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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반주자는 솔리스트를 감싸는 예술가이다

등록일 2023-02-20 18:33 게재일 2023-02-2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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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가 만났다<br/>정혜경 반주전문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정혜경

모든 시는 음악이다. 시에 멜로디를 입힌 가곡은 그래서 희노애락의 우리 감정을 한 단계 승화시키는 우리의 노래다. 품위와 격조를 갖춘 우리의 노래, 바로 가곡이다. 반주자는 그 가곡을 더욱 가곡답게 만든다. 반주 전문연주자 정혜경은 반주자나 성악가에게 더 많은 작사가와 작곡가에 대한 공부를 주문한다. 그것이 우리 가곡을 더 많이, 더 멀리 전파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반주를 무대 백그라운드로 보는 경향 아쉬워… 성악가와 음악 협업하는 코치로 인식을

독일 유학시절 되돌아 보게 된 ‘한국 가곡’… 희노애락 감정을 승화·우리의 얼이 깃든 노래

해설집 ‘가곡의 시간’ 발간, 서울·대구서 정기연주회 등 끝없는 연습·대중과 호흡에 몰두

 

-피아니스트 정혜경에게 한국 가곡이란 어떤 것인가.

△한국 가곡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아픈 역사의식도 함께 새겨진 시가 만들어낸 음악이다. 그렇게 우리의 희노애락이 담긴 가곡이 지금 시대에서 부르기엔 구시대적 유물처럼 폄훼되어 점점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사장되어 가는 데에 위기감을 느꼈다. ‘봉숭아’의 가사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라는 부분이 있다. 마치 우리 가곡의 미래를 예견한 듯해서 가곡을 지켜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전공이 독일 예술가곡이다. 왜 한국 가곡에 관심을 갖게 됐나.

△어릴 때부터 책을 참 좋아했다. 친정아버지께서 내게 ‘책벌레’라는 별명을 주셨을 정도다. 글보다는 시가 좋았고 시보다는 시조를 더 좋아했다. 한국 가곡의 작사는 대부분 아름다운 시로 지어졌고 가곡의 효시인 홍난파의 ‘봉숭아’나 박태준의 ‘동무생각’의 작사는 시가 아닌 시조다.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우리 가곡에 대한 인식을 새로 하게 됐다. 유학 생활 중 친구의 입학시험에 반주를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심사하시는 독일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왜 너희 나라 음악은 연구하지 않고 여기에 왔니?” 그 말을 듣고 한국 가곡을 돌아보게 됐다. 유학에서 돌아와 우리 음악계의 현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됐다. 남의 나라 곡과 작곡가는 그토록 연구하면서 우리나라 가곡의 작곡가는, 또 작사자는 왜 연구하지 않느냐는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국내 음악에서 가곡의 위치와 중요성은 어느 정도인가.

△가곡의 위치보다는 우리 가곡을 바라보는 우리 정신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가곡은 우리의 근본적인 부분이므로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때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깊은 물이 조용히 흐르는 것처럼. 일제가 우리나라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한 일이 우리글을 없애고 문화의 훼손과 저급화를 꾀한 일이었다. 우리의 얼이 깃든 음악과 문화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가곡의 위치에 앞서 한국 가곡을 바라보는 우리 정신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이다.

 

-최근 K팝의 세계적 인기와 트로트 신드롬 속에서 우리 가곡의 위치는 어떠한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세대는 젊은이들이 등장하고 그런 시대의 대중성을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가곡이라도 대중이 함께 그 의미를 호흡할 수 없으면 발전할 수 없다. 살아있는 생물이 되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인 가곡의 대중화를 위한 협업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예술가곡과 대중가요의 콜라보는 더러 있었다. 가수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도입부는 베토벤의 ‘Ich liebe Dich(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차용한 것이며 가수 마야의 ‘진달래꽃’은 시인 김소월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대중가요 작곡가인 김희갑 씨가 작곡을 하고 성악가인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불러 크게 히트했다. 클래식을 고급으로 보면서 대중가요를 낮춰 보는 인식이 강했던 시대에 엄청난 비판을 받으면서도 앞질러 간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정지용의 ‘향수’는 작곡가 채동선이 작곡하기도 했으나 오리지널 가곡이라 할 이 노래는 지금 악보로만 남아있고 별로 불러지지 않는다. 대신 김희갑의 ‘향수’가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피아노를 선택하고 반주를 전공한 이유는.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국문과를 가고 싶었지만 원하시는 대로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결국 솔로 피아니스트보다 시와 가곡에 끌려 반주로 전향했다. 결정적 계기는 친구의 레슨 반주 중 성악 교수님의 일갈이었다. 슈베르트의 ‘겨울여행’ 중 ‘봄의 꿈’에서 사랑을 잃은 청년의 꿈 이야기를 노래할 때다. 청년이 추운 방안에서 잠시 잠들었다가 사랑하던 여인과 5월의 푸른 잔디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꿈을 꾼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닭 홰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깨었다. 이 부분을 반주에서는 빠른 16분 음표가 나오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쳤던 것이다. 그때 교수님은 “혜경아, 여기는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 것처럼 홰치는 리듬의 감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지적해 주셨다. 그 소리에 머릿속이 확 깨쳐지는 것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시와 음악, 두 마리 토끼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전문반주자로서 성악, 특히 가곡과 반주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성악가들에게 그 곡의 내용을 좀 더 알게 하고 풍부하게 하며 곡을 다듬는 일을 반주자와 함께 협업한다. 이것을 우리 음악에서는 음악코치라고 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어떤 때는 성악가들조차도 반주는 선율을 보강하거나 곡을 강조하려는 무엇인가를 보충하는 보조인식으로, 심하게 표현하면 백 그라운드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반주는 노래나 악기를 지원하는 단계(accompaniment)를 거쳐 공동 작업(collaboration)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단 가곡뿐만 아니라 음악과 협업하는 음악 코치로서 서로 음악에 대한 의견을 나누어서 무한대의 색깔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반주자와 음악과의 관계다. 반주는 솔리스트의 종속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문 반주자의 자세는 그냥 연주자와는 달라야 하나.

△무엇보다 반주자는 먼저 배려하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를 빛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주자의 역량이 느껴지고 결국에는 반주자로 인해 서로가 빛나게 만드는 것이 전문 반주자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유능한 반주자는 솔리스트를 감싸는 예술가이다. 요즘 들어 내가 생각하는 전문 반주자는, 특히 내 전공인 가곡 반주자는 피아노로 시를 읊을 수 있는 피아니스트여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가곡의 시간’이라는 가곡 해설집을 발간했다.

△반주를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우리 가곡은 치열하게 연습하지 않고도 연주할 수 있다는 오해를 조금이나 줄이고 싶었다. 무엇보다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다. 또 성악가들도 작사가와 작곡가를 공부하고 노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책을 쓰게 됐다.

 

-슈베르트의 가곡 반주와 한국가곡 반주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곡의 왕’이라는 슈베르트는 스스로 자신은 운명적으로 가곡 작곡가로 태어났다는 자부심으로 가곡을 작곡했다. 그가 작곡한 가곡은 유명 시인의 시나 신화 등을 작곡에 두루 반영했다. 우리 가곡은 그런 시들 외에도 역사적인 아픔과 한의 요소가 깊이 배어 있는 작품들이 많아 작곡보다는 시인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부분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반주는 당연히 서양 기법의 피아노 테크닉이지만 그 테크닉 중에서도 페달링 기법은 우리 가곡의 반주가 독일 가곡만큼 촘촘하거나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음악을 풍부하게 하고 시를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런 점이 한국가곡의 지상 레슨을 쓰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됐다.

 

- CMAK를 결성한 이유와 활동상을 설명해 달라.

△협업(Collaborative)에 의미를 둔 Collaborative Musicians Association of Korea, 클래식 음악 앙상블이라 보면 된다. 반주라는 개념이 성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주자의 능력을 다방면으로 확대하고 연주기회를 더 많이 갖기 위해 2009년 서울에서 결성됐다. 현재 피아노와 성악 관현악 작곡가 6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있다. 매년 정기연주회를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영산아트홀 등 메이저급 장소에서 개최한다. 회원들의 공부 기회를 주기 위한 작은 연주회는 연간 4∼5회 열고 있으며 대구지부도 연 2회 정기연주회를 통해 회원들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서울협회가 18회의 정기연주회와 40회의 작은 연주회. 8회의 CMAK 음악인협회 콩쿠르를 개최했고 대구지부도 21회의 정기연주회를 했다.

 

-대구의 음악계 풍토와 대구반주연구회의 역할은 어떤 것이 있나.

△대구에는 좋은 성악가가 많다. 특히 오페라 쪽이 더 강세가 있다. 또 피아노 단체의 연주들도 활발하며 특히 모던 앙상블이라는 현대음악 단체는 그 존재가 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1999년 창단한 대구반주연구회도 23년 동안 해마다 2차례 정기연주회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대구를 대표하는 반주자 공부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 가곡을 더 널리 보급하고 젊은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한국적인 것과 전통을 사랑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에게 예술가곡이 많이 노출되도록 해야 한다”는 유미경 도서출판 성득 대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2030세대에게 우리 가곡을 전파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일종의 사명감으로 도서출판 유 대표와 협업하고 있다.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CMAK(앙상블 음악인 협회)와 북 콘서트도 여러 차례 연주되었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또 가곡이야기와 연주를 병행하는 실버에서 청소년까지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가곡 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 서울 홍난파 가옥에서 이야기가 있는 한국가곡연주회가 3, 5, 9월에 기획되어 있다. 살롱음악처럼 작은 공간에서도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할 수 있는 연주를 모색하고 있다.

 

-개인적인 바람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 달라.

△‘지성(至誠)’과 ‘불광불급(不狂不及)’ 그리고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라는 글귀를 신조로 삼고 있다. 지극한 정성과 미쳐야만 하나를 이루고 그것에 도달할 수 있으며, 끝없는 연습만이 위대한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정혜경(鄭惠卿)

CMAK음악인협회(앙상블연주단체) 이사장. 반주전문 피아니스트.

1963년 서울생. 선일여고 졸.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독일 뒤셀도르프 슈만국립음대 대학원 졸업(피아노)

독일 부퍼탈 국립음대 대학원 졸업(리트 반주)

1991년 귀국 후 대구반주 연구회 창립 및 회장(현), (사)CMAK음악인협회(앙상블연주단체) 창단 및 이사장(현).

‘음악저널’콩쿠르에 대한민국 최초의 예술가곡 콩쿠르 창설.

20042023년 24회의 반주자 정혜경의 반주연주회 개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한국 등의 예술가곡 반주 음반 41매 발매.

독일 인도주의재단 ‘동행’초청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연주, 주독일 한국문화원 초청 연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우아리바이 문화원 오픈 초청연주 등 해외연주 및 수백회의 연주.

제30회 오늘의 음악가상(2010년), 제15회 대한민국 오페라대상 예술상 부문 공로상(2022년), 이화여자대학교 개교 130주년 ‘올해의 이화인’ 선정(2016년).

자연을 사랑하고 순수함을 지향하며 문학과 시를 좋아한다.

반주는 노래를 더욱 노래답게 만들어주며 성악가의 보조를 넘어 동행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정통 반주전문 연주자.

가곡의 반주는 가사와 작곡가의 의도를 알고 충실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반주자는 성악가와의 학구적인 마찰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가곡을 온 나라에 더 널리 보급하고 다음 세대에까지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경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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