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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괴테·모차르트 등 흔적 담긴 명소 모두 복원, 사후에 더 유명

△독일이 독일인을 사랑하기튀빙겐은 독일인이 사랑하는 시인 휠덜린의 도시다. 릴케가 휠덜린을 자신들의 선구자로 여겼고, 철학자 하이데거가 ‘시인의 시인’이라고 할 만큼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튀빙겐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한 유명한 철학자로 헤겔도 있는데, 둘은 신학교 동기로 기숙사도 한 방을 쓸 정도로 친했다. 튀빙겐 신학교 정문에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있다. 그뿐이다. 튀빙겐은 헤겔은 잊고 휠덜린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정신착란증으로 입원했던 정신병원이 있고 그 바로 앞 네카어강가에는 그가 살던 집이 있다. 무려 36년간이나 그를 돌본 목수 짐머의 집이 휠덜린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건재하는데, 지금은 휠덜린박물관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휠덜린길이 있는 건 물론이다. 영면에 든 후 그가 묻힌 공동묘지엔 시들지 않은 꽃과 작은 소품들도 놓여 있으니 여전히 그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았다. 튀빙겐 성당 부근엔 헤르만 헤세가 한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서점이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땐 수리로 문을 닫아 구경할 수는 없었다. 대신 바깥에 헤세의 초상과 그가 지은 책 몇 권을 전시해 두고 있었다. 사실 헤세를 보기 위해서 튀빙겐에서 멀지 않은 도시 칼프를 가려고 했다. 그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의 배경이 되는 도시로, 소설 속 장면이 곳곳에 있고 헤세박물관도 있다기에 꼭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박물관 역시 수리로 문을 닫은 상태라 가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유명인이 남긴 발자취와 흔적을 모두 찾아 보존하여 남기고 시민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공간으로 만들어 두는 독일시민들이었다. 그들은 떠났지만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시민과 함께하고 있었다. 휠덜린박물관과 헤세의 서점은 관광객을 위한 명소라기보다는 시민을 공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괴테가 여행으로 잠시 들러 10일간 머물렀다는 곳도, 약 3년간 직원으로 있었던 헤세의 서점 자취도 없애지 않고 기억하는 시민정신은 뭘까.“괴테가 사랑한 도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크대학이 있는 도시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하이델베르크중앙역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문구다. 독일 문학의 거장이요, 연극감독, 철학자, 식물학자이자 정치인이기까지 했던 괴테의 흔적은 독일 곳곳에서 발견한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해는 우리나라가 주빈국이었기에 많은 문인들이 독일의 작품 낭독회도 했고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출판사가 대거 참석한 큰 국제행사였다. 그때 마침 운좋게도 일행으로 독일을 처음 방문했고, 여러 도시를 다녔다.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박물관도 당연히 들렀는데,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여타 도시에도 이렇게 그를 기억하려는 곳이 많은 줄은 이번에야 알았다. 그가 잠시 머문 호텔, 그가 음식을 먹고 토했다는 식당도 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하이델베르크에는 ‘괴테가 거의 머물 뻔했다’는 글귀를 써 둔 식당도 있단다. 밤늦게 도착해서 찾은 식당에 하필 빈 자리가 없었나 보다. 하이델베르크는 괴테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주 왕래했던, 그래서 더 특별한 곳이다. 과연 하이델베르크를 걷다 보면 괴테가 자주 머물었다는 집에 붙여둔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다. 전 국민의 사랑을 어지간히도 받았고 여전히 받고 있는 괴테였다. 그 길의 남쪽, 또 다른 집에는 철학자 야스퍼스가 1923년 1월부터 1948년 3월까지 3년간 살았다는 표지가 선명하고 같은 골목에는 1817년 1월부터 1818년 9월까지 철학자 헤겔이 살았던 집도 있었다. 그들이 머물고 발 닿는 곳마다 표지를 해서 기억하고 기념하고 아끼는 시민들이 있어 그들은 죽었어도 살아있어 참 좋겠다 싶다. 뮌헨대학교 부근의 릴케의 집을 어렵사리 찾았더니 개조되어 아쉬웠지만 릴케와 그의 연인인 루 살로메가 잠시 살았던 집은 잘 보존되어 있다고 들었다. △오스트리아 모차르트, 프로이드박물관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1756~1791)에게 진심이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는 샛노란색 모차르트박물관으로 꾸며져 관광객들로 항상 문전성시다. 임대아파트였던 이 집의 3층만이 그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6층 건물 전체가 박물관이다.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마카르트 광장에는 1773년 이사해서 7년간 모차르트하우스가 있다. 이 또한 박물관으로 꾸며 악보 등을 전시하거나 간혹 연주회도 하는 장소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 앞엔 모차르트의 동상이 있다. 가까이엔 모차르트가 죽은 후 그의 부인이 경영하였다는 카페가 성업 중이었다. 일부러 찾아갔지만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포기해야했다.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의 정원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슈테판 성당 부근의 골목에 들어가면 그가 빈에 있을 때 1784년부터 1787년까지 거주했던 집도 모차르트하우스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빈모차르트오케스트라가 있어 빈을 찾는 모차르트의 팬이라면 언제든 공연을 볼 수가 있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관광 상품은 모차르트 초콜릿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모차르트의 오스트리아다. 괴테도 이런 명언을 남겼다. “모차르트와 같은 현상은 언제나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기적으로 남는다.”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생리학자, 심리학자, 철학자인 프로이드는 저 유명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다. 20세기의 큰 인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로이드는 빈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 교수로 있다가 빈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꿈의 정신분석을 시도했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곳이 지금은 프로이드박물관이다. 동생이 잘못 찾겠다면서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길을 물었더니 자기 집이 가까이 있다면서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평범한 동네 가운데 있는 박물관은 생가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기에 가능했다. 그의 생애 디오라마는 물론이고 병원 진료실과 상담실, 그의 학문과 논문, 진료 당시의 메모 등등이 모두 전시되어 있어, 마치 지금도 병원을 운영하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1층엔 그의 저서와 정신분석학 관련 서적과 굿즈, 커피도 파는 카페도 있었다. 크지 않은 박물관엔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관람객들이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전시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튀빙겐 부르사가세 18번지엔 홀로코스트 가해자 테오도르 단케너가 태어난 집이며, 그의 만행을 세세히 알려주는 표지. 독일에는 이같은 전범국인 자신들의 만행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곳곳에 있다. △독일인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이번 여행에서 받은 또 하나의 충격은 거리 곳곳에서 발견한 나치의 만행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크지 않은 도시 튀빙겐에서만도 4개나 봤다. 일부러 찾은 것이 아니라 거리를 걷다가 보였고 동생의 설명으로 안 거였다. 네카어강 가운데 섬에서는 큰 나치집회가 열렸다는 표지가 있었다. 지금은 대학교의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튀빙겐 성에서 발견한 표지판의 큰 글씨는 ‘민족사회주의의 과학과 범죄’. 일부 과학자들이 국가사회주의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구체적인 인명까지 엄중하게 밝혀두었다. 휠덜린의 시집을 사기 위해 찾았던 서점 앞에도 있었다. 히틀러의 조직원으로 유대인 살인의 중요한 역할을 한 행적을 쓰고 사진까지 척 붙여놓았다. 나쁜 조상의 잘못된 만행을 인정하고 만천하에 공개하여 그 잘못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이런 독일인의 태도는 같은 제2차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의 그것과 대조되는 거였기에 오히려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피해자가 엄연하게 있음에도 일본은 그들의 만행을 감추고 지우기에 바쁘고 오히려 미화하려 들지 않는가.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이 좀 아쉽다이번 독일과 오스트리아 여행에서 관광지보다는 관심있는 시인이나 예술가의 흔적을 찾게 되면서 다시 새삼 그들의 높은 문화의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름지기 생가는 무조건 박물관으로 보존하고 활용하고 있음을 보면서 문득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이 생각난다. 김동리와 박목월은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 큰 소설가요, 시인이다. 한 도시에 위대한 문인이 두 분이나 났음은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들의 생가가 엄연함에도 문학관을 전혀 엉뚱한 곳, 토함산 자락 불국사 맞은편 한 귀퉁이에 있음은 후인으로서 심히 부끄럽다. 후에 건천의 박목월 생가터는 복원했으나 성건동의 동리 생가터는 그렇지 못해, 가까이에 문학비 건립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으니 심히 속상하다. 동리와 목월이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서 우뚝한데도 타 도시 그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의 문학관보다 더 초라함을 부인할 수가 없다. 모쪼록 경주에 성건동에 동리문학관이 생겨 그의 모든 자료들이 옮겨지고, 박목월의 생가에도 그의 작품과 모든 유품들이 전시되어 제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 경주시민이 갈망하고 있다. 또한 경주엔 그들의 족적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곳을 모두 찾아 간데족족 표지판을 붙이는 시민운동이라도 벌여볼까.글·사진/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끝

2024-07-18

역사·전통에 뿌리 두며 새롭게 시도하는 변화의 힘

△ 현대적 해석의 전통 오페라동생은 클래식의 본 고장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세계적 오페라극장에서의 오페라 감상을 제안했다. 단체여행에선 누리기 힘든 호사니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동생이 6개월 전에 예약해 둔 세 곳의 극장과 2편의 오페라, 교향악단의 공연에 기대가 컸다. 동생은 미리 오페라 공부해 오라고 당부했지만 대구에도 오페라하우스가 있어 ‘토스카’와 ‘투란도트’를 본 적 있다며 동생을 안심시켰다. 드레스코드가 필요하냐 물었더니 청바지에 운동화보다는 원피스가 좋겠지 해 세 벌의 옷과 구두까지 챙겼다.뮌헨국립오페라극장은 1818년에 세워져 독일 3대 오페라하우스로 명성이 높았지만 제2차세계대전 때 전소, 1963년에 외관은 옛 모습으로, 내부는 현대식으로 재건했다. 화려한 레지덴츠궁전과 거리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엔 맥주와 독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식당도 많았다. 시민들의 접근성이 좋은 오페라하우스는 시민과 함께 하는 시민의 문화공간이었다. 생전의 훈데르트 바서 모습. 빈의 쿤스트하우스 미술관 2층에 걸린 사진을 찍었다. 준비해 간 원피스에 스카프까지 둘러 한껏 차려입었다. 좀 일찍 가서 오페라하우스 건너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며 입장시간을 기다렸다. 멋지게 차려입은 커플들이 팔짱을 끼고 오페라하우스로 가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남녀도 없지는 않았지만 나이 지긋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성장(盛裝)한 모습이었다. 빈 국립오페라극장, 혹은 오케스트라나 오페라에 대한 묵언의 예의일까. 여기서 갑자기 최근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광기같은 트로트 팬덤 문화가 머릿속을 스친 것은 왜일까.음악과 함께 무대가 열리자 깜짝 놀랐다. ‘토스카’는 1800년의 로마가 배경인 걸로 알고 있는데 간소한 현대식 무대, 등장인물들의 현대식 복장은 정말이지 생경했다. 스토리를 대강 알고 있으니 망정이었다. 무대와 등장인물이 오히려 훌륭한 음악을 방해한다는 느낌 탓에 눈감고 듣기만 할까 생각했다. 음악과 노래가 없다면 영락없이 연극이었다. 우리나라 공연에서 인물들의 과장된 서양식 분장이 거슬려 서양 주인공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기대한 나는 당혹했다.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 나와 남편과는 달리 동생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무대에 몰입한 듯했다. 1막이 끝나자, 실망스러우면 나갈까 기색을 살피는 동생에게 2막과 3막의 유명한 아리아는 듣겠다며 주저앉혔다. 가까이 몇몇 나이든 관객들의 실망스럽다는 대화를 엿들었던지 인터미션 후엔 빈자리도 생길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웬 걸, 그런 일은 없었다. 여전히 객석은 꽉 찼다. 2막에서는 흑백무성영화도 한참 나왔는데 도통 맥락이 안 잡혀 전통오페라를 완전히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거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2시간이 훌쩍 넘는 공연 후 커튼콜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20여 분 이상의 갈채로 새로운 버전의 오페라에 아낌없는 성원과 찬사를 보냈다. 감독의 과감한 연출 시도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박수리라. 오스트리아의 빈 국립오페라극장은 세계 3대 오페라하우스다. 유명한 빈 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전속으로 둔 전통의 극장이다. 해마다 정초가 되면 빈 필의 신년연주와 ‘라데츠키 행진곡’을 찾아 들었던 나는 빈 국립오페라극장을 유난히 동경했다. 저기 저 자리에서 새해를 열면 얼마나 신날까. 이 극장 역시 1945년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시민들의 자발적 성금으로 10년만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음악도시를 반드시 재건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열정과 희망에 따라 고색창연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7월과 8월을 제외한 모든 달, 모든 날에 잡힌 공연 달력을 보고, 빈 시민의 참으로 두터운 음악 사랑이 부러웠다.빈에서는 제대로 된 시대극을 기대했다. ‘투란도트’는 고대 중국이 배경이니 서양인 배우들의 동양인 분장과 무대의상이 궁금했다. 그러나 연두색 정장을 입고 등장하는 합창단의 첫 장면에서부터 알아차렸다. 이 공연 역시 현대적 버전의 오페라인 것을. 무대 장치가 거의 없는 연극 무대였지만 이미 뮌헨의 경험이 있으니 놀라는 대신 즐겼다. 오케스트라와 성악가의 연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그런가 하면 빈 모차르트오케스트라는 오히려 18세기 모차르트 시대를 재현한다. 모든 연주자는 한결같이 흰 가발을 쓰고 18세기 궁중복장, 지휘자는 빨간 모차르트 복장이었다. 연주곡은 모두 유명한 모차르트의 넘버였고, 앵콜곡으로 관객과 함께 즐긴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에 나는 잠시 흥분했고 황홀했다. 순전히 관광객을 위해 특화된 관광상품은 관광객을 열광케 했다. 관객 중 상당수가 중국인으로 보였다. 그래선지 좌석 앞 모니터엔 중국어 자막도 있었다. △ 고건축의 도시에서 만난 현대적 건축물빈에는 쇤브룬 궁전, 벨베데레 궁전, 호프부르크 왕궁, 슈테판 대성당, 성페터 성당 등 수많은 역사유적지와 미술관, 박물관에서 유명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에곤 쉴레(1890~1918)도 있지만 그 계보를 잇는 전위적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 바서(1928~2000)가 리모델링한 장난감 같은 건축물도 만날 수 있다. 빈은 전통을 지극히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도시이지만 동시에 전통을 거부하고 비튼 예술가를 낳고 포용하고 인정한 도시이기도 하다. 빈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거나 혼재하면서 미래의 문화유산이 될 예술을 토닥이고 쓰다듬고 어루만져주는 도시였다. 쿤스트하우스빈은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친환경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직선과 네모는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라며 극도로 혐오했다. 네모난 창문은 장난스러운 그림으로 가렸으며, 자연이나 식물의 모양을 닮은 비정형의 건축물과 실내디자인은 독특하되 아름답고, 기괴하지만 매력적이다. 슈테판성당 앞에는 훈데르트 바서를 오마주한 호텔도 있었다. △ 문화의 힘이 국력이다빈 국립오페라극장은 외곽지의 관광지로 가는 시티투어 버스가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노란버스는 싸지만 한국어 해설이 없고, 빨간 버스는 비싸지만 한국어 해설을 들을 수 있단다. 과연 우리가 탄 노란버스엔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어, 그리스어, 터키어, 중국어, 일본어도 있는데 한국어는 없었다. 빈 오페라극장의 좌석 앞엔 외국어 자막 모니터가 있다. 거기에도 중국어와 일본어는 있는데 한국어는 없었다. 남편은 국력은 이런 데서 알 수 있다며 분개했다. 극장 가까운 곳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단 한국문화원을 발견하자 뭐하는 문화원인지 중얼거렸다. K-문화를 자랑해대면서, 정작 이런 것 하나도 못 챙기는 문화외교에 무력감을 느꼈다.김구 선생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우리나라가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를 바랬다. 경제력이나 군사력보다 문화의 힘을 가져야 아름다운 나라라고 했다. 문화의 힘은 오랜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새롭게 시도하고, 변화하고, 고뇌하는 예술가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시민의 힘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뮌헨과 빈이 아름다운 도시인 이유는 시민들의 자발적 동의에서 얻어지는 영향력, 예술과 문화라는 소프트파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다.글·사진/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4-07-11

500년 역사 인재 요람서 시민의 ‘대학거리’를 꿈꾸다

튀빙겐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고 강한 비도 내렸다. 당연히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상관없었다. 동생이 든든하게 옆에 있었고, 여기서 4일을 머물 것이었고, 이 도시와 주변의 도시까지도 둘러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단했던지 단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청량한 공기가 반겼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단정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남편은 20여 년 전 1년간 살았던 도쿄와 매우 비슷하다고 했고 나도 동의했다. 비온 뒤라 적당히 습했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정원이며 가로의 화단과 나무의 수종까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었다. △튀빙겐 시민들의 여유와 자긍심아침을 먹은 후 튀빙겐 시내로 버스를 타고 갔다. 마침 금요일이라 시청 앞 광장에서 농부들이 직접 나와 채소며 육류, 소시지, 치즈 등을 파는 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직접 식사를 해먹을 작정이었다. 집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오는 버스, 기차와 버스를 탈 수 있는 티켓을 동생이 미리 사두었고, 각자 소지하고 있었지만, 거기 머무는 동안 티켓을 지갑에서 꺼낸 적이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사회적 신뢰가 탄탄하다는 느낌이었다.시내까진 약 15분 정도 걸렸다. 거기 머무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을 버스로 다니면서 금방 길을 익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버스들이 튀빙겐대학교를 가로질러 다닌다는 사실에 놀랐다. 튀빙겐은 마치 도시 전체가 대학 구내라는 느낌이었다. 버스로 대학 투어를 한다는 느낌, 대학 본부 건물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고, 코너를 돌면 도서관이 있었다. 튀빙겐대학교가 1477년 설립되었다 하니 5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가진 이 대학교를 일상의 공간으로 누리는 시민들에게도 크나큰 자긍이 되리라. 동생이 가리키는 이런저런 대학 건물들이 시민들에게는 그저 내가 사는 동네일뿐이라는 건 얼마나 큰 자랑이자 축복일까. 철옹성까지는 아니지만 대학 공간이 왠지 근접하기 어려운 곳인 우리의 대학이 안쓰럽다.강 위 다리에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비온 뒤라선지 누런 흙탕물이 제법 거칠게 흐르는 네카어 강이었다. 플라타너스나무가 섬의 양 옆을 에워싸며 1km나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는 좁고 기다란 섬이 있었다. 강 건너 대학이나 구도심의 아름다운 집들을 올려다보면서 걷는 것으로 튀빙겐의 첫 여행이 시작되었다.야트막한 언덕 위의 11~12세기의 건축물인 호엔튀빙겐성으로 갔다. 튀빙겐대학교 박물관으로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유적들이 전시되어있었고, 무려 고고학 전공 박사가 상세하고 전문적인 해설을 해주었다.고성으로 오르는 길옆 옛 집들은 식당이거나 카페였다. 더러는 학생들이 세 들어 산다고 했다. 인구 10만도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튀빙겐, 인구의 약 25%가 학생이고 대학 관계자를 포함하면 40%를 차지한다고 했다. 시민의 평균연령이 35세 정도로 젊은 도시로 과연 대학도시였다. 튀빙겐에는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온 학생들이 많아, 시민들은 붙임성있고 개방적이라고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맞는 말인 듯했다. 대학을 도시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일상을 사는 시민들의 여유와 자긍심이 보여 부러웠다. 단 며칠이지만 만난 시민들은 온화하되 유쾌했으며 시장은 북적거렸으나 소란스럽지 않았다. 치즈를 팔고 사는 사람과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모두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단 100g 치즈를 사기 위해 10개 이상의 치즈를 맛보여주며 맛보며 일상 대화는 끝이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먹은 ‘학식’하이델베르크 역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교를 가진 도시이며 뛰어난 학자와 시인들이 사랑한 도시였다. 대학 도시다운 분위기를 충분히 맛볼 수 있는 도시다. 물론 고성과 박물관 등의 볼거리도 많으며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으로 미국에서 유명세를 타면서 더욱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하이델베르크엘 도착하면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가는 리프트를 줄지어 기다려 타고 올라간다. 성에서 내려다본 구시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조망하기에도 딱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성을 둘러보는 데만 2시간 이상이 걸릴 정도로 볼거리도 많다. 성내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와인술통, 약사박물관도 있다. 전쟁과 낙뢰, 화재로 파괴된 성을 일부 복원했고, 지금도 복원 중이지만, 복원을 보류한 채 그대로 방치해 둔 고성의 전경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오랫동안 머물렀다.시내로 내려오자마자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갔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학생식당(멘자·Mensa)은 홀은 크고 값은 싸서 학생들에겐 성지같은 곳인데, 일반인도 식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학생보다는 비싼 값이지만 바깥 어떤 식당보다도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단다. 뷔페 형식으로 원하는 음식을 담으면 무게로 계산을 했다. 홀 크기도 어마어마해서 빈자리가 있지만 바깥에도 식탁이 많았다. 학생들 틈에 앉아 여유롭게 ‘학식’을 즐겼다. 우리나라의 대학 중에도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학생식당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포스텍도 예전에는 시민 접근이 가능한 카페테리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학생식당 바로 옆은 하이델베르크 인문대 건물이었고, 이곳저곳 어슬렁거리면서 대학 구경을 했다. 이 대학 역시 캠퍼스와 시내의 구분이 없어 도서관을 찾으러 갔다가 카페를 마주치고, 학교 뒤쪽을 나오면 유명한 크리스마스마켓을 만난다. 학교 건물을 쭉 따라 독일에서 가장 긴 골목을 거닐면서 곳곳에 표지된 유명인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괴테도 헤겔도 이 골목에서 머물며 이 길을 걸었다. △뮌헨대학교 부근 슈바빙거리뮌헨대학교는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대학교로 노벨상 수상자를 43명이나 배출한 공립연구 중심종합대학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뮌헨대학교는 슈바빙으로 먼저 알려졌다. 뮌헨대학교를 잠시 유학했던 수필가 전혜린 덕분이었다. 동생은 우리의 요구대로 뮌헨대 근처 레오폴드거리부근의 숙소를 맞춤맞게 찾았다. 숙소 바로 앞의 영국정원, 슈바빙거리를 완벽하게 누렸다. 슈바빙은 우리나라의 대학촌 정도라 생각하면 된다. 대학생들이 즐길 만한 장소가 즐비했다. 실제 거리에서 만난 시민과 잠시 얘기 나눈 동생은 이분도 맥주 마시고 싶으면 슈바빙으로 간다고 알려주었다. 뮌헨의 마지막 밤엔 우리도 슈바빙의 한 호프집에서 맥주를 즐겼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우리나라 지방대학을 생각한다대학을 가진 도시는 축복이다. 그 대학이 크든 작든 중요하지 않고, 대학의 유명세도 그닥 상관없다.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학이 있어 그저 자랑스러울 뿐이다. 독일의 대학도시에서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그러면서 떠올린 우리의 현실은 뼈아프다. 지방은 공동화되어가고, 지방의 대학 또한 고사 직전이다. 지방의 광역정부와 기초단체도 안간힘을 쓰지만 ‘서울로 서울로’의 이동 욕구, 진학 욕구는 가속화되고 있다. 인구 10만도 안되는 도시에 500년이 넘는 역사의 대학이 있고, 시민과 함께 하는 학생식당이 존재하고, 시민들이 즐겨 찾는 대학거리를 왜 우리는 만들 수 없을까.글·사진/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4-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