이욱 대구사립중고교연합회 회장
교육은 다양한 아이들을 각기 수준에 맞게 길러내는 개별화된 과정이어야 한다. 결코 일률적이고 획일적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교육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교육자와 학습자가 서로 도와가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다. 그렇다면 지금 교실의 붕괴는 현장을 제대로 장악하고 수습하지 못하는 교사에게서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70여 년을 여성교육에 집중해 온 조양교육재단의 이욱 이사장(대구사립중고교연합회 회장)은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며 “현모양처는 오늘날에 더 절실히 요구되는 가정의 근본이며 우리 사회의 근간”이라 강조한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면서 3대를 이어오고 있는 교육자 집안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그다.
당시 대구지역에 남학교는 여럿 있었지만 여학교는 경북여고와 신명여고 정도였다.
동암 선생은 여성과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 열정이 상당하셨던 것 같다. 해방과 더불어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동암 선생과 창주 이응창 선생은 원화여중과 여고를 잇달아 설립했다.
남녀평등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성의 역할은 분명 있다. 가사나 육아를 물리적으로 분리할 수는 있지만 야구에서 포수가 리드하듯 가정을 지키는 것은 아내이자 엄마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사회는 여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지식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배워야 한다. 그래서 현명한 아내와 어진 어머니로 대표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지금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대구 경북지역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한 조양회관이 건립 100주년을 맞았다. 조양회관 건립자의 후손으로서, 또 조양회관 이사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떠오르는 우리 민족의 희망의 상징으로 설립된 조양회관이 우리지역 독립운동사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번 조양회관 건립 100주년을 기하여 선열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 낸 자주독립의 소중한 가치를 잊지 않고 기리고 경배하는 후손이 되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원화여중고의 학교재단 이름도 조양회관이다. 어떤 의미인가.
△원화여중, 원화여고는 조양회관에서 설립되었고 ‘조선의 빛이 되어라’는 의미를 간직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청소년 교육이라는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 왔다고 자부한다. 조양회관이 원화이고 원화가 곧 조양회관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100년 원화를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동암 서상일 선생의 정신이 원화여중고 교육에도 지켜지고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원화의 건학이념은 무엇인가.
△우리 학교의 건학이념은 ‘나라사랑 겨레 사랑’이다. 학교 교육 전반을 통해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소중함을 늘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 이해하고 과거의 역사적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역사교육과 국제이해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강조하는 평화교육도 우리 학교의 중요 교육과정 중 하나다.
-왜 여학교를 설립했나. 배경이 궁금하다.
△당시 대구지역에 남학교는 여럿 있었지만 여학교는 경북여고와 신명여고 정도였다. 동암 선생은 여성과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 열정이 상당하셨던 것 같다. 해방과 더불어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동암 선생과 창주 이응창 선생은 원화여중과 여고를 잇달아 설립했다. 원화에 야간부를 뒀고 여군반과 여승반도 있었다. 창주 할아버지 장례 때 운구차가 2군사령부 앞을 지나자 여군들이 도열해서 경례로 전별하기도 했을 정도다.
-학교를 대신동에서 현 성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조양회관의 운명도 바뀌었다.
△평준화 이후 급격히 늘어나는 중등교육 수요를 수용하고 보다 현대화되고 쾌적한 학습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학교를 이전하게 됐다. 대신동의 1천177평이었던 학교부지는 9천737평으로 10배 가까이 넓어졌다. 이 과정에서 재단은 대신동 교사와 함께 가창의 원화동산 2만평과 대명동 사택, 수익용 주식까지 모두 매각해야 했다. 학교는 1981년 현재 교사로 이전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대구 사학의 대표학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학교 교무실과 강당 등으로 이용하던 조양회관을 함께 이전하지 못하고 현재의 망우공원으로 이전 복원하게 됐다.
-할아버지 창주 선생과 동암 선생은 어떤 관계인가.
△두 사람은 장인과 사위 관계이지만 부자(父子) 같은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동암 선생에게는 4명의 따님이 계셨는데 저의 할머니(서옥주)가 동암 선생의 맏따님이었다. 동암 선생과 증조부이신 우재 이시영 선생은 절친이셨는데 한 분은 외국에서 항일독립투쟁을, 한 분은 국내에서 경제활동과 국민계몽운동을 하신 것이다. 동암은 만주에서 무력항일투쟁을 하는 친구를 위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또한 홀로 남은 친구 모자를 가족처럼 보살펴 주셨다. 그리고 경성사범을 마친 친구의 아들(이응창)을 대구사범을 졸업하신 할머니의 배우자로 선택하시고 사위로서, 그리고 교육동지로서 함께 하셨다. 당시 서문시장 인근에서 곡물과 숯을 파는 태궁상회를 운영한 동암 선생은 달성공원 인근에 100여호를 소유할 정도로 부를 이루셨지만 딸 넷에게 모두 고등교육을 시켰을 뿐 집 한 칸 마련해 주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경주 산내에서 초임교사를 시작한 할아버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대구 서부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할머니와 부부교사 생활을 했던 것이다.
13살에 아버지(우재 이시영)를 잃고 외동으로 자란 창주 선생은 5남1녀를 모두 훌륭하게 대학교육까지 시킨 헌신적인 부모였다. 동암 선생은 해방 후 서울에서 나라 정치를 하시느라 따님들과는 다소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신 듯하다.
-동암 선생은 몇 차례 옥살이를 하는 등 가산을 털어 넣고 육체적 고통을 당해가면서 민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그 활동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적절했다고 생각하나.
△동암 선생은 일찍이 미곡상을 하시면서 대구지역의 손꼽히는 경제인으로 성장하셨다. 1921년 대구지역 지도자들은 대구구락부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신동 1번지 자신의 땅 500평에 조양회관을 짓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우재 선생을 통하여 해외 항일무장 투쟁도 지원했다. 나라를 잃고 백성이 고통을 받을 때 자신보다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가산을 기꺼이 내놓으신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민주화운동을 빌미로 희생자의 후대에까지 지나치게 보상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되돌아보아야 한다. 나라와 겨레를 위한 국가의 보상은 상징적 의미일 뿐 적절성 논란은 선열의 희생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교육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또 교육자로서 어떤 대책이 있나.
△무엇보다 급격한 학생 수의 감소가 문제다. 국가적 어려움이기도 한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인구 감소가 예상되지만 대책이 없다는 거다. 일본이 반성하고 있는 여유교육(餘裕敎育)의 부정적 효과가 우리 학교 현장에도 나타나고 있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위계층 학생군에서 심각한 학업성취 부진이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 규명하는 것이 선결과제이고 대증요법보다는 개별화된 전문적 지원과 지도가 필요하다.
-사학의 자율성을 달라고 하는데 동의하나. 사학에 대한 가장 큰 규제는 무엇인가.
△우리 사학은 근대교육이 시작된 해방 이후 국가가 담당하지 못했던 절대 다수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교육입국을 통한 국가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1969년 중학교 무시험제도,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를 통해 국민 다수에게 중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국가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사립학교에 대한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수용했다. 그러나 사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약속에 못 미치고 있다.
-사학의 비리가 언론에 자주 오르곤 한다.
△사학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나는 사학을 건강한 우리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퍼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극히 일부 사학의 비리를 일반화하여 사회악처럼 영화로 희화화하거나 척결 대상으로 내모는 작금의 편견이 너무 안타깝다. 지난 100년간 묵묵히 국가와 겨레를 위해 헌신하신 사학 원로와 선배들의 노고와 헌신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멀리 날기 위해서는 힘찬 양날개가 필요한 것처럼 국공립학교와 사립학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한 쪽이 없이는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는 영원한 한 팀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학에 대한 지원은 사립재단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국가가 사립학교에 위탁한 정당한 납세자 자녀에 대한 당연한 지원임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사립학교는 위탁교육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학교법인의 건학이념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구현해 나가고 싶다.
-지금 학생 인권에 비해 교권을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 중고교 교육 현장의 변화와 대응하는 모습에서 가장 뚜렷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오늘의 교사들은 최고 엘리트들이지만, 무한한 가능성과 엄청나게 다양한 욕구를 표출하는 학생들 사이의 괴리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성실과 모범의 표상인 교사집단과 개성과 다양성,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학생들 간에는 ‘우리’라는 교집합의 공감이 일어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진짜 문제는 품행방정하고 모범적인 학생보다는 저마다의 개성을 추구하는 더 많은 학생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지닌 교사를 선발하여 진정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실붕괴를 막기 위한 방안은 어떤 것이 있나.
△임용고사 성적만으로 교사를 임용하는 현재의 제도는 개선돼야 한다. 교사의 인지적 유능함 뿐만 아니라 정서적 도덕적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여러 분야의 전문 지식과 소양을 갖춘 교사들을 선발할 수 있도록 채용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다양성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원화여고의 사례를 들어보고 싶다.
△우리 학교는 지난 30년 동안 교사 임용에 앞서 인턴제를 실시해 왔다. 기간제 교사로 1, 2년 근무하면서 동료 교사와 학생, 학부형으로부터 인정받은 후 검증된 교사들을 채용해 왔다. 사립학교 특성상 한 번 임용하면 30년가량 같이 근무해야 하는데 우선 동료들과의 협업 능력과 상호 신뢰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교육계에 끼친 영향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비대면 원격 수업이 일반화되면서 교사 사회가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로 더욱 분명히 구분됐다. 학습과 학생 지도에서 현장과 경력을 앞세우던 교사들이 우세하던 교직사회가 디지털 이론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들의 우위로 역전된 것 같다. 그래서 명퇴 신청도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여학교의 장점이 있나. 원화만의 교육 목표는 무엇인가.
△남녀평등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성의 역할은 분명 있다. 가사나 육아를 물리적으로 분리할 수는 있지만 야구에서 포수가 리드하듯 가정을 지키는 것은 아내이자 엄마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사회는 여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지식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배워야 한다. 그래서 현명한 아내와 어진 어머니로 대표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지금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자녀는 엄마의 사랑으로 키운다”고 가르치고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남편 책상 하나는 꼭 놓아두라”고 ‘엄부자모’의 모습을 강조한다. ‘자유의 원화’를 모토로 원화의 딸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주역이 되기를 소망한다.
□ 이욱(李旭·63)
대구 출신. 학교법인 조양학원 이사장. 대구사립중고교연합회 회장.
청구고. 경북대 지리학과 졸,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교육행정학 석사, UC버클리대 교육행정학 박사.
원화여고 교장, 영남대학교, 계명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
전(前) 대구사립중고등학교 교장회 회장.
미국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31살에 귀국해서 교장과 이사장으로 3대째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 설립자의 정신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혜택은 없고 불이익은 많아 ‘억울한 것을 생각하면 끝도 없다’면서도 외부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는 자긍심 하나로 버틴다.
1971년 조부 이응창 초대교장이 경북도문화상을, 1992년 부친 이용 선생이 대구시교육상을 받은 데 이어 이욱 이사장도 2019년 대구교육상을 받았다.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