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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으로 먹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서예다

등록일 2022-04-11 20:12 게재일 2022-04-12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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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가 만났다<br/>서예가 리홍재

서예란 무엇인가. 그냥 붓으로 쓰는 글씨에 그친다면 서예가를 욕보이는 소리가 될 것이다. 필가묵무(筆歌墨舞),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추는 춤이다. 생명이 있어야 한다. 서예는 살아 있는 예술이어야 한다.

서예가 율산 리홍재에게 서예는 춤이고 음악이고 스포츠다. 그는 끈질기게 자기를 고집한다. 자기 목소리를 찾아 자기 노래를 부르듯 글자 한 자 한 자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일을 한다. 그것이 타묵 퍼포먼스든 한글이든 한문이든 상관없다.

첫눈에 보고 ‘우와’하는 환성이 나오는 것이 예술이다. 그에게 서예는 스스로 감동하고 엑스터시를 느끼며 예술적 오르가즘의 지경에 닿게 하는 마법이다. 노랫말에 리듬과 강약과 박자와 고저장단을 넣으면 노래가 되듯 서예는 화선지에 먹물로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노래여야 진정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서예야말로 아는 만큼 보여… 법첩 의존 말고 많이 써보며 자신의 것 만들어야

‘타묵 퍼포먼스' 괴짜 별명? 정적인 예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예술로 승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나로, 붓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서예가이고 싶다

- 코로나 팬데믹에도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예총으로부터 한국예술문화명인 타이틀을 얻고 퍼포먼스도 벌였다.

△코로나로 모든 대면활동이 일시 정지된 2021년엔 명인전과 TV생중계된 서예퍼포먼스를 통해 시민들에게 팬데믹 상황을 이겨내라는 응원 활동을 했다. 2019년에는 독도에서 퍼포먼스를 펼쳐 국민들의 독도에 대한 관심을 끌어냈다. 나이 60에 ‘율산 이홍재 60년 명품전’을 열었다. 그동안 작품을 망라해서 서예인 이홍재를 보여줬는데 올해는 내 나이 66에 맞춰 미(美, 六十六)전을 가질 생각이다. 미(美)를 풀어쓰면 한자 六十六을 거꾸로 쓴 상형이 된다. 서예는 예술 창작활동이어야 하고 어떤 이유로도 중단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획하는 거다.

- 우리가 서예라고 부르는데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쓴다.

△서예 서도 서법 다 같은 것이다. 글씨를 쓸 때 중국은 필법을 중시하고 일본은 검도 다도처럼 글씨도 도를 닦듯 수양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서예라고 해서 도를 무시하거나 법을 몰라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말이 나라별로 문화가 달라 그렇다는 것이지 모두 붓으로 쓰는 글씨다.

-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서예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서예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역입이니 중봉이나 삼절 등 서법 기초부터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붓글씨를 배우는 사람들이 너무 법첩(法帖)에 의존하거나 중봉(中奉)을 의식하는 데 대해 나는 반대한다. 파중봉해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다고 강조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중봉을 붓의 끝으로 알고 있는데 사람이 허리로 서 있고 움직이듯 중봉은 붓의 허리다. 붓끝이 아니다.

기초가 중요하지만 늦은 나이에 서예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기초부터 시작해서는 죽을 때까지 제대로 글씨 한 번 써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서예를 시작하고 30년이 되어도 아직 초보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서예가들을 보아왔다. 잘못된 교육 탓이다. 마치 평생 영어교육을 받아도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 한마디 못하는 영어교육과 같은 것이다. 예전에 한국인 교사가 a b c d부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원어민 교사가 Good morning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공을 멀리 던지기 위해 팔을 뒤로 빼서 다시 앞으로 던져야 하지만 가까이 던지는 것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더구나 그 동작도 익숙해지면 순간 이동이 가능해 진다. 언제까지 뒤로 빼기만 하여서는 더 이상 진보가 없다.

지금 잘 걷고 있는 성인들에게 새로 걸음마를 가르치기보다 지금 걷는 걸음걸이를 수정하고 숙달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잘 걷고 있는 성인이 느닷없이 걸음마를 새로 배워서야 언제 달리겠느냐.

- 아주 우문 같지만 어떻게 해야 글씨를 잘 쓸 수 있나. 글씨를 잘 쓰려면 기초부터 차근차근 그렇게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 서예를 가르치는 서실에서는 왕희지나 구양순 등 옛 서예가들의 법첩을 따라 쓰기를 강조한다.

△따라 쓰는 데 너무 집착하지 마라. 처음은 따라 쓰더라도 지금 왕희지를 배우고 닮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2천년전의 법첩을 따라 쓰는 것은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

세상사 다 그렇다. 글을 잘 쓰려면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욕 얻어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 필법에 억매이고 법첩에 갇히게 되면 창작의 의지가 밟혀버린다. 전통은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법고(法古)는 창신(昌新)에 방점이 찍혀 있다. 철두철미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 먼저 자신이 반해야 한다. 자신의 글씨를 보고 자신이 흡족해 하고 만족해야 한다.

글씨체에서도 전서와 예서, 해서, 행서와 초서는 우리 몸의 다섯 손가락처럼 모두 한몸이고 그 다섯을 아우르는 글씨를 쓰는 것도 같은 이유다.

- 서예가 캘리그라피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서예가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나 노력이 필요한가.

△갤리그라피를 통한 서예의 세계화는 우선 작가들의 능력부터 쌓아야 한다, 서예가 예술이라면 서예의 세계화도 그렇다. 한 번에 딱 보고 ‘뻑’ 가야 한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를 보고도 감탄하듯 멋진 글씨 앞에서는 감탄사부터 나오게 된다. 그것이 예술로서의 서예다. 그렇다면 열심히 글씨를 본뜨듯 베껴서야 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일찍 서실을 열었고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내게서 배워서 다시 후진들을 교육하는 서예가가 전국적으로 100명은 넘을 것이다. 그들은 더러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수준의 서예를 가르치기도 할 것이고 혹은 대학생 수준의 서예를 가르치기도 할 것이다. 나에게서 배웠다고 모두 같은 방법으로 같은 수준의 교육을 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랬듯. 저마다 색깔을 갖고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 전국적으로 수많은 서예 공모전이 실시되고 있다. 시전과 국전 등 크고 작은 서예전의 심사위원을 해 본 경험으로 어떤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어떤 작품들이 입상할 가능성이 높나.

△공모전은 공모 주최측의 입상 조건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공모전의 심사를 맡아본 결과 보통 서예전에서는 대작이나 걸작이 나오지 않더라. 그 수준이 초보를 벗어난 정도가 대부분이다. 예술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입상이라는 것도 서예를 ‘앞으로 열심히 해라’ 하는 식의 격려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툭 하면 국전을 붙이는데 대한민국 국전이라면 대통령이 상을 주어야 국전이 된다. 마찬가지로 시전이면 시장이, 도전이면 도지사가 대상을 주어야 한다. 나는 심사할 때면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글씨를 입상작으로 뽑으려 노력한다.

- 20대에 이미 개인전을 열고 40대에 국전 초대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른바 세상이 인정하는 서예의 대가가 됐다. 유홍준은 추사를 이야기하면서 글씨에 신품(神品)과 법품(法品)과 묘품(妙品)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본인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품이라는 평가를 인정하나?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붓을 잡긴 했지만 남보다 서예에 소질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엄청난 노력을 했다. 수많은 글씨를 배우고 썼다. 그런 면에서는 배우고(學而) 노력하는(困而) 형이었다고 해야 하나.

서당 훈장이던 조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자에 호기심이 많았다. 또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미술반에 들기는 해도 서예의 길을 평생 걷게 될 줄은 몰랐다. 단지 한자를 즐겨 익혔고 한문 공부를 독학했던 정도였다. 그러다 스무 살에 대한서예원에 들어갔다. 스승은 석재와 죽농의 맥을 이은 죽헌 현해봉 선생이었다. 그 스승한테 배운 것은 글씨보다는 의리 하나였다. 그분은 펜글씨를 정말 잘 쓰셨다. 그러나 붓을 잡으면 왜 그런지 머뭇머뭇하셨다. 나는 스승이 볼 때는 법첩을 따라 썼지만 스승이 보지 않을 때는 내 멋대로 글씨를 만들어 쓰고 연구했다.

- 스물둘에 서실 원장이 됐고 스물넷에 서울미술제 초대작가가 돼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이십대에 4번의 개인전을 연다. 율산의 색깔은 어떤 색인가.

△서예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 알아야 한다. 많이 써봐야 한다. 자꾸 써야 한다. 그런데 법만 따지지 말고 쓰면서 터득해야 한다.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노래로 말하면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 조용필 나훈아의 노래는 아무리 잘 불러도 조용필 나훈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지금 젊은이들의 아이돌의 음악을 봐라.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지금 세상은 쓰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바뀌고 있다.

가수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노래한다. 서예도 그런 것이다.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다. 나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정을 실어야 노래가 되듯 글씨에도 자신의 감정을 실어야 된다.

- 서예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다.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나.

△아니다. 소년 명필도 있을 수 있고 실제 있다. 지금 재주가 있는 사람이 제대로 배우고 닦으면 명필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경륜이 쌓이고 글이 연륜이 묻어나 완숙해진다. 잘못 시작하면 30년 써도 초심자를 면하지 못한다.

- 1997년 대형 붓으로 서예 퍼포먼스를 펼친 이래 ‘타묵(打墨)’은 율산을 전국적 명사로 만들었고 드디어 한국예술문화명인에 선정됐다. 덕분에 서예계에서는 이단아라거나 예술계에서는 괴짜라는 별명도 얻었다.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도 기인이라는 평도 있다.

△괴짜라고?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거다. 처음 타묵 퍼포먼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서예를 욕보인다. 예술을 형편없이 실추시킨다. 서예를 희화화하지 마라’는 식으로 반응하면서 타묵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랬다. 그런데 그냥 쇼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적인 예술인 서예를 대중이 현장에서 눈으로 보는 순간의 무용과 소리로 듣는 음악의 경지로 승화시킨 것이 타필비묵(打筆飛墨)이다. 지금은 퍼포먼스에서 업그레이드 돼 공공 행사에서 자주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세상이 인정한 증거다.

- 율산의 서예 세계 지향점은 어디인가.

△예술은 기술이 아니다. 예술은 그 끝이 없다. 예술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나로 붓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서예가이고 싶다. 그 속에서 예술적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그것이 율산 서예의 진수다.

예술은 야생에서 자란다. 온실에서 키워낸 나물은 다르다. 온실에서 자란 봄나물이 산야에서 겨울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난 봄나물의 맛을 내지는 못한다. 그런 야생화 같은 예술을 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붓을 잡고 지금을 즐기며 가슴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서예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 일 많아 죽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나의 작품으로 전시관을 열어 서예 전 과정을 전시하는 것이 목표다.

/이경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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