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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市·해병대 공동운명체로 상호발전 기대

“첫째, 해병대는 일치단결하여 유사시를 대비, 교육훈련에 정진하자. 둘째, 민(民)에는 양이되고 적(敵)에는 사자가 되자. 셋째,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역사를 창조하자.”1949년 4월 15일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수륙양면 작전의 상시전개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창설된 해병대 초대사령관 신현준 중령이 강인한 해병양성을 위해 제시한 교육훈련 이념이다. 창설기 해병대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훈련의 연속으로 `해병혼`과 `해병정신`을 주입했으며 그 결과 한국전쟁 당시 상승불패의 정신을 갖게하는 초석이 됐다. 오늘날까지도 군입대를 앞둔 20대 청년들 사이에서 해병대는 최소 5대 1이 넘는 경쟁률을 거쳐야 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혹자는 해병인들이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기치아래 전역 후에도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선후배 문화를 강조하는 등 튀는 행보를 보이는 것에 대해 “`해병대부심`을 부린다”며 비하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지역사회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에 기여하는 바는 이루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1952년 8월 포항비행장 방호를 위해 포항과의 첫 인연을 시작한 해병대 포항부대도 이같은 해병정신을 바탕으로 수많은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각종 재난재해 발생시 적극적인 대민지원을 펼치고 있다.지난 2012년 기준 해병대는 포항시에 생산유발효과 776억원, 부가가치 유발효과 310억원, 취업유발효과 795명을 발생시키고 있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경우 해병대의 포항주둔으로 인한 경제적효과는 연간 1천846억원에 이른다. 지난 1997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해병대 캠프는 1회당 약 300명씩 지난해까지 총 113회에 걸쳐 3만4천961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봄, 가을 두 차례 농번기가 오면 실시하고 있는 대민지원활동은 포항지역 16개 읍·면·동에서 연간 2만여명의 장병을 투입해 지역 농민들의 생업을 지원하고 있다.이처럼 해병대는 70여년 동안 포항에 주둔하면서 사회·경제·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역사회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함께한 포항시와 해병대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서상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포항시민과 해병대 장병간의 상호 인식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해병대 장병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포항시민이라는 의식을 갖도록 하고 기존 시민들은 장병들에 대해 타지역에서 온 손님이 아닌 같은지역 시민이라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는 장병들이 전역 후에 포항을 떠날 경우 포항명예시민에 준하는 칭호를 수여해 포항시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남기고 명예시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안을 제시했다.포항시는 지역의 위상을 크게 높인 인물이나 시민의 생활개선 및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에 대해 명예시민증을 수여해 지난 1997년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시작으로 홍명보 감독, 가수 최백호씨, 개그맨 김원효씨 등 현재까지 총 10명의 명예시민을 선정한 바 있다. 해병대1사단, 교육훈련단 등 포항지역 해병대에서 한 해 배출하는 전역자가 5천명에 이르는 만큼 적지 않은 숫자라 포항시가 이들 전원에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기에는 부담이 큰 상황이다.명예시민증의 희소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대신해 명예시민에 준하는 칭호를 별도로 신설해 이들에게 수여한다면 가치있는 일로 승화될 것으로 기대된다.서 연구원은 포스텍, 한동대 등 지역대학과의 적극적인 공조필요성도 제기했다. 군복무를 수행하면서 배움을 희망하는 장병들에 대해 지역대학 교수가 진행하는 강의를 수강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전역 후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포항출신인 서상문 책임연구원은 “포항시민과 해병대 장병들이 이처럼 다양한 경로로 접촉할 기회를 가지면서 상호간 존재를 지속적으로 인식한다면 군부대와 지역사회가 상호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끝

2016-12-07

타국서 젊음 바친 용사들을 기억하며

“100명의 적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외국 원정군으로 파병된 해병대 청룡부대가 신조로 내세운 문구다.1964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공산 침략에 직면한 자유월남공화국을 지원키 위해 한국군의 월남파병을 결정했다.해병대 1개 여단과 육군 1개사단의 파월을 결정한 정부는 1965년 9월 20일 해병대 포항기지에서 해병대1사단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해 파월해병 결단식을 가졌다.초대 청룡부대장으로 임명된 이봉출 준장은 선봉대를 이끌고 포항역을 거쳐 부산항에서 출항, 1965년 10월 9일 베트남 캄란만에 도착했다.청룡부대는 미군 1공수사단 제1여단으로부터 캄란만 일대의 전술책임지역을 인수, 같은해 11월 4일 까두산 작전을 실시해 부숑비행장을 위협하는 적을 소탕해 18년동안 베트콩(베트남 공산군)의 아성으로 군림한 까두산을 탈환했다.같은해 12월 16일 캄란 동북쪽 투이호아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이듬해 1월 1일 파월 이래 최초로 전개한 여단급 탐색작전인 `청룡 1호작전`을 펼쳐 베트콩의 해상보급 추진기지인 봉로만 일대에 주둔하던 적군 1천500명을 소탕하는 성과를 냈다.이 작전을 통해 봉로만을 경유해 북쪽 퀴논으로 통하는 1번도로를 개통시키고 월남 3대 곡창지대인 휴송평야를 확보해 주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는데 기여했다.청룡 1호작전과 함께 청룡부대 10대 작전 중 하나인 `짜빈동 작전`도 혁혁한 성과를 낸 전투 중 하나였다.1967년 2월 14일 오후 11시 20분부터 이튿날 오전 7시 24분까지 펼쳐진 이 작전은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인해전술을 펼친 월맹정규군 제2사단 1연대, 21연대 및 지방게릴라 1개대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작전이었다.11중대 장병 191명은 수백여명이 기습공격을 펼친 베트콩을 전술기지에 구축한 교통호를 이용, 일제사격과 수류탄·크레모아 폭발로 격퇴했다.당시 아군 15명이 전사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했으나 적군 243명을 사살하는 뛰어난 공을 세우며 중대 전원이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이후에도 청룡부대는 1972년 2월 29일 제5진 철수가 완료되기까지 6년 5개월간 총 3만7천304명을 베트남에 파병해 여단급 작전 66회, 대대급 작전 109회, 소부대급 작전 15만1천347회를 전개해 적군 9천619명을 사살하고 1천256명을 포로 또는 귀순자로 삼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또한 구호물자 8천810t을 지원하고, 현지 민간인 40만3천729명에 대한 교육지원, 건물 1천593동에 대한 건설지원을 실시하는 등 대민봉사활동도 함께 진행했다.이 과정에서 2천702명이 다치고 1천76명이 전사하는 아픔도 있었으나 한국군의 전투력을 국내외에 과시하고 침체된 국가 경제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이렇듯 오직 국가를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젊음을 바친 참전용사들을 영원히 기억속에 남기기 위한 월남참전 기념비를 해병대의 본거지이자 월남파병 결단식이 열린 역사적 장소인 포항시에 건립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도심공원 등 접근성이 뛰어난 장소에 별도로 기념비를 세워 해병대 예비역과 지역민, 관광객들까지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와 관련 월남 참전용사 서모(77)씨는 “서울, 대구, 울산 등 대도시 뿐만 아니라 경남 창녕, 거제, 경기 이천, 의정부, 전남 남원, 강원 양구 등 전국 10여곳에 월남참전기념비가 건립돼 있지만 해병도시인 포항에는 별도의 기념비가 없어 안타깝다”며 “해병대 출병식이 열린 옛 포항역에 공원이 조성될 예정인 만큼 포항시와의 협조를 통해 월남참전기념비를 마련했으면 한다”고 전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11-29

“포항시·해병대는 공동운명체”

▲ 서상문 고려대학교 연구교수포항과 해병대는 어미 닭과 병아리의 관계로 비유될 수 있다. `줄탁동기`과정을 거친 피붙이 같은 운명공동체다. 줄탁동기란 불교의 깨침과 득도 수단의 하나인 공안(公案) 가운데 하나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돼 나오기 위해서는 병아리와 어미닭이 알의 안과 밖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어미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주어 부화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쉽게 나오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든 혼자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관계를 말한다.市·해병대 협력, 동반 성장비행장·철도·항만 시설 등군사전략적 입지조건 갖춰전 세계적 신속 임무 수행해병대의 `최강 조직` 자랑포항시민이나 해병인이라면 이 관계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포항은 지속적으로 변화해오고 있지만, 앞으로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철강 위주에서 탈피한 산업의 다양화는 중요한 과제이지만, 허물기보다 보존의 개념으로, 개발만능에서 벗어나 자연 생태계와 인간이 상호 공존하는 쪽이 바람직하다.해병대도 부단히 발전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세계 군사강국들이 추진하고 있는 21세기형 현대 해병대의 발전 방향은 정규전 이외에도 다양하고 복수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쪽으로 가고 있는 추세를 따라가고 있다. 위협의 다양화, 비대칭화, 비선형화라는 오늘날의 안보환경 하에 국가 혹은 비국가 집단들은 군사혁신을 통한 무기, 장비의 다양화 및 첨단과학화,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WMD)의 위협 증가에 대응하는데 해병대가 가장 적절한 부대로 평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양한 전투경험을 토대로 제4세대 전쟁(The 4th Generation War)과 대반란전(counter insurgency) 교리를 정립하는 식으로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미국의 해병대가 좋은 본보기다. 우리 해병대는 국가 전략기동부대로서 병력은 적지만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신속하게 병력과 장비를 투사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최강의 조직으로 평가 받고 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반도국가의 특성상 해병대는 서해-남해-동해를 잇는 U자형 전략방어 부대로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돼 실제로 그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해병대가 `국방 119`, `작지만 강한 군대`로 일컬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하지만 해병대의 발전 방향을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제압능력의 제고에만 국한시킬 게 아니다. 시야를 넓혀 점증하고 있는 동북아 역내 중국, 일본 등의 군사력 증강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하게 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로 병력이 최소 3만3천명 정도로 편제될 필요가 있다.또 이에 걸맞게 1개 연대급에 불과한 해병의 상륙함 전력도 최소 현재 보다 3배 이상 증강돼야 한다. 이 문제는 육·해·공군 간의 병력 배분의 합리적이고 대국적인 재조정문제와 맞물려 있다. 2020년대 초 완성을 목표로 창설 중에 있는 해병항공단을 앞당겨 조기 작전 투입이 가능토록 할 것도 고려할만하다. 이는 기존 지상전 위주의 전쟁에서 해상전과 공중전의 중요성이 더해지는 현대전 추세에 부합하기 위한 자연스런 요구다. 하지만 이는 해병대 예산이 전체 국방비 예산 중 겨우 1%에 불과한 현실에서는 요원하기만 하다. 오늘날 해병대가 전국민의 사랑을 받으면서 최강의 강군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해병대의 터전인 포항시민의 애정어린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보적인 줄탁동기 같은 공동운명체의 관계에 있는 해병대가 무너지면 포항도 무너질 뿐만 아니라 국가 전역이 무너질 수도 있다. 반대로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해병대가 웅지를 틀 수 있는 입지조건으로 비행장, 철도, 항만을 다 갖추고 있는 포항만한 곳도 없다. 따라서 대지가 어머니라면 인간은 대지의 아들이듯이 어미 닭이 병아리를 보듬고 있는 형국의 운명공동체인 포항과 해병대의 미래는 지속적인 상호 신뢰와 사랑의 농도에 달려 있다. 포항시민과 해병대인이여, 서로 믿고 뜨겁게 사랑할지어다!

2016-11-21

조국 위해 몸바친 영웅 `5인의 해병`

인터넷 검색창에 `5인의 해병`이라고 치면 가장 먼저 1961년에 개봉한 이 영화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전쟁영화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해 영화제목을 딴 날치기단까지 등장할 정도였다.영화는 군인 아버지를 둔 초임장교가 아버지가 대대장으로 있는 부대에 소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소대장은 개성이 강한 소대원들과 5인의 해병을 이뤄 북한군의 탄약고를 폭파시키는 위험한 임무를 자원한다. 5명의 해병대원은 적진에 진입해 임무를 완수하지만 소대원 1명을 제외한 4명은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숨진 소대장의 시신을 안고 귀환한 소대원은 소대장의 아버지인 대대장에게 소대장이 탈취한 기밀문서와 유품을 전해준다(중략)….1965년 해병1사단 병사 5명적진 침투훈련 임무 중 순직해병대 12m높이 충혼탑 건립과송라면 방석리에 추념비도 세워방문객 위한 환경정비 신경써야□ 영원히 기억해야 할 영웅들임무 수행과정과 대원들의 관계 등이 영화와는 내용에 있어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영화 개봉 4년 후인 1965년 포항에서도 조국을 위해 한 목숨 바친 5인의 해병이 등장했다.해병대1사단 1연대상륙단 수색중대 소속 고 강대현 중위, 오중광 상병, 오경환 일병, 유문선 일병, 김규산 일병 등 5인의 해병은 1965년 12월 13일 상륙단이 진행한 훈련인 `해룡작전`에서 상륙훈련에 앞서 적 해안 수색정찰 임무를 맡게 됐다.수송함에서 7인승 고무보트를 이용해 정찰조로 투입된 이들은 이날 오전 7시 15분께 가상 적 해안에 은밀하게 침투하던 중 포항시 북구 송라면 독석리 앞 해상에서 갑자기 불어온 돌풍과 험한 파도에 휩쓸려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해병대1사단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사단 내에 충혼탑을 세우고 순직장소 인근에 추념비를 건립해 지금도 고귀한 희생을 기리며 우뚝 서있다. 해병대는 1966년 2월 2일 5인의 해병 추모사업을 발기했고, 해병 전 장교 및 부사관들이 모은 성금 159만5천714원으로 같은해 10월 15일 12m높이의 충혼탑을 만들었는데 1사단 내 조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박영근 전 기자의 특종보도하지만 당시 사고가 보도되자 군의 무리한 훈련을 질타하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정부에는 큰 악재로 부상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구일보의 1면 특종기사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됐다.당시 포항 주재기자였던 박영근(82) 한동대 특임교수는 “`돌아오지 않은 5인의 해병`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기억나는데 `해병에는 훈련이 없다. 해병의 훈련은 실전이다. 해병이 기상이 나쁘다고 작전을 안 하느냐`의 골자로 보도를 하자 상황이 급변했다”면서 “우리 청년들의 해병 입대 경쟁이 오늘날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은 해병대의 투철한 전투정신이 미국 해병도 인정하는 최고의 한국 해병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진입로 등 관리 개선 시급북구 송라면 방석리 해안가에 위치한 추념비는 5인의 해병이 순직한 이듬해인 1966년 3월 포항지역 해병전우들의 모금을 통해 세워졌다.직사각형 모양의 비석 전면에는 강대현 중위를 비롯, 순직 후 1계급씩 특진한 5인의 해병 이름이 새겨져 있다.건립된지 올해로 50년을 넘긴 비석이지만 비교적 관리가 잘돼 훼손된 흔적이 없다.그러나 비석 주변이 밭과 주택으로 둘러싸여 처음 방문한 이들이 추념비가 세워져 있는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특히 차도에서 단번에 가로지를 수 있는 진입로가 있음에도 추념비 옆 주택소유주가 사유지라는 이유로 이용을 막고 있어 방문객들은 100여m를 빙 돌아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방문객 김모(41·북구 양덕동)씨는 “해병대 출신으로서 이곳에 추념비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방문하게 됐는데 진입로를 찾는데 적잖게 애를 먹었다”며 “50년이 지난 오래된 비석이지만 찾는 이가 아직도 있는만큼 국가와 포항시 차원에서 관리에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전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11-01

해병대의 역사와 함께한 옛 포항역

해병대가 포항에 자리잡은 1950년 이후 해병대를 거쳐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스쳐갔을 법한 장소.장병들 입영·휴가 등 추억의 관문베트남 참전 애환 서린 공간으로도KTX개통에 따라 이전된 역사도로개통으로 철거 `진한 아쉬움`“기념비로나마 후세에 기억 남기길”해병인과 포항시민의 애환과 추억이 고스란히 남겨진 그곳.KTX개통으로 흥해읍 이인리 현 부지로 역사(驛舍)가 이전되면서 2015년 4월 1일을 마지막으로 역할을 다하고 폐역된 `옛 포항역`을 일컫는 수식어다.지금은 사통팔달(四通八達)에 가까운 뛰어난 교통인프라를 자랑하는 포항이지만, 불과 12년전까지만해도 고속도로 하나 없는 낙후된 상황으로 인해 철도교통은 포항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 역할을 했다.해병대 장병들도 입영을 하거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향할 때면 옛 포항역을 관문으로 삼았다.1960~70년대 해병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퇴역군인들은 옛 포항역과 관련된 특별한 추억이 한가지 더 있다.옛 포항역은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최초로 국군을 해외에 파병한 베트남 전쟁 당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해병 청룡부대의 출발지였다.1965년 6월 1일 응우옌까오끼 월남 수상의 전투 전력 파견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7월 20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1개 사단과 지원 부대를 베트남으로 파병키로 결정했다.당초 1개 연대로 파병할 예정이었으나 해병대 사령부의 계획 변경으로 해병대 제1상륙사단의 제2해병연대를 기반으로 같은 제1상륙사단 11해병연대에서 일부 부대를 차출해 여단으로 증편했다.이들은 포항에 위치한 해병대 훈련소에서 6월 4일부터 약 3개월간의 파병에 앞서 현지 적응을 위한 훈련을 마친 후 포항역에 집결해 임시특별열차를 타고 병력수송선이 기다리고 있는 부산항 3부두에 도달해 가장 먼저 파병됐다.이렇게 선봉대가 출발한 이후 해병 청룡부대는 월남에서 철군한 1972년 2월까지 약 6년 4개월간 수만명이 월남전에 투입돼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2차례 월남파병을 다녀온 한 퇴역군인은 “당시 파병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아 베트남에 2~3차례 다녀온 사람도 꽤 많았다”며 “한 장교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파월돼 약 6년간 근무한 뒤 한국에 돌아와 소령으로 쾌속 진급하기도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당시 월남파병에 앞서 출병식이 열리는 날이면 옛 포항역 앞 광장은 어린 나이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먼 이국땅으로 향하는 장병들의 눈물로 가득찼다.월남참전용사 김모(77)씨는 “군용트럭을 타고 포항역 앞 광장에 다다랐을 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가족의 모습을 보기 위해 찾은 수천명의 인파로 발디딜 틈도 없었다”며 “혹시라도 가족이 와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다보니 우연히 먼발치에 있는 여동생과 눈이 마주쳤는데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교복을 입은 여학생들도 출병식이 열리는 날이면 포항역 앞 광장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장병들의 임무완수와 무사귀환을 기원했다.또 다른 참전용사 최모(74)씨는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장병들을 응원하기 위해 역 앞에 나와준 여학생들 덕분에 많은 힘이 됐다”며 “장병들 중에서는 베트남 현지에서 여학생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싹틔워 결혼에 골인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이렇듯 수많은 추억이 남아있는 옛 포항역이 도로개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 해병인들은 한목소리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한 해병대 출신 퇴역군인은 “해병대와 포항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포항역이 철거됐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아쉬운 마음이 매우 컸다”며 “이미 철거된 역사(驛舍)는 어쩔 수 없지만 역이 있던 자리에 기념비를 마련해 옛 포항역에서 열린 가장 큰 행사인 월남파병 출병식을 후세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면 한다”고 희망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10-24

`함께 즐기는` 입영문화… 모두에게 감동의 장

지난 10일 해병대 교육훈련단 대연병장.대한민국에서 가장 강인한 남성으로 새롭게 태어나고자 희망하는 20대 청년 1천100여명이 이곳을 찾았다. 10월의 푸르른 하늘 아래 가족, 친구, 연인들과 함께 입영문화제에 참석한 해병대 1215기 신병들의 눈빛에는 결연한 의지와 기대가 동시에 보였다.軍 매년4회 입영문화제 개최1215기 신병 1천100명 입소전차 전시·장비 체험행사 등볼거리 풍성…방문객 줄이어지역홍보 등 시민축제로 거듭또 이들은 2년 뒤 늠름한 아들이, 멋진 남자가 되길 바라고 있었다.1215기로 입대한 김호준(19)씨는 “가족이 모두 해병대를 전역했다”며 “안다치게, 건강하게, 사람되서 돌아오겠다”며 입대 소감을 밝혔다.이날 입소식은 평소 김성은관과 강당 등에서 진행된 것과 달리 대연병장에서 진행됐다. 대연병장 한쪽으로는 6개의 홍보 부스가 방문객들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연병장 주변으로는 K-1전차, K-55자주포, 155㎜견인포, 상륙장갑차 등 평소 볼 수 없었던 전차들이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이날은 해병대 교육훈련단이 매년 4차례에 걸쳐 개최하는 입영문화제 행사가 열리는 날이다.해병대 교육훈련단은 입대 장병들만의 입소식 행사를 벗어나 부대를 방문하는 모든 시민들의 축제를 만들어보고자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본 행사가 시작되기 이전, 오전 11시 30분부터 1시간 반가량 진행되는 입영문화제는 이미 많은 시민들로부터 소문이 나 있다. 포항시와 해병대 교육훈련단, 병무청과 해병대전우회 등이 각각 운영하는 홍보 부스에는 이를 입증하듯 시민들의 방문으로 북적였다. 포항시는 포항시 관광해설사 2명이 포항시 관광 홍보관을 운영하면서 포항시의 시정을 홍보하고 포항시 관광을 안내하고 있다. 또 교육훈련단을 방문한 군장병들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포항 시티투어(City tour)를 연계해 운영한다. 포항시는 매달 해병대에 입대하는 입영장병과 장병의 가족, 친구, 연인 등 6천여명 이상의 부대 방문객들에게 지자체 홍보효과를 거두고 있다.해병대에서는 해병대 홍보 및 부사관, 병 지원 관련 상담과 함께 전투복, 전투화 등 신형 장비 체험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군 입대 장병과 장병 아버지들에게 인기가 높은데, 군 장비에 생소한 입대 장병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고, 장병 아버지들은 자신의 군생활을 다시금 추억해 볼 수 있어 많이 찾고 있다.입대 장병들의 친구와 연인에게는 병무청이 운영하는 추억의 포토존이 가장 인기가 많다.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데다 현장에서 바로 현상해 제공하기 때문에 입대 전 마지막 추억을 남기려는 젊은 층들이 주로 이곳을 찾는다. 현재의 내가 7주 뒤의 나에게 쓰는 타임캡슐도 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은 7주간의 고된 훈련을 마친 뒤 받는 자신의 편지는 입대 당시의 다짐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 위해 타임캡슐을 마련했다.이외에도 △공정한 병역이행을 다짐하는 스크레치-보드 편지쓰기 △해병대 가족을 찾는 해병 선·후배 부자를 찾아라 등 현장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해병대 교육훈련단 관계자는 “해병대 입영문화제는 단순한 입소행사가 아닌 가족, 친구, 연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입영축제가 될 수 있도록 행사를 구성했다”며 “앞으로도 해병대와 포항시 등이 지니고 있는 역량을 집중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행사를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이바름기자bareum90@kbmaeil.com

2016-10-17

“해병인만의 공간에서 지역민 모두의 공간으로”

훈련과 근무에 지친 장병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조성된 포항 청룡회관의 역사는 2000년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73년 포항시 북구 죽도동 45-1번지 2천211.5㎡부지에 건물 3동, 연면적 2천89.2㎡규모로 문을 연 청룡회관은 1970~80년대 포항 해병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방문한 기억이 있는 해병인의 성지다.장병들 휴식·복지시설 갖춰숙소·면회장소 등으로 각광죽도동서 임곡리로 신축이전24년만에 현 청룡회관 탄생최신시설에 일반인도 이용가능포항지역의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청룡회관은 휴가갔던 장병들이 귀대할 때면 집결장소로, 병영생활에 시달린 장병들의 외박때는 숙소로, 고향에서 찾아온 부모나 친구, 형제들의 면회장소로 이용되며 각광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포항시내에는 장병들이 외박 또는 휴가를 나오면 휴식과 놀이를 즐길만한 장소가 많지 않았고 식당, 다방, 객실, 목욕탕, 이발소, 당구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청룡회관은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특히 1980년대 경북 동해안에서 지속적으로 실시된 한미연합훈련인 팀스피리트훈련이 실시되면 한·미연합사령관이나 공보담당 장교가 국·내외 기자들을 초청해 훈련상황을 브리핑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이렇듯 100만 해병대 예비역들에게 청룡회관은 아련한 군대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전역한지 수십년이 지난 전우들까지 만남의 장소로 활용할 만큼 숨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그런데 죽도동 청룡회관은 도심지 한복판에 있어 부대와 거리가 멀고 건물마저 노후화돼 신축이 불가피하다는 해병대 사령부의 결정으로 24년간 해병인들과 추억을 나눈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됐다.해병대 사령부는 1997년 청룡회관의 이전을 결정하고 1998년부터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225번지 현 위치에 신축을 시작해 2000년 12월 새 청룡회관의 문을 열었다.청룡회관은 1만9천834.7㎡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6천611.5㎡인 종합복지시설로 마련됐다. 지하 1층에는 볼링장, 실내골프연습장, 커피숍, 슈퍼마켓, 목욕탕, 노래방, 이발소, 미용실, 지상 1층에는 예식장, 연회장, 식당, 지상 2~4층은 34개의 한·양식 객실을 갖추고 있다.당시 최신식 시설로 만들어진 청룡회관은 호텔같이 정갈하고 쾌적한 분위기로 일반적인 군 복지시설에 대한 편견을 탈피하며 장병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이용이 가능한 시설로 변모했다.해병대에 따르면 청룡회관은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멋진 경관과 쾌적한 환경으로 평일 150여명, 주말 500여명이 넘는 이용객들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지난 2010년에는 일본인 단체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해 경주, 포항, 안동, 수원, 서울 등 4박5일간 전국을 일주를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당시 청룡회관을 방문한 일본인들은 현직 군인들이 싱싱하고 풍성한 해산물요리를 선보이는 다소 생소한 광경에 “스데키나! 스데키나!(멋지다)”라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해병대 관계자는 “시설 이용을 희망하는 주민들께서는 언제든지 문의해 주시기 바란다”고 전했다. 이렇듯 성공적인 이전으로 더욱 빛나게 된 새 청룡회관과는 달리 옛 청룡회관은 한동안 어두운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해병대는 청룡회관이 빠져나간 이후 수차례에 걸쳐 매각을 위한 공개입찰을 실시했으나 경기불황이 지속되면서 오랜기간 동안 응찰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포항시가 매입의사를 밝혔고 2006년 1월 38억6천505만원에 국공유지 매입협상을 마무리하면서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은 포항시로 바뀌었다. 포항시는 상습침수지역인 이곳에 183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270마력 펌프 3대, 180마력 1대, 집수정 1대(3천500㎥)가 설치된 죽도빗물펌프장을 건립해 가동하고 있다./박동혁기자

2016-10-10

무적 해병들의 아련한 추억 `西門`

`무적해병`이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100만 예비역 해병들의 아련한 추억이 살아 숨쉬는 공간.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리 일원에 위치한 해병대 제1사단 서문에 붙는 수식어들이다.입소 날엔 가족 등 외지인 `북적`100만 예비역들의 어울림 공간2007년 교육훈련단 정문 개장 등문덕 활성화로 상권 쇠퇴기 맞아빈 점포 늘어 한산한 거리로 변해해병대 서문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에도 해병대 제1사단의 존재로 동, 서, 남, 북 4개문이 오천읍과 동해면, 청림동에 걸쳐 존재했다.그러나 신병훈련소와 같은 외부인 왕래가 잦은 부대없이 현역병, 부사관, 장교들만이 드나드는 전투사단만 있다보니 서문 주변의 상권형성 속도가 더뎠고, 이는 서문 뿐만 아니라 나머지 3개 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970년대 후반.해병대는 1949년 창설 이후 경남 진주와 제주도에서 해군과 뒤섞여 기초군사훈련 및 각종 특기훈련을 실시했는데 고유의 양성교육을 계승해 최강 해병대원을 자체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1977년 1월 1일 해병대 교육훈련단을 포항에 창설한 것이다.교육훈련단은 2007년 정문개방 이전까지 출입문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터라 30년간 한 달에 1~2기씩 선발하는 신병들의 입소식이 열리는 날이면 입영장정과 가족 수천여명이 서문을 드나들었다.이렇듯 외부인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서문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됐고 이는 포항공항 인근에 위치한 동문이 폐쇄되면서 더욱 가속화 됐다. 여기에 주말과 휴일이면 외출, 외박을 나온 현역병들과 직업군인들이 무리지어 쏟아져 나오면서 인근 상가들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가까운 주점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뤘다.한 부사관 출신 퇴역군인은 “서문이 호황기를 이뤘던 1980~90년대에는 평일 저녁에도 술집에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며 “당시에는 직업군인들의 월급이 적었지만 나중에 힘들어지더라도 우선 먹고 보자는 분위기라 서문 앞 술문화가 더욱 발달됐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서문 일대에서 술을 마시는 군인 숫자가 늘어나다보니 폭력사건 등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는 일이 간혹 발생했고, 이는 부대 주변에 거주하는 민간인들로 하여금 부대 이미지를 떨어뜨리게 했다.서문 앞에서 30년간 장사를 하고 있다는 한 상인은 “서문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모든 것이 군인 탓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면서 부대에서는 부대원들이 민간인들과 엮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미봉책으로 한동안 휴가시 부대원을 버스에 태워 터미널 또는 역으로 내려주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다”며 “서문 앞 상인들이 이를 알고 크게 반발하면서 최근에는 예전처럼 각자 교통수단을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고 전했다.이처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해병대 서문 앞 상권은 2000년대에 들어 쇠퇴기를 맞았다. 2007년 7월 교육훈련단이 정문을 개방하면서 더이상 서문을 통해 신병이 입소하는 일이 사라졌고, 비슷한 시기에 포항의 신도시인 문덕단지 활성화가 시작되면서 상권이 크게 요동을 치게 된 것이다.문덕단지는 인근 공단 근로자들의 주거지로 원룸이 각광받으면서 1만여세대가 넘는 원룸촌이 형성됐고 음식점, 주점, 숙박업소 등 번화가가 형성되면서 해병대원들까지 자주찾는 장소로 발전했다.상황이 이렇다보니 해병대 서문 앞에는 문을 닫는 점포가 크게 늘었고 현재까지도 새로운 임차인을 찾지 못한 빈 점포들이 수두룩한 상황이다.3년전까지 서문 앞에서 고깃집을 운영했다는 한 상인은 “이곳에서 10년 넘도록 장사를 했는데 손님이 크게 줄면서 장사가 힘들어져 3년 전에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며 “마크사, 배달음식점 등 일부 업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가들이 매출감소로 허덕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9-26

해병대 본고장 포항서 母軍 사랑·끈끈한 전우애로 뭉친다

올해로 창설된지 67년이 지난 해병대는 긴 역사만큼 다양한 장소에서 수많은 역사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1949년 4월 해병대가 출범한 경남 창원시 진해구 덕산비행장, 6·25전쟁 당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승리를 이끌어 내며 `무적해병`의 칭호를 얻게 된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 최근 개봉한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2대 상륙작전으로 평가받는 통영상륙작전이 펼쳐진 경남 통영시 등에서는 해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창설 68주년인 내년 4월15일 맞춰 해병한마당 문화축제 준비 `착착`2014년 세계해병대축제 경험 살려국내외 150만 예비역 결속 이끌어강석호 의원 등 전·현직 국회의원현빈 등 연예인출신 예비역도 초청예비역 페스티벌·부대방문·포럼1박2일 병영체험 등 다채로운 행사지역만의 고유행사 자리매김 기대그렇다면 해병대의 메카이자 본고장으로 불리는 포항에서는 어떠한 특색있는 축제가 열리고 있을까.아쉽게도 해병대 제1사단, 교육훈련단 등 부대 주도로 열리는 부대 내 행사 이외에는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행사는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이다.10여년 전인 지난 2004년 7월 국내는 물론 전세계 최초로 시도된 세계 해병전우인 축제가 포항에서 열린 적이 있다. 당시 포항시가지 일원과 해병대 1사단, 영일대(당시 북부), 송도, 도구해수욕장 등지에서 열린 축제는 해병 씨름왕선발대회, 해병 의장대 공연, 조개잡이 체험 행사, 해병전우인 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로 구성됐다. 미국, 호주 등 30여개국에서 30만명에 달하는 해병대 전역자 및 가족이 참여하는 등 높은 인기를 누리면서 정기적인 축제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해병인을 넘어 포항시민들에게까지 관심받는 축제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됐다. 실제로 2005년과 2006년, 포항해병인축제라는 명칭으로 변경돼 2, 3회 행사가 연이어 개최됐으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이 행사는 더이상 열리지 못했다. 이후 해병대를 상징하는 도시를 상징하는 행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지닌 해병인들이 뜻을 모아 `포항 해병대 예비역 축제`라는 새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축제준비의 주축 중 하나인 해병대 특우회는 해병대 창설 68주년인 2017년 4월 15일 개최를 목표로 지난해부터 차분히 준비과정을 밟고 있다.이는 포항시의회에서도 한차례 언급되면서 현실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지난 3월 8일 의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포항시의회 제227회 임시회에서 김일만 의원이 이강덕 포항시장을 상대로 날카로운 시정질문을 날린 것이다.김 의원은 당시 매년 해병대 수료 장병 1만5천명과 전역장병 6천여명을 대상으로 포항을 알리기 위한 어떤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지에 대해 질문했고, 이에 이 시장은 `해병한마당 문화축제`(가칭)를 추진할 뜻을 밝혔다. 이후 해병대 특우회와 포항시는 포항제철소 용광로에서 쏟아지는 쇳물보다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조국근대화에 힘을 보탠 해병인의 강인한 정신을 소개하기 위한 행사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포항시는 국내·외 150만명(포항 8만명, 국내 100만명)의 해병대 출신 예비역들이 모군(母軍)에 대한 사랑과 단단한 결속력으로 한자리에 모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이 행사에는 해병대 출신 연예인과 정치인들도 초청해 끈끈한 전우애를 느끼는 자리로 마련할 계획이다. `호랑나비`로 유명한 가수 김흥국(401기)과 그가 입대를 권유한 후배가수 이정(1080기), 해병대에서 가장 힘들다는 수색대에서 근무하다 훈련 이수를 위해 전역을 1개월 연기하며 찬사를 받은 가수 오종혁(1140기), 한류스타 현빈(1137기), 개그맨 임혁필(708기), 배우 최필립(903기), 정석원(995기) 등 해병대 출신 연예인은 알려지지 않은 이까지 포함하면 수십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정치계에서도 강석호(영양·영덕·봉화·울진), 정병국(경기 여주·양평), 이우현(경기 용인갑) 국회의원 등 현역의원을 포함해 전현직 의원 20여명이 해병대에 몸담은 바 있다.주요 프로그램으로는 개막식, 입장퍼레이드, 축하공연, 고공낙하 등으로 구성된 `해병대 예비역 페스티벌`과 해병대 예비역의 사회역할과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해병인의 정신 발전 포럼`, 축제 기간 중 가족, 연인과 함께 근무했던 모군부대를 방문하는 방문하는 `부대방문행사` 등으로 구성될 예정이다.특히 MBC 진짜사나이에서 극한의 산악행군이 펼쳐진 장소로 유명해진 `포항 운제산 천자봉 행군`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1박2일 해병대 병영체험행사`를 준비해 예비역들이 옛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할 방침이다.축제 준비에 참여하고 있는 해병대 특우회 관계자는 “경남 진해와 통영, 강원 양구, 최근에는 제주시에 이르기까지 해병정신을 알리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정기적인 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포항에서는 유독 그러한 행사가 존재하지 않아 많은 해병출신 예비역들이 안타까워했다”며 “철저한 준비과정을 통해 이번 행사를 단지 해병인만을 위한 축제가 아닌 경기활성화, 일자리창출 등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포항만의 고유축제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9-19

“100만 해병대 예비역 자부심으로 화합·단결에 평생 바칠터”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지난 8일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노()해병이 건넨 명함에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가 적혀있었다.이는 미 해병대의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에서 한국전쟁시 유래한 것으로 해병대의 일원으로서 자부심과 긍지, 명예심을 잊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1987년부터 해병대 정신의 표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현재는 해병대에 몸을 담은 현역, 예비역은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도 `해병대`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1970년 서해구락부 영포지구로 태동한`해병대 전우회` 창설 멤버로 맹활약“美·호주 등 30여개국 30만명이 참가한2004년 세계해병전우인축제가 전성기내년 4월 개최 `포항 해병대 예비역축제`정기적 축제로 자리잡도록 힘보탤 것”그렇다면 자신의 명함에 이 의미심장한 문구를 새겨넣은 이는 어떤 사람일까.이제는 전국에 10여명만이 생존해 있는 해병대 전우회 창설멤버로서 이들의 모임인 해병대 특우회를 이끌고 있는 김상영(75) 해병대 특우회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해병대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고 싶다는 그는 지난 1962년 해병 137기로 입대해 일반병으로 3년간 근무하다 사회에 나온 뒤부터 가슴 속에 아로새긴 해병대라는 이름 석자를 50여년 동안 단 한 번도 지운 적이 없다.제대한 이후에도 고향인 포항에 남아 5년간 사회생활에 매진하던 김 회장은 1970년 2월 해군·해병대 예비역 장병들이 모여 만든 서해구락부 영포지구(영일군, 포항시)의 창설멤버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창설초기 전우회 사무실로 활용할만한 건물이 마땅치 않았지만 모군(母軍)부대의 협조로 헌병대(당시 보안대) 사무실을 대여받아 사용할 수 있게 됐다.이 곳을 무대로 10여년간 포항시민들과 지역사회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 서해구락부 영포지구는 1988년 6월 3일 해병대 전우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당시 전우회 발대식 행사가 개최된 옛 포항역 광장에는 해병대 전역자 1천500여명과 해병대 사령관, 해병대 제1사단장 등 현역 지휘관 및 참모들도 함께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이때부터 10여년 동안이 전우회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율기동 봉사대를 발대시켜 관공서 직원들과 함께 방범활동도 펼치고, 포항시에서 개최한 각종 행사에서도 많은 전우회 회원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했죠.”1990년 9월에는 미국 하와이에 방문해 하와이 해병대 전우회와 특별한 만남을 갖기도 했다.하와이에 도착한 포항 전우회 회원 40여명에게 하와이 전우회는 융숭한 대접을 하며 피보다 진한 전우애를 과시했다.김 회장은 “당시 2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했던 하와이 전우회는 전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결집력을 자랑했다”며 “일례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 방문할 당시 하와이 경찰이 아닌 전우회 측에 경호를 맡겼을 정도였다”고 소개했다. 2004년 7월에는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인 세계 해병전우인 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포항에서 열린 이 행사는 미국, 호주 등 30여개국에서 30만명에 달하는 해병대 전역자 및 가족이 참여한 초대형행사였다.축제기간 동안 포항시가지 일원과 해병대 1사단, 영일대(당시 북부), 송도, 도구해수욕장 등지에서 다양한 체험행사와 풍성한 볼거리가 펼쳐지면서 해병대정신이 불꽃처럼 타올랐다.“세계 각국의 해병들이 한국 해병대의 메카인 포항에 모여 진행한 세계 해병전우인 축제는 해병대의 끈끈함과 응집력을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축제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많이 아쉽습니다.”세계적인 행사를 포항에서 열며 전성기를 누린 해병대 전우회는 최근까지 경기침체 등의 영향으로 좀처럼 대형행사를 개최하지 못하고 있다. 김 회장은 이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요즘 경기가 워낙 좋지 않다보니 생업에 쫓겨 전우회 활동을 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는 해병 후배들이 많아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그는 이렇듯 침체된 분위기를 극복하고 해병대 전우회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해병대 특우회 차원에서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해병대 창설 68주년인 2017년 4월 15일 개최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포항 해병대 예비역 축제는 전국에 있는 100만 해병대 예비역을 위한 화합의 장으로 마련될 예정이다.▲ 김상영 해병대 특우회 회장이 해병대 전우모임의 역사를 소개하며 활짝 웃고 있다.김 회장은 “이번 행사는 단발성 행사가 아닌 해마다 개최되는 정기적인 축제로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며 “축제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이강덕 포항시장이 공언한 해병 테마공원, 마린타운 조성 등 추가적인 사업진행도 착실히 준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이라고 전했다.이제는 해병대 전우회에서 물러나 해병대 전우회 창설멤버의 모임인 특우회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는 김 회장은 후배 해병들에게 전하고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김상영 회장은 “해병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선배는 후배를 사랑하고 후배는 선배를 존경하며 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전국의 모범 전우회가 됐으면 한다”며 “전국의 100만 해병대 예비역과 포항의 8만 예비역들이 해병대라는 자부심을 갖고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전우회가 다시 한 번 활성화되는 계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9-13

뜨거운 청춘으로 바다를 제압했다… “장갑차는 내 운명”

해병대의 주임무는 상륙작전이다. 국군조직법 제3조2항에서 확인 할 수 있듯 상륙작전의 핵심은 전쟁발발 시 해상으로 이동해 적 해안에 기습 상륙하는 것이다.해병대는 이 특수임무를 위해 타 군에는 없는 상륙돌격장갑차라는 장비를 사용한다.상륙돌격장갑차는 바다에서 해병대원을 태우고 적이 점령하고 있는 해안가로 상륙하는 수륙양용장갑차다.이렇듯 해병대를 넘어 우리군 전체의 주요전력인 상륙돌격장갑차와 반평생을 함께한 `영원한 해병` 김영환(62) 포항시 해병대 전우회 수석부회장을 만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포항·경주 물난리에 장갑차로 수재민 수백명 구조도현역·예비역 지역봉사 열심… 시민과 동반자 인식 가져야“남자는 해병대” 강원도에서 경남 진해까지 가서 부사관 지원1974년 입대, 34년 5개월간 상륙돌격장갑차 관련 임무 수행- 간단한 자기소개를.△1974년 12월 9일 해병대부사관 114기로 입대해 2009년 5월 31일 준위로 퇴역할 때까지 34년 5개월간 오직 상륙돌격장갑차와 관련된 임무만 수행했다.`매사에 긍정적인 사고`, `군사지식 함양을 위한 군사교범 속독 생활화`, `가장 예의바른 해병으로 성장`이라는 3대 인생철학을 지니고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군복무 기간 동안 국방부장관 표창을 비롯한 표창을 20차례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퇴역당시 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되는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 해병대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21살 어린 나이에 강원도 원주의 집으로 갑자기 입대영장이 날아들었다. 육군에 일반병으로 입대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대다수 젊은이들이 선택하는 육군보다는 무언가 특별한 길을 걷고 싶었다. 주변사람들에게 `남자라면 해병대지`라는 이야기를 평소 많이 들었고, 혈기왕성하던 시절이라 주저없이 해병대 지원서를 들고 경남 진해로 향했다.병사든 부사관이든 개의치 않았는데 당시 지원 가능한 기수가 부사관밖에 없었다. 입대 후에 깨닫게 됐는데 우리 기수가 장기부사관을 뽑는 기수였고, 이 선택이 30년이 넘는 군생활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상륙돌격장갑차와 관련된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고 하던데.△중사시절이던 1983년 5월 포항의 한 해안가에서 한미해병대 연합훈련인 `팀 스피리트(Team Spirit)`상륙작전이 벌어졌던 때였다. 1차 리허설을 마치고 상륙돌격장갑차를 해군 함정에 싣고 결박을 마치기 직전 갑자기 배가 흔들리면서 갑판에 바닷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돌풍이 불어왔고, 거센 파도는 함정을 집어삼킬 듯했다.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해군 함장은 퇴함명령을 내렸고 해군 승조원, 미해병대 등 수백명은 즉시 배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해병대는 퇴함명령에 따를 수 없었다. 중대장으로부터 “우리는 장갑차와 함께 죽는다”는 명령이 떨어졌고 해병대원들은 10여대의 장갑차에 남아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소대 선임부사관이었던 저는 흔들림이 심했던 배 안에서 장갑차끼리 부딪혀 파손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홀로 좁은 배안 이곳 저곳을 움직였다. 푹신한 수면용 매트리스를 장갑차 사이에 끼워넣는 작업을 한 것이다. 무릎에 피가 흥건히 젖을 정도였지만 워낙 상황이 긴박해 깨닫지 못했다. 이렇게 몇시간에 걸친 작업을 마친 후 배 밖에서 던져준 식량을 대원들과 함께 먹으며 일주일을 버텼다.이후 도착한 구조대에 의해 함정에 남아있던 대원 전원이 무사히 구조됐고, 장갑차와 대원 모두 크게 다친 곳 없는 모습으로 부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도 상륙돌격장갑차의 활약이 대단했다고.△1980년 9월 포항과 경주에 홍수가 발생해 수천여명의 수재민들이 구조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렸다. 대원들과 함께 상륙돌격장갑차를 타고 7번국도 포항방면 시작점에 있던 효자검문소에서 출발해 경주 건천지역까지 이동하며 구조에 동참했다.당시에는 가옥 거주형태가 대부분 단층주택이었고 불어난 물로 주민들은 지붕 위에 겨우 올라 발만 동동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저와 대원들은 수륙양용이 가능한 상륙돌격장갑차의 특성을 살려 지붕에 남겨진 수재민들을 하나 둘씩 구조했고, 이윽고 500여명의 주민을 무사히 구조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일은 1990년에도 반복됐고, 이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주민 수백명을 추가로 구조했다. - 한국형 상륙돌격장갑차 `KAAV`의 완성과정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고.△순수 국내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국형 상륙돌격장갑차 `KAAV`가 도입되기 전까지 해병대는 미국의 수륙양용장갑차인 `LVT`를 운용했다.1970년대초부터 20여년 동안 활용된 LVT는 1998년 막강한 화력과 최신 보호장갑을 갖춘 KAAV로 전면교체됐다.그런데 KAAV 1, 2차 배치가 완료된 후 8년여가 흐른 2006년 해병대사령관으로부터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게 됐다.기존에 운용 중인 장갑차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을 검토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장갑차 관련 모든 부대의 협조를 구해 정보를 제공받고 이를 관련 근거로 보고서를 작성, 사령관이 마련한 보고회에 참석해 브리핑을 맡았다.이 자리에서 1, 2차 장비에는 열상잠망경이 없어 야간사격이 불가능하고, 일체형포탑조준기가 없어 조준과 사격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점 등 기존 장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다.이날 보고회에 참석한 방위산업체 관계자들은 이같은 단점을 보완해 성능을 개량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렇게 탄생한 3차 KAAV 장비는 오늘날까지 우리군의 주요전력으로 활동하고 있다. - 가족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슬하에 두 아들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힘들게 군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란 아들들이 아버지와 같은 길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둘 모두 직업군인이 됐다. 큰 아들 정관(40)이는 해병대 상사로, 작은 아들 주홍(35)이는 해군 6전단 중사로 착실히 근무하고 있다. 큰 아들은 2014년 국방부와 조선일보가 제정한 제5회 위국헌신상 시상식에서 용기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버지 뒤를 따라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두아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해병대 퇴역군인으로서 포항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포항은 8만 해병대가 살고 있는 행복한 도시이다. 농번기가 되면 모심기, 보리베기, 과일따기 등 농촌일손돕기에 서슴없이 앞장서고 각종 재난재해 발생시 구조대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오천, 장기 일대에서 주둔하고 있는 현역 해병대뿐만 아니라 예비역들이 지역사회를 위해 수행하고 있는 역할도 상당하다. 이들은 포항시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교통자원봉사로 참여해 교통정체를 최소화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고, 지역별 방범순찰활동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영원한 친구` 포항시와 해병대라는 이번 특집시리즈의 대주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 포항시민과 해병대원들은 동반자라는 인식을 갖고 상호 보완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9-06

1965년 입대로 맺은 인연, 퇴역 후 20년간 `제2의 고향으로`

지난 18일 오후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덕리의 한 사무실. 세평 남짓한 작은 컨테이너에 들어서자 남다른 풍모를 지닌 노신사가 기자를 반겼다. 해병대의 본거지인 오천읍을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는 퇴역자 모임인 해병대전우회 포항시 오천분회 서수홍(72) 회장이었다.서 회장은 1965년 1월 해병대에 일반병으로 입대, 같은해 10월 부사관으로 자원해 본격적인 군생활을 시작했다.20살 해병대 입대후 2년뒤 월남 파병베트남 추라이 반도서 탐색조 선봉에서해5도 근무 후 신병훈련소 교관 거쳐상사로 퇴역… 지역봉사 등 앞장서 와“고향 경남 진해에서 아버지가 도장방을 하며 어렵게 저희 가족을 부양하셨습니다. 당시에는 특별히 배운 것도 없어 입에 풀칠이라도 할까 싶어 20살 젊은 나이에 군에 입대하게 됐죠.”첫 2년동안은 군인이 된 것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먹기 힘들었던 시절에 숙식도 해결해주고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봉급도 챙겨주는 부대에 그저 고마웠다. 군생활이 잘맞는 체질이었는지 고된 훈련과 적지 않은 작업량도 어렵지 않게 견뎌냈다. 그렇게 서 회장의 군생활은 무난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1967년, 그의 군생활에 한 획을 그은 명령이 떨어졌다. 월남 파병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1965년 10월 3일 첫 파병을 시작으로 해병대 월남파병부대인 청룡부대는 1년에 1기수씩 월남으로 향해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서 회장은 3기 파병대원으로 선출됐고, 1967년 5월 9일 포항역에 집결한 대원 300여명과 함께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그는 당시 심경에 대해 “왜 안두려웠겠나…. 언제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질 것이 불보듯 뻔한데…”라며 “그렇지만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국가의 지시에 따라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몸을 싣고 갑판 위에 올라서니 부둣가에 나온 수많은 해병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혹시라도 가족들이 왔을까 이쪽 저쪽을 부단히 살펴봤지만 그의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나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는 “사실 3개월 전에 아버지께 파병사실을 알렸는데 후에 파병순서가 뒤로 밀렸다는 사실을 미처 전하지 못했다”며 “파병소식을 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부대 위병소를 찾아와 눈물만 흘리다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산항 환송에 가족들이 오지 않아 차라리 덜 힘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에 잠겼다.해병대 300여명, 육군 3천여명이 탑승한 수송선은 5박 6일의 항해 끝에 베트남 다낭항에 상륙했다. 이곳에서 작은 배로 옮겨탄 서 회장과 해병대원들은 월남전 최대 접전지 중 하나인 추라이반도로 직행했다.`대대 1중대 1소대 1분대장 하사 서수홍`선임분대장 보직을 맡은 서 회장은 머나먼 타국에서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을 가슴에 묻고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베트콩(베트남 공산군)은 주로 땅속이나 정글에 숨어다니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다보니 한국군은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해병대는 항상 탐색조의 선봉에 섰고, 서 회장의 1분대는 그중에서도 가장 앞줄에 있었다.“아군은 평지에 있는데 맞은편 높은 산에서 포격소리가 들리면 잠시 엎드려 있다가 얼마 뒤 산으로 달려가야 했어요. 적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말이죠. 만약 적이 남아있다면 백이면 백 죽는 것이 당연한 무모한 돌격이었기에 누구도 가길 원하지 않았죠. 그렇지만 우리는 해야만 했어요. 우리가 1분대인데 선봉이 상관의 명령을 어기면 전 부대의 기강이 흔들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죠.”그렇게 1년 3개월여의 임무를 마치고 1969년 9월 그리운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부대에 복귀한 뒤 열흘간의 포상휴가를 얻어 고향을 찾은 그는 가족들을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서 회장은 “부산항을 떠날 때 살아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다시 가족들의 얼굴을 보니 절로 눈물이 났다”며 “운좋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고맙게 생각하고 먼저 떠나간 전우들의 얼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복귀 후 첫 근무지는 백령도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섬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백령도, 연평도, 대청도 등 6·25 전쟁 이후 크고 작은 남북간 군사적 충돌을 직접 경험한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이른바 `서해 5도`를 떠돌았다. 하지만 육지청년인 그에게 섬생활은 맞지 않았다. 섬생활을 한지 얼마지나지 않은 1970년 그는 또 한 번의 월남파병을 스스로 지원했고 부대가 이를 수용하면서 포항 해병대1사단에 머무르며 재파병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재파병 신청인원이 넘쳐났고, 파병순서를 기다리던 중 전쟁이 베트콩의 승리로 끝나면서 재파병의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이후 해병대 신병훈련소 교관, LMG기관총 교관, 연대본부 작전하사관 등을 거친 그는 1989년 3월 20여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상사로 퇴역했다. 퇴역 후에도 `제2의 고향` 포항에 남아 해병대전우회 일원으로 여러 봉사활동을 하며 지역사회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그는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군생활을 한 포항에서 퇴역 후에 살아온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며 “앞으로 남은 세월 동안 해병대의 정신이 살아있는 포항 지역사회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8-22

`제2의 고향` 포항으로 기억되길…

□ 전역장병 포항투어버스 운영 해병대 1사단은 포항에서 근무한 장병들이 전역하면 포항을 떠나는 `손님`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고향`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역 직전 장병을 대상으로 포항투어버스를 운영하고 있다.지난 2011년 3월부터 시작된 포항투어 프로그램은 호미곶, 구룡포, 포항제철, 포항항,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 덕동문화마을 등 포항의 산업시설과 지역의 특색있는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코스로 구성돼 있다. 장병들은 해병대 포항역사관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해 코스별로 견학한 뒤 오후 5시에 부대로 북귀한다.포항시에서는 관광버스와 중식, 각종 홍보물을 지원하고 있으며 보다 내실 있는 견학이 될 수 있도록 문화관광해설사도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전역을 한 달 앞둔 장병들은 매월 기수별로 2개조로 나눠 포항투어를 실시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연간 4천여명의 장병들이 지속적으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포항시는 포항투어를 통해 단순히 포항의 주요 관광지를 눈으로 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항의 도시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포항의 주요 시책을 홍보함으로써 해병대 장병들을 잠재적인 포항 홍보대사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해병대 출신 예비역들은 전역 후에도 모군(母軍)에 대한 회귀본능이 있어 자녀들까지 해병대에 입대시키기를 희망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포항에서 군복무를 한 해병대 장병들이 전역 후에도 포항을 잊지 않고 다시 찾고 싶은 추억의 장소로 기억하게 하는 것은 포항시의 미래 관광산업에 대한 중요한 선투자라고도 할 수 있다.부대 측에서도 전역하는 장병들이 전우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추억여행을 통해 모군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남기고, 행복하게 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포항투어버스는 해병대 1사단과 포항시가 함께 상생하기 위한 야심찬 `윈-윈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지역사회와 한·미 해병대의 주요 협력활동한·미 해병대는 한국전쟁 당시 피를 나눈 혈맹(血盟)관계로, 한·미동맹 가운데에서도 가장 돈독한 혈맹의 유대관계를 자랑한다.해병대 제1사단과 미 해병대 3사단은 유사시 한반도를 최전선에서 지켜야하는 핵심 전력 연합훈련을 가장 많이 하는 부대이기도 하다. 대부분 연합훈련은 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포항지역에서 이뤄진다.한·미 해병대는 매년 연합훈련이 있을 때마다 성공적인 훈련을 자축하고, 형제 해병의 돈독한 우애를 바탕으로 지역 내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매년 실시하는 연합훈련의 유종의 미를 거두고 훈련지역인 포항에서 의미있는 행사로 지역사회와 유대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시작된 `연합 봉사활동`은 이제는 한·미 해병대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지난 7월 12일 연합 공지전투훈련을 마친 한·미 해병대 장병 500여명은 포항시 남구 오천읍 일대에서 장마철이 끝나고 길가에 방치된 쓰레기와 폐기물을 수거하는 환경정화활동을 펼쳤다.앞서 지난 3월에는 쌍룡훈련을 마친 한미 해병대 장병들이 오천행복요양원을 찾아 빨래와 청소를 하고 어르신들의 말동무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한미 해병대가 훈련뿐만 아니라 다양한 봉사활동을 함께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더욱 단결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한편, 포항시에 위치한 `캠프 무적`은 한반도에 주둔한 유일한 미 해병부대로, KMEP훈련 등 한국에서 실시하는 각종 연합훈련과 작전에 필요한 시설 및 보급품을 지원하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지난 1980년 처음 설립돼 지역학생들을 위한 영어수업, 농촌일손돕기, 환경정화활동 등 꾸준히 지역민과 화합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8-08

지역사회와 거리 좁히기 적극 나서

호국문예경연·병영캠프 등 개최누구나 해병대 체험기회도 가능軍장병들 해안정비·의료봉사 등대민봉사로 든든한 지원군 역할□ 지역주민의 품으로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세대인 40~50대 남성들이 군생활을 하던 시절인 1980~90년대까지만해도 군대는 지역사회에 다가가기보다는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분위기였던 것이 사실이다.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군대 내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군을 신뢰하지 않고 이면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경향이 강했다.이같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2000년대 들어 군이 바뀌기 시작했다. 지역사회 민간단체, 기업 등을 대상으로 부대를 개방하고 군이 변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주민들이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해병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우선 해병대 1사단은 부대 내에서 나라 사랑 호국문예 경연대회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올해로 37회째를 맞은 이 행사는 시, 수필, 수채·크레파스화 등 3개 부문으로 나눠 포항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참가자들로 하여금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확고한 안보관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부대 내에 배치돼 있는 한국형상륙돌격장갑차(KAAV)와 전차, 자주포, 견인포, IBS 등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지난 1997년 시작돼 해병대를 알리는데 혁혁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해병대 캠프도 지역사회에 다가가려는 해병대의 노력 중 하나다. 해병대에 따르면 해병대 캠프는 1회당 300명 내외를 신청받아 연간 동계 1회, 하계 3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까지 총 113회에 걸쳐 3만4천961명이 수료했다.캠프에 참여하게 되면 해병대 소개를 비롯해 IBS 상륙기습기초 훈련, KAAV 탑승훈련, 해상생존술, 화생방 체험 등 강한 해병대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캠프참가자들은 고된 훈련을 견뎌내며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고 주위에 감사하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해병대는 2013년 충남 태안에서 고등학생 5명의 목숨을 앗아간 해병대 명칭을 사칭한 사설캠프의 사례를 계기로 해병대, 해병대 캠프, 해병대 캐릭터, 고유 앰블럼 등 부대명칭과 마크, 로고의 저작권과 상표권 등록을 마쳐 사설캠프의 난립을 차단하고 있다.또한 전문교관진과 군의관이 포함된 의료진을 구성해 철저한 안전감독과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국내 최고 수준의 병영문화캠프를 주관하고 있다.□ 포항 지역사회의 든든한 우군2013년 포항 용흥동 산불에서 해병대의 활약을 앞서 언급한 바 있듯 해병대는 적극적인 대민지원 활동으로 포항 지역사회의 든든한 우군이 되고 있다.봄, 가을 두 차례 농번기가 오면 남구 구룡포읍, 동해면, 북구 흥해읍, 청하면, 송라면 등 포항지역 16개 읍·면·동에서 연간 2만여명의 장병을 투입해 지역 농민들의 생업을 지원하고 있다.장병들은 모내기와 모판 나르기, 과실열매 솎기, 봉지 씌우기 등 농가에 필요한 다양한 활동을 돕고 있다. 해병대는 저소득 고령농가를 우선순위로 선정해 교육훈련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우선 순위로 대민지원을 진행하고 있다.아울러 대민지원 기간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사전에 전 장병을 대상으로 안전교육을 실시하고, 일일 단위로 개인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있다.또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촌지역 주민을 위해 의료봉사활동도 실시하고 있다. 해병대는 송라면, 동해면, 청하면 등 읍·면지역을 중심으로 주기적으로 이동진료실을 만들어 놓고 군의관, 간호장교, 의무부사관, 의무병 등이 참여해 주민들의 건강상태를 무료로 점검해주고 있다.이밖에 해안가에 위치한 포항지역의 특성을 고려, 구룡포해수욕장, 도구해수욕장 등 해안가를 중심으로 해안환경정화활동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7-25

경제효과 연간 2천억… 지역 활력소 역할 `톡톡`

2011년부터 신병·가족 부대밖 나들이 허용숙박비 등 포함 경제효과 연 3억원 `훌쩍`병사 외출·외박 소비효과도 8억이나 달해지방세도 매년 50억 이상 납부, 市재정 도움장교 등 직업군인·가족 씀씀이도 만만찮아800명 취업유발 효과까지 적잖은 보탬 줘□ 전군 최초 영외면회 긍정적 영향6·25전쟁 발발 직전인 1949년 시로 승격한 포항은 인구 5만여명에 불과한 작은 어촌마을이었다.전쟁통에 인구가 5만명 밑으로 추락했지만 1958~1959년 해병대가 정식으로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1958년 4만9천32명이었던 인구는 2년만인 1960년에 5만9천555명으로 크게 늘었다.해병대의 존재는 도시전체에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장병을 가족으로 둔 면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외박을 나온 장병들도 포항시내를 가득채웠다. 간혹 민간인과의 갈등, 부대원간의 다툼 등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해병대는 1968년 포스코가 포항에 설립되기 이전까지 포항지역 경제활성화에 적지않은 역할을 했다. 이같은 영향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해병대는 2011년 11월 전군 최초로 신병수료식 후 가족과 함께 부대밖 나들이를 하는 영외면회를 허용했다. 영외면회는 `선진 병영문화 안착`이라는 해병대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그동안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병영문화를 자율적 개방적인 문화로 혁신하기 위해 마련됐으며 이는 4년여가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도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해병대에 입대한 신병은 2010년 1만2천6명, 2012년 1만2천686명, 2014년 1만2천820명이다. 이들 전원이 포항에 위치한 교육훈련단에서 6주간의 군사기초훈련과 해병대 특성화훈련을 받고 있다. 혹독한 훈련을 거쳐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변신을 완료한 장병들은 해병대만이 실시하는 특별한 신병수료식 행사인 `빨간명찰 수여식`을 마친 후 가족과의 만남을 갖고 있다. 환동해미래연구원 전명종 연구원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영외면회를 하기 위해 포항을 찾는 가족의 숫자는 신병 1인당 3.5명 정도다. 이들이 숙박비, 교통비 등을 포함해 1인당 7만5천원을 소비한다고 가정할 때 경제적효과는 연간 3억원이 넘는다.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일반병사들의 외출·외박으로 이뤄지는 소비효과도 추정가능하다. 외출·외박을 나온 장병들은 소속부대에서 1~2시간 이내 복귀가능한 지역(위수지역)에 머물러야 하는데 이같은 조건은 주변도시 중 가장 큰 규모인 포항을 벗어날 확률을 낮추고 있다. 따라서 장병들은 외출허가를 받을 경우 1인당 평균 4만5천원, 외박은 9만5천원을 포항에서 소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숫자를 연간 외출·외박허가수에 맞춰 분석해보면 외출 6천여명, 외박 8천여명 등 총 1만4천여명이 창출하는 경제적효과는 연간 8억원이 넘는다. □ 납세의무도 충실히해병대가 포항지역에 미치는 경제적효과는 납세자의 역할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해병대는 주민세, 지방소득세, 자동차세, 담배세 등 지자체가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징수하는 세금인 지방세를 지난 2013년 기준 약 53억원을 납부했다. 이는 해병대가 포항에 주둔하지 않았다면 포항시 재정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자동차세는 군용차량의 경우 면세혜택을 받기 때문에 부대원 개인이 소유한 차량에만 한정해 소유세 11억2천여만원, 주행세 17억여원 등 28억여원을 나타냈다. 담배소비세는 2012년 국방부가 조사한 군인복지실태조사에 따라 해병대 소속 직업군인 중 59.6%, 병사 53.5%가 흡연을 한다고 가정, 10억6천여만원이 산출됐다. 이같은 수치는 지난해 이후 담배세가 2배 가까이 오르면서 동반상승효과를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주민세 1천300만원, 지방소득세 4천800만원, 지방교육세 13억8천만원 등을 포함하면 53억원의 지방세를 납부한 것으로 분석됐다.국가에 납부된 세금 중 지자체의 행정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지방교부세는 보통교부세와 특별교부세 두 가지로 나뉜다. 보통교부세는 용도를 제한하지 않고 지방정부가 자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반 재원이고, 특별교부세는 재해, 공공시설 등 특별한 재정수요가 있을 때 교부되는 특별한 재원이다. 대체로 보통교부세가 군부대의 지역주둔과 관련있으며 해병대 주둔으로 인한 지방교부세는 16억5천여만원으로 확인됐다.이처럼 지방세 53억원, 지방교부세 16억5천만원은 포항시가 2013년 한 해 동안 확보한 지방세 2천870억원과 지방교부세와 2천818억원의 각각 1.8%, 지방교부세의 0.6%에 해당되며 이는 해병대가 납세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 지역총생산액 1% 이상 차지 이밖에 부대건설 발주효과, 직업군인 소비효과, 부대운영효과 등 직접효과와 다양한 산업으로 이어지는 간접효과 등도 포함할 수 있다. 부대시설의 신·증축 공사를 위한 건설업체 발주비용은 지난 2013년 총 6건을 통해 52억3천여만원이 소요됐다. 이 금액은 대형공사 포함 여부에 따라 해마다 변동폭이 매우 큰 편이나 지역 건설경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주둔지역에서 장교, 부사관 등 직업군인과 군인가족들의 소비행위로 창출되는 경제적 효과도 있다.군인복지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업군인의 월평균 가구당 총소득은 290만6천원이며 생활비는 213만7천원으로 총소득의 약 73%를 차지하고 있다. 해병대의 경우 86.5%를 나타내 92.6%를 생활비로 사용하고 있는 해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지출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분석한 2013년 기준 해병대 부대원의 소비효과는 약 348억원에 이른다. 부대운영효과는 행정소모품 구입, 부대원의 사기진작, 부대장 관사 운영비, 부서원 격려 및 간담회, 부대행사, 부대원 여비 등에 이용되는 부대운영비로 연간 6억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이렇게 해병대가 포항지역에서 소비한 금액은 다양한 산업으로의 간접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2012년 한국은행 포항본부가 발표한 포항 산업연관구조분석에 따르면 포항의 생산유발계수는 1.984, 부가가치유발계수는 0.794, 취업유발계수는 20.3명이다. 환동해미래연구원이 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 해병대는 포항에 776억원의 생산유발효과, 310억원의 부가가치유발효과, 795명의 취업유발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경우 해병대의 포항주둔으로 인한 경제적효과는 연간 1천846억원에 이르며 이는 경북도가 발표한 2010년 포항시 지역총생산액인 17조5천467억원의 1.05%를 차지하고 있다. 이같은 규모는 해병대 가족투어가 실시된 2012년 초부터 더욱 늘어나 오늘날 연간 2천억원이 넘는 경제적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7-11

美 해병대 주둔했던 기지, 한국이 물려받아 `혈맹의 맥` 이어

포항, 북한 포함 주변국 억제전략 사용 신속한 업무대응 수행 가능한 곳 평가육군 포함 1개사단이 한 장소 집결 `국내 유일`제1사단·교육훈련단·군수지원단으로 구성포항제철소 등 국가 중요시설 방호도 책임져□ 해병대와 포항의 인연대한민국 해병대의 역사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의 교훈을 통해 정부가 상륙작전을 담당할 부대의 필요성을 검토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의 주도로 1949년 4월 15일 경남 창원군 진해읍에 위치한 덕산비행장에서 신현준 초대사령관 휘하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등 380명의 전력으로 창설한 것이 해병대의 시초이다. 같은해 8월 1일 해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을 추가로 지원받고 해군 14기로 입대한 병사 440명을 해병대 2기로 특별모집해 2개 대대규모로 증설했는데 이들의 모습은 광복절 4주년인 8월 15일 기념식 사열에서 최초로 확인됐다.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 하에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모집된 해병대 3·4기 위주의 병력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후 지속적인 항공지원을 위해 1950년 12월 미 해병대 제1전투 비행단 소속 제12, 제33비행전대가 포항비행장에 자리를 잡았고, 1년여가 지난 1952년 8월 한국 해병대가 포항비행장 방호를 위해 1개 중대를 지원한 것이 포항과 해병대의 사실상 첫 만남이었다. 미 해병 항공부대가 주둔한 포항비행장을 방호하던 경비중대는 1952년 10월 1일 포항경비부대로 개편됐고 한국전쟁이 끝난 1956년 7월 1일부터는 포항기지로 부대규모를 확대해 창설됐다.포항기지는 미해병대 제1전투 비행단의 철수에 따라 포항비행장(K-3)을 인수하고 주둔지 경계 및 교육훈련시설을 유지하면서 예비역 교육대를 증편해 예비역 해병 입영근무 소집훈련 임무를 실시했으며 1958년 4월 15일 해병대 포항기지로 개편됐다.해병대 제1사단은 제1전투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한국전쟁 말기 사천강지구 전투를 수행 중이던 해병대 제1전투단은 1953년 7월 27일 남북 휴전협정과 동시에 수도권 방어 임무를 위해 경기도 파주군 금촌면에 전투단 본부를 설치했다. 제1전투단은 미해병대 제1사단이 본국으로 철수한 후에는 작전지역의 작전권을 환수했다. 이 전력을 바탕으로 해병대는 1955년 1월 15일 상륙작전부대인 해병대 제1사단을 창설하기에 이른다.그러던 중 수도권 방어의 중요성을 인식한 국군이 1959년 2월 26일 제1임시여단을 새롭게 편성, 김포에 주둔시키면서 제1사단은 포항으로 이동해 상륙작전 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됐다.□ 해병대 포항 주둔의 필요성6·25전쟁 당시 해병대사령부 참모부장 임무를 수행하던 공정식(해병대 제6대 사령관) 장군은 해병대가 포항에 주둔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포항비행장에서 미 해병 제3비행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부대재배치 조정이 필요했다. 당시 해병대사령부 수석고문이던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은 활주로 방어 및 전략기동부대로서 한국 해병대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그와 함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직접 만나 건의한 끝에 한국해병대가 포항 상륙작전기지로 이전하게 됐다.”공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포항비행장 활주로 주변지역은 청포도 밭이었고 미 5공군과 미 8군이 이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고 언급했다. 결국 이 자리는 `미 해병대가 주둔한 기지를 한국 해병대가 물려받아 혈맹(血盟)의 맥을 이을 것`이라는 포니 대령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한국 해병대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 해병대에 대한 군사 전략적 사고가 반영된 것으로, 북한 및 주변국에 대해 억제전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역으로 포항을 선정했다고 볼 수 있다.국방부가 2년 단위로 발간해 배포하는 `국방백서` 2012년판에 의하면 포항은 지역적으로 한반도 동서해안 및 주변국에 가장 신속히 대응이 가능한 적격의 위치로서 부대의 신속대응임무 수행을 가능케 하는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다. 현재도 국군 전력 중 육군을 포함해 1개 사단의 구성부대가 한 장소에 모두 집결돼 있어 즉각 출동이 가능한 부대는 포항에 주둔한 해병대 제1사단이 유일하다.한편, 해군본부에서는 1964년 4월15일 포항지역에 근무하는 해군·해병대 장병에 대한 의료지원을 위해 포항 해군병원을 만들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포항병원은 포항에 주둔한 모든 군부대 의료지원를 담당하고 있으며 2차 진료위주의 병원이지만 타지역에 비해 많은 분야에 대한 1차 진료를 할 수 있도록 돼 있어 장병들이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 `포항특정경비지역` 해병대가 지킨다포항시는 포항제철소를 필두로 하는 국내 철강산업의 선두주자로 국가발전을 이끌어왔다.비록 최근들어 글로벌 금융위기와 철강업계의 전세계적인 불황 등 악재를 극복하지 못하며 침체기를 겪고 있지만 지난 40여년간 지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해병대는 산업발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포항제철소 등 포항지역의 국가 중요시설을 방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포항을 `특정경비지역`으로 분류하고 합동사령부를 만들어 포항시와 역사를 함께 했던 것.특정경비지역이란 일반적인 지역과는 다르게 사태 발생시 군 주도의 조치를 함으로써 조기에 지역을 안정화 시키기 위한 제도이다.1969년 1월 포항특정경비지역사령부라는 명칭으로 탄생한 합동사령부는 해병대 제1사단장이 사령관을 겸직하며 포항지역 일원의 모든 해병대와 해군의 부대를 지휘하고 있다.이 중 주요전력을 차지하고 있는 해병대의 소속 부대는 제1사단, 교육훈련단, 군수지원단 등이 있다.해병대 제1사단은 국가의 전략기동부대로서 역할인 상륙작전을 위해 포항지역에서 훈련하는 것과 포항특정 경비지역 사령부로서 책임지역에 대한 방호를 하는 역할을 한다. 교육훈련단은 해병대 장교, 부사관, 병사에 대한 양성 및 보수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해병대가 포항에 주둔한 후 책임지역 내에서 북한 간첩의 침투는 약 40여회에 걸쳐 80여명이 시도했고, 이는 1980년대 이후들어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해병대는 간첩침투로부터 포항지역을 방호하기 위해 평상시에는 1개 연대 규모가 해상을 보호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 해상침투 방법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대침투작전 및 대테러작전을 실시할 방침이다.포항 해병대 창설 역사 1950년 12월 미 해병대 제1전투단 비행단제12·33비행전대 포항비행단 주둔1952년 8월 한국 해병대, 포항비행장 1개중대 지원10월 미 해병대 제1전투단 비행단1956년 7월 포항기지로 부대규모 확대1958년 8월 해병대 포항기지로 개선/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6-27

반세기 훌쩍 넘는 세월 `희로애락` 함께한 동반자

`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중국의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남긴 친구에 관한 소회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마주했을 때 곁에서 어깨를 내어주는 친구가 진실한 우정이었다는 깨달음이다. `영원한 친구`포항시와 해병대의 인연은 한국전쟁 당시 포항비행장을 방호하던 미 해병대에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합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희로애락(喜哀)을 함께했다. 본지는 특별기획시리즈를 통해 반세기 넘게 운명을 함께한 포항시와 해병대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21세기 민·군 협력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려 한다.한국전쟁 당시 美 해병대 전비단에韓 해병대 1개중대 합류로 첫 인연1959년 3월 `포항시대` 본격 개막`포항시·포특사 발전협의회` 결성대민 지원·부대 주변환경정비 등공동발전사항 논의 꾸준히 이어가산불·수해·폭설 등 재난수습도 앞장악재극복 발벗고 나선 든든한 지원군□ 군부대의 포항주둔 역사포항시가 지난 2014년 발간한 `포항시사(浦港市史)`에 의하면 포항지역에 주둔한 군부대의 역사는 신라시대 수군진 설치에서 비롯돼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현재 해병대 제1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포항시 남구 오천읍 일원은 조선 태종·세종 때 새로운 군사제도 마련에 따라 설치한 수군진이 위치한 곳으로 천혜의 요새였다. `세조실록`과 `경상도속찬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경상도 4진 중 하나인 영일진은 임곡포(林谷浦·현재의 임곡항)로부터 6리 20보(2.5㎞) 지점`이라고 정확히 기술돼 있다. 영일진은 중익(中翼)으로서 좌익(左翼)을 장기(현 장기면)로, 우익(右翼)을 흥해(현 흥해읍)로 삼았다고 한다.일제시대에는 1941년 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따른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동남아에 국한됐던 전쟁이 태평양 전체로 확대되면서 포항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됐다.일본 본토에 대한 미국의 점령을 우려했던 일제는 1943년부터 포항, 여수, 목포, 제주도에 비행장 건설을 극비리에 추진했고 포항지역에는 영일군 오천면(현 포항시 오천읍) 일월동 일대에 비행장 건설작업을 실시했다.일제는 1943년 5월부터 포항 유지들에게 군용비행기 할당을 강제해 패전때까지 비행기를 계속 헌납받았다. 비행기 완공후에는 가미가제용 비행기 2대를 대기시켜 기초훈련을 실시했으며 불과 몇년만에 광복을 맞게 되면서 1945년 10월 3일 포항비행장에 대한 무장이 해제됐다.□ 해병대와 포항의 인연해병대는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던 1952년 8월 1일 미 해병대 제1전투비행단의 포항비행장 외곽경계를 지원하기 위해 1개 중대가 주둔하면서부터 포항시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같은해 10월 1일 해병대 포항경비부대로 개편된 이후 1개 중대를 증편해 평택파견대를 운용했으며, 1953년 3월 17일에는 포항막사로 개편됐다.1955년 7월 21일 포항막사와 평택막사를 통합해 포항부대로 증편한 해병대는 이듬해 7월 1일 미 해병대 제3비행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포항기지를 창설했다. 해병대는 포항비행장을 인수하고 주둔지 경계 및 교육훈련시설을 관리·유지하면서 포항기지에 예비역 교육대를 설치해 예비역 해병 입영근무 소집을 실시하면서 1958년 4월 15일 마침내 해병대 포항기지로 개편됐다.장단·사천강지구 전투를 수행 중이던 해병대 제1전투단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서명과 동시에 수도권 방어임무를 위해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에 전투단 본부를 설치했다.1954년 2월 1일 제1전투단을 기간으로 해병 제1여단이 금촌면에서 증·창설됐으며 3월 17일 미 해병 제1사단이 본국으로 철수함에 따라 작전권을 환수했다. 1955년 1월 15일 제1여단을 기간으로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 제1상륙사단을 창설해 상륙작전부대로서 체제를 정비해갔다.이같은 상황 속에 1959년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 해병대 제3비행사단이 주둔하던 포항기지를 한국 해병대가 인수해야 한다는 미 해병대사령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부전선에 있던 해병대 제1상륙사단은 1959년 3월 28일 포항으로 이전하며 본격적인 해병대 포항시대가 개막했다. □ 경제효과 연간 2천억원㈔세계한민족미래재단 부설 포항환동해미래연구원은 지난 2014년 `해병대와 포항지역발전`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당시 세미나에서는 전병훈(전 해병대 제1사단장) 박사, 전명종 포항환동해미래연구원 소속 연구원, 이종판 한국미래문제연구원 연구기획실장, 서상문 포항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등 군관련 전문가 4명이 차례로 등장해 해병대와 포항시의 관계에 대해 주제발표를 진행했다.이 자리에서 전명종 연구원은 해병대가 포항시에 주둔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는 2010년 기준 1천846억원으로 지역 총생산의 1.05%를 차지한다고 분석했다.이같은 규모는 해병대 가족투어가 실시된 2012년 초부터 더욱 늘어나 오늘날 연간 2천억원이 넘는 경제적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소비집단으로만 여겨졌던 해병대가 주둔 지역의 사회·문화뿐만 아니라 경제적 부분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상생협력 첫걸음 `포항시·포특사 발전협의회`포항지역 주변 영토와 해안을 방어하는 해군과 해병대의 합동지역 사령부인 포항특정경비지역사령부(이하 포특사)는 포항시와 정기적인 회의를 실시하면서 정책협의적 교류를 실시하고 있다.이는 2004년 12월 해병대가 현안문제 협의체 구성을 포항시에 제안해 시행된 것으로 2005년 5월 18일 첫 회의 개최 이후 현재까지 `포항시·포특사 발전협의회`라는 명칭으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포항시와 해병대는 회의를 통해 군부대의 대민지원, 지자체의 부대 주변환경정비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논의하고 양측의 각종 현안사항과 공동 발전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특히 군부대의 물리적 개방뿐만 아니라 군 부대원이 지역사회에 대해 가지는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고 개방성을 확보해주기 위한 다양한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지역사회 구성원이 군의 폐쇄적 성향에 대해 가지는 편견을 깨는 노력이 이 협의체에서부터 시작돼 사회·문화적 영향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지역사회가 제기하는 다양한 민원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해 나가는 협의체를 구성하고 정기적인 회의를 진행하면서 포항시와 해병대는 동반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대형사고 수습에도 앞장춘삼월 봄기운이 움트던 지난 2013년 3월 9일 포항시 북구 용흥동의 한 야산에서 초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산불은 최고 초속 15.9m의 강풍을 타고 도심 속 야산 3개를 타고 넘었다. 불과 1시간여 만에 직선거리 2㎞, 인근 4개 동을 휩쓸었다.이 산불에 의해 1명이 숨지고 14명이 부상당했고 주택 58채가 불에 타 120여명이 갈 곳을 잃었으며 재산피해만 29억6천만원에 달했다. 당시 경찰조사결과 철없는 중학생의 불장난이 거대한 화마로 이어진 것으로 밝혀져 충격은 배가 됐다.시름에 빠져있던 주민들을 위해 나섰던 이들은 다름 아닌 해병대.해병대 제1사단은 사고 당일인 9일 포항시로부터 긴급지원요청을 받아 즉시 포특사 위기조치반을 소집해 산불진화부대 병력 700여명과 소방차 2대, 헬기 2대를 산불 현장으로 급파했다.해병대는 이날부터 10일 새벽 1시께까지 포항시 북구 용흥동과 연일읍 일대에서 유관기관 인력과 함께 지역별 방화선을 구축하고 군사작전에 준하는 산불진화작전을 수행했다.복구작업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화재현장에 투입된 해병대 장병 500여명은 산불 발화지점에서 날아온 불씨가 옮겨 붙어 피해를 입은 수도산과 포항고, 포항여고, 영흥초 등에서 화재 복구작업을 실시했다.이렇듯 해병대는 화재발생 이후 사흘간 총 2천200여명의 장병을 투입해 화재진압과 복구에 구슬땀을 흘렸고, 이같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은 지역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해병대는 이처럼 포항의 크고 작은 재난(산불, 수해, 폭설, 영농지원 등)에 발벗고 나서며 포항시민들과 돈독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6-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