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이정웅 대구 생명의 숲 대표
대구는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운 도시다. 날씨만큼은 대구가 전국의 어느 도시에도 양보해 줄 수 없다. 그런 대구가 푸르게, 녹색의 도시로 바뀌었다. 대구의 여름, 팔공산과 비슬산을 비롯해 도시 곳곳의 소공원이나 가로수를 보면 더위를 이겨내려는 대구시민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푸른 대구, 그 주인공은 33년여 대구시청에서 근무하며 가로수를 교체하고 대구수목원을 조성한 이정웅 전 녹지과장이다. 퇴임 후에도 그는 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 대구생명의 숲 이사장 등 시민단체 운동을 통해 푸른 대구 만들기와 지역문화 역사 살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대구수목원은 많은 반대와 곡절 겪으며 개원, 골짜기마다 내 발자국이 남아 있어
주말·휴일 가리지 않고 누비며 조성… 연간 200만 명이 찾는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아
전국 평균보다 넓은 녹지·느티나무 가로수 조성 등 힘써 대프리카 열섬 식히는 역할 톡톡
-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대구를 녹색 도시로 만든 장본인 아닌가.
△나는 행동대장이다. 당시 문희갑 대구시장이 식견과 의지가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대구시 공무원으로 시장을 여러분 모셨다. 취임사에서는 모두들 ‘대구를 푸르게 만들겠다’고 했지만 립 서비스에 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돈이 들고 조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희갑 시장은 달랐다. ‘세계적 숲의 도시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또 립 서비스로 끝날 줄 알았다. 경제전문가로만 알았던 문 시장은 도시 녹화에 대한 의지도 강했고 ‘문핏대’로 불릴 만큼 열정도 대단했다. 대구를 녹색 공원도시로 만든 총연출자다.
- 대구수목원이 개원 20주년을 맞았다. 수목원을 조성하고 초대 수목원장을 지냈으니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많은 반대와 곡절을 겪으면서 수목원이 개원됐다. 수목원 골짜기마다 내 발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주말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수목원을 누비며 조성했다. 당초 계획과는 달리 일부 일탈도 있지만 연간 200만 명이 찾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가 됐다. 이제 이곳에서 ‘숲속 음악회’ 같은 것도 열렸으면 좋겠다. 또 세미나 같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구수목원은 인근 도원지의 물을 끌어들여 용수로 확보하고 실개천을 조성해 조경도 살리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서울의 한밭 수목원은 후발주자인데도 대형 유리온실의 열대수목원을 조성, 겨울에도 열대의 삼림을 서비스하고 있다. 대구수목원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
- 수목원의 조성 당초 컨셉은 어떤 것이었나.
△수목원은 공원이 아니다. 국립 광릉수목원이나 사설 천리포수목원 등과는 다른 차별성 있는 수목원으로 조성하려 했다. 대구에 역사적인 약령시가 있지만 정작 한의사들도 한약재는 건재여서 그 약초들의 제 모습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약초들을 모아 약용식물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또 산야의 수많은 야생화들을 옮겨 심어 어떤 야생화라도 대구수목원에 가면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 수목원 7만4천평이 시민에 공개되기까지 조성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시민단체와 언론의 반대였다. 1998년 3월 1단계 공사를 발주하자 지역 환경단체에서 기다렸다는 듯 ‘수목원 계획을 전면 취소하라’는 성명서를 냈다. 그들은 “수목원 계획을 검토하고 현장을 답사한 결과 계획의 무모성 무지성 허구성을 발견하고 시 당국이 예산을 낭비하는 데 대해 분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지역의 방송과 신문들이 덩달아 무차별 공격을 해댔다. 심지어 한 방송에서는 없는 매립가스 분출을 연출까지 해가며 조성을 반대했다.
환경과 조경 전문가들의 자문과 검토를 거쳐 진행된 공사를 비전문인들이 여론몰이로 공격해일시적으로 화도 났다. 논리적으로 맞받아쳤지만 당시 언론과 맞서서는 이로울 것이 없다는 주변의 권유로 토론회를 거치고 예산 규모를 줄이는 등 일부 수정하면서 수목원을 완성했다. 그러나 엉터리 조작 보도한 방송사와 기자는 반성하지 않았고 끝내 사과 한 번 하지 않고 있다.
- 수목원은 처음부터 대곡동에 수목원으로 설계되었나.
△지산동에 있던 대구시 양묘사업소가 택지개발로 이전해야 할 처지가 됐다. 대구 전역을 검토하다가 대곡동 쓰레기 매립장 부지를 활용하기로 했다. 양묘사업소를 임업시험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검토 단계에서부터 곡절이 많았다. 당시 박병련 부시장이 찬성하면서 사업이 한 단계 진전했다. 제주시 기획실장 당시 한라수목원을 조성한 경험이 있었던 박 부시장은 이를 벤치마킹하라는 구체적 지시까지 했다.
- 양묘사업소 이전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나.
△당시 조해녕 시장은 ‘기회비용 검토’라는 조건으로 결재를 미뤘다. 캐비닛 속에 잠자던 계획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났다. 조 시장이 민선시장 출마를 위해 사표를 내기 전에 ‘밀린 결재 가져오라’는 청내방송을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산불감시 등으로 늘 현장에 나가있어야 했는데 마침 그날 청내에서 근무하다가 그 방송을 들었다. 시장 결재는 과장이 가야 하는 선례를 깨고 계장인 내가 직접 서류를 들고 시장실로 들어갔다. 시장에게 “그동안 준비를 철저히 해서 당선돼 오시면 멋진 포지(圃地)를 만들어 놓겠다”고 해서 결재를 받았다. 야생화 전시포, 잔디광장 등과 함께 대구수목원이 대곡동에 들어설 수 있는 양묘사업소 이전계획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조 시장이 낙선하고 실제 공사는 문희갑 초대 민선시장 때 시작됐다.
- 나무박사로 알려졌고 이팝나무를 사이버 상 이름으로 쓰고 있다. 특별히 이팝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
△수목원에서 제일 먼저 심은 나무가 이팝나무다. 수목원을 한창 조성중일 때 달성 유가초등에서 도로확장으로 수령 200년이 넘는 이팝나무를 베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달성군에 공사 중단을 요청하고 2그루를 수목원으로 옮겨 심었는데 한 그루는 수목원 입구에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 이팝나무를 대구의 시목으로 지정하자고 주장했다.
△대구의 시화 목련은 원산지가 중국이고 꽃은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인 3월에 핀다. 영하의 날씨에 더러 개화도 못하고 낙화하는 꽃을 보면 안쓰럽기도 했다. 대구의 풍토에도 맞지 않아 대구의 상징물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팝나무는 계절의 여왕인 5월에 핀다. 대구가 원산지라 향토성도 있고 모양도 아름다우며 이식해도 잘 산다. 그래서 시화를 이팝나무로 하자고 제안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 대구를 푸르게 만들기 위한 대구시의 특별한 노력은 어떤 것이 있나.
△대구시에서 발주하는 공사에서는 수종의 20%를 교목으로 심도록 했고 민간 공사는 10%를 교목으로 심도록 권장했다. 그러면서 이팝나무를 심었다. 앞산 순환도로에도 이팝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한 때 이팝나무 묘목 수요가 늘어났고 뒤늦게 심었던 사람들은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특히 가로수의 경우 산림청 훈령은 8m마다 1그루씩 심도록 돼 있지만 대구는 시내에서는 6m당 1그루씩 심도록 바꿨다. 또 폭 5m이상 인도와 상가가 없는 곳에는 2줄로 심도록 했다. 30m 이상 도로의 아파트 담장 쪽에도 같은 수종으로 1줄 더 심어서 가로수를 2줄로 만들었다.
- 대구의 녹지는 전국 평균보다 넓다. 특히 대구의 가로수는 대프리카 열섬 대구를 식히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대구 가로수 때문에 한전과 많은 갈등을 겪었다. 가로수 전정을 너무 많이 해서 전봇대처럼 흉물스럽게 되니 조경은 물론 그늘 조성 등 가로수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에서는 고압선이 지나 위험하고 태풍에 노출돼 위험하다는 한전과 가로수 전정을 두고 싸움을 벌이다 일본 사례를 찾아봤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고압선이 자나는 경우 1m까지만 자르고 계속 자라면 그때는 한전 몫으로 한다는 조건이었다.
또 가로수 수종도 병충해 적고 그늘이 많으며 잘 자라면서 수형도 아름다운 느티나무로 많이 바꿨다.
- 대구시가 금호강의 하중도를 개발하려 한다.
△하중도 개발은 찬성이다. 강수가 범람하면 침수하는 지역으로 건물은 지을 수 없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태종 이방원의 처남 민무질이 대구에 유배 와서 11개월 정도 머문 적이 있다고 한다, 명시하진 않았지만 ‘섬’이었다고 하니 하중도일 수도 있고 그 후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도 첨가해서 하중도를 개발하고 시민이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계절별 꽃밭을 꾸미는 등 활용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 시가지 조경에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시가지에 조성하는 가로변 정원 등에 심는 화초가 메리골드 팬지 데이지 외래종이 대부분이다. 우리 꽃도 예쁘고 아름다운 꽃들이 많다. 특히 그 이름도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활용했으면 좋겠다.
대구으아리, 세뿔투구꽃 같은 야생화는 대구에서 발견돼 그 이름이 지어진 것들이다. 화원동산이나 봉무동에 자생하는 모감주나무는 대구서만 발견됐다. 이런 소중한 자산들은 교육에도 활용할 수 있고 시민의 자긍심도 높이게 될 것으로 본다.
- 퇴직 후에도 대구를 푸르게 가꾸기 위한 녹화 사업과 향토사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시절 북구 사수동에 ‘한강공원’을 조성했다. 한강 정구는 72세에 사수에 와서 7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저술활동을 한 유학의 대유학자다.
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장 시절 사수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학부모들이 ‘재수도 싫은데 4수가 뭐냐’며 학교 이름을 강산초등으로 바꿔 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수(泗水)는 공자가 태어난 곡부의 강 이름이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것은 공자 같은 인격체를 키우는 것”이라 설득해서 이름을 지켜냈다.
칠곡은 조선 후기 도호부로 대구 도호부와 세를 겨뤘다. 역사적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칠곡의 역사와 문화유산, 함지산 사람들 등 저서는 역사적 근거를 찾아낸 기록이다. 최근 칠곡도호부 관아 복원 운동을 펴고 있다. 소설가 이태원을 기리는 이태원길도 칠곡 문화유산 찾기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다.
- 지금 대구 생명의 숲 운동에 몰두 하고 있다. 어떤 단체인가. 어려움은 없나.
△자연과 이웃과 나무를 사랑하는 모임이다. 나무를 심고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시민들에게 해설해준다. 대구를 녹색으로 만드는 일에서 대구시가 놓치는 부분을 민간에서 보완하고 있다. 시민 정서를 순화하고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시대에 숲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회원 200여 명의 회비로 활동하는 데 아직은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기업의 기여도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
-오늘 같은 여름날, 대구의 가로수 길을 걸으면 어떤 생각이 나나.
△녹지과장(서기관)으로 퇴직했으니 공무원으로서는 소위 출세(?)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환경 시민단체의 반대와 언론의 부정적 보도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대표적 혐오시설인 쓰레기매립장에 수목원을 조성하는 일을 마무리해서 오늘날 대구의 새로운 명소가 되게 한 것은 보람이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경우 편집위원
□ 이정웅(李貞雄) 대구 생명의 숲 대표·전 대구시 녹지과장
의성 단밀. 상주농잠고.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계명대 정책개발대학원 행정학 석사.
대구시 산림계장, 녹지계장, 임업시험장장, 녹지과장.
대구가톨릭대 조경학과 겸임교수.
대구시 문우회장, 대구시 도시경관자문위원, 도시디자인위원, 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장 등 역임.
현 달구벌 얼 찾는 모임 대표. 대구 생명의 숲 이사장. 대구시 녹색성장위원회 위원, 수성문화원 향토사 연구소 연구위원.
저서 ‘며느리밥풀꽃’(시집), ‘팔공산을 아십니까’ ‘나의 사랑, 나의 자랑 대구’, ‘ 푸른 대구 이야기’, ‘나무, 인문학으로 읽다’, ‘대구가 자랑스러운 12가지 이유’ 등.
고교 졸업 후 농촌지도소에 잠시 근무하다 군 제대 후 1969년 대구시 공채로 농림직으로 공직에 들어온 뒤 임업직으로 2003년 퇴직할 때 까지 대구 녹색화에 앞장섰다. 직원들을 격려해서 행정직이 맡았던 과장(서기관) 자리를 임업직이 차지하고 임업직 사무관 자리도 늘리는 등 조직관리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문희갑 시장 시절 기술직의 편견을 업무를 통해 인정받게 된 것을 ‘고기가 물을 만났다’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