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박재환 대구아트파크 대표
코로나19로 전 국민을 힘들게 만들었던 거리두기가 드디어 풀렸다. 따라서 예술인들의 활동 공간도 넓어지고 숨통도 틔워질 것 같다.
문화 예술의 도시를 만들어 시민들 모두가 행복한 대구를 만들기 위한 지역 예술인들의 노력은 끝이 없다. 음악인들에게 공연 장소를, 미술인들에겐 전시 장소를, 연극이나 무용인들에게도 공연 장소를 제공해주고 시민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섰다.
사설 복합 문화예술회관을 개관한 박재환 대구아트파크 대표는 “문화는 갈등을 치유하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며 힘닿는 데까지 공간을 운영해서 예술을 하는 후배들에게 힘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한다.
음악인들에게 공연장소
미술인들에겐 전시장소
연극·무용인에게도 공간 제공
작품가격 100분의1 수준으로
미술품 렌탈 … 감상 기회 확대
대신대 교수로 재직하며
전국 처음 플루트 전공과 신설
찾아가는 음악회·예술아카데미로
대중들 클래식 쉽게 접하도록
정부, 기초예술에 더 관심 가져야
- 대구아트파크는 작은 사설 대구문화예술회관이라 할 만하다.
△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배고픈 직업이다. 더구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아래에서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은 곳이 예술계라 할 수 있다. 전공으로 직업을 삼는 나로서는 참으로 혜택받은 존재이고 후배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문화예술회관장을 하면서 음악 이외의 예술 분야에 대한 식견을 넓히게 됐고 그들에게도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또 시민들에게도 이런 예술 분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그런 장소를 만들어야겠다는 오랜 신념을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 대구아트파크다,
- 대구아트파크가 개관 2년째를 맞았다. 공간과 지난 1년 성과를 소개해 달라.
△공연장이자 전시 회의장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연면적 800㎡ 규모 종합예술공간이다. 지하 아트홀 ‘예현’은 70석 규모로 클래식 국악 무용 영화감상 등 공연과 연습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 2층 ‘스페이스 샘’은 50석 규모의 소규모 행사 모임을 위한 연회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 2층에는 또 40명 정도 인원이 야외음악회와 가든파티들 할 수 있는 ‘테라스 바람’과 옥상 ‘루프탑 하늘’이 있다. 3층 ‘갤러리 나무’는 청년 작가 및 아마추어 미술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미술 작품을 판매하거나 대여해주는 곳이다. 4층 ‘프리미엄 아카데미’에서는 음악 미술 무용 뮤지컬 댄스 강좌와 인문학 강의도 할 수 있다. 5층 ‘대구문화산업연구소’는 대구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세미나와 포럼 등을 개최할 수 있다.
- 개관이후 어떤 행사들이 대구아트파크에서 일어났나.
△개관하고 첫 한 달 동안 공연으로는 대구국악협회의 공연과 소프라노 이윤경 독창회를 열었고 계명앙상블, 대구무용협회 팀의 발레와 현대무용 한국무용 실용무용 같은 공연이 있었다. 또 박경숙 첼로 독주회도 성황리에 열렸다.
전시는 대구를 대표하는 구상작가 43명과 비구상작가 20명의 전시회를 갤러리 나무에서 가졌다.
- 대구아트파크에서 미술작품 렌탈 사업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문화예술회관장 시절 발견한 사실인데 일반인들이 미술품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고 구입해 소유하기에는 너무 고가여서 망설이더라. 그들에게 작품 가격의 100분의 1 수준으로 작품을 접할 기회를 확대해 주기 위한 방안이다. 서울에는 이미 일반화되었는데 대구에는 아직 초기단계다. 시중 병원이나 기업들과 MOU를 맺고 작품을 빌려주고 있다. 대구 작가 150명으로부터 3천점 확보를 목표로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현재 50명으로부터 500점을 확보해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이 중 30여 점은 렌탈해 주고 있는데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 플루트 연주자다. 플루트는 오케스트라나 관현악에서 악기 중 어느 정도 위치인가.
△국내에서 연습용으로 연간 7만 ~8만 대가 팔린다고 들었다. 어쨌든 연주자 수로는 피아노 바이얼린 다음에 플루트 연주가 차지할 것으로 생각한다. 음악대학에서 학생을 뽑을 때도 관현악 전공이 가장 많고 그 중 플루트가 반드시 포함된다. 오케스트라에서도 작은 규모인 2관(단원 70명 정도) 편성일 경우 플루트 주자가 2명이고 대구시향 같은 3관(단원 100명 정도) 편성일 경우 3명이다. 뉴욕 필이나 베를린 필처럼 4관 편성 오케스트라는 단원이 120명이 넘는다.
- 일반인들의 취미 생활로 색소폰이 인기다. 그런데 왜 색소폰이 음대에 전공자도 없고 오케스트라에는 끼지 않는가.
△색소폰이 대중적인 악기인 것은 분영하다. 지금은 음대에 따라 색소폰 전공자를 뽑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색소폰 연주자를 선발하지 않는 것은 연주곡 중 색소폰이 들어가는 곡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색소폰이 필요할 때면 전문 연주자를 초빙하는 것이다. 상주단원으로 선발하기에는 필요에 비해 너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색소폰 연주가 들어가는 곡으로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재즈왈츠 No. 2’는 알토 색소폰이 연주하는 정말 아름다운 곡이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 많은 악기 중 플루트를 연주하게 된 계기가 있나.
△고교에 들어가니 악대부가 있어 너무 기뻤다. 내 발로 악대부를 찾아 입단했는데 선배들이 귀엽다며 ‘하고 싶은 악기를 하라’고 선택권을 줬다. 처음 트럼펫을 시작했는데 소리 내는 것이 힘들었다. 어느 일요일 혼자 플루트를 연습하던 선배(이성호 플루트 연주자)를 보고 ‘나도 불고 싶다’고 해서 바꿨다. 또 나보다 나중에 들어온 후배가 나보다 트럼펫을 더 잘 불어 속이 상한 것도 플루트로 바꾼 이유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중에 온 후배는 초등학교때부터 트럼펫을 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 경력 중 부산시립교향악단과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있다.
△대학 졸업 후 부산시향에 입단했다. 꽤 괜찮은 보수를 받았고 주말에 대구로 올라오면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막걸리 파티를 벌이곤 했다. 그때부터 후배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대도 상무대 군악대에 들어갔다. 제대 후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구시향에 들어갔다.
- 그러다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계기는 무엇 때문인가.
△당시 외국유학 붐이 불 때였다. 제자들이 찾아오면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유학을 다녀와야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에 유학을 다녀온 선배나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유학 가면 정말 훌륭한 선생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도 했다. 그래서 결혼해서 아이 둘을 데리고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 2학년 이후 내 스스로 학비를 마련했고 유학 경비도 내가 벌어둔 돈으로 다녀왔다. 시향 단원으로 있으면서 레슨을 했고 미국 유학 (뉴욕 주립대학 펄처스칼리지) 4년 동안 한인사회에서 레슨을 열심히 했다. 그 시절 유학 가서 고생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대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랑할 만한 성과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전국 처음으로 대학 음악과에 플루트 전공과를 만들고 플루트 오케스트라와 앙상블 레피토아를 비롯, 플루트 수리까지 교육과정에 편성했다. 당시 음악과 신입생 60명 중 플루트 전공만 12명을 선발했다.
- 대구음악협회장 시절 대구 출신 음악가 현창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최초 가곡인 동무생각 작곡가 박태준 선생과 한국최초 오페라 춘향전 작곡가 현재명 선생 현창사업을 벌이다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화연구소측과 마찰이 있었다. 세미나 등을 통해 박태준 선생의 친일파 논란은 해소했으나 현재명 선생에 대해서는 ‘공과 과를 함께 기록해 달라’는 주문에 대구시의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보여 중단했다.
-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시절 찾아가는 음악회를 통해 클래식을 대중에게 접근시켰다는 평가다.
△클래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대중화 노력의 하나로 찾아가는 음악회를 구상했다. 그런데 대상이 주로 시설에 치중돼 있었다. 김범일 대구시장에게 찾아가는 음악회를 제안했더니 아주 반기더라. 그래서 먼저 대구시청 월례 조회에 찾아갔다. 월례회에 본청뿐 아니라 구군청과 경찰 소방 등 시청 산하 전 기관의 공직자들이 참여했는데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자기들 기관으로 와서 연주해 달라는 신청이 쇄도했다.
- 어떤 식으로 공연했기에 그런 인기를 얻었나.
△공연은 성악팀과 관현악팀, 무용팀으로 구성했다. 노래도 그냥 클래식은 아무래도 무거우니 대중적인 곡을 선택하고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남성4중창단이 부르는 빨간 구두 아가씨에 청중들 모두 신나 하는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찾아가는 음악회는 연 100회나 열었더라. 구청과 소방서 등 공공기관에서 혁신도시로 파급돼 감정원과 가스공사 등에서도 음악회를 가졌다.
- 찾아가는 음악회 말고도 클래식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 것 같다.
△문화예술회관에서 실시하는 예술 아카데미에도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시민들을 위해 출장 아카데미를 열었다.
31절이나 광복절 기념식에는 그냥 기념 노래나 부르고 끝내는 기념식에서 탈피해 기념식 사이에 20분짜리 공연을 집어넣었다. 함께 노래 부르고 태극기 휘날리며 만세도 부르고 장내를 동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미래 관객인 학생들을 상대로 창의체험학습을 위한 상설 투어를 실시했다.
- 예전에 비하면 예술에 대한 정부 기관의 지원이 늘어난 것 아닌가.
△기관의 예술에 대한 지원이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예전에 비해 문화 예술에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다. 특히 대구시의 경우 생활예술에 지원이 치우치고 있는 느낌이다. 그 많던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음악학원 같은 시설들이 모두 주민생활지원 센터나 공공도서관 등 기관 산하로 이양돼 버린 것 아닌가. 수용자들은 적은 비용으로 예술을 직접 혜택을 받으니 문턱이 낮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예술의 수준이 낮아지고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음악인으로, 예술인으로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기초예술에 더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기초예술의 발전이 있어야 생활예술, 대중예술의 발전이 가능해진다. 처음엔 물론 턱이 높고 힘이 든다. 그러나 클래식에의 투자가 소수 마니아만을 위한 투자가 아닌 것이, 그 클래식의 저변확대와 발전을 통해 대중음악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 대구아트파크의 미래와 자신의 소망은 무엇인가.
△나는 1980년대 음악을 전공하면서 교육과 사회적 혜택을 받았던 마지막 세대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음악을 평생직장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음악계 후배들은 한 마디로 어렵다.
음악인들에게는 공연 기회와 장소를, 미술인들에게는 전시장을, 연극 무용계 인사들에게도 그들의 땀과 재능을 펼쳐 보이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대구아트파크가 필요함을 증명하겠다. 문화예술에 예산을 퍼붓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다는 비난을 예술의 힘으로 바꿔놓겠다. /이경우 편집위원
□ 박재환(63) 대신대 교수· 대구아트파크 대표
대구출신, 영남고, 계명대 음대. 미 뉴욕주립대 음악석사. 줄리아드음대 오케스트라 지휘토스 수료.
전 부산시립교향악단. 대구시립교향악단.
전 대구음악협회장,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초등학교 4학년때 고적대로 활동하면서 음악적 소질과 재능을 스스로 발견했다.
고교에 입학하면서 악대부에 자발 입단했고 음대를 졸업하고 풀루트 연주자로 평생 직업을 삼았다.
“나는 더 많은 혜택을 받아 전공을 직업으로 한 선배”라며 힘닿는 데까지 대구아트파크를 운영하면서 지역 예술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