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이종주 전 대구시장
1923년 대구 대봉동에서 개교한 대구상고(상원고)가 16일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이 학교 5만여 동문들은 금융 산업계를 비롯 각계에 진출해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했다. 또 야구와 럭비 등 스포츠에서도 발군의 실력으로 체육진흥을 넘어 국민 사기를 진작시켰다. 학교는 달서구 상인동으로 옮기고 후학들은 남녀공학 인문계로 바뀌어 선배들의 구국 교육열을 이어가고 있다. 이 학교 28회 졸업생 이종주 총동창회 고문(전 대구광역시장)은 “개교 100주년을 맞은 대상인의 기백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낀다”며 후배들에게 전통 계승을 당부한다. 36년여 공직생활을 한 그는 대구시 행정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한 세기 질곡의 역사 속 학문과 독립 애국정신 일깨워 온 모교 자랑스러워
상업교육 산실서 자란 5만여 동문 금융·산업계 등 사회 곳곳 활발히 활동
대구시장 취임 한 달 채 안돼 300명 사상자 낸 상인동 가스폭발사고 발생
유가족들에 “내가 모든 책임 지겠다” 공직생활 중 가장 잘한 연설 아닐까
-대구상고 100년을 축하한다. ‘대상인’으로서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한 세기 질곡의 역사 속에서 학문과 독립애국정신을 일깨워 온 대구상고가 자랑스럽다. 5만 동문과 함께 100주년을 마음껏 축하한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개교한 모교가 민족적 갈등과 수적 열세(당시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많았다)를 딛고 오늘이 있기까지 동문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개교 100주년을 맞아 많은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개교기념일인 4월 16일 기념식부터 기념공원 조성 제막식과 운동회, 전시회 등 연중 30여 종의 행사를 통해 대상인의 저력을 과시할 계획이다. 동문들의 폭발적이고 전폭적인 참여로 100주년 기념 발전기금만도 지난해까지 27억원을 모금했다. 이번 100주년 행사는 앞으로의 100년을 시작하는 새로운 첫걸음이 될 것으로 믿는다.
-대구상고의 정신을 이야기할 때 먼저 불의에 항거한 역사를 자랑한다.
△1942년 일제의 내선일치 황국신민화 교육 등에 항거해 학생들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비밀결사 독립운동 태극단을 조직했다. 이듬해 이상호 등 26명이 전원 체포 구금돼 옥고를 치렀던 사실이 해방 이후에야 알려졌다. 내가 동창회장 때 현 모교 교정에 태극단 기념비를 새로 세우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동문들이 학도의병대로 참전해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1960년 자유당 독재정권에 항거한 대구 2·28학생의거에 참여한 것도 불의에 항거한 대상인의 혼을 보여준 사건이다.
-운동에서도 대구상고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고교야구가 인기였고 대구상고는 전국적 스타군단이었다. 전국대회 결승전에는 대구에서 버스로 단체 응원을 가기도 했고 응원을 통해 선후배가 하나로 결속해서 대상인의 저력을 보여줬다. 6·25 직전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해서 우승기를 안고 한강을 건너온 추억이 새롭다. 정구부와 럭비부도 전국적으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공부하면서도 운동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상업교육의 산실로서 모교 출신 인재들이 우리나라 금융계는 물론 산업계에 대거 진출해 국가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대상인들은 지금도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키가 작아 선발되지 못했던 것 같다. 뒷날 삼성라이온즈 감독이 된 서영무와 동기였는데 영무는 야구를 하고 나는 뽑히지 못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승마였는데 6개월 동안 마굿간 청소만 시켜서 그만두고 럭비를 했다. 운동을 하고 싶었고 당시로서는 선수가 되지 않고서는 운동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지금 상원고는 남녀공학의 인문계로 전환해 또 다른 교육 비전을 갖고 전진하고 있어 든든하다. 100년을 맞은 상원의 혼을 보니 아름답고 위대하다. 후배들이 ‘푸른 꿈을 안고 오늘도 힘차게’ 대상의 혼을 면면히 이어가리라고 확신한다. 국가를 인간에 비유하면 몸과 같고 그 역사는 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세기를 맞은 대상의 체력은 굳건하고 그 기백과 영혼은 너무나 자랑스럽다. 불의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선배들의 기백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선배들의 저력을 이어 대상인의 전통을 굳게 이어갈 수 있도록 모두 노력하기를 바란다.
-대구시장으로 공직생활 마감했다. 그런데 그 때 큰 사고가 났다.
△시장 취임 한 달도 안 돼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상인동 가스폭발사고가 터졌다. 현장을 보니 참혹하고 앞이 캄캄했다. 그런 초대형 사고를 8일 만에 장례까지 모두 마치고 수습했다. 사상자 유가족들이 몰려왔을 때 시장으로서 직접 마주쳤다. 그때 “나는 3개월 한시적 시장이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설득했더니 모두 수긍하더라.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공직 생활 중 가장 잘한 연설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대구에 왔을 때 경호원으로부터 영접이 늦었다고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사건 수습과 관련,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10여 차례 격려 전화를 받기도 했다. 당시 대구백화점(현 롯데백화점) 터파기 공사 중 일어난 사고여서 대백 측에 ‘선보상 후구상’ 안을 확약 받은 것이 사태 해결의 결정타였다고 생각한다.
-해외로 공무 출장도 다녔을 것이다.
△김무연 대구시장 당시 기획관으로 일본 삿포로시와 자매결연을 맺으러 갔다. 당시 대구JC와 삿포로JC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고 사전 조율이 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현지에서 자매결연이 불발되자 호텔에 돌아온 김 시장은 위스키를 병째 들이키며 고심하고 있었다. 궁리 끝에 ‘대구-삿포로 양 도시간 정보교환협정’을 맺는 아이디어를 내서 일본 측의 흔쾌한 호응을 얻어냈다. 이후 10여 년간 양 도시의 공무원들이 오가며 서로 정보를 공유했던 적이 있었다. 대구와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 애틀란타에도 시의원들과 2번이나 다녀왔고 PACOM(아시아태평양 시장회의)에서 2번이나 대구 대표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당시 지역 정치인들과 대구시정 협조는 잘 된 편이었나.
△지역 정치인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특히 박준규 의원과 김용태 의원은 대구를 위해 많은 예산을 챙겨 주었다. 1987년 대구지하철을 처음 기획했을 때 설계도만도 8t 트럭 한 대 분량이었다. 그걸 전문가도 아닌 대구시 기획관이 모두 읽고 결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담당 과장과 국장 등에게 검토하게 하고 나는 국회와 경제기획원 등 중앙부처, 철도청 등에 브리핑하러 다녔는데 정치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대구시정의 산 증인이라고들 한다. 업적을 몇 가지 들어 달라.
△태종학 대구시장은 대구시의 기본 도시계획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당시 김무연 전 시장이 기획관이었고 이규이 전 시장이 공보실장이었다. 나는 공보관으로 그때 대구시립교향악단을 창단했는데 서울에 이어 두 번째였다. 시민회관을 기획 공모해서 건립하고 대구시사를 편찬 발간했으며 향교를 근대화했다. 김무연 시장 때 도시새마을운동의 하나로 반상회를 전국 처음 시범운영했고 ‘목련회의 여반장’이란 홍보영화를 제작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공로로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이상희 시장 때 보사국장으로 대구 쓰레기매립장을 현대화했고 달서구의 미나리깡을 매립해서 공단으로 개발했으며 앞산 수목원 부지, 두류공원 문화회관 부지, 쓰레기 소각장 현대화 등을 했다.
-경북도내에서도 영주 구미 포항시장으로 재직하는 기회를 가졌다.
△농촌도시 영주를 작은 대구처럼 만들고 싶었고 그런 그림으로 도시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구미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여서 멋진 도시를 만들고 싶었는데 당시 이판석 도지사의 부름을 받고 기획관리실장으로 불려 들어오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다. 포항시장 1년 4개월 동안 포항∼울진 간 도로 확장, 포항비행장에서 포항시내간 도로확장, 쓰레기매립장 건설, 형산강 대교 건설 등 많은 일들을 해냈다. 돌아보니 신명과 열정이 넘치던 때였다.
-관선 시절에는 여차하면 사표를 내야 했다던데.
△포항시장 재직 중에 대형 산불이 났다. 영일군에서 난 불이 포항시로 넘어온 것이다. 시·군이 통합되기 전이었고 대형 산불이 나면 단체장이 책임을 졌던 때였다. 소방차뿐 아니라 헬기까지 동원해서 위기를 넘겼지만 청와대에서 ‘시장 사표를 받아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전지 4장에 산불이 난 지역 주변 지도에 탄약고와 위험물을 비롯한 중요시설, 민가 등을 표시하고 풍향과 풍속, 산불저지선, 헬기와 소방차, 소방인력의 배치를 담은 산불진화작전도를 작성해서 청와대로 올라갔다. 그러나 해명 대신 ‘두고 가라’는 비서관의 말만 듣고는 포항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며 20일을 보냈더니 ‘표창장’과 함께 산불피해 복구비로 1억6천만원을 지원받았다. 여기에다 지역 경제인들의 협조로 피해복구를 할 수 있었다.
-스포츠를 취미생활 이상으로 즐겼던 것 같다.
△학생 때 운동을 했고 대구시청에 들어가서는 배드민턴 경북도 대표선수 생활을 10여 년 했다. 당시 경북여고 박점순 학생이 일본에서 우승하고 돌아와서 도청 마당에서 시범경기를 했고 이를 보고 배드민턴 팀을 만들었던 것이다. 1966년 전국체전에서 대표선수로 결승전에서 이기면서 경북도를 종합 3위로 올려놓았고 공으로 그해 경북도 최고체육상을 받았다.
-취미생활도 다양하다. 글씨를 잘 써 달성공원의 석주 이상룡 구국 기념비 비문을 썼더라.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구국기념비는 대구시에서 공모가 있었다. 시청 서기 시절이었는데 응모하라는 부친의 강권으로 밤낮없이 연습해서 당선됐고 쌀 1가마니를 부상으로 받았다. 이은상 시인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내가 썼다. 어려서 가친의 글 쓰는 모습을 옆에서 보았고 중학시절 서예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이 전부이고 공모전에 출품한 적이 없다. 그러나 공직 생활 중 가는 곳마다 준공 현장이나 행사 때 필요하다면 직접 썼다. 주변에서 좋은 일이 생긴 직원이나 후배들에게도 붓글씨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배에게 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기념부채를 선물했더니 그냥 학위장을 전시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누구의 무슨 체냐’고 물을 때면 내 호를 들어 ‘중산(重山)체’라고 말해준다.
-그림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화첩도 내고 전시회도 열었다.
△서예와 함께 동아백화점에서 회화교실을 운영할 때 그림을 시작했다. 모교 대구상고를 비롯, 수성못과 달성공원, 팔공산, 두류공원, 비슬산, 문화예술회관 등을 그렸다. 이걸 전시회를 열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사갔다. 순식간에 팔려나가 예상을 웃도는 거금을 챙겼다. 지금도 날마다 A4에 수채화를 그리고 좋아하는 시나 글을 적어 주변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날려 보낸다. 하루 인사인 셈이다.
-일상을 어떻게 소일하고 있나. 지금 바람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골프 정기 월례회도 있고 가족이나 친지들과 월 두세 차례 골프장에 나간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간을 보낼 친구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나이 들어감을 새삼 느끼는 요즈음이다. 다만 후배들이 대상의 전통을 이어가고 대구가 발전하길 바랄 뿐이다.
□ 이종주(李鍾宙·88)
전 대구광역시장, 대구 출신. 대구상고, 영남대 행정학과. 석사.
1960년 대구시청 서기보로 출발. 대구시 총무과장, 시정과장, 기획관, 기획관리실장, 내무국장, 보사국장, 중구청장, 동구청장, 대구시부시장 역임. 경북도 기획관리실장, 영주시장, 구미시장, 포항시장 역임.
대구상고 총동창회장. 대구시럭비협회장. 대구스포츠맨클럽 회장. 88올림픽 대구대회 사무총장. 대구시 원로자문회의 의장. 국무령 이상룡 기념사업회 이사장. 고성이씨대구종친회장. 녹조근정훈장 수상.
자서전 ‘염평봉직’, 수필집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시골버스 소묘’ ‘유화집 달구벌’ 출간 및 유화 개인전 개최.
36년 동안 대구 경북에서 주무 또는 책임자로 전근대적 대구의 형태를 근대화하는 현장 행정을 수행했다. 일을 겁내지 않고 시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시정을 이끌었던 실천형 행정가다.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