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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좋은 재료와 경험이 좋은 요리를 만든다

등록일 2023-03-06 18:24 게재일 2023-03-0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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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가 만났다<br/>손보충 중화요리사
손보충 중화요리사
손보충 중화요리사

매스컴의 먹방과 요리 열풍은 요리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관심도를 높였고 미식가들의 입맛도 높아졌다.

그 중에서도 중국 요리는 단연 세계적이다. 지구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화교가 있고 중국 음식점을 만날 수 있을 만큼 중국 요리는 그 지역에 적응해 대중화된 요리다. 대구에도 화교가 직접 운영하는 그런 중화요리점이 여럿 있다.

그 중화요리로 대구시민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손보충(63) 전 대구화교협회장.

그가 최근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한민국과 대구시민의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다”고 귀화한 이유를 설명하는 손 전 회장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평생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랑스럽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대구서 전가복 요리로 식도락가에 입소문, 신선한 재료·착한가격의 맛과 양으로 인기

손님들이 가장 즐겨찾는 탕수육 등 셀 수 없는 중국요리, 세계 어딜가도 현지화로 자리

서울 오가며 대한민국 국적 취득까지 1년, 귀화하고 나니 한국 국민이라는 자부심 생겨

맛있는 음식으로 대구시민 고마움 보답, 지역민·화교들 모두 잘 살도록 다같이 노력을

-늦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을 축하한다. 어떻게 귀화할 마음을 먹었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대한민국에서 살아왔다. 이제 중화민국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나를 키워주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대한민국과 한국인에 보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귀화하게 됐다. 대구시민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손보충은 없었을 것이다.

-왜 진작 귀화하지 않았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특히 화교협회 회장 등 화교로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맡아야 했고 그런 임무들을 수행하면서 귀화할 기회를 놓쳤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가 2년 전 드디어 귀화를 결정했다. 남은 인생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대구시민들과 서로 도와주면서 살고 싶다. 화교들이 대구시민들과 협력하는데도 앞장설 것이다.

-화교로서 불편한 점은 어떤 것인가.

△화교로서의 불편?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다. 특히 복지혜택에서 소외돼 있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자 불편이었다. 물론 세상이 달라졌고 지금은 많이 개선됐다.

-귀화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대한민국으로 귀화하고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위한 법무부 시스템이 개선됐으면 좋겠다. 직접 서울까지 가야 하는 등 귀화 절차를 밟는데 1년이 걸렸다. 귀화하니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는 자부심이 생기더라. 화교로서도 명예 대구시민이자 수성구민, 남구민으로 지역 사회에 많은 기여와 봉사 등으로 참여했는데 이제 내놓고 국민이자 시민으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 자랑이다. 앞으로는 대구시민과 화교들이 모두 같이 잘 살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화교협회 회장으로 있는 동안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

△협회 활동을 통해 대구시와 중화민국의 민간교류에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김범일 대구시장 당시 대구화교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화교에게도 65세 이상은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화교에게 복지혜택이 너무 없었고 특히 대중교통 문제는 큰 불만이었다. 그래서 지하철 무료탑승 혜택을 건의해서 관철시켰다. 전국에서 대구가 처음으로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화교들이 대한민국에서 인정받은 사건이었다. 물론 대구의 위상도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대구시민과 화합의 차원에서 그때부터 대구 화교의 대문도 개방하고 있다.

-대구에서 중국요리점을 운영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특히 손 사장의 전가복(全家福)은 인기가 높다. 전가복 때문에 손 회장의 가게를 찾는다는 고객도 많이 봤다.

△그 점에 대해서는 대구시민들이 정말 고맙다. 오랜 단골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것은 내 요리실력을 인정해 준 것이다. 특히 전가복은 스스로도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재료를 넉넉히 썼고 모든 재료를 직접 구해왔다.

- 도대체 전가복의 어떤 점이 그런 히트를 치게 됐다고 생각하나.

△무엇보다 재료에서부터 차이가 났다고 생각한다. 송이 철이 되면 전국의 송이 산지를 찾아 1등품을 매집했고 대게 철에는 동해안을 누볐다. 전복과 해삼, 대하, 조갯살(관자) 같은 해산물을 구하러 일주일에 한 번, 많을 때는 두 번씩 전남 여수까지 갔다. 4시간씩 걸리는 먼 길을 저녁에 가서 재료를 구해 새벽에 대구로 돌아왔다. 당시로서는 정말 고생을 했지만 손님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전가복이 식도락가의 입맛을 사로잡고 IMF로 피로해진 대구시민들을 위로해 줬다고 생각한다.

전가복이 히트하면서 우리 음식점도 전가복으로 유명해졌고 전국적으로도 중국요리에서 전가복 붐이 일게 됐다고 하더라.

지금도 전가복을 먹으러 연경반점을 찾는 많은 고객들이 ‘가격에 비해 맛과 양이 대만족이다’고 칭찬해주어 신이 난다. 요리는 재료부터 신선하고 좋아야 한다. 나는 돈을 벌면 저축하는 대신 해삼을 사서 비축했다. 그만큼 좋은 재료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언제부터 요리에 발을 들여 놓았나.

△고등학교(대구 화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요리 공부를 하러 서울로 갔다. 중화요리집에서 주방일을 하며 중화요리 수업을 하고는 서울에서 부산, 경주의 요리집을 거쳐 30년 전인 1993년 대구 이천동에서 연경반점으로 시작했다. 그때 아버지는 대구 중앙로 만경관 옆에서 중화요리집 원화반점을 하고 있었다. 당시 대구의 1세대 화교들이 운영하던 유명 중국 음식점들이 지금은 대부분 2세대로 세대교체가 됐거나 사라졌고 아버지도 몇 년 뒤엔 식당을 그만 두셨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어떤 것이 있나.

△요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고 손진은·25년 전 작고)로부터 기초를 배웠다. 그러나 장사는 아버지와는 딴 판이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베풀고 퍼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을 것 아닌가.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이제 그만 두려 해도 손님들이 찾아주어서 그만 둘 수가 없다. 장사의 기본은 손님이다. 손님이 음식을 먹고는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도록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 요리라면 손님이 먹을 수 있도록 내용부터 만족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특히 요리의 미관까지 생각해서 요리를 해야 한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내용은 충실하게 채우지 못하면서 선전만으로 음식점을 홍보하려는 경우로 있는 것으로 안다. 경험을 통해 요리를 배워야 한다.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요리도 그렇다.

-요리점 소문이 나면서 에피소드도 많이 있었겠다.

△돈을 싸들고 와서 동업하자고 찾아오거나, 분점을 내고 싶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직 한 곳에서만 했다. 한 곳이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음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지켰다.

-도대체 중국 요리는 종류도 많다는데 얼마나 되나. 손 회장이 해 본 요리는 얼마나 되나.

△중국 요리는 셀 수가 없다. 변화무쌍한 것이 중국 요리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를 응용해 만들 수 있고 열 가지를 알면 백 가지를 조리할 수 있는 것이 중국 요리다. 물론 내가 조리해 본 요리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언젠가 소꼬리 새우말이를 주문한 손님이 있었다. 갑자기 그의 주문을 받아서 재료를 챙겨보니 당장 할 수 있는 요리가 아니었다. 궁리 끝에 소고기를 얇게 저며서 새우를 말아 조리한 뒤 테이블에 올렸더니 손님이 ‘바로 이거야!’ 하면서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음식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중국 요리는 모두 불에 익힌다고 들었다. 생선회 같은 요리는 없나? 낯선 지방에 가서 음식을 모를 때는 일단 중국음식점에 가면 가장 무난하다는 이야기도 있더라.

△그렇다. 육류나 어패류는 물론 야채까지 어떤 재료든 모두 불로 익혀 내놓는다. 모든 요리는 재료에 양념을 하거나 녹말가루를 묻히거나 손질해서 기름에 튀기거나 볶거나 찌거나 굽거나 훈제로 익히는 등 즉석에서 조리한다. 미리 해두는 요리는 없다. 그러니 생선회 같은 요리는 당연히 없다. 그래서 중국 요리가 위생적이고 안전하다는 거다.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음식점은 있다고 한다. 모두 같은 중국음식인가? 심지어 중국인들은 한국의 중화요리가 중국 현지에는 없는 요리라고 한다는데.

△그건 아니다. 세계 어디에도 중국음식점이 있지만 모두 현지화 된 중국음식점이라고 보면 된다. 미국에는 미국식 중국음식점으로, 일본이나 유럽에도 그 지역에 맞는 음식점으로 현지화(로컬라이즈)된 것이다. 한국의 자장면이나 짬뽕이 중국면의 한국화인 것처럼 중국 음식점이라도 메뉴들이 현지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만큼 변화무쌍한 요리가 중국 요리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서 중국인들조차도 넓은 중국 땅의 음식을 모두 모른다고 보면 된다. 중국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르고 그 음식들이 조리법에 따라 다른데 정통 중국요리라고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식당을 찾는 손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집에 오는 단골들 중에는 ‘알아서 해 달라’고 주문하는 손님들도 있다. 자신 있는 요리를 해 달라는 주문이다. 그럴 때는 준비된 계절 재료로 요리를 낸다. 가을이면 송이를 재료로 하듯 지금은 부추가 제철이니 부추를 재료로 한 요리를 내놓게 된다. 중국 요리집에 오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가장 즐겨 찾는 메뉴가 탕수육이다. 비슷하지만 그 탕수육으로 요리 실력을 알 수 있고 고객 입맛을 맞출 수도 있다. 특별한 메뉴는 시간이 걸린다. 동파육만 하더라도 주문하고 빨라야 1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요리 붐이 일면서 TV에서 요리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겨나고 인기 셰프들이 등장하고 있다.

△같은 요리사로서 저마다 특징을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중화요리에 대해 인식을 넓혀주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식객들의 입맛도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셰프들이 TV에 나와서 시범을 보이거나 공개 강연을 하는 것을 보니 모두 대단하다. 요리들은 모두 특색이 있고 각기 선호도가 있는데 내가 평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말 대단한 실력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들이 보기 좋더라.

-살아오면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인가.

△맨주먹으로 출발해서 어엿한 내 가게를 가졌으니 평생의 희망이자 꿈을 일군 것이다. 맨땅에서 세집을 전전하다 내 집을 장만했다. 열심히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돈 많이 벌어서 가져가는 것 아니다. 베풀어야 하고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 한다. 각종 기관 단체에서 요구하는 각종 기금이나 성금에서부터 공개할 수 없는 여러 형태의 기부에 인색할 수도 없다. 연말이면 각종 단체에서 기부금 출연 요구가 줄을 이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대구시민 덕분에 오늘의 연경이 있고 손보충이 있으니 보답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귀화한 것이다.

□ 손보충(孫寶忠)

전 대구화교협회 회장, 중화요리 전문가.

전 대구화교중 이사장. 전 중화민국 교무위원

전 명예 대구시민. 현 연경반점 대표.

그의 부친(고 손진은)은 중국 산동성 치하현 출신으로 해방 후 인천에서 열린 누나의 결혼식에 따라왔다가 한국전쟁이 터져 나가지 못하고 부산을 거쳐 대구에 터를 잡은 1세대 화교상이다.

손보충은 1993년 대구 남구 이천동에서 연경반점으로 시작, 때마침 IMF로 지친 시민들을 전가복으로 위로해주면서 전국적 히트를 친다.

귀화 전에는 명예 대구시민으로 지역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가게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각종 감사패나 표창장이 대변해준다.

그의 가게는 연말이면 각종 사회단체의 기부금 출연 요구가 줄을 이었고 근본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격에다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손 전 회장은 이들의 요구에 인색하지 않았다.

/이경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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