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윤달호 전 한국안경수출협회장
자원빈국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이루고 세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여기서 우리는 산업화로 생산된 재화를 무역으로 효율을 극대화해 경제발전에 기여한 수많은 무역상들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는 우리 상품을 선전하고 신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동네처럼 누빈 대형 종합무역상사에서부터 그야말로 보따리장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안경 산업의 메카 대구에서 안경을 통해 세계 시장을 열고 외화를 벌어들인 윤달호 전 한국안경수출협회 회장. 그는 대구 안경이 4차산업시대에 맞는 시설 투자와 인력개발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故 김재수 회장이 1946년 설립한 국제셀룰로이드… 국내 안경공장 출발점
대구 직접 수출 품목은 안경이 처음… 내가 지역 외화벌이 초창기 멤버였죠
무역회사 ‘아이디자인즈’ 창립… ‘버스서도 뛴다’고 했을 정도로 열심히 했지
지금이 중요… 제대로 투자하지 않으면 지역 안경산업 존폐 걱정해야 할 수도
-안경 수출로 평생을 보냈다. 안경 수출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대학 졸업할 때 최고 인기 직종이 무역업이었고 나도 무역을 하고 싶었는데 당시 정부에서 수출을 장려할 때였다. 마침 대구의 국제셀룰로이드라는 안경회사에서 무역업을 할 신입사원을 모집했고 그것이 무역과의 첫 인연이 됐다.
-대구의 안경 산업은 어느 정도인가. 과거에는 어느 정도였고 지금은 어떤가.
△대구는 한국 안경산업의 메카라 할 정도로 한국 안경의 80%, 많을 때는 90%까지 차지했다. 지금은 전국 안경 제조사 1천145곳 중 대구가 503곳(44%)이지만 한때는 80% 이상을 차지했다. 안경 생산량에서도 압도적이다. 특히 안경테는 거의 대구에서 석권했으니 지금도 수출의 70%를 대구가 차지하고 있다. 세계 안경 시장의 주요생산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지금은 중국에 밀려 침체기에 들어섰다. 안경 소재가 메탈(금속) 테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다시 금속소재가 트렌드가 되고 있다. 이 민감한 시장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새다.
-왜 대구에서 안경 산업이 발흥하게 됐나.
△국내 첫 안경공장이 대구에 들어선 것이 그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일본에서 안경 공장을 하던 김재수 회장(1984년 작고)이 1946년 북구 침산동에서 국제셀룰로이드라는 안경공장을 설립했다. 국제셀룰로이드는 수많은 안경 기능공들을 배출했고 그들이 곳곳에서 제2, 제3의 안경공장을 설립하면서 대구의 안경공장이 부흥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대구로 안경업자들이 몰려들었고 이미 설립된 국제셀룰로이드에 자극받아 안경산업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면 한국 안경의 세계시장에서의 위치는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나.
△안경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그러나 노동집약적 산업이어서 고용 증대에는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지만 자그마치 260가지 공정이 들어가야 안경이 탄생한다. 그러니 내가 있던 국제셀룰로이드도 한 때는 직원이 700명이 넘었다. 그만큼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그래서 안경산업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우리나라로 왔고 이제는 중국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안경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인가.
△모든 제품이 그렇겠지만 한국 안경(made in Korea)도 제품의 경쟁력이 가장 중요하다. 경쟁력이라면 가격과 품질, 서비스(Delivery 납기 등)인데 지금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다. 경쟁력이 있어야 내수도 잘 되고 수출도 잘 될 것 아닌가. 제품 경쟁력이 있으면 영어를 못해도 세계 바이어들이 안경 구입하러 한국으로 몰려온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도 말까지는 이런 현상이 이어졌다. 심지어 통역을 대동하고 오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 안경 제품의 경쟁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안경이 시력 보조용 의료기기에서 패션상품으로 변해가는 모양이다.
△안경 착용이 많지 않았던 1970년도까지는 안경테가 거의 의료용구 개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후반부터는 이탈리아 제품이 세계시장을 주도하면서 안경이 패션화 되었다. 예전에는 독일제 ‘로덴스톡’ ‘마비츠’ 등 안경테가 주류였고 선글래스는 미국이 ‘레이반’이 고유명사처럼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샤넬’이나 ‘루이비통’ ‘톰포드’ ‘구찌’ 등 럭셔리 브랜드가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대구에서 다이렉트로 수출을 하는 품목이 많이 있었나.
△대구가 섬유도시라지만 당시 대구의 갑을이나 동국 등 유명 섬유회사들도 서울사무소를 통해서 수출을 했고 대구에서 직접 수출한 것은 안경이 처음이다. 그러니 내가 대구지역 수출의 초창기 멤버였던 셈이다.
-언제 처음 수출시장을 개척하러 갔나.
△여행 자유화 전인 1980년이었다. 처음 뉴욕으로 출장을 갔을 때는 비자는커녕 여권조차도 고급관료나 갑류 무역회사 사원이라야 발급받던 시대였다. 회사에서는 큰 기대보다 ‘경험이나 하고 와라’는 식으로 출장을 보낸 것이다. 혼자서 커다란 견본품 가방과 옷가방 서류가방을 둘러메고 끌고 대구에서 김포공항까지 가서 비행기를 타고 도쿄와 호놀룰루, 앵커리지를 거쳐 뉴욕에 도착하니 기내에서 코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36시간을 비행기에 갇혀 있다가 생긴 일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이야기가 많이 있을 것 같다.
△뉴욕 맨해튼 호텔에서 바이어와 미팅을 하고 나와 짐가방을 들고 택시를 잡으려다 덩치 큰 흑인 포터를 만났다. 수고비로 1달러를 주니 ‘9달러를 달라’고 했다. 겁도 나고 해서 10달러짜리 지폐를 줬더니 1달러를 거슬러 주더라. 사람들은 나더러 ‘운 좋았다’며 ‘어떻게 9달러로 해결했느냐’고 하더라. 9달러는 내 목숨값이었던 거다. 그 뒤로는 내 별명이 ‘9달러’가 됐다.
-당시 국내 수출액 중 안경이 얼마를 차지했나. 대구의 안경 수출액은 얼마나 되나.
△안경은 생활필수품이 아니어서 수출액 비중은 미미하다. 현재 안경 수출액은 1억5천790만달러 정도다. 미국 현지에서 종합무역상사원들을 만나곤 했다. 그들은 한 달에 1건만 성사돼도 성공적이라 했지만 안경은 단가가 적어서 나는 하루에도 2, 3건씩 판매해야 했다. 그러나 재미도 훨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해 대구의 안경 수출액은 5천970만달러로 전국 수출의 37.8%를 차지했다. 직원 7명이던 우리 회사가 한창때는 직원 1천명의 회사와 맞먹는 한 달 70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영어는 언제부터 유창하게 했나.
△국제광학 무역부에 있을 때 회장 배려로 영어회화 공부를 했다. 또 미8군 사령관 부인에게 직접 회화를 배웠고 나중에는 매일 미8군에 가서 미군에게 영어회화를 공부해야 했다. 덕분에 88서울올림픽에는 명예통역원을 맡기도 했고 한국관광공사의 명예통역안내원으로 인정받았다. 대구상공회의소의 무역실무 영어를 강의하기도 했다.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왜 안경산업을 직접 하지 않았나.
△나는 법대 출신이어서 제조에는 자신이 없었고 직종은 전문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경 수출이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을 때 종합무역상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며칠 고민하다가 내 길을 가기로 작정하고 ‘아이디자인즈’를 창립했다. 사무실 전세는 옆집 사장이 빌려줬고 칠성시장에서 중고 전화기와 타자기를 샀다. 버스 토큰 100개를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는 대중교통으로 우체국이며 세관과 은행 업무를 처리했다. 그야말로 ‘버스 안에서도 뛰어다녔다’고 했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해외 바이어를 상대하는 일도 많았을 것 같다.
△덕분에 대구의 유명 호텔과 유명 요리집에서 VIP 대접을 받았다. 한창때는 대구시내 호텔에 바이어들을 분산 수용해놓고 시간차로 구매 상담을 벌여야 했다. 그런데 낮 상담도 그렇지만 밤 접대도 빠뜨릴 수 없었다. 별보기 운동을 날마다 하는 꼴이었다. 1년 중 300일 이상을 술에 절어 있어야 했으니 무역담당은 술상무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한번은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에 호텔로 바이어를 찾아가서는 커피를 타면서 설탕을 재떨이에 털어 넣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이어가 이상하게 보는 바람에 실수한 것을 눈치 채고는 ‘나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절반은 버리고 절반만 커피에 넣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적도 있다.
-무역업을 하면서 안경만 팔았나.
△미국 리비에라의 극동총책을 맡았다. 안경 이외에도 많은 수출품목들을 연계해 줬다. 대구에서 무역창구가 없는 회사에는 대리로 무역을 맡아주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에 유리그릇을 연계해주기도 했고 섬유나 간장 공구 등을 팔아주기도 했다. 한 액세서리 업체에서 여성 머리핀만 서너 컨테이너를 팔아주기도 했다.
-리비에라는 어떤 회사인가
△뉴욕 맨해튼 파크 애비뉴에 본사를 둔 유럽 ‘룩소티카’ ‘사필로’ 등 브랜드를 키운 세계 1등 무역업체다. 회장 클리오트는 유대인으로 메이시, 브루밍데일, 로드앤테일러 등 미국 백화점 매출의 50%를 점유하는 회사다. ‘세계 선글래스업계의 왕’으로 불리는 그는 출장가면 그 도시 최고의 호텔 스위트룸을 사용한다. 이탈리아에서 구입하던 선글래스를 3분의 1 가격으로 공급했는데 가격과 품질에 만족하면서 클리오트의 1등 공신이 됐고 극동책임자가 됐다. 밀라노에서 세계적인 안경 엑스포인 ‘이탈리아 미도 쇼’에 참석했다가 나오다가 택시를 기다리는 일본 안경회사 사장을 만났다. 클리오트 회장은 내게 누구냐고 묻고는 이내 내 손을 잡고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벤츠 리무진에 나를 태우고는 출발했다. 아직 부회장 3명이 전시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클리오트 회장은 일본 사장에게 나의 위신을 세워주려 했던 것이다. 프린시페 디 사보이아 호텔에서는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렸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참석했다. 내가 경호원을 뚫고 가서 인사를 하자 기꺼이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역시 세계적인 스타였다. 클리오트의 삼남 결혼식이 포르투갈 리스본의 고성에서 치러졌을 때 하객들은 전세계에서 전용기를 타고 왔다. 클리오트는 내게 결혼예식에 맞는 정장과 와이셔츠, 넥타이, 양말까지 입혀줬다. 나는 평소 하얀 양말을 즐겨 신었는데 그걸 본 미국 동료들은 ‘당신 마이클 잭슨이냐’고 놀려대기도 했다.
-한국 안경산업은 어떤 위치에 있고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지금은 안경 산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다. 지금 제대로 투자하지 않으면 대구의 안경산업은 존폐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안경 사업자들이 돈을 벌어 안경 사업에 기술과 인력양성에 재투자하는데 인색하고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쓴 흔적들이 있다. 그것이 안경산업을 힘들게 만들었다. 우리 후발주자인 홍콩만 하더라도 안경 사업체가 상장된 회사도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상장사가 한 곳도 없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후회되는 일이나 자랑은 어떤 것인가.
△돌아보니 나름 열심히 살았고 후회는 없다. 세계적인 업체에서 일하면서 대구의 안경을 세계에 알렸고 수출 불모지 대구에서 무역업의 터전을 마련했다고 나름 자부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업이 주춤했는데다 지난해엔 코로나에 걸려 처음으로 일주일 격리돼 쉬었더니 너무 좋더라. 이제 45년 몸 바친 안경업을 정리할 때라고 생각했다.
□ 윤달호(尹達浩·69)
대구 출신. 경대사대부고, 영남대 행정학과 졸. 전 국제광학 무역부장. 리비에라 극동담당총책. 폴라로이드 한국 에이전트. 아틀란틱 한국 에이전트. 전 한국안경수출협회 회장. 전 한국안광학산업진흥원 이사. 전 대구경실련 이사. 대구에서 안경 수출로 대구의 안경 산업과 수출역량을 키운 무역업자. 회사원일 때는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했고 회사 설립 후에는 ‘버스 안에서도 뛰어다닌다’고 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답설야중거(踏雪夜中去·눈 내린 들길을 걸을 때는 조심해서 걸어라. 지금 내가 걷는 발걸음이 뒷사람의 길이 될 것)’이라는 서산대사의 시구를 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