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이동순 가요평론가
예부터 우리 민족은 노래를 즐겼다. 노래는 분함을 삭여주고 답답함을 뚫어주며 기쁠 때는 흥을 돋워주며 슬플 때는 위로해준다. 우리 민족의 삶에 깃든 애환을 겉으로 표현하고 속으로 다독여 시로 짓고 노래의 근원을 찾아 밝히는 이동순 가요평론가. 신춘문예 출신 시인이자 명예 대학교수인 그는 “대중가요라고 깔보지 마라”며 “가요는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애환을 해소하고 여과시켜 주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삶의 치료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가요를 모두 정리해 하나의 실로 꿰어내겠다는 당찬 포부를 보인다.
“신춘문예 당선… 상처투성이였던 나를 자신감으로 충만하게 만든 분기점
‘일제시대 무명 저항시가’ 연구중 대중가요의 ‘가치’를 새삼 인식하게 됐어
수많은 가요 모두 사연 담고 있지 그걸 그 시대와 함께 조명하는 것이 목표”
-올해가 김춘수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고 지금 시인 김춘수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학창시절 김춘수 시인은 거대한 언덕이었고 그런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 정말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대학 4년을 김춘수 선생을 흠모하며 시를 공부했고 석사과정에서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좋아하시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면 손을 덜덜 떨면서 담배를 피시던 스승이었다. 심지어 김춘수 선생의 기침 소리까지도 노트에 적어놓을 만큼 심취해 있었다고나 할까. 그만큼 김춘수의 초기 시는 매력적이기도 했다.
-김춘수 선생의 추천을 받았나.
△대학 3학년 때 시를 10편 적어서 연구실로 찾아갔다. 창밖을 내다보시며 ‘봉투를 두고 가라’고 해서 책상 위에 놓고 나왔다.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두 달 뒤 연구실에 갔더니 그 자리에 봉투가 밀봉된 채 그대로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저항심도 생겨 도로 갖고 나왔다.
-김춘수 선생과의 인연은 계속됐을 것 아닌가.
△4학년 때 ‘전국대학생 현상작품공모전’에 ‘장마이후’ 등 3편을 출품해 당선됐다. 시상식에서 김춘수 선생은 ‘추천하고 싶다’며 작품을 가지고 오라 하셨다. 나는 이미 마음이 떠나 대답만 하고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1973년 ‘마왕의 잠’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기억이 생생할 것 같다.
△당시 아르바이트 하던 집으로 당선통지서가 속달등기로 왔다. 현기증이 났다. 먼저 김춘수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무언가 서운한 듯 축하해 주시더라. 대신 당시의 문단 흐름을 의식해서인지 ‘각별히 조심하라’고 경계의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김춘수 선생은 순수시의 대표로 참여시의 대표인 김수영 시인과 여러 면에서 대비되고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김수영에 대해 공부를 했고 김춘수에는 없는 정신을 김수영 시인에게서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김수영의 시에 매력을 느끼고 접근하고 있음을 눈치 차린 듯 경계한 것이다.
-신춘문예 당선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당선 이전과 이후로 세상을 구분하게 됐다. 주위에서 누구도 하지 못한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이었다. 당선 이전에는 상처투성이에다 콤플렉스 덩어리였고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으며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일거에 해소해버리고 자신감으로 충만하게 만든 분기점이 신춘문예 당선이었다.
-조부가 독립투사 이명균이다. 그 영향이 홍범도 서사시 등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보면 되나.
△대학 재학 때는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밤늦게 교수 연구실에서 닭털침낭을 펴놓고 자다가 숙직에게 발각돼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2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갔고 신춘문예 당선도 그럴 때였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고 대학 재학동안 등록금을 면제받은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승에서 육신으로 만나지 못했지만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립투사 할아버지의 정신과 기질을 이어받은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유훈이 나를 길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문학박사가 어떻게 가요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가요평론가가 됐나.
△1980년 박사학위 논문이 ‘일제시대 무명 저항시가에 나타난 현실의식 연구’였다. 여기에는 일부 대중가요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가요를 좋아했던 것 같다.
-유행가에 대해 뽕짝이라 하고 가수는 딴따라라는 둥 폄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때였다.
△공부하다보니 우리 대중가요의 ‘가치’를 새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유행가 가사가 식민시대에는 극작가나 문학인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가요를 연구한다는 것은 가사의 미학적 가치도 있지만 사회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도 의미있다.
-특히 대학에서 그런 시각이 심했을 것 같다.
△대중가요에 대한 폄하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조명암을 주제로 한 학위 논문 심사에서 심사위원이던 교수가 ‘그게 무슨 논문이냐’며 모욕을 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대에서 대중가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도 나오는 등 가요사 연구가 대학가에서도 학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시인 조지훈은 고려대 교수 시절 시가 가요에 담긴 정서와 문학사적 배경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너무 외면해 왔다며 앞으로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대구가 유별 근대 대중가요의 메카가 된 배경은 뭔가.
△1950년대 당시 오리엔트레코드사가 대구에 있었고 수많은 전쟁 가요들이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녹음됐다. ‘굳세어라 금순아’가 녹음되던 날은 새벽 5시 곡 녹음이 끝나려는 순간 ‘두부사려’ 하는 두부장사 목소리와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끼어들어 다 된 녹음을 이튿날 다시 하는 비극도 있었다. 이병주 사장의 집념은 대구를 대중가요 메카로 만들었지만 오리엔트레코드사는 지금 헐어지고 그 자리에 오피스텔이 지어지고 있다. 그 자리를 ‘대구근대음악박물관’으로 만들자고 여러 단체장들에게 제안했고 내가 자료를 모두 제공하겠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타깝고 아쉽다. 나는 계명문화대 평생교육원 내에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를 만들고 음반전시관을 개관했다. 많은 레코드판을 모두 기증했다.
-노래에 천부적 재질이 있었던 것 같다. 유전은 아닌가. 가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흥얼거린 걸 들은 적은 있지만 잘 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목소리도 얼굴도 모른다. 그러나 어릴적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 왠지 좋았다. 특히 여가수는 모두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표지도 없는 유행가 책에 ‘이동순’이라고 이름을 기록했을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다. 따라 부르면 곧 곡조가 익혀졌다. 가사를 받아쓰고 노래를 익힌 것이다. 누나들의 칭찬을 들으면서 레퍼토리를 늘려 나갔다. 중학생 때 벌써 500곡 이상의 노래를 익혔던 것 같다.
-어머니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기억은 평생을 여가수 목소리에 목매달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고 10달이 채 못돼 돌아가셨다. 6·25 전쟁 때 동네에 인민군이 들어오자 나를 잉태한 채 4km나 떨어진 문중 종산 산지기집으로 피난 가 있다가 3달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나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 해 나한테는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한 채 43살에 돌아가신 거다. 나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은 내가 모든 여가수의 목소리를 들으면 모두 어머니 목소리로 여기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가수 목소리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다더라.
△고교시절 소풍 가서 학반대항 노래자랑 대회가 열리면 내가 늘 반 대표로 나갔고 또 1등을 했다. 우쭐했다. 심판을 맡은 선생님들은 나를 불러 소주를 한 잔 권하며 칭찬해 주셨는데 싫지 않았다.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재수할 때는 같이 공부하던 친구의 부모님이 일부러 불러서 노래를 시키고 특식으로 라면을 끓여 주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너는 대학 가지 말고 가수 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군대에 가서도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뒤늦게 군에 갔는데 나보다 나이 어린 고참들이 곧잘 노래를 시켰다. 노래사역이었다. 그러면 부동자세로 ‘어머니’ 관련 노래나 ‘전선야곡’ 같은 노래를 불러 고참을 울렸던 기억이 난다.
-시인으로 살면서 늘 대중가요와 함께 했다. 세기적인 가요대항전은 어떻게 생겼나.
△시인 김지하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나왔을 때다. 김지하 시인은 술을 마시면 혼자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라. 그 때 한 후배가 ‘형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르는 후배 시인이 있다고 합니다’하고 염장을 질렀던 모양이었다. 김지하 시인이 당장 누구냐고 묻고는 직접 확인하겠다며 내가 있던 청주로 내려와 기상천외의 노래 대결이 펼쳐진 것이다. 그 상황을 소설가 김성동이 내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의 발문에서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전채린 교수의 13평 아파트 거실에서 저녁 10시에 시작해서 새벽 5시에 김지하 시인의 항복으로 결판난 사건이다.
-지금 K팝이 세계 한류의 대세가 되고 있다. 우리 가요와는 어떤 관련이 있나.
△물론이다. 비록 현재 아이돌이 중심인 K팝이 옛 가요와 시·공간적 분위기가 달라도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과 핍박, 오욕과 영광의 정신사적 계보를 이어 온 것만은 분명하다. 결코 평지돌출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 노래? 이난영의 ‘진달래시첩’ 같은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BTS나 블랙핑크 같은 아이돌 가수가 세계무대에 내놓는다면 또 다른 히트 한류가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시인의 노래는 창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까 두려워하며 가슴 저 밑으로 지그시 눌러가며 불러대는 맛이 있다.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노래에 맞춰 부는 퉁소 소리처럼 애잔하고 그러면서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그런 소리다. 겉으로는 흔들리지도 않더라.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좋아하고 ‘명동 블루스’를 즐겨 부른다. 밤새도록 김지하와 노래 대결을 벌였을 때 김지하 시인은 온 힘을 다해 절규하듯 노래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길 것이라고 예견했다.
- 시인이자 가요평론가로서의 이동순의 정체를 스스로 설명해 달라.
△27살에 교수가 돼 안동간호대에서 3년을 보내고 30대에는 충북대에서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40대에 영남대 교수로 와서 정년 할 때까지 25년동안 시와 함께 가요 연구와 수집 채록으로 보냈다. 수많은 가요들이 모두 사연을 담고 있다. 그걸 그 시대와 함께 조명해보는 것이 목표다. 노래와 예술의 사회사가 될 것이다. 지금은 가요황제인 남인수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출생에서 데뷔하고 임종하기까지의 동선을 모두 찾아냈다. 그의 인간적 풍모와 그가 부른 노래의 가치를 풀어내려고 한다. 제주도에서 석 달 작정하고 있다.
□ 이동순(李東洵·72) 시인, 문학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김천 출생, 경북대 인문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발견의 기쁨’, ‘강제이주열차’, ‘고요의 이유’ 등 21권 발간.
민족서사시 ‘홍범도’(전 5부작 10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시전집’ 발간(1987년, 창비)하고 시인을 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민족시의 정신사’, 가요에세이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노래따라 영남을 걷다’, ‘한국근대가수열전’. 기행에세이 ‘실크로드에서의 600시간’, ‘시가 있는 미국기행’ 등 저서 70여 권.
대구MBC라디오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 이야기’에서 5년간 MC로 활동.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라디오에서 ‘남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 ‘시로 만나는 남과 북’ 프로 10년 동안 매주 방송. 방송사 가요사 전문 패널로 활동.
신동엽 창작상, 김삿갓문학상, 시와 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
충북대학교 인문대 국문학과 교수,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역임.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옛 가요 사랑모임 ‘유정천리’ 전국회장,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