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 <br/>최상희 춘추회 회장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2030세대, 586세대, 꼰대세대 등 나이로 편 가름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 의식을 지배하던 장유유서와 가정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의 붕괴 현상이 부정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곳곳에서 목도되고 있다. 부모와 자녀를 구성원으로 하는 전통적 형태에서 다양한 조합으로 가정이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 ‘공자왈’이 과연 유효한가. 그래도 후세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늘도 아침이면 책 보따리를 들고 출근하는 팔순의 청년 최상희 춘추회장.
젊어서는 지역의 금융인으로 기업인으로 지역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금융계를 은퇴하고는 교단에서도 후학을 가르쳤다.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더 흠이 가지 않으려는 생각만으로 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하루하루를 살아 간다”
“춘추회, 윤리이념 회복 사업 목적으로 창립된 지 43년 된 단체
종이에 물 스며들 듯 자연스레 젊은이들에게 깨우침 주고 싶어”
- 연세에 비해 건강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특별한 운동을 하나.
△아침 산책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아내와 진밭골을 산책하면서 하루 일과를 계획한다. 요즘은 혼자서 돌거나 빼먹기도 한다.
- 춘추회는 어떤 회인가. 왜 춘추회인가.
△도의와 윤리사상을 고취 앙양하고 미풍양속을 조장하며 사회 복지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윤리 이념 회복 사업을 목적으로 창립된 지 43년이 된 단체다. 회원들에게 도덕성 회복을 위한 강연회를 갖고 선현과 위인들의 유적지를 탐방하는 등 충효 예절교육을 통해 유풍을 함양하는 것이 목적이다. 유학이념의 창조적 승계 발전을 위한 모임이다. 나이 들었다고 모여서 밥만 먹어서야 되겠나.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여 젊은이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 천천히 자연스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땅의 유학 이념을 승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유학 이념의 정의부터 분명히 하고 회원 모두가 유학이념으로 무장돼 있어야 한다. 나부터 공부하고 있다.
- 그럼 춘추회가 지향하는 그 유학이념은 바로 우리의 선비정신 아닌가. 선비정신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는 같은가.
△춘추회가 공자의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담은 ‘춘추’에서 가져왔다.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기고 역사의식에서 시시비비의 정신을 신봉하는 것이 춘추의 정신이니 유학의 이념이 바로 선비정신이라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구체적으로 선비정신은 오늘날 어떻게 구현되고 있나.
△어찌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나. 청렴과 청빈을 우선가치로 삼으면서 일상에서는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선비는 문무를 겸비한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유학을 공부하여 그 이념과 도덕으로 스스로 인격을 수양하고 나아가 사회교화를 자기 임무로 여기는 지식인이라면 선비라 할 수 있지 않겠나. 확대하면 의롭지 못한 부귀는 탐내지 않고 불의에는 목숨을 걸고 항거하며 예의와 염치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선비정신이라 하겠다. 이건 우리 대구 경북인의 정신이기도 하다.
- 그러면 선비정신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야 하나.
△선비정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견위수명과 선공후사의 올바른 마음가짐이나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기개와 고결한 인격자라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는 신분차별이 당연시됐고 문을 숭상하면서 무를 낮춰보아 국력이 약화되기도 했다. 특히 농업과 공업 상업을 천시해서 산업능력을 저하시킨 점은 분명히 짚어야 한다. 이런 잘못들을 바로 잡아 긍정적인 면은 계승 발전시키고 부정적인 면들은 과감히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춘추회는 그런 일을 하나씩 하려는 모임이다.
- 지금 MZ세대는 유학 이념을 ‘꼰대’로 몰아가기도 한다. 춘추회장의 입장에서 유학의 이념 중 하나인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어떻게 평가하나.
△장유유서는 오륜의 하나로 소학과 논어 맹자 등에서 늘 되풀이되고 있는 유학의 기본 정신이다. 현실에서는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보면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 역지사지해서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자리를 선뜻 양보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동방예의지국이라 일컫는 이 땅에서 장유유서라는 미풍양속이 면면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우리 시민 모두가 사람의 도리를 지켜나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지난해 4월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110명이었던 회원은 1년도 안 돼 두 배 가까운 190여 명으로 늘어났다.
△춘추회는 처음 79명으로 출발했는데 결성 당시에는 대유림(大儒林)이자 대가벌(大家閥)이라는 자부심으로 입회 희망자가 넘쳐나 정원을 120명으로 한정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학에 대한 시대적 인식 등으로 다소 주춤해져서 내가 회장이 되면서 회원 확대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학연과 혈연, 지연을 동원하고 현업에서 활동하던 때의 인간관계를 모두 활용한다. 유학을 이해하고 춘추회 이념에 동의하면서 또 뜻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이면 적극 권유한다.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권유하는 식이다. 대부분 흔쾌히 응하고 또 참여기금을 쾌척하는 지인들도 상당수 된다. 덕분에 춘추회가 뭐 하는지 몰랐다던 사람들이 춘추회에 관심을 갖고 또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 코로나19 팬데믹이 모임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는가하면 오히려 깊은 인간관계 만들기도 했다는 사람도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활동하려 하나.
△유학의 이념을 전파하는 거다. 지금 공교육에서도 내팽개치다시피 한 도덕 윤리 교육이나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같아 이를 되새기고 되살리려는 것이다.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그동안 회원들의 활동이 부진했다. 코로나가 정점을 지난다면 올 4월부터는 특강이라도 살려가면서 활기를 불어넣을 생각이다. 그동안 순수한 회원들의 회비와 기여만으로 회를 운영해 왔으나 사회봉사단체로서 외부의 지원도 얻어내는 등 활동반경을 넓혀 나갈 계획이다.
- 금융인이었다. 1958년 한국상업은행에서 출발해 대구은행 창립멤버였다. 대구은행 상무에서 대동은행 전무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 대구에 지방은행이 하나 더 생겼다. 선배의 권유에 못 이겨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것이 1989년. 내가 아끼고 나를 따르던 후배들도 함께 챙겼다. 그들은 새로운 금융 세계를 꿈꿨다. 그러나 거기까지. 결국 꿈은 6년 만에 좌절됐고 모두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어쩌다 당시 후배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끝이 좋지 않으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더 이상 옛날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는 않다.
- 그 후 서민지원금융기관인 우리캐피탈 대표를 맡아 금융인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했다.
△청구 보성 우방 등 지역의 유명 건설업체 7곳이 출자한 주택할부금융이었다. 당시 아파트 건설 붐을 타고 지역 건설업체가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개업식에는 문희갑 대구시장과 이의근 경북도지사를 비롯한 그룹 주주들이 모두 참석해서 성황을 이뤘다. 이후 전국의 지방 캐피탈이 모두 문을 닫았지만 우리캐피탈은 9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고 대구의 우리캐피탈만은 살아남았다. 나는 회사가 대기업에 인수될 때까지 3연임하면서 9년3개월동안 경영했다. 당시 인수한 회사가 직원들을 모두 승계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 금융인으로서 평생을 활동했는데 그러면서도 유학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최근 상산만록(常山漫錄)과 속상산만록이란 두꺼운 역사 기록서를 잇따라 출간했다.
△영진전문대에서 초빙교수로 4년여 근무한 뒤 대구향교에 11년 출입하게 됐다. 그 중 6년동안 수석장의(首席掌議)로 활동하면서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특히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족적을 좇아 후진들에게 참고가 되도록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제목에서처럼 글 중에는 내가 쓴 글도 있지만 선현들의 문헌과 기록에서 인용하고 축약 편집된 자료들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어 만필(漫筆)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용기를 냈다.
- 취미로 하는 서예는 전국 공모전에서 여러 번 입상 경력이 있는 수준급으로 알고 있다. 특별히 좋아하는 시나 문구가 있나.
△좋아하는 말로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을 꼽는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말을 되풀이 뇌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지나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생각할수록 진리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자칫하면 넘쳐나기 쉽다. 안 넘쳐야 한다. 늘 조심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과유불급이다.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친구 사이나 후배와의 관계에서, 특히 친한 사이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과공비례도 같은 말이다. 상대를 대접할 때 인사도 과장하면 상대를 욕보이게 되는 것이니 적당하게 해야 한다. 술을 조심해야 하는 것도 술을 마시게 되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면 실언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넘쳐서 자기자랑으로 이어지니 조심할 일이다.
- 개인으로서 코로나19 발생이후 확산과정을 책으로 냈다. 섬세하고 자상한 마음 씀과 세상을 보는 시각을 때로는 객관적으로, 때로는 개인의 내면을 담담하게 그려냈더라.
△2020년 2월 대구에서 처음 코로나19가 시작해서 2021년 봄 전국적으로 확산되기까지 1년 여에 걸친 기간 동안의 국내외 코로나 역병의 확산과 대응, 그리고 개인의 일상과 성찰을 담은 일지를 책으로 낸 것이다.
코로나19 상황들을 언론 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때그때 기록한 일기들을 적다보니 원고 분량이 100페이지가 되었다. 여기에는 내 가족의 삶과 우리 이웃들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었고 방역에 대비한 시민들의 모습이 일상화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먼 훗날 내 자손들이 오늘의 일을 알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평범한 오늘날의 일상이 훗날에는 역사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코로나 백신이 도입되기까지의 인류의 재앙을 기록으로 남겼다.
<코로나 일기 중>
2020년 4월 2일(목요일) 흐림
아내가 기침을 계속 한다. 걱정이다. 부엌에 가서 밥을 전기밥솥에 안쳐 놓고 따듯한 엽차 한 잔을 아내의 침실에 가져다줬다. 오늘은 슈퍼에 가서 녹차를 좀 사와야겠다. 녹차가 떨어졌다.
오늘은 9시경에 대구은행에 가서 이사장 건 5백만원을 처리해야 하겠다. 영진중개소에도 10시경에 가야겠다.
어제는 공부를 못했다. 공부 안 한 날은 마음이 공허하다. 편치 않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느낌이다.
오늘 조선일보 조간에는 일본의 코로나 대응 관계기사가 났다. 확진자가 3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 한국 중국 미국 등 외국 49개국에 대해서 입국금지 조치했다고 한다.
□ 최상희(崔相熙·82)
호 상산(常山). 경주출신. 대구상고, 영남대 상학과, 영남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 박사.
전 대구은행 상무이사. 대동은행 전무이사. 우리캐피탈(주) 대표이사.
영남대 총동창회 부회장, 대구상고 총동창회장. 영진전문대 초빙교수.
경주최씨 광정공파 종친회장, 대구향교 수석장의. (사)담수회 부회장. 경주최씨 대구종친회 회장. 구회당 종중회장. (사)구향회 회장. 현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감사.
조간신문을 1면부터 국제면, 사설까지 꼼꼼히 읽고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놓지 않는다. 유학의 ‘수신제가’를 수범으로 보여주는 회원들의 거울. 늘 공부하고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세상과, 그리고 주위에 맞춰가려 노력한다.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