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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15) 이육사 `광인의 태양`

치열한 광인의 삶, 의열단 훈련의 풍경광인의 태양 ………………………………………………………………………………… 이육사 분명 라이플선을 튕겨서 올라그냥 화화(火華)처럼 살아서 곱고오랜 나달 연초(煙硝)에 끄슬린얼굴을 가리면 슬픈 공작선(孔雀扇)거치른 해협마다 흘긴 눈초리항상 요충지대를 노려가다이육사의 `광인의 태양`은 그의 항일투쟁 경험이 구체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에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라이플선`, `연초`, `요충지대` 등의 어휘가 등장한다. 이것은 일종의 군사용어다.`라이플`은 라이플(rifle) 총으로서, 총신(銃身) 안에 나사 모양의 홈을 새겨 탄알이 회전하면서 날아가도록 만든 총을 가리킨다. 라이플선은 총신(銃身) 안에 새겨진 나선 모양의 홈을 말하는데, 이것 때문에 명중률이 높고 사정거리가 늘어난다. `튕겨서 올라`라는 표현은 이 라이플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용수철과 유사하게 생겼기 때문이다.또한 `연초`는 화약 혹은 화약의 폭발에 의해 생기는 연기를 말한다. 연초는 앞에서 말한 라이플에서 총알이 발사하면서 생기는 화약연기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요충지대`는 지세가 험하여 적을 막고 자기편을 지키기에 편리한 지대를 말한다.이런 어휘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육사의 체험 때문이다. 육사는 1923년 10월에 의열단에서 만든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간다.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이 학교는 중국정부의 도움으로 중국 남경에 세워졌는데, 육사는 제1기로 입학하였다. 이 학교의 교장은 바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다.이 학교에서 육사는 6개월 동안 각종 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외에서 활약하게 된다. 교육 내용은 정치학, 사회학 같은 정치과목과 `사격교범`, `폭탄제조법` 등의 군사과목, 그리고 `기관총조법`, `실탄사격` 같은 실습과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사는 이 과정을 훌륭하게 수료한 군사간부였다. 또한 증언에 따르면 육사는 권총 사격에 있어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따라서 이 시의 광인은 어떤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비밀요원으로서 육사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라이플선에서 튕겨 올라 망설임 없이 불꽃처럼 살아가는 치열한 존재이다. 이런 삶은 불꽃처럼 격렬하고 화려하기 때문에 고울 수밖에 없다. `아리랑`에서 감동적으로 그려진 의열단원의 불꽃과 같은 삶을 생각해보면 이 구절의 의미가 선명해진다.이 광인은 오랜 시간 동안 연초(烟硝), 즉 화약의 폭발에 의해 생기는 연기 속에서 단련되는 존재이다. 군사훈련 중에 그을린 얼굴에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릴 때, 그 손은 공작선이 된다. 공작선은 조선 시대에 나라의 의식에 쓰던 부채로, 붉은 빛으로 공작을 화려하게 그린 것이다. 햇빛을 가린 손바닥이 초라해서 슬픈 것이긴 하지만, 삶의 치열함 속에서 그것은 공작선처럼 곱고 화려한 것일 수밖에 없다.불꽃처럼 격렬한 삶을 선택한 사람은 자신이 피할 수도 있는 극한적 상황을 끝내 피하지 않고, 삼엄한 경계가 끊이지 않는 요충지대를 `항상` 의도적으로 `노려가는` 존재이다. 자신을 절대 극한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애쓰는 자학에 가까운 준열함이 이런 표현에 잘 나타난다.`항상`이라는 강렬한 부사가 등장한 것도 이 준열함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이제 왜 이런 존재를 광인이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일부러 극한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 정신의 준열함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또 흉내 낼 수도 없는 정신적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지의 인간이 광인으로 불러지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육사가 `광인의 태양`을 발표한 것은 1940년 4월이다. 이때면,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제의 억압과 약탈이 심해지던 시기이다. 내선일체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창씨개명이라는 유례없는 저질 식민지 정책이 강요되던 시기이다.시국을 비판하는 작품이 자취를 감추고 친일파시즘문학이 창궐하던 이때, 육사는 이 시를 발표하였다. 이런 위험한 시기에 이런 위험한 작품을 발표한 이육사는 과연 이 시대의 광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태양처럼 찬란한 광인이다. 끝(경북대 국문과 교수)

2011-04-21

(14) 백석 `북방에서`

북방이라는 위대한 공간에서 부르는 노래 북방에서 …………………………………………………………………………………… 백석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나는 그때자작나무와 익갈나무의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갈대와 장풍의 붙들던 말도 잊지 않었다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던 것도쏠론이 십리 길을 따라 나와 울던 것도 잊지 않었다 (후략)백석의 `북방에서`는 이육사의 `광야`와 더불어 `숭고`를 성취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도 `광야`처럼 태초와 유사한 `아득한 옛날`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서 시적 화자는 그런 태곳적 시간을 떠나왔다. 그 오랜 여행을 이 시는 기록하고 있다.아득한 옛날에 시적 화자는 옛 하늘과 땅을 떠난다. 그곳의 짐승들과 자연물의 만류를 뿌리치고, 여러 부족의 아쉬운 전송을 받지만, 시적 화자는 그 이별에서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느끼지 않고 수많은 시간을 거쳐 먼 앞대, 즉 남쪽을 향해 떠난다. 그리고 또 긴 시간이 지나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에 그는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다시 옛 하늘과 땅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옛 자취도 없고 자랑삼을 만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고, 화자는 절망한다. 이것이 이 시의 뼈대이다.그가 떠나온 이 `아득한 옛날`은 무엇일까. 이 시간은 부여와 숙신, 발해, 여진, 요, 금이라는 역사상의 국가나 민족명과 동일시된다. 또 여기에는 오로촌(Orochon)족. 북방 퉁구스계의 한 종족도 등장하고, 쏠론, 즉 남방 퉁구스족의 일파인 색륜족도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비슷한 지역에 사는 종족이다.이들 민족과 국가는 그러나 동일 시간대가 아니다. 그 시간은 기원전에서부터 12세기에 이르는, 수많은 국가가 소멸되고 탄생을 거듭했던 시간이며, 많은 종족이 새로 역사에 등장하고 사라진 시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의 흐름은 국가와 종족의 명칭이 뒤섞여 있어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것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그 공간은 바로 `옛 한울과 땅`으로 명명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자연과 그 속에 놓인 모든 생물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성한 공간이다. 시인은 왜 이곳을 이토록 신성한 공간으로 표현하였을까.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터전으로 여겨지는 곳이기 때문이다.이곳은 바로 우리 민족의 시원지이자 주요 활동영역이었지만 신화 속에만 남아 있는 만주 지역이다. 특히 이 작품에 인용된 고유명사들은 모두 만주에서 활동한 국가와 민족명이다. 이 공간은 흥안령과 음산산맥, 아무우르(흑룡강), 숭가리(송화강)를 포함하고 있는 광대한 지역이다. 이육사가 `신성한 광야`로 부를 수 있는 곳도 이곳이 아니면 안 된다.그렇다면 이 시는 단순한 개인적인 감상을 적은 서정시가 아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적 화자의 이동 방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적 화자는 부여, 숙신, 발해 등을, 아무우르와 숭가리 등을 떠나 `먼 앞대`를 향하여 왔다고 한다. 남쪽이라는 의미의 `앞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시적 화자의 경로가 바로 우리 민족의 이동 경로와 일치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성스러운 장소인 민족의 태반 즉 만주벌판은 그런 원형 상징을 심층 내면에 지니고 있는 시적 화자에게 있어서 민족사를 구성하는 태초의 신성성을 지닌 곳이 된다. 바로 이 점이 `광야`와 `북방에서`의 시공이 모두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유이다. 원형 상징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서거나 그곳을 생각하면 그 누구라도 그런 신성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백석이 `북방에서`에서 만주를 이렇게 숭고하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을 떠돌며 그곳에 남아있는 우리 선조의 신성성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1940년경에 서울의 신문사를 그만 두고 만주로 떠난다. 그는 여러 일을 하며 만주 일대를 떠돌다 해방이 되어서야 고향 정주로 돌아간다.이 시는 바로 이 만주 체험에서 나온 웅장한 작품이다. 짧지만 웅대한 서사시적 풍모를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원형적인 서사시의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질곡을 극복하기 위한 백석 나름의 고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국수주의적 민족감정으로부터 미적 거리를 유지하며 도달한 시적 수준이 돋보이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경북대 국문과 교수)

2011-04-14

(1) 백석의 `국수`

국수 한 그릇에 가득한 축제의 흥겨움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내려 메기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중략) `근대화`는 오랫동안 우리의 화두였다. 개화기부터 국가의 모든 목표는 오로지 이 근대화 하나에 맞추어졌다. 경제나 정치는 물론, 교육, 문화도 근대화가 최고의 목표 중의 하나였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근대화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도달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육체적인 허기가 아니라 정신적인 허기다. 숨가쁘게 근대화를 향해 달려오면서 우리는 무엇을 놓친 것일까. 백석의 `국수`는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백석의 `국수`는 국수를 예찬하는 시이다. 이때 국수를 `평양지방의 토속음식인 평양냉면`(고형진)으로 보기도 하고, `메밀가루로 빚은 국수`(이숭원)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조풍연이 신문에 발표한 `식도락`이란 글에, “서울 이남 사람은 `냉면`이라고 하지만 평안도에서는 `냉면`은 따로 없고 그냥 `국수`라는 것이 곧 냉면이다.”고 한 것을 보면, 두 가지 말이 다 맞는 셈이다. 최남선은 `조선상식`이란 책에서 국수는 주로 메밀로 만든다고 하고, 평안도 지역의 “국수의 발달은 화전민 생활에서 유래함”이라 하였다. 메밀은 원래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는 구황식물인데, 평안도 지역 특성상 메밀을 많이 키울 수밖에 없고 당연히 메밀을 이용한 음식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쪽에는 비교적 토질이 비옥하고 평야가 많기 때문에 굳이 메밀을 키울 필요가 없어서 “국수 숭상”의 필요성도 사라졌다고 한다. 백석의 `국수`는 바로 이 “국수 숭상”의 풍습을 알 때 더 깊이 이해된다. 그럴 때 “외따른 산 옆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자라는 것이 바로 메밀이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 더 확인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산멍에 같은 분틀”이라는 말이다. 산멍에는 큰 구렁이를 말하고, 분틀은 국수를 만드는 국수틀을 말한다. 분틀을 큰 구렁이처럼 본 것은 아마도 손잡이 모습이 구렁이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래 사용하면 손때가 묻어 뱀의 비늘처럼 반짝이지 않겠는가. 국수는 바로 이 분틀을 타고 내려온다. 평안도에는 국수를 자주 먹기 때문에 집집마다 분틀을 두고, 국수를 할 때면 솥 위에 걸고 국수를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으로 바로 뽑아내었다. 그리고 이 분틀은 많은 힘이 필요하므로 한 사람의 힘으로 사용하기 힘들다. 그래서 어른과 애들이 함께 힘을 합쳐 축제 분위기를 내는 것이다. 이런 풍경을 그린 그림을 보면 왜 국수를 먹는 날이 축제의 날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백석 시인이 이 국수를 대하는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시인은 국수를 시에서 직접 말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라 부르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것`이라 부른다. 국수라는 말은 제목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왜 이렇게 하였을까. 이것은 국수를 신성한 어떤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국수는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부터 내려온 것이며, 그래서 국수를 먹는 날은 온 마을이 “구수한 즐거움”에 싸여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되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함부로 이름 부를 수 없다. 만일 이 시에서 `이것` 대신에 국수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썼다면 국수의 신성성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시의 수준도 형편없어질 것이다. 이 국수는 공동체의 축제, 그 속에서 하나가 된 우리 조상들의 신성한 삶을 나타내는 음식이다. 우리는 국수는 이어받았으나 국수에 담긴 그 정신은 버리고 말았다. 근대화를 통해 근대의 세계로 넘어온 우리는 음식 하나에도 스며 있는 따스한 공동체 정신, 축제 속에서 하나 된 즐거움을 미처 챙겨오지 못하였다. 백석의 `국수`는 우리가 바로 이것을 우리가 잃어버렸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문득 국수 그릇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이런 깊은 의미 때문일 것이다. 국수를 먹으면서 옛 조상의 그 마음을 한 번 짐작해볼 일이다. 박현수 교수 약력시인. 문학평론가. 경북 봉화 출생. 1992년 한국일보에 `세한도`로 등단. 시집으로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위험한 독서`, 평론집 `황금책갈피` 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 시인상 수상. 현재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11-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