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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를 모신 `파르테논 신전`

고된 일정이 될 수밖에 없는 그리스 여행이다. 그리스 여행은 어느 여행지를 선택해도 대부분 야외 박물관이기 때문에 한 곳을 반나절 둘러본다는 각오로 출발해야 한다. 휴양지 아닌 문화유적을 답사한다는 일은 다리에 힘 있을 때 해야 함을 그리스 여행은 충분히 깨닫게 하고도 남는다. 오늘의 일정은 아테네다. 둘러보지 못한 시내 관광지를 차근차근 견학하기로 했다. 아침 식사 후 간단한 옷차림으로 로비에 모였을 때 일광 형이 특별 이벤트를 이야기한다.오늘 저녁은 특식으로 지난 번 메테오라 갈 때 함께 한 현지 가이드 조 선생이 식당을 안내하기로 했단다. 딸 영인이가 저녁 식사 경비를 찬조했다며 최 형과 나 모르게 부탁했단다.식당이나 음식 종류는 그리스에서만 주로 맛볼 수 있는 것으로 찾아달라고 부탁했단다. 그리스를 여행하며 여러 종류의 현지 음식을 접했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 샐러드다. 그 밖에도 모스카리 메스타휘토, 게미스타, 스파게티, 스디첼, 지로스포크, 모스카리예 휘로삐다, 마스티르카, 요구르트 등 먹고 메모한 음식 종류도 여러 가지다. 특별 이벤트 때문인지 제우스 신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고 즐겁다. 이런 이벤트는 여행을 보다 신나게 만든다. 오늘은 하루 종일 걸어야 한다. 제우스 신전, 아크로폴리스, 그리고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형님, 무슨 음식인데요?”“글쎄. 이따 오후 6시에 조 선생이 우리 숙소로 차를 갖고 오기로 했어.”우리는 호텔에서 익숙한 골목길을 따라 제우스 신전(Temple of the Olympian Zeus)으로 향했다. 미로처럼 골목에서 골목으로 뚫려있는 길이다. 아테나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기준으로 잡으면 어디든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찾는 제우스 신전은 아크로폴리스 동남쪽이다. 골목 하나를 지나면 아크로폴리스 한 부분이 보이다가 이내 건물에 가린다. 플라카(Plaka) 지역을 지나 아크로폴리스 후문에 도착하여 티켓을 끊었다. 어른은 12유로다. 나흘간 사용할 수 있는 입장권으로 여섯 곳을 관람(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제외)할 수 있다. 관람할 때마다 끊어서 한 장씩 내야 한다. 그곳에서 큰 길로 나가자 131년 지어진 하드리아누스(Hadrianus)문이 보인다. 로마 제국의 하드리아누스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높이 18m, 너비 13m다. 그 뒤쪽으로 제우스 신전이 있다. 가는 곳마다 다들 사진 찍기에 바쁘다. 빙빙 울타리를 돌아 찾은 제우스 신전의 출입구를 통과하자 우뚝 선 코린트식 기둥이 우리를 맞는다. 원래 104개의 기둥이 있었다. 현재 15개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도 태풍에 쓰러졌다. 이 신전은 말 그대로 신들의 왕 `제우스(Zeus)`를 위한 신전이다.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정치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성은 기원후 2세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때에 완성하게 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한 만큼 신전의 크기는 그리스에서 가장 컸다. 하지만 3세기경 이방인의 침략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약탈과 파손으로 요즘의 모습으로 남았다.우리는 제우스 신전을 둘러보고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첫날 늦은 시각으로 문 앞에 도착하고도 관람할 수 없었던 아크로폴리스였다. 시간은 충분하다.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아크로폴리스 매표소를 통과했다. 다들 설렌 표정이다. 6년 전이었다. 난 그때 오랜 시간 아크로폴리스에서 보냈다. 탑돌이 하듯 파르테논 신전을 둘러보다 힘들면 당시 파르테논 신전 동쪽에 있었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6년 후에 다시 입장하지만 마음은 역시 긴장된다. 입장하면서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디오니소스 극장` 앞에 선다. 아크로폴리스에는 두 개의 극장이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과 아티쿠스 극장이다. 두 극장은 햇살 좋은 비탈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디오니소스 극장은 많은 부분이 망가져 있다. 아직도 곳곳에 금줄을 쳐 놓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연극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18,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관람하던 사람들이 무대 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실레노스`다. 디오니소스의 술친구로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걷는 길 양옆으로도 오랜 세월의 역사가 곳곳에 스며 있다. 아티쿠스 극장을 내려볼 수 있는 곳에 멈춘다. 이곳 역시 에피다우로스 대극장처럼 현재 주기적으로 공연을 한다. 161년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죽은 아내 레기나를 위해 기증한 극장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나무스쿠리`를 비롯하여 1993년 `야니`가 이곳에서 공연했다. 그 공연 음반을 구입해 본적이 있다. 스케일이 큰 멋진 연주였다. 로마시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지은 `불레의 문(Boule gate)`을 지나 대리석 계단을 디딘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 년 디뎠기 때문에 반질반질하다. 8m 높이의 아그라파 기념비, 프로필레아(성스러운 건물에 들어서는 문), 니케 신전, 하물며 곁의 돌 하나하나도 그리스인들의 철학과 숨결이 묻어 있는 곳이다.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들이 아테네의 절반을 본다는 이곳을 빼 놓을 리 없다. 다들 이곳에 왔다는 인증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를 위해 기원전 447년 착공하여 기원전 438년 완공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리스 건축물 중에 가장 돋보이는 건축물로 세계문화유산 첫 번째 지정물이다.계단을 밟고 오르자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백미(白眉)다. 장엄한 파르테논!``장엄(莊嚴)`이란 이런 건축물 앞에 어울릴 단어란 생각이 든다. 파르테논 신전은 남북으로 30.87m, 동서로 69.51m로 총 46개의 기둥이 있다. 기둥 위 공간을 `프리즈(frieze)`라 하는데 이 프리즈는 높이 101㎝, 길이 160m로 팬아데나이아 축제의 제사행렬을 묘사하고 있다. 360여 명의 신들과 인물, 219필의 말을 조각하였는데 율동적이며 뛰어난 조각솜씨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기원전 5세기 중엽 그리스 조각의 완벽한 표현이며 고전 건축조각의 가장 유명한 예다. 하지만 부분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을 비롯하여 외국으로 반출되고 남은 것은 아크로폴리스박물관에 일부 전시하고 있다. 지붕은 없다. 1687년 튀르크 군 화약창고가 이곳에 있었다. 그해 10월 26일 베네치아 군의 포격으로 화약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지붕이 날아갔다.설레는 맘을 누르며 천천히 파르테논을 둘러본다. 아테네 시내도 내려본다. 시내 곳곳에서 올려볼 수 있는 신전이다. 이 파르테논 건물에는 페이디아스가 금과 상아로 치장한 높이 12미터의 아테나 페이디아스 상(전쟁의 신, 처녀 신 `아테나`)을 모시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원전 아테네인들의 경배 대상 지역이다. 그늘을 찾아 오랜 시간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하산하듯 발길을 옮긴다. 점심 식사 후 플라카(Plaka) 지역을 둘러본 우리는 피로를 풀 겸 호텔에서 쉬다 6시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6시 로비로 가니 이미 조 선생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일행 6명은 승합차로 아테네 바닷가 길을 거쳐 공항 가까운 식당으로 갔다. 대를 이어 장사하는 그리스 전통 양고기 전문 식당이었다. 주방에선 네 명의 요리사가 양고기를 부위별로 자르고, 숯불 위에 올리고, 주문한 음식을 만들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빵과 그리스 샐러드가 나오고 주문한 양고기가 부위별로 나왔다. 갈비도, 내장구이도 끝내주는 맛이다. 우리는 양고기 맛에 젖어 오랜 시간 그리스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즐겁고 행복한, 그래서 더 머물고 싶은 여행이라고…. 깜짝 이벤트를 마련한 영인이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즐겁게 읽어주신 독자에게도 감사!끝

2012-12-21

포세이돈의 아들 나프폴리오스가 세운 항구도시

그리스 음식에는 올리브가 빠지지 않는다. 그런 만큼 올리브를 많이 재배한다. 나라에 등록된 올리브 나무 그루수도 1억 7천만 그루 쯤 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올리브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다. 그 다음이 그리스다. 그리스 신화에서 올리브 나무는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이 인간 세계에 준 귀한 선물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앞 바위에서도 열매를 맺은 올리브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우리 일행이 찾아가는 나프폴리오(Nafplio)행 길 곁으로도 올리브가 한여름 땡볕 밑에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그리스 여행 시작 한 주가 넘는데 그 사이 빗방울은 한 방울도 만날 수 없었다. 폭염, 건조한 날씨에도 올리브는 신기할 정도로 잘 자란다. 올리브 나무의 뿌리를 캐보면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뻗었을 것 같다. 건조한 날씨에도 고사되지 않고 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뿌리를 깊게 뻗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는 차 서편 하늘로 두꺼운 구름이 뭉쳐 있다. 어쩌면 오늘은 빗방울을 만날 것 같다.신화에 따르면 나프폴리오는 포세이돈의 아들 나프폴리오스가 세운 항구다. 그런데 아테네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신화의 한 배경이었던 이곳 나프폴리오가 수도였다. 그리스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할 필요는 없지만 그 이유를 짧게 밝히자면 두꺼운 역사책을 넘겨야 한다. 그리스는 1453년부터 약 400년간의 오스만 튀르크(현재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814년 그리스 독립당이 생기고, 1821년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1822년 1월 에피다우로스에서 독립을 선포한다. 튀르크와 이집트 연합군이 그리스 독립을 방해하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 세 나라가 연합하여 이를 물리친다.1829년 튀르크는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고, 1830년 런던회의에서 그리스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한다. 어찌 보면 일제강점기 독립을 찾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습이다. 웃기는 일 같지만 1829년 독립한 그리스의 초대 대통령은 러시아 외상 카포디스트리아스(1776-1831)가 맡게 된다. 세 연합국의 승리에서 그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1831년 반정부단체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나프폴리오 `아기오스 스피리돈`교회에는 암살될 때 생긴 총알구멍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바로 이런 시기에 그리스는 1829년부터 1834년까지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독립 후 나프폴리오를 첫 수도로 삼는다.나프폴리오는 참 아름답다.과거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던 도시로 이름 자체에서 보듯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도시 동편으로 해발 216미터의 팔라미디(Palamidi) 요새가 있다. 우린 나프폴리오에 들어서며 처음으로 팔라미디 요새에 올랐다. 정상까지의 계단이 999개란다. 중턱에서 나프폴리오를 내려본 후 바닷가 카페에서 그야말로 모처럼 여유를 갖고 차 한 잔 하기로 했다. 팔라미디 요새는 1714년 베네치아 사람이 지었는데 성채를 쌓은 지 3일 만에 튀르크 군에 함락당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성이다. 반면에 19세기 초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에는 15개월 동안이나 튀르크 군이 포위를 했어도 함락되지 않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팔라미디 요새에서 내려다본 해안선은 한 폭의 그림처럼 색상이 선명하다. 우리는 성채에서 주황 기와를 아름답게 입힌 나프폴리오 마을과 그 안쪽의 푸른 바다, 그리고 바다에 건축한 브르치(Bourtzi) 요새를 감상했다. 아무래도 감상이란 단어가 `바라봤다`, `내려봤다`란 말보다 어울릴 것 같은 위치의 풍경이다. 모든 풍경이 달력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멋진 해외 모습으로 환상적이다.견고한 성채는 오래 전에 쌓은 즉 미케네 성과 같은 축성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어 정교하여 아름답다. 돌을 직육면체로 크고 작게 깎아서 성을 쌓았다. 그곳에서 한참 머물렀던 우리는 해변 길을 따라 카페 촌까지 걷기로 했다. 걸어가는 오른쪽으로 아크로나필리아 요새(Akronafplia Fortress)가 있다. 팔라미디 요새와 아크로나필리아 요새 사이 뚫린 좌측 길을 따라 내려가니 해수욕장이다.바다 서편의 구름에 비해 이곳은 아직 햇살이 쌓인다.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햇살 아래 해수욕을 한다. 모래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잔돌만 해수욕장에 깔려있는 것 같다. 그리 넓은 해수욕장은 아니다. 좁은 해수욕장에 몸을 길게 눕히고 일광욕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도시 곁에 낮은 산과 해수욕장과 멋진 산책로가 있다는 것은 시민들에게 축복이다.사진 몇 장을 더 찍기 위해 일행들과 떨어져 천천히 걷는다. 해수욕하는 사람들 사이 들어가 나도 바닷물에 풍덩 몸을 담그고 싶다. 하지만 맘뿐이다. 휴양지를 찾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수욕장을 지나 가파른 아크로나필리아 요새 왼편 바닷가 길을 걷는다. 암벽에 선인장이 무더기무더기 열매를 달고 있다. 선인장 열매를 맛보려 열매를 살며시 당겨본다. 잔가시만 손에 박힌다. 오기가 생긴다.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으로 열매를 포장하듯 싸서 당겨본다. 간신히 따서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입에 넣자 달콤하다.어디였던가, 시장에서 선인장 열매를 사 먹으려 했던 것이?그 때 바다 저쪽으로 번개가 번쩍인다. 이미 검은 구름은 바다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밀려왔다. 정말 오늘은 비 맛을 볼 것 같다.500여 미터 거리의 해변 길을 걸으며 되돌아보니 팔라미디 요새가 영화 속의 한 배경처럼 높게 서 있다. 온통 바위로 형성된 산이다. 중간중간 선인장과 잔나무들이 철조망처럼 둘러싸여 있다. 산책로를 뚫기 위해 제법 돈을 투자했을 것 같다. 바위 위에 길을 내기 위해 조각낸 돌을 수평으로 깔았다. 해변 길 중간 굴처럼 생긴 바위 사이로 지나면 길은 급하게 꺾인다. 커브 길에 세워진 등대를 지나자 위령탑이 보인다. 그리스를 여행하다 보면 종종 만날 수 있는 조형물이다. 객사(교통사고 등)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탑처럼 조형물을 만들고 상부 공간에 수호성인의 성화와 초를 넣어 가족이든,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카페가 이어진 주거지에 도착하자 아름드리 소철이 가로수로 서서 나를 반긴다. 팔라미디 요새에서 내려보던 브르치 요새가 눈높이 저쪽으로 보인다. 베네치아군이 터키군을 막기 위해 세운 요새다. 뭍에서 약 600m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는 섬으로 1930년까지 사형집행인들이 은퇴 후에 살았던 곳이다. 카페 거리 앞쪽엔 크루즈 투어 안내판도 있다. 당일치기다. 그곳에서 출발하고 되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하늘의 먹구름과 드센 파도로 생략하고 카페로 향한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번개와 천둥소리도 요란하다. 불꽃놀이 하듯 바다 저쪽으로 번갯불이 연이어 떨어진다. 더위는 한풀 꺾였다. 올리브 나무들은 이 빗방울에 맘껏 춤을 출 것이다.카페 실외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일행들이 나를 보며 실내로 들어가자고 한다. 그 때 바다에서 배 한 척이 거센 파도를 무릅쓰고 출항한다. 두렵지 않을까? 출항하지 않는 배는 배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람 역시 여행을 통해 자아를 재발견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힘을 충전한다.비는 소나기로 잠시 쏟아지고 말 것이다. 그리스 커피 한 잔을 추가한다. 여행하며 있었던 일을 웃어가며 나눈다. `하하하…. 허허허…. 호호호….`늘 이런 풍경으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으랴. 세상은 저 바다처럼 잔잔할 때도, 거셀 때도 있음을 발견한다. 서로 소중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계속

2012-12-14

육성으로 1만4천명 웃기고 울린 고대 그리스 `힐링` 명소

언제부턴가 가로등이 켜진 것처럼 몸과 마음의 치유를 뜻하는 `힐링(healing)`이란 말이 사회 곳곳에서 반짝인다. 힐림 캠프, 힐링 화장품, 힐링 명상, 힐링 오락…. 정치에도 `힐링`자를 붙여 힐링 정치란 말까지 사용한다. 어찌보면 우리 사회는 지금 몸과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할 중증 환자들이 수두룩한지 모른다.일찍이 힐링의 명소로 수많은 환자들이 모였던 곳이 있다. 198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리스 `에피다우로스(Epidauros)`다. 에피다우로스는 그리스 아르고리스 지방의 살로니카 만 가까이 있는 고대 도시다. 아라네오(Arahneo) 산기슭 송림 숲에 자리잡은 이곳은 건강과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가 있었던 성역이다.그 성역 산비탈엔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형 극장이 있는데 현재도 각종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에피다우로스에 들어서며 우린 대형 극장보다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엔 `파이돈`이란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심오한 철학과 최후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책이다. 영혼 불멸을 믿은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 전 친구 크리톤에게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 꼭 갚아주게”라고 말한다. 영혼 불멸을 죽음으로 증명해 보려 한 소크라테스가 한 말 속에 `아스클레피오스`가 등장한다. 닭은 당시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치유의 감사로 바치는 제물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쓴 히포크라테스의 조상이 아스클레피오스라고 한다.아스클레피오스 출생과 죽음에 따른 신화를 잠시 소개하면 이렇다.플레귀아스 왕에겐 딸 코로니스가 있었다. 그는 아르카디아의 왕자 이스키스라는 남자와 약혼했다. 그런데 태양의 신 아폴론을 만나자마자 아폴론에 반해 그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된다. 아폴론의 아이를 임신한 코로니스는 그 사실을 숨기고 이스키스와 결혼한다. 아폴론의 심부름꾼 까마귀는 코로니스의 결혼 사실을 아폴론에게 일러 바쳤다. 화가 난 아폴론은 코로니스를 활을 쏴 죽인다. 아폴론은 코로니스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까마귀를 향해 `네놈 때문에 코로니스를 죽였어`라며 흰색의 까마귀를 검은 색으로 둔갑시켰다. 죽은 코로니스를 화장하려 장작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의 배에서 아기가 꿈틀대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다. 총명한 아스클레피오스는 켄타우로스의 박학다식한 `케이론`에게 생로병사의 열쇠를 배워 죽은 자까지 살리는 능력을 갖게 된다. 지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치료로 죽지 않자 지하의 신 `하데스`는 제우스를 찾아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치료 행위를 중지하도록 요청한다. 사람이 죽지 않는 일은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라 여긴 제우스는 벼락으로 아스클레피오스도 죽인다. 아는 대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막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이 개량한복을 입고 있는 내게 달려온다. “우리랑 사진 한 장 찍어요.” 얼떨결에 나를 포함한 우리 일행은 학생들과 사진을 찍었다. 영국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다. 웃옷을 벗고, 포즈도 가지각색이다. 자유분방한 모습이 젊은이 특유의 모습이라 보기 좋다. 한 바탕 웃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표를 끊고 처음으로 찾은 곳은 실내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에서 나온 대리석 조각상, 청동 의료기구, 그리스와 로마 조각물, 도리아식 열주, 아르테미스 돌림띠, 톨로스 기둥머리, 천장의 꽃, 아스클레피오스 석고 조각상.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아스클레피오스 조각 등을 전시한다.박물관을 구경한 우린 노천박물관으로 향했다. 넓은 유적지를 관람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유적지 사이사이 곳곳에 자란 소나무 가지가 푸른 그늘을 만든다. 지금은 허물어졌지만 길은 유물 유적과 이어져 있다. 많은 환자들이 머물 수 있는 병실(카타고제이온, Katagogeion)을 지나 온천 터도 거쳐 아스클레피오스의 축제를 연 오데이온(Odeion)과 연회장을 지난다.천천히 걷다가 스타디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소나무 그늘에 들어가 주변을 살핀다. 무엇이 이렇게 폐허로 만들었을까? 지진과 기독교 전파 그리고 무관심이다. 넓은 스타디움은 제일 낮은 곳에 조성해 놓았다. 그곳에선 운동을 통해 건강한 육체를 만들게 하였을 것이다. 서남쪽에 자리잡은 톨로스는 기원전 360~320년 사이 폴리클레이토스(Polycleitos the Younger)가 둥근 형태로 지은 것이다. 건물의 용도는 불확실하다. 당시 올린 기둥 몇 개 남아 있는데 코린트 양식의 대표적 건물이다. 북쪽으로 아바톤(Abaton)이 있다. 아바톤은 치료소다. 실내박물관에서 본 각종 수술도구들을 사용했던 곳이다. 수술뿐만 아니라 정신치료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환자를 몽롱한 상태로 만드는 환각체험을 통해 치유하기도 하였다. 동쪽에는 이집트 신들의 영역도 있다. 당시 이집트와의 교역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이 모든 시설들이 오늘 우리가 접하는 힐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죽음을 앞둔 수많은 환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허물어진 유적을 둘러본 후 대극장으로 향하며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 거울 앞에 활짝 핀 유도화를 꽃병에 꽂아놓았다. 그 자체가 청량감을 준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힐링이다.대극장으로 향하며 우리들은 가곡 한 곡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극장 무대에서 가곡을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6년 전 터키의 에페소 대극장에서였다. 객석에 앉아 있을 때 성악을 전공한 사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종종 그 장면이 멋진 추억으로 떠오른다. 가곡을 떠올려보지만 생각나는 게 없다. 오랜 시간 가요에 젖어 가곡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국가라면 어떠랴, 아리랑이면 또 어떠랴. 하지만 그래도….지중해 고대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대형 극장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극장은 연극뿐만 아니라 무용, 음악, 시와 같은 것을 통해 많은 시민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역할을 했다. 에피다우로스의 야외극장도 마찬가지다. 산비탈을 이용해 만든 야외극장은 이곳 톨로스를 건축한 젊은 건축가 폴리크레이토스(Polycleitos)가 설계했으며, 기원전 4세기 말엽에서 기원전 2세기 중반에 걸쳐 지어졌다. 오랜 세월 흙더미에 묻혀 있던 것을 1881년 발굴하고,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특히 이곳의 음향 효과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대 중앙 원형 돌(지름 20m)에 동전을 던지면 그 소리가 공명되어 제일 상석(위쪽)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것이다. 원형 무대를 중심으로 펼친 부채 모양인데 객석은 55계단이며 수용인원은 1만4천여 명이다.평민석은 흰 석회암, 귀족석은 붉은 석회암으로 구분하였다. 요즘도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공연하고 있는데 우리 일정하고는 맞지 않아 관람할 수 없어 아쉬웠다. 극장에 들어선 우리 일행은 드문드문 관광객이 앉아 있는 객석을 향해 가곡 `동무생각`을 불렀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그 소리가 계단 한칸한칸 물결처럼 퍼졌다. 노래가 끝나자 객석의 외국인들이 박수친다. 멋진 순간이다. 손을 흔들어 답례한 후 찬찬히 계단을 밟고 올라 극장을 한 바퀴 둘러본다. 누군가 동전을 무대 중앙에 떨어뜨렸는지 동전 구르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이 모든 것들이 힐링이다. 힐링(Healing)!계속

2012-12-07

그리스 미케네왕국 王 트로이전쟁의 주인공 아가멤논 `황금마스크`

그리스로 출발하기 전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스 신화`, `그리스 미술`, `그리스 문명`, `그리스인 조르바` 등 넘긴 책을 곁에 두니 제법 많다. 여행 후 다시 넘겨보기 시작한 책이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다. 아무래도 여행하면서 보았던 그리스 문명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다.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 아가멤논이 있다.위대한 황금 예술의 전형을 볼 수 있는 황금마스크의 주인. `아가멤논!`트로이 전쟁의 총사령관 `아가멤논!` 우리 일행은 지금 아가멤논의 유물이 발굴된 미케네로 간다.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고대 성채로 코린트에서 48km 거리다. 길은 아크로코린트 우측으로 뚫렸다. 그 우측 산비탈 자락에는 끝없는 수평선에 걸린 빨래처럼 이야기가 걸려있다.시지프의 신화다. 바위덩어리를 산꼭대기까지 이고가면 그것이 굴러 떨어져 다시 이고 올라가야만 하는 시지프. 금세 시지프가 오르는 신화의 산자락이 달리는 차 뒤쪽으로 사라진다.미케네 주차장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찾은 곳은 벌집형 무덤 `아트레우스의 무덤(또는 금고,金庫)`였다. 벌집형이라는 것은 벌의 애벌레가 부화하기 전 머물던 집의 형태로 무덤이 그와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들어가는 입구 연도 양 옆으로 거대한 돌을 쌓았다. 긴 것과 작은 것을 절묘하게 섞어 쌓았을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긴 돌을 밖으로 뻗게 하여(안 보이지만) 안쪽으로 넘어지는 것도 방지했다. 둥근 사일로 형태의 내부로 들어가니 침침하다. 밖과 안의 조도가 달라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자 돌덩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대단한 건축술이다. 13.2m 높이에 지름 14.5m의 원형으로 돌을 33단 쌓은 다음 천장은 돔형으로 만들었다. 그 모든 형태가 치밀한 수학적 계산 없이는 건축하기 힘든 기하학 건축이다. 즉 천장이 바닥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밖에서부터 안쪽으로 원을 그리듯 둥글게 돌을 올려 중앙엔 하나의 돌로 마감했다. 긴 밤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들 회전하는 모습을 긴 노출로 찍은 사진처럼 말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보면 별들의 움직임이 천장에 있는 느낌이다. 천장(天障)이며 천정(天井)이다. 빗물이 안으로 새지 않도록 방수도 완벽하다. 돔형이기 때문에 안에서 이야기하면 상대편의 소리가 확산되듯 울린다. 한쪽으로 또 하나는 작은 공간이 뚫려있는데 그곳에선 많은 보물을 발견했다. 도굴꾼이 그 공간엔 손을 대지 못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키지만 그 형태는 전혀 다르다. 이런 건축물을 기원전 14~13세기 경에 만들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트레우스의 무덤을 본 우리는 산으로 뚫린 미케네 성터로 향했다. 난공불락의 철벽 옹성이다. 왼편으로 바위를 깎아 높은 담장을 쌓고, 성채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엔 `사자(獅子)의 문`을 만들었다.`사자의 문`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물이다. 두 개의 기둥 주춧돌을 놓고 그 위 3.1m 길이의 수평 상석을 올렸다. 수평 상석 위 한 덩어리의 돌로 조각한 사자 두 마리가 가운데 기둥을 붙잡고 있다. 기둥은 미케네 궁궐을, 즉 사자 두 마리가 미케네 궁궐을 보호하는 모습이다. 이 역시 기원전 13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성벽으로 향하는 사람을 쳐다보며 침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상징물이다. `사자의 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아트레우스의 무덤`처럼 생긴 또 다른 무덤이 보인다. 1876년 독일인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발굴한 무덤이다. 그는 이곳에서 `아가멤논의 황금마스크`를 발견했다.슐리만은 어린 시절부터 호메로스의`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탐독했는데 그는 트로이 전쟁의 주인공 `아가멤논`은 허구가 아닌 실제 인물이라고 믿었다.사업을 시작한 슐리만은 36세까지 큰 돈을 벌어 고고학에 투자한다. 그가 어느 정도 호메로스에 빠졌는가 하면 자신의 아이들 이름을 일리아드에 나오는 안드로마케와 아가멤논으로 지을 정도였다. 그는 1870년 트로이를 발굴하고, 1876년 미케네에서 서른네 개의 갱도를 팠다. 그 중에서 아가멤논의 황금 마스크를 발굴한 것이다. 호머의 `일리아드`주인공 아가멤논은 고대 그리스 왕국 미케네의 왕이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여 10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아가멤논 왕이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왕궁을 비운 사이,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는 아이기스토스(Aegisthus)와 불륜을 저지른다. 갖은 고생 끝에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아가멤논이 미케네의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마음은 아가멤논을 떠난 상태였다.왕비는 애인 아이기스토스와 음모를 꾸며 환영식에서 아가멤논을 죽인다.여기에 얽힌 이야기는 심리학자 칼융에 의해 `엘렉트라 콤플렉스`란 용어로 탄생한다. 여자아이가 아버지에게 애정을 품으면서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질투하거나 적대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즉 아가멤논에겐 엘렉트라라는 딸이 있었는데 엘렉트라는 남동생 오레스테스(Orestes)와 공모하여 아버지의 원한(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엄마와 아이기스토스를 살해)을 갚는다.우린 성안으로 들어가면서 사방을 둘러봤다. 우리나라의 시골 뒷동산 같은 높이로 삼각형을 눕힌 것 같은 성채는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리적 위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산 밑으로 넓은 들이 보이고, 먼 곳엔 바다가 있다. 동편의 에우보에 산과 이어지는 부분이 직각에 가까운 암벽으로 쉬이 접근할 수 없다. 이런 곳에 성을 쌓고, 문명을 일궜다는 것은 그 만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며 고유의 문명을 지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성에 얽힌 신화 한 도막도 빠뜨릴 수 없는 이야깃거리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가 성채를 쌓았다는 속설인데 기원전 1,350년 전에 쌓은 세계최초의 성벽이라고 한다.비탈길을 오르자 왕궁터가 펼쳐진다. 한국, 중국, 일본의 궁궐처럼 넓은 평지가 아니다보니 넓은 편은 아니다. 왕궁터 주변에 쌓은 오래된 석축엔 여름 햇살이 쌓이고 있다. 왕궁터 뒤쪽으로 오르자 옛날 사람이 살던 집터가 보인다. 황금을 다루고, 그릇을 빚고, 장롱을 만든 각 분야의 장인들이 살던 곳이다. 동북쪽 끝부분에 우물터가 있다. 지하도를 따라 내려가면 그 옛날 물을 보관하던 물 창고를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성에서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는 것은 식량만큼이나 중요했을 것이다.북문까지 살펴본 우리 일행이 찾은 곳은 그곳에서 발굴한 물건을 전시하는 북쪽 산비탈 박물관이었다. 기원전 16세기에서 11세기까지의 유물을 오밀조밀하게 전시하고 있다. 장인들이 살던 곳에서 발굴한 채색 토기를 비롯하여, 초기 그리스어를 나타내는 점토판도 있다. 유물을 둘러보던 내가 멈춘 곳은 `아트레우스의 무덤`에서 출토된 물건을 전시한 방이었다. 황금 마스크, 황금 목걸이, 황금 귀걸이, 황금 팔찌 등 많은 금세공 유물이 있다. 기원전 14세기 만든 것이란 생각이 안 든다. 며칠 전 만든 느낌이다. 황금 색깔을 보며 정말 변하지 않는 것은 흔한 사랑이 아니라 황금이란 생각까지 든다.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것들은 이곳뿐만 아니라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에도 전시하고 있다. 위대한 황금 유물은 사진으로 책자에 모셔져 전 세계로 흩어진다. 민둥산 위 낡은 성채만 있던 곳에서 발굴된 황금유물로 세계 곳곳의 여행객들은 오늘도 미케네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계속

2012-11-30

300명 군사로 30만 페르시아군 물리친 레오니다스왕

늦은 점심을 오후 3시 넘어 칼람바카(Kalambaka)에서 3대째 영업하고 있는 `레스토랑 메테오라`에서 먹었다. 뷔페였다. 대형 솥 12개에 다양한 음식을 푸짐하게 제공하였다. 대를 이어 하는 식당답게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은 많았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은 난 칼람바카 마을을 벗어나기 전 성스테파누스 수도원을 되돌아봤다. 우뚝! 수도원을 끌어안은 메테오라 바위가 성인(聖人)처럼 우리를 향해 손 흔든다. `바이바이! 여행객이여 은총이 가득하길!`얼마쯤 달리자 길옆으로 강 하나가 긴 꼬리를 잇는다. `피니오스`강이다. 피니오스 강은 아폴론과 다프네에 얽힌 신화가 흐르는 강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여신 에로스는 금화살을 아폴론의 어깨에 맞추고, 첫눈에 만나는 여성을 사랑하게 만든다. 그 사랑의 상대가 다프네다. 반면에 다프네는 에로스의 은화살을 맞게 되는데 그것에 꽂히면 첫눈에 띄는 사람을 영원히 미워할 수밖에 없다. 애증의 역학관계에 아폴론과 다프네는 쫓고 쫓기게 된다. 아폴론이 시도 때도 없이 쫓아오자 결국 다프네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월계수란 나무로 변한다. 아폴론은 그 가지로 전차경기의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었다는 신화다.피니오스 강은 테살리아 평야를 가로지른다. 해 뜨고 지는 풍경을 지평선 끝으로 볼 수 있는 평야다. 테살리아는 그리스 13개 주 가운데 한 주로 중심지는 라리사市다. 이곳에선 밀, 옥수수, 목화, 채소 등 많은 식물을 재배한다. 우리가 달리는 도로는 평야 가운데로 뚫려있다. 한여름 땡볕 가뭄에도 식물들은 무성하고 푸르다. 이동 중 멀리 피니오스 강을 바라볼 수 있는 휴게소에 들렀다. 휴게소에선 테살리아 평야에서 생산한 농작물과 꿀, 약초를 팔았다. 원탁의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자 서비스로 시원한 수박을 준다. 수박 맛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단 것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그것 역시 피니오스 강이 흐르는 테살리아 평야에서 생산한 것이다. 다시 출발한 승용차가 오랜 시간 달리다 들른 곳은 테르모필레(Thermopylae) 온천이었다. 테르모필레의 테르모(thermo)는 온도계(thermometer)의 앞 글자에서 보듯 `뜨겁다`를 의미하고, 필레(pylae)는 문(gate)을 뜻한다. 자연 온천 특유의 유황냄새가 코를 찌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온천으로 갔다. 노천온천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있다. 대부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다. 우린 양말을 벗고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갔다. 거짓말처럼 쌓였던 피로가 풀린다. 이 물줄기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흘러내린 물줄기다. 우리처럼 발만 담그고 있는 그리스 사람이 우리를 향해“어느 나라에서 왔어요.”“코리아”“코리아! 삼성! 가고 싶은 나라죠. ……이곳을 종종 찾는데 온천욕을 하면 기분이 좋죠. 일광욕을 함께 할 수 있어 해수욕만큼 좋죠.”`삼성`이란 말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기업 `포스코`란 말을 들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분은 아미아(Amia)에 산다고 했다. 온천에서 북쪽으로 좀 떨어져 있는 마을이란다.입장료도 없다. 그냥 노천 온천 밖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들어가면 된다. 족욕을 즐긴 난 물이 나오는 원천지를 구경할 겸 상류로 올라가는데 현지인이 막는다. 위락시설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단다. 온천으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캠핑투어장도 보인다. 온천은 큰 도로에서 가깝기 때문에 운전하는 사람들이 피로를 풀겸 잠시 들러 쉬었다 가기도 한다. 노천온천에서 휴식을 취한 우린 그곳과 가까운 테르모필레 전투 기념비로 옮겼다. 테르모필레는 지명의 상징에서 보듯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다. 아테네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동편은 바다, 서편은 높은 산으로 영화 `300(삼백)`의 스토리가 된, 세계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천혜의 요새다.기념비 광장에 도착했을 때 일광 형 형수가 말한다.“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삼백` 개봉할 때 봤어요. 그 배경이 이곳이라니?”넓은 공터 뒤쪽으로 20여 미터 울타리 대리석 기단을 쌓고, 가운데 부분에 흰 대리석을 높인 다음 그 위 긴 창을 들고 있는 청동 인물을 올렸다. 청동 인물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조국 그리스를 위해 목숨 바친 `레오니다스(Leonidas)`왕이다. 그 밑 양편으로는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장면도 부조로 새겼다.기원전 481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엄청난 대군(역사가 헤로도토스는 264만1천명의 병사라 함, 어느 책은 170만명, 현대의 학자는 30만명 정도로 추정)을 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바로 3차 페르시아 전투다.대군 앞의 그리스 연합군은 풍전등화였다. 이때 레오니다스 왕은 스파르타 정예병 300명, 노예병 7천명을 이곳에 남기고 나머지 아테네 연합군을 철수시켰다. 페르시아의 대왕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는 `레오니다스`에게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고 했다.레오니다스는 대꾸했다.`와서 가져가라.`테르모필레 전투 기념비 레오니다스 동상 밑에는 당시 그가 말했던 말이 두 단어로 새겨져 있다.이것 외에도 스파르타 군인의 용감성은 불세출의 명언으로 많이 회자된다. 스파르타 군인 `디에네케스`에게 동맹국 트라키아의 주민이 하얗게 질린 채로 찾아왔다.“페르시아 모든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쏘면 화살의 그림자가 태양을 가릴 정도입니다.”그 말에 디에네케스는 너털웃음을 웃으며“잘됐군. 그럼 우리 군대는 그늘에서 전투할 수 있겠군.”그만큼 페르시아의 많은 군사에 대항하는 스파르타 군인의 임전무퇴 정신자세를 보여주는 일화다.그리스와 페르시아는 테르모필레 전투 이전에도 두 번이나 싸웠다. 첫번째는 기원전 492년이었고 두번째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다. 이곳의 테르모필레 전투는 기원전 480년 실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이런 전투에 대한 기록은 헤르도트스의 명저 `역사`를 비롯하여 풀루타르크 `영웅전` 및 여러 책에 등장하는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던 전투다.테르모필레 전투 기념비 광장 옆에는 전투에 따른 설명과 당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다. 그렇다고 델포이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거창한 유물유적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래 전 기록에 따른 기념물을 세웠기에 후세의 사람들은 그곳을 찾고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전쟁을 잊지 않고 기억할 뿐이다.광장 밖에는 머리와 팔이 없는 또 하나의 조각상도 보인다. 무명용사비다.전쟁에는 숱한 영웅호걸이 탄생한다. 영웅호걸과 그들 밑에서 목숨을 잃은 이름 없는 수많은 병사들이 있었기에 나라의 영토는 지켜지고, 역사는 존재하는 것일 게다. 2천5백년 전 테르모필레 전투는 유럽과 아시아를 지리적으로 나누는 계기가 된 전투다. 그 전쟁의 후유증은 아직도 저 중동 곳곳에서 배턴을 이어받듯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테르모필레 전투 기념비에서 허황되게 떠올려본다계속

2012-11-16

기암괴석 위 하늘의 수도원… 불가사의 건축물

새벽이었다. 일찍 눈을 뜬 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7시 넘어 카메라와 시집 한 권을 들고 살며시 밖으로 빠져나왔다.호텔 뒤편의 기암괴석이 나를 내려본다. 그 풍경을 카메라로 찍는다. 참 많이도 찍는 사진이다.여행 출발 전 노트북을 챙겼다. 외국 여행 중 컴퓨터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음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호텔 역시 마찬가지였다. 룸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겠다고 하니 5유로를 내란다.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처럼 컴퓨터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물론 그것이 강점이면서 때론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로비로 가니 벌써 다른 곳으로 출발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메테오라는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 있는 성지다. 지금 출발하는 사람들은 전날 수도원을 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다. 몇 대의 버스가 출발하고 나니 조용하다. 주차장 근처 수영장에 놓인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어 시집을 넘긴다. 시는 함축미를 갖고 있어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여행에서 보는 유물 역시 한 편의 시를 읽듯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세월의 정으로 쪼아 마모된 곳을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감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낮은 하늘엔 하현달이 떠 있다. 여행 중에 만난 하현달이라 그랬을까? 그 자체가 조각난 하나의 유물로 생각된다. 그러면서 역시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한 시간 남짓 밖에 머물다 식당으로 들어가 아침을 먹고 일행들과 9시35분 호텔을 출발했다. 칼람바카 메테오라(METEORA)는 단어 자체가 종교적이다. 칼람바카는 `은수자(隱修者)`를 뜻하고, 메테오라는 `공중에 떠 있는, 하늘 바로 아래`를 의미한다. 평지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 그야말로 신령스럽다. 평균높이 300미터이며, 가장 높은 곳은 550미터란다. 기암괴석은 `007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 등 많은 영화의 배경도 되었다. 198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에 수도원이 많을 때는 24개였다. 현재는 6개뿐이다. 루사노스 수도원, 발렘 수도원, 그레이트 메테오라 수도원, 니콜라스 아나파사스 수도원, 트리아스 수도원, 스테파노스 수도원(수녀원)이다. 우린 세 곳을 보기로 했다.이곳에 수도원이 들어선 것은 12세기다. 두피아니의 기둥으로 불리는 바위 꼭대기에 있던 파나이아 두피아니란 성모 마리아 예배실이 시초다. 이후 시대에 따라 새로운 수도원이 건축되었는데 가파르고 협소한 곳에 있기 때문에 모든 공간이 좁은 편이다.처음으로 찾은 곳은 가장 큰 수도원 그레이트 메테오라 수도원이었는데 문이 닫혀 있다. 방문객의 편리를 위해 요일별로 문을 열고 닫는데 우리가 방문한 날은 쉬는 날이란다. 그레이트 메테오라 수도원을 배경으로 사진 몇 컷 찍고 이동한 곳은 모든 성인들의 수도원 발렘(Barlaam) 수도원이다. 발렘 수도원은 두 번째로 큰 수도원으로 1350년 발렘이 수도생활을 하면서 시작되어 이오니아에서 온 수도자 테오파네스(Theophanes)와 넥타리오 아프사라데스(Nektarios Apsarades)가 1542년 완성하였다고 한다. 가파른 계단을 밟으며 수도원으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여성들은 치마를 둘러야했다. 그것은 규칙이다. 큰 정육면체에 가까운 성당에 들어서자 바닥을 제외한 모든 면이 아름다운 성화로 그려져 있다. 테베 출신의 프랑고 카텔라노(Frango Katelano)라는 유명한 성화가가 1548년 그린 성화(Icon)다. 성화를 보면서 잠시 묵상하고 오래 전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로 발을 옮겼다. 나무로 만든 대형 오크통이 보인다. 포도주를 빚을 때 사용했던 것인데 눈대중으로 보더라도 가로 4미터, 세로 2미터는 될 것 같았다. 1만3천리터를 담을 수 있었단다. 그곳 옆에는 과거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절벽 문이 있다. 즉 절해고도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식량과 의복 등 가장 간단한 것들을 보급할 수 있는 통로다. 맞은편으로 그레이트 메테오라 수도원이 보인다. 트인 공간에서 슬며시 아래를 내려본다. 낭떠러지다. 현기증이 인다. 오래 전 도르래를 이용하여 사람도 올리고, 물건도 올렸던 장소다. 세속과 단절할 수 있는 곳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던 곳이 수도원이다. 발렘수도원 박물관에 들러 그곳에서 머물렀던 수도자들의 옛 모습도 엿본다. 수도자들이 사용하던 의복과 성구, 성경 필사본 등 다양한 것들이 많다. 하나하나가 정성스럽다. 그 자체가 기도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세워질 당시 모든 성인들에게 봉헌되어 모든 성인들의 수도원이라고도 한다.차분한 맘으로 발렘수도원을 벗어난 우리는 칼람바카를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스테파노스 수도원으로 향했다. 스테파노스 수도원은 일명 바실리까(황제) 수도원이라고 부른다. 1192년부터 사람이 머물기 시작하여 14세기에 수도원으로 완공되었는데 1333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가 머물렀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얻게 되었다. 1798년부터 성 하랄람보스(Charalambos or Haralambos)를 기념하는 교회가 되었고, 그 분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 수도원으로 1961년 수녀원으로 바뀌었다. 통로 벽에는 성경 구절 액자가 곳곳에 걸려 있다.`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테살로니시카 전서 5장 16-18절)의 말씀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무릇 여행도 그와 같아야 함을 발견한다. 새로운 만남에 기뻐하고,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는 일정이 될 때 여행은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대부분의 수도원은 위치와 크기만 다를 뿐이지 안의 구성은 비슷하다. 스테파노스 수도원의 성화는 진한 것이 화려하다. 수녀원으로 바뀌고 1951년 출생으로 천사의 화가라 불리는 봐시오스 토소소니스(Vlasios Tsotsonis)가 복원했단다.스테파노스 수도원을 나와 우리 일행이 오후 2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성 니콜라스 아나파사스(St. Nicholas Anapafsas)수도원이다. 1388년 세워져 1628년 확장한 수도원으로 돔의 작은 교회에는 크레타 출신의 성화가 테오파네스(Theophanes Strelitzas, Cretan)가 1527년에 그린 `최후의 심판`과 `천국`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또 한 곳에는 에덴 공원의 아담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그곳에서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 조 선생께서 그림을 설명한 후 그리스 정교회 미사 특징을 설명한다.“정교회 미사는 오감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시각은 성경, 성상, 사제, 이웃을 보는 것이고, 청각은 찬양기도, 후각은 향내음과 사람내음, 촉각은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직접 만지며, 미각은 성체인 빵을 나누어 먹는데서 정교회의 거룩한 미사는 완성됩니다.”수도원의 4대 덕목이라며 회개, 기도, 순종(복종), 겸손에 대해서도 덧붙인다.그러면서 그리스어 `이뽀아꾸오(내가 듣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미심장하다.오래 전 수도원에 안토니오라는 수도자가 있었는데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단다. 외출에서 돌아온 원장이 안티니오를 부르자 관 속에 있던 그가 `예, 나갈 거예요.` 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수도자들의 복종에 대한 4대 덕목을 강조한다.밖으로 나서며 성물상점에 들렀다. 성물을 취급하는 상점엔 나무에 성상을 그린 아이콘이 많다. 이곳 특산품이다. 많은 상품 중 원형으로 된 떡살무늬 조각물 하나를 구입했다. 수도원을 벗어나며 떡살무늬에 새긴 글씨의 뜻을 물어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란 내용이란다.신앙인에게 그 문구야말로 영원히 마음에 새겨야 할 문구 같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기념물 하나로 여행이 그냥 즐거워진다. 그 모든 것에 감사! 또 감사!계속

2012-11-09

그리스신화에 델포이는 `세계의 배꼽` 옴파로스

오늘의 유럽(Europe)이란 어원은 그리스어`에우로페(그리스어: Ευρωπη)`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에우`는 넓음, `로`는 눈을 뜻한다. 즉 `시각의 넓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만약 유럽에서 그리스란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체성 혼란으로 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유럽연합(EU)과 같은 거대 조직은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시아와 인접한 그리스 문명은 그만큼 유럽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영어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의 언어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 그리스 땅에는 지구의 중심이며 자궁이라고 여긴 옴팔로스(Omphalos:배꼽)가 있다.바로 델포이(Delphoe)다.한여름 머리 위 태양이 작열하는 도로를 달리며 바라보는 창 밖 풍경은 건조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파르나쏘스 산 왼편으로 델포이까지 가는 길은 굽이굽이 산길이다. 파르나쏘스 산은 높이가 2천457m로 포키스·프티오티스 · 보이오티아 주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창 밖을 바라보는 그 자체로도 뜨거운 열기가 전해진다.가는 길에 산 중턱 고갯마루에서 멈췄다. 휴게소는 없지만 파르나쏘스 산 서편으로 자리잡은 `아라코바`란 예쁜 마을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산 중턱에 전형적인 그리스 풍의 흰 벽, 붉은 기와 건물들이 우리를 향해 길 하나를 밧줄처럼 내려주고 있다. 사진 몇 컷을 찍은 우린 밧줄(길)을 타고 아라코바 마을로 올랐다.아라코바는 마을 뒤쪽으로 스키장이 있어 겨울이면 유럽인들이 찾는 휴양지다. 스키뿐만 아니라 파스타, 양모, 수예로 널리 알려진 부자마을이다. 아라코바에서 다시 쉬었다 출발한 승용차가 델포이 유적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였다. 옛날옛적 그곳엔 왕뱀 퓌톤과 그의 짝 퓌티아가 살고 있었다. 활 잘 쏘는 아폴론이 화살로 퓌톤을 죽였다. 그리고 퓌티아를 인간으로 만들어 아폴론 신전의 제관(예언자)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당시 국가적 중요한 사안인 전쟁, 식민지 건설 등이 있을 때마다 왕들은 이곳에서 신탁을 청했다. 신탁의 신전이기 때문에 그리스 곳곳에서 봉헌된 보물로 아폴론 신전 창고는 가득했다.한낮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피할 겸 야외보다 실내 박물관을 먼저 견학하기로 했다.박물관 입장료는 야외 관람까지 포함해 9유로(1만3천원 정도)다.델포이 유적 관광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실내 박물관과 아폴론신전 부근, 위쪽 전차경기장, 그리고 도로 밑 톨로스 부분이다. 그 공간이 넓기 때문에 시간의 안배가 필요하다. 점심때가 지났지만 실내 박물관을 관람하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델포이는 고대 그리스의 4대 제전 가운데 하나인 퓌티아 제전을 기원전 582년부터 4년마다 열었던 곳이다. 퓌티아 제전은 체육대회와 연극대회로 구분되는데 아폴론 신전 바로 뒤쪽으로 공연장이 자리하고 있다. 전차 경기장은 제일 위쪽에 있는데 당시 경기의 우승자에겐 월계관을 수여했다.델포이 실내박물관은 아르카이크 시대로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델포이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6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의 모습과 별 차이 없다. 당시 난 혼자 이곳을 찾았다. 또 다시 박물관 유물을 만나니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감회가 새롭다. 박물관에는 부서진 돌조각들의 해체와 결합, 부조와 환조들이 널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망가져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상상하면서 감상해야 한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전차 기사(약 180cm)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보곤 마부가 마차를 몰고 가는 것처럼 4두 마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이 청동 기사는 시칠리아 섬의 겔라(Gela)를 다스리던 참주(지역 왕) 폴리잘로스(Polyzalos)가 델피에 바친 봉헌물이다. 폴리잘로스가 기원전 478년경 퓌티아 게임의 전차 경주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해서 바쳤다. 시칠리아는 현재 이탈리아 땅이지만 당시는 이곳의 영향력 아래였음을 보여주는 전시물이다. 대부분의 유물이 없어지고 파괴되었음에도 이것은 기원전 373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땅속에 묻혔기에 약탈을 피할 수 있었고 1896년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었다.실내 박물관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머무는 곳 중의 하나는 옴팔로스(Omphalos) 앞이다. 이 돌은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토해냈던 `돌` 이라고도 하고, 제우스가 지구 끝까지 보냈던 두 독수리가 되돌아왔을 때 만난 지점으로 지구의 중심을 상징하기도 한다. 새끼줄(양모)처럼 돋을 무늬가 이어진 옴팔로스는 아폴론 신전 북쪽에 있었다. 또한 낙소스 섬에서 바친 스핑크스는 이집트에서 유래한 것으로 얼굴은 여자, 몸은 사자에 새의 날개를 가졌다. 기둥을 포함해서 높이가 12m나 되었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 정면에서 방문객을 내려 보았다고 한다. 기원전 580년 경 아르고스에서 바친 쿠로스 상은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로 알려졌다. 이런 조각과 함께 벽면 부조는 아폴론 신전의 박공부분, 헤라클레스의 전쟁 장면 등 다양하다. `여인 기둥상`, `목 잘린 여인상`, `시시포스 1세 동상`, `무희의 기둥`, `헤라클레스상`, `청동방패`, `아폴론 두상`, `악기들 들고 술을 따르는 아폴론 도자기` 등 긴 시간 각종 전시물을 보고 나오려 할 때 `삼발이 솥`이 보였다. 많은 책에서 인용하는 유물이다. 이 솥은 헬레네가 트로이아(=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고국 스파르타로 되돌아가면서 바다에 던진 솥이다. 이 황금 솥은 코스 섬에 사는 고기잡는 어부의 그물에 걸려나왔는데 `가장 현명한 철학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탈레스, 비아스, 솔론 3사람에게 주었더니 모두 사양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바쳐졌다고 한다.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형태를 상징한다. 신탁의 무녀들이 앉았던 의자도 삼발이 의자다.실내 박물관을 보고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톨로스`로 향했다.기원전 4세기 초 사모스의 테오도로스라는 건축가가 지은 원형신전 톨로스는 박물관 도로 아래쪽에 있다. 수많은 돌들이 바닥에 널려 있다. 원형의 모습대로 제 자리를 찾아 돌 하나하나 놓으려 했지만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돌들이 산더미처럼 많다. 아티가(아테네를 포함한 주변 지역)의 펜테리 지역에서 가져온 돌로 건축하였다고 한다.톨로스를 구경한 후 실내 박물관 옆 아폴론 신전으로 향했다.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은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과 함께 고대시대에 가장 중요한 신탁소였다. 주변 방대한 유물들이 그야말로 노천박물관이다. 톨로스나 아폴론 신전에 대한 속살 깊은 이야기는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아고라, 참배로, 보물창고(아테네 보물창고는 거의 완벽하게 복원), 김나지움(체육관), 아폴로 신전, 극장을 구경한다. 비탈에 쌓은 돌들이 정교하다. 아테네, 아르고스, 시키온, 시프노스 등 곳곳 지역에서 봉헌한 봉헌창고 흔적을 훑어볼 때 `너 자신을 알라`란 글자가 소크라테스 이전에 이미 새겨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길이 60m, 폭 23m의 기단과 38개의 기둥(현재 6개 남아 있음)이 있었던 아폴론 신전과 5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을 견학한 후 위쪽 전차 경기장을 보러 가야 하는데 이미 더위로 지친 상태다. 강렬한 빛으로 사진을 찍어도 액정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일행 대표로 서둘러 올라가서 사진 몇 컷을 찍고 내려온다. 전차 경기장의 길이는 178m, 폭은 25m로 7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6년 전에도 문 닫을 시각이라 숨 가쁘게 올라갔다 내려왔던 곳이다.여행엔 오지도 않은 미래의 시간이 지금의 시간을 서두르게 할 때가 많다. 그래도 여유롭게 이동하는 이번 여행이다. 그렇기에 폭염도 한층 즐겁게 느껴진다.계속

2012-11-02

비잔틴 건축의 걸작 호시우스 루카스 수도원의 감동

그리스 도착 둘째 날 델포이와 메테오라로 가는 길에 그리스 정교회의 모범됨을 볼 수 있는 호시우스 루카스 수도원(Monastery of Hosios Loukas)에 들르기로 했다. 아침을 간단히 먹은 일행은 큰가방을 호텔에 맡기고 작은 가방 하나씩 챙겼다. 시간을 절약하며 많은 곳을 구경할 방법을 찾다 보니 현지 여행사를 물색하게 되었는데 그리스에서 20여 년 살면서 현지 여행사를 운영하는 조 선생과 닿게 되었다. 그가 9인승 봉고차를 끌고 나타난 것은 오전 8시 조금 넘어서였다. 우리는 산뜻한 맘으로 차에 올라 출발했다. 길 곁의 건물 벽에는 내가 이해하기 힘든 그리스 글자와 그림들이 영화 필름처럼 이어졌다. 어디든 마찬가지다. 붉은색, 청색, 검은색….경제 불안에 따른 불만을 그렇게 표출한 것도 그 중에는 많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공항에서 아테나로 들어오면서도 그런 낙서를 숱하게 보았다. 폐가처럼 짓다 만 건물도 여러 채 보았다.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길 옆 건물에서도 그랬다. 실물 경제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풍경 같았다.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자랑했던 그리스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있다. 한국의 언론에도 `그리스 총파업 또 다시 마비`란 제목이 종종 타이틀로 뜬다. 긴축과 동시에 이뤄지는 증세 정책에 반대하는 그리스 시민들의 목소리는 크다. 현재도 금융 수혈은 진행중이다. 창 밖을 보던 난 광장 가운데 있는 조형물에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갔다.`이카로스의 추락!`그랬다. 철로 만든 조각품이 로터리 가운데 땅에 박히듯 거꾸로 놓여있다. 이카로스의 추락은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란 것을 가르치는 그리스 신화다.아테네가 미노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왕.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로, 법을 제정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죽어서는 저승의 재판관이 됨)와의 전쟁에서 패했을 때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는 사람들이 미노타우로스의 먹잇감으로 잡혀가는 것을 보고 일부러 포로가 되어 크레타로 갔다. 미노타우로스는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와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 사이에 낳은 황소를 닮은 괴물이다. 그는 매일 사람을 잡아먹어야 살 수 있다. 테세우스는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 공주의 도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탈출한다. 공주에게 탈출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라비린토스(Labyrinthos : 미궁)를 만든 다이달로스였다. 이것을 안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를 미궁 속에 가뒀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라도 탈출할 수 없는 미궁. 손재주가 좋았던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을 모으고, 밀랍으로 깃털을 붙여 날개를 만들어 미궁을 탈출한다. 날기 전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너무 높은 하늘은 밀랍이 녹으니 올라가지 마라.` 란 주의를 준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태양 가까이 오르다 그만 바다로 추락하여 죽는다. 다이달로스는 이카로스의 시신을 건져 올려 섬에 묻었는데, 이 섬을 이카로스의 이름을 따서 이카리아섬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카로스의 추락` 신화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리스 경제가 이카로스의 추락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하게 된 것을 가이드 겸 운전을 담당한 조 선생은 이야기한다.“그리스 경제의 몰락에는 정치인들의 썩어 빠진 부패와 인기에 영합한 포퓰리즘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낙천적 성격이 끌고 온 것입니다.”이 말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상은 좋지만 그것이 실현 가능한 일일 때, 백성은 허황된 꿈의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차는 시내를 벗어나 바다를 곁에 두고 달리다 산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 좌측으로 테베 마을을 멀리 두고 있다. 테베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의 신화 발상지이다. 이어서 파르나쏘스 산이 보이는 곳 가까이 `레테(망각의 강)`란 신화와 관련된 곳을 지난다.그리스는 곳곳이 신화의 배경이며 고전의 터전이다. 신화는 스토리 텔링으로 이카로스 아버지가 만든 깃털 날개를 달고 세계 곳곳으로 날아간다. 오늘의 첫 목적지 호시우스 루카스 수도원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였다.호시우스 루카스 수도원은 델포이에서 37km 떨어진 곳으로 스테리 헬리콘 산기슭에 위치한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수도원으로 걸어가는데 앞쪽 계곡으로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수도원 입구 앞 넓은 공터에는 수령 수백 년 되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성지순례로 그곳을 찾은 그리스 사람들이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한가해 보이는 것이 평화롭다. 고된 삶의 길에서 정적인 수도원을 찾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며 지친 영혼에게 신선한 바람을 넣어주는 일이다.나무 그늘에서 오밀조밀한 수도원 전체의 모습을 바라본다. 참 예쁘다. 건축의 낯섦이 이국의 모습을 확 느끼게 한다. 연붉은 벽돌로 쌓은 독특한 건축물이 건축미학의 모델이 될 것 같다.그리스는 그리스 정교가 국교다. 국민 대부분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결혼하고, 죽으면 영결미사를 드린다. 성인의 성화가 그려진 작은 문을 통과하자 대성당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호시우스 루카스` 수도원은 그리스 중세 비잔틴 교회 중 그리스 신화 속 물의 요정 `다프네`란 이름을 따온 다프니(Daphni) 수도원,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모자이크 벽화로 유명한 키오스 네아모니(Nea Moni) 수도원과 함께 1990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이들 수도원들은 중기 비잔틴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서로 떨어져 있지만 건축의 형식이나 장식 등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호시우스 루카스 성인은 953년 56세 때에 7개월을 더 살고, 8시간만에 돌아가셨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겸손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치유와 예언의 능력(은사)을 갖고 있었다. 962년 크레타가 이슬람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그의 예언처럼 크레타는 동방교회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죽는 날도 정확하게 예언했다고 한다. 지하 한 방에는 루카스의 관도 모셔져 있다. 십자가 형태로 꾸며진 대성당(Katholikon:카톨리콘) 안으로 들어갔다. 사면의 벽은 성화로 가득했다. 둘레의 사각형 건물들이 중앙의 대성당 높은 팔각형 돔을 둘러싸고 있다. 작은 방들을 대성당 둘레에 건축함으로써 실내 공간의 용적률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각 방의 기능을 잘 활용할 수 있게 꾸몄다. 교회 바닥과 벽면과 천정의 대리석, 프레스코화, 모자이크 등 풍부한 장식들 하나하나가 최고의 예술품으로 정교하고 조화롭고 호화롭다. 아치형의 천장에는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조화롭게 프레스코화가 이어진다. 예수의 생애도 있고, 사도들의 모습도 있다. 중앙부 돔의 지름은 9m다. 비잔틴 건축 양식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준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듯 성화를 올려본다. 천 년 이상의 역사 속에는 한 생애의 삶이 바톤을 이어받듯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외벽을 본다. 돌과 벽돌과 흙으로 쌓은 외벽이 연한 황토색으로 붉다. 밖에서 보는 건물 곳곳의 창문도 아치형으로 정교하고 멋지다. 빼어난 건축인의 손길이다. 천년 전의 출발이 지금도 진행되고 천년 후에도 진행될 것이다. 그것은 이승을 벗어나 후세에 대한 천국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그것이 확실함을 호시우스 루카스 수도원에서 본다.

2012-10-26

신화가 전하는 인류 최초 법정 아레이오스 파고스

이번 주부터 하재영 시인의 그리스 기행문을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그리스는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반도국이면서 수많은 철학자를 배출하고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꽃피운 나라입니다. 현재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낙천적인 그리스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수많은 문화유적을 지역마다 보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재영 시인의 `신화의 나라 그리스 기행`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아레이오스 파고스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밟았던 곳을 다시 밟는다. 가까운 곳이 아닌 먼 나라 그리스.아테네 공항에서 5유로 티켓을 끊고 탄 버스는 펑 뚫린 길을 벗어나 시내버스처럼 곳곳 에 멈춰 손님을 태운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들어서며 나는 지난 번 찾았던 곳을 떠올렸다.파르테논 신전, 아고라, 제우스 신전, 모나스티라키, 오모노이아, 고고학 박물관….6년 전 겨울이었다. 흰색이 주조색인, 나라 인구의 절반 가까운 사람이 사는 그리스 아테네에 들어서며 난 내 여행 이력에 새로운 곳을 보탰다는 설렘으로 온몸은 충만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1호 `아크로폴리스(Acropolis=우뚝 솟은 곳이란 뜻으로 `파르테논 신전`이 있음)`을 바라보며 후일 다시 이곳을 밟을 수 있을까? 다시 찾는다면 누구랑 동행하게 될까?그런데 또 밟는다. 가까이 지내는 문우 두 명과 나, 그리고 그들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여성 셋, 그렇게 여섯 명이 한 팀이 되어 떠난 여행이라 의미는 각별했다. 이 여행을 위해, 조각난 천을 이어 만든 조각보처럼 일행들은 시간의 자투리를 모으기 위해 땀흘렸다. 시간 조각보 위에 돈을 모으고 일정을 짜고, 드디어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한 것이다.공항을 출발한 지 한 시간 지나 버스는 종점 신타그마 광장에 도착했다. 우리가 내린 버스엔 공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다시 탔다. 신타그마 광장 가까운 숙소에 짐을 푼 우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오늘의 일정을 협의했다. 우선 아크로폴리스로 가기로 했다. 숙소를 나서기 전 벽면에 걸린 그리스 지도를 보았다. 섬, 섬, 섬…. 그리스는 섬이 많은 나라다.그 섬마다 신화 한 자락 끈을 잇고 있는 신화의 나라이기도 하다.차 한 대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 응달을 따라 일행은 발을 옮겼다. 여름 휴가철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높은 온도에 비해 응달은 시원했다. 길가의 상점을 기웃기웃하며 더딘 걸음으로 아레이오스 파고스(Areios Pagos=아레스의 언덕이란 뜻)에 올랐다. 반질반질한 바닥은 수천년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미끄러웠다.신화에 따르면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인류 최초의 재판이 열렸던 곳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는 딸 알카페를 겁탈하려는 아리로티오스(포세이돈의 아들)를 죽였다. 결국 살인죄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올림포스 신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정당방위로 인정하여 무죄 선고를 한다. 바로 그 장소가 아레이오스 파고스다. 현재 그리스 대법원의 이름도 아레이오스 파고스다. 이런 신화적 요소가 있는 이곳은 사도행전 17장에서 보듯 아테네 기독교 전파와 밀접한 맥을 잇고 있는 곳이다. 사도 바오로가 이곳에서 전교를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시내를 배경으로, 아크로폴리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천천히 걸어서 아크로폴리스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문이 닫혔다.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일요일은 오후 2시 45분까지 입장할 수 있다. 우린 다음에 구경하기로 하고 아크로폴리스를 한 눈으로 조망할 수 있는 필로포스(Philopos) 언덕으로 향했다. 필로포스 언덕은 아크로폴리스 남서쪽에 있는 낮은 산이다. 그곳엔 소크라테스가 갇혀 있었다고 전해지는 동굴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받기 전까지 두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동굴 속에서 머물렀다고 한다.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스승이며 `너 자신을 알라!`란 말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다. 기원전 470년 경 태어나 폴리스의 신들을 모독하고 젊은이를 선동한다는 이유로 기원전 399년 사형을 받은 사람이다. 하늘 중심의 신화적 철학에서 인간 중심의 철학을 주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키케로는 “소크라테스야말로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고 했다. 입구는 쇠창살이다. 관광객의 발길이 뜸하다. 아테나엔 이곳보다 더 가치를 부여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우린 필로포스 언덕 위에서 아크로폴리스를 조망하고, 남쪽의 피레우스(Pireus)항도 내려보았다. 피레우스항은 아테나로 들어오는 배들이 정박하는 항구다. 대부분의 크루즈 투어도 이곳에서 출발하고 도착한다. 파르테논 신전을 올려볼 수 있는 올리브 나무 그늘에 앉아 이번 여행 일정을 짠 최 형의 설명을 듣는다.“…. 파르테논 신전은 전쟁의 여신 아테네를 모신 신전으로 다른 여신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도리아식 건축의 백미죠.”최 형의 이야기를 들은 우린 올리브 나무 그늘로 이어진 길을 밟으며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으로 향했다. 내가 6년 전 이곳을 찾았을 당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파르테논 신전 동편에 있었다. 전시실은 파르테논 신전의 기단보다 낮은 곳으로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한 유적을 주로 전시했다. 그런데 그 사이 새롭게 박물관을 건설하고 그곳에 있던 유물을 옮긴 것이다. 일설에는 영국에서 빼앗아간 유물(특히 `엘긴 마물`)을 되찾으려 했는데 `당신 나라에는 그런 유물을 보관할 박물관이 없잖느냐?`며 그리스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에 건설했다고도 한다. 그렇기에 옮긴 박물관엔 `뉴`자를 접두사로 붙이고 있다.`와!`정문을 통과했을 때였다. 박물관 내부로 가기 위해서는 강화유리를 밟아야 하는데 그 아래쪽은 유물 발굴 모습 그대로다. 그야말로 오래된 역사의 현장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곳에서 발행한 브로슈어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 남쪽 300미터 떨어진 곳에 베르나르 추우미(1944년생으로 뉴욕에서 활동)와 아테네에서 활동하는 ARSY의 미카엘 포티아디스가 설계한 2만1천평방미터의 건물로 1만4천평방미터의 전시공간을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건물은 4층으로 되어 있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면 가게, 카페와 짐을 보관하는 방이 있고, 비탈진(slopes) 통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양 옆으로 고대의 도자기, 부조들을 전시한다. 2층(level 1)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에렉테이온(Erectheion) 신전 여인상과 파르테논 이전 및 로마 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3층(level 2)에는 기념품 가게와 아크로폴리스를 전망할 수 있는 테라스가 있고, 4층(level 3)은 파르테논 갤러리로 파르테논 신전을 원형 형태로 기둥과 부조, 석상을 배치하여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우리 일행은 흩어져 천천히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3층에서 4층으로 관람했다. 유물유적 4천여 점이 눈앞에 있다. 그것을 하루 중 몇 시간으로 둘러본다는 일은 아무래도 수박 겉핥기식이 될 것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작품들을 감상한다. 많은 것들이 눈에 익다. 전에 왔을 때 꼼꼼히 훑어본 작품들이고 또 책을 통해 본 작품들이다.전에 왔을 때 메모했던 글을 상기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조금 전 파르테논 신전 박공에서 보았던 니레아스상이죠. 상체는 인간이지만 꼬리를 보세요. 뱀입니다. 반인반수(半人半獸)죠. ….이곳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시 물질을 이루는 원소로 생각했던 불, 물, 새(공기)를 상징합니다.`이런 설명은 4층 파르테논 갤러리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내부엔 파르테논 신전을 설명하는 비디오 실이 있어 지친 발길을 멈추고 쉴 수 있다.신화란 무엇일까? 역사란 무엇일까? 문화란 무엇일까?여행 첫날 고대문화의 진수를 보면서 우리 문화를 생각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든 국립 경주박물관이든 박물관에 있는 조상의 흔적이 현재의 우리 문화를 창출하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낯선 땅에서 새롭게 발견한다.계속

2012-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