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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5.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고려의 안동` 역사적 가치 부각시킨 `컨텐츠 개발` 절실 본지는 `공민왕과 안동`을 주제로 앞서 4회에 걸쳐 공민왕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안동과의 관계, 유물과 유적 등을 살펴봤다. 공민왕이 안동 지역에 남긴 것은 공민왕가에 대한 신앙으로, 또는 현판 등 필적으로, 더러는 하사한 유물과 이때 쌓았다는 산성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공민왕이 1361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서 머물렀던 역사적 사건은 이처럼 많은 문화유산을 남기게 했다. 그렇다면 이미 65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공민왕 관련 문화유산(역사의식과 문화현상)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승해야 하는지가 앞으로의 과제다.유물 등 문화유산의 퇴색놋다리밟기 등 일부 제외하고 거의 방치 공민왕의 안동 체류역사를 재현하는 행사가 한창이던 지난 5월29일 안동시청에서는 공민왕 관련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승할지에 대한 주제발표와 토론이 열렸다. 주제발표에 나선 한양명(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는 현재 놋다리밟기 등 공민왕의 몽진에 연원을 둔 놀이를 비롯해 수많은 설화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방치상태에 있음을 지적했다. 우선 공민왕이 하사한 물품들만 살펴보더라도 안동시 북문동의 태사묘 내 보물각에 보관중인 일부 유물은 훼손상태가 매우 심각하다. 안동을 비롯해 봉화 등지에 산재한 성곽들도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퇴락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형의 문화유산도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변질돼 있는 현실이다. 공민왕가에 대한 지역민들의 신앙은 일부를 제외하면 전승력이 상당히 약화돼 있어 축소되거나 형태가 변해버렸다. 공민왕의 안동몽진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여성들의 놀이 놋다리밟기도 원형이 바랬다. 수많은 설화들 역시 지역의 노인들에게만 전해지고 있어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 쉽게 단절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양명 교수는 “체계적 보존과 관리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유물 보존방안 시급태사묘 보물각, `고려문화전시관` 규정 필요 태사묘 보물각에 보관된 공민왕 하사품 등 유물의 보존상태는 매우 좋지 않다. 혁대는 가죽이 훼손됐고 장식판이 부식됐다. 직물류는 원래 9종류에서 지금은 5종류만이 남아 있는데 그나마도 섬유가 변색되거나 약해지는 현실이다. 지난 2007년 보수작업을 거친 보물각은 온도와 습도조절이 가능한 장비를 도입하는 등 비교적 공을 들였지만 전시면적 부족이나 체계적인 전시가 아쉽다는 지적이다. 한 교수는 이와 관련 “시급히 고려해야 할 것은 현대적인 전시공간의 확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야 만이 관련유물의 역사적 의의를 일반 시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보물각에 보관된 자체유물뿐 아니라 공민왕이 남긴 여타의 문화유산을 비롯해 고려시대와 안동의 연관성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는 평가다. 다시 말해 고려 당시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는 `고려문화전시관`으로 규정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것. 구체적으로 유실되거나 훼손된 유물의 복원품을 포함한 보물각 유물과 함께 공민왕 관련 산성의 모형, 신앙문화와 관련한 소재, 놀이와 설화 등의 컨텐츠를 개발해 전시할 수 있다. 또 안동의 삼태사 관련 유적과 하회탈, 고려시대 안동의 인물, 당시의 불교문화 등 전반적인 유산형태를 수렴해 전시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산성·신앙의 보존과 전승지원 필요엄밀한 지표·시굴조사 선행뒤 복원 추진 현재 공민왕과 관련한 산성은 모두 11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산성들 대다수가 그동안 방치되면서 겨우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거나 아예 찾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경우도 있다. 이들 산성의 원형을 복원하자면 상당한 시일과 경비가 소요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유산의 소중함과 복원에 대한 강한 의지와 함께 큰 원칙을 세우고 엄밀한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를 거친 뒤 단계적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게 학계 등의 요구이다. 한편, 공민왕가에 대한 지역민들의 신앙은 현재 크게 약화돼 있다. 상당수가 전승이 끊겼으며 겨우 전승되고 있는 경우에도 축소되거나 원형이 변질됐다. 공민왕신앙 중 주민들이 동진과 서진으로 편을 나눠 진법을 펼치는 풍산읍 수리 별신굿은 역사적 사건을 연극화했다는 점에서 그 독특함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원래 수리 별신굿은 공민왕 군대가 적을 물리치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대규모 지역 축제였다가 일제강점기에 전승이 끊겼던 점에 비춰 전승지원이 시급하다. 이와 함께 신앙의 현장, 산성의 현장, 설화의 현장 등에 대한 학문적 조사 등은 이미 상당수 이루어진 만큼 앞으로는 관련지역에 안내판과 표석 등을 설치하는 1차적 지원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중론. 공민왕과 관련된 모든 유적지에 안내판과 표석을 설치해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요구다. 고려속에서의 안동 이미지 점해야 `공민왕 축제`, 독립축제 육성 바람직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과 놋다리밟기 및 차전놀이(동채싸움)로 유명한 `안동민속축제`까지 안동은 전통축제의 고장이다. 여기에다 올해 안동시는 안동예술제 기간을 이용해 `고려 31대 공민왕 70일 체류역사 재현` 행사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을 축제화하는 과정에서 안동 지역은 공민왕과의 인연을 대외에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양명 교수는 “공민왕 축제를 마땅히 독립축제로 육성해야 하며 몽진 자체 보다는 고려시대의 안동문화를 집약적으로 제시해 체험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올해 공민왕 몽진 관련 행사는 첫 시도인 만큼 비교적 단순하게 진행됐지만, 보다 역동적이고 폭넓은 축제 컨텐츠의 개발이 필요하다. 특히 공민왕 몽진과 관련된 놋다리밟기나 고려 왕건과 관련한 동채싸움 등을 축제의 연행으로 삼고 마당극 등 현대적 공연물을 제작해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안동은 공민왕 시대를 포함해 고려조에 두 번씩이나 임시수도 역할을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고려의 안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려 왕실과 조정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해 왔다. 고려조에 융성했던 불교문화는 안동에서 왕실의 원찰인 용수사(안동시 도산면 운곡리)를 통해 꽃 피웠으며 이후의 양반문화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해 고려와 관련한 끈질긴 인연과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고려관련 문화유산을 갖춘 안동은 남한의 어느 지역보다 고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 교수는 “통일 이후를 대비해 미래지향적, 역동적 지역이미지와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고려의 안동`을 부각시킬 필요는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안동시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의 자매결연 추진을 오래전부터 계획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한에서 개경의 고려왕조와 가장 깊은 인연을 맺었던 도시로서 분단상황 극복에 노력을 보탠다는 계획이며 이를 통해 역사문화의 도시로서 안동시는 앞으로 무한한 경쟁력이 기대되고 있다. 끝 /정태원·이임태기자 lee77@kbmaeil.com ♠자문: 한양명(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권두현(안동축제관광조직위 사무처장, 안동대 출강) ♠사진자료 제공: 사진작가 강병두·안동시청 문화예술과

2009-07-31

4.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몽진 당시 청량산성·왕모산성·학가산성 등 축조해 전란 대비공민왕 가족 신격화… 정월대보름 동제 통해 마을 안녕 기원 1.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2.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3.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4.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5.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고려 31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문 기간은 모두 70일에 불과하다. 우리 역사상 왕의 몽진도 흔치 않았거니와 공민왕의 안동몽진 역시 긴 재위기간에 비하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단 한 번 안동을 찾아 70일을 머문 공민왕.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은 이후 안동 지역 사람들의 삶 속에 700년의 세월동안 유·무형으로 남아 이어져 왔다. 이를 크게 나누자면 하사품과 성곽들, 공민왕 신앙, 전통놀이 정도를 들 수 있다.충성에 보답한 하사품 공민왕은 유형의 문화유산과 무형의 문화유산을 다양하게 남겼다. 유형의 자취 중 대표적인 것들은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안동 지역 백성들의 정성에 감동해 안동부와 안기역에 하사한 물품들이다. 보물 451호로 지정된 이 하사품들은 현재 안동시내의 태사묘의 보물각에 보관중이다.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공민왕은 안동부에 백옥대와 옥관자를 비롯해 모두 18종류 35개 물품을, 안기역에는 유잔구대 14개를 하사했다. 이 가운데 9종 30점이 유실됐고 6종은 일부가 남아있지만 역시 유실된 게 더 많다. 태사묘 보물각에 보관된 하사품들은 따라서 전체 하사품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군왕이면서도 서화에 뛰어난 예술가로 알려진 공민왕은 현판과 포장교서의 형태로 많은 글씨도 하사했다. 현판 글씨로는 영호루(映湖樓)와 안동웅부(安東雄府), 봉정사 진여문(眞如門)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 등이 있다. 포장교서로는 1360년 당시 복주목사이던 정광도에게 내린 것이 태사묘 보물각에 남아있다. 이 교서는 `영가지`에서 안동의 고적 가운데 하나로 꼽은 공민왕 친필교지로 추정되지만 친필 여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공민왕이 축성했다는 산성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한 것은 전란을 피해서였다. 이에 따라 안동 지역에는 어찌 보면 필연적이게도 공민왕이 축성했다는 산성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청량산 축용봉 부근의 공민왕산성, 청량사와 여러 절터가 자리 잡은 곳 부근의 청량산성, 오마대도산성(五馬大道山城), 도산면 원천리의 왕모산성(王母山城), 안동과 예천 및 영주의 접경지역인 학가산의 학가산성, 서후면 천등산의 천등산성, 남선면 신석리의 신석산성, 용상동과 성곡동 일대의 성황당토성, 송천동과 임하면 천전리의 경계쯤인 양장성(羊腸城), 일직면 송리의 송리산성, 풍산읍의 풍악산성, 도산면 서부리의 선성산성(宣城山城) 등이다. 이 같은 안동지역의 산성들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도록 이어진 축성방법에 따라 석성 또는 토석혼축의 성으로 모두 공민왕이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성 중 상당수는 공민왕 이전에 있었던 성으로 공민왕이 몽진했을 당시 재정비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이는 원래 안동지역이 전략적 요충지였던 점에 비춰 몽진 이전에 이미 상당수의 산성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도산과 청량산 일대의 경우 왕모산성과 청량산성 등은 물론 공민왕이 군율을 위반한 죄인을 처형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밀성대가 남아 있어 공민왕과의 깊은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학계의 어떤 연구에서도 공민왕이 청량산을 직접 다녀갔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산세가 험한 청량산 일대가 매력적인 군사적 요지였던 사실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이 점은 공민왕이 청량산에 직접 다녀갔으며 산성 구축이나 재정비에도 일정부분 관여했을 가능성을 유추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공민왕 신앙 공민왕이 남긴 무형의 문화유산으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신격화 양상이다. 공민왕 또는 왕의 가족을 동신으로 모시는 마을은 현재 안동에만 9개 마을이며 봉화군 지역에도 8개 마을에 이른다. 사실 전통사회에서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공동체의 신으로 모신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공민왕의 신격화 양상은 왕은 물론 왕의 어머니와 부인,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등 가족 구성원 거의를 나눠 신앙화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실제, 공민왕을 직접 모신 마을은 풍산읍 수리 국신당과 남선면 신석리 성골, 용상동 공민왕당이 있다. 또 그의 딸을 모신 `딸당`은 도산면 가송리와 예안면 신남리 구티미마을에 남아 있다. 또 왕의 어머니를 모신 `왕모당`이 도산면 원천리 왕모산성에 존재하며 예안면 신남리 정자골에는 `며느리당`이 남아있다. 600여년 동안 동제가 올려진 가송리 `딸당`에서는 해마다 정월대보름 자정께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풍물 등을 앞세우고 길 굿을 벌인 뒤 유교식 제례로 치러진다. 이날 자정을 전후해서는 안동 지역의 공민왕과 가족신을 모신 마을에서는 규모만 다를 뿐 일제히 동제가 열린다. 주민들은 이 동제를 통해 마을의 안녕과 안동 전체가 복을 받기를 기원한다. 놀이와 설화 공민왕의 안동 몽진시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널 때 안동의 부녀자들이 등을 잇대어 인교를 만든데서 유래했다는 `놋다리밟기`는 실은 이전부터 있어온 여성들의 집단놀이라는 데 이설이 별로 없다. 여성들이 서로 손을 잡거나 몸을 부대끼면서 벌이는 집단적 춤이나 놀이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문화임을 춤 인류학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곤경에 처한 공민왕에 대해 안동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을 베풀었는지에 대한 증거로서 하나의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놋다리밟기는 전라도의 강강술래, 동해안의 월월이청청, 의성의 지애밟기 등과 같은 맥락인 여성의 대동놀이이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의 놀이가 서로 밟고 밟히거나 주고받는 평등한 방식의 놀이라면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그와 다르다. 공주를 뽑은 뒤 나머지는 모두 엎드리고 공주만이 등을 밟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공민왕 몽진시 노국공주가 이 놀이에 함께 동참하면서 전승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안동에서는 해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등 수차례 놋다리밟기 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이와 함께 안동 지역에는 공민왕과 관련한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설화는 공민왕이 몽진한 과정을 조명한 이야기기 10편에 달하며, 몽진 기간 동안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는 무려 46편에 달하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공민왕과 그 가족들을 모시는 동제와 관련해서도 42편의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유형별로 살펴보자면 공주를 위해 인교를 놓았다는 놋다리밟기 설화의 경우 공민왕의 몽진과정을 이야기한 대표적인 설화이다. 안동의 여러 지명에 대한 전설과 공민왕이 청량산에서 거주했다는 설화 등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물던 당시의 행적을 소재로 한 설화이다. 이처럼 다양한 설화는 곧 공민왕 신격화의 토대가 됐으며 `공민왕 신앙` 자체도 영험담 등이 전해지는 등 설화로 내려온다. 이처럼 공민왕은 안동 지역에 크고 작은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남겼다. 왕의 안동 체류 이후 7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일부 유실되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유산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끈질긴 인연은 오늘날까지 안동의 문화적·정신적 모태가 되고 있다./정태원·이임태기자

2009-07-17

3.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

공민왕이 홍건적의 2차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해 머문 기간은 1361년 12월 임진일로부터 1362년 신축일에 이르기까지의 70일 동안이다. 하필 몽진지로 안동을 선택한 것은 날랜 적 기병의 추격을 떨치는데 안동의 산간지형이 유리했고 태조 왕건 이래 보여준 고려왕실에 대한 안동인들의 충성심 등이 작용했음을 전편에서 언급했다. 또 당시 공민왕의 측근 중에는 안동 출신 또는 안동에 연고를 둔 인물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고려왕실을 의리로 지켜낸 안동 사람들은 공민왕의 체류기간 70일 동안 어떻게 왕을 모셨으며 위급한 정세에 대응했을까. 따뜻한 영접과 재기의지 독려 공민왕이 안동에서 70일을 무사하게 보냈다면 이는 안동지역을 관리하는 행정책임자와 지역 백성들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몽진 당시 안동의 관리는 목사 김봉환이었던 것으로 최근까지의 연구는 결론 내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공민왕의 몽진 당시 김봉환 목사와 안동 사람들이 국왕을 극진해 예우해 모시자 공민왕은 그 공로를 인정해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로, 복주목사를 안동대도호부사로 승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안동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고려사`는 안타깝게도 자세한 기록을 전하지는 않는다. 이는 전략상 왕의 행적을 지나치게 노출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봉환 목사는 왕의 안동 도착 당시 상주도(尙州道) 소속 안기역 역리들에게 왕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독려하거나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학계의 추정이다. 또 부녀자들이 인교를 놓아서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너게 한 것도 안동부의 행정적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목사 김봉환은 왕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집무하던 복주목 청사를 정리한 뒤 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行宮)으로 준비했을 것이다. 또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왕과 군지휘자들과 협의해 확실한 방어태세를 구축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정세가 위급하던 이때 왕의 최후의 보루로 준비됐던 곳은 다름 아닌 현재 성곡동의 성황당토성과 청량산의 공민왕산성과 왕모산성, 오마도산성 등이었음을 들 수 있고 김봉환이 이를 주도했다는 사실적 추측이다. 이런 것들은 `영가지`가 김봉환의 직책에 대해 행정 관리인 목사나 부사라 하지 않고 무인에게 통용됐던 안집사(安集使)로 기록한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왕의 휴식과 군사정비 지원 공민왕은 안동에서 우선적으로 오랜 몽진길의 피로함을 달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왕이 어느 날에는 낙동강 영호루 아래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며 물가에서 활쏘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전시체제에서도 후방인 안동이 비교적 안전했으며 왕은 피로를 풀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나들이를 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실제 이때 홍건적은 한 번도 경상도를 넘은 일이 없었다. 이에 따라 왕의 일행은 전세가 비교적 안정된 틈을 이용해 안동 지역의 다른 곳으로도 순행했을 것이며, 안동 지역의 많은 산성들이 공민왕의 안전을 위해 축조됐거나 보수됐다고 전해진다. 산성 축조가 정확히 이 시기에 공민왕을 위해 이뤄졌다는 사실적 기록은 충분하지 않지만 안동에 이르러 공민왕의 마음이 편안했음은 여러 기록으로 입증되고 있다. 한편, 왕은 개성 일대를 휘젓던 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안동에 머무는 동안 군대의 지휘체제를 정비했다. 이는 총병관으로 정세운을 임명해 홍건적을 격퇴한 사실로 증명된다. 이때를 전후해 진성이씨의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李子脩)가 정세운의 휘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건적을 물리친 공로로 이자수는 공신이 됨으로써 그 자손들이 예안현과 청량산 일대에서 사회적 위상을 점했으며 후일 이 가문에서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이 배출되는 계기가 됐던 점도 소홀히 볼 수 없는 한 인과다. 왕은 또 한편 봉정사의 진여문(眞如門) 현판글씨로 볼 때 봉정사에도 들러 불력으로 홍건적을 물리치기를 기도했을 개연성도 적지 않다. 이후 공민왕은 정세운이 지휘하는 군대가 개성의 홍건적을 섬멸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개성 환도를 준비했던 것이다. 왕은 떠나기 전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다”며 안동부에 여러 가지 선물을 하사했으며 이 중 다수가 아직까지 태사묘 등에 전해지고 있다.안동에 대한 공민왕의 사은 공민왕이 안동에 도착해 송야천을 건널 당시 노국공주를 위해 안동의 부녀자들이 서서 엎드린 채 등을 잇대어 인교를 만들었다는 `놋다리밟기` 전설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내리자면 사실이 아니다. 영덕의 월월이청청과 의성의 지애밟기, 호남의 강강술래 등 놋다리밟기와 같은 맥락의 놀이는 얼마든지 있다. 여성들이 소로 손을 잡거나 몸을 잇대어 노는 춤의 문화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다. 결국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안동의 백성들이 공민왕을 어느 정도 환대했던지를 보여주기 위해 덧씌워진 전설이다. 이런 환대에 힘입어 왕은 재기할 수 있었고 안동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두드러진 왕의 사은 중 하나는 몽진시에 복주목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킨 일이다. 안동이라는 지명은 왕건이 최초로 내렸고 중간에 몇 번이나 다른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확고한 지명으로 굳었다. 이와 함께 `금방기`에 따르면 왕은 안동대도호부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안동 지역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배려했다. 의미가 깊은 여러 가지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안동부와 안기역리들에게 복식류와 식기류를 하사했으며, 영남의 대표적 누각이자 자신의 시름을 달랬던 `영호루`의 현판 글씨를 친필로 하사했다. 이로써 안동의 영호루는 국가적인 주목을 받게 됐으며 이후 누각을 확장하고 유실시 복원하는 동력이 될 수 있었다. 또 몽진해온 공민왕을 중도에서 맞이한 손홍량에게는 “충정이 하나같이 곧은 사람이 늙을수록 나라 위한 마음이 독실하도다”라는 시를 내리고 그의 사후에는 정평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손홍량은 나라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낙향해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던 충성심 강한 신하였다. 이외에도 공민왕은 여러 가지 유무형의 선물을 안동에 남겼으며 안동의 백성들은 왕이 머물렀던 역사를 잊지 않는 의미로 `공민왕 신앙`을 이어왔던 것이다. /정태원·이임태기자

2009-07-10

2.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

공민왕 몽진 당시의 정세 1360년 홍건적은 해로를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침입하는 한편 요동 지방에서 활동하던 홍건적의 대부대는 원(元)의 상도를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원이 대군을 동원해 만리장성 이남과 이북의 양 방면에서 홍건적을 포위해 압박하자 궁지에 몰린 홍건적은 진로를 고려로 돌렸다. 이에 따라 고려는 다시 한 번 홍건적과 결전을 치러야만 했다. 공민왕 10년인 1961년 10월 20일 10만여 명의 홍건적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고려의 영내에 침입했다. 이들이 5일 만에 삭주를 거쳐 이성을 점령하자 고려 조정은 홍건적을 방어하기 위한 지휘부를 편성했다. 방위군을 전진 배치하는 한편 각 도에서 장정을 징발하고 선비와 향리가 출전을 자원하면 관직을 주고 천민이 출전을 자원하면 양인 신분을 주는 우대를 통해 전투 병력의 확충에도 팔을 걷었다. 그러나 1차 홍건적의 난을 비교적 쉽게 제압한 바 있는 상원수 안우와 도지휘사 이방실 등이 지휘한 고려군은 홍건적을 다소 과소평가했다. 청천강 방어선에 머물던 고려군은 홍건적이 한꺼번에 대부대를 남하시킬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경계태세를 게을리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중과부적으로 고려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홍건적은 놀라운 기세로 남하했다. 패배와 퇴각을 거듭한 고려군이 개경까지 퇴각하자 고려 조정은 개경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파천을 결정하기에 이른다.눈보라 맞으며 초라한 몽진 파천 계획에 따라 고려조정이 부녀자와 노약자를 도성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하자 개경 도성의 민심은 크게 흔들렸다. 최영과 이방실 등 무장들은 공민왕과 문신들이 피난길에 오르자 앞을 가로막고 도성의 사수를 주장했다. 최영 등이 국왕의 파천을 반대한 것은 국왕이 조정을 지켜야 군대의 사기가 유지되고 의병모집도 쉬워지며 그래야 반격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문신들은 개경의 성곽이 불완전하고 비축된 양곡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천을 강행했다. 이때 최영은 통분을 이기지 못해 울면서 “주상께서 개경에 머물며 종묘와 사직을 지키셔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고 `고려사`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결국 겨울이 닥쳐오는 11월 19일 공민왕 일행은 개경을 떠났다. 20일 파주 분수원과 양주 영서역을 거쳐 21일에 광주 사평원에 도착했다. 당시 이 지방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도망친 뒤였고 고을의 행정책임자만이 쓸쓸이 남아 왕을 맞았다. 이천에 이른 24일에는 눈과 비가 함께 섞여 휘몰아치는 궂은 날씨여서 공민왕은 옷이 눈비에 젖어 얼어붙자 모닥불을 피워 옷을 말리는 등 초라함을 면치 못했다. 25일 충주 북쪽의 음죽에 도착했지만 발길이 닿는 지방마다 관리와 백성은 도망친 뒤였으므로 공민왕 일행의 고생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이 같은 백성들의 외면과 함께 피란 중 전해진 수도 개경 함락 소식은 공민왕으로서는 그야말로 뼈 아팠을 것이다. 안동에 이르러 비로소 극진한 대접 거쳐 온 지방마다 국왕의 지위에 걸맞은 대접은커녕 눈보라를 뚫고 갖은 고생만 겪은 초라한 몰골로 왕은 충주와 문경을 거쳐 예천과 용궁을 지나 12월 25일 한 달 정도 만에 복주(福州:안동)에 도착했다. 안동의 초입인 송야천에 공민왕이 이르러 다리가 놓이지 않은 냇물을 건너야 할 상황에 놓이자 추운 겨울 이 곤란한 장면을 본 안동의 젊은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잇대 인교(人橋)를 만들어 노국공주 일행을 건너게 했다고 전설로 전한다. 이는 다른 고장에서는 받아본 적 없는 극진한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깃발을 앞세우고 관복 행렬이 줄지어 나타나 왕을 맞이하고 궁궐을 정해 어가를 모시니 공민왕이 비로소 기뻐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공민왕 일행은 그동안 지나온 다른 고장과는 달리 안동에서는 고을 입구에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안동의 목사였던 김봉환과 토착세력은 주민들과 힘을 합쳐 공민왕을 성심껏 보위하면서 재기에 필요한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민왕은 나중에 수도 개경을 수복한 것을 두고 안동 주민들의 정성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이때의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실제 공민왕은 안동의 주민 대표들에게 옥대와 옥관자, 상아홀 등 귀중품을 하사했는데 이는 홍건적의 1차 침입을 물리치고 개선했던 무신에게도 노국공주의 반대로 하사하지 못한 귀중품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당시 안동의 안기역 관리들에게도 여러 종류의 귀중품을 하사했다. 개경에 환도한 뒤 안동과 안동 주민들의 따뜻한 대접을 잊지 못한 공민왕은 복주목(福州牧)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대도호부란 지금의 광역자치단체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행정단위다. 이와 함께 공민왕은 손수 붓과 벼루를 가져다가 자신이 몽진의 시름을 달랬던 안동의 누각에 `영호루(映湖樓)`의 현판을 써서 내려 걸어두도록 했다. 임시수도는 왜 하필 안동이었나 안동은 고려의 건국부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등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한 뒤 수세에 몰리자 찾은 곳은 안동이었다. 태조 13년 안동지역의 토착세력인 삼태사(三太師)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공으로 안동부로 승격됐다가 다시 영가군(郡)으로, 성종 14년 길주자사(吉州刺史)로 바뀌었다가 현종 3년 다시 안동부라 했다. 이후 명종 27년 김사미와 효심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안동부에서 평정한 공으로 도호부(都護府)로, 신종 7년 동경 야별초의 패좌 등이 일으킨 반란을 막아낸 공으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했다. 이후 다시 복주목으로 고쳤다가 공민왕에 의해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된 것이다. 이 같은 안동의 지명변천 및 승격과 강등의 역사적 사실로 미뤄 안동 지역은 당시만 해도 지방지배의 핵심이자 군사 전략상의 요충지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안동은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여러 유리한 점을 가진 지역이었다. 홍건적은 북에서 처내려왔기 때문에 주변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들이 에워싼 안동의 지형은 적의 날랜 기병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상당했다. 또한 내륙이라는 특성으로 서남해안에 자주 출몰한 왜구의 침략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식량은 물론 철을 비롯한 각종 물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에도 유리했다. 이외에도 안동은 수차례 반란을 제압한데서 알 수 있듯이 `남쪽에서 충성과 의리가 가장 뛰어난 고장`으로 고려 왕실은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전란을 맞아 고려의 임시수도가 된 안동은 왕을 보필해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왕이 수도를 떠나는 몽진이 결코 흔치 않았기 때문에 왕의 방문지라는 강한 자부심을 안동사람들은 지녔고 지금까지도 그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정태원·이임태기자 lee77@kbmaeil.com

2009-07-03

1.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

글 싣는 순서①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②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③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④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⑤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안동은 지리적으로 경북북부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웅부로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한 것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몽진을 온 이후부터 이다. 공민왕은 수도 개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파천하면서 왜 하필이면 임시수도로 안동을 택했을까? 왕이 다녀간 뒤 안동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안동인들에게는 공민왕의 파천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본지는 창사 19주년을 맞아 특별취재팀을 편성하고 관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공민왕과 안동`을 5회에 걸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주공민왕이 남긴 발자취1361년 12월 임진일 고려 31대 공민왕은 2차 홍건전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서 난이 평정될 때까지 70일간 이곳에 머무른다. 전란 70일 동안 안동은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하며 왕을 극진히 모셨다. 공민왕이 머물고 간 안동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공민왕이 하사한 백옥대와 옥관자 금대 비단 등을 비롯해 안동웅부와 영호루 현판 등 유형문화와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 민속놀이 등 다양한 무형문화가 전승돼 오고 있다.지난달 29일부터 3일간에는 안동시내 일원에서는 공민왕 안동 70일 체류 역사 재현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이 행사는 안동시 용상동 공민왕 사당에서 열린 성황제를 시작으로 놋다리밟기와 어가행렬 재현, 그리고 사은행사 등 다양하게 펼쳐졌다. 행사에 맞춰 안동지역 내 신석동과 수동, 가송, 신남, 원천 등 6곳에 있는 공민왕 관련 사당에서는 왕의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8일 자정 무렵에 안동시 도산면 가송 가사리마을에서는 인근 올미재, 쏘두들 주민들이 수백 년 전부터 연례행사로 이어져 온 마을 동신제를 올리기도 했다. 청량산 축륭봉을 이은 연봉 아래 자리 잡은 이 마을의 동신제는 여느 마을 동신제와는 다르게 공민왕의 따님을 마을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이 마을 어귀 산자락에 자리한 부인당에 모셔진 공주는 인근 원천리의 왕모당과 신남리의 며느리당과 함께 왕의 가족들까지 신으로 모시고 600여 년이 넘게 섬기고 있다.공민왕과 홍건적의 난“공민왕은 이름이 전이고 몽골 이름은 백안첩목아(佰鞍貼木兒)이다. 충혜왕의 동생이고 충숙왕 17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엄격 중후하고 또한 자애로우며 어질어 백성의 인심을 많이 얻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기심이 많고 음란하여 화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라고 고려사절요는 적고 있다. 그림과 글씨 등 예능 방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왕후인 노국대장를 끔찍이 사랑하는 등 감수성이 예민해서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원나라와 왜구에 시달리는 등 고려 말의 시대 상황마저 녹록하지 않아 원만한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즉위 8년째 되던 1359년 2월부터 침략의 조짐을 보이던 홍두적(홍건적)은 그해 11월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노략질을 해 갔으나 변방을 지키던 지휘관은 이를 숨기고 보고마저 하지 않는다. 홍두적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 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중심이 돼 일어난 한족(漢族) 반란군이다.머리에 붉은 수건(紅巾)을 둘러 표시를 했으므로 홍건적 또는 홍두적·홍적이라고도 했다. 몽골민족이 세운 원나라는 중국 내지를 통치했으나 13세기 전반에 이르러 피지배 민족이었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홍건적은 당시 유행하던 비밀결사인 백련교(白蓮敎)를 업고, 우두머리가 미륵불을 자처하며 큰 세력으로 성장해 중국의 각지를 점령했다. 홍건적은 원나라와 벌인 전쟁의 물자를 구하기위해 1357년부터 1360년까지 여러 차례 2~3천 명의 소규모로 고려를 침범한다.그러다 공민왕 즉위 10년(1361년) 10월에 10만 여명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로 침입해와 최영과 이자춘 등을 중심으로 고려군이 필사적으로 대항했으나 결국 밀리고 만다. 적들이 개경 인근까지 밀고 들어오자 다급해진 왕은 태후와 공주를 대동하고 남쪽으로 파천을 모색한다. 이 때 최영 장군이 통곡을 하며 왕이 조금만 더 머물면서 군사를 모집하고 종사를 지키자고 간청했으나 왕은 남쪽으로 파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의병을 모집하겠다고 신하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모집에 응한 이는 겨우 몇 명에 불과하고 적은 코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라 우선 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다급하게 피난이 이뤄졌던지 왕이 숭인문을 나서자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자식을 버리고, 짓밟혀 깔린 자가 들판에 가득했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고려사는 이 상황을 묘사했다. 이처럼 다급한 파천 길이라 공주마저 연을 버리고 말을 탔는데 차비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해 제대로 달리지 못하자 보는 이들이 모두 울었다. 왕의 일행은 이처럼 경황 없이 남행길을 재촉한다. 왕의 안동 도착 공민왕 일행이 수도를 버리고 떠난 뒤 홍두적들은 바로 경성을 함락시키고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리니 이 같은 전술을 겪어 보지 못한 고려군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홍두적들은 온갖 만행을 다 저지르는데 사람을 잡아 굽거나 임산부의 젖을 구워먹는 등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고 다녔다. 왕의 일행이 경기도 이천현에 이르렀을 때는 눈까지 내려 왕의 옷이 젖어 모닥불을 피워 말리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피난길로 이어진다.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인 음죽현에 이르렀을 때 백성은 물론 관리마저 도망가 버리고 없어 먹을 양식마저 구하기 힘들어 관리 한 명이 어렵게 구해 온 쌀 두 말로 일행이 연명을 하는 등 어렵고 힘든 여정으로 문경새재를 넘고 예천을 거쳐 12월 임진일에 목적지로 잡았던 지금의 복주(안동)에 다다른다. 안동에 도착한 왕은 정병운을 총병관으로 삼고 임금의 죄를 뉘우치는 `애통교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 같은 행동은 일부 충신들의 간언에 따른 것일 뿐 왕 스스로는 유흥을 즐겨 찾는 등 전란 중의 임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안동에 도착한 며칠 뒤 왕은 영호루에 올라 한동안 경치를 바라보다가는 누에서 내려와 강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줄을 지어 늘어섰고 더러는 차마 이 모습을 보지 못해 돌아서서 탄식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의 왕이었지만 안동 지역 백성들은 언 강을 공주가 건너도록 사람의 등으로 놓아 주는 충성스런 모습으로 왕의 일행을 맞이해 이를 후세의 문화로 전해 오고 있기도 하다.특별취재팀 : 정태원·고도현·이임태· 이용선 ♠자문: 한양명(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권두현(안동축제관광조직위 사무처장, 안동대 출강) ♠사진자료제공: 사진작가 강병두·안동시청 문화예술과

2009-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