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7600억 달러로 세계 14위. 호주는 1조7900억 달러로 세계 13위를 기록해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비슷한 경제 규모를 가진 두 나라지만 양 국가의 향후 경제 전망은 판이하다. 미국 워싱턴대 의과대학 산하 보건계량분석연구소(IHME)는 2100년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20위로 추락하는 반면, 호주는 세계 8위로 올라설 것으로 예측했다.이 같은 전망이 나온 배경에는 ‘인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한국의 인구는 지난해 5174만 명에서 2100년 2678만 명으로 줄어들지만, 호주 인구는 같은 기간 2573만 명에서 4235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본 것.2023년 기준 호주의 출산율은 1.7명으로 인구 유지를 위한 출산율 2.0명을 밑돈다. 그럼에도 호주 인구 그래프는 매년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1970년대 후반부터 선진국들의 인구감소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와중에도 호주가 인구 성장 측면에서 선전하고 있는 이유는 오랜 기간 적극적으로 펼쳐온 이민정책 덕분이다. 글 싣는 순서1. 청년층 대신하는 외국인 근로자들2. 호주, 이민국가로의 변신3. 외국인 근로자 통한 시드니의 도심 재생4. 시드니가 ‘워킹 홀리데이’ 성지된 이유5. 노동력 수혈 시급한 대구·경북의 과제
□ 이민자 핍박한 호주의 백호주의(白濠主義)오늘날 호주는 미국, 캐나다 등과 함께 대표적인 다민족·다문화 신대륙 이민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적극적 이민정책을 펼친 건 아니었다.호주에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건 1783년부터다. 당시 영국의 죄수 736명과 관리들을 태운 배 13척이 호주로 건너왔다.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소수의 인원이 원주민들의 저항을 받으며 서쪽으로 개척지를 넓혀나갔다. 이후 1816년 영국 정부가 ‘자유 이주자(Free Settlers)’의 호주 입국을 허가했다.1800년대 중반까지 40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호주의 인구는 1851년 ‘골드러시’를 계기로 급속히 팽창해 세계 제1차대전 무렵에는 500만 명에 이르게 된다.호주 대륙은 풍화와 침식이 활발하게 일어나 금광이 지하 깊숙이 묻혀 있지 않다. 대량의 금맥이 대륙 곳곳 지표면에 드러나 있고, 대륙 남부의 따뜻한 기후는 포도주 생산과 농장 운영에 적합했다. 그런 이유로 영국, 미국, 중국, 남태평양 등지에서 이민자가 급증했다.이민자들이 늘어난 만큼 사회적 혼란도 심화됐다. 이민자의 폭동이 종종 발생했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행정시스템은 튼튼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호주 대륙은 엄연한 영국 영토였지만, 본토와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기 때문. 특히 영국이 호주 식민지에 데려온 청나라 출신 중국인 계약 노동자(쿨리) 4만 명 중 여성은 12명에 불과해 심각한 성비 불균형을 드러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회문제를 야기되기도 했다.1851년 호주에서 거대한 규모의 금광이 발견되자 이른바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중국인(당시 청나라)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호주에 유입됐는데 이들은 자국민 중심으로 모였다. 중국인 이민자들이 마을로 밀려들면서 기존의 영국계 중심 호주사회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인 이민자들이 저임금 노동에 종사해 우리들 임금까지 낮추고 있으니 이민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이 같은 아시아인 노동자 유입에 대한 호주 백인들의 반발은 결국 호주 독립으로 이어진다. 물론 호주 자치령의 성립 배경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분명한 건 이민 노동자들에 대한 호주인의 반발도 그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1901년 사실상의 독립을 선언한 호주 자치령은 ‘백인들의 호주를 추구해야 한다’는 백호주의(白濠主義) 정책을 시행해 사실상 아시아인들의 이민을 제한하게 된다. 신대륙 이민국가로 출발한 호주가 역설적이게도 한시적이지만 제한적 이민 정책을 펼친 셈이다. □ 출산율 저하, 인구 위기에 백호주의 탈피한 호주, 다민족 이민국가로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호주였지만, 194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영국과 호주는 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이러한 호주인들의 정체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20세기 초중반, 세계 1차대전과 1930년대의 대공황, 그리고 2차대전 등을 겪으면서다.특히 2차대전에서 호주 본토인 다윈이 일본군에게 폭격을 당하면서 호주인들은 “적은 인구 탓에 이웃 국가의 위협에 유효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커졌다.이 시기부터 호주는 유럽 각지에서 이민 초청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등 적극적 이민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970년대 유럽 국가들과 갈등을 빚던 호주는 아시아·태평양 국가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한다. 1970년 2.86명을 기록했던 호주의 출산율은 꾸준히 하락해 1978년에는 1.95명까지 떨어지게 된다. 인구대체수준 출산율인 2명을 밑돌자 호주사회에선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아시아계 이민을 적극 받아들이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하기에 이른다.이런 과정을 거쳐 호주의 백호주의는 막을 내린다. 호주통계청에 따르면 호주 인구는 1970년 약 1200만 명에서 2022년 2627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 중 820만 명이 이민자다. 전체 인구의 30.7%에 달한다. 이는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15.3%)의 2배가 넘는 수치다. □ 적극적 이민 정책 펼치는 호주… 인구증가로 경제 규모도 확장앞서 살펴봤듯 이민국가로 태동한 호주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한시적으로나마 제한적 이민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고령화와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력 부족 문제에 직면한 후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추진하게 됐다.현재 호주의 이민정책은 기술, 투자, 가족 부문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눠져 있다.투자이민은 만55세 미만의 외국인이 150만 호주달러(약 14억 원)이상을 호주 국채에 투자하고, 225만 호주달러 이상의 개인 재산 증빙, 학력, 영어점수 등의 기타 조건을 충족하면 영주권을 부여하는 제도.기술이민은 전체 이민의 50%를 차지한다. 가장 흔한 이민 방법이다. 영어 점수, 학력, 전문기술 등에 따라 점수가 부여되는 식으로 운영된다. 호주 정부는 그간 주로 기술이민을 통해 노동인구를 늘려왔지만, “비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인력 공백을 메우기엔 그것만으로 모자란다”는 목소리가 계속 제기돼 왔다.이에 따라 최근 ‘SSRM 이민프로그램’이 호주 내에서 주목받고 있다.‘SSRM 이민프로그램’은 비도시지역의 저출산과 인구 고령화, 기존 청년층의 이탈로 인한 노동력 부족과 도심공동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비도시 지역에 3년간 머물게 하는 제도다. 도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의 인구 증가와 지속적 노동력 제공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호주의 전체 이민자 중 SSRM 이민자의 비중은 지난 1997년 2.3%에서 2005년에 20.9%까지 증가했고, 이로 인해 1991∼2001년(10년간) 비도시지역의 이민자 비중 또한 증가(13.7 →16.1%)했다. 또 비도시지역의 신규 이민자들의 평균연령이 32세로 상당히 젊고 이중 79%가 가족과 함께, 28%는 자녀를 동반해 이주함으로써 인구정책 측면에서도 큰 성과를 달성했다. 특히 이들의 고용률이 98%로 집계되고, 지역에서 지속적 체류율 역시 90%에 육박하는 등 인구 증가 효과만이 아니라, 지방소멸 현상을 막는데도 힘을 보태고 있다.여기에 더해 지난해 호주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 유치를 위해 임시 숙련노동(TSS) 비자로 입국하는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30% 인상해 연 7만 달러로 정했다. 복잡한 비자 획득 절차도 단순화했다. 그 결과 지난해 6월 기준 한 해 동안만 50만 명의 이민자가 호주로 유입됐다.여타 선진국들은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지방소멸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호주는 그간 추진해온 적극적 이민정책을 발판 삼아 경제규모를 키우는 한편, 인구 문제에도 비교적 유연하게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영국경제연구소(CEBR)는 호주의 경제규모가 현재 세계 13위에서 2027년엔 11위로 두 계단 올라설 것으로 예상했다.CEBR은 호주가 그동안은 자원을 바탕으로 성장해왔지만, 가장 인기 높은 이민자 국가 중 하나가 되면서 앞으로는 인구증가가 호주 경제력 순위 상승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 전망했다./구경모기자 gk0906@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