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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모차르트 등 흔적 담긴 명소 모두 복원, 사후에 더 유명

등록일 2024-07-18 19:24 게재일 2024-07-19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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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소프트파워<br/>&lt;3&gt; 그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
튀빙겐 네카어강변의 휠덜린탑. 정신병을 앓은 휠덜린은 이 집에서 35년을 살았다. 지금은 휠덜린박물관.
튀빙겐 네카어강변의 휠덜린탑. 정신병을 앓은 휠덜린은 이 집에서 35년을 살았다. 지금은 휠덜린박물관.

△독일이 독일인을 사랑하기

튀빙겐은 독일인이 사랑하는 시인 휠덜린의 도시다. 릴케가 휠덜린을 자신들의 선구자로 여겼고, 철학자 하이데거가 ‘시인의 시인’이라고 할 만큼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튀빙겐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한 유명한 철학자로 헤겔도 있는데, 둘은 신학교 동기로 기숙사도 한 방을 쓸 정도로 친했다. 튀빙겐 신학교 정문에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있다. 그뿐이다. 튀빙겐은 헤겔은 잊고 휠덜린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정신착란증으로 입원했던 정신병원이 있고 그 바로 앞 네카어강가에는 그가 살던 집이 있다. 무려 36년간이나 그를 돌본 목수 짐머의 집이 휠덜린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건재하는데, 지금은 휠덜린박물관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휠덜린길이 있는 건 물론이다. 영면에 든 후 그가 묻힌 공동묘지엔 시들지 않은 꽃과 작은 소품들도 놓여 있으니 여전히 그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았다.

 

휠덜린 정신병으로 입원했던 병원

헤세 어릴 적 아르바이트 했던 서점

괴테가 잠시 머물렀던 호텔·식당 등

명사들 체취 스민 곳마다 관광지화

튀빙겐 성당 부근엔 헤르만 헤세가 한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서점이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땐 수리로 문을 닫아 구경할 수는 없었다. 대신 바깥에 헤세의 초상과 그가 지은 책 몇 권을 전시해 두고 있었다. 사실 헤세를 보기 위해서 튀빙겐에서 멀지 않은 도시 칼프를 가려고 했다. 그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의 배경이 되는 도시로, 소설 속 장면이 곳곳에 있고 헤세박물관도 있다기에 꼭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박물관 역시 수리로 문을 닫은 상태라 가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유명인이 남긴 발자취와 흔적을 모두 찾아 보존하여 남기고 시민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공간으로 만들어 두는 독일시민들이었다.

헤르만 헤세가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튀빙겐의 서점. 문이 닫혀있지만 입구엔 그의 사진과 책이 전시돼 있다.
헤르만 헤세가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튀빙겐의 서점. 문이 닫혀있지만 입구엔 그의 사진과 책이 전시돼 있다.

그들은 떠났지만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시민과 함께하고 있었다. 휠덜린박물관과 헤세의 서점은 관광객을 위한 명소라기보다는 시민을 공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괴테가 여행으로 잠시 들러 10일간 머물렀다는 곳도, 약 3년간 직원으로 있었던 헤세의 서점 자취도 없애지 않고 기억하는 시민정신은 뭘까.

“괴테가 사랑한 도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크대학이 있는 도시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하이델베르크중앙역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문구다. 독일 문학의 거장이요, 연극감독, 철학자, 식물학자이자 정치인이기까지 했던 괴테의 흔적은 독일 곳곳에서 발견한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해는 우리나라가 주빈국이었기에 많은 문인들이 독일의 작품 낭독회도 했고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출판사가 대거 참석한 큰 국제행사였다. 그때 마침 운좋게도 일행으로 독일을 처음 방문했고, 여러 도시를 다녔다.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박물관도 당연히 들렀는데,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여타 도시에도 이렇게 그를 기억하려는 곳이 많은 줄은 이번에야 알았다. 그가 잠시 머문 호텔, 그가 음식을 먹고 토했다는 식당도 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하이델베르크에는 ‘괴테가 거의 머물 뻔했다’는 글귀를 써 둔 식당도 있단다. 밤늦게 도착해서 찾은 식당에 하필 빈 자리가 없었나 보다.

하이델베르크대학 부근의 건물. 괴테가 오면 이 집에서 머물렀다는 표지판이 있다.
하이델베르크대학 부근의 건물. 괴테가 오면 이 집에서 머물렀다는 표지판이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괴테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주 왕래했던, 그래서 더 특별한 곳이다. 과연 하이델베르크를 걷다 보면 괴테가 자주 머물었다는 집에 붙여둔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다. 전 국민의 사랑을 어지간히도 받았고 여전히 받고 있는 괴테였다. 그 길의 남쪽, 또 다른 집에는 철학자 야스퍼스가 1923년 1월부터 1948년 3월까지 3년간 살았다는 표지가 선명하고 같은 골목에는 1817년 1월부터 1818년 9월까지 철학자 헤겔이 살았던 집도 있었다. 그들이 머물고 발 닿는 곳마다 표지를 해서 기억하고 기념하고 아끼는 시민들이 있어 그들은 죽었어도 살아있어 참 좋겠다 싶다. 뮌헨대학교 부근의 릴케의 집을 어렵사리 찾았더니 개조되어 아쉬웠지만 릴케와 그의 연인인 루 살로메가 잠시 살았던 집은 잘 보존되어 있다고 들었다.

모차르트의 생가는 전체가 박물관

연간 수백만명씩 관광객 불러들여

나치 만행도 꼼꼼히 남겨 후대 교훈

△오스트리아 모차르트, 프로이드박물관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1756~1791)에게 진심이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는 샛노란색 모차르트박물관으로 꾸며져 관광객들로 항상 문전성시다. 임대아파트였던 이 집의 3층만이 그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6층 건물 전체가 박물관이다.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마카르트 광장에는 1773년 이사해서 7년간 모차르트하우스가 있다. 이 또한 박물관으로 꾸며 악보 등을 전시하거나 간혹 연주회도 하는 장소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 앞엔 모차르트의 동상이 있다.

가까이엔 모차르트가 죽은 후 그의 부인이 경영하였다는 카페가 성업 중이었다. 일부러 찾아갔지만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포기해야했다.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의 정원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튀빙겐 시립묘지 안에 있는 휠덜린의 묘지. 시민들이 자주 찾는 듯 작은 꽃들도 심겨있다. 우리도 들꽃으로 만든 작은 꽃다발을 놓았다.
튀빙겐 시립묘지 안에 있는 휠덜린의 묘지. 시민들이 자주 찾는 듯 작은 꽃들도 심겨있다. 우리도 들꽃으로 만든 작은 꽃다발을 놓았다.

슈테판 성당 부근의 골목에 들어가면 그가 빈에 있을 때 1784년부터 1787년까지 거주했던 집도 모차르트하우스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빈모차르트오케스트라가 있어 빈을 찾는 모차르트의 팬이라면 언제든 공연을 볼 수가 있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관광 상품은 모차르트 초콜릿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모차르트의 오스트리아다. 괴테도 이런 명언을 남겼다. “모차르트와 같은 현상은 언제나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기적으로 남는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생리학자, 심리학자, 철학자인 프로이드는 저 유명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다. 20세기의 큰 인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로이드는 빈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 교수로 있다가 빈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꿈의 정신분석을 시도했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곳이 지금은 프로이드박물관이다.

△빈에 있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생가는 지금은 프로이드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빈에 있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생가는 지금은 프로이드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동생이 잘못 찾겠다면서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길을 물었더니 자기 집이 가까이 있다면서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평범한 동네 가운데 있는 박물관은 생가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기에 가능했다.

그의 생애 디오라마는 물론이고 병원 진료실과 상담실, 그의 학문과 논문, 진료 당시의 메모 등등이 모두 전시되어 있어, 마치 지금도 병원을 운영하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1층엔 그의 저서와 정신분석학 관련 서적과 굿즈, 커피도 파는 카페도 있었다. 크지 않은 박물관엔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관람객들이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전시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튀빙겐 부르사가세 18번지엔 홀로코스트 가해자 테오도르 단케너가 태어난 집이며, 그의 만행을 세세히 알려주는 표지. 독일에는 이같은 전범국인 자신들의 만행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곳곳에 있다.
튀빙겐 부르사가세 18번지엔 홀로코스트 가해자 테오도르 단케너가 태어난 집이며, 그의 만행을 세세히 알려주는 표지. 독일에는 이같은 전범국인 자신들의 만행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곳곳에 있다.

△독일인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

이번 여행에서 받은 또 하나의 충격은 거리 곳곳에서 발견한 나치의 만행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크지 않은 도시 튀빙겐에서만도 4개나 봤다. 일부러 찾은 것이 아니라 거리를 걷다가 보였고 동생의 설명으로 안 거였다. 네카어강 가운데 섬에서는 큰 나치집회가 열렸다는 표지가 있었다.

지금은 대학교의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튀빙겐 성에서 발견한 표지판의 큰 글씨는 ‘민족사회주의의 과학과 범죄’. 일부 과학자들이 국가사회주의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구체적인 인명까지 엄중하게 밝혀두었다. 휠덜린의 시집을 사기 위해 찾았던 서점 앞에도 있었다. 히틀러의 조직원으로 유대인 살인의 중요한 역할을 한 행적을 쓰고 사진까지 척 붙여놓았다.

나쁜 조상의 잘못된 만행을 인정하고 만천하에 공개하여 그 잘못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이런 독일인의 태도는 같은 제2차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의 그것과 대조되는 거였기에 오히려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피해자가 엄연하게 있음에도 일본은 그들의 만행을 감추고 지우기에 바쁘고 오히려 미화하려 들지 않는가.

생가 놔두고 엉뚱한 곳에 기념관

경주 동리목월문학관 아쉬움 남아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이 좀 아쉽다

이번 독일과 오스트리아 여행에서 관광지보다는 관심있는 시인이나 예술가의 흔적을 찾게 되면서 다시 새삼 그들의 높은 문화의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름지기 생가는 무조건 박물관으로 보존하고 활용하고 있음을 보면서 문득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이 생각난다. 김동리와 박목월은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 큰 소설가요, 시인이다. 한 도시에 위대한 문인이 두 분이나 났음은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들의 생가가 엄연함에도 문학관을 전혀 엉뚱한 곳, 토함산 자락 불국사 맞은편 한 귀퉁이에 있음은 후인으로서 심히 부끄럽다.

후에 건천의 박목월 생가터는 복원했으나 성건동의 동리 생가터는 그렇지 못해, 가까이에 문학비 건립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으니 심히 속상하다. 동리와 목월이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서 우뚝한데도 타 도시 그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의 문학관보다 더 초라함을 부인할 수가 없다. 모쪼록 경주에 성건동에 동리문학관이 생겨 그의 모든 자료들이 옮겨지고, 박목월의 생가에도 그의 작품과 모든 유품들이 전시되어 제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 경주시민이 갈망하고 있다. 또한 경주엔 그들의 족적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곳을 모두 찾아 간데족족 표지판을 붙이는 시민운동이라도 벌여볼까.

글·사진/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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