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권동순 전통문화콘텐츠개발사업단 대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90여 종가가 터를 잡고 대를 이어오고 있는 유가의 땅 안동. 동해바다의 고등어가 영덕 청송 고개를 넘어 내륙 안동에 와서는 낙동강 뱃길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을 만나 간이 밴다. 안동간고등어로 재탄생한 것이다.
안동토박이 권동순 전통문화콘텐츠개발사업단 대표는 “안동간고등어는 20세기말 IMF 사태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국민식품으로 인정받았다”며 “안동 문화를 바탕으로 한 안동 종가음식으로 한식의 세계화를 이끌겠다”고 욕심낸다. 종손의 오너 마인드와 종부의 주방 카리스마로 ‘봉제사 접빈객’의 정신을 담은 ‘예미정’이란 브랜드로 식품업계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지방 주재기자 출신으로 수많은 특종을 한 그는 필생의 사업 중 하나로 이육사 기자상을 만들어내 올해 첫 수상자를 배출했다.
대구·경북 언론인 중심 안동 주재기자 출신 ‘이육사 기자상’ 제정… 올해 첫 수상자 배출
‘안동간고등어’ 내륙지역 생산물 아니라 국가지원금 등 제외 극복 전국적 브랜드로 성공
일반 한식과 차별화된 향토음식점 ‘예미정’ 창업… 안동 종가음식문화의 보전·전승 기대
-안동 출신 독립투사 이육사의 정신을 기리는 이육사 기자상이 첫 수상자를 냈다. 안동시민들의 성원이 밑거름이 됐을 듯하다.
△역사 속 안동 사람들은 반골 기질이 강했다. 견훤에 밀려 대구 팔공산에서 안동으로 쫓겨 온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것만 해도 그렇다. 조선시대에도 청음 김상헌 같은 꼬장꼬장한 선비를 낳았다. 그 반골 기질은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로 이어졌고 경술국치 때는 최다 단식순국 사례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만주로 집단이주해 정착촌을 이루고 벼농사를 일으키며 독립운동의 근간을 구축한 것도 안동사람들이었다. 이런 흐름이 구한말 올곧은 언론인들을 배출해 냈고 이육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이러한 반골기질 안동사람들의 열화같은 성원 덕분이다.
-이육사기자상 제정 동기는.
△육사는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기자 활동을 했으며, 본의 아니게 기자직을 그만두고도 평생을 기자에 대한 향념을 지녔었다. 또 삼형제인 그의 형과 동생들도 모두 기자생활을 했다. 같은 안동 출신으로 같은 주재기자로 재직하면서 육사의 기자 정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집기사나 특종으로 여러 차례 기자상을 받게 된 것도 계기가 됐다. 그래서 지역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육사 기자상 제정에 뜻을 한데 모으게 되면서 어렵사리 성사된 것이다.
-상 제정에는 지속가능한 재정적 뒷받침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줄 안다.
△10여 년 전 용정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불필요한 부동산을 재단으로 귀속시켜 거기서 나오는 임대수익을 모아 기금을 마련했다. 당초엔 안동과 인연이 깊은 만주 용정과의 교류를 위해 재단을 준비했었다. 안동에 낙동강이 있고 이육사가 있으면 용정은 해란강이 흐르고 또다른 민족시인 윤동주가 활동했던 도시다. 재단은 정관에 기자상 시상뿐 아니라 불우이웃 돕기, 만학도 장학금 지급, 문화예술인 후원 등 다양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대구경북언론인회의 대경언론인상을 후원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안동간고등어를 상품화해서 전국 브랜드로 성공했다.
△궁즉통(窮則通)이랄까. 1997년 말 IMF가 터지면서 봉급이 급격히 쪼그라든 위기의 월급쟁이가 찾은 자구책이 시작이었다. 늦둥이로 낳은 딸아이의 분유 값이 걱정되는 시골 기자가 시도한 몰래부업이었다. 1998년 봄이 오기도 전에 부도와 실직으로 절망감에 내몰린 사람들의 비극적 사건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에게도 너무나 곤궁하게 살던 여동생을 잃는 아픔이 닥쳤다. 당시 월급이 반토막 나 도와줄 수도 없는 나로서는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꽃다운 나이에 삶을 포기해버린 여동생을 잃었을 때는 또래 여성들이 모두 여동생처럼 보이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이런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창업한 것이 안동간고등어다. 겸직을 금기시하는 회사 분위기 속에서도 부업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내남할 것 없이 지독하게 궁핍했던 당시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안동간고등어가 전국적 상품이 될 때까지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인가.
△너무 잘 팔려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흑자 부도라는 말을 실감했다. 판매점에 깔리는 외상값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감당할 수 없었다. 돈이 회전되어 돌아오는 시간적 여유가 극히 짧은데도 워낙 거래처가 폭증한 때문이었다. 맨 땅에 헤딩하듯 창업했으니 밑천이 달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처음엔 돈 꾸러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봉정사 총무 성묵스님이 나서 절돈을 몰래 꿔주기도 하고, 은행지점장에게 직접 호소도 해줬다. 덕분에 ‘지금 팔리는 걸 보니 6개월 후면 이만큼은 팔겠군’ 하는 소위 ‘추정매출’을 신용으로 은행에서 3억원이나 꿔줬다. 은행조차 부도나는 당시로서는 대동강물 팔아먹은 김선달 같은 이야기지만 그게 밑천이 됐다.
-기술이나 제품 생산에는 어려움이 없었나.
△바닷가도 아니고 농촌 소도시인 안동엔 생선 가공 기술인력은 물론이고 전문 경영인도 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기초생활보호대상자들을 생산직으로 채용해 하나하나 가르쳐 숙련공을 만들고 사내 장학제도를 만들어 사무관리 및 경영인력을 자체 양성했다. 특히 생선은 지역 생산물이 아니라서 일체의 행정적 지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도 내륙 생선가공업의 설움이었다. 지금까지도 안동시에서 수출 지원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원료가 지역산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향상품 팔아주기 사업 대상에서도 제외되어 있다.
-안동간고등어가 히트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나.
△IMF라는 시대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절망감에 휩싸인 도시 사람들이 간절하게 희망을 찾고자 할 때였다.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옛날 보릿고개 시절을 생각하면 이 어려움은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동간고등어가 준 것이다. 시골 어머니가 도시로 나간 자식들에게 ‘니 짭짤한 안동간고등어 먹고 다시 힘내라’라는 감성적 상품 캠페인이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먹힌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내륙에서 생선을 특산물로 내세운 역발상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 마케팅과 2000년 초 홈쇼핑 유통사업이 처음으로 도입되는 시기에 홈쇼핑 전문상품으로 기획한 점도 히트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예미정이 안동의 종가음식 브랜드가 됐다.
△매일신문 연재물 ‘향토음식산업화 맛’ 시리즈가 만든 셈이다. 100여 차례 국내외 취재를 하면서 외식산업과 식품 유통산업에 대한 안목이 생겼다. 안동간고등어로 구축된 전국 온·오프라인 유통망에 향토식품도 다양하게 유통시켜 보자는 생각에서 창업했다. 간잽이를 앞세워 간고등어만 할 게 아니라 안동 종가음식을 모토로 명예종부 맛잽이들을 육성하고 다양한 농축수산물도 더불어 팔 수 있도록 해 보자는 게 창업목적이었다.
일반 한식과의 차별화를 위해 안동 종가음식이란 트렌드를 선택했고 예미정이란 당호로 식품 브랜드를 키우자면 큰 기와집도 필요했다.
맛과 조리기술만 자랑하는 외식산업에서 고유의 셰프 정신과 오너 마인드가 살아 숨쉬는 안동 종가음식의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라는 종부 종손 마인드는 세계적인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예미정 종가 떡갈비는 지난해 말 첫 홈쇼핑 방송에서 대번에 인기상품으로 떴다. 새해 벽두부터 아주 좋은 조짐이다.
-종가음식의 가치를 자랑하면 어떤 것이 있나.
△음식에 ‘진심’을 담은 치유와 웰빙의 슬로우 푸드가 종가음식이다. 종손이 음식재료를 살 때는 결코 값을 깎지 않는다. 대신 ‘최고 식재료를 최고가로 샀다’는 자랑과 자부심이 오너의 마인드다. 종부는 목욕재계하고 정안수 떠 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자세로 조리를 한다. 생명을 걸어놓고 조리하는 종부는 주방에서 절대 권력자다. 음식 고명과 접시를 오방색으로 차림으로써 식탁에 별도의 꽃을 장식할 필요가 없다. 이탈리아나 중국 일본 태국 같은 세계적 음식이 맛과 기술을 앞세우지만 세계 음식 박람회에서 우리 종가음식의 ‘정신적 깊이’에 ‘원더풀’이 쏟아졌던 경험도 여러 차례 있다.
-오랫동안 지역기자로 활동하면서 지역민들과 소통이 돼야 할 것 같다. 갈등은 없었나.
△지역담당 기자로서 자칫하면 기득권과의 결탁이나 유착으로 흐를 여건이 넘쳤지만 그래도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야 한다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끝까지 지켰다.
특히 고향 선후배 등 인간관계로 제보가 많아서 비판, 폭로기사로 인한 역대 국회의원과의 관계는 상호 긴장과 견제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지역 정치권으로부터 보도 내용에 불만을 품은 고소 고발이 이어졌으며 헛소문 유포와 악의적인 모함도 숱하게 겪었다. 결국 당사자들이 사실을 수긍하면서 모함이 해소되긴 했지만 되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의 반복이었다. 후배를 신뢰하고 보호해 주는 걸 절대덕목으로 삼는 신문사 선배들 덕분에 험한 직업이었으나 무사히 정년퇴직을 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기자시절 여러 차례 특종을 했다.
△가장 자랑스러운 특종은 군의 구조적인 고추 군납비리 보도였다. 농협과 보안사의 조직적인 취재 방해로 자칫 단순 사건으로 묻힌 뻔 했으나 광범위한 탐문취재를 통해 경북은 물론 충북 강원 경남지역의 군납비리까지 밝혀냈다. 또 농협서 물먹인 고추를 수매하는 비리를 밝혀내기도 했다. 상인들이 납품 전 건고추에 물을 뿌려 고추 중량을 늘이고 농협 수매장에서 이를 눈감아 준 비리였다.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발생보고서 조작사건을 터뜨리기도 했고 안동호가 겨울철에 검게 변하는 턴오버(turn over)현상, 여름철 노랗게 변하는 녹조현상을 최초 발견해 안동호 수질 보존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면 상도 여러 차례 받았을 것 같다.
△군납고추 비리 보도로 제34회 한국기자상을 받았는데 재직 중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향토음식 산업화 맛’ 시리즈는 106회를 이어온 장편 연재물이었다.
연재 피날레를 장식하는 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찾아다니며 전통음식을 취재할 때는 수천km를 날아다니며 취재했는데 마감시간에 쫒겨 기사는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작성했지만 보람도 많았다. 이 시리즈로 대구경북기자협회 올해의 기자상, 일경언론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한국 하회마을과 중국 려강고성, 일본 시리카와고의 전통마을을 취재한 ‘신도청시대 하회마을’(15회)은 한국지방언론대상 최우수상을 받았고 ‘부내야, 아! 부내야’라는 이름의 책으로 나왔다. 재직기간 중 15차례, 퇴직 후 지난해 운 좋게도 대경언론상을 하나 더 추가했다.
-많은 것을 일궈냈다. 이제 어떤 바람이 남아있나.
△800년 전 안동 하회마을에서 ‘허씨’라는 이름 없는 목공예가가 깎은 하회탈에 ‘김씨 처녀’와의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진 하회탈춤은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문화 콘텐츠가 됐다. 이육사기자상도 하회탈춤처럼 시대를 넘어 안동의 전통문화 콘텐츠가 되길 희망한다.
안동간고등어는 백년 향토기업이 될 수 있도록 재정비하는 일이다. 또 예미정은 단순 음식점을 넘어서 무형 문화재급인 안동 종가음식 문화의 전승과 전통 음식 조리교육의 도장이 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를 보완하는 일도 과제다.
□ 권동순(權東純·64)
안동 출신. 안동고. 경북외국어대. 연세대 정경대학원 정치학 석사.
전 매일신문 부장.
(주)안동간고등어 창업, (주)예미정 창업.
안동 병산탈춤 복원. (사)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 이사. (재)세계탈연맹(IMACO) 이사.
안동석빙고장빙제 실무 부회장. 낙동강누치잡이 보존회 회장
전통문화콘텐츠개발사업단 대표. (사)안동종가음식체험관 설립.
(사)안동간고등어생산자협회 설립. 이육사기자상 제정위원회 위원
저서 ‘향토음식산업화 맛’ ‘접신의 땅 일월산’ ‘부네야 아! 부네야’
주재기자로 출발해서 안동간고등어, 예미정을 한식 브랜드로 키워내고 이육사기자상을 출범시켰으나 본인은 늘 대표 아닌 ‘고문’ 역할을 맡았다. 어려운 시절 산에 들어갈 결심을 했었다는 그는 5년 전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중이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남은 생을 잘 마무리 하려고 날마다 암과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