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홍종흠 <br/>전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공동의장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대구시내 8개 공립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 부패에 항거하며 일시에 봉기했다.
대구에서 일어난 청년학생들의 용기있는 외침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첫 민주화 운동이었고 4·19민주운동으로 이어져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기치를 드높이는 신호탄이 되었다.
당시 경북고 2년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홍종흠 전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은 ‘우리 정치에서 여전히 공정과 정의가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아직 민주주의가 미성숙한 때문’이라며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더욱 발전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그동안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2·28민주운동이 국가지정 기념일이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2·28 민주운동이 일어난 지 62년이 지났다.
‘우리 정치에서 여전히 공정과 정의가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아직 민주주의가 미성숙한 때문’이다.
2·28 민주운동이 국가지정 기념일이 된 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민주주의를
최초로 부르짖은 것은 바로 대구의 선배들이었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려주기 위해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다시 2·28 민주운동 기념일을 맞는다. 1960년 2·28의 주역으로서의 소회를 말해 달라.
△2·28 민주운동이 일어난 지 62년이 지났다. 사람으로 치면 새로운 한 주기를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역시 우리 정치에서 핵심 이슈는 ‘자유와 공정’이다. 자유와 공정은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2·28 민주운동은 당시 자유당 정권이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채택했지만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악용했기 때문에 분노한 고등학생들이 일어섰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미성숙 단계에 있고 더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 2·28 민주운동이 국가지정 기념일이 됐다.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대구 경북뿐 아니라 호남지역에서도 청원에 동참해서 이뤄졌다. 2·28 민주운동이 명실공히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국민 청원에 이어 국회에서 통과되고 대통령이 선포한, 전 국민이 청원한 민주운동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 2·28 민주운동이 일어나고 30년 뒤인 1990년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2·28 민주운동의 주역으로서, 또 기념사업회 발기인으로서 의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TK(대구경북) 지역이 군부독재의 아성처럼 잘못 비쳐졌다. 특히 6월항쟁 이후 이런 잘못된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우리 후손들에게 ‘선배들이 독재정권에 아부하고 기여한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다. 한반도에서 민주주의를 최초로 부르짖은 것은 바로 대구의 선배들이었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려주기 위해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사단법인이 되고 3대 공동의장(문희갑 대구시장과)을 맡았다.
- 당시 고교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온 사실에 대해 실제 상황이 지나치게 미화됐다는 지적도 있다. 또 이젠 18세 이상에 선거권을 주고 있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1960년 당시 평균수명이나 사회적 성숙도, 평균 학력 등을 고려했을 때 2·28의 주역인 고교생은 지금과는 다른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정치 사회적으로도 성숙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선거 연령 18세도 찬성한다.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그들이 ‘어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18세면 어느 정도 사회를 보는 눈과 판단력은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 2·28민주운동을 시작점으로 4·19민주운동이 일어났고 80년대에는 6월 혁명이 일어나는 등 젊은이들의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계속됐다. 우리 정치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나.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나라로 인정받지만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민주주의가 더 발전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나 영국 같은 구미 자유 민주국가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헌법만 하더라도 1986년 6월 항쟁이후 5공화국의 헌법체제로 바뀌어 지금껏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지금의 경직화된 권력구조는 국론을 분열시키고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
이명박 정권이후 지금의 문재인 정권까지 모든 정권들이 선거 때면 권력구조를 포함한 헌법 개정을 공약해 놓고도 집권 이후엔 실천하지 않았다.
- 지금 여당에서는 자신들의 주요 지지세력인 86세대를 기득권이라며 일선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보다 20여 년, 한 세대나 앞선 2·28 세대들은 과연 그런 지조를 지켰나.
△과거에도 세대교체론이 있었다. 그러나 동일 세대가 모두 같은 인식을 갖고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나이 들었다고 반드시 생각까지 낡았다거나 젊었다고 의식이 선진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에나 기득권은 존재했다. 공론화를 통해 국민총의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 세대교체론은 특정 세대들이 자기들 이해관계에 너무 결집해 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독일의 메르겔 총리는 10년 집권에도 박수받고 떠나지 않았나. 그런데 30대가 세상이 변한 2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같은 생각을 고집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그 30대가 여전히 특정 세력으로 몰려 있고 기득권이 돼 의식마저 20년 전에서 정지돼 있다면 ‘물러나라’는 세대교체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 2·28 세력은 정치적으로 어떤 세력으로 그 정신을 이어오고 있나.
△지금 우리 국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민주주의 정신이 바로 2·28 정신이다. 그러니 특정 정파적 이해관계에 의해 특정 세력이 뭉쳐 3권분립 정신을 망가뜨리고 민주주의에 도전하거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제도나 세력에는 반대해야 하는 것이 2·28 정신이다.
이승만 정권이 제도상 민주주의를 채택하고도 개헌을 통해 4선을 획책한 독재정치를 했다. 그들은 ‘나는 바담풍이라 하더라도 너희는 바람풍이라고 해야 한다’는 억지를 부렸고 그것이 정권교체 요구로 이어진 것이 2·28 민주운동이다. 당시 정치적으로만 민주주의를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갖지 못하게 했다. 그것을 반대한 것이 2·28 운동이고 그 정신이 바로 지금의 민주주의 정신이다. 자유당 독재와 군부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이 바로 2·28 정신을 잇고 있는 것이다.
- 2·28 정신과 6월 정신의 차이. 그 주역에 대한 국가적 예우에 차이가 있나.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비교하면 어떤가.
△5·18과 달리 2·28 민주운동은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늦었지만 서훈은 받았다. (2020년 대통령 표창). 집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 때려잡는 것이 주인으로서 당연한 노릇 아니겠나. 누구에게 공치사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인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생각한다.
- 신문기자가 된 것과 2·28 운동과는 관계가 있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선택해야 할 때 마침 신문사 응모 기회가 있었다. 언론계에 들어가는 것이 2·28민주운동 정신과 상통한다고 생각했다.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고 정의가 실현되어 언론에서 굴하지 않고 핍박받는 국민을 보호해주고 민주주의 반대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언론인을 직업으로 선택했다.
- 신문기자로서 실체적 진실과 현실과의 괴리는 없었나.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나.
△기자 생활을 하면서 두 차례나 중앙정보부에 불려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권위주의 시대의 정말 어처구니없는 혐의였다. 고등군사재판에 참고인으로 서기도 했다. 말이 참고인이지 피의자와 종이 한 장 차이나는,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다. 같이 재판정에 섰던 후배는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했다.
당시 사건은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이튿날 바로 사형됐고 15명이 무기징역 등 실형을 받았던 크고 중대한 사건이고 관계자가 있으니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그들을 생각하면 나의 고초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암흑기였다.
- 신문사를 퇴직한 뒤 대구문화예술회관장으로 있으면서 한 일은 어떤 일인가.
△문화예술회관장을 5년이나 맡았다. 대구 문화예술의 실질적 업무 관리를 통해 문화예술인 600명에 제 자리를 찾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구의 문화예술이 경제 분야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 그 때 초석을 놓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오페라하우스도 콘서트홀도 없는 시대였고 상대적으로 문화예술회관으로서의 역할이 크고 중요했다. 그 당시는 막 한류가 빛을 내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문화예술계로부터 대구문화예술회관이 그들의 놀이판 바탕을 제대로 만들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팔공산을 자주 찾고 책도 썼다. 팔공산과 대구 정신을 어떻게 이을 수 있겠나.
△대구와 경북의 모태는 신라다. 신라는 오악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됐고 그 중심이 중악 팔공산이다. 그 문화적 맥이 팔공산에 흐르고 있다. 팔공산은 신라시대와 고려 조선시대를 이으면서 경상도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이 부인사에 보관됐고 임진란 때는 의병의 본부가 팔공산에 있었다. 이런 역사적 정신이 팔공산에 있어 팔공산을 자주 찾았고 팔공산 관련 문화 역사 인문서를 쓰게 됐다.
- 대구지역 인문교양서를 여러 권 저술했다.
△지금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지만 언론계에 있던 1990년대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자 상당히 희망을 가졌다. 지방자치제가 되면 지역민에게 지방자치시대에 맞는 지역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역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것은 문화이며 문화를 통한 정체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나름 판단한 것이다.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필요했다. ‘팔공산, 그 짙은 역사와 경승의 향기’는 대구시민의 정체성을 찾게 하겠다는 욕심으로, ‘대구의 앞산’은 대구시민과 남구 주민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대구의 뿌리 수성’은 수성구의 역사 인문지리서로 썼다. 그밖에 여러 편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된 책들이다.
- 젊은 시절부터 지금 연세에도 약주를 즐겨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별한 건강 비법이 있나. 하루 일과를 어떻게 시작하나.
△직(職)에서 해방된 삶을 살고 있지만 옛날과는 달라 힘이 든다. 한 세대 전에는 퇴직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노년의 삶이 만만찮다. 그럴수록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산다. 매일 새벽 일어나 체조하고 낮이면 체육공원을 걷는 것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운동한다. 글을 쓰고 강연 요청이 오면 하면서도 두렵다.
홍종흠(洪宗欽·79)
전 매일신문 논설주간,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장.
군위생. 경북고, 경북대 사회학과, 경북대 경영대학원 석사.
매일신문 정치 문화 사회부장,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대구문화예술회관장(2001~2006).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제3대공동의장. 대구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 대구시문화상. 대통령표창.
일찍이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대구로 나와 대구에서 수학.
1969년 매일신문 기자로 입사해 2001년까지 32년간 근무.
경북고 2년이던 1960년 2·28 민주운동 참여하고 1990년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창설 주역으로 3대 회장을 맡았다.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