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대학들도 경쟁과 협력으로 위기 돌파해야”

국민의 교육열과 국가 고급인재 수용이라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던 대학이 지금 백척간두의 끝에 서 있다. 2000년 이후 19개 대학이 폐교됐고 모두 지방의 사학이다.대학의 폐교는 지역 경제의 추락과 지방소멸로 확대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야 할 일이다. 그러나 먼저 대학들이 자구책 마련에 적극 나서야 한다.홍덕률 한국사학재단 이사장은 ‘대학에 대한 규제 완화와 구조개선 지원’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GDP의 0.6%인 정부재정 지원을 OECD 평균인 1%대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사학도 변하고 있으니 국민의 사학을 보는 눈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이와함께 대학들의 대응을 주문한다. 경쟁의 룰을 지키면서 시설을 공유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 운영하는 등 경쟁과 협력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한국사학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났다. 사학재단이 하는 일이 사학에 어떤 도움이 되나.△사학진흥기금을 조성하여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사립학교의 교육 환경을 개선하고 학교 발전을 지원한다. 2000년부터는 주로 사립대학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융자사업과 청년 주거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행복기숙사 건립사업을 벌이고 있다. 대학에서 부지를 마련하면 사학재단이 기숙사 건설비를 지원해 주고 30년에 걸쳐 저금리로 분할 상환받고 있다.또 대학의 예산 결산 자료를 집계분석해서 교육정책 기초자료로 국회와 국민에게 정보로 공개하고 있다.강사 처우개선 지원사업, 사학혁신 지원사업, 그리고 실비로 교육 연수 컨설팅 사업도 제공하는 등 사학진흥기금을 활용하여 다각적으로 사립대학의 어려운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특히 지난해부터 폐교대학 종합관리기관으로 올해부터 본격적인 폐교 대학에 대한 종합 관리를 하고 있다. 현재 재단 부지 내에 금년 내 준공을 목표로 폐교대학 기록물 아카이브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폐교대학의 기록물 보관과 관리 활용도가 크게 늘어날 것이다.- 우리 교육에서 사학의 비중이 높다. 그런데 정부 지원은 공립에 비해 형평성이 부족하다고 불평한다.△대학 중 83%가 사학인 데서도 그 중요성이 나타난다. 나라가 어려울 때 사학 법인이 대학을 설립해 국민의 교육열과 국가의 고급인재 수요를 감당해 왔다.그러나 선진국이 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사학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다. 고등교육에 대한 재정 투자가 OECD 회원국의 경우 평균 GDP 대비 1%이지만 우리나라는 0.6%에 지나지 않는다.- 사학에 대한 지원을 이야기하지만 사학에 대한 국민적 시각이 부정적인 것은 사학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흔히 사학 비리라고 일컬어지는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들을 말하는 것 같다. 사학 설립자 및 경영진의 권위주의적 태도, 전횡, 교비 빼돌리기, 족벌 경영 등이 그것이다.국민의 높은 교육열에 비해 국가의 투자 여력은 미치지 못해 사학을 권장하게 됐다. 이 통에 교육 철학이나 자질이 부족한 학교 경영자나 교수, 행정가 등이 사학을 설립하고 학교를 경영하면서 자질 부족 무자격자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은 것이다. 이들의 교육관과 철학 등은 민주화 바람 속에 내부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불화를 빚을 수밖에 없었다. 지역 대학들도 상당수 겪었고 전국 대학들이 대부분 겪었던 몸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학에 대한 규제를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많은 대학 총장들은 규제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사실 사학과 사학법인들의 비리들은 그동안 교육부와 언론의 감독을 통해 많이 노출되면서 줄어들고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법으로 정한 개방이사제도, 대학평의회, 학생 대표가 참여하는 등록금 심의위원회 등도 많은 역할을 했다. 특히 사학진흥재단은 사학과 사학법인을 대상으로 한 재정 실태점검 및 회계감리 제도 등으로 사학법인의 비리를 줄이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이제 사학과 사학법인들의 재정 운용 등 경영이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투명해졌고 비리 요인들도 제도적 장치에 의해 사전에 차단되고 있다. 따라서 사학에 대한 규제도 대폭 풀고 자율적으로 책임 경영할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의 위기, 특히 지방 사립대학의 위기를 이야기한다.△사립대학의 재정 수입에서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54.9%다. 그런데 대학 등록금은 올해로 14년째 동결돼 있다.학령인구 급감으로 대학 정원이 줄어들었는데 그마저 정원 충원율도 줄어들었다. 물가와 경직성 경비는 계속 늘어나는데 수입은 14년째 그대로이니 사립대학의 재정 여건이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그리고 그 사정은 국립대학에 비해 사립대학이, 수도권 대학에 비해 비수도권 대학이, 4년제 일반대학에 비해 전문대학이 더욱 심각하다.- 그럼 홍 이사장의 해결 방안은 무엇인가.△키는 정부가 쥐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에는 ‘사립대학의 구조개선지원 특별법’ 제정이 담겨 있다. 사립대학의 위기를 인식하고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대학에 대한 규제 완화와 구조개선 지원’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는 규제 완화를 천명한 바 있고 지난 달 15일 학교 자산 처분과 관련한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의 조치를 발표했다. 우리 사학진흥재단도 교육부와 함께 사립대학의 재정 여건 개선을 위한 규제완화를 위한 논의에 참여하여 교육부 안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고등교육 재정정보 전담기관으로서 대학의 재정이 개선될 수 있도록 새정부 정책에 맞추어 적극 역할할 것이다.또 사립대학 구조개선을 위한 지원이다. 사학진흥재단은 사립대학의 건전한 성장과 경영위기 대학의 원활한 구조개선을 제도적 법제화를 통해 지원할 계획이다. 한계대학의 폐교로 인한 교직원 학생 등 대학 구성원과 지역사회에 미치는 피해가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폐교 대학이 급증하고 있다. KEDI(한국교육개발원)은 최근 전국의 한계대학이 84개교에 이르며 비수도권에 74%, 사립대학이 94%라고 보고했다.△2000년 이후 폐교 대학은 19개 대학에 이르고 있다. 경영상 위기로 폐교되는 대학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만 더 이상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과 교육 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대학들이 폐교를 결정할 수 있도록 퇴로를 마련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재단은 폐교가 되는 과정에서 대학과 법인, 구성원들이 겪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하고 있다. 폐교대학 학생들의 특별편입학을 지원하고, 교직원들의 체불임금 변제를 위해 청산 융자를 지원해주고 있다.폐교대학 종합관리기관으로서 폐교대학의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이와함께 한계대학의 회생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포럼을 열고 ‘사립대학 구조개선을 위한 특별법’의 연내 입법을 위해 노력해 나가고 있다.-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을 강조한다. 대학 총장시절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무엇인가.△대구대학교는 전국 대학들 중 가장 민주화된 대학이라 할 수 있다. 총장만 교수 직원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단과대학 학장과 학과장까지 소속 교수들이 직선으로 선출한다.민주화된 조직에서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소통과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총장으로서 헌신과 봉사의 리더십으로 정책 결정을 하고 대학 구성원들의 지혜와 역량을 모아 위기를 타개하려 노력했다.학생회 임원들과도 수시로 만나 학생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토론했고 일반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SNS로 피자데이트를 신청해 수백명의 학생들과 즉석 간담회를 갖는 등 소통을 위한 다양한 채널을 가동했다.학생이 행복한 대학을 표방하며 학교 구성원들의 신뢰를 기반으로 재단 분규를 해결하고 대학 위상을 제고시킨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교수로 총장으로 대학에 오래 몸담았다. 지금은 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대학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오늘의 한국 대학 문제의 핵심은 재정위기와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나는 평교수로 있을 때는 교수협의회 간부를 하면서 혹은 신문 기고와 방송 토론 등을 통해 견해와 주장을 개진하려 노력했다.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는 평소 소신과 문제의식을 정책으로 구현해서 책임지고 있던 대학의 학생과 교수 직원들에게 양질의 교육과 교육 연구 여건을 제공하는데 노력했다.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옮긴 지 1년 동안 대학 총장으로 경험을 살리고 한편으로는 교육부 및 국회 등과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전국 사립대학들을 대상으로 필요한 정책과 지원 조치들을 실천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한다.사학재단 이사장으로서 맡은 책임을 다해 지금의 위기에 처해 힘겨워하고 있는 전국 사립대학들에게 의미 있는 지원을 하고 싶다.- 언론에 칼럼 등으로 사회에 많은 활동을 했다. 홍 이사장의 교육관과 대학, 대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교육은 학생을 위한 제도다. 교육의 대상으로 그치지 않으며 더구나 돈벌이의 수단은 더욱 아니다. 학생을 정신적 인격적 지적 사회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의식적 활동이 교육이다.아울러 교육은 학생에게나 사회에게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는 제도다. 전통을 계승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갖고 급변할 때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교육의 역할이다.대학은 학생이 행복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고 사립대학 법인이나 총장이나 교수 직원 모두 학생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2009년 대구대 총장에 취임하면서 ‘학생중심 대학운영’을 천명했고 2010년 후반에 들면서 전국 대학으로 확산됐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지역 대학들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지역 대학의 위기는 지역사회의 위기이고 국가경쟁력의 위기를 의미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이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적극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이와함께 대학에서도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위기가 심해지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지만 경쟁하더라도 룰은 지켜 조화롭고 균형있는 경쟁과 협력을 해야 한다.더 중요한 것은 협력할 주제에 대해서는 과감하고 폭 넓게 협력할 것을 주문한다. 인근 대학 사이 시설을 공동 활용한다거나 교수 교류, 학과나 교육 프로그램과 대학원 과정 등을 공동 운영하는 방안까지 적극 검토해야 할 때다. 대학 간 컨소시엄 구성도 적극 검토하고 가능한 주제부터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지역사화와의 소통, 협력, 상생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지역사회에 필요한 신산업을 발굴하고 첨단 인재를 육성 공급하며 지역민의 평생학습을 책임지는 등 지자체와 대학이 역할을 분담해 지역과 대학이 함께 사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홍덕률(洪德律·65)인천출신. 제물포고. 서울대 사회학과, 서울대 대학원 석사, 문학박사.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대구대학교 총장(10, 11대) 대구사이버대학교 총장(4대)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대통령자문 사회통합위원회 위원.경북지방노동위원회 위원. (재)경북행복재단 이사장, 경북도 평생교육진흥원장.소통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교육자이자 교육행정가.대구에서 대학 교수와 총장 등으로 30여 년 살아오면서 언론 기고와 각종 사회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여론주도층 역할을 해왔다. 학내분규 당시 교수협의회 간사를 맡아 해직되기도 했고 지난 2014년 지역사회의 요청으로 대구시교육감 선거에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사학진흥재단은 작지만 일 잘하는 기관의 모델이라고 자평하며 전국의 사립대학들에 의미있는 지원을 하겠다고 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7-11

기득권의 사회 구조를 국민 이익에 맞게 바꿔야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으로 봐서는 실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기득권층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하면 실체를 선명히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학연·혈연·지연으로 엮인 연고주의나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기득권층의 횡포가 특히 심하다. 이건 보수뿐 아니라 진보를 표방하면서도 사욕 추구에 매몰된 탐욕적 기득권자들에서도 예외가 없다.조국 교수가 법무부장관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맨 처음 주장한 신평 변호사는 “세상을 보는 국민의 눈이 ‘조국 사태’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다”고 했다. “세상은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공정의 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신 변호사는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왜곡시킨 사회적 구조를 전 국민의 이익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 사법제도 개혁을 끊임없이 주장했다.△올바른 사법제도의 핵심은 국민이 공정한 수사를 받고, 또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제도개선 혹은 개혁을 한 적이 없다. 그 결과 수사나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 수가 많고 또 그 중에는 명백히 부당한 수사나 재판의 희생이 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을 ‘사법피해자’라고 한다면 이들이 내뿜는 피맺힌 절규가 전국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다.그리고 한국의 사법신뢰도는 국제적인 조사에서 매년 OECD 37개국 중에서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지하게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우리 법률 중 현실과 맞지 않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법률은 대표적으로 어떤 것이 있나.△ 지금으로 봐서는 문재인 정부에서 행한 소위 검찰개혁, 또는 ‘검수완박’으로 이루어진 여러 법률들을 다시 개정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정권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막기 위해 행한 것으로 검찰의 권력 핵심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자 하는 것이 본질이다.나는 진정한 사법개혁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두고 민형배 민주당 의원이 당선됐을 때 직접 의원회관으로 찾아가 사법개혁 강의를 해주기도 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경우 케이스별로 처리하겠지만 폐지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피해자를 위축시키는 법이다. 유엔에서도 그렇게 한국에 권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처벌하지 않아야 하고 허위사실에 따른 명예훼손이라도 벌금형에 그쳐야 한다는 식이다. 언론의 자유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갖는 고귀한 가치에 비추어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유전무죄’인 것 같다. 갈수록 변호사 의존하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고 세상이 변호사 중심으로 바뀌는 것 같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의 일면도 있고, 한편으로는 법조인의 과다배출이 야기한 과열경쟁에 의해 초래된 측면도 있다.- 현재의 로스쿨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지금 한국의 로스쿨 제도는 철저하게 기득권층을 위한 제도다. 많은 부분이 중·하위층 자녀들의 계층 상승 사다리를 봉쇄하고 있는 집안 자녀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졌다. 지금의 로스쿨을 우리 사회의 진보 귀족들이 만들기는 했으나 보수와 진보 기득권층이 모두 로스쿨 제도 개혁을 반대하고 있다.교육과정도 훌륭한 법관을 배출하기 위한 교육이기보다 교수를 위한 교육과정으로 편성돼 있다. 이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먼저 표준교과과정제를 실시하여 교과과정을 충실히 할 일이다. 또 등록금도 대폭 낮춰서 중하위 계층에서도 법조직역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실정에 맞는 법조인 양성제도를 개발해야 한다.- 변호사 숫자가 늘어나면서 자질론도 끊이지 않고 있다. 사법고시 부활론이 나오기도 한다.△며칠 전 현직 중견 법관을 만났더니 현재 판사 자질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우려하더라. 판사가 법 이론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부실한 로스쿨 교육 때문이라 생각한다. 거기에다 법원의 규율은 땅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큰일이다. 사법제도의 근간이 무너지는 것 같다.개인적 의견으론 사시부활론의 가리키는 사회적 사다리의 복구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나는 사법시험제도, 로스쿨 제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제도의 창설이 필요하다고 본다.- 로스쿨뿐 아니라 대학입시나 공무원 임용에서도 공정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다.△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공정하지 못하다. 공정하게 돌아가야 할 사회 시스템이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는 쪽으로 불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다.특히 586 운동권 세력들은 명예와 권력에 이어 이번 정부에 들어와서는 재물까지 탐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탐욕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면 국가제도를 바꾸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던 아름다운 사회적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 차 버렸다. 뻔뻔스럽고 보수 기득권보다 더 교활하고 탐욕적이었다.계층 상승을 위한 사다리는 어떤 형태로든 유지돼야 한다. 그 사다리가 없어지면 불건전사회가 되고 압력이 폭발하게 된다. 있는 사람, 기득권 자녀를 좋게 고쳐놓은 법이나 대학입시 공무원 임용 등에서 기득권층의 탐욕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 않나.대학입시에서부터 불공정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수시 전형의 많은 부분이 기득권 자녀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공직 사회의 경우에도 외교부에는 많은 직원들이 특채로 들어와 있다. 과거 외무고시를 통해 들어왔을 자리들이다. 현대판 음서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공정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안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우리 사회가 공정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개혁을 넘어 이순신 장군의 ‘산하재조’(山下再造)를 본받은 ‘국가대개조’(國家大改造)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 기득권자들이 그들의 이익에 맞게 왜곡시킨 사회적 구조를 전 국민의 이익에 맞게 바꾸는 것이다. 예산 뒷받침이 없이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방안도 있다. 기득권 자녀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대학입시 제도를 되돌려야 한다. 또 사무관 이상 공무원 특채를 줄이고 공정하게 선발하는 것이다. 로스쿨 제도를 바꾸는 것도 방안 중 하나다.- 문재인 정부 탄생에 많은 역할을 했다.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에 몸담았고 친문 성향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다. 지난 정부에서 요직을 맡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것이 안 돼 삐쳤다는 소문도 있다.△민주당 씽크탱크인 민주통합포럼 상임위원이기도 했고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 중앙선대위 위원장도 맡았다. 그래서 대법관이나 감사원장 법무부장관 등에 하마평이 있었고 상당히 진전되기도 했었다. 그러니 삐친 것은 사실이 아니고 민주당에 등을 돌린 결정적 계기는 조국 법무부장관 때문이다.- 그렇다고 곧바로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게 됐나.△그가 검찰총장일 때 비판하는 글을 써 주목을 받았고 비판 언론들과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위선을 그대로 두고는 나라가 바로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문 정권은 뉴욕타임즈가 지적한 ‘내로남불’ 정권이다. 그런 문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운동권 세력들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586운동권, 촛불 정부의 탄생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니 위선적이고 잇속 챙기는 사람들이었다. 진보 귀족이라 불릴 이들 운동권은 국정을 담당할 실력이나 식견은 없으면서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는 어느 부패 보수 세력에 뒤지지 않았다.그러던 차 주위에서 ‘윤석열이라는 사람이 괜찮으니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실제 만나봤더니 사람이 믿을 만했다. 거기에다 주변에 필체 분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전문가들로부터 윤 후보의 필체를 분석해 본 결과 신뢰하게 됐다.무능하고 위선적인 문재인 정권을 옹위하면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진보 귀족들에 대한 청산은 윤석열 후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윤 대통령이 당선되고 취임한 지 50일이 지났다. 잘 해 나갈 것 같나.△통합과 개혁의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통합은 잘 해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좋은 가정에서 훈육받은 성장 과정을 볼 때 우리사회의 모순에 대한 감수성이 약하지 않을까 생각도 된다. 지난 5년간 정치 사법 교육 부동산 등 국가 사회 전반에 걸쳐 헝클어진 질서를 수습해 줬으면 하고 기대한다.- 조국 전 장관과는 어떤 관계인가.△서울대 법대학보(Fides) 후배 편집위원이었고 나를 대법관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장관 후보가 됐을 때 내가 처음으로 ‘후보 사퇴하라’고 주장했다. 그 때부터 조국과 문 정부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면서 민주당에 등을 돌리게 됐다. 조 전 장관 입장에서는 내가 야속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도 ‘그 때 사퇴했더라면 지금은 아마 조국 대통령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나서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고 싶다.- 판사 재임용에 탈락했다. 사전에 사표를 썼나, 탈락했나? 왜 그런 일이 생겼나.△탈락한 것이 맞는다. 당시 법관 사회에 돈 봉투가 횡행했다. 구체적으로 적시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다. 그걸 비판하는 정풍 운동을 벌였다. 발단은 법관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재판소에 파견됐고 그 때 쓴 책 ‘일본 땅 일본바람’에서 우리 법원 실정을 폭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변호사 개업했을 때 전관예우는 좀 받았나. 경북대 로스쿨에서는 왜 사퇴했나.△예우는커녕 사건수임조차 없었다. 대가대 교수시절 한국헌법학회 회장을 맡아 이용훈 대법원장에게 인사하러 갔더니 “전관예우도 못 받아본 변호사”라고 하더라. 그게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로스쿨 제도는 설계부터 잘못 되어 있음을 느꼈고 학교에 계속 있는 것이 불편했다.- 판사로, 교수로, 변호사로 여러 직업을 편력했다. 최근 정치인으로, 정치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 요즘은 아주 농부, 농업인을 자처하고 있다.△그 중에서 지금의 일이 가장 마음에 맞고 제일 낫다. 변호사 사무실은 몇 달 전부터 사건 수임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유스럽게 독서하고, 농사를 짓고, 틈나는 시간에 어디에 얽매임 없이 글을 쓰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고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아 사물을 보는 눈이 밝아진 것 같다. □신평(申平·66) 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변호사.대구출생. 경북고, 서울대 법학과 졸업. 서울대 석사. 영남대 법학박사제23회 사법시험 합격. 판사(서울 인천 대구 경주의 법원에서 근무)대구가톨릭대 법대 교수. 경북대 로스쿨 교수·학장.미국 중국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연구.한국헌법학회장, 한국교육법학회장, 엠네스티 법률가위원회 위원장. 국공립대학 교수회 연합회 정책위원장. 경북대 법학연구원장 역임.시와 수필로 등단한 한국문인협회 회원.2018년 대한민국법률대상 2016년 국회의장공로장, 2013년 철우언론법상. 2012년 일송정문학상 수상.현재 (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중국 런민(人民)대학 객좌교수. 한일비교헌법학회 한국회장.30여년 전엔 허허벌판이었던 경주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짓고 있다.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부모에 대한 존경심과 땅에 대한 동경으로 농업인을 자처한다.하지만 흘리는 땀에 비해 수확은 터무니없는 보통 농부들에 비하면 농사를 직업이라 부르기에는 부끄럽다고 한다.최근에는 고 심정민 소령 추모사업회 회장을 맡았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7-04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해 기업 존중받는 사회 만들겠다

‘기업이 국가다’라는 말에서처럼 기업과 경제는 국민 생활과 직결돼 있고 그만큼 기업인의 역할은 중요하다. 기업은 4차 산업혁명 시대 기술 혁신의 주체이자 환경 고용 성장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을 주역이다.이재하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은 “산업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맞게 사회와 기업을 연결하여 기업의 경쟁력 강화는 물론 사회적 책임 이행으로 친기업 분위기를 만드는데 더 노력하겠다”고 말한다.기업의 역할을 새겨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사회와 함께 성장함으로써 시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이다. - 윤석열 대통령이 ‘기업 규제를 과감히 혁파하겠다고’고 했다. 지역 기업인들의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큰 것 같다.△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생각이나 철학이 밑으로 내려와 실천 단계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나.사실 기업인들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크다. 기금 기업인들의 사기도 높다. 지난 정권에서 반기업 정서가 팽배했던 데 비하면 이번 정부는 친기업 정서가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개혁은 역대 정부에서도 한다고 하지 않았나. 대표적인 기업규제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물론 역대 정부에서도 규제 개혁을 하겠다고 했고 노력도 했다. 그러나 건수 위주 추진이나 개선하기 쉬운 과제 해결 등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또 제도나 규제들을 시대에 맞게 정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불필요하고 중복되는 규제는 통폐합하고 간소화하여 기업이 중복적으로 규제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중대재해처벌법이나 주52시간제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규제만이 문제가 아니다. 현재 규제들은 기업들의 ‘가능 행위’를 하나하나 규정하고 제한하는 방식으로 정해져 있다. 상황에 맞춰 과거의 제도가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정비해야 한다.- 기업인이 존경받는 환경을 강조해 왔다.△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성공의 핵심 요인 중 하나가 ‘기업가 정신’이라 생각한다. 경제발전의 원천이 되는 기업가 정신은 기업이 존중받는 사회에서 제대로 발현될 수 있다. 물론 기업인이 존중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국민들이 기업을 올바르게 보고 평가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가능하다.- 기업인이 존중받는 환경을 강조하는 배경은 어디서부터 왔나.△기업인은 일자리창출과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고생하는 만큼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DNA가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공부 잘 하면 기업가 아닌 관료나 공직자를 선호하고 있지 않은가. 행사장에 가보면 보통 기업인에게는 앞자리가 없다.회장 취임 직후부터 ‘기업인이 존경받는 환경’을 강조해왔고 대구산업대상을 시상하고 대구를 빛낸 기업을 소개하는 등 기업인의 사기를 높이는 ‘경제계 신년인사회’를 개최했다. 또 기업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온라인 기업가 박물관도 추진하고 있다.2019년부터 시작한 리딩기업 간담회와 원로 기업인 초청 간담회를 통해 기업인의 자부심과 긍지를 높이고 지역을 대표하는 100년 기업들이 많이 생겨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새 정부에서 법인세 등 세제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기업인으로서 상속세를 폐지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기업은 많은 세금을 내는 세원이기도 하다. 기업이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기업 승계를 통한 노하우의 축적이 중요하다. 그런데 돈으로 상속받는 것이 아닌데도 상속세를 물리고 있다. 그러니 제품 만들고 경영하는 데 신경 써야 할 기업이 어찌 재테크에 더 신경 쓰고 있는 이상한 현상까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상속세를 줄여서 2세 기업인이 많이 나오게 해야 한다. 100년, 200년 된 기업이 나오기 위해서는 경영의 노하우가 필요한데 축적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주52시간 근무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현장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대구상의가 2020년 말 회원사를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응답 기업의 절반 이상(58.2%)이 ‘임금이 줄어들었다’고 하더라. 근로시간 단축으로 휴게 시간은 늘어났지만 실질적 근로시간 감축에 따라 소득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있는 삶도 소득이 보장돼야 가능해지는 것이다.법 취지는 사람을 더 채용하라는 고용증대에 있지만 실제 기업으로서는 한 번 고용하면 위기가 닥쳤을 때에도 쉽게 해고할 수 없다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어 쉽지 않다.또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 문제, 산업별 직무별 특수 작업환경으로 인한 초과근로 상황이 발생하는 등 복잡하다. 초과근로 제한은 기업 생산에도 차질이 생겨나고 근로자는 임금 감소로 이어지는 등 현실적으로 문제가 빚어지고 있다.- 대구는 중소기업 비중이 높은 도시다. 대구 경제와 중소기업 육성책으로 특히 필요한 대목은 어떤 것이 있나.△대구가 중소기업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규모가 작다거나 어렵다는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세계적으로 중소기업 중에서도 세계 1등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많이 있다. 중요한 것은 중소기업이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끊임없이 RD(연구 개발)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RD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런 여력이 되는 중소기업이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 위탁생산에 그치고 있어 안타깝다. 내가 취임 초부터 지역 기업의 RD 지원을 강조하고 동대구 벤처벨리에 RD 지원기관들을 집적화해 연구 개발부터 제품 출시까지 지원할 수 있는 대구 RBD(사업화 연계 기술개발) 지원센터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 발전의 조건으로 RD를 강조한다. 마치 RD가 중소기업 성장의 도깨비 방망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 기술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과거 우리 중소기업이나 기업인은 첨단 기술을 벤치마킹하는 시대였고 그 때는 ‘Fast Follower’여야 했다. 그러나 우리 수준이 높아진 지금은 그렇게 해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지금은 ‘First Mover’여야 한다. 1등 기업이 되면 더 이상 배울 데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신기술에 따른 장치 설비는 처음 투자할 때는 힘들어도 양산 체제에 들어갈 때면 후발 주자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경쟁력을 갖게 된다. 이런 기술은 RD에 대한 투자에서 나온다. 샘이 깊어야 물이 고인다. RD에 투자해야 세계적 석학이나 연구 인력들이 모여들고 좋은 기술이 나오게 된다.- 동대구역 네거리에 위치한 동부소방서가 이전하게 되면 그 자리에 ‘대구 RBD 지원센터’를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그런 이유인가.△그렇다. 지역 중소기업들이 독자적으로 RD를 운영할 수준은 되지 못하지만 대구로서는 절실한 문제이다. 지역 과학의 혁신 역량을 높이고 우리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신기술 개발과 이를 사업화할 수 있는 종합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또 기업인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연구소의 중요성과 유치의 필요성을 전파해왔고 또 실제 건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부의 공공기관 이전과 관련, 대구 중소기업들의 현실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관이 유치돼야 하나.△대구로서는 중소기업은행 유치가 가장 필요하다. 기업 경영에는 금융이 필수 요소이다. 코로나19 위기 때도 기업들이 자금 지원을 가장 필요로 했을 만큼 정말 중요하다. 이런 문제는 정치논리로 지역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효과를 최우선 고려해야 한다.나는 운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대구를 방문했을 때 직접 건의하기도 했다. 또 홍준표 대구시장 당선인도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나도 인수위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지자체와 함께 경제계에서도 총력을 기울여 유치에 나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최저임금 협상에 대한 대구상의의 입장은 무엇인가. 업종별 지역별 차등적용에는 동의하나.△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라도 최저 임금 인상 수준은 고민해야 한다. 통계청 자료에도 최저임금을 못 받는 근로자가 전체 근로자의 15.6%나 된다. 특히 업종별로 차이가 커서 숙박음식업 종사자는 절반 가까이(42.6%) 최저임금을 못 받고 있다.기업 규모로도 4인 이하 기업의 36.3%가 최저임금 미만으로 일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 규모, 업종별로 지불능력, 근로조건, 생산성에 차이가 있는 만큼 최저 임금의 업종별 지역별 차등적용은 필요하다.- 자동차 부품 산업은 대구의 핵심 산업이다. 내연기관 자동차가 전기차 수소차 시대로 전환해 가고 있는데 대구의 자동차 부품산업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나.△끊임없는 신기술의 등장과 접목으로 앞으로의 자동차 산업은 더욱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미래 자동차 시장의 변화와 트렌드를 사전에 예측하고 선제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는다면 현 경쟁 구도에서 생존해 나가는 것조차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지난해 대구상의가 대구경북연구원과 공동으로 실시한 ‘지역 미래차 전환 실태조사’에 따르면 57.1%가 미래차 개발 계획이 있다고 응답했다.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기업이 절반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삼보모터스도 미래차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RD에 집중 투자하고 있으며 특히 ‘친환경 미래차’라는 큰 테마에 초점을 맞추고 선행 개발을 실행하고 있다.-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에 연임됐다. 회장직 수행이 개인적으로 기업 경영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기업인으로서 회장직 수행은 실리적, 실질적으로 엄청난 기회손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역 상공업계의 권익을 대변하고 제도 개선과 기업들의 어려움을 지원하고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적극 나서면서 보람을 찾고 있다. 기업인들이 경영 성과를 사회와 공유하고 우리 사회가 기업인을 존중하면서 기업과 사회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더욱 노력하겠다.- 회장님이 경영하는 삼보모터스의 성장 과정에는 어떤 기업가 정신이 있었나.△미술선생에서 자동차 부품 산업에 뛰어들어 성공하기까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신이 있었다. 1994년 국내 최초로 자동변속기 부품 개발에 성공, 점유율 국내 1위, 세계 9위로 세계적으로 기술을 인정받고 있다.앞으로는 ‘Fast Follower’가 아닌 ‘First Mover’로 산업 변화의 중심 역할을 해 나가려 한다. 회사로서도 대구 상공회의소 차원에서도 RD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도 지속적으로 해나가겠다.- 최근 계명대에서 명예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상도 많이 받았다.△실력보다 더 좋은 상을 받을 때면 상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을 하면서도 수출탑 산업훈장 등 더 받을 것이 없을 만큼 받았다. 상은 언제나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인다.□ 이재하(李在夏·68)안동출생계명대 서양화과 졸, 계명대 교육학 석사. 대구대 명예 경영학 박사. 계명대 명예 공학박사.포항 대동고 교사.삼협산업 대표이사. 삼보모터스 회장.대구성서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 삼보문화재단 이사장. 대구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장.대구FC이사회 회장. 은탑·금탑 산업훈장. 무역의날 1억불 수출탑.신기술을 개발해서 세계 1등 제품을 생산해야 기업이 살아남는다며 RD 중요성이 몸에 배어 있는 철저한 기업인. 미술선생에서 기업가로 변신해 직원 3천명에 매출 1조5천억원의 삼보모터스를 일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6-27

영화는 첨단 과학 기술이 융합된 미래 먹거리 산업이다

범죄도시 2가 1천만 관객을 동원한 28번째 한국영화가 됐다.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영화상은 한국영화가 세계 영화시장의 절대 강자임을 확인시켰다. 영화는 이미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세계적 공용어가 되고 있다.영화는 오락과 예술을 넘어 첨단 과학 기술이 융합돼 미래의 먹거리를 만들어가는 4차 산업의 핵심이다.대구가 한 때는 한국의 헐리우드였으나 지금은 영화 소비도시에 머물고 있다. 젊은 영화인들을 이끌고 대구의 영화산업 부흥에 앞장서고 있는 서성희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그는 대구가 영화 소비도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독려한다. “영화 인프라를 확충하는 일이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이라며 “250만 대구의 문화 예술은 ‘선택과 집중’ 아닌 ‘다양성’을 위해 영화 인프라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윤석열 대통령이 영화인들을 초청해 격려하면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겠다’고 했다.△정권이 바뀔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꼭 지켜지길 바란다. 지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도 아직 해결이 안 된 상태인데, 간섭은 안 될 말이다.- 영화의 세계적 발전 추세와 한국 영화는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하나.△한국영화는 개화기에 도입된 이후 세계적 호평을 받는 수준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특히 K-POP, K-드라마 등 한류가 확산됨에 따라 한국 영화에 대한 해외 인지도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앞으로 한국 영화는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 기술인 AI(인공지능),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 기술 간 융합을 통해 영화 기술 경쟁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영화 관련 원천기술의 높은 해외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체계적인 기술 개발 로드맵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구가 한국 영화의 중심지였던 적이 있었다. 기억할 만한 대구 출신 영화감독은 누가 있나.△대구는 한국 근대 예술의 근거지다. 6·25 한국전쟁은 대구를 문학 음악 미술 등에서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한국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1962년 영화법을 개정해 영화사 등록여건을 강화시키고 전국 71개 영화사를 16개로 통폐합했다. 이때부터 서울로 집중되면서 대구의 영화산업이 쇠락해 진 것이다.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을 비롯, 국어교사에서 영화감독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창동 감독, 그들은 대구에서 영화적 소양을 키웠다.제작과 감독 촬영 편집 등 혼자서 만들어낸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세계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를 알린 배용균 감독도 대구가톨릭대 교수였다. TV의 드라마 PD에서 상업영화로 성공하고도 독립영화의 길을 모색했던 영원한 영화 청년 박철수 감독도 대구가 낳은 영화인이다.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인 1932년 한국영화사의 대표적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를 만든 이규환 감독도 대구 출신이다.6·25전쟁이 막 끝난 1955년, 출산한 지 한 달 되는 딸을 업고 여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미망인’을 찍은 박남옥은 대구의 여성과 영화인이라는 이미지를 영화사에 새겨놓았다.- 현재 대구 영화계의 사정은 어떠한가.△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한국영화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대구는 영화에서 소비도시로 그 역할이 제한되고 있다. 문화 예술이 경제 발전의 힘이라고 하면서 첨단 과학기술의 융합인 종합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최근 지역 젊은 영화인들의 노력은 눈이 부실 정도다. 박재현 감독의 ‘나랑 아니면’이 지난해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단편 경쟁 부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6월에는 박찬우 감독의 ‘국가유공자’가 평창국제영화제 한국단편 경쟁 부분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김정원 감독의 ‘희수’는 전북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고 스페인 빌바오 단편영화제에 초청받는 등 국내외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김정원 감독이 ‘희수’로, 김현정 감독이 ‘흐르다’로 데뷔했고 유지영 감독은 ‘Brith’ 촬영을 마치는 등 3명의 여성 감독이 모두 장편을 만들어내 대구영화계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대구 영화계의 과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최근 지역 청년 창작자들의 성과를 살리면서 악화하는 영화계 외적 환경을 극복해 내는 일이 지역 영화계의 시급한 과제다. 대구만의 영상영화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역에서 영화를 한다는 것은 이미 영화 산업으로 자리 잡은 서울의 대형 영화사의 제작 배급 방식과는 달라야 한다. 대구만의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해 나가며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켜 대구에 적합한 영화도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오오극장 대표도 맡고 있다. 대구 오오극장은 어떤 곳인가.△독립영화전용관으로 7년 전인 2015년 2월11일 인디스페이스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개관했다. 영화인뿐만 아니라 지역 시민과 관객들의 십시일반 성금으로 설립됐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데 이름처럼 좌석수가 55석뿐이다.오오극장은 가능하면 지역에서 제작되는 영화들을 소개하려 노력한다. 전국적인 우수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것도 중요한 미션이었지만 지역의 영화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것 역시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영화 상영 후에는 GV(관객과의 대화) 시간도 마련하고 있다.- 독립영화는 어떤 영화인가.△상업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영화다. 자본으로부터 독립이다. 흥행을 목표로 하고 대박을 터뜨려 제작비를 건지고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영화와 달리 비상업적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영화다. 그러니 이야기 전개 방식도 마케팅 면에서 유리하게 만들어지기보다 제작자나 감독의 주제의식을 표출하기 위한 내용과 형식을 담아낸다.보통 15억 원 이하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독립영화라고 부른다. 장편 영화는 편당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다.언제 어떤 영화가 히트 칠지 모른다. 독립영화는 상업영화를 제작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흥행위주의 상업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다루며 예술성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독립영화는 한국 영화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구의 독립 영화와 단편영화는, 또 대구단편영화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대구에는 독립영화 중에서도 상영시간 40분 이내의 단편 영화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다. 2017년 유지영 감독은 순수 대구 제작진으로 장편 독립 영화 ‘수성못’을 찍어냈다. 대구의 장편 영화 제작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올해 23회째를 맞는 대구단편영화제는 2000년 3월 대구에서 만들어진 대구독립영화협회가 같은 해 11월 창립영화제를 열면서 시작됐다. 현실적으로 대구 지역 청년 영화인들의 제작 여건을 고려한 선택이 상업영화 아닌 독립영화였고 장편 아닌 단편영화였다. 해마다 1000편이 넘는 경쟁 단편 영화들이 출품되는데 여기서 성공하면 장편으로, 또 상업영화로 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영화 생태계가 건강해야 한다는데 영화 생태계는 어떻게 작동하나.△영화 생태계는 교육부터 제작, 후반작업, 배급, 마케팅, 상영까지 사업 분야가 명확히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분야별 지원체계가 유기적으로 작동될 수 있어야 한다. 한 편의 단편영화도 제작자 감독 배우에서 촬영 조명 등 15명 정도의 제작 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화 제작이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영화 한 편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영화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영화 산업은 대기업 중심, 서울 중심으로 구성돼 지역에서 영화를 할 환경 조성이 어려운 상황이다.- 대구영화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영화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영화학교를 운영하고 지금은 대구영상미디어센터가 맡고 있다. 열악한 대구 영화계는 지역 영화인과 영화 지망생들을 서울 등으로 빠져나가게 만들고 있어 이들을 붙잡아 지역 영화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영화 아카데미 연출전공 11기 출신이다. 대구에는 그런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영화 교육 기관이 없고 대학에도 영화과가 없다.대구에는 영상위원회가 없고 대구영상미디어센터가 교육 기관의 역할과 함께 영화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대구영상미디어센터는 대구시가 문화관광부와 공동으로 설립해 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이 수탁 운영했다. 그러다가 2019년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이 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운영하다가 올 2월부터 단독 운영하고 있다.대구영상미디어센터는 영화와 창작 활성화를 위해 대구영화학교를 운영하고 센터가 보유하고 있는 장비와 창작지원 사업을 통해 지역 미디어 인력 양성과 제작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앞으로는 창작 지원활동뿐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대구 영화 산업은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나.△영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다. 스튜디오를 건설하고 촬영 장비를 구비하는 것이다. 문화 예술이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낸다면 영화야말로 30년 후 먹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예술 작가를 키우는 일, 크리에이티브를 키우고 창작과 과학 기술이 융합한 예술이 영화다. 그 역량은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대구는 250만 도시다. 문화와 예술에서도 도시 규모에 걸맞은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때이지 더 이상 ‘선택과 집중’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이젠 영화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대구단편영화제는 장편까지 포용하도록 판을 더 키워야 한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는 교육이라는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고 대구 영화의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고 실행할 수 있는 영상위원회가 구성돼야 한다. 대구 영화는 더 큰 힘이 필요하다.- 영화계에서 바닥부터 다져왔다고 했다. 대구 영화계와의 인연과 역할은 어디서부터인가.△대학(연극영화학과)을 졸업한 뒤로 줄곧 영화계에 몸담고 있었고 대구에서도 대학에서 영화 강연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2007년 결혼 후 대구로 와서 본격적인 영화인의 길을 걸어왔다. 대구단편영화제 심사위원을 10년 간 맡으면서 지역 영화 생태계를 지켜봤고 2017년 대구경북영상영화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이 되면서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와 함께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소장을 맡아 2019년에는 영화진흥공사의 공모사업을 통해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이 대구영화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런 일들에는 지역 젊은 영화인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땀이 큰 힘이 됐다.- 영화인으로서 후회나 바람이 있을 것 같다.△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있다. 배우가 됐더라면, 감독이 됐더라면, 제작자가 됐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러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영화라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영화라는 소신을 지켰으니 영화는 내 인생인 셈이다. □ 서성희(徐成姬)대구 출생. 성화여고, 청주대 연극영화학과. 경북대 대학원 경영학석사. 동국대 영화영상학 박사.경일대, 영남이공대 초빙 및 겸임교수, 계명대 영남대 외래교수.한국영화기획정보센터, 이우영상 기획실 근무.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정회원, (전)기획이사.현)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고교 시절엔 무용을 했다. 뮤지컬 배우 남경주를 보고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청주대에 지원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서울의 충무로 영화사 기획실에서 수입영화의 홍보와 배급, 한국영화 제작회의 등을 거치면서 영화계 실전을 익혔다.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된 것도 모두 영화에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했다.처음엔 직접 연기하는 배우의 길을 희망했는데 제작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지금은 영화 기획과 행정 지원을 맡고 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6-20

독서 생활화 기여, 진정한 문화 도시 대구 만들겠다

모든 것이 광속으로 움직이는 디지털 시대. 그런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뒤돌아보고 한 번 더 생각하는 여유를 가지게 하는 힘, 그것은 독서를 통해서 가능하다. 책이 인류의 지혜와 정보의 보고라면 그 보물과 소통하는 방법이 독서다.책을 읽는 사람은 생각을 깊게 하게 된다. 독서는 지식에의 허기를 채워주고 독서카페나 동아리 문화센터를 통해 지적 허영심까지 해소시켜 준다.평생을 책을 만들어 온 신중현 학이사 대표. 그는 “책 읽기는 숙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역에 좋은 출판사 하나가 있다는 것은 좋은 언론사나 대학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는 그는 책을 통해 개인의 발전뿐만 아니라 지역 대구가 진정한 문화의 도시, 책의 도시가 되는 길을 고민한다. 그가 독서아카데미에 열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 대구가 인쇄 출판 도시라 불렸는데, 대구 출판업계의 현황은 어떠한가.△역사적으로 대구는 출판 문화의 도시였다. 특히 6·25 전쟁을 계기로 서울의 작가와 출판사가 대구로 피란 우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때 출판의 수도로 번창한 곳이 대구다. 내가 출판사 이상사에 입사하던 1987년만 해도 전국을 무대로 활발한 영업을 하던 수많은 출판사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신생 출판 기획사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대구시에 등록된 출판기획사 수만도 1천개는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그렇게 많지만 단행본을 출판하는 출판사는 몇 되지 않고 대부분 관공서나 특정 업체의 인쇄물을 수주 받아 인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종이책의 위기라 그런다. 독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인가.△옛날이나 지금이나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책값이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독서 인구는 오히려 늘어난 것 같다. 지금 지하철에도 도서관 시스템이 있고 동네 도서관을 통해 책을 빌릴 수 있다. 독서 환경이 정말 좋아졌다.예전에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여성이 가장 큰 독자층이라 했다. 지금은 30 ~40대가 가장 큰 독자층이라 생각한다.- 대구서적 문화서점 본영당서점 제일서적 학원서림 태양당 등 문화도시 대구의 위세를 보여준 서점들이 대부분 사라졌다.△정말 서점들이 많이 줄었고 대구가 특히 심하다. 중앙로를 중심으로 번창했던 서점들이 건물 임대료에 밀려 업종을 바꾸고 사라진 것이다. 현재 대구를 대표할 토종 서점이 없다. 많은 서점들이 학습교재 판매로 주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그나마 긍정적인 면으로는 전국적으로 작은 책방이 골목마다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모바일이나 e북이 종이책을 삼킬 것으로 보나.△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양적인 면에서는 당연히 줄어들겠지만 종이책과 모바일이나 e북이 지닌 물성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책을 만들어왔다. 종이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종이책은 읽는 사람에게 깊게 사유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건 정말 중요하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작가와 교감할 수 있고 자신의 상상을 펼쳐 나갈 수 있다.기억하고 싶은 곳은 밑줄을 치거나 포스트잇 등으로 표시할 수 있어 다시 찾기 편리함과 더불어 내용을 기억하기에 유리하다. 종이책은 읽는 사람에게 무게와 형태, 그리고 종이의 감촉 등이 책의 물성을 느끼게 한다.- 지방 출판사의 어려움은 어떤 것인가.△이건 지방신문과 중앙일간지를 비교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라고 보면 된다. 중앙과 지방의 차이는 인력과 마케팅 능력, 자본 등에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좋은 책은 기획하려면 그만한 투자가 뒤따라야 하는데 지방 출판사에서 그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지방 출판사의 어려움은 지방 작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품을 출판사가 책으로 만들면 서점에서 일반 독자와 만나는 선순환의 유통 구조를 이뤄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서점들이 거의 사라지고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구조가 되고 있다. 중앙 중심, 대형출판사 중심으로 책의 유통구조로 짜여 지면서 지방출판사는 물류면에서도 불리하고 지방출신 작가의 위치도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 어려운 구조라는 이야기인가.△좋은 작가의 책을 기획해서 서점에 내놓고 책이 독자와 만나는 구조가 돼야 한다. 그런데 그런 기획출판은 드물고 대부분의 책은 작가가 자비출판해서 배급까지 떠맡고 있다.자비출판의 경우 저자가 출간한 책을 본인이 지인들에게 배포하는 것이다. 어쩌다 판매가 예상되는 책이 있을 때는 출판사에서 일부 판매에 나서기도 하지만 물류창고도 있어야 하고 영업능력도 필요하기 때문에 흔하지 않다.책이 더 이상 라면 냄비 받침에서 탈피해야 한다. 안 팔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런 책도 있다는 정도는 알려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책 광고만 하더라도 한 때는 책 광고 한 번에 뉴 그랜저 한 대 값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만한 값어치를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 지역 출판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역 출판사가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지역 출판사가 그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만 생각하면 아주 미미하다. 그러나 책 출판 이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자부한다. 출판은 그 지역의 진정한 삶을 발굴하고 기록한다. 그것은 문학이 되고 철학이 되고 역사가 된다. 그래서 ‘지역에 좋은 출판사 하나 쯤 있다는 것은 언론사나 대학이 하나 있는 것과 같다’는 말에 위안을 삼고 용기를 얻는다.지역 출판사의 역할이 왜 소중한지, 왜 지역 출판사를 아껴야 하는지를 알리는 데에도 적극 나선다. 책을 통해 개인의 발전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지역 대구가 진정한 문화의 도시, 책의 도시가 되는 길을 고민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학이사(學而思)라는 출판사 상호부터 특이하다. ‘학이’는 뭐고 사(社)가 아니기도 하다.△논어 위정편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판사명을 생각 사(思)로 쓰는 것도 그래서이고 이건 기업정신이기도 하다. 2007년 대구의 한자 옥편 전문 출판인 이상사(理想思)를 맡으면서 이름을 바꿨다.학이사는 2017년 ‘제37회 한국출판학회상(기획 편집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한국출판학회가 제정한 상으로 출판사가 가장 받고 싶어 하는 기획 편집부문 상을 지역출판사로서 받은 것이다.- 그동안 어떤 책을 얼마나 발간했나. 어느 책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나.△종이책 400종, 전자책 150종, 그리고 오디오 북 몇 권을 냈다. 1년에 30권 가량을 내고 있다. 가장 자랑스러운 책은 대구에서 코로나가 창궐하던 당시 국내 처음으로 코로나 관계 도서를 발간해 기록으로 남기고 전국적인 코로나 관련 도서 발간의 동기를 만들어 냈다는 거다.코로나가 발생한 지 한 달 여 만인 2020년 4월 17일 ‘그때에도 희망을 가졌네’를 발간했다. 각기 다른 직업의 대구시민 51명의 코로나 체험기다. 이어 대구에서 의료활동을 했던 의사와 간호사, 구급대원 등의 체험과 제안을 수록한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를 냈다.책이 나오자 중앙 일간지에서 대서특필했고 일본에서도 번역 출간되고 NHK를 비롯한 일본 언론까지 관심을 갖고 취재했다.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지역 출판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했다.기억에 남는 책으로는 환경운동가 정홍규 신부의 ‘마을로 간 신부’로 중국국제도서전을 앞두고 우리 정부의 사전검열에서 4대 금서 리스트에 오른 일이다.- 출판사 운영에 어려운 시절은 없었나. 언제가 제일 힘들었나.△시쳇말로 ‘단군 이래 안 어려운 적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디지털시대인 지금이 어렵다면 가장 어렵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펄프 값이 40%나 뛰고 제작비가 인상되어 힘들다. 그러나 출판 환경은 예전과 달라졌다. 대통령 욕이든 어떤 이야기든 제지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학이사에서 주관하는 독서아카데미가 지역 문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책을 통해 개인과 지역이 함께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책을 제대로 읽는 훈련을 하는 곳이다. 2016년 시작, 지난해 7기까지 배출했다. 매 기수 15명이 주 1회씩 3개월간 12강으로 완성한다. 문무학 시인의 강의와 서평쓰기 공부를 통해 제대로 읽는 방법을 배운다. 수강생 중에는 멀리 경주나 구미에서 오는 사람도 있고 대학생부터 70대까지 연령층과 직업 또한 다양하다. 각 기수별 수료생들의 서평집을 발간해 시중에 판매하고 있다. 또 지역 일간지에 매주 토요일 ‘내가 읽은 책’으로 연재(6월 4일 현재 237회)하고 있다.- 학이사 독서아카데미 출신의 모임인 ‘책으로 노는 사람들’도 책읽기를 전파하고 있다.△한 달에 한 권의 동서양 고전문학을 번갈아 읽고 토론을 벌이는 모임으로 2016년 7월 설립됐다. 코로나로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었을 때는 단체 톡이나 줌을 이용해 독서토론을 벌여왔다.또 문학작품의 배경지 답사를 연례적으로 벌이고 있기도 하다. 춘향전의 배경인 남원, 무영탑(김동리)의 배경 경주, 삼국유사 배경 군위 인각사, 칼의 노래(김훈)를 읽고는 고령, 덕혜옹주(권비영)를 읽고는 ‘대마도 하루 만에 다녀오기’ 등 작품이 탄생한 현장을 찾아 작품의 깊이를 되새기고 있다.- 학이사 창사 10주년 기념으로 작가 60명의 자기 책에 대한 생각을 담은 ‘내 책을 말하다’를 출간했다.△올 해는 창사 15주년이자 학이사의 전신 이상사를 기준으로 35주년이 된다. 그동안 나는 출판인으로 학보사 활판인쇄에서부터 청타와 인화지의 사진식자 시대를 건너 현재의 전산 시대까지 출판 현장을 경험했다. 내달 쯤 개인의 출판계 역사를 출간하려 한다.- 지역 출판사로 서평쓰기 대회를 열고 있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학이사 취지에 공감하는 지역인의 지원으로 2017년부터 시작하고 있다. 기업이 이름을 걸고 후원하고 수상을 받은 개인은 물론 회사에서도 독서 활동으로 이어지는 행사다.앞으로 ‘책 학교’를 만들고 싶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책이 부담스런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항상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친해질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어린이에게 장난감이 친밀한 것처럼. 아직은 막연한 꿈일 뿐이지만. 신중현 학이사 대표경남 거창 출신. 가조고, 계명전문대 무역과. 방송통신대, 방통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중퇴.1987년 6월 29일 이상사에 입사해 편집자와 영업사원을 거쳤다. 2006년 7월 1일 이상사를 물려받아 학이사로 변경하고 대표가 됐다. ‘월급을 안 받아도 좋을 만큼 책을 만드는 일이 신이 났다’고 회고한다.그가 자란 거창군은 군 단위에서 고교가 6개나 있는 전국 굴지의 교육도시이다. 독학사 자격을 따고는 대학원에서 문예창작과에서 공부하다 접었다. “학력을 세탁해서 출세할 일도, 취업할 일도 없는데 밤새워 공부하기보다는 더 나은 사회 기여의 길을 찾은 것”이라 한다.35년을 책과 살아온 그는 돈 많이 벌면 ‘책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시민들에게 취미로서의 독서가 아니라 생활로서의 독서를 정착시키는 것이 목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6-13

육체적 정신적으로 삶에 활력을 주는 파크골프

신생아 1명이 태어날 때 노령인구는 2명 꼴 늘어난다. 이늘 노년들이 건강하게 즐길 수 있는 여가와 운동으로 파크골프가 무섭게 확산되고 있다. 시내 어느 곳에서는 30분에서 1시간이면 즐길 수 있는 파크골프는 남녀노소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국민체육이다. 대구파크골프협회 회장 김광기씨. 그는 약을 통한 국민 보건 건강증진에 앞장섰던 약사에서 이제는 운동을 통한 건강지킴이로 나섰다. 전 대구시 약사회장으로 의약분업 설계에 적극 참여했고 시민들의 보건 증진과 약사들의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지금은 파크골프 회장으로 시민들의 건강과 여가선용, 나아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골프장이 일대가 시장통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가장 성황을 이룬 곳이 골프장이라고 들었는데 파크골프도 코로나와는 관계없는 곳인가.△그만큼 파크골프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이곳 강변 파크골프장만 하더라도 하루 800여명이 이용한다.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풀타임으로 골프장이 운영된다. 이만큼 시민 건강에 이바지하는 체육시설이 파크골프 말고 또 있겠나. 이용객들이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는 것은 스스로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기도 하면서 햇빛 차단을 위해서이다.- 대구를 전국 파크골프의 메카라고 한다. 골프장 숫자와 골퍼 인구 때문인가.△대구시내에는 작게는 9홀에서부터 이곳 강변의 45홀까지 모두 27개 파크골프장(61개 코스)이 있고 회원만도 8개 구군별 협회와 시니어연맹, 장애인 연맹까지 10개 연맹 600여 클럽에 1만7천 명 정도이고 파크골프 동호인은 4만 명 이상 될 것으로 추산한다. 전국 파크골프 회원의 23%를 대구 골퍼들이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협이나 마을금고까지 직장이나 모임별로 파크골프 동호회를 조직하고 있는 추세다.거기에다 대구 골퍼들의 실력이 또 만만찮다는 거다. 전국체전이나 파크골프 축전을 비롯, 전국의 유명 파크골프 대회에서 상위권을 대구가 휩쓸기 때문에 대구 골퍼들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대구파크골프협회 사무실도 지난 5월 신축 개장했다.-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파크골프 붐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산천어 축제로 유명한 화천군은 지금 파크골프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산천어 축제는 한 철이지만 파크골프는 연중 계속된다. 화천군으로 골프를 치러 오는 관광객들이 줄을 이으니 지역민들이 대환영하고 있다고 한다. 며칠 동안 화천군에 와서 자고 먹고 하는 파크골프가 화천군의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이웃 경기도 연천군에서도 파크골프장을 관광 자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지역마다 파크골프는 골프보다 접근하기 좋고 동호인들이 많아 지자체에서도 경쟁적으로 골프장을 조성하고 관광객 유치를 위한 전략을 세우고 있는 모양이다.- 파크골프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육체적 운동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유익한 여가 활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60대 이후 인생의 제2 황금기에 삶의 질을 높여 줄 수 있는 활동으로 그만이다. 적은 경비에도 근교에서 자연과 호흡하면서 동반자와 소통을 통해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이 파크골프다. 30분에서 1시간이면 골프장에 닿을 수 있고 장비도 골프채 한 개만 하면 되니 얼마나 접근하기 쉽나. 회원 중에는 암 투병중이거나 관절염 신경통 등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파크골프를 만나 건강을 되찾고 인생에 새로운 의욕과 자신을 얻었다고 감사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대구시체육회의 72개 경기종목 중 역사가 짧은 신생종목이면서도 회원 수나 경기 회수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종목이기도 하다.- 회장으로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 파크골프가 특히 나이 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운동이다. 정부에서 경로당에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파크골프에도 관심을 더 가져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지금 골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나 골프장이 충족시켜주지 못해 이곳은 2부제로, 심지어 수성구와 북구의 경우 수요를 감당 못해 4부제로 골프장을 운영해야 할 지경이다. 시내 근교에 더 많은 파크골프장을 만들어 시민 건강도 살피고 도시 환경도 정비했으면 좋겠다.- 약사로 대구시 약사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 대구시약사회 자문위원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당시 약사들은 어떤 역할을 했나.△코로나19 발발 초기 대구에서 확진자가 대량 발생하자 마스크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마스크를 구하려는 시민들의 긴 행렬에 대구시 약사회는 마스크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 지역 도매상과 협력하여 물량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시민들이 불만을 약사들에게 토로하고 그 불평이 약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보건의료인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위해 많은 약사들이 희생을 감수했다. 시내 1200여 약국이 코로나에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공적마스크 취급처로 참여하여 방역 최전선에서 안정적으로 마스크를 공급했다. 또 공적마스크 시행이 종료될 때까지 매주 주말과 공휴일까지 최소 100개에서 많게는 300개 약국이 휴일지킴이 약국으로 근무하며 마스크의 안정적 공급에 최선을 다했다. 이처럼 약사들의 적극적인 코로나 방역 참여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계속됐다.- 대구시 약사회장 시절 파란이 많았다. 특히 약사들의 한약 취급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됐다.△ 약사들의 한약 취급문제를 두고 한의사 단체와 집단으로 충돌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한약 붐이 일었고 한약 취급에서 과학적 조제를 주장하는 약사와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한의사간 다툼이 시민들에게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졌다. 약사의 한약 조제 투쟁을 벌이면서 대구시내 약국들이 파업으로 맞섰다. 그러자 당국은 약사회장을 주동자로 규정했고 나는 검찰에 불려 들어가 24시간 구금당했다가 각계의 구명 운동으로 추석을 앞두고 석방됐다.결국 시험을 통해 합격한 약사만 한약을 취급할 수 있도록 하면서 사태가 해결됐으나 이후 한약 붐이 식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약사와 한의사가 모두 손해를 본 것이다. 서로가 상생하는 방법을 찾았더라면 한약 붐이 이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윈 윈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의약분업 시행 22년이 지났다. 김 회장이 약사회장이던 시절에 비해 약국의 수입 면에서나 약사들의 사회적 위치에 있어서 변화가 있는 것 같다.△예전에는 지역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약국이 들어섰다. 그런 유명세가 지금은 밀려나고 있다. 지금 가장 목 좋은 곳에는 커피숍이나 카페가 들어서 있지 않나. 이와 함께 경영이 어려운 약국들도 많다. 그렇지만 정년이 없는 면허업이라는 장점이 대학 입시에서 약대의 인기가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지금 전국적으로 수많은 요양병원들이 들어서서 약사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 약사들은 사회적으로도 보건 복지 분야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서 활약하고 있다.- 의사들의 처방전 발행에서 제품명 처방 아닌 성분명 처방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환자들의 복약편의를 위해서도 성분명 처방이 바람직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초기 방역 당국에서 백신 접종 후 발열시 ‘타이레놀’을 복용하라고 지침을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타이레놀 외에도 게보린 사리돈 같은 진통제도 있고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인 낙센이나 아스피린 탁센 등 대체의약품도 있는데 구태여 특정 제품명을 이야기해서 시중에 타이레놀 품귀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의사들이 성분명 처방을 하면 환자들도 약을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고 보험공단의 재정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의약분업 초기부터 주장해 온 성분명 조제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편의점에서 일반의약품을 판매하는 문제는 어떻게 되나. 확대하는 것이 시민편의를 위해 바람직한 것 아닌가.△갑자기 열이 나거나 가벼운 증상에서 긴급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의약품이 편의점에서 일부 판매되고 있다.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약사법으로 정한 안전상비의약품으로 해열진통제 5종, 감기약 2종, 소화제 4종, 파스 2종 등 13종이다. 이런 약들은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에서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다.그런데 일부에서는 시민 편의를 위해 이런 일반의약품의 종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사회에서는 편의점 판매 확대에 대해 반대한다. 의약품의 관리 문제 뿐 아니라 약의 오남용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약에 따라 복약 지도가 필요하며 국민 보건과 국민 불신 해소를 위해서도 편의점의 일반약품판매 확대는 반대다. 일부 시민들이 주장하는 취약시간대의 의약품 판매는 공공 심야약국 도입으로 안정성과 공공성을 충족시키고 있다.- 대구시 약사회에서 처음 시도한 심야약국은 현재 잘 운영되고 있나.△대구에서 처음 시도한 심야약국 제도는 대구시민들의 편의 증진이라는 전폭적지지 속에 현재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운영되고 있다. 이와 함께 대구시 약사회는 구군별로 365약국도 운영중이다. 이들 약국은 연중무휴로 운영하면서 시민 건강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이런 약국들이 운영되고 있어 일반의약품의 편의점 확대 판매도 재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의약품의 인터넷 판매나 비대면 진료에 따른 약 배달 판매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비대면 진료에 따른 조제약 배달은 의약품의 오남용과 무분별한 사용을 유발할 우려가 높다. 전문의약품은 취급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특히 환자 본인에게 직접 전달해야 하는데 배달이나 인터넷 판매는 이를 확인할 수 없고 변질 등의 우려도 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약사회는 비대면 투약과 의약품 배송에 반대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겠나.△인생은 경제활동 일선에서 물러나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인 65세부터 75세까지가 가장 좋은 황금기라며 이 때 삶의 질을 높여주는 생활체육으로 파크골프가 최고라고 추천한다. 파크골프는 골프처럼 요란하거나 절차가 까다롭지 않아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파크골프도 골프처럼 매너를 지키면서 해야 하는 운동이다. 골퍼들이 동반자를 구하지 못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파크골프장을 많이 찾고 있다. 그런데 파크골프는 거리나 상황에 따라 클럽을 바꿔 플레이하는 골프와 달리 1개의 클럽으로 운동해야 하는데 골퍼들이 풀 스윙을 해서 안전사고가 더러 발생하기도 한다. 매너를 지키면서 운동했으면 좋겠다. □ 김광기(金光紀) 대구파크골프협회회장·전 대구시약사회장대구출신. 계성고, 영남대 약대.대구시 북구 약사회장, 대구시북구 약사 새마을금고 초대이사장. 북대구JC회장, 팔공환경복지연구소장.대구시약사회 회장. 대한약사회 부회장. 한국마약퇴치운동분부 대구지부장, 대구시약사회 총회의장.현 대구시약사회 자문위원, 햇살요양병원 약사.지금은 대구시 파크골프 협회 회장으로 운동을 통한 시민 건강 증진에 앞장서고 있지만 대구시 약사회장이 됐을 때는 30년 경영하던 약국을 닫고 회무에 전념했고 그때부터 약사회장이 되면 회무에 집중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10년 전 약국을 완전히 접고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며 취미생활에 빠졌고 엄격한 자기 관리는 약사 후배들의 닮고 싶은 선배가 됐다. 술과 담배 대신 월 1회 먼 산을, 2회 동네 산을 찾는 등산애호가가 됐다. 그 통에 야생화 사진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6-06

열섬 대구를 녹색공원도시로 만든 행동대장

대구는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운 도시다. 날씨만큼은 대구가 전국의 어느 도시에도 양보해 줄 수 없다. 그런 대구가 푸르게, 녹색의 도시로 바뀌었다. 대구의 여름, 팔공산과 비슬산을 비롯해 도시 곳곳의 소공원이나 가로수를 보면 더위를 이겨내려는 대구시민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푸른 대구, 그 주인공은 33년여 대구시청에서 근무하며 가로수를 교체하고 대구수목원을 조성한 이정웅 전 녹지과장이다. 퇴임 후에도 그는 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 대구생명의 숲 이사장 등 시민단체 운동을 통해 푸른 대구 만들기와 지역문화 역사 살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대구를 녹색 도시로 만든 장본인 아닌가.△나는 행동대장이다. 당시 문희갑 대구시장이 식견과 의지가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대구시 공무원으로 시장을 여러분 모셨다. 취임사에서는 모두들 ‘대구를 푸르게 만들겠다’고 했지만 립 서비스에 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돈이 들고 조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희갑 시장은 달랐다. ‘세계적 숲의 도시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또 립 서비스로 끝날 줄 알았다. 경제전문가로만 알았던 문 시장은 도시 녹화에 대한 의지도 강했고 ‘문핏대’로 불릴 만큼 열정도 대단했다. 대구를 녹색 공원도시로 만든 총연출자다.- 대구수목원이 개원 20주년을 맞았다. 수목원을 조성하고 초대 수목원장을 지냈으니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많은 반대와 곡절을 겪으면서 수목원이 개원됐다. 수목원 골짜기마다 내 발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주말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수목원을 누비며 조성했다. 당초 계획과는 달리 일부 일탈도 있지만 연간 200만 명이 찾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가 됐다. 이제 이곳에서 ‘숲속 음악회’ 같은 것도 열렸으면 좋겠다. 또 세미나 같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대구수목원은 인근 도원지의 물을 끌어들여 용수로 확보하고 실개천을 조성해 조경도 살리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서울의 한밭 수목원은 후발주자인데도 대형 유리온실의 열대수목원을 조성, 겨울에도 열대의 삼림을 서비스하고 있다. 대구수목원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 수목원의 조성 당초 컨셉은 어떤 것이었나.△수목원은 공원이 아니다. 국립 광릉수목원이나 사설 천리포수목원 등과는 다른 차별성 있는 수목원으로 조성하려 했다. 대구에 역사적인 약령시가 있지만 정작 한의사들도 한약재는 건재여서 그 약초들의 제 모습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약초들을 모아 약용식물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또 산야의 수많은 야생화들을 옮겨 심어 어떤 야생화라도 대구수목원에 가면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수목원 7만4천평이 시민에 공개되기까지 조성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시민단체와 언론의 반대였다. 1998년 3월 1단계 공사를 발주하자 지역 환경단체에서 기다렸다는 듯 ‘수목원 계획을 전면 취소하라’는 성명서를 냈다. 그들은 “수목원 계획을 검토하고 현장을 답사한 결과 계획의 무모성 무지성 허구성을 발견하고 시 당국이 예산을 낭비하는 데 대해 분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지역의 방송과 신문들이 덩달아 무차별 공격을 해댔다. 심지어 한 방송에서는 없는 매립가스 분출을 연출까지 해가며 조성을 반대했다.환경과 조경 전문가들의 자문과 검토를 거쳐 진행된 공사를 비전문인들이 여론몰이로 공격해일시적으로 화도 났다. 논리적으로 맞받아쳤지만 당시 언론과 맞서서는 이로울 것이 없다는 주변의 권유로 토론회를 거치고 예산 규모를 줄이는 등 일부 수정하면서 수목원을 완성했다. 그러나 엉터리 조작 보도한 방송사와 기자는 반성하지 않았고 끝내 사과 한 번 하지 않고 있다.- 수목원은 처음부터 대곡동에 수목원으로 설계되었나.△지산동에 있던 대구시 양묘사업소가 택지개발로 이전해야 할 처지가 됐다. 대구 전역을 검토하다가 대곡동 쓰레기 매립장 부지를 활용하기로 했다. 양묘사업소를 임업시험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검토 단계에서부터 곡절이 많았다. 당시 박병련 부시장이 찬성하면서 사업이 한 단계 진전했다. 제주시 기획실장 당시 한라수목원을 조성한 경험이 있었던 박 부시장은 이를 벤치마킹하라는 구체적 지시까지 했다.- 양묘사업소 이전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나.△당시 조해녕 시장은 ‘기회비용 검토’라는 조건으로 결재를 미뤘다. 캐비닛 속에 잠자던 계획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났다. 조 시장이 민선시장 출마를 위해 사표를 내기 전에 ‘밀린 결재 가져오라’는 청내방송을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산불감시 등으로 늘 현장에 나가있어야 했는데 마침 그날 청내에서 근무하다가 그 방송을 들었다. 시장 결재는 과장이 가야 하는 선례를 깨고 계장인 내가 직접 서류를 들고 시장실로 들어갔다. 시장에게 “그동안 준비를 철저히 해서 당선돼 오시면 멋진 포지(圃地)를 만들어 놓겠다”고 해서 결재를 받았다. 야생화 전시포, 잔디광장 등과 함께 대구수목원이 대곡동에 들어설 수 있는 양묘사업소 이전계획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조 시장이 낙선하고 실제 공사는 문희갑 초대 민선시장 때 시작됐다.- 나무박사로 알려졌고 이팝나무를 사이버 상 이름으로 쓰고 있다. 특별히 이팝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수목원에서 제일 먼저 심은 나무가 이팝나무다. 수목원을 한창 조성중일 때 달성 유가초등에서 도로확장으로 수령 200년이 넘는 이팝나무를 베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달성군에 공사 중단을 요청하고 2그루를 수목원으로 옮겨 심었는데 한 그루는 수목원 입구에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이팝나무를 대구의 시목으로 지정하자고 주장했다.△대구의 시화 목련은 원산지가 중국이고 꽃은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인 3월에 핀다. 영하의 날씨에 더러 개화도 못하고 낙화하는 꽃을 보면 안쓰럽기도 했다. 대구의 풍토에도 맞지 않아 대구의 상징물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이팝나무는 계절의 여왕인 5월에 핀다. 대구가 원산지라 향토성도 있고 모양도 아름다우며 이식해도 잘 산다. 그래서 시화를 이팝나무로 하자고 제안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대구를 푸르게 만들기 위한 대구시의 특별한 노력은 어떤 것이 있나.△대구시에서 발주하는 공사에서는 수종의 20%를 교목으로 심도록 했고 민간 공사는 10%를 교목으로 심도록 권장했다. 그러면서 이팝나무를 심었다. 앞산 순환도로에도 이팝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한 때 이팝나무 묘목 수요가 늘어났고 뒤늦게 심었던 사람들은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리도 들었다.특히 가로수의 경우 산림청 훈령은 8m마다 1그루씩 심도록 돼 있지만 대구는 시내에서는 6m당 1그루씩 심도록 바꿨다. 또 폭 5m이상 인도와 상가가 없는 곳에는 2줄로 심도록 했다. 30m 이상 도로의 아파트 담장 쪽에도 같은 수종으로 1줄 더 심어서 가로수를 2줄로 만들었다.- 대구의 녹지는 전국 평균보다 넓다. 특히 대구의 가로수는 대프리카 열섬 대구를 식히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대구 가로수 때문에 한전과 많은 갈등을 겪었다. 가로수 전정을 너무 많이 해서 전봇대처럼 흉물스럽게 되니 조경은 물론 그늘 조성 등 가로수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에서는 고압선이 지나 위험하고 태풍에 노출돼 위험하다는 한전과 가로수 전정을 두고 싸움을 벌이다 일본 사례를 찾아봤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고압선이 자나는 경우 1m까지만 자르고 계속 자라면 그때는 한전 몫으로 한다는 조건이었다.또 가로수 수종도 병충해 적고 그늘이 많으며 잘 자라면서 수형도 아름다운 느티나무로 많이 바꿨다.- 대구시가 금호강의 하중도를 개발하려 한다.△하중도 개발은 찬성이다. 강수가 범람하면 침수하는 지역으로 건물은 지을 수 없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태종 이방원의 처남 민무질이 대구에 유배 와서 11개월 정도 머문 적이 있다고 한다, 명시하진 않았지만 ‘섬’이었다고 하니 하중도일 수도 있고 그 후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도 첨가해서 하중도를 개발하고 시민이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계절별 꽃밭을 꾸미는 등 활용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시가지 조경에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시가지에 조성하는 가로변 정원 등에 심는 화초가 메리골드 팬지 데이지 외래종이 대부분이다. 우리 꽃도 예쁘고 아름다운 꽃들이 많다. 특히 그 이름도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활용했으면 좋겠다.대구으아리, 세뿔투구꽃 같은 야생화는 대구에서 발견돼 그 이름이 지어진 것들이다. 화원동산이나 봉무동에 자생하는 모감주나무는 대구서만 발견됐다. 이런 소중한 자산들은 교육에도 활용할 수 있고 시민의 자긍심도 높이게 될 것으로 본다.- 퇴직 후에도 대구를 푸르게 가꾸기 위한 녹화 사업과 향토사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시절 북구 사수동에 ‘한강공원’을 조성했다. 한강 정구는 72세에 사수에 와서 7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저술활동을 한 유학의 대유학자다.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장 시절 사수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학부모들이 ‘재수도 싫은데 4수가 뭐냐’며 학교 이름을 강산초등으로 바꿔 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수(泗水)는 공자가 태어난 곡부의 강 이름이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것은 공자 같은 인격체를 키우는 것”이라 설득해서 이름을 지켜냈다.칠곡은 조선 후기 도호부로 대구 도호부와 세를 겨뤘다. 역사적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칠곡의 역사와 문화유산, 함지산 사람들 등 저서는 역사적 근거를 찾아낸 기록이다. 최근 칠곡도호부 관아 복원 운동을 펴고 있다. 소설가 이태원을 기리는 이태원길도 칠곡 문화유산 찾기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대구 생명의 숲 운동에 몰두 하고 있다. 어떤 단체인가. 어려움은 없나.△자연과 이웃과 나무를 사랑하는 모임이다. 나무를 심고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시민들에게 해설해준다. 대구를 녹색으로 만드는 일에서 대구시가 놓치는 부분을 민간에서 보완하고 있다. 시민 정서를 순화하고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시대에 숲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회원 200여 명의 회비로 활동하는 데 아직은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기업의 기여도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오늘 같은 여름날, 대구의 가로수 길을 걸으면 어떤 생각이 나나.△녹지과장(서기관)으로 퇴직했으니 공무원으로서는 소위 출세(?)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환경 시민단체의 반대와 언론의 부정적 보도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대표적 혐오시설인 쓰레기매립장에 수목원을 조성하는 일을 마무리해서 오늘날 대구의 새로운 명소가 되게 한 것은 보람이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이경우 편집위원 □ 이정웅(李貞雄) 대구 생명의 숲 대표·전 대구시 녹지과장의성 단밀. 상주농잠고.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계명대 정책개발대학원 행정학 석사.대구시 산림계장, 녹지계장, 임업시험장장, 녹지과장.대구가톨릭대 조경학과 겸임교수.대구시 문우회장, 대구시 도시경관자문위원, 도시디자인위원, 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장 등 역임.현 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 대구 생명의 숲 이사장. 대구시 녹색성장위원회 위원, 수성문화원 향토사 연구소 연구위원.저서 ‘며느리밥풀꽃’(시집), ‘팔공산을 아십니까’ ‘나의 사랑, 나의 자랑 대구’, ‘ 푸른 대구 이야기’, ‘나무, 인문학으로 읽다’, ‘대구가 자랑스러운 12가지 이유’ 등.고교 졸업 후 농촌지도소에 잠시 근무하다 군 제대 후 1969년 대구시 공채로 농림직으로 공직에 들어온 뒤 임업직으로 2003년 퇴직할 때 까지 대구 녹색화에 앞장섰다. 직원들을 격려해서 행정직이 맡았던 과장(서기관) 자리를 임업직이 차지하고 임업직 사무관 자리도 늘리는 등 조직관리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문희갑 시장 시절 기술직의 편견을 업무를 통해 인정받게 된 것을 ‘고기가 물을 만났다’고 표현한다.

2022-05-30

로봇을 대구 미래산업으로 끌어올린 한국의 로봇 대통령

4차 산업혁명시대, 기술 융합의 최종 결론은 로봇이다.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이나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일본의 아베 전 총리 등 세계의 지도자들이 모두 로봇을 활용해 경제를 부흥하겠다고 선언했다. AI(인공지능)와 IoT(사물인터넷), 5G 등 첨단 기술이 융합된 로봇이 농업에서부터 의료와 국방 등 전 산업에서 혁명적 발전을 이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런 세계적 추세에 우리나라도 동참한 결과가 대구의 로봇산업 기반조성이다.문전일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부총장은 로봇을 대구의 미래 산업으로 굳힌 주인공이다. 그는 대구의 자동차 부품 산업도 기계 중심에서 소프트웨어와 전자 중심으로 개편돼야 하며 미래는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DGIST(디지스트.대구경북과학기술원) 연구부총장 겸 융합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DGIST와 지역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고 있나.△대학은 지역에 봉사하고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교육시키지만 강제로 지역 기업에 배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신 교원들의 연구 성과를 기업 매출에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 상용화로 기여하고 있다. 대학의 연구 결과를 지역 기업이 활용하면 연구원으로서는 그만큼 지역에 기여하는 것이 된다.그동안 경북대 등에 의존하던 대구시의 많은 사업들을 디지스트가 떠맡게 된 것이 변화일 것이다. 특히 대구가 물과 의료 미래형자동차 에너지 등과 함께 로봇산업을 대구의 신산업으로 설정한 것은 디지스트의 적극적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앞으로 대구경북통합신공항이 열리고 주위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디지스트가 경북도와의 협력도 확대해 나갈 것이다.- 디지스트의 연구본부장 시절 2020년까지 국가 최고수준의 기술사업화와 상용화를 실현하겠다고 했다.△한국 이공계 대학 평가에서 5년 연속 특허출원 1위(2017 ~2021)를 기록했다. 특허는 차별화된 기술사업화와 상용화 실현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만큼 전방위적으로 창업 및 육성 지원을 통해 전국 대학중 상위권 성과를 내고 있다. 또 2018년 대구지역 대학 최초로 기술이전 수입 연 20억원을 달성했다. 누적 기술이전 수입금과 건수의 60% 이상이 지역 기업을 대상으로 했다. 지역기업의 기술 상용화와 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것이다.- 로봇공학자로서 지난해까지 한국로봇산업진흥원장을 맡으셨다. 로봇산업의 세계적 추세와 전망을 어떻게 보나.△선진 강국 대부분 국가들이 로봇을 활용한 제조혁신을 선언하고 이를 통해서 경제부흥을 이루고자 정책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국내외 선도 기업들도 로봇 부문을 신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추세다.- 우리나라가 세계4대 로봇 강국이 되겠다고 했다. 우리나라 로봇 산업의 현황과 세계 속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우리나라의 로봇 산업 생산 규모로는 5위 수준이다. 생산으로는 미국 일본 독일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다. 로봇 산업의 매출은 10조원 규모이지만 생산액으로는 7조원 정도다. 인구 1만명당 로봇 사용대수는 1~2위를 다툰다.우리나라가 4대 강국이 되려면 미국을 뛰어넘어야 한다. 가치 사슬 측면에서 보면 후방산업인 소재 부품 등은 일본과 독일이 앞서 있고 미국은 기술 분야, 즉 서비스를 위한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선도하고 있다. 로봇을 활용한 전방산업(로봇 시스템, 로봇 서비스 등)을 선점해 나가면서 소프트웨어 솔루션 같은 후방산업과 로봇 제품의 경쟁력을 확보해 가는 전략을 병행해 나가야 한다.- 최근 LG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KT 등 대기업들이 신사업으로 로봇 사업에 본격 가세하고 있다.△결국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매출은 줄어들지만 기업 가치는 올라가고 있다. 로봇 신산업에 대한 기업의 관심을 시장이 인정한 것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 연계해서 기업의 보유 역량을 기반으로 한 사업다각화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혁신기술과 융합시너지를 통해 기업 가치를 제고하려는 것이다. 또 기업으로서는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고 정부 정책과 연계해서 미래먹거리를 준비하려는 것이다.코로나19 팬데믹으로 비대면 서비스가 확산되고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맞으면서 기업 환경이 변화하는 데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것이 로봇산업 진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류로봇이나 돌봄로봇, 웨어러블 로봇의 확산 보급 움직임은 이런 배경을 두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업의 움직임이다.- 대구가 로봇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게 됐다.△대통령이 참석한 유일한 로봇 산업 행사가 대구에서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로봇산업육성전략’ 발표회에 참석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대구가 로봇 산업의 심장이라고 추켜세우고 로봇산업이 대구의 미래 신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지역의 로봇산업 사업체수와 생산규모는 전국의 33% 수준(2020년 기준)이다. 수도권(52%)을 제외하면 최대 규모다. 사업체 구성은 산업용로봇 208개, 로봇 부품과 소프트웨어 427개, 로봇시스템 201개, 로봇서비스 477개, 서비스용 로봇 106개 등이다.- 대구가 로봇산업의 심장으로 인정받는 기반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대구지역의 로봇 산업은 지난 10년 동안 인프라를 비롯한 산업 생태계가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왔다. 2010년 한국로봇산업진흥원이 대구에 들어섰다. 이어 2012년부터 2017년 로봇 클러스터 구축사업이 완성됐고 로봇시장 창출과 로봇가치사슬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2020년에는 로봇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됐고 지난해에는 ‘국가로봇테스트필드’를 대구 테크노파크에 유치해 내년부터 2029년까지 본격적으로 로봇 테스트필드 구축사업을 펼 수 있게 됐다.- 지난해 대구가 유치한 로봇테스트필드는 어떤 의미가 있나.△로봇 산업으로서는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전국 6대도시가 경쟁했고 특히 서울시가 비싼 땅을 제공해가며 상당히 노력을 했는데 대구가 유치에 성공했다. 대구가 로봇산업 중심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근거가 또 하나 마련된 것이다. 한국로봇산업진흥원장으로 재직 당시 로봇 테스트필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대구가 유치할 수 있는 기반을 상당부분 닦았다. 그리고 DGIST 차원에서 유치를 적극 지원했다.- 로봇 테스트필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나.△기업이나 창업자들이 새로운 로봇을 개발하면 그 로봇을 활용하기 위한 테스트 시스템이 필요하다. 설거지 로봇이 개발되면 로봇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디에 적용할 것인지를 시험하기 위한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택배를 위한 배달 로봇은 아파트 경비실까지 배달된 물건을 개별 세대 문 앞까지 배달해 주는 서비스 환경의 구축이 필요하다.또 로봇 테스트필드를 계기로 장차 로봇 서비스 경진대회를 대구에서 개최해야 한다. 또 로봇산업 창업 경진대회를 대구에서 열어 로봇산업의 실질적 중심 기능을 맡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전국에서 참여 기업과 관계자들이 대구의 로봇 테스트필드를 이용하기 위해 대구를 찾게 되고 체류를 위한 숙박과 편의시설의 확장 보급도 뒤따를 것이다.- 로봇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야 산업이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규제가 있나.△로봇이 움직이면서 안전 문제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로봇이 할 수 없게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는 문제, 횡단보도를 건너는 문제 등 제한된 규제를 풀어야 한다. 대구는 로봇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됐다. 외팔 달린 모바일 로봇이 안전 문제와 관련 없이 대구 전역에서 서비스 실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대한의료로봇학회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의료로봇의 진화 현황과 추세,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하나.△의료로봇은 수술과 재활 등 활용과정에서 안전성이 검증돼야 하고 시험과 평가, 임상시험 등 식약처의 인허가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나는 지난 10년동안 의료로봇의 국제 표준화를 위한 한국대표로 활동하면서 의료로봇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꿰고 있다.대한의료로봇학회가 다루고 있는 로봇의 영역은 재활과 수술 등 전문서비스용 로봇이다. 현재는 의료분야에 로봇 활용을 확산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산업부와 식약처를 중심으로 의료로봇의 안전성과 효과성 확보, 그리고 법과 규제 개선 등 이슈들을 풀어나가고 있는 단계다. 재활로봇을 이용하여 재활치료를 할 때 적정 보험수가를 산정하기 위해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들과 지속적으로 논의중이며 일부 재활치료에 대해서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지만 보험수가가 점차 현실화 돼가고 있다.한국 의료계가 보수적이고 브랜드를 좋아한다. 국산 의료용 로봇이 가격이 3분의 1 정도이지만 구태여 미국이나 독일제 의료기기를 들여놓고는 병원에 커다랗게 현수막을 붙여 자랑한다. 의료보험도 되지 않으니 환자들이 손해를 보는 셈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것이다.- 우리나라 로봇 산업의 문제점과 해결책은 무엇인가.△로봇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고 있다. 중국산보다 성능과 내구성은 우위에 있으나 가격경쟁력이 약하다. 유럽산과 일본산에 비해서는 전반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편이다.또 소재와 부품, 소프트웨어 플랫폼과 모듈 등 로봇 후방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편이다.로봇을 활용한 시스템 구축과 운영, 서비스별로 로봇을 활용한 비즈니스 모델 발굴과 구축 등 전방산업 선점에 집중하면서 후방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노력도 함께 해서 해결해야 한다. 국무총리실이 중심이 되어 신산업 규제혁신을 주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로봇산업 규제혁신 로드맵’을 수립해서 추진중이다. 규제 개선과 로봇을 활용한 서비스 활성화를 통해 로봇산업 육성뿐 아니라 서비스산업 활성화에도 기여해 나가야 한다.- 로봇 대통령이라 불렸다고 하더라. 대구와의 인연과 대구의 미래 산업에 대해서도 조언해 달라.△평생을 로봇 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대기업(LG산전)에 있을 때는 ‘돈 되지 않는 연구에 투자만 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동안 10여 종의 산업용 로봇을 개발해서 상품화했다. 대학에서 로봇학과를 만들고 가르쳤다. 그러다가 2010년 당시 DGIST 이인선 원장의 간곡한 삼고초려에 이끌려 대구에 왔다. 로봇학과를 만들고 로봇 관련 연구조직을 만들고 로봇을 DGIST의 핵심 프로젝트로 만들고 대구의 미래산업으로 끌어올렸다.한국로봇산업연구원장 시절 해외에 나가서는 원장을 President라 하니 한국의 로봇 대통령이라 불린 것이고 그것이 별명이 됐다.로봇을 대구의 미래 산업으로 기반을 만든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자동차 부품도시라지만 사실 자동차는 전자와 소프트웨어 산업이다. 더 이상 기계산업이 아니다. 대구는 그 기로에 있다. 중소기업 중심의 대구 자동차 부품 산업은 자율차와 전기 수소차로 이행하면서 산업구조가 개편돼야 한다. 로봇 산업은 그야말로 미래 산업이다.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면서 도시와 산업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문전일(文全一) DGIST 연구부총장 겸 융합연구원장제주 오현고. 서울대 기계설계학, 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과 (로봇제어)석사, 미 시라큐스대학 기계항공공학과(지능제어)박사.LS산전(구 LG) 중앙연구소장, 임원. 호서대학교 로봇공학과 교수.DGIST연구본부장, 연구부총장, 융합연구원장. 로봇공학전공 교수 겸임.한국로봇산업진흥원 원장(2018 ~2021),현 식품의약품안전처 의료기기위원회 전문가. 대한의료로봇학회 차기회장(2023~ ). 한국공학한림원 회원.1984년 석사과정 논문부터 로봇관련 연구를 시작해서 38년째 로봇관련 산·학·연·관을 두루 경험한 한국 로봇계의 대부.2011년부터 지금까지 DGIST와 한국로봇산업진흥원에서 대구의 로봇산업 기반을 조성하고 로봇 산업을 대구의 미래 산업으로 구축한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로봇관련 개발 기술의 상용화와 상품화가 소신이며 기술을 응용한 로봇기업 창업 육성에도 적극 역할하고 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5-23

“나무처럼 땅과 상생 공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길은 처음부터 길이 아니었다. 사람이 다녀서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들어 가야 한다. 여기서 개체적 생명, 인간의 자유 의지가 가능해지고 자유로운 인간이 탄생하게 된다. 양명학의 정신이다.‘세상의 모든 이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은 그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태어난 것이 양명학이다. 양명학자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는 동양철학을 연구하면서도 저술활동과 시, 그림, 기고, 강연 등 활동에 영역이 따로 없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이스인 조르바가 환생한 듯, 그의 생도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하며 전위적이며 분방하다. 인간의 삶은 지구를 떠나 존재할 수 없으니 나무처럼 땅에 기대어 우주와 교감해야 한다는 식물성 사유를 주창한다. - 일찍 대학교수가 됐고 평생 직업이 됐으니 꽃길을 걸어온 것 같다. 그런데 글은 도발적이고 반시대적 불평과 ‘시니컬’하면서 패러독스로 무장한 듯 농담조에 때로는 낙천적이어서 종잡을 수가 없다.△내가 삐딱하고 허접해 보이는 것은 유아기 모성결핍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쓴 일기를 보니 젖이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더라. 그래서 모성이 결핍됐을 것이고 자연인으로서 스스로 결핍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91년 29살의 나이로 교수(전임강사)가 됐고 40살도 전에 교수가 됐다. 그러니 자연 ‘안티’가 많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유림의 본산이기도 한 영남에서 이단으로 치부되는 양명학을 전공한 것도 이유가 될 것 같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였고 양명학은 정통 주자학에 반하는 ‘마이너’였다.- 30여 년 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많은 작업을 했다. 지금 하고 있는 강의나 저작활동은 어떤게 있나.△명품강의 반열에 오른 스무살의 인문학을 비롯, 인간관계와 철학, 노자와 인문학 등 6개 강좌에 17시간 강의가 있고 대학원 수업과 외부강의, 교수신문과 다수 일간지 정기 및 비정기 기고와 칼럼, 방송 출연 등으로 일과가 짜여졌다. 그런 중에도 시작과 그림을 그리고 주말이면 농장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 키만큼 책을 쓰겠다고 작정했더니 고려대 김언중 교수가 나를 ‘등신(等身)교수’라고 했다. 뜻을 풀어보니 불쾌해 할 수도 없었다. 쓰다가 죽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교수신문에 연거푸 올해의 사자성어에 선정되는 실력을 발휘했다.△양식있는 시민으로서 정치권에, 사회에 쓴소리를 한 것이 먹혀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이후인 2017년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문재인 정권의 2019년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공동운명체 공명지조(共命之鳥)를, 조국 사건이 불거진 뒤인 2020년에는 내로남불을 지적하는 아시타비(我是他非), 지난해에는 고양이가 잡아야 할 쥐와 같이 살아간다는 묘서동처(猫鼠同處)를 이야기했다. 모두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을 지식인의 눈으로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는 최 교수를 진보나 좌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동의하나.△ 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 한 적 없다. 나대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어정쩡하게 살아왔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이념적으로도 중도에서 좌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좌도 아니다. 내 양심대로, 교수의 양식대로 살아왔다. 내게 이념과 친소관계는 다르게 작용한다. 태극기 부대를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인문학의 포용력이다. 마찬가지로 시인 서정주의 친일과 그의 작품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불편했던 적은 없었나.△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를 초청해서 특강을 하고 난 뒤 국정원에서 찾아와 “박근혜 대통령 시대를 어떻게 비판할 수가 있나”하고 추궁조로 물었다. 나는 “대학은 좌도 우도 없고 독도를 지키는 데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더구나 독도를 지키는 데는 저런 분이 필요하다”고 되레 꾸짖었다. 5공 6공 시대도 아닌 지금 어떻게 국정원이 대학 강의를 트집 잡는지 불쾌했다.아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으로 불러가면서 강의한 것 때문이라 생각한다.한번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총장실에 갔더니 당시 총장님이 “교수가 복장이 그게 뭐냐?”고 하더라. 마침 함께 간 카이스트의 뇌 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최 교수가 연구하는 양명학은 어떤 학문인가.△16세기 중국 명나라의 왕양명이 제창했던 학문이다. 당시로서는 보편적 주류였던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자기의 독창적 사상을 펼쳤던 것이 양명학이다. 주자학은 ‘세상의 모든 이치는 이미 있다. 불변하는 이치가 모든 사물의 근저에 있다’고 했다. 이런 이치[理]의 선험성에 대해 왕양명은 ‘그런 것은 없다. 결국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며 반론을 폈다.모든 이치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이 만들어 가면 그것이 이치가 된다는 주장이다. 심즉리(心卽理)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길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된다. 잘못되면 바꾸면 된다’ 이런 식의 이야기다.- 그러면서 영남퇴계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아이러니 아닌가.△역설적이기도 하다. 영남이 그만큼 개방됐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철학자로서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린다. 일찍이 등단했고 시집도 여러 권 냈다.△철학은 추론하고 논리적이지만 철학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감성적 작업을 통해 풀어나간다. 이 작업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나는 소외된 존재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혼의 결핍, 소외감 같은 것을 해소하는 창구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나는 이념적으로 좌도 우도 아니다. 나는 특정 이념이나 논리나 이슈 같은 것에는 동조하지 않는다.어릴 때부터 시를 쓰고 소설도 썼다. 중고교 이후 집중적으로 시를 썼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마 철학을 하지 않았다면 시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이었다가 철학자가 됐다는 말이 맞는다. 지금은 철학에 더 신경을 쓰고 시가 소외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철학의 문제나 내용에서 보면 시적 표현이 많이 있다. 결국 내 내면에는 시와 철학이 동거하며 상생적으로 작업을 일궈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한다. 인문학자로서 어떻게 해석하고 또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지금까지 인문학이 위기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의 위기’이며 ‘인문학적 방법론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을 다루는 주체인 인문학자가 시대를 캐치해내고 선도해가기 위해서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시대를 성찰하고 반성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지금 인문학자들의 사고는 너무 분화됐고 오로지 자기 영역에만 몰두하고 다른 영역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온 말이 융복합이다. 융복합적이란 말은 방법론적인 것인데 이마저도 분과학문의 하나로 자리 잡는 듯해 좀 못마땅하다.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우선 인문학자 개개인의 자각과 성찰, 노력에 기반한 창의성과 독창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다음 국가와 대학 자체의 제도적 뒷받침이 지속돼야 할 것이다. 인문학을 공공적인 것으로 보고 공동선을 위해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돈이 되거나 안 되거나 관계없이 ‘인간다움’을 위한 공동의 방향에서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철학과 교수로서 독도연구소를 맡고 있다.△10년 이상 독도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다. 일본에서 공부했고 일본어를 할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 동아시아 근세 근대사상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독도 문제는 대한민국의 영토 문제이고 평화와 연관된 문제다. 우리 영토에 대한 정확한 학습과 교육의 문제는 인문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또 국가 간의 평화라는 것은 윤리적 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독도에는 역사적 국제법적 외교적 정치적 등의 문제가 맞물려 있어 좀 복잡하다. 역사 속에 이루어진 문제이기 때문에 다루어야 할 고문서 등 자료들이 많다. 거기에다 섬으로서 자연 생태 지질학적 해양적인 문제도 껴안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라서 대륙과 해양 두 방면에서 접해야 할 문화적 외교적 문제를 늘 안고 있다.- 앞으로 인문학은 어떻게 진전될 것으로 보나. 또 최 교수는 앞으로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나무를 좋아하고 식물성 사유에 대해 구상중이다. 대지의 철학, 지구의 철학으로 식물성 사고에 대해 천착할 예정이다. 이미 동양의 철학 사상에는 이런 요소들이 풍부하다. 식물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우주와 교감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지구를 떠날 수 없다. 나무처럼 대지의 정치를 해야 한다. 지구와 대지를 새롭게 바라보고 상생 공존하는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 그 속에서 인간의 위치와 의미를 묻는 것이 인문학의 큰 흐름이 될 것으로 본다. 자꾸 지구를, 땅을 벗어나고 배반하는 삶을 살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고뇌와 번민이 자라는 것이다.- 생명철학은 최근 타계한 김지하 시인이 주창하기도 했다.△신문사 주간으로 당시 김지하 시인과 생명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가 고문으로 일그러진 몸뚱이를 부르르 떨면서 “내가 감옥에 있던 당시 너는 어디에 있었어?”라고 꾸짖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무도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궈야 했다. 운동권에서도 그 열매만 챙기는 세력들이 따로 있음을 일갈했던 것이다. 고인이 된 김 시인을 생각하면 그 장면부터 떠오른다.- 성과 인문학이라는 다소 엉뚱한 책을 쓰기도 했다.△엉뚱하게 보이겠지만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다. 한국의 성 문화는 보수적이고 경직돼 있다. 역설적으로 병리적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이 땅의 진보는 진부(陳腐)가 되었다. 모두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책을 구상했고 썼다. 해원상생(解51A4相生)해야 한다. 마광수를 포용할 수 없는 진보와 지성은 이미 죽은 사회다. 그런 사회는 비정상의 사회이고 미투(Me too) 같은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쩔래’라는 시집을 냈다. 앞으로도 나대로 살아갈 것인지, 계획 같은 것은 있나.△나 스스로의 매력이라면 ‘촌스러움’이라 생각한다. 농촌에서 태어났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발터 벤야민처럼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호기심 많게 사는 존재일 것이다. 운명에 사로잡히거나 굴복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뭘 해보려고 하는 그런 정신, 그것도 촌스러움이라 본다. 그래서 호도 돌돌(乭乭) 돌구 이런 것이다. 시냇가 어디에나 있는 돌처럼 촌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 최재목(崔在穆) 영남대 철학과 교수상주출생. 대륜고. 영남대 철학과 졸, 일 츠쿠바대 문학석사, 문학박사(철학사상 전공) 양명학 자. 시인. 저술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과 한국양명학회 회장, 영남대 도서관장과 신문방송사 주간 등을 역임했다.현 영남대 독도연구소장, 퇴계학연구원장.하버드대와 도쿄대 베이징대 등에서 객원연구원으로, 네덜란드 라이던대에서 방문학자로, 중 절강이공대 객원교수를 지냈다.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 등 8권의 시집과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의 도덕경’ 등 35권의 저서를 냈고 앞으로 출간할 도서목록까지 작성해 뒀다.스스로를 결핍된 존재로 규정짓고 하는 일은 허접하다면서도 늘 저지르고 주목을 받으려 노력하는 아방가르드적 자유인.“나는 아나키스트가 되고 싶다. 모든 억압된 체제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자연과 자치를 모토로 살아가려 한다. 나는 자유를 존중하고 생명주의자이다.”/편집위원 이경우

2022-05-16

영남의 힘 시대정신,근원은 역사자료에서

기록의 민족답게 무궁무진하다. 외침으로 기근으로 피폐해진 일상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보고 듣고 겪은 세상사를 종이에 또 목판에 새겨 놓았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지금까지 수집 보관하고 있는 자료만도 고서 18만4천여 점, 고문서 32만4천여 점, 목판 6만6천여 점, 서화 5천500여 점, 현판 1천300여 점 등 58만5천여 점에 이른다.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이 방대한 자료에 담긴 정보와 가치들을 찾아내고 활용 가공해서 우리 삶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문화유산 보고로서의 대구 경북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은 물론 지역 정신의 정체성 확립에도 기여하겠다고 했다. - 한국국학진흥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지 1년이 지났다. 주위에서는 아주 적성을 찾아 잘 왔다고 한다.△학자로서 자기 자리에 온 것 같다. 평생을 학자로 살아왔는데, 현실정치에서 못 이룬 꿈을 이제 후배들이 이룰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국학원 자료가 방대하다. 수장고에서 평생 햇빛을 못 볼 수도 있는 작품들을 꺼내어 해석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하려면 언제쯤 가능할까.△지금까지의 자료들이 주로 관(官) 중심의 역사인데 진흥원 자료는 현장의 역사와 일기 같은 개인의 소상한 기록들이다. 대학교수에서부터 전문가들이 번역을 지원해주고 있지만 지금의 속도로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다행히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예산 증액을 약속했고 안동시와 경주시가 시 차원에서 협력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군에서도 참여하면 시간이 당겨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시대, 국학 자료도 디지털화는 어떻게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나.△국학진흥원이 보관하고 있는 58만여 점의 자료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료에 담긴 방대한 정보와 엄청난 가치들이 우리 삶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해 진흥원의 자료 58만점을 국학분야의 인공지능 자동번역시스템 구축 사업을 통해 올해부터 2030년까지 9년간 단계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국학진흥원은 자료의 가치 있는 활용을 위해 우선 고서와 고문서를 스캔해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를 위해 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또 자료에 담겨 있는 다양한 스토리를 발굴, 문화콘텐츠의 원천 소스로도 제공하고 있다.- 국학진흥원 자료를 활용한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성과가 대단하다고 한다.△현재 진행하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자료들을 이용하고 있는 대표적 케이스다. 2009년 대구 경북의 30명으로 시작한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지금까지 연인원 5천명이 교육을 받았고 현재 3천500여명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유치원생과 대화를 통해 선조들의 지혜를 교육을 하고 있다.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는 선조들의 지혜를 통해 인성을 길러주고, 참여하는 어르신들에게는 일거리와 자아실현을 통한 삶의 질을 높여주는 상생 사업이기도 하다. 이야기할머니는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발하는데 은퇴한 교수나 교장 출신들이 몰려들어 최고 기록이 50대 1을 넘기도 한다.- 정종섭 원장이 부임하고 지난해 7월 한국국학진흥원의 변화와 혁신을 위한 ‘국학 30비전’을 선포했다.△‘새 시대를 열어가는 문화 콘텐츠 개발에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관으로 성장하겠다’는 포부와 함께 계승 전문 향유 상생 책임의 기관 핵심가치와 5대 경영목표를 혁신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원동력을 발표했다.국학 30비전이란 “Culture, Future, Picture · 문화로 미래를 그리다”는 슬로건이다.문화는 국학 자료의 연구를 통한 한국문화의 새로운 원형을 창출하고, 미래는 국학 자료의 보급과 활용으로 미래를 선도하며 한국적 가치를 교육을 통해 문화국가 실현에 이바지한다는 거창한 비전이다.- 국학진흥원의 현안은 무엇인가.△지금까지는 자료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면 앞으로는 이들 자료를 활용해 그 결과물을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소장자료 중 가치가 높은 것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비롯해 국가문화재에 등재시킴으로써 경북의 문화적 위상을 제고하겠다.유교책판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고 국보 징비록을 비롯해 전체 자료의 12% 정도를 문화재로 지정시킨 경험을 갖고 있다.- 국학진흥원의 30비전을 보니 정 원장의 행정자치부 장관 시절 추진한 국가대개조론이 연상된다.△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는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 위기 상황이었다. 나는 김영삼 정부 시절 30대 학자로서 국가설계를 한 적이 있다. 장관 취임 이후 정치 사회 경제 정부 전 분야의 대개조를 통해 정상적인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자 했다. 그러나 뜻대로 안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치인이 됐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정책을 지지해주지 않았나.△박 대통령은 국가 개조에 대한 소신이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안다. 4대 공공개혁은 시대적 소명이었지만 정치적인 고려를 한다면 결코 추진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단하게 결심을 했다. 강성 개혁론자인 나를 불러냈고 나도 소신대로 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하는 결실은 끝내 얻지 못했다.-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학자로서의 이론이 현실 정치와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학자는 이론적 근거만으로 주장하고 비판하지만 실제 자기실현까지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정치인이 돼 현실에 적용하려니 정부 모든 부처가 생각을 같이 해야 하고 공무원들이 인식을 같이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 때 대통령제의 개헌 필요성이 나오기도 했다.△나는 옛날부터 대통령제의 폐단이 심각함을 지적해왔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문민정부는 기대만큼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정상적인 국가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하고 대통령의 의지가 헌법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헌법 위에 있으면 국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국가 기관의 일은 모두 헌법에 규정돼 있는데 권력이 ‘내가 하겠다’고 나서면 법의 지배가 아닌 권력의 지배가 된다.우리는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되라’고 요구하지만 인간에게 호소해서는 실효성이 없다. 물러가는 대통령을 향해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남은 국민은 뭐가 되나. 국민들의 행복은 누가 책임지나. 이런 방식의 비난과 요구가 반복되는 것은 모두 대통령제에서 기인한다. 제도로 정상화시켜야 하고 그것은 개헌을 통한 개조여야 한다.- 결국 국가의 정상화는 대통령제를 바꾸는 개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인가.△대통령제의 폐해는 너무 많다. 대통령은 ‘정치적 중립’을 요하는 5대 권력기관에 자신의 핵심을 임명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통령이 ‘수사’를 지시하고 수사기관이 무리한 수사를 함으로써 최종심에서 무죄가 나오는 사건이 생겨나기도 했다.80년대 말 학자로서 대의정치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참여민주주의를 제안했다. 그러자 노무현 정권에서 컨텐츠를 도용하고 이름까지 ‘참여정부’라 했다. 그러나 진정한 참여는 좌파나 우파만의 참여가 아닌, 전 국민의 참여여야 하는데 자기들만의 참여정부가 돼 버린 느낌이다.헌법 개정을 통해 내각제로 가거나 대통령 직선 내각제로 바꾸는 것이 해법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적 합의를 거쳐 결정해야 한다.- 장관으로서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됐다.△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당시 국무위원으로서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며 모두 사표를 쓰자고 제안했었다. 동의하는 동료도 있었지만 반대자도 있었고 혼자만이라도 실행하기에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임기 3년이상 남은) 국회의원은 그만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당장 (재선 불출마를) 공개할 수는 없었다. 선거 막판까지 ‘끝까지 나간다’고 했지만 불출마는 탄핵 후 바로 결심했다. 더 이상 국회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헌법 개정은 무산됐고 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고치려던 정치개혁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학자로서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국회의원 시절 원칙대로 했나.△국회의원은 국가의 대표로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데 지역의 대표는 아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갈등은 있었지만 살아온 철학만큼은 한 길이었다고 자부한다.공항이 내 지역에 위치하는 것보다 다른 지역이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면 그렇게 주장해야 하는 것이 헌법의 원리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역구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상충된다면 국가의 이익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대구 동구의 숙원사업을 위해 확보한 예산이 국가 전체로 보면 다른 지역에 지원돼야 할 예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치인의 말은 절대로 믿지 마라”는 말도 있다.△정치인으로 일부러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정치인이었던 때 나도 그랬다.- 국학진흥원 자료를 통해 본 영남인의 정신은 어떤 것인가.△영남 남인들이 권력에서 배제돼 있는 동안 끊임없는 성찰과 훈련을 통해 내공을 쌓았던 것이다. 국학진흥원 자료를 보면 이 지역에 많은 정자는 시가로 음풍농월하는 한가한 놀이 장소가 아니었다. 치열하게 현실을 고민하고 친구를 찾아 함께 논의하는 장소였다. 특히 영남 남인들은 출사에서 봉쇄된 상황에서 지식 탐구와 논쟁을 통해 지금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특히 영남의 본거지 대구를 ‘수구’로 몰거나 ‘뒤쳐졌다’고 하는 비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개혁의 선도자였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항상 시대정신에 앞장선 것이 이 지역민이었다.특히 영남인의 치열했던 삶은 이 지역 선조들의 독립운동에서도 두드러진다. 당시에도 외국 유학으로 새 시대를 개척했던 사람들과 달리 전답을 처분해서 일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간 독립운동가들은 시대의 문제를 자기문제화 해서 역할을 마다 않고 앞장섰던 선각자들이었다. 그들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유림들이었다. 그들의 치열한 삶을 보면 결코 수구꼴통이 아니다. 지금 국학진흥원 자료를 근거로 영남의 정신을 다시 부흥하는 운동이라도 펴야 한다.- 지금 국학진흥원장이라는 학자의 길로 다시 왔다.△공부를 왜 하느냐고 물을 때는 유학의 퇴계와 율곡의 삶을 대비해서 이야기한다. 율곡은 자신의 안위보다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몸을 던진 것이다. 반면 퇴계는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의 완성으로 세상을 감화시키려 했다. 제자를 출사시켜 현실 정치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다. 징비록을 몇 페이지만 읽어도 “이게 나라냐” 하는 화가 치민다. 그러나 서애는 욕을 먹으면서도 자리를 지켜가면서 이순신을 발탁해 나라를 구해냈다.젊은 시절 평생을 학자의 길을 가겠다고 작정했는데 국가 개조를 작정하고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다. 지금 청량산을 걸으면서 ‘퇴계의 길로 갔어야 했나’ 자문해 보기도 한다. 정종섭(鄭宗燮) 한국국학진흥원장경주, 경북고, 서울대 법대, 경희대 법학석사, 연세대 법학박사.헌재 헌법연구관, 서울대 법대 교수, 서울대 법대 학장, 법전원 원장.헌법학원론 등 저서 62권국회의원, 행정자치부 장관.대의 민주주의를 전공한 헌법학자, 관련 저서만도 65권이나 된다. 학계에서 현실 정치를 따갑게 비판했다. 참여민주주의를 처음으로 역설했고 책임총리제와 특별검사제를 제안했다. 정치권에 들어와서는 대통령제 폐지 헌법개정과 정치개혁 등 자신의 국가개조를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5-02

시민과 더 가까워지는 문화예술인 활동공간 대구아트파크

코로나19로 전 국민을 힘들게 만들었던 거리두기가 드디어 풀렸다. 따라서 예술인들의 활동 공간도 넓어지고 숨통도 틔워질 것 같다.문화 예술의 도시를 만들어 시민들 모두가 행복한 대구를 만들기 위한 지역 예술인들의 노력은 끝이 없다. 음악인들에게 공연 장소를, 미술인들에겐 전시 장소를, 연극이나 무용인들에게도 공연 장소를 제공해주고 시민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섰다.사설 복합 문화예술회관을 개관한 박재환 대구아트파크 대표는 “문화는 갈등을 치유하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며 힘닿는 데까지 공간을 운영해서 예술을 하는 후배들에게 힘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한다. - 대구아트파크는 작은 사설 대구문화예술회관이라 할 만하다.△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배고픈 직업이다. 더구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아래에서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은 곳이 예술계라 할 수 있다. 전공으로 직업을 삼는 나로서는 참으로 혜택받은 존재이고 후배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문화예술회관장을 하면서 음악 이외의 예술 분야에 대한 식견을 넓히게 됐고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또 시민들에게도 이런 예술 분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했다.그래서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그런 장소를 만들어야겠다는 오랜 신념을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 대구아트파크다,- 대구아트파크가 개관 2년째를 맞았다. 공간과 지난 1년 성과를 소개해 달라.△공연장이자 전시 회의장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연면적 800㎡ 규모 종합예술공간이다. 지하 아트홀 ‘예현’은 70석 규모로 클래식 국악 무용 영화감상 등 공연과 연습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 2층 ‘스페이스 샘’은 50석 규모의 소규모 행사 모임을 위한 연회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 2층에는 또 40명 정도 인원이 야외음악회와 가든파티들 할 수 있는 ‘테라스 바람’과 옥상 ‘루프탑 하늘’이 있다. 3층 ‘갤러리 나무’는 청년 작가 및 아마추어 미술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미술 작품을 판매하거나 대여해주는 곳이다. 4층 ‘프리미엄 아카데미’에서는 음악 미술 무용 뮤지컬 댄스 강좌와 인문학 강의도 할 수 있다. 5층 ‘대구문화산업연구소’는 대구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세미나와 포럼 등을 개최할 수 있다.- 개관이후 어떤 행사들이 대구아트파크에서 일어났나.△개관하고 첫 한 달 동안 공연으로는 대구국악협회의 공연과 소프라노 이윤경 독창회를 열었고 계명앙상블, 대구무용협회 팀의 발레와 현대무용 한국무용 실용무용 같은 공연이 있었다. 또 박경숙 첼로 독주회도 성황리에 열렸다.전시는 대구를 대표하는 구상작가 43명과 비구상작가 20명의 전시회를 갤러리 나무에서 가졌다.- 대구아트파크에서 미술작품 렌탈 사업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문화예술회관장 시절 발견한 사실인데 일반인들이 미술품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고 구입해 소유하기에는 너무 고가여서 망설이더라. 그들에게 작품 가격의 100분의 1 수준으로 작품을 접할 기회를 확대해 주기 위한 방안이다. 서울에는 이미 일반화되었는데 대구에는 아직 초기단계다. 시중 병원이나 기업들과 MOU를 맺고 작품을 빌려주고 있다. 대구 작가 150명으로부터 3천점 확보를 목표로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현재 50명으로부터 500점을 확보해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이 중 30여 점은 렌탈해 주고 있는데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플루트 연주자다. 플루트는 오케스트라나 관현악에서 악기 중 어느 정도 위치인가.△국내에서 연습용으로 연간 7만 ~8만 대가 팔린다고 들었다. 어쨌든 연주자 수로는 피아노 바이얼린 다음에 플루트 연주가 차지할 것으로 생각한다. 음악대학에서 학생을 뽑을 때도 관현악 전공이 가장 많고 그 중 플루트가 반드시 포함된다. 오케스트라에서도 작은 규모인 2관(단원 70명 정도) 편성일 경우 플루트 주자가 2명이고 대구시향 같은 3관(단원 100명 정도) 편성일 경우 3명이다. 뉴욕 필이나 베를린 필처럼 4관 편성 오케스트라는 단원이 120명이 넘는다.- 일반인들의 취미 생활로 색소폰이 인기다. 그런데 왜 색소폰이 음대에 전공자도 없고 오케스트라에는 끼지 않는가.△색소폰이 대중적인 악기인 것은 분영하다. 지금은 음대에 따라 색소폰 전공자를 뽑고 있는 것으로 안다.그러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색소폰 연주자를 선발하지 않는 것은 연주곡 중 색소폰이 들어가는 곡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색소폰이 필요할 때면 전문 연주자를 초빙하는 것이다. 상주단원으로 선발하기에는 필요에 비해 너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색소폰 연주가 들어가는 곡으로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재즈왈츠 No. 2’는 알토 색소폰이 연주하는 정말 아름다운 곡이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많은 악기 중 플루트를 연주하게 된 계기가 있나.△고교에 들어가니 악대부가 있어 너무 기뻤다. 내 발로 악대부를 찾아 입단했는데 선배들이 귀엽다며 ‘하고 싶은 악기를 하라’고 선택권을 줬다. 처음 트럼펫을 시작했는데 소리 내는 것이 힘들었다. 어느 일요일 혼자 플루트를 연습하던 선배(이성호 플루트 연주자)를 보고 ‘나도 불고 싶다’고 해서 바꿨다. 또 나보다 나중에 들어온 후배가 나보다 트럼펫을 더 잘 불어 속이 상한 것도 플루트로 바꾼 이유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중에 온 후배는 초등학교때부터 트럼펫을 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경력 중 부산시립교향악단과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있다.△대학 졸업 후 부산시향에 입단했다. 꽤 괜찮은 보수를 받았고 주말에 대구로 올라오면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막걸리 파티를 벌이곤 했다. 그때부터 후배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대도 상무대 군악대에 들어갔다. 제대 후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구시향에 들어갔다.- 그러다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계기는 무엇 때문인가.△당시 외국유학 붐이 불 때였다. 제자들이 찾아오면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유학을 다녀와야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에 유학을 다녀온 선배나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유학 가면 정말 훌륭한 선생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도 했다. 그래서 결혼해서 아이 둘을 데리고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 2학년 이후 내 스스로 학비를 마련했고 유학 경비도 내가 벌어둔 돈으로 다녀왔다. 시향 단원으로 있으면서 레슨을 했고 미국 유학 (뉴욕 주립대학 펄처스칼리지) 4년 동안 한인사회에서 레슨을 열심히 했다. 그 시절 유학 가서 고생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랑할 만한 성과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전국 처음으로 대학 음악과에 플루트 전공과를 만들고 플루트 오케스트라와 앙상블 레피토아를 비롯, 플루트 수리까지 교육과정에 편성했다. 당시 음악과 신입생 60명 중 플루트 전공만 12명을 선발했다.- 대구음악협회장 시절 대구 출신 음악가 현창사업을 벌이기도 했다.△당시 한국최초 가곡인 동무생각 작곡가 박태준 선생과 한국최초 오페라 춘향전 작곡가 현재명 선생 현창사업을 벌이다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화연구소측과 마찰이 있었다. 세미나 등을 통해 박태준 선생의 친일파 논란은 해소했으나 현재명 선생에 대해서는 ‘공과 과를 함께 기록해 달라’는 주문에 대구시의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보여 중단했다.-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시절 찾아가는 음악회를 통해 클래식을 대중에게 접근시켰다는 평가다.△클래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대중화 노력의 하나로 찾아가는 음악회를 구상했다. 그런데 대상이 주로 시설에 치중돼 있었다. 김범일 대구시장에게 찾아가는 음악회를 제안했더니 아주 반기더라. 그래서 먼저 대구시청 월례 조회에 찾아갔다. 월례회에 본청뿐 아니라 구군청과 경찰 소방 등 시청 산하 전 기관의 공직자들이 참여했는데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자기들 기관으로 와서 연주해 달라는 신청이 쇄도했다.- 어떤 식으로 공연했기에 그런 인기를 얻었나.△공연은 성악팀과 관현악팀, 무용팀으로 구성했다. 노래도 그냥 클래식은 아무래도 무거우니 대중적인 곡을 선택하고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남성4중창단이 부르는 빨간 구두 아가씨에 청중들 모두 신나 하는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당시 찾아가는 음악회는 연 100회나 열었더라. 구청과 소방서 등 공공기관에서 혁신도시로 파급돼 감정원과 가스공사 등에서도 음악회를 가졌다.- 찾아가는 음악회 말고도 클래식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 것 같다.△문화예술회관에서 실시하는 예술 아카데미에도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시민들을 위해 출장 아카데미를 열었다.31절이나 광복절 기념식에는 그냥 기념 노래나 부르고 끝내는 기념식에서 탈피해 기념식 사이에 20분짜리 공연을 집어넣었다. 함께 노래 부르고 태극기 휘날리며 만세도 부르고 장내를 동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미래 관객인 학생들을 상대로 창의체험학습을 위한 상설 투어를 실시했다.- 예전에 비하면 예술에 대한 정부 기관의 지원이 늘어난 것 아닌가.△기관의 예술에 대한 지원이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예전에 비해 문화 예술에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다. 특히 대구시의 경우 생활예술에 지원이 치우치고 있는 느낌이다. 그 많던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음악학원 같은 시설들이 모두 주민생활지원 센터나 공공도서관 등 기관 산하로 이양돼 버린 것 아닌가. 수용자들은 적은 비용으로 예술을 직접 혜택을 받으니 문턱이 낮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예술의 수준이 낮아지고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음악인으로, 예술인으로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기초예술에 더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기초예술의 발전이 있어야 생활예술, 대중예술의 발전이 가능해진다. 처음엔 물론 턱이 높고 힘이 든다. 그러나 클래식에의 투자가 소수 마니아만을 위한 투자가 아닌 것이, 그 클래식의 저변확대와 발전을 통해 대중음악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대구아트파크의 미래와 자신의 소망은 무엇인가.△나는 1980년대 음악을 전공하면서 교육과 사회적 혜택을 받았던 마지막 세대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음악을 평생직장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음악계 후배들은 한 마디로 어렵다.음악인들에게는 공연 기회와 장소를, 미술인들에게는 전시장을, 연극 무용계 인사들에게도 그들의 땀과 재능을 펼쳐 보이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대구아트파크가 필요함을 증명하겠다. 문화예술에 예산을 퍼붓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다는 비난을 예술의 힘으로 바꿔놓겠다. /이경우 편집위원 □ 박재환(63) 대신대 교수· 대구아트파크 대표대구출신, 영남고, 계명대 음대. 미 뉴욕주립대 음악석사. 줄리아드음대 오케스트라 지휘토스 수료.전 부산시립교향악단. 대구시립교향악단.전 대구음악협회장,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장.초등학교 4학년때 고적대로 활동하면서 음악적 소질과 재능을 스스로 발견했다.고교에 입학하면서 악대부에 자발 입단했고 음대를 졸업하고 풀루트 연주자로 평생 직업을 삼았다.“나는 더 많은 혜택을 받아 전공을 직업으로 한 선배”라며 힘닿는 데까지 대구아트파크를 운영하면서 지역 예술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한다.

2022-04-25

참외는 땅의 능력과 환경에 맞춰 재배해야

서울 시내 백화점에서도, 남해의 섬에서 강원도 산골까지 전국 과일전의 참외는 성주참외가 평정했다. 과일 생산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참외만큼은 경북 성주가 전국을 석권하고 있다. 4천300여 농가에서 올해 수익 6천억원을 목표로 하는 성주참외는 이제 국민과일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듯하다.재배기술은 연작 피해를 극복하고, 생산시기가 여름이라는 계절적 한계를 뛰어넘어 달싹하고 아삭한 식감의 싱싱한 참외를 전 국민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농민들의 노력과 농업기술센터를 비롯한 관계 기관들의 지원 덕분이다.“참외는 기술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참외 명장 박진순 씨는 “참외의 성장 속도를 읽어내고 적기에 참외가 필요로 하는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참외 재배의 열쇠”라고 말한다. - 시중에 참외가 한창인 것 같다. 지금이 참외 성수기인가. 하루에 얼마나 생산되고 있나.△오늘(4월 12일)도 ‘생산자 박진순’이라고 큼직하게 찍힌 성주참외 188상자(상자당 10kg)가 가락동시장에 올라갔다. 요즘 하루 180상자 이상 출하하고 그러면 1천만원 이상씩 현금으로 통장에 꼽힌다. 열흘이면 1억이다. 올해는 2월 8일 처음으로 58상자를 수확했다. 참외 성수기는 5월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생산량이 한동안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8월까지 수확이 계속된다. 이 재미로 농사를 짓는 거 아닌가.- 도대체 참외 농사를 얼마나 짓고 있나. 참외 농사에서 영농비는 얼마나 차지하고 순수익은 얼마나 되나.△올해는 800㎡(250평) 규모 비닐하우스 25개동에서 참외 농사를 짓는다. 지난해엔 21개 동에서 3억원의 조수익을 올렸는데 올해는 그보다 좀 많을 것 같다.그 중 30%는 영농비로 들어간다. 경험상 10개 동을 농사지어서는 남는 게 없더라. 10개동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이문이 생기는 것 같았다. 영농비는 자재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닐하우스 1동의 시설비만도 300만원이 들어가는데 시설의 수명은 20년 정도지만 비닐은 3년이면 바꿔줘야 하고 속 터널 비닐은 해마다 새로 한다. 비료 농약 박스값 등 영농비도 만만찮다. 오늘 참외 수확에만도 인부 6명이 동원됐다. 참외 농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더불어 같이 먹고 사는 거다.- 지금처럼 수확하려면 언제부터 참외농사를 시작해야 하나.△ 추석이 지나면 농사 준비를 해야 한다. 10월이면 참외를 심을 밭을 물로터리로 고르고 퇴비를 넣고 땅을 만들어서 씨앗을 넣는다. 11월이면 접붙이기를 한다. 한겨울 비닐하우스에서 참외가 자라면 수정을 거쳐 수확한다.- 경상북도의 참외명장 1호 타이틀 보유자다. 명장이 되고 무엇이 달라졌나.△ 명장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또 처음 참외명장에 선정되고는 명예나 자랑보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았다. 그전에는 그냥 참외 농사를 지으면 되었는데 명장이 되고 나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외 농사의 노하우를 전수해 줘야 했다. 무엇보다 참외농사도 남들보다는 잘 지어야 했다. 지금은 스스로 명장 값을 하려고 노력한다.- 무엇으로 참외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나.△열심히 부지런히 농사지었다. 특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다른 사람과는 반대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렇지만 역발상이 땅의 이치와 작물의 이치를 꿰뚫어보고 스스로 적용한 것이 성공한 때문일 것이다. 참외를 이식하기 전에 로터리 친 땅을 단단하게 다지자 이웃 사람들이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그런데 그 농법이 통했고 이젠 모든 농가들이 ‘이랑 다지기’를 하니 이것 때문에 명장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 농법이 인정받은 셈이다.- 명장 이외에도 많은 상을 받았을 것 같다.△농업단체에서 주는 상은 수도 없이 받았다. 2016년에는 참외 농사로 대통령 포장을 받기도 했다. 그때도 농업기술센터에서 와서 귀찮게 굴더니 나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산업포장을 주더라. 참외 기술 컨설팅을 하러 다니면서 지난해에는 경북농업기술원으로부터 현장 명예 연구관이라는 직책도 받았다.- 참외 농사를 짓기 전에 수박 농사도 지었고 그전에는 도시 생활도 했었다.△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5남매의 맏이였다.유산은 손재주와 남에게 지지 않겠다는 의지뿐이었다. 중학을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차피 고등학교 진학은 못할 형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엔 덩치는 작았지만 동기들에 기죽지 않을 만큼 ‘좀 까불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야심 하나로 일찍 대구로 나와 공장 생활을 했으나 성에 차지 않았다. 양복점 일을 배웠다. 남보다 앞서 재단까지 배워 양복점을 열었으나 양복점이 사양 사업이 되고 임대 점포가 재개발로 헐리게 돼 3년 만에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직 20대였다.- 참외 농사는 재미가 있었나.△처음엔 수박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재미가 적었다. 그래서 오래 수확할 수 있는 참외로 바꿨다. 새벽에 일어나 참외 농장에서 일을 하고는 9시면 오전 일과를 마친다. 그때부터 동네 농장들을 순회하면서 내 농법을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해보고 다른 사람들의 농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는 오후 4시쯤이면 다시 내 농장으로 돌아와 일을 하곤 했다. 부지런하고 억척같이 일했다.- 비닐하우스 작물 재배에 자동개폐장치가 인력난을 해결하는 획기적 발명품이 됐다. 자동개폐장치 개발에 박 명장의 기여가 크다고 알려졌다.△우리 작목반 23명 모두가 최소 억대가 넘는 참외 농사꾼들로 한 사람은 지난해 5억4천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혼자서 그렇게 많은 농사가 가능한 것은 모두 자동개폐기 덕분이다. 하우스 보온덮개를 예전에는 모두 수동으로 했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밤 10시면 보온덮개를 덮으러 갔다. 뒤에서 친구들이 ‘농사 너 혼자 짓나?’ 하면서 핀잔을 주기도 했다. 당시 하우스 18동의 덮개를 모두 덮고 나면 새벽 1시가 넘고는 했다. 그래서 농업기술센터에 자동개폐장치를 개발해 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자동개폐장치가 개발되면서 이젠 한 사람이 60동까지도 참외농사가 가능하게 됐다.- 참외재배 기술은 남에게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던데, 참외를 재배하려는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해주나.△ 참외 농사는 다른 작물에 비해 까다롭다. 그래서 참외 농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 역병이 돌기 전에는 경북대 농대와 농업기술센터 등에서 참외 재배 컨설팅을 했다. 정부 농촌수출지원단의 일원으로 교수들과 조를 이뤄 참외 재배 컨설팅을 하러 다녔다. 우리 농장으로도 참외 재배 기술을 배우겠다는 사람들도 해마다 수 백명씩 찾아오고 있다.컨설팅에서 참외 재배 농가에 강조하는 것이 환경이다. 참외 재배 환경을 조성하고 난 다음에 참외를 재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땅의 능력과 특성부터 제대로 정확히 알아야 한다. 토양 성분이나 토질이 다르고 일조량이 다르고 주변 여건이 모두 다른데 한 가지 방식만 고집해서는 참외 재배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참외 재배는 기술보다 환경 조성이 먼저다.컨설팅에서 또 강조하는 것이 ‘참외는 채소지만 나무처럼 키워라’는 것이다. 참외는 열매를 키우는 것인데 잎만 무성한 채소가 되어서는 품질 좋은 참외를 많이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잎은 나무처럼 작고 적어야 한다.- 참외 재배 현장 컨설팅에서 주로 발견하는 실패 사례는 어떤 것이 있나.△현장을 확인해보면 무엇이 잘못 됐는지 한눈에 ‘탁’ 보인다. 주위만 봐도 알 수 있다. 땅을 제대로 편편하게 고르지 않으면 물이 한쪽으로 쏠린다. 그러면 작물이 고루 자라지 못한다. 병충해가 농사를 망치기도 한다. 노균병 흰가루병 등 많은 병들은 모두 수분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약을 쳐서 약해(藥害)로 수확량이 줄어들기도 한다. 수확량의 3분의 1은 병충해 때문에 줄어든다.대학을 나왔다고, 학식이 풍부하다고 농사를 잘 짓는 것은 아니다. 특히 참외 농사는 기술보다는 환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컨설팅을 갔을 때 산 밑에 하우스가 있어 일조량이 절대 부족한 하우스에서 전력을 기울여 농사짓는 사람에게 하우스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조언했다. 그늘에서는 참외 농사를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외 재배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어렵나.△물관리만 하더라도 참외의 성장 속도에 따라, 토양에 따라 다르다. 처음 이식하고 겨울 동안은 물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참외가 한창 자라고 수확기인 지금은 물을 계속 줘야 한다. 토양도 사질토와 마사토 성분의 토양에 따라 다르다. 작물이 크는 속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물이 필요한지, 비료가 필요한지, 비료는 어떤 성분이 필요한지, 역병은 어떤 병이며 어떤 약을 쳐야 하는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찌 말로 설명될 수 있겠나.몇 해 전 서울의 한 대학 농학박사가 참외 재배를 연구한다며 우리 농장에 왔다. 그는 처음에는 Ph 농도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러 실험들을 하더니 나중에는 ‘내 이론은 이 농장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실토했다. 어느 날 그가 소리 없이 올라가고는 그 후로 소식이 없더라.- 귀농인들에게도 참외 농사 비법을 아낌없이 전수해 준다고 소문났다.△젊은 사람이 참외 농사를 짓겠다고 할 때는 최상품의 참외로 돈을 벌 수 있도록 조언해준다. 젊은이들이 의지만 가지면 농업에 대한 각종 지원도 많고 혜택도 많아 도시보다도 더욱 빠른 시간에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극 권유한다. 그런데 환경 논리와 일머리를 모르면 아무리 노하우를 가르쳐 줘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실천하기 어렵다. 이건 학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지금은 참외 재배도 스마트농업 시대다.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하우스 안 참외 성장 상태를 확인하고 원격제어로 온도 습도를 관리할 수 있다.- 나이 들어 은퇴하고 농업에 뛰어든 사람들에게도 같은 조건으로 할 수 있나.△나이 든 귀농인들에게는 적당히 농사지으라고 가르치고 권한다. 돈을 따라가다 보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충고해 준다. 농사, 특히 참외 농사는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까다로운 작물이고 힘든 작업이기도 하다. 또 규모의 농사를 해야 일정 수확을 올릴 수 있다.- 참외 명장으로서 바람이 있다면.△4년 전부터 참외 농사는 주로 아들에게 맡기고 나는 쉬엄쉬엄 지원하는 편이다. 아들 상현(32)은 농수산대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참외 재배에 뛰어들었다.바람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가업으로 참외농사를 이어받은 아들이 나보다 참외를 더 잘 재배한다는 칭찬을 들었으면 좋겠다.또 농부로서, 농업인이 우대받고 농민들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 바란다.□ 박진순(朴鎭淳) 경북 참외명장 1호. 섬들농장 대표.성주 월항.빈농의 아들로 손재주와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중학교 졸업 후 대구로 나와 공장 직공과 양복점 경영을 하다 20대에 귀향.수박 농사를 시작하다 5년만에 참외를 바꿔 현재 연 3억원의 조수익을 올리고 있다.토양의 성질과 참외 성장과정을 면밀히 관찰해 지역에 맞는 재배 기술을 습득했다.2004년 경북도 참외명장 1호로 선정되고 2016년 참외 재배로 대통령 포장을 받았다.연간 수백명이 참외 재배 기술을 배우러 그의 농장을 방문하고 자신도 지역 대학과 농민들을 상대로 참외재배 컨설팅을 했다.전수받은 아들이 참외 재배에서 자신을 능가하기를 바란다. /이경우 편집위원

2022-04-18

붓으로 먹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서예다

서예란 무엇인가. 그냥 붓으로 쓰는 글씨에 그친다면 서예가를 욕보이는 소리가 될 것이다. 필가묵무(筆歌墨舞),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추는 춤이다. 생명이 있어야 한다. 서예는 살아 있는 예술이어야 한다.서예가 율산 리홍재에게 서예는 춤이고 음악이고 스포츠다. 그는 끈질기게 자기를 고집한다. 자기 목소리를 찾아 자기 노래를 부르듯 글자 한 자 한 자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일을 한다. 그것이 타묵 퍼포먼스든 한글이든 한문이든 상관없다.첫눈에 보고 ‘우와’하는 환성이 나오는 것이 예술이다. 그에게 서예는 스스로 감동하고 엑스터시를 느끼며 예술적 오르가즘의 지경에 닿게 하는 마법이다. 노랫말에 리듬과 강약과 박자와 고저장단을 넣으면 노래가 되듯 서예는 화선지에 먹물로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노래여야 진정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 코로나 팬데믹에도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예총으로부터 한국예술문화명인 타이틀을 얻고 퍼포먼스도 벌였다.△코로나로 모든 대면활동이 일시 정지된 2021년엔 명인전과 TV생중계된 서예퍼포먼스를 통해 시민들에게 팬데믹 상황을 이겨내라는 응원 활동을 했다. 2019년에는 독도에서 퍼포먼스를 펼쳐 국민들의 독도에 대한 관심을 끌어냈다. 나이 60에 ‘율산 이홍재 60년 명품전’을 열었다. 그동안 작품을 망라해서 서예인 이홍재를 보여줬는데 올해는 내 나이 66에 맞춰 미(美, 六十六)전을 가질 생각이다. 미(美)를 풀어쓰면 한자 六十六을 거꾸로 쓴 상형이 된다. 서예는 예술 창작활동이어야 하고 어떤 이유로도 중단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획하는 거다.- 우리가 서예라고 부르는데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쓴다.△서예 서도 서법 다 같은 것이다. 글씨를 쓸 때 중국은 필법을 중시하고 일본은 검도 다도처럼 글씨도 도를 닦듯 수양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서예라고 해서 도를 무시하거나 법을 몰라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말이 나라별로 문화가 달라 그렇다는 것이지 모두 붓으로 쓰는 글씨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서예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서예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역입이니 중봉이나 삼절 등 서법 기초부터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붓글씨를 배우는 사람들이 너무 법첩(法帖)에 의존하거나 중봉(中奉)을 의식하는 데 대해 나는 반대한다. 파중봉해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다고 강조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중봉을 붓의 끝으로 알고 있는데 사람이 허리로 서 있고 움직이듯 중봉은 붓의 허리다. 붓끝이 아니다.기초가 중요하지만 늦은 나이에 서예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기초부터 시작해서는 죽을 때까지 제대로 글씨 한 번 써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서예를 시작하고 30년이 되어도 아직 초보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서예가들을 보아왔다. 잘못된 교육 탓이다. 마치 평생 영어교육을 받아도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 한마디 못하는 영어교육과 같은 것이다. 예전에 한국인 교사가 a b c d부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원어민 교사가 Good morning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공을 멀리 던지기 위해 팔을 뒤로 빼서 다시 앞으로 던져야 하지만 가까이 던지는 것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더구나 그 동작도 익숙해지면 순간 이동이 가능해 진다. 언제까지 뒤로 빼기만 하여서는 더 이상 진보가 없다.지금 잘 걷고 있는 성인들에게 새로 걸음마를 가르치기보다 지금 걷는 걸음걸이를 수정하고 숙달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잘 걷고 있는 성인이 느닷없이 걸음마를 새로 배워서야 언제 달리겠느냐.- 아주 우문 같지만 어떻게 해야 글씨를 잘 쓸 수 있나. 글씨를 잘 쓰려면 기초부터 차근차근 그렇게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 서예를 가르치는 서실에서는 왕희지나 구양순 등 옛 서예가들의 법첩을 따라 쓰기를 강조한다.△따라 쓰는 데 너무 집착하지 마라. 처음은 따라 쓰더라도 지금 왕희지를 배우고 닮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2천년전의 법첩을 따라 쓰는 것은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세상사 다 그렇다. 글을 잘 쓰려면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욕 얻어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그리고 무엇보다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 필법에 억매이고 법첩에 갇히게 되면 창작의 의지가 밟혀버린다. 전통은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법고(法古)는 창신(昌新)에 방점이 찍혀 있다. 철두철미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 먼저 자신이 반해야 한다. 자신의 글씨를 보고 자신이 흡족해 하고 만족해야 한다.글씨체에서도 전서와 예서, 해서, 행서와 초서는 우리 몸의 다섯 손가락처럼 모두 한몸이고 그 다섯을 아우르는 글씨를 쓰는 것도 같은 이유다.- 서예가 캘리그라피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서예가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나 노력이 필요한가.△갤리그라피를 통한 서예의 세계화는 우선 작가들의 능력부터 쌓아야 한다, 서예가 예술이라면 서예의 세계화도 그렇다. 한 번에 딱 보고 ‘뻑’ 가야 한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를 보고도 감탄하듯 멋진 글씨 앞에서는 감탄사부터 나오게 된다. 그것이 예술로서의 서예다. 그렇다면 열심히 글씨를 본뜨듯 베껴서야 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 서실을 열었고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내게서 배워서 다시 후진들을 교육하는 서예가가 전국적으로 100명은 넘을 것이다. 그들은 더러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수준의 서예를 가르치기도 할 것이고 혹은 대학생 수준의 서예를 가르치기도 할 것이다. 나에게서 배웠다고 모두 같은 방법으로 같은 수준의 교육을 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랬듯. 저마다 색깔을 갖고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서예 공모전이 실시되고 있다. 시전과 국전 등 크고 작은 서예전의 심사위원을 해 본 경험으로 어떤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어떤 작품들이 입상할 가능성이 높나.△공모전은 공모 주최측의 입상 조건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공모전의 심사를 맡아본 결과 보통 서예전에서는 대작이나 걸작이 나오지 않더라. 그 수준이 초보를 벗어난 정도가 대부분이다. 예술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입상이라는 것도 서예를 ‘앞으로 열심히 해라’ 하는 식의 격려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툭 하면 국전을 붙이는데 대한민국 국전이라면 대통령이 상을 주어야 국전이 된다. 마찬가지로 시전이면 시장이, 도전이면 도지사가 대상을 주어야 한다. 나는 심사할 때면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글씨를 입상작으로 뽑으려 노력한다.- 20대에 이미 개인전을 열고 40대에 국전 초대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른바 세상이 인정하는 서예의 대가가 됐다. 유홍준은 추사를 이야기하면서 글씨에 신품(神品)과 법품(法品)과 묘품(妙品)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본인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품이라는 평가를 인정하나?△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붓을 잡긴 했지만 남보다 서예에 소질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엄청난 노력을 했다. 수많은 글씨를 배우고 썼다. 그런 면에서는 배우고(學而) 노력하는(困而) 형이었다고 해야 하나.서당 훈장이던 조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자에 호기심이 많았다. 또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미술반에 들기는 해도 서예의 길을 평생 걷게 될 줄은 몰랐다. 단지 한자를 즐겨 익혔고 한문 공부를 독학했던 정도였다. 그러다 스무 살에 대한서예원에 들어갔다. 스승은 석재와 죽농의 맥을 이은 죽헌 현해봉 선생이었다. 그 스승한테 배운 것은 글씨보다는 의리 하나였다. 그분은 펜글씨를 정말 잘 쓰셨다. 그러나 붓을 잡으면 왜 그런지 머뭇머뭇하셨다. 나는 스승이 볼 때는 법첩을 따라 썼지만 스승이 보지 않을 때는 내 멋대로 글씨를 만들어 쓰고 연구했다.- 스물둘에 서실 원장이 됐고 스물넷에 서울미술제 초대작가가 돼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이십대에 4번의 개인전을 연다. 율산의 색깔은 어떤 색인가.△서예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 알아야 한다. 많이 써봐야 한다. 자꾸 써야 한다. 그런데 법만 따지지 말고 쓰면서 터득해야 한다.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노래로 말하면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 조용필 나훈아의 노래는 아무리 잘 불러도 조용필 나훈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지금 젊은이들의 아이돌의 음악을 봐라.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지금 세상은 쓰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바뀌고 있다.가수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노래한다. 서예도 그런 것이다.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다. 나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정을 실어야 노래가 되듯 글씨에도 자신의 감정을 실어야 된다.- 서예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다.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나.△아니다. 소년 명필도 있을 수 있고 실제 있다. 지금 재주가 있는 사람이 제대로 배우고 닦으면 명필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경륜이 쌓이고 글이 연륜이 묻어나 완숙해진다. 잘못 시작하면 30년 써도 초심자를 면하지 못한다.- 1997년 대형 붓으로 서예 퍼포먼스를 펼친 이래 ‘타묵(打墨)’은 율산을 전국적 명사로 만들었고 드디어 한국예술문화명인에 선정됐다. 덕분에 서예계에서는 이단아라거나 예술계에서는 괴짜라는 별명도 얻었다.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도 기인이라는 평도 있다.△괴짜라고?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거다. 처음 타묵 퍼포먼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서예를 욕보인다. 예술을 형편없이 실추시킨다. 서예를 희화화하지 마라’는 식으로 반응하면서 타묵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랬다. 그런데 그냥 쇼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적인 예술인 서예를 대중이 현장에서 눈으로 보는 순간의 무용과 소리로 듣는 음악의 경지로 승화시킨 것이 타필비묵(打筆飛墨)이다. 지금은 퍼포먼스에서 업그레이드 돼 공공 행사에서 자주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세상이 인정한 증거다.- 율산의 서예 세계 지향점은 어디인가.△예술은 기술이 아니다. 예술은 그 끝이 없다. 예술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나로 붓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서예가이고 싶다. 그 속에서 예술적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그것이 율산 서예의 진수다.예술은 야생에서 자란다. 온실에서 키워낸 나물은 다르다. 온실에서 자란 봄나물이 산야에서 겨울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난 봄나물의 맛을 내지는 못한다. 그런 야생화 같은 예술을 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붓을 잡고 지금을 즐기며 가슴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서예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 일 많아 죽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나의 작품으로 전시관을 열어 서예 전 과정을 전시하는 것이 목표다. /이경우 편집위원

2022-04-11

유학이념 발전 위해 지금도 매일 공부합니다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2030세대, 586세대, 꼰대세대 등 나이로 편 가름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 의식을 지배하던 장유유서와 가정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의 붕괴 현상이 부정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곳곳에서 목도되고 있다. 부모와 자녀를 구성원으로 하는 전통적 형태에서 다양한 조합으로 가정이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지금 세상에 ‘공자왈’이 과연 유효한가. 그래도 후세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늘도 아침이면 책 보따리를 들고 출근하는 팔순의 청년 최상희 춘추회장.젊어서는 지역의 금융인으로 기업인으로 지역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금융계를 은퇴하고는 교단에서도 후학을 가르쳤다.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더 흠이 가지 않으려는 생각만으로 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하루하루를 살아 간다” - 연세에 비해 건강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특별한 운동을 하나.△아침 산책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아내와 진밭골을 산책하면서 하루 일과를 계획한다. 요즘은 혼자서 돌거나 빼먹기도 한다.- 춘추회는 어떤 회인가. 왜 춘추회인가.△도의와 윤리사상을 고취 앙양하고 미풍양속을 조장하며 사회 복지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윤리 이념 회복 사업을 목적으로 창립된 지 43년이 된 단체다. 회원들에게 도덕성 회복을 위한 강연회를 갖고 선현과 위인들의 유적지를 탐방하는 등 충효 예절교육을 통해 유풍을 함양하는 것이 목적이다. 유학이념의 창조적 승계 발전을 위한 모임이다. 나이 들었다고 모여서 밥만 먹어서야 되겠나.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여 젊은이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 천천히 자연스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이 땅의 유학 이념을 승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유학 이념의 정의부터 분명히 하고 회원 모두가 유학이념으로 무장돼 있어야 한다. 나부터 공부하고 있다.- 그럼 춘추회가 지향하는 그 유학이념은 바로 우리의 선비정신 아닌가. 선비정신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는 같은가.△춘추회가 공자의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담은 ‘춘추’에서 가져왔다.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기고 역사의식에서 시시비비의 정신을 신봉하는 것이 춘추의 정신이니 유학의 이념이 바로 선비정신이라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선비정신은 오늘날 어떻게 구현되고 있나.△어찌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나. 청렴과 청빈을 우선가치로 삼으면서 일상에서는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선비는 문무를 겸비한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유학을 공부하여 그 이념과 도덕으로 스스로 인격을 수양하고 나아가 사회교화를 자기 임무로 여기는 지식인이라면 선비라 할 수 있지 않겠나. 확대하면 의롭지 못한 부귀는 탐내지 않고 불의에는 목숨을 걸고 항거하며 예의와 염치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선비정신이라 하겠다. 이건 우리 대구 경북인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러면 선비정신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야 하나.△선비정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견위수명과 선공후사의 올바른 마음가짐이나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기개와 고결한 인격자라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는 신분차별이 당연시됐고 문을 숭상하면서 무를 낮춰보아 국력이 약화되기도 했다. 특히 농업과 공업 상업을 천시해서 산업능력을 저하시킨 점은 분명히 짚어야 한다. 이런 잘못들을 바로 잡아 긍정적인 면은 계승 발전시키고 부정적인 면들은 과감히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춘추회는 그런 일을 하나씩 하려는 모임이다.- 지금 MZ세대는 유학 이념을 ‘꼰대’로 몰아가기도 한다. 춘추회장의 입장에서 유학의 이념 중 하나인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어떻게 평가하나.△장유유서는 오륜의 하나로 소학과 논어 맹자 등에서 늘 되풀이되고 있는 유학의 기본 정신이다. 현실에서는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보면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 역지사지해서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자리를 선뜻 양보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동방예의지국이라 일컫는 이 땅에서 장유유서라는 미풍양속이 면면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우리 시민 모두가 사람의 도리를 지켜나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난해 4월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110명이었던 회원은 1년도 안 돼 두 배 가까운 190여 명으로 늘어났다.△춘추회는 처음 79명으로 출발했는데 결성 당시에는 대유림(大儒林)이자 대가벌(大家閥)이라는 자부심으로 입회 희망자가 넘쳐나 정원을 120명으로 한정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학에 대한 시대적 인식 등으로 다소 주춤해져서 내가 회장이 되면서 회원 확대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학연과 혈연, 지연을 동원하고 현업에서 활동하던 때의 인간관계를 모두 활용한다. 유학을 이해하고 춘추회 이념에 동의하면서 또 뜻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이면 적극 권유한다.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권유하는 식이다. 대부분 흔쾌히 응하고 또 참여기금을 쾌척하는 지인들도 상당수 된다. 덕분에 춘추회가 뭐 하는지 몰랐다던 사람들이 춘추회에 관심을 갖고 또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모임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는가하면 오히려 깊은 인간관계 만들기도 했다는 사람도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활동하려 하나.△유학의 이념을 전파하는 거다. 지금 공교육에서도 내팽개치다시피 한 도덕 윤리 교육이나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같아 이를 되새기고 되살리려는 것이다.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그동안 회원들의 활동이 부진했다. 코로나가 정점을 지난다면 올 4월부터는 특강이라도 살려가면서 활기를 불어넣을 생각이다. 그동안 순수한 회원들의 회비와 기여만으로 회를 운영해 왔으나 사회봉사단체로서 외부의 지원도 얻어내는 등 활동반경을 넓혀 나갈 계획이다.- 금융인이었다. 1958년 한국상업은행에서 출발해 대구은행 창립멤버였다. 대구은행 상무에서 대동은행 전무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알고 있다.△그 때, 대구에 지방은행이 하나 더 생겼다. 선배의 권유에 못 이겨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것이 1989년. 내가 아끼고 나를 따르던 후배들도 함께 챙겼다. 그들은 새로운 금융 세계를 꿈꿨다. 그러나 거기까지. 결국 꿈은 6년 만에 좌절됐고 모두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어쩌다 당시 후배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끝이 좋지 않으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더 이상 옛날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는 않다.- 그 후 서민지원금융기관인 우리캐피탈 대표를 맡아 금융인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했다.△청구 보성 우방 등 지역의 유명 건설업체 7곳이 출자한 주택할부금융이었다. 당시 아파트 건설 붐을 타고 지역 건설업체가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개업식에는 문희갑 대구시장과 이의근 경북도지사를 비롯한 그룹 주주들이 모두 참석해서 성황을 이뤘다. 이후 전국의 지방 캐피탈이 모두 문을 닫았지만 우리캐피탈은 9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고 대구의 우리캐피탈만은 살아남았다. 나는 회사가 대기업에 인수될 때까지 3연임하면서 9년3개월동안 경영했다. 당시 인수한 회사가 직원들을 모두 승계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금융인으로서 평생을 활동했는데 그러면서도 유학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최근 상산만록(常山漫錄)과 속상산만록이란 두꺼운 역사 기록서를 잇따라 출간했다.△영진전문대에서 초빙교수로 4년여 근무한 뒤 대구향교에 11년 출입하게 됐다. 그 중 6년동안 수석장의(首席掌議)로 활동하면서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특히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족적을 좇아 후진들에게 참고가 되도록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제목에서처럼 글 중에는 내가 쓴 글도 있지만 선현들의 문헌과 기록에서 인용하고 축약 편집된 자료들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어 만필(漫筆)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용기를 냈다.- 취미로 하는 서예는 전국 공모전에서 여러 번 입상 경력이 있는 수준급으로 알고 있다. 특별히 좋아하는 시나 문구가 있나.△좋아하는 말로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을 꼽는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말을 되풀이 뇌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지나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생각할수록 진리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자칫하면 넘쳐나기 쉽다. 안 넘쳐야 한다. 늘 조심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과유불급이다.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친구 사이나 후배와의 관계에서, 특히 친한 사이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과공비례도 같은 말이다. 상대를 대접할 때 인사도 과장하면 상대를 욕보이게 되는 것이니 적당하게 해야 한다. 술을 조심해야 하는 것도 술을 마시게 되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면 실언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넘쳐서 자기자랑으로 이어지니 조심할 일이다.- 개인으로서 코로나19 발생이후 확산과정을 책으로 냈다. 섬세하고 자상한 마음 씀과 세상을 보는 시각을 때로는 객관적으로, 때로는 개인의 내면을 담담하게 그려냈더라.△2020년 2월 대구에서 처음 코로나19가 시작해서 2021년 봄 전국적으로 확산되기까지 1년 여에 걸친 기간 동안의 국내외 코로나 역병의 확산과 대응, 그리고 개인의 일상과 성찰을 담은 일지를 책으로 낸 것이다.코로나19 상황들을 언론 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때그때 기록한 일기들을 적다보니 원고 분량이 100페이지가 되었다. 여기에는 내 가족의 삶과 우리 이웃들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었고 방역에 대비한 시민들의 모습이 일상화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먼 훗날 내 자손들이 오늘의 일을 알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평범한 오늘날의 일상이 훗날에는 역사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코로나 백신이 도입되기까지의 인류의 재앙을 기록으로 남겼다.코로나 일기 중2020년 4월 2일(목요일) 흐림아내가 기침을 계속 한다. 걱정이다. 부엌에 가서 밥을 전기밥솥에 안쳐 놓고 따듯한 엽차 한 잔을 아내의 침실에 가져다줬다. 오늘은 슈퍼에 가서 녹차를 좀 사와야겠다. 녹차가 떨어졌다.오늘은 9시경에 대구은행에 가서 이사장 건 5백만원을 처리해야 하겠다. 영진중개소에도 10시경에 가야겠다.어제는 공부를 못했다. 공부 안 한 날은 마음이 공허하다. 편치 않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느낌이다.오늘 조선일보 조간에는 일본의 코로나 대응 관계기사가 났다. 확진자가 3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 한국 중국 미국 등 외국 49개국에 대해서 입국금지 조치했다고 한다. □ 최상희(崔相熙·82)호 상산(常山). 경주출신. 대구상고, 영남대 상학과, 영남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 박사.전 대구은행 상무이사. 대동은행 전무이사. 우리캐피탈(주) 대표이사.영남대 총동창회 부회장, 대구상고 총동창회장. 영진전문대 초빙교수.경주최씨 광정공파 종친회장, 대구향교 수석장의. (사)담수회 부회장. 경주최씨 대구종친회 회장. 구회당 종중회장. (사)구향회 회장. 현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감사.조간신문을 1면부터 국제면, 사설까지 꼼꼼히 읽고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놓지 않는다. 유학의 ‘수신제가’를 수범으로 보여주는 회원들의 거울. 늘 공부하고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세상과, 그리고 주위에 맞춰가려 노력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4-04

건축에는 문화·역사, 우리들 삶이 담겨 있다

건축은 우리 삶을 담는 그릇이다. 겉으로 보기엔 조형성의 예술 영역이지만 그 내면에는 기능이라는 목적성을 지니고 있다.건축가의 생각이 현실적 작품으로 구체화되지 못하는 한계를 건축 스케치로 해소하는 최상대 전 대구경북건축가협회장. 그에게 건축은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 시대의 정신과 함께 담겨 있어야 한다. 그는 건축을 집짓기라는 영역에서 인문학의 세계로 지평을 넓혀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가겠다고 욕심낸다.한옥의 현대화는 외형의 복제가 아닌 전통과 문화의 계승이어야 한다. 현재 대구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개발과 재건축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미래를 내다보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획일적 아파트만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 좋은 건축, 훌륭한 건축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탄생하나.△기능과 구조, 미(美)를 건축의 3요소라고 한다. 편리하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건축은 인간의 삶을 보호하고 영위하는 건축의 기본이다. 건축주의 균형 있는 요구와 건축가의 훌륭한 설계에 따라서 성실한 시공자의 능력이 합일된 마음으로 세워지고 만들어진다면 좋은 건축이 탄생할 것이다. 인간의 삶을 보호하고 영위하는 주거 건축에서 지금은 현대 문명생활을 위한 이상적 건축이 요구되고 있는 시대이다.- K팝으로 대표되는 한류가 각 분야에서 세계화하고 있다. 한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전통건축과 한옥은 그 시대의 시간과 생활문화라는 공간적 산물이다. 당연히 고려, 조선시대의 일상과 삶이 건축에 녹아 있다. 그러나 지금 시대문명과 함께 공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궁궐건축, 사찰, 민가, 정자건축에는 세계에 없는 K건축만의 정신이 있다. 건축문화 유산 계승과 연구로 한옥의 정신과 공간의 맥락이 연결되는 창의적 건축 탐색이 곧 세계화로 이어질 것이다. 기와지붕, 처마선, 배흘림기둥으로 표현되는 외형적 형태의 재현에 머물러서는 한계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한국의 서원, 전통마을의 구성들은 일제강점기, 6·25동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중간적 연계가 없이 단절되어 버렸다. 그러나 K팝의 세계화처럼 이제는 건축에도 한류 파워가 생겨나고 있다.- 현재 대구시내 곳곳에서 재건축과 재개발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방향으로 진행돼야 경관과 주변 환경 등 생활 여건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나.△아파트는 현대 주거생활이 극대화로 치달으면서도 건축 문화적으로는 하극상(下剋上)으로 표현되어지기도 한다. 함께 산다는 ‘공동 주거’라는 본질에서도 벗어나 차단되고 고립으로 치닫고 있다. 골목도 이웃도 동네도 사라지고 건폐율과 용적률 채우기에 급급한 도시를 만들어 가고 있다.땅값이 올라가고 재산증식 수단으로 아파트 구입과 평수 늘리기에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 현실이 되고 있다. 도시계획도 이상적인 삶의 터전이 아닌, 아파트지구만 채워지는 기형적 도시가 되고 있다. 도시의 바람길이자 물길인 신천 양편에도 아파트로 채워져 가고 있다.시민의식과 국민의식이 재건축과 재개발은 기존의 개발과 건축을 더욱 새롭고 미래를 내다보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다음 세대들이 함께 어울려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공적 도시’라는 화두를 사명으로 여겼으면 한다. 그러나 현실적 제도적 인식적으로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생각이다.- 아파트에 변화를 주는 것은 불가능한가.△아파트에 변화를 줘야 하는데 그 변형이 테라스를 넓히고 빛을 거실로 들여 놓는 정도이다. 변화를 주고 설계를 새로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해서는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건축주의 생각이나, 그렇게 해서 살려고 하지 않는 시민의식도 바뀌어야 할 문제다.지금 아파트는 외관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통제가능한 권위주의 국가가 아닌 이상 다양한 아파트 디자인과 경관 변화는 어려울 것 같다.- 한옥을 좋아하면서도 한옥지구로 지정해도 현실적으로는 잘 들어서지 않는 것 같다.△한옥의 정신은 마당과 사랑채에 있다. 기와집이라는 목조 시대의 필연적 결과가 한옥인 것이다. 복고에의 환상이나 추억이 외형의 복제를 가져오는데 이건 또 다른 실패작일 뿐이다. 대형 관공서 같은 건물이 표피만 한옥을 복제한 시멘트 덩어리는 결코 문화가 아니고 전통도 아니다.우리는 골목이나 작은 가게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전통을 파괴하고 재건축하고 있다.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고도(古都)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빠른 근대화는 금전적 가치와 함께 전통이나 한옥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생활 터전이 상업적 가게로 변하면서 현재까지는 성공적이지만 계속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시민상대 특강을 나가보면 수강생들의 높은 수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생활로 이어지기에는 부족하고 교양으로, 생각으로만 이해되고 있을 뿐이다.- 도시에서 건축물 외관과 내부만 치중하고 건축물 주위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도시에 공간 구조물을 배치하면서 쾌적하지는 못하더라도 불편하지 않은 생활공간부터 마련하는 도시계획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건축물이 예술작품이라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바라는 경제가치가 내재된 상업시설이자 업무시설이다. 아파트도 분양 대출 투자라는 논리 안에 갇혀 있다. 도시 경관을 지배하는 것은 고층 주상아파트가 되고 있다. 재개발 재건축이 그렇듯 피해갈 수 없는 경제 논리 과정에서 건축가 행정가 시행사 건설사의 인식과 무엇보다 시민의식의 변화와 향상이 가장 중요하다.그나마 문화 예술 시설이 복잡다단한 도시민의 정서를 품고 위안을 주는 오아시스적 건축이어야 하는 이유다.- 대구문화예술회관이나 경주 엑스포공원의 황룡사 9층탑 등 건축물은 나름의 상징을 띠고 있다.△대구문화예술회관이나 시민회관(대구콘서트하우스), 경북실내체육관 건축은 지역건축가인 고 후당 김인호의 작품이다. 시민회관은 철거하지 않고 건축 이미지를 영속하는 리노베이션으로 새로운 콘서트홀로 변신하는 사례를 남겼다. 기능이 다한 실내체육관도 구 경북도청 후적지(현 대구시청 별관)와 함께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 시민공간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체육관이라는 한정된 이미지에서 문화적 시각을 입혀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하길 바란다.경주 엑스포공원 상징 타워는 1500년 전 세워진 신라 황룡사 9층탑을 일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아이디어에서 실루엣으로 상징화한 현대 건축이다.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역사보존도시의 건축 컨텐츠요, 경주의 랜드마크다.- 유럽의 런던이나 파리 같은 도시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다. 중국의 고대 도시들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그들은 모두가 역사적인 건축 문화유산들이다. 과거 시간이 그대로 연계되어서 지금 국가와 도시의 관광 상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도 도동 도산 옥산 소수서원과 하회 양동마을, 대구의 청라언덕, 사대문 읍성, 약령시의 흔적으로 컨텐츠를 구축해 왔다. 우리가 배척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로 지워버렸던 일제강점기 건축조차 100여 년의 근대건축으로 보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역사의 단절은 곧 잃어버린 건축 문화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구시청 신청사를 달서구 두류정수장 부지에 건설하게 된다.△대구 미래의 청사진을 담을 새 청사 건축은 명실상부한 대표 건축 작품을 세울 기회를 살려야 한다. 두류산 공원의 자연환경을 연계하고 여유로운 부지와 공간적 배경, 시청사의 업무기능에만 한정하지 말고 시민문화 공간, 대구시 상징 공간, 주변 전망공간을 모두 갖춘 복합적 미래 청사로 세워져야 한다. 기존의 대구시 청사는 업무적인 1차 기능만 담당했다. 새로 지어질 신청사는 오피스 빌딩의 단순 기능을 넘어 대구의 대표 조형물, 랜드마크로 건축되어야 마땅하다. 일본 동경도 청사처럼 문화와 예술의 복합기능과 시가지 조망이라는 기능을 더한 다목적 종합 청사여야 한다.- 대구지역의 공공 건축 공간에는 어떤 조형 건축이 들어서야 할 것인가.△앞으로 공공건축은 시립박물관과 도시건축미래관이 들어서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시립박물관은 지역 내 각 대학에 분산되어 있는 박물관 기능을 한 곳으로 집중하여 관람 기회를 높이는 것이다. 진정한 시민의 박물관으로 전환해서 박제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또 대구의 역사와 변화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도시건축미래관이 들어서야 한다. 그곳에서 대구의 50년, 100년사를 집약 전시해서 지금까지 도시의 난맥상을 짚어보고 앞으로 청사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민뿐 아니라 외부 방문객에게 대구의 건축과 경제 문화를 한 곳에서 보여주는 공간 시설이 되는 것이다. 세계의 도시에는 그 도시의 생성과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도시 건축박물관이 있다. 중국 닝보시의 도시계획관처럼 도시의 미래 비전을 보여줌으로서 앞날을 내다보게 하는 일종의 도시계획관이 되는 것이다.- 건축가로서 스케치여행을 활발하게 하고 책도 3권이나 냈다.△과거에 반해 건축이 인문학 영역으로 범위가 무한정 넓어지고 이에 따라 다양한 체험을 통한 건축 활동이 요구되고 있다. 현실에서는 건축주의 요구와 법규적 제약, 경제적 여건 등 이유로 건축 설계 작업이 작품이 항상 좋은 작품으로 현실화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완성되지 못한 아쉬움과 과정을 스케치와 글로 표현해 왔고 전시와 책으로 정리했다. 컴퓨터로 표현하기 이전 마음과 몸의 표현이 스케치 과정이다.대구와 호치민 교류 미술전에 대구의 건축을 표현한 스케치 시리즈를 출품, 베트남 미술인들에게 건축가의 스케치가 대구를 알리는 중요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책 발간을 통해 대학, 도서관, 연수원, 단체모임 등에서 건축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됐고 시민들에게는 인문으로서의 건축을 이야기하고 대화하는 계기가 됐다.- 건축가로서, 화가로서, 수필가로서 앞으로 활동 계획은.△코로나19 팬데믹은 개인적으로 내면의 깊이를 살찌우는 성찰의 시간이라고 생각된다. 대중적 만남을 자제하는 대신 진정성을 갖고 참으로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과 깊게 교유하고 예술 문화의 세계에 깊숙이 침잠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돌아보면 그동안 건축가로서 또 사회적으로 활동도 열심히 다양하게 했다. 아직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외연을 확장하며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겠다. 국내외 여행도 더 많이 다니고 스케치도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시민 사회의 문화적 고양과 성숙된 건축 문화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인문학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기회가 닿는다면 예술학 철학 공부에도 도전하고 싶다. 물론 건축설계 본래 작업을 손 놓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작업 공간을 재정비하고 있다.□ 최상대(崔相大·66)한티시티건축 대표. 전 대구경북건축가협회장.경남 의령. 중앙대 건축과, 경북대 건축과 석사.대구경북건축가협회 회장, 대구예총 수석부회장(회장 대행), 대구광역시 경관위원(장).이인성 고택 복원추진위원. 경북대, 영남대 겸임 초빙교수.저서 ‘말하는 건축, 침묵하는 건축’, ‘대구의 건축 문화가 되다’, ‘건축, 스케치로 읽고 문화로 말하다’.대구건축작가상 수상, 한국예총 예술문화 대상.포항 워터폴리, 부광교회, 경북대 전자공학관, 복현회관, 영남대 기숙사, 국군체육부대, 88올림픽 레슬링경기장 등 설계.경남에서 고교시절 대구로 전학 왔고 대학 졸업후 국내 최대 정림건축에서 10년 근무했다. 삼척문화회관 전국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대구에 정착, ‘고군분투’한 끝에 대구에 뿌리를 내리고 작품 활동과 사회활동 병행했다.건축을 전공한 공학도이지만 문화와 예술을 건축에 접목한 인문학적 작품에 집중하고 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3-28

사학에 자율권 주고 비리에는 강력 규제를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위상을 바꾼 대한민국의 저력은 교육에서 나왔다. 그 교육의 절반을 사학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학에 대해 적절한 보상이나 지원은커녕 규제만 하고 있다고 사학은 반발한다.홍택정 문명고 재단이사장은 사학이 건학 이념을 구현할 수 있도록 사학재단에 자율성을 달라고 주장한다. “사학에서 자성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라는 그는 “비리 사학은 강하게 처벌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는 사학들까지 연좌제로 매도하는 2중 3중의 사학규제법을 완화시켜 달라”고 말한다.지난 정권에서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지정 파문을 겪었던 홍 이사장은 “우리 미래들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제공해 줄 역사 교과서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이 바뀌었다. 새로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취임 초에는 누구나 비단 같은 말의 향연을 벌여 국민들의 기대만 잔뜩 높여놓았다. 하지만 결국은 정치인들의 잇속 챙기기로 마무리되어 원성을 샀던 전례들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교육 현장에서만이라도 학생들을 올바른 정체성을 가진 애국 국민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뒷받침해 달라. 특히 교육현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사학의 자율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 달라. 사학은 지난 정권에서 매를 많이 맞았다.- 사학의 정책에 불만이 많은 것 같다.△(사학 정책 얘기에 민주당 교육특별위원장이자 이재명 후보 선대위 교육위원장인 3선의 유기홍 의원이 보낸 편지를 보여주며) 지금 대한민국에 사립학교가 있는지 되묻고 싶다. 사립학교는 ‘법인이나 개인(私人)이 설립 경영하는 학교’라고 법으로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설립 주체가 자신의 책임과 권한을 갖고 그 조직의 운영에 관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경영이다. 그런데 그 경영권을 박탈당했으니 하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권한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나.△현재 사립학교의 경영 핵심은 학교의 학생 선발권, 학생의 학교 선택권, 등록금 책정권(재정운영권), 교과과정 편성권, 교원선발권(인사권)이라고 할 수 있다. 설립자는 여기서 어느 것 하나 갖고 있는 게 없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 보루였던 신규교원 선발권도 빼앗기고 운영에 관한 예 결산업무도 학교운영위원회가 심의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립학교의 경영은 설립주체가 아닌 타인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아닌가? 최소한 그 중 하나라도 남아 있어야 그나마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4차 산업에 대비한 신바람 나는 교육현장은 자율성 보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사에 개입할 수 없는 식물사학에서 이사장들은 현실적으로 의욕을 상실한 채 교육에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사립학교는 공익법인이고 공공재 아닌가. 어찌 주식회사나 사유재산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물론 사립학교는 비영리 특수법인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주식회사와는 다르다. 법인 구성에서부터 학교법인은 주식회사보다 자율성을 크게 제약받고 있다.정부는 사립학교의 모든 과정을 관여하고 법과 행정지시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학교 운영과 교육과정을 통제함으로써 학교법인은 고유한 설립목적인 건학이념 구현의 명분만 주고 실제로 학교 운영이나 교육과정, 즉 학사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교육과정과 급식 등에서 발생하는 인명사고와 식중독 등으로 발생하는 사고의 민사배상 책임을 지게 하는 등 오로지 행, 재정적, 대외적 책임만 지고 있다.사학의 기본권인 학생모집권, 수업료 징수권, 교육과정 편성권을 정부가 직접관리하고 법인구성권, 인사권의 제약도 매우 심각한 상태로 사학운영의 의욕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다,- 사립은 공립에 비해 재정적 부분에서 정부 지원에 차별이 있나.△학교 1개를 짓는데 500억원이 들어간다. 이런 시설비를 공립학교의 경우 BTL(민간이 공공시설을 짓고 정부가 임대료를 지불) 방식으로 정부에서 지불해준다.30학급 규모의 초등학교 경우 월 9천만원, 20년 동안 10억8천만원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의 공립학교에 시설 사용료로 연간 5조원 정도를 지불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국의 1970개 사립학교에는 시설사용료나 임대료를 주지 않고 있다. 과거의 잘못 된 관행은 고쳐져야 한다면서 과거사위원회가 이런 관행을 고치지 않고 있다.- 사학에 문제점은 없나. 사학의 대형 재정 비리가 잇달아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면 국민들은 사학을 더욱 강력히 규제하라며 정부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사학 스스로 자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사학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투명하지 못한 학교 운영과 비리 때문에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학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도 자성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비리를 변명하거나 감싸려고만 드는 세력들이 있다. 이를 좌파 정권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학의 비리를 드러내고 두드리면 국민들이 지지하고 표가 되니까 사학을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다.- 모든 사학이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 아닌가.△사학에서도 초 중 고와 대학은 분리해야 마땅하다. 초 중 고교의 사학운영에 따른 비리는 차라리 생계형 비리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다. 이사장에게 최소한의 품위유지비조차 줄 수 없는 곳이다. 특히 1908년 설립된 문명학교는 이윤이나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었다. 민족교육이 목적이었다. 이건 알아 줬으면 한다.사학비리는 대부분 대학에서 일어난다. 수많은 전문대학들 중 일부는 설립 때 한 몫 보려 한 것 아닌가. 누가 허가해 주었나. 교육부 아닌가.- 홍 이사장이 생각하는 사학 비리 근절과 해법은 어떤 것인가.△사학 설립자의 절반 이상이 제대로 보상해주면 학교 운영을 국가에 넘기겠다는 의견이더라.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제안했다가 내부적으로 배신자 소리를 듣기도 했다. 사학에 자율권을 주고 사학의 주장과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다음은 사학의 비리에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해 강력 제재하는 것이다. 그만큼 분명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잘못도 사학재단에 있다.- 문명고는 지난 박근혜 정권때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지정 신청했다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렀다.△당시 검정교과서가 왜곡 좌편향된 내용으로 문제점이 많아 교육부가 새로 국정교과서를 발행했다. 교사 2명과 교수 1명이 집필한 검정에 비해 국정은 경제 역사 문화 등 각계 전공자 27명이 참여했다. 세상에 알려지기는 국정만 사용하는 것으로 호도됐지만 사실은 국정과 검정을 비교 연구하는 연구학교로 신청한 것이었다. 합법적 절차를 거쳐서 결정했고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규명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국정화 계획이 발표되자 전국적으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야당과 좌편향 된 역사과 대학교수를 비롯한 전교조와 민노총 등이 내용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친일미화, 군사독재 미화란 프레임으로 사전에 조직적 반대를 했다. 전교조 지부장이 김태동 교장에게 포기 강요 협박전화를 하고 민노총과 전교조, 농민회, 심지어 장애인 단체까지 교장실에 난입하여 협박하고 소란을 피웠다. 학생들과 일부 학부모를 선동하였으며, 교내에서도 시위를 벌였고 내가 제지하자 욕설과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사 기자들과 인터넷 신문 기자들이 소강당에서 반대교사들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무법천지가 되었고, 끝내 3월 4일 입학식장에까지 난입하여 입학식을 무산시켰다.- 그 과정을 문명고 역사지키기 77일 백서에 담은 것인가.△검정교과서 비판 토론회는 무시 생략된 체, 불법, 폭력적 시위가 계속되었지만 연구학교 채택을 포기하지 않자, 마지막으로 민변 주도하에 국정교과서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고, 사법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경북 교육청이 항고하였으나 기각됐다. 법치를 주창하는 정권 하에서 벌어진 불법 사태를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 것이다.- 당시 문명고의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지정을 반대한 단체들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사실 반대의 큰 목적은 국정이 발행되면 초중고 학생을 상대로 한 거대한 참고서 시장을 잃게 되는 것을 염려한 숨겨진 이유 때문이다. 초,증,고생 600만명이 사용하는 교과서는 물론 문제집과 참고서, 교사용 지도서 등의 시장을 상실하게 되니 밥그릇 챙기기가 반대이유였다.- 문명고는 어떤 학교인가.△1908년 나의 증조부를 포함한 8명이 사재를 털어 경북도 인가 1호로 설립한 문명고등보통학교가 시작이다. 일제가 일방적으로 공립화해 버렸는데 1966년 선친(홍영기, 2021년 작고)께서 군 제대 후 학교법인 문명교육재단으로 조직을 변경하고 중고교를 설립했다. 1992년 운문댐 건설로 경산시 백천동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떻게 학교 운영에 뛰어들었나.△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부모님은 법관을 바랐지만 나는 창작 예술계를 원했고 대학은 행정과를 나왔다. 사업을 했는데 교제하고 접대해야 하는 풍토가 싫어 사업을 접었다.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이 후 부친의 학교 경영을 도와주다가 내가 맡게 됐다.- 최근에 부친의 농촌부활운동을 담은 ‘대통령과 쇠똥소령’이라는 책을 냈다.△새마을운동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는 생각에서다. 부친(홍영기. 2011년 작고)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군 생활부터 인연이 있었고 1970년 새마을운동이 공식화되기 이전 청도군 운문면 방음리에서 일어난 농촌계몽운동으로 1968년 5·16민족상을 받았다. 방음리 ‘살고파 마을’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 부친이 마을 현황을 브리핑을 했던 새마을 운동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부친의 농지 개척과 농촌 계몽운동, 문명교육재단 설립 등을 담았다. 일종의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이다.-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국정교과서의 폐기를 선언하여 연구학교 신청이 무산되었다. 이제 다시 새 대통령을 맞았다. 다시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대한민국의 아들딸들이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사람,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현재 60만 고3들이 왜곡된 교육을 통해 부정적 사고가 형성된 채 사회로 진출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모든 국민들이 정치에만 올인하고 있다. 이들에게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질 때 학생들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또 국정 교과서는 햇빛을 보지 못했지만 미래 세대에게 올바를 역사 인식을 심어 줄 교과서로 다시 태어날 것으로 믿는다. □ 홍택정(洪鐸正·75) 문명중고등학교 이사장청도출신. 마산고, 영남대 행정학과 졸업.현 (사)한국사립초중고등학교법인협의회 경북도회장국사문제연구소 이사. (사)산남의진기념사업회 자문위원.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택정(鐸正)은 목탁의 소리다. 바른 소리를 내야 한다. 원칙주의자다. 돌이켜 보면 늘 시끄러운 놈이었다.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참아본 적은 없다. 그런 면에서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지금도 길가다가 좋은 것을 보면 학교에 갖다 놓고 싶다. 아버지를 닮았다. 학교 사랑이다. 집은 그 다음이다. 내가 좋으니 학생들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3-21

문화 예술인을 모두 껴안는 대구예총으로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 했다. 굴뚝이 아닌 예술과 문화가 도시의 품격과 시민의 삶의 질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한다.이창환 대구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은 예술과 문화의 힘으로 대구를 업그레이드 하겠다고 선언했다. 4년의 부회장을 거쳐 10개 예술단체 총연합회 회장에 추대된 그는 예총부터 변하고 예총이 앞장서서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고 선언했다.그는 예술인만이 아닌 시민과 함께 공유하는 예술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약속한다. 당장 예총회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생활예술인 단체들을 포용하는 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예총의 외연 확대로 몸집을 키우는 것이 예술 문화를 시민과 함께 공유하는 한 과정이라 말한다. - 회장 취임을 축하한다. 예총 부회장을 4년간 역임했고 처음으로 경선 없이 단독 출마해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됐다. 대구 예술 발전을 위한 이창환 회장의 포부나 목표는 무엇인가.△대구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회장으로서 각 회원단체 간 의견을 조율하고 통합하는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화합과 희망을 모토로 제12대 대구예총에서 대구의 예술인들을 대변하고 대구 시민과 함께 예술문화도시 대구를 만들어 가겠다.- 취임하면서 ‘대구의 힘은 예술이다’고 했다. 예술과 문화가 언제부터 그렇게 대접받게 됐나. 아니면 그렇게 대접받도록 하겠다는 말인가.△우리 사회의 유력한 성장 동력이 바로 예술이라는 믿음에서다. 개인의 삶의 질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며 예술가라고 생각한다.대구를 예술과 문화로 살찌워야 한다. 나라와 도시의 품격은 수출이나 국민소득이 아니라 예술문화를 어떻게 얼마나 꽃피우느냐에 달려 있다. 굴뚝산업으로 도시를 활성화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대구시의 성장 동력은 예술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예술의 공공적 가치에 대한 인정이 꼭 필요하다.또 예술가에 대한 존중과 배려도 예전보다 향상되었다. 하지만 예술가들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 주는 등 사회보장제도는 아직 개선의 여지가 많다. 예총이 앞장서겠다.- 대구 문화 예술이 발전하기 위해서 예총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어디까지인가.△우선 대구를 대표하는 예술문화단체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고 선도해 가기 위하여 대구예총이 앞장서겠다. 이와함게 대구예술문화정책을 선도하는 정책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이다. 또한 예총 회원단체 상호간의 협업을 확대하고 대구 예총의 품격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더욱 창의적이고 다양한 개성을 추구하는 예술행사로 발전시킬 것이며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어려웠던 지난 시기를 미리 준비하는 차원에서 예술인들을 위한 예술인의 복지 환경 개선과 예술창작의 쾌적한 분위기 조성에 더욱 힘쓰도록 하겠다.- 기업의 메세나 활동을 강조한다. 지역 기관이나 기업과 예술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생각인가.△지역 예술인 상당수는 기본적 삶을 영위하기에도 벅찬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메세나 활동을 활성화하려고 한다.대구시교육청의 경우 방과후학교나 방학 기간 동안의 예술교육을 상의하는 것이다. 지금 교육청의 보건체육과에 예술이 포함됐더라. 그만큼 예술이 바로 인성교육과도 직결되기 때문 아니겠나. 예총은 코로나19 초기에도 지역 고3 학생들을 위한 마스크 크리닝에 1억원을 지원했다. 회원들은 개인적으로 여러 창구를 통해 방과후학교에 참여하고 있다.-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메세나 활동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특별히 다른 점이 있나.△기업에 무조건 도와달라고 말하는 건 염치없고 실제 도움받기도 힘들다. 우리가 먼저 도움을 주고 기업이 문화 예술계를 지원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일회성이 아닌, 영속적인 지원이 가능해 진다고 본다.기업체가 예술계를 지원하고 신문 보도 등으로 1회성에 그치게 되면 그 효과는 반감된다. 그들의 기부에 걸맞게 예우를 해 줘야 한다. 대학이 기부금을 받으면 건축물에 이름을 붙여 대우해주는 식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대구 도심의 근대문화유산 중 개인 소유를 기업이 매입해서 대구시가 운영토록 하고 예술계에서 실질적인 운영을 맡는 것도 한 방안이 될 것이다.또 ‘기업으로 찾아가는 메세나 문화강좌’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메세나를 통해 기업과 결연한 문화예술단체와 개인의 합동 콘서트, 합동 전시회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 회장의 계획을 구체화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예총부터 변화가 필요한 것 아닌가.△물론이다. ‘예총부터 변하자’고 강조한다. 불편하고 불필요한 행사는 과감히 없애거나 줄이고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총 내부의, 우리들만의 보여주기 식 행사였다면 과감히 탈피하고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모든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제 시민들의 눈도 그만큼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예총의 위상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다.△대구시와 문화재단, 대구예총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예총의 위상 강화와 회원 단체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제도적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 또 오는 지방선거에서도 대구의 문화 예술인을 지원하고 문화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지지의사를 밝히는 후보를 지원할 계획이다. 지역의 문화 창달과 예술 발전은 자치단체장이 할 일이다. 문화 예술분야 공약을 하고 이행할 의지가 있는 후보는 도움이 되도록 지원해 줄 것이고 그렇지 않은 후보는 개인적으로라도 낙선운동을 벌일 작정이다. 이미 지난 대선 때도 그런 선례가 있다. 우리는 정치권과 사전 협의 없이 예총 스스로 대구를 예술 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한 공약을 하고 이행 의지를 보이는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예총 차원에서 공개 천명했었다. 당시 예총의 행동에 정치권이 뒤늦게 합류하는 모양새를 보이기도 했다.- 예총의 외연 확장을 위한 계획은 어떤 것이 있나.△현재 예총에는 10개 단체(건축가회, 국악협회, 무용협회, 문인협회, 미술협회, 사진작가협회, 연극협회, 연예예술인협회, 영화인협회, 음악협회)가 있는데 아직 예총에 가입하지 않은 문화 예술인과 단체들에게 과감하기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다. 지금 그 작업을 벌이고 있다. 단체에 따라 입회금이 너무 많거나 대학을 졸업해야 가입할 수 있는 등 조건이 까다로워 회원으로 가입하지 못하는 단체도 있다. 이런 예술인들에게 예총이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다.체육회가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이 합쳐져 하나의 체육단체가 되었듯 우리 예총도 순수예술 중심에서 생활예술까지 포용해 시민과 접촉면을 넓혀 나가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뷰티(Beauty), 꽃꽂이, 다도, 생활음악, 실용무용 등 예술인들도 예총이 포용하는 것이다. 순수예술과 실용예술이 서로 보완하고 도움을 주면서 함께 발전하게 될 것이다. 예총 정관에 ‘특별회원 단체를 둘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시도된 적이 없었다. 올해는 특별한 회비 없이 일단 신사만으로 가입을 승인하고 향후 추이를 지켜보겠다. 그렇게 되면 현재 1만명 규모인 대구 예총이 4만~5만명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예총이 주체가 되어 대구시민과 함께하는 예술문화 도시 대구를 조성하는 데 한 발 더 다가가려는 것이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오래전부터 계획을 갖고 있었나.△대구예총 부회장을 하면서 구상해 온 것이다. 틀도 어느 정도 갖춰가고 있다. 지역출신 전 국회의원을 정책위원장으로 하고 예총 내 분회별 대표와 외부인사 등으로 15명 내외의 정책위원회를 구성해서 추진할 것이다. 임기 초반에 성과를 보려고 한다. 취임이후 대구시내 8개 구 군 자치단체부터 여러 기관단체들을 찾아 소통하고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대구시청이 두류공원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시청 별관과 시립미술관, 문화예술회관 등 대구 전역의 문화공간에 대한 접근성이나 예술성, 이용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종합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대구가 행복한 예술문화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시 전체 기본계획을 예술문화와 접목시킨 도시계획이 필요하다. 신 대구시청 주변의 두류공원 전체를 행정과 문화 예술 관광 특구로 지정하여 대구의 랜드마크로 만들어야 한다. 대구 도심지는 역사 문화 예술의 재발견, 보전, 승화로 구체화한 후 클러스터화하여 시민의 접근성과 이용률을 높일 수 있는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도 이제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구의 위상과 대구 예술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그것이 대구시민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문화의 세계화가 정치 경제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는 21세기다. 세계적인 문화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문화예술 진흥이 아주 중요하다. 대구 예술의 발달로 대구시민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게 해 대구 한류를 이루었으면 한다. 시민과 함께할 수 있는 창작 공간 마련으로 대구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앞장서겠다.- 지금 대구 시가지 곳곳에서 재건축과 재개발로 들썩거리고 있다. 건축가로서 도시의 균형 발전을 위해 어떻게 평가하나.△예총 회장으로서 그런 부분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 공인으로서의 예총회장 활동이 개인사업과 충돌하는 부분은 없나. 또는 제약을 받거나 개인 사업이 시간과 경제적 불이익을 받는 부분은 없나.△예총회장은 봉사하는 자리다. 회장 임기 동안은 개인의 본업은 잠시 뒤로 미루고 대구 예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개인사업체인 건축설계사무소 운영에 미치는 영향이 없지 않을 것 같지만 사무실 구성원들이 잘 해 주리라 생각한다. 건축가와 건축사는 다르다. 예총의 예술 문화영역과 건축사 업무는 별개이므로 부딪치는 부분은 없다.- 본인 소개를 한다면.△항상 겸양과 실천 정신을 가슴에 품고 생활하고 있다. 경북 의성군 안평면 시골마을에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대구로 전학 와서 일찍부터 자립심을 키워왔다. 고교때 미국 유학중인 선배의 박사학위 논문 자료수집에 따라 다니면서 전통 건축에 흥미를 느껴 건축을 전공하게 됐다. 자본금 150억원 회사 대표이사도 역임했고 대구경북의 대표 경제인들과의 교류도 하고 있다. 촌스럽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공경 경(敬)자를 되새긴다. 이창환(李暢煥·60) 대구예총 회장·토담 건축사무소 대표영신중, 대륜고, 울산대 건축학과, 경일대 석사, 계명대 대학원 건축공학과 박사.대구경북 건축가회장.계명대 겸임교수, 대구시 건축심의위원, 대구시 한옥위원회 위원 등 역임.대구시 건축상 금상(2004), 대상(2014), 공공분야 은상(2016) 한국예총 예술문화공로상 대상.포항 코아루 공동주택, 포항 항구동 호텔. TBC 경북본부 사옥 신축, 대구FC클럽하우스 건립, 문화예술회관 팔공홀 리모델링, 경북도 동해안발전본부 청사지원센터, 영남이공대 대구대 기숙사 신축공사 등 설계.내성적으로 보이지만 목표를 설정하면 앞만 보고 매진하는 성격이다. /이경우 편집위원

2022-03-14

세계 수준의 병원서 최고 의술로 암 정복 도전

과학의 발달은 인체의 신비를 한 꺼풀씩 벗겨내고 있으나 암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신약개발과 새 수술기법 연구로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며 암 정복도 멀지 않다고 믿게 하는 의사.부인암의 조기 진단과 복강경 로봇 수술의 세계적 권위자 조치흠 계명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는 “의사로서 병에 대한 지식은 20%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며 겸허함을 보인다.국립암센터 암정복 추진 기획단 기획위원으로 1996년 세계 최초로 반복적 자궁경관 무력증을 복강경을 이용한 자궁경부 봉축술을 시행헸고, 2014년 아시아 최초로 자궁내막암 로봇 수술을 성공하고 2015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궁경부암 단일공 로봇수술을, 2016년에는 세계 최초로 자궁내막암 단일공 로봇수술의 수술 방법을 정립하여 가이드 라인을 세웠다.코로나19 사태 때 그는 대구 동산병원에서 비상대책본부장으로 코호트 격리를 감행했고 성서 동산병원을 세계 최고수준의 병원으로 만들겠다며 이전을 총괄 지휘했다. -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종이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고 있는데 방역 당국은 방역 패스를 중단하는 등 아예 손을 놓은 모양 같다.△지금 코로나19 상황은 2020년의 시작 당시와는 다르다. 어중간한 거리두기로 코로나 감염의 피크를 오래 가게 만들어 버렸다. 너무 오랜 기간의 제한으로 모든 국민이 지쳐 있다. 이런 때일수록 질병관리청에서 중심을 잡고 정치적인 목적에 휘둘리지 말고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이 백신 접종에 따른 집단면역의 완성을 통해 코로나19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 플랜 A에만 머물지 말고 경우의 수를 고려한 플랜 B, 플랜 C까지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계명대 동산병원은 코로나19 초기의 K방역을 이끌었고 그것이 세계적인 코로나 방역의 텍스트가 됐다. 당시 동산병원장으로 이를 진두지휘했다.△2020년 2월 대구에서 코로나19가 대규모로 유행하면서 동산병원이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되자 비상대책본부장을 맡아 하루 만에 병원 전체를 코로나 환자 진료공간으로 바꿨다. 음압 병동이 아닌 격리 병원 개념으로 건물 전체를 코호트 건물로 지정한 국내 첫 사례였다. 코로나 전담 병원으로 지정되자 의료진은 물론 청소부나 식당 조리사들까지도 외면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참여와 설득으로 극복해서 동산병원의 대응체계는 K방역의 모범사례가 되었고 세계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을 전 세계가 코로나19 방역체계에 공유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코로나19 병원에서 얻은 교훈’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WHO에서 발간하는 온라인 저널에 기고했다. 의사로서 보람이다.- 계명대 성서 동산병원이 밖에서 보는 외양도 아름답지만 병원 안에서 둘러보니 훨씬 정교하면서도 효율적이고 쾌적하다.△돌이켜 보니 이야기가 많다. 계명대 성서 동산병원 건축 공정률이 8%일 때 기획정보처장을 맡았고 오픈할 때는 병원장을 맡았다. 5천억원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이전 당시엔 이전기획단 부단장을 맡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챙겼다. 병원은 청정과 친환경을 모토로 건축했다. 환자와 의료진을 위해 병원의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에서도 대구를 넘어 세계 최고의 병원을 목표로 추진했다. 미국의 병원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2014년 스탠포드에 6개월이나 다녀오기도 했다.- 조 교수가 생각하는 동산병원은 어떤 병원인가.△환자가 오고 싶어 하는 병원, 직원이 자랑스러워하는 병원, 최첨단의 스마트한 병원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형태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인 면에서도 효율적인 건물이 될 수 있도록 세심한 신경을 썼다. 수술실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어느 수술실이건 주치의 이름만 넣으면 집도가 가능하도록 최적화 세팅이 되는 하이브리드로 꾸몄다. 병원 내 어디에서든 햇볕을 즐길 수 있고 어디에서나 쾌적한 공기를 숨 쉴 수 있다. 필터 비용만도 연 8억원이 들어간다. 입구 로비의 에스컬레이터 천정은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는 등 병원 곳곳에 스토리도 담았다.- 병원 오픈과 관련한 비화 같은 것은 없나.△환자 1명도 없는 0 베이스에서 시작했다. 병원을 오픈하면서 현금 600억원을 마련해 뒀다. 적어도 3달 정도의 직원 월급은 비축해 두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그런데 2주만에 900여 병상을 채웠고 결과적으로 그 자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부인종양분야 양성(혹) 및 악성(암)의 조기 발견과 치료에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다.△지역 여성 부인암 환자의 3분의 2를 우리 병원이 차지하고 있을 만큼 부인암 분야에서는 전국적으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5위 이내다. 그만큼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고 수술했다. 수술 환자들의 생존율이 국내외적으로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예후가 좋고 또 환자들도 만족하고 있더라.- 부인과 복강경 수술에서 로봇을 활용한 수술은 지금 어느 단계까지 와 있나.△주로 자궁절제 및 난소종양 수술에서 로봇 수술이 활용되고 있다. 복강경 수술처럼 로봇 수술도 종전 4곳 절제하던 수술에서 지금은 단일공으로 한 곳만 절제하고 있다. 그만큼 정교해 졌다. 최근에는 부인암까지 영역을 넓혀 자궁내막암 환자를 단일공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수술했다. 로봇 단일공 수술은 시간이 절약되고 복강경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수술할 수 있다.- 산부인과에서 하던 기존의 복강경 수술과 비교하면 로봇 단일공 수술의 장점은 무엇인가.△로봇 단일공 수술에서는 10배까지 확대되는 3D 고화질 입체영상과 같은 최첨단 이미징 기술로 의사가 수술 부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복강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첨단 장비다. 또 복강경 단일공 수술로 자궁적출 수술을 할 경우 의료진의 체력적인 부담이 큰 데 반해 로봇 단일공 수술은 편한 자세로 수술할 수 있다. 이것은 치료 효과와도 연결된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로봇 단일공 수술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한국 의사들의 술기가 워낙 좋아 전세계적인 표준 로봇 수술법이 국내 의료진에 의해 개발되고 있을 정도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독보적으로 로봇 단일공 수술을 하고 있다. 한국은 단일공 복강경 수술에서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임상 데이터도 많고 뛰어난 결과를 나타냈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술기가 좋아 복강경 수술 실력이 세계적 수준이라는데 구태여 로봇 수술이 필요하나.△부인과 수술에서 복강경 수술, 복강경 단일공 수술, 로봇 수술, 로봇 단일공 수술 등으로 기술이 발전해 왔다. 그만큼 환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로봇 단일공 수술은 환자에게는 최소 침습수술의 혜택을. 의사에게는 더욱 쉽고 정확한 수술이 가능하다는 혜택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마트폰 시대에도 2G폰으로 충분히 생활하는 사람이 있듯 반드시 로봇 단일공 수술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비용면에서 차이가 없다면 로봇 단일공 수술을 권하고 싶다. 수술시간 감소는 물론 환자의 만족도도 매우 높기 때문이다.- 여성 환자에게는 산부인과 수술 후의 삶의 질도 매우 중요할 것 같다. 로봇 단일공 수술이 환자에게 주는 특별한 혜택이 있나.△무엇보다 흉터를 최소화해서 여성들에게 미용적인 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절개창을 통해 모든 수술을 진행하기 때문에 몸에 흉터가 남을까 걱정하는 여성들이 이 수술을 선호한다. 또 환자의 회복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단점은 비용이 복강경보다 비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예전보다는 많이 낮아졌고 장점이 크기 때문인지 환자들이 큰 부담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지금은 자궁내막암과 자궁경부암 및 초기 난소암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산부인과에서 복강경 수술 전문가다. 자궁경관 무력증 환자에게 복강경으로 자궁경부 상부 봉축술을 성공시켜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로봇 단일공 수술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의사의 기본은 끊임없이 환자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는 치료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성격이 남을 따라 하는 것을 싫어하고 남과 다르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의사로서 직접 개발한 수술법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수술법을 연구하고 싶었다. 로봇 수술은 배우기도 쉽고 후배 의사들을 교육시킬 때도 편하다. 줄어드는 산부인과 외과의들을 생각하면 로봇 수술이 의료계 현실 문제의 한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병원경영에서뿐 아니라 의사로, 교수로 진료와 연구에서도 성과가 돋보인다. 최근 난소암 유발 여성호르몬을 밝혀내 세계 학계를 놀라게 했다. SCI급 논문 120여편을 비롯, 국내외 전문 학술지에 19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연구와 임상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평소 의사로서 병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은 20%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백신만 해도 그 실체를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아직도 연구할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다. 의사로서 나는 6시30분부터 진료를 시작한다. 병원장일 때도 진료와 수술을 했다. 계명대 산부인과와 의사 조치흠을 알리기 위해서는 논문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의사로서 좋은 논문 한 편 나오는 것이 가장 기쁘다.- 최근 연구중인 프로젝트를 소개할 수 있나.△95년부터 연구실에서 연구원 5명과 분자생물학 분야 신약 연구를 하고 있다. 자궁근종의 약물치료 방법과 생존율이 가장 낮은 난소암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연구다. 이를 위해 연구실에 5명이 연구하고 있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코로나 이전에는 해마다 미국 학회에 연구실 팀 6명이 함께 갔다. 1주일동안 미국에서 같이 생활하며 낮이면 각자 관련 섹션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저녁이면 함께 모여 맥주를 마시며 배우고 느낀 점들을 공유한다. 비용이 조금은 들어가는 행사지만 배우고 오는 것이 더 많다.- 비용 충당에 문제는 없나. 경제적인 어려움은 걱정하지 않았을 것 같다.△지금은 큰 문제가 없지만 어려울 때도 있었다. 어머니가 인정받는 조산원이셨다. 확장하던 사업이 잘 안되면서 월급을 차압당하는 처지로 내몰렸지만 가족들이 합심해서 해결해냈다. 살아가면서 위기는 생겨나고 위기가 좋은 기회가 된다는 이치를 터득했다. 그러면서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충성심이 생겨난다는 것도 체득했다. 그때부터 ‘어른 싸움은 돈 싸움이다’는 경험이 생활신조가 됐다. 인간에게는 위기가 오면 슬기롭게 극복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봉사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치흠(趙致欽·61)계명대 동산병원 산부인과 교수. 복강경, 로봇 수술 권위자. 현 아시아 부인과 로봇 수술학회장. 대륜고, 계명대 의대, 대학원, 경북대 의과대학원 박사.2004 국립암센터 암정복 추진기획단 기획위원. 동산의료원 산부인과학교실 과장, 암 연구소장. 동산의료원 기획정보처장.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장. 부인종양중개연구회 회장, 대한산부인과 로봇학회 회장. 대한부인종양, 폴코스코피학회 상임이사 및 부회장. 미국암확회 정회원. 대한의학 한림원 정회원.어머니가 유명 조산원이었고 부인과 아들, 딸, 동생 등 집안에 의사만도 20명이 넘는 의사가족이다.여성호르몬 프로게스테론이 난소암 유발의 주요 원인이라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고 생명과학분야 국제학술지 PNAS(미 국립과학원회보) 2020년 12월호에 게재되는 등SCI급 논문 120여 편 발표했다. 2021년 황조근정훈장 수상./ 이경우 편집위원

2022-03-07

3권분립, 민주주의 억압 세력 항거가 2·28 정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1960년 2월 28일 일요일. 대구시내 8개 공립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 부패에 항거하며 일시에 봉기했다.대구에서 일어난 청년학생들의 용기있는 외침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첫 민주화 운동이었고 4·19민주운동으로 이어져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기치를 드높이는 신호탄이 되었다.당시 경북고 2년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홍종흠 전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은 ‘우리 정치에서 여전히 공정과 정의가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아직 민주주의가 미성숙한 때문’이라며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더욱 발전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그동안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2·28민주운동이 국가지정 기념일이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다시 2·28 민주운동 기념일을 맞는다. 1960년 2·28의 주역으로서의 소회를 말해 달라.△2·28 민주운동이 일어난 지 62년이 지났다. 사람으로 치면 새로운 한 주기를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역시 우리 정치에서 핵심 이슈는 ‘자유와 공정’이다. 자유와 공정은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2·28 민주운동은 당시 자유당 정권이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채택했지만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악용했기 때문에 분노한 고등학생들이 일어섰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미성숙 단계에 있고 더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2·28 민주운동이 국가지정 기념일이 됐다.△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대구 경북뿐 아니라 호남지역에서도 청원에 동참해서 이뤄졌다. 2·28 민주운동이 명실공히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국민 청원에 이어 국회에서 통과되고 대통령이 선포한, 전 국민이 청원한 민주운동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2·28 민주운동이 일어나고 30년 뒤인 1990년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2·28 민주운동의 주역으로서, 또 기념사업회 발기인으로서 의장을 맡기도 했다.△당시 사회적으로 TK(대구경북) 지역이 군부독재의 아성처럼 잘못 비쳐졌다. 특히 6월항쟁 이후 이런 잘못된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우리 후손들에게 ‘선배들이 독재정권에 아부하고 기여한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다. 한반도에서 민주주의를 최초로 부르짖은 것은 바로 대구의 선배들이었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려주기 위해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사단법인이 되고 3대 공동의장(문희갑 대구시장과)을 맡았다.- 당시 고교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온 사실에 대해 실제 상황이 지나치게 미화됐다는 지적도 있다. 또 이젠 18세 이상에 선거권을 주고 있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1960년 당시 평균수명이나 사회적 성숙도, 평균 학력 등을 고려했을 때 2·28의 주역인 고교생은 지금과는 다른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정치 사회적으로도 성숙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선거 연령 18세도 찬성한다.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그들이 ‘어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18세면 어느 정도 사회를 보는 눈과 판단력은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2·28민주운동을 시작점으로 4·19민주운동이 일어났고 80년대에는 6월 혁명이 일어나는 등 젊은이들의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계속됐다. 우리 정치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나.△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나라로 인정받지만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민주주의가 더 발전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나 영국 같은 구미 자유 민주국가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헌법만 하더라도 1986년 6월 항쟁이후 5공화국의 헌법체제로 바뀌어 지금껏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지금의 경직화된 권력구조는 국론을 분열시키고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이명박 정권이후 지금의 문재인 정권까지 모든 정권들이 선거 때면 권력구조를 포함한 헌법 개정을 공약해 놓고도 집권 이후엔 실천하지 않았다.- 지금 여당에서는 자신들의 주요 지지세력인 86세대를 기득권이라며 일선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보다 20여 년, 한 세대나 앞선 2·28 세대들은 과연 그런 지조를 지켰나.△과거에도 세대교체론이 있었다. 그러나 동일 세대가 모두 같은 인식을 갖고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나이 들었다고 반드시 생각까지 낡았다거나 젊었다고 의식이 선진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에나 기득권은 존재했다. 공론화를 통해 국민총의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지금 세대교체론은 특정 세대들이 자기들 이해관계에 너무 결집해 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독일의 메르겔 총리는 10년 집권에도 박수받고 떠나지 않았나. 그런데 30대가 세상이 변한 2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같은 생각을 고집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그 30대가 여전히 특정 세력으로 몰려 있고 기득권이 돼 의식마저 20년 전에서 정지돼 있다면 ‘물러나라’는 세대교체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2·28 세력은 정치적으로 어떤 세력으로 그 정신을 이어오고 있나.△지금 우리 국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민주주의 정신이 바로 2·28 정신이다. 그러니 특정 정파적 이해관계에 의해 특정 세력이 뭉쳐 3권분립 정신을 망가뜨리고 민주주의에 도전하거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제도나 세력에는 반대해야 하는 것이 2·28 정신이다.이승만 정권이 제도상 민주주의를 채택하고도 개헌을 통해 4선을 획책한 독재정치를 했다. 그들은 ‘나는 바담풍이라 하더라도 너희는 바람풍이라고 해야 한다’는 억지를 부렸고 그것이 정권교체 요구로 이어진 것이 2·28 민주운동이다. 당시 정치적으로만 민주주의를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갖지 못하게 했다. 그것을 반대한 것이 2·28 운동이고 그 정신이 바로 지금의 민주주의 정신이다. 자유당 독재와 군부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이 바로 2·28 정신을 잇고 있는 것이다.- 2·28 정신과 6월 정신의 차이. 그 주역에 대한 국가적 예우에 차이가 있나.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비교하면 어떤가.△5·18과 달리 2·28 민주운동은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늦었지만 서훈은 받았다. (2020년 대통령 표창). 집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 때려잡는 것이 주인으로서 당연한 노릇 아니겠나. 누구에게 공치사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인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생각한다.- 신문기자가 된 것과 2·28 운동과는 관계가 있나.△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선택해야 할 때 마침 신문사 응모 기회가 있었다. 언론계에 들어가는 것이 2·28민주운동 정신과 상통한다고 생각했다.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고 정의가 실현되어 언론에서 굴하지 않고 핍박받는 국민을 보호해주고 민주주의 반대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언론인을 직업으로 선택했다.- 신문기자로서 실체적 진실과 현실과의 괴리는 없었나.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나.△기자 생활을 하면서 두 차례나 중앙정보부에 불려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권위주의 시대의 정말 어처구니없는 혐의였다. 고등군사재판에 참고인으로 서기도 했다. 말이 참고인이지 피의자와 종이 한 장 차이나는,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다. 같이 재판정에 섰던 후배는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했다.당시 사건은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이튿날 바로 사형됐고 15명이 무기징역 등 실형을 받았던 크고 중대한 사건이고 관계자가 있으니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그들을 생각하면 나의 고초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암흑기였다.- 신문사를 퇴직한 뒤 대구문화예술회관장으로 있으면서 한 일은 어떤 일인가.△문화예술회관장을 5년이나 맡았다. 대구 문화예술의 실질적 업무 관리를 통해 문화예술인 600명에 제 자리를 찾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구의 문화예술이 경제 분야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 그 때 초석을 놓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오페라하우스도 콘서트홀도 없는 시대였고 상대적으로 문화예술회관으로서의 역할이 크고 중요했다. 그 당시는 막 한류가 빛을 내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문화예술계로부터 대구문화예술회관이 그들의 놀이판 바탕을 제대로 만들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팔공산을 자주 찾고 책도 썼다. 팔공산과 대구 정신을 어떻게 이을 수 있겠나.△대구와 경북의 모태는 신라다. 신라는 오악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됐고 그 중심이 중악 팔공산이다. 그 문화적 맥이 팔공산에 흐르고 있다. 팔공산은 신라시대와 고려 조선시대를 이으면서 경상도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이 부인사에 보관됐고 임진란 때는 의병의 본부가 팔공산에 있었다. 이런 역사적 정신이 팔공산에 있어 팔공산을 자주 찾았고 팔공산 관련 문화 역사 인문서를 쓰게 됐다.- 대구지역 인문교양서를 여러 권 저술했다.△지금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지만 언론계에 있던 1990년대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자 상당히 희망을 가졌다. 지방자치제가 되면 지역민에게 지방자치시대에 맞는 지역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역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것은 문화이며 문화를 통한 정체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나름 판단한 것이다.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필요했다. ‘팔공산, 그 짙은 역사와 경승의 향기’는 대구시민의 정체성을 찾게 하겠다는 욕심으로, ‘대구의 앞산’은 대구시민과 남구 주민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대구의 뿌리 수성’은 수성구의 역사 인문지리서로 썼다. 그밖에 여러 편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된 책들이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 연세에도 약주를 즐겨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별한 건강 비법이 있나. 하루 일과를 어떻게 시작하나.△직(職)에서 해방된 삶을 살고 있지만 옛날과는 달라 힘이 든다. 한 세대 전에는 퇴직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노년의 삶이 만만찮다. 그럴수록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산다. 매일 새벽 일어나 체조하고 낮이면 체육공원을 걷는 것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운동한다. 글을 쓰고 강연 요청이 오면 하면서도 두렵다.홍종흠(洪宗欽·79)전 매일신문 논설주간,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장.군위생. 경북고, 경북대 사회학과, 경북대 경영대학원 석사.매일신문 정치 문화 사회부장,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대구문화예술회관장(2001~2006).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제3대공동의장. 대구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 대구시문화상. 대통령표창.일찍이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대구로 나와 대구에서 수학.1969년 매일신문 기자로 입사해 2001년까지 32년간 근무.경북고 2년이던 1960년 2·28 민주운동 참여하고 1990년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창설 주역으로 3대 회장을 맡았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02-21

대구에는 자존심을, 대구시민에게는 자부심을

1만2천여명이 일시에 발을 구르니 지축이 흔들린다. 내지르는 함성은 대구의 잠자는 혼을 일깨운다. 프로축구 K리그가 열리는 DGB대구은행파크에서 대구FC를 응원하는 대구FC엔젤과 대구시민들의 함성이다. 야구의 도시 대구에서 시민구단 대구FC가 태동한 지 20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대구에서 이제 축구를 통해 지역사랑을 실천하는 대구사랑 운동이 불붙고 있는 것이다. 그 최전방에 대구FC엔젤이 있다.이호경 대구FC엔젤클럽 회장은 축구를 통해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그래서 대구의 자존심을 우뚝 세우는 것이 목표다. - 올해로 대구FC가 창단 20주년을 맞는다. 지난 시즌 대구FC는 15승 10무 13패로 리그 3위라는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다. FA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지금 대구FC는 우승을 목표로 남해에서 담금질하고 있다. 선수들은 대구FC엔젤클럽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훈련하고 있다. 선수단과 클럽이 그만큼 서로 신뢰하고 있다는 증표다. 성적도 중요하지만 코로나19등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 우리 대구FC선수단에게 진정한 마음의 박수를 보낸다.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이번 주말(19일) DGB대구은행파크에서 FC서울과 개막전을 벌인다. 벌써 기다려진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시민들에게 위로와 보람을 줄 수 있는 대구FC를 기대한다.- 대구FC엔젤클럽의 탄생 배경과 설립 당시를 듣고 싶다. 기업인으로서 대구FC엔젤을 창설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엔젤클럽은 단순히 응원 차원을 넘어 시민구단 대구FC가 명문자립구단이 될 수 있도록 뒤에서 후원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나아가 축구를 통해 지역 사랑을 실천하는 대구사랑 운동이다. 2003년 창단된 대구FC가 당시에는 시민들로부터 외면받는 시민구단이었고 성적도 2부리그로 강등되면서 위기에 빠져있을 때였다. 2014년 지역의 뜻있는 30여명이 ‘대구의 자존심을 살리자’며 ‘우리가 지역을 위해 무엇을 할까’고민한데서부터 엔젤클럽이 시작됐다.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을 재현한다는 마음으로 위기에 빠진 시민구단 대구FC를 ‘명문 자립 시민구단’으로 살리자는 순수 시민운동이었다. 2016년 250명 엔젤로 정식 출범했다. 아래로부터 불을 지펴 대구사랑 열기를 대구 전역에 확산시키기로 한 것이다.- 대구FC엔젤클럽의 목표가 대구FC의 성적 향상에 있나, 대구시민의 대구FC와 축구 사랑에 있나.△대구FC가 성적이 좋으면 물론 좋다. 실제로 대구FC는 FA컵에서 우승(2018년)도 했고 K리그에서도 상위권이다. 아시아 프로팀들의 챔피언을 가리는 AFC챔피언스리그에도 두 번이나 출전했으며 올해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있다. 모두 엔젤클럽 출범 이후의 일들이다. 엔젤 역시 이런 결과에 기뻐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좋은 성적으로 시민들의 자부심이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대구시민들이 대구FC를 ‘우리 팀’이라고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엔젤클럽의 역할이다. 그것이 ‘축구사랑을 통한 대구 사랑’이라는 엔젤클럽의 슬로건과도 같은 맥락이다.- 대구는 삼성 라이온즈가 버티고 있는 야구도시였다. 거기에다 인근 포항에 스틸러스 축구단이 있다. 대구시민의 축구 열기는 어느 정도이며 대구FC가 어떻게 대구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모을 수 있었나.△지금도 여전히 대구는 야구도시다. 삼성 라이온즈는 지금도 대구시민이 사랑하는 구단이다.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쌓여 야구도시가 됐다. 축구 역시 마찬가지다. 올해로 대구FC가 20년째다.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시민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대구시민들이 대구FC를 사랑하고 있다. 2019년 대구FC 홈구장인 DGB대구은행파크 개장 이후 많은 경기들이 매진됐으며 코로나19 이전만 하더라도 대구FC입장권 구입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지역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많은 엔젤클럽 회원 역시 경기가 있기 전후에 축구 이야기로 인사를 건넬 정도로 대구FC 팬이 됐다.- 대구FC엔젤클럽의 회원은 현재 몇 명이나 되나. 어떻게 구성돼 있고 목표는 어디까지인가.△대구FC엔젤클럽은 연 1천만원 이상 후원하는 다이아몬드엔젤, 연 100만원 후원하는 엔젤, 그리고 월 1만원씩 후원하는 엔시오로 모두 1천500여명이 엔젤클럽과 인연을 맺고 있다. 창립 2년만에 5년 목표였던 1004명 회원을 달성하며 활기를 보였으나 코로나19로 엔젤 회원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등 변화가 생기고 있기도 하다. 올해는 이런 엔젤클럽의 규모도 재정비할 예정이다.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엔젤클럽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엔젤클럽 조직은 자체 사무국이 별도로 운영되고 있으며 산하 3개 본부로 활동하고 있다. 엔젤클럽은 기업인뿐만 아니라 지역의 각종 단체 관계자, 그리고 의사 변호사 전문직 종사자 직장인 등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대구FC의 가장 빛나는 해는 언제로 기억하나. 공유하고 싶은 잊을 수 없는 경기는.△해마다 빛나는 해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해는 1부로 승격한 2017년이었다. 엔젤클럽으로서도 2017년 11월 28일 출범 2년만에 당초 5년 목표였던 1004명 회원을 달성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경기는 2018 FA컵 대회에서 대구FC의 첫 우승 경기였다. 강호 울산을 원정과 홈에서 모두 이기며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울산 원정경기에 대규모 엔젤클럽 응원단이 참여해서 승리에 힘을 보탰고 기쁨과 감격을 함께 누렸다.또 대구축구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DGB대구은행 파크의 2019년 3월 9일 제주유나이티드와의 개장경기도 잊을 수 없다. 대구FC가 2대 0으로 승리하기도 했으니 대구축구가 바뀐 날로 기억하고 싶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엔젤과 대구시민 1만2천여 명이 발을 구르며 내지르는 응원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면 어떤 것이 있나.△2017년 10월 대기업 모 구단과 원정경기에서 대구FC는 3골을 넣었지만 두 번에 걸친 VAR(비디오판독) 끝에 2골을 잃어버렸다. 엔젤클럽은 다음 홈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거세게 항의했고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경기관리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구구단에 과징금을 부과했다. 엔젤클럽은 거세게 항의하는 한편 과징금 모금운동을 벌여 과징금을 훨씬 넘는 금액을 모금했다. 이 일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대구FC와 엔젤클럽의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러시아월드컵 대표로 활약한 조현우 선수를 위한 환영 현수막, AFC일본원정대, 코로나19 극복에 적극 참여, 대팍깃발 퍼포먼스 등 대구FC엔젤클럽과 대구FC의 관계는 서로 감동 그 자체다.- 대구FC엔젤의 임무라면 어떤 것이 있나.△회원 배가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다. 1인당 2명씩 릴레이로 클럽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또 해마다 100만원씩 후원금을 내고 축구장에 직접 응원에 참여해서 선수들에게 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다. 후원금은 엔젤클럽 계좌가 아닌 구단 계좌에 직접 낸다.- 대구FC엔젤클럽의 수칙 같은 것이 있나. 자랑이라면.△대구시민에게 자부심을 주자는 순수한 동기에서 자발적으로 출발했다. 다른 어떤 의도나 사심이 없다. 그래서 처음엔 구단에서조차 ‘저러다가 말겠지’ 하고 시큰둥했다. 그러나 진정성 있는 태도에 엔젤클럽을 인정해 주더라. 엔젤클럽은 철저히 정치색을 배제한다. 엔젤이었다가도 선출직에 나가면 엔젤은 자동 제명된다. 구단주인 권영진 대구시장은 엔젤이 아니고 강은희 교육감이나 홍석준 국회의원은 모두 엔젤에서 제명됐다.- 기업인으로 지역사회에 자랑할 업적이 있다면.△나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목표로 ‘푸른 희망’을 개발하고 만들어가는 디벨로퍼다. 동대구역복합환승센터 개발사업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복합환승센터 특별법이 제정된 뒤 첫 케이스로 동대구역이 적용된 것이다. 정말 가능성이 없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대구를 위해서 누군가 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판단했고 내가 나섰다. 신세계를 끌어들일 때는 6개월 동안 잡상인 취급을 받아가면서 성사시켰다. 대구를 방문하는 외지인들에게 대구 전체의 인상을 심어주는 동대구역을 보란 듯이 바꿨고 대구시민들에게도 푸른 희망을 줬다고 자부한다. 사업 성공에 이어 남부정류장 개발 사업도 성사시켰고 지금은 서대구역세권 개발에 민간출자로 참여하고 있다.- 최근 진행한 경산의 문화타운 ‘샤갈의 마을’은 어떤 컨셉인가.△코로나 시대를 맞아 새로운 주거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집 그 이상의 집’이다. 넓은 테라스와 골프장과 넓은 들판과 이어진 자연친화형 타운하우스다. 여기에 첨단 시설로 아파트의 편리함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꾸몄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계절의 자연 풍광과 상쾌한 공기를 숨쉬며 살아가는 곳이다.‘샤갈의마을’이라는 브랜드처럼 문화가 함께 하는 곳이기도 하다. 입주민을 대상으로 사진공모전을 통해 타운하우스 주변을 공유했고 공동음악회나 전시회도 열었다. 특히 테라스와 타운하우스는 코로나19 시대를 미리 내다봤다는 평가를 들었다.- 기업인 이호경과 대구FC엔젤 이호경은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같은가.△다르지 않다. 기업인으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엔젤클럽 역시 같은 마음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기업도 성장시키고 그 결실을 엔젤클럽을 통해 지역에 환원하고 있다. 기업인으로 구성원들이 물심양면으로 모두 행복하게 만들고 또 엔젤클럽을 통해 시민들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인간은 기계와 다르다. ‘1+1=2+α(알파)’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나로 인해 지역사회가 더 발전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체격이 날렵하다. 어떤 운동을 좋아하나. 자신을 소개하면.△스포츠를 좋아하고 삼성 라이온즈와 야구 광팬이었다. 사회인 야구에서는 투수 포수 유격수 등 어떤 포지션도 소화해 냈다. 골프도 싱글 수준이다. 겨울에는 필드에 나가지 않는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TV는 다큐 프로를 보고 대신 자기계발서와 소설류의 독서를 꾸준히 하고 있다.새벽 4~5시면 일어나서 먼저 17대 선조인 농암 이현보 선생의 초상화 앞에 ‘적선지가(積善之家)의 일가를 이루겠습니다’ 하고 다짐한다. 그리고 일기를 쓴다. 내가 하는 일이 지역에 내 회사에 이웃에 도움이 되도록 해 달라고. 이호경 대구FC엔젤클럽 회장 이호경 대구FC엔젤클럽 회장대구FC엔젤클럽 회장, 대영에코건설(주) 대표이사. 경산출생, 대구대 경영학과, 대구대 행정대학원 부동산학 석사.대구수영연맹 부회장과 수성구 리틀야구단장, 수성구 생활체육회 부회장 등 경력. 현 경산상공회의소 감사, 현 대구오페라하우스 이사,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 상임위원.경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나와 대구토박이를 자처한다. 중학을 중퇴하고는 고입검정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대구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했다.10대에는 사환부터 시작해 직물공장, 봉제공장, 철공소, 주물공장 등을 전전하면서 인생과 삶에 대한 배움을 깨우쳤다. 스스로 했지만 ‘불량스럽지는 않았다’고 술회한다.부동산학을 전공했고 남선알미늄 경리부와 창신주택 기조실에서 근무하다 1988년 부동산개발회사 대영레데코를 창업했다. 이후 주택건설과 종합건설사를 설립한 자수성가 기업가./이경우 편집위원

2022-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