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은퇴 후 우리에게 맞는 ‘천자문’을 짓고 서예를 가르치다

사회생활을 하면 누구나 은퇴하게 되는데 정치인도 예외일 수 없다.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물러나 어떤 일을 했으며, 무엇을 남겼을까? 그리고 그의 장남 최승태 선생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며 최승태 선생과의 대담을 마무리했다.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최승태(이하 최) : 아버지는 동양 고전에 조예가 깊고 붓글씨를 잘 썼어.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였지. 아버지는 말년에 서울 장충동 쪽에 목운서실(木雲書室)을 열고 서예를 가르쳤어. 사실 그 서실은 정치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지. 유진산을 비롯해 고흥문 국회부의장, 유진오 고려대 총장, 권중돈 국방부장관 등 아버지와 친분이 깊은 분들이 드나들었어. 그리고 1977년에 ‘국민 천자문’을 냈지. 김 : 처음 들어보는 책입니다.최 : 쉽게 말해 아버지가 ‘천자문’을 직접 만들었어. 오랜 옛날 중국에서 만든 ‘천자문’은 우리 현실과 맞지 않으니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천자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야.김 : 그 책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최 : 딱 한 권 남았어.최승태 선생이 건네준 국배판형의 ‘국민 천자문’은 “천신음우(天神陰佑) 단조시기(壇祖始基)─ 하느님과 신령님이 음으로 도와서 단군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를 세우셨다”로 시작해 “사기동몽(使其童蒙) 서기편습(庶幾便習)─ 어린이와 초학자로 하여금 배움에 편리함이 있음을 바라는 바이다”로 끝이 난다.저자 서문에서 최원수 선생이 이 책을 낸 의도를 읽을 수 있다.이 ‘국민 천자문’은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산업, 문화, 역사, 윤리 등 각 부문에 걸쳐 사자이행(四子二行) 팔자(八字)를 일구절(一句節)로 하고 국민 생활감정에 알맞게 뜻이 통하도록 하여 쉽고 빠르게 습득할 수 있고 이용가치가 많은 것으로 엮어 보았다. 우리 어린이나 초학자들이 이 책만 제대로 익히게 되더라도 붓글씨를 배움과 아울러 신문이나 잡지 등 한자가 섞인 여러 간행물을 용이하게 해독할 것이요, 각자의 인생관, 국가관이 은연중 확립될 것이며 민족정신의 함양과 나아가 민주국가의 공민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유진오가 쓴 추천사에서는 최원수 선생의 성품과 서예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목운(木雲)은 해방 전후를 통하여 독립과 건국에 그의 청춘을 기울였고 건국 후에는 초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허다한 공적을 세운 것으로 믿고 있다. 원래 성품이 온아하면서 강직하여 권력을 멀리하고 오직 안빈낙도하는 청백한 기품으로 정계에서도 언제나 야측(野側)에서 시종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십수 년 전부터 정계를 물러나면서 고전의 연구와 함께 서예에 정진해온바 그 유려하면서 단정하고 웅휘하면서 자유자재한 필법은 이미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하겠고 역대 명필들의 진수를 두루 섭렵하면서 독창적인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김 : ‘국민 천자문’에 최원수 선생이 펼치고자 했던 뜻과 남기고 싶은 말씀이 담겼다고 봐도 되겠군요. 이제 최원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장남의 눈에 비친 부친은 어떤 분이었는지요?최 : 앞서도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분이고 아버지는 세상의 병을 고치려 한 분이지. 아버지는 신념과 원칙을 중요하게 여겼던 분이고 그 때문에 말 못 할 고초를 겪었어. 비록 가슴에 품은 큰 뜻을 모두 펼치지 못했지만 신념을 지키며 꿋꿋이 사신 아버지가 존경스러워.김 : 최원수 선생은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셨는지요?최 : 지병이 악화되면서 1987년 초에 내가 살고 있던 울진으로 모셨지. 작고하신 후에 울진에 묘를 썼다가 2010년에 포항 죽도성당 추모관으로 옮겼어.김 : 이제 최승태 선생님의 삶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군요.최 : 내 인생이야 할 이야기가 특별히 있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포항에 오게 되었어. 포항에 있는 아버지의 동지들이 아버지의 정치적 기반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 아버지는 서울과 포항을 오가는 형편이었으니 포항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그런데 그 역할을 누가 하겠어. 장남인 내가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포항에 오게 되었어.김 : 포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최 :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의 사람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야당 사람들을 챙긴 거지. 당시 야당 생활은 참 고달팠거든. 밤마다 그 사람들과 어울려 소주에 노가리를 씹으며 울분을 달랬지. 김 : 선생님도 고초를 많이 겪었겠군요.최 : 오죽했겠어. 우리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경찰에서 일일이 확인했지. 내가 타지에 갔다 오면 정보과 형사들이 어디에 갔다 왔냐며 꼭 물었고.김 : 그 과정에서 각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최 : 1983년에 YS가 단식할 때였어. YS가 민주화를 위해 결연한 각오로 목숨을 걸었지. 그런데 세상은 그런 엄중한 상황을 모르는 거야. YS의 최측근인 김덕룡 의원한테서 단식 상황을 적은 자료를 받아 포항 해도의 한일인쇄소에서 복사했지. A3 크기의 유인물을 포항과 영덕, 울진 곳곳에 뿌렸어. 그때 그 일을 김기철과 함께했지.김 : 김기철 선생과는 언제 인연이 되었습니까?최 : 1982년 겨울이었을 거야. 서울에 있는 김덕룡 의원한테서 전화가 왔어. 자신이 신뢰하는 김기철이라는 후배가 포항으로 가게 되니 잘 챙겨달라고 하더군. 그때 인연이 돼 지금까지 동고동락하고 있어.김 : 김기철 선생과도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습니다.최 : 김기철은 1986년 6월에 결혼했어. 3선 포항시의원을 한 차동찬이 부인이야. 오거리 남도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는데 주례를 계훈제 선생이 맡았고 당시 유명한 야당 인사와 민주화운동 인사가 대거 왔었지. 그 바람에 전투경찰 2개 중대가 예식장 주변에 배치되었어. 결혼식을 마치고 계훈제 선생과 영일대해수욕장 횟집에서 식사를 함께한 기억이 나는군.김 : 선생님께서는 울진에도 계셨지요?최 : 한때 울진종합터미널을 운영했어. 울진에 있을 때 울진여고에 사격장을 지어주기도 했지.김 : 울진에서도 민주화운동을 하셨습니까?최 : 당연하지. 1984년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천만인 서명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열렸어. 안동에서도 그 대회가 열렸는데 울진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려면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야 했어. 그래서 냉동차에 20여 명을 태우고 울진에서 안동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없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중간에 내려서 숨을 돌리고 다시 안동으로 갔었지.김 : 선생님의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요?최 : 1남 3녀를 두었어. 아들 준석이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포항 해병대에 입대해 만기 제대했지. 그 후로 LA에서 사업하고 있는데 준석이 사업장은 포항 출신 미국 유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어.김 : 선생님 가문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방을 마련해주셨군요. 이제 선생님과의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최 : 이제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아버지가 짧은 기간이나마 정치 지도자로서 이뤄낸 일의 의미는 결코 작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도자가 올바로 이끌어야 세상이 편안해지겠지. 앞으로 나라와 지역에 좋은 지도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야.끝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29

족청계 숙청되면서 정치 인생에 먹구름 드리워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굵직한 성과를 내면서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1950년대 초의 혼란한 정치 상황은 그의 정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맡았던 이승만과 이범석의 관계가 벌어지며 최원수 선생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 곁의 여러 정치인 중에 박일천 포항시장이 있습니다.최승태(이하 최) : 박일천 시장은 아버지가 마음 깊이 믿었던 분이지. 그분이 시장에 당선된 1952년 선거는 아주 치열했어. 시의원이 선출한 포항 최초의 민선 시장이라는 역사성도 있었고.김 : 시장 선거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습니까?최 : 시의원 20명이 시장을 선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지. 영일 갑구 국회의원인 아버지와 포항시 국회의원인 김판석의 힘이 크게 작용했어. 시장 선거를 앞두고 매일 우리 집에서 대책 회의를 했지. 뚜껑을 열어보니 박일천이 11명, 상대 후보는 9명을 확보했어. 아슬아슬했지. 이를 두고 시중에서는 ‘11파, 9파’라고 했어.김 : 다시 최원수 선생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954년 5월 20일 총선거에서 정당 공천제가 처음 시행됩니다. 이 선거에서 최원수 선생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자유당 공천을 받은 박순석 후보에게 패합니다. 이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시지요.최 : 이범석이 광복 직후에 족청(族靑,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해서 이끌었는데, 이승만이 이범석을 경계하면서 1953년에 족청계를 숙청하지. 그 바람에 이범석과 가까웠던 아버지도 화를 입게 된 거야. 사실 아버지는 의정 활동을 잘했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계속할 거라고 했어. 결국 공천을 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1954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 당시 선거는 정상적인 선거라고 하기 힘들었어. 불법이 난무했지. 자유당 공천을 받아야 당선될 수 있었어.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는 그때부터 기울어버린 거야.조선민족청년단은 1946년 10월에 미군정의 전면적인 후원을 받으며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이다. 비정치, 비군사, 비종파를 내세우며 10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을 조직했다. 사상적으로는 민족 지상, 국가 지상을 내걸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편 좌익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1948년 11월부터 이승만의 지시로 청년단체 통합이 추진되어 새로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해산 뒤에도 족청 출신들은 ‘족청계’라고 불리는 세력을 형성해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1953년 12월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이들이 자유당에서 제명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김 : 이범석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자유당에서 축출되자 이범석과 가까웠던 최원수 선생의 정치 인생에도 암운이 드리우는군요.최 : 그런 셈이지. 이승만이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한 후 아버지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어. 하지만, 그 후로 이승만과 자유당도 몰락의 길을 가게 되지.김 : 만약 최원수 선생이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했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요?최 : 포항과 흥해 사이에 있는 소티재를 편평하게 해서 포항과 흥해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게 아버지의 꿈이었어.김 : 그 일이 가능했다면 굉장히 큰 사업이었겠군요.최 : 아버지는 큰 구상을 하시는 분이었으니까.김 : 1954년 총선에서 이채로운 건 하태환이 포항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겁니다.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면 당선이 거의 힘든 상황에서 하태환의 당선은 이변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하태환은 최원수 선생의 외사촌 동생이라고 들었습니다.최 : 그렇지. 하태환이 일본의 리쓰메이칸대학에 다닐 때나 동지교육재단을 세울 때 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었어. 1954년 총선은 불법이 난무해서 시민들의 불만이 높았지. 다리 한쪽이 불편했던 하태환은 지프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 지프차가 동빈내항에 빠져버리는 사건이 있었어. 장안에 화제가 된 그 사건으로 하태환한테 동정표가 많이 갔을 거야. 그 선거에서도 아버지가 하태환을 많이 도왔지.하태환(1913∼1991)은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아 재선 의원이 된다(하태환에 관한 이야기는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1’(2021)에 실려 있다). 하태환과 함께 동지교육재단을 설립한 그의 처남 김병윤(1922∼2013)은 포항시장(1959∼1960, 간선)을 거쳐 1971년 제8대 총선(포항·울릉, 민주공화당)에서 당선된다.김 : 최원수 선생은 그 후로 선거에서 잇달아 패하게 됩니다.최 : 포항에서는 자유당과 공화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면 당선이 힘들었지. 아버지는 야당을 지키며 고생을 많이 하셨어.김 : 정치를 하면서 다른 일도 하셨는지요?최 : 사업을 계속하셨지. 광복 직후에는 포항신문사를 경영했고, 그 후에 대한조선, 덕수양조장, 동운여객, 미흥방직 등을 운영했어. 사업에 전념했다면 크게 성공했을 거야.김 : 최원수 선생 곁에서 여러 정치인을 보셨을 텐데 기억이 남는 분이 있습니까?최 : 박경석 의원은 동아일보 기자 시절부터 아버지가 아끼던 고향 후배였지. 박경석의 중매를 아버지가 섰어. 아버지가 유진산 신민당 총재에게 박경석을 잘 부탁드린다고 했고, 유진산이 장홍염 의원에게 박경석을 소개해 박경석과 장홍염 의원의 딸이 결혼하게 된 거야.유진산(1905∼1974)은 7선의 거물 정치인이며, 장홍염(1910∼1990)은 전남 신안군 출신의 재선(제1, 2대) 국회의원이다. 박경석(1937∼2019)은 포항 송라면 지경리 출신으로 포항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동아일보 정치부장 등을 거쳤다. 1980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로 당선되었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정당 후보로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서 출마해 서종렬 민한당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김 : 박경석 의원의 친동생이 박경용 시인이지요?최 : 박경용은 어릴 때부터 내 친구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同時) 당선되었으니 문학적으로 비범한 친구지. 박경석 의원이 모범생이고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박경용은 예술가 기질이 강했어. 박경석 의원이 한번은 나한테 “경용이가 머리는 나보다 좋다”고 하더군. 박경석 의원은 동생 경용이를 그렇게 아꼈어.박경용(1940∼)은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을 거쳐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출생지인 송라(松羅)가 그의 아호다. 1958년 동아일보에 시조 ‘청자수병(靑瓷水甁)’, 한국일보에 동시 ‘풍경(風磬)’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시집 ‘어른에겐 어려운 시’, 시조선집 ‘적(寂)’, 시선집 ‘소리로 와서’ 등을 발간했으며, 세종문학상(1969)과 대한민국문학상(1984) 등을 수상했다. 포항에서 한흑구 선생이 주도한 흐름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김 : 선생님 친구 가운데 떠오르는 분으로 또 누가 있는지요?최 :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포항에서 출마한 변석화라는 여의사가 있어. 남편이 김두수라는 의사였지. 그분 차남이 김여탁이라고 내 친구야. 김여탁은 포항국민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MIT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어.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 개발을 할 때 대덕연구단지에 왔다가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바람에 난처한 처지가 되었지.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했어.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나하고 통화해. 여탁의 형 김여대는 대우중공업 부사장이었는데 우리나라가 동구권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가교 역할을 했어. 안종식이라는 친구도 빼놓을 수 없군. 청하 출신으로 포항수산고를 졸업하고 파독 광부로 갔다가 미국 LA에서 봉제업으로 크게 성공했지. LA에 있는 한국 교민들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마당발이기도 해. 포항시와 미국 롱비치(LongBeach)시가 자매결연할 때 이 친구가 다리를 놓았지.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25

포항읍을 시로 승격시키고, 호리못을 만들어

최원수 선생은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되어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끈 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영일군 갑구)에서 당선된다. 군수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합쳐 5년 3개월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공직 생활을 했는데, 그마저도 전쟁 때문에 온전한 의정 활동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하지만 그가 해낸 굵직한 일을 살펴보면 진정한 지도자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김도형(이하 김) : 당시 영일군수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습니까?최승태(이하 최) : 경상북도 시장·군수 회의에 가면 큰 목소리를 낼 정도로 대단했지. 영일군이 농지가 넓고 어획량이 많았거든. 그리고 군수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컸어. 경찰서장이 아버지를 깍듯이 모셨지. 경찰서 정보과의 힘이 셌는데 정보2계 담당이 거의 매일 아버지를 찾아와 동향 보고를 했어.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업적이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최 : 영일군에 포항읍과 구룡포읍 2개 읍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포항읍을 시로 승격한 것은 큰 의미가 있지. 사실 당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될 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야. 하지만 아버지가 워낙에 열정적으로 시 승격을 추진했고, 정부 인맥도 좋아서 시로 승격되었던 것 같아.포항시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영일군의 광복 당시 행정구역은 포항읍을 포함해 2읍 13면 1출장소 237정동리(町洞里)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까지도 경북의 1부, 22군, 11읍, 240면이 1943년 10월 행정구역과 같은 수로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영일군의 경우도 정부 수립 때까지 읍면의 수는 변동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포항읍은 1949년 8월 14일 포항부로 승격되어 영일군에서 분리되었고 8월 15일 ‘지방자치법’ 법률 제32호에 의해 포항시로 개칭되었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2010, 165∼166쪽 참조 다음의 일화는 최원수 영일군수의 안목과 추진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포항시 승격 추진 운동을 전개하여 이일우, 박동주, 박일천 등과 시 승격 진정차 상경하니 내무부 어느 국장이 농담조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되면 영일군수의 산하에서 이탈 행정구역이 독립되는데, 군수가 솔선하여 시 승격 운동을 하러 상경해 진정하는 예(例)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최 군수는 앞장서서 진정을 하러 다닙니까” 하고 물으니 최원수 군수가 “내가 백 년 동안 영일군수로 있는 것도 아닌데 영일군의 발전보다 포항이 시가 되어 번영하는 것이 국가백년지대계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1987, 879∼880쪽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지요?최 : 아버지는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셨지. 특별한 연회 외에는 외식을 거의 하지 않았어. 할아버지처럼 아버지도 원칙주의자였지. 그리고 영일군 공무원들이 탄복할 정도로 글씨체가 좋았어.김 : 최원수 선생은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영일군 갑구에 출마해 당선됩니다. 그 직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극도의 혼란 속에서 의정 활동을 하게 됩니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최 : 우선 흥해 신광에 있는 포항에서 가장 큰 저수지 용연지(龍淵池, 호리못)를 만든 것을 꼽을 수 있겠지.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 기반의 경제였잖아. 사람들이 먹고살려면 농사가 잘돼야 하고 농사가 잘되려면 농업용수를 확보해야 했지. 하지만 당시 농지는 대부분 천수답이었어. 그래서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농림부에서 막대한 예산을 끌어와 용연지를 만든 거야. 그 덕분에 흥해의 경작 면적이 영일군 전체 경작 면적의 40% 가까이 된 걸로 기억해. 흥해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공적비를 세워주었지.용연지는 1952년 8월 15일 착공해 1961년 12월 30일 준공되었다. 저수량은 657만t이며, 용수로는 2만 8천368m에 이른다. 공적비는 1990년에 세워졌으며 “흥해읍 매산리 외 52개 마을 농민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다.김 : 전쟁 중에 대규모의 저수지를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최 : 오죽했겠어. 그 정도 공사를 하려면 불도저가 있어야 했지만 당시 포항에는 한 대도 없었어. 부산에서 불도저를 갖고 와 공사를 했지.김 : 최원수 선생의 이력을 보면 학교를 몇 군데 설립한 게 눈에 띕니다.최 : 해아중학교(현 청하중학교)와 죽장중학교, 기계중학교 세 곳을 설립했지. 아버지는 지역과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학교 설립에 앞장섰지. 김 : 학교를 세우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최원수 선생은 어떻게 짧은 기간에 학교 세 곳을 세우셨는지 궁금하군요.최 : 아버지는 학교를 하루빨리 개교하는 게 중요하니까 문교부에 일단 학교 설립 인가부터 내달라고 요청했지. 그뿐 아니라 동지중·고등학교가 설립 인가를 받는 과정은 물론 학교 건물을 지을 때 미군 부대에서 자재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도 아버지가 큰 도움을 주셨어. 동지교육재단의 설립자인 하태환씨가 아버지와 외사촌이라는 인연도 있었지.김 : 최원수 선생은 용연지를 조성해 경제적 기반을 다졌고, 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쓰셨군요.최 : 그렇지. 나라와 지역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려면 경제와 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어.김 : 그 밖에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요?최 : 6·25 전쟁이 터지고 보도연맹 사건이 있었잖아. 트럭에 실려가던 억울한 보도연맹원들을 아버지가 여럿 구해냈어. 좌익으로 찍히면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억울한 좌익 연루자를 여러 명 살려냈지.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빨치산이 포항에서도 암약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죽장이야. 죽장은 산악지대와 연결되면서 민가도 있으니까 궁지에 몰린 빨치산이 식량을 거둬가기에 좋은 곳이었지. 국군과 경찰로서는 죽장이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어. 그때 그 유명한 경찰 김종원이 죽장을 소개(疏開)하려고 하자 아버지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울 일이 있냐며 강력하게 반대했어. 죽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김종원과 대판 싸웠지. 아버지는 당시 비호(飛虎)라고 불리던 김동헌을 경찰지서장으로 투입해 양민은 보호하면서 빨치산을 제압했어. 아버지가 그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죽장에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지 몰라. 죽장 사람들이 아버지가 죽장을 살렸다며 공덕비를 세워주었지.김종원(1922∼1964)은 광복 이후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경찰이다. 1951년 2월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이 발생하자 3월 29일 국회의원 신중목이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4월 7일 합동진상조사단이 거창군 신원면으로 가던 도중,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부하들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합동조사단에 공포를 쏘아 현장 접근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실행했음을 밝혀냈다. 김종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뒤 군에 복직과 동시에 파면 뒤 경찰로 이직했다. 1952년 7월 전북경찰국장을 시작으로 경북경찰국장 등을 거친 뒤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 등을 역임했다. 치안국장 재직 시절에는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의 배후로 밝혀져 파면된 뒤 구속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22

이승만 눈에 들어 영일군수에 발탁 … 이범석과 가까워

1948년 5월 10일에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는 인구 10만 명 기준의 1개 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였다. 전국 200개 의석 가운데 경상북도가 33개 의석을 차지했으며 영일군(현재 포항시에 해당)은 갑구·을구의 선거구에서 의원 2명을 선출했다.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 갑구에 출마했지만 박순석 목사에 밀려 낙선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돼 1950년 4월 20일까지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끌었다.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과 당시 포항의 정치, 사회 상황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이 궁금하군요.최승태(이하 최) : 아버지는 광복 후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일군지부장을 맡으면서 지역 우익의 구심이 되었지. 학력이 좋은 데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도 열성적으로 했으니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발탁했다고 보면 될 거야. 경북 지역의 시장·군수 중에 최연소였지.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1946년 2월 8일 서울에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 발족한 단체다. 발족 당시의 임원은 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 고문 김창숙·함태영·조만식 등이다. 전국의 시·도·군까지 조직을 확대하면서 국민운동 단체로서 방대한 조직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조직이 비대해지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 여러 계열의 파쟁으로 인해 발족 직후부터 간부 진영의 개편이 되풀이되었다. 이 단체는 후일 이승만 계열의 우익 국민운동 조직으로 변화하면서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하는 이승만 지지 세력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김 : 혹시 조부께서는 장남(최원수)이 가업을 이어받길 바라지 않았습니까?최 : 할아버지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 실제로 아버지는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웬만한 한의사 못지않은 수준이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히 한의원을 하고 있을 분이 아니었지. 할아버지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분이었다면, 아버지는 세상의 병을 고치고 싶어 하셨던 분이었어.김 :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 중 상당수가 좌익 활동을 했지요. 최원수 선생은 어떻게 우익 쪽에서 활동하게 되었나요?최 : 일제강점기 때부터 포항에는 좌익이 많았어. 포항을 제2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한 예로, 일제강점기 때 영일군 경찰서장이 좌익이었는데 경찰서장이 죽자 좌익의 주도로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지. 좌익이 워낙에 득세하니 아버지는 세상이 사회주의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김 : 당시에 좌익이 많았던 이유가 있을까요?최 : 일제강점기부터 많은 지식인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는데 포항도 다를 바 없었지. 광복 후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사회주의가 확산되기 좋은 상황이었어. 대표적인 이슈가 토지개혁이었지. 남쪽에서 추진하던 토지개혁에 문제가 없지 않았거든. 사회주의 세력이 이걸 파고들었지.김 : 혹시 포항 좌익의 거점 같은 게 있었는지요?최 : 불종거리에 있던 수복여관, 죽도시장 앞에 있던 종로여관이 좌익의 아지트였어. 나중에 좌익 검거 바람이 불 때 종로여관의 주인이 일본으로 피신했지. 그 바람에 그 집 식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김 : 좌우익 간의 갈등이 심했을 텐데 혹시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요?최 : 아버지가 군수가 되기 전에 우리 집이 지금 북포항우체국 근처였어. 집에서 청년단체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곤 했는데, 어느 날 어른 머리만 한 큰 돌이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들어왔어. 아마 누가 그 돌을 맞았으면 중상을 입었을 거야. 다행히 방바닥에 돌이 떨어져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 그 자리에 있던 박일천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돌 던진 사람을 잡아왔는데,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라며 풀어주라고 했어.약운(若雲) 박일천(1915∼1998)은 1952년 5월 시의원들이 간접선거로 선출한 포항 최초의 민선 시장이다. 시장 임기는 1952년 5월 5일부터 1953년 6월 30일까지 1년 2개월이었다. 최원수 선생의 신임이 각별했던 동지로 알려져 있다. 박일천은 광복 후 포항 지역 최초의 역사지인 ‘일월향지(日月鄕誌)’(1967)의 발간을 주도했고 포항종합제철 유치 운동, 포항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 등에 앞장섰다.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은 후일 포스텍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1982년 발족한 포항지역발전협의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1998년 작고 후에는 유족들이 유산 2억 원을 포스텍의 발전기금으로 기탁해 미담이 되었다.김 : 그 후에도 선생님 댁이 좌익의 공격을 받았습니까?최 : 아버지가 영일군수에 취임한 후 관사로 이사 갔어. 지금 포항세무서와 포은중앙도서관 중간에 있는 적산가옥이 군수 관사였지. 그 관사가 수도산에서 가까웠어. 좌익이 수도산에서 나팔을 불며 시위하면 어린 나조차 공포감에 휩싸였어. 그뿐 아니라 좌익이 관사 담벼락에 붉은색 표시를 해놓고 테러 표적으로 삼았지. 어머니는 항상 물을 팔팔 끓여놓고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했어. 좌익 쪽에서 갑자기 공격해 들어오면 끓인 물을 퍼부으려고 말이야. 당시에 우익 활동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지. 김 : 최원수 선생이 광복 후 가깝게 지낸 분 가운데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까?최 : 아버지는 많은 사람과 친분이 있었는데 철기 이범석 장군과 특히 가까웠지.철기(鐵驥) 이범석(1900∼1972)은 광복군 참모장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했으며 ‘국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1915년 여운형과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관 등을 맡았으며 1919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제2제대(第二梯隊)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에는 제2지대장으로 미국군과 합동작전에 참가했고 1945년에 광복군 참모장이 되었다. 1946년 6월 환국해 정부 수립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했다. 1951년 12월 이기붕 등과 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52년에는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53년 이승만의 족청계(族靑系, 조선민족청년단)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1967년 1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 회담을 성사시켜 통합 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김 : 이범석 장군과 최원수 선생 사이에 기억나는 일화가 있는지요?최 :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 이범석 장군은 중화요리를 잘 먹었지. 아버지는 이범석 장군 덕분에 중화요리를 잘 먹었고 중화요리에 대한 지식도 꽤 있었어. 아버지가 영일군수 시절에 집이나 군수 관사에서 가끔 연회를 열었는데 그때마다 동순관(同順館, 중화요리 전문점)의 화교 주방장을 불러서 중화요리를 부탁했지. 동순관 주방장이 중화요리를 잘 만들었거든.포항에서 처음 문을 연 중화요리 전문점은 화교가 운영했다. 제1호는 진가현, 강성모가 동업한 동순관으로 후일 부산각(富山閣, 진가현)과 길성관(吉星關, 강성모)으로 분가했고, 이와는 별개로 중흥관(中興關, 왕문옥)이 있었다. 부산각과 길성관, 중흥관이 포항 중화요리 전문점의 트로이카를 이룬 셈이다. 진가현과 강성모는 한국인 자매와 결혼해 동서지간이 되었다. 현재 중앙상가에 있는 길성관이 유일하게 그 맥을 잇고 있다.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18

“곧 아흔이지만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해”

곧 아흔을 맞이하지만 한경식 선생의 기억력은 스무 살 청년 못지않았다. 포항제철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때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줬고, 당시 급박했거나 감동적이던 상황까지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반세기 전에 관계 맺었던 사람들 이름도 잊지 않고 있었다. 전남드래곤즈 사장을 끝으로 일흔 살이 가까워서야 조직 생활을 끝내고 자유로운 생활인으로 살아가게 된 한경식 선생. 그의 노년을 즐겁게 해준 취미는 그림 그리기였다. 주위에서는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솜씨”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 선생의 70대 이후 삶은 어떠했을까? 그 궁금증과 더불어 포항제철 후배들, 나아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격려와 당부를 전하고 싶은지 물었다. 홍성식(이하 홍) : 사장을 맡았던 축구단 전남드래곤즈가 만들어진 과정이 궁금합니다.한경식(이하 한) : 먼저 자문단을 구성해 광양에 있는 포항제철 협력업체들의 도움을 받았어. 협력업체가 직원들에게 경기 입장 티켓을 사주면, 그 회사 직원들이 축구장에 가서 응원도 하고 스트레스를 풀며 여가를 보낼 수 있지 않겠어. 게다가 전남드래곤즈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축구팀이니, 지역민들에게 ‘나도 우리 지역의 축구팀과 함께한다’는 자부심이 생겼지.1994년에 창단된 전남드래곤즈는 전라남도를 연고로 하는 K리그 소속의 프로축구단이다. 김태영, 김도근, 마시엘, 김남일 등 빼어난 수비수들을 배출한 구단이며, 체계적인 유소년 시스템이 구축된 구단이다. 같은 모기업을 가진 포항 스틸러스와 함께 선진 축구 시스템을 일찌감치 도입한 구단으로 평가받는다.홍 : 축구단 운영 역시 마냥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한 : 전남드래곤즈가 너무 잘해서 곤란하기도 했어.(웃음) 창단 초기에는 축구계 관계자 대부분이 신생 팀이니 하면 얼마나 잘하겠냐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뛰어난 성적을 거둔 거야. 게다가 포항제철의 최초 출발지이자 근거지인 포항의 축구팀(스틸러스)에게도 이길 때가 적지 않았으니 “한 회사가 축구팀 두 개를 운영하며 승부조작을 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까지 떠돌았지. 그것 때문에 나와 허정무 감독이 마음고생을 했어.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다 웃을 수 있는 추억이지.홍 : 30대부터 오랜 인연을 이어온 포항제철을 떠난 건 언제인지요?한 : 일흔 살이 가까워서였지. 1994년에 이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두 번째로 전남드래곤즈 사장을 한 이후야. 그때 든 생각은 ‘이제 후배들에게 모든 걸 물려주고 나는 남은 인생에서 해보지 못한 다른 걸 시도해야겠다’는 것이었지. 홍 : 그렇다면 그림은 은퇴 후에 그리기 시작했나요?한 : 그림을 그리는 건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했어. 당시는 “그림을 그려서는 밥을 먹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던 시절이잖아. 예술가 대접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지. 사실은 포항에서 광양으로 오면서부터 조금씩 시간을 내 붓을 잡기 시작했어. 젊은 시절엔 사진에도 관심이 있었지. 포항제철 역사에 관련된 사진을 많이 찍었어. 사진대회에 출품해서 입상한 경력도 있고.홍 : 주로 무엇을 그리십니까?한 : 광양으로 온 후에 ‘순천 미술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김덕기 화백을 만났어.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줘 지도를 받게 되었지. 휴일이면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가 머리도 식히면서 화우(畫友)들과 그림을 그렸어. 수채화를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유화를 시작하게 되었지. 그러면서 화가들이 참여한 단체에도 가입하고 전시회도 열게 되었어. 내 그림의 주된 소재는 세상 풍경이야. 삶의 체험을 풍경 속에 녹여내고 싶어. 그러고 보니 벌써 유화를 시작한 지 30년이 되었네.홍 : 적지 않은 연세인데도 새로 시작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시는군요.한 : 곧 아흔이지만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어?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나는 그들에게 “자기 앞만 보며 달려가지 말고, 소중한 걸 놓치는 게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홍 : 말이 나온 김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습니까?한 : 어떤 분야에서 일하건 자신의 몫으로 맡겨진 건 건성으로 넘기지 말고 끈질기게 파고들어 끝을 봐야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려면 하고자 하는 일을 연구하고 집중하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나 역시 아흔이 가까우니 그걸 알게 되었어.홍 : 포항제철 후배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텐데요.한 : 신문과 방송을 통해 포항제철의 상황을 보고 있지.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나와는 여러 면에서 생각하는 게 다를 거야. 다만 무언가를 이루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 시대를 뛰어넘는 진리 아니겠어. 2022년 태풍 힌남노가 포항제철을 덮쳤을 때 걱정을 많이 했지. 그런데 회사 구성원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고난을 극복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 이후에 모두의 노력으로 재난을 잘 극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지. ‘아직 포항제철의 전통은 살아 있구나’라고 칭찬해주고 싶었어.2022년 9월 6일 포항 일대를 덮친 태풍 힌남노는 여의도 면적의 세 배에 달하는 포항제철소 생산 라인을 완전히 침수시켰다. 하지만 포항제철은 135일 만에 공장을 복구했고, 그 과정을 ‘함께 만든 기적,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책에 담았다.홍 : 포항제철의 전통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합니까?한 : 그게 어떤 일이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남들이 말해도 포항제철 직원들은 해내곤 했어. 밤을 새우더라도 공사 기간을 맞추고, 기존의 해결 방식이 없다면 어떻게든 새로운 해결 방법을 기어코 찾아냈지. 그게 포항제철의 전통이 아닐까. 어떤 큰 고난도 이겨낼 힘이 바로 거기서 나오지.홍 : 포항제철이 다른 기업과 비교해 가진 장점은 뭘까요?한 : 어떤 사람들은 포항제철을 ‘주인 없는 회사’라고 말하는데, 실상 포항제철은 국민이 주인인 기업이라고 봐야 해. 그러니까 구성원들이 책임감 있는 자세로 일해야지. 내가 임원으로 있을 때도 후배들에게 항상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어.홍 :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인지요?한 : 젊은 시절에 국가 기간산업의 기틀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탰다는 거야. 어떤 어려운 일을 맡아도 절망하지 않았지. 고생이 클수록 고생 이후의 보람 또한 커진다는 걸 포항제철에서 일하면서 깨달았어. 돌아보면 그때가 내 삶의 황금기였지. 나와 동료들이 허허벌판에 세계에서 손꼽는 철강공장을 만드는 초석을 놓았어. 국가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건 큰 보람이 아니겠어? 그렇기에 부끄럽거나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홍 :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씀이 있습니까?한 : 포항제철 성공의 핵심은 공사 기간 단축이었어. 공기 단축은 건설 원가를 줄이는 것은 물론, 불황일 때 제품을 만들어 호황일 때 판매할 수 있게 해주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부실공사가 있어서는 절대 안 되겠지. 21세기인 지금도 다를 게 없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부실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확인하고 감독해야겠지. 이는 개별 회사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아닐까 싶어.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끝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그림 제공 : 한경식

2023-09-20

전남드래곤즈 창단하고 골프장도 운영

선생은 번지르르한 수사(修辭)가 아닌 실제로 전투를 치르듯 일했다. 1968년 시작된 포항제철 건설의 역사. 짧지 않은 기간 이어진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건 작은 몫의 역할을 했건 직원들에겐 국가 기간산업 구축에 자신의 힘을 보탰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30대와 40대를 온전히 포항에서 보내며 자신의 열정을 포항제철에 바친 한경식 선생은 1990년대에 들어서며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맡아 호남으로 간다. 그곳에서의 삶과 생활은 어땠을까? 홍성식(이하 홍) :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과 얽힌 추억이 많겠습니다.한경식(이하 한) : 젊은 시절엔 박태준 회장이 안전모를 쓴 내 머리를 때리기도 했고(그때는 이걸 ‘에밀레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했지.(웃음)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런 행동을 했던 게 아닐까 싶어.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라는 뜻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 거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박 회장에게 서운한 마음은 전혀 없어.홍 : 포항제철 건설 과정과 발전 시기를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한 : 높은 설산(雪山)에 오른 산악인들이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눈물 글썽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내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그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돼. ‘전투’라고 불러도 좋을 포항제철의 각종 공사와 프로젝트를 사명감과 애사심, 나아가 애국심을 무기로 완수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듯해.홍 :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으로 일하던 때였군요.한 : 종합제철 건설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나라로부터 받은 조직의 한 사람으로서 생애를 걸고 일했지. 멸사보국(滅私報國)의 마음가짐으로 땀 흘렸던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어? 그 시간을 함께한 동료와 선후배들 모두 그런 마음이었겠지.홍 : 1990년대엔 포항을 떠나 호남으로 가셨다고 들었습니다.한 : 1968년 대한석탄공사에서 포항제철로 이직해 22년이 흐른 1990년에 포항제철 상무이사(건설본부장)를 했지. 꽤 긴 세월이었어. 그 전후로 서울 테헤란로 포스코센터가 만들어졌는데, 거기 건축과 전기 관련 일에도 관여했어. 이후엔 제철장비 철구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와 제철설비주식회사 대표이사도 했지.홍 : 그러다가 포항에서 광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한 : 광양에서 일하게 된 건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노동조합 운동의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였어. 사용자 측과 노동자 측 사이를 원만하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고 해야 하겠지.1987년 6월항쟁 이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 시기엔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대우조선 등 대기업의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과격화·장기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신규 노조가 급증했고 기존의 한국노총에 대한 어용 시비가 일면서 1990년 1월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었다. (‘두산백과’에서 인용)홍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한 : 그즈음 경남 창원에서 생산된 재료들이 제때 포항제철로 입고되지 않아 회사가 크게 애를 먹었어. 포항제철은 다른 회사와 달리 1990년대부터 일찍 화상회의를 했지. 서울과 포항, 광양에 있는 임원들이 화상회의를 시작하면 박태준 회장이 주도했어. 박 회장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란 건 많은 사람이 알고 있잖아. 그러니 회의에 참여한 간부들이 긴장을 많이 했지. 어떤 프로젝트라도 기한 내에 완료하지 못하면 엄청난 질책을 받았으니까. 포항제철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제철 장비와 제철 설비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했어. 내가 사장이 되어 그 역할을 맡은 거지. 홍 : 당시 노동조합은 강성이라 다독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한 : 1994년쯤일 거야. 포항제철에서 건설 파트를 만들 때 호남 쪽에서 노동조합의 파업이 자주 있었어. 내 고향이 그곳이니 노동조합 간부들과 노동 관련 관청의 후배들을 자주 만났지. 처음 광양에 가서 시청, 노동청, 검찰청, 경찰서 등을 쭉 다니며 인사했어. 광주고등학교와 전남대를 졸업했다고 소개하니, 그곳 관계자 대부분이 “그러면 선배시군요” 또는 “어, 내 후배네”라고 하더군.홍 :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인맥이 중요하군요.한 : 그렇다고 봐야지. 노동조합과의 협의도 편안하게 진행될 수 있었고, 관청과의 업무 협조도 조금은 편했지. 아무래도 타지 사람들보다는 내가 호남의 정서를 잘 알고 아는 사람도 많았으니까.홍 : 그때 협력업체 노동조합 간부들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해나갔는지 궁금합니다.한 : 광양에 가면서 노동조합 사람들과 술도 많이 마셨지. 노동조합 간부들도 나와 이야기하면 잘 통한다며 협상의 길을 어렵지 않게 열어줬어. 한번은 광양제철소 사장과 강성 노동조합원 50여 명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자리도 만들었지. “혹시 떠들썩한 인민재판이 열리는 것 아니냐”고 모두 걱정이 많았지만, 내가 중간에서 원만하게 중재했어.홍 : 그래서 그 자리가 잘 끝날 수 있었던 겁니까?한 : 협력사 노동자들은 “우리도 누구보다 힘든 일을 하는데 임금이 본사보다 지나치게 낮다”며 그간 쌓인 불만을 쏟아냈지. 사용자 측에선 “앞으로 회사가 발전하면 모두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달랬어. 회사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사람들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포항제철 연수원에 교육 시설을 갖추고, 좋은 강사들을 부르겠다는 약속도 했지.홍 : 1990년대 중후반엔 포항제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와 축구단 전남드래곤즈 사장도 하셨지요?한 : 어째서인지 공장 시설이건 스포츠팀이건 난 뭔가를 처음 만드는 작업을 많이 한 것 같아. 팔자인지도 모르지.(웃음)홍 : 제철소와 골프장에서의 일은 그 형태가 전혀 다른데 힘들지 않았습니까?한 : 골프장을 처음 맡았을 때가 생각나는군. 알다시피 골프장은 회원권이 비싸잖아. 그러니 선뜻 그걸 구매할 사람이 별로 없었어. 궁여지책으로 내가 포항까지 가서 협력업체 대표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지. 그에 앞서 골프장 운영이 어려우니 포항제철 재무 담당 이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그랬더니 “먼저 열심히 자구 노력을 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적극적으로 나선 거지. 그때 회원권을 30억 원어치쯤 팔았을걸.홍 : 승주골프장을 운영할 때 위기는 없었는지요?한 : 한번은 큰 태풍이 골프장을 덮쳤어. 물에 휩쓸린 골프장 전체가 박살이 났지. 토사가 쏟아져 내려 인근 논의 벼까지 다 쓰러졌어. 주변 농민들은 당연히 난리를 치며 분노하지 않았겠어? 배상하라고 할 것 아니야. 문제는 골프장으로 들어오는 도로였더라고.홍 : 그래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한 : 맨 먼저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태풍 피해를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을 고민했어. 그래서 승주 군수를 찾아갔지. 우리가 돈을 댈 테니 군에서는 제대로 배수가 될 수 있도록 주변을 정비해달라고 요구했어. 만약 그걸 그대로 두면 해마다 태풍이 오는 시기에 비슷한 사태가 반복될 테니까. 서울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포항제철로부터 돈을 받아와 승주군에 전달했어. 흘러내린 골프장 토사 때문에 피해를 입은 농가에는 불만이 없도록 보상금을 나눠 주고,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해달라고 했지. 그렇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포스코

2023-09-17

“내 인생의 자부심, 제1고로 제2대 화입식”

박태준 회장의 ‘제철보국’ 기치 아래 진행된 포항제철 건설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경제와 관련된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관심 사업이기도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건설 초기부터 여러 차례 포항을 찾아 공사 현장을 점검했다. 당시 포항제철 직원들은 그 시절과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홍성식(이하 홍) :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 공사 현장을 자주 찾았지요?한경식(이하 한) : 1970년 4월로 기억해.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정비공장을 시작으로 한 종합 착공식을 마치고 상황실에서 건설 공정에 관한 브리핑을 하는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어.홍 :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한 : 당시 김완주 건설기획실장과 나는 상황실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마련된 조작실에서 대기 중이었어.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정표를 펼치고 설명을 이어가던 박태준 회장이 갑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거야. 모두 깜짝 놀랐지. 박 회장을 대신해 윤동석 부사장이 브리핑을 이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축적된 피로와 스트레스 탓에 박태준 회장에게 위경련이 온 거야. 부랴부랴 대통령 주치의가 응급처치했지.홍 : 국가원수가 참석한 브리핑에서 그런 일이 생겼으니 모두 당황했겠군요. 그 후 어떻게 됐습니까?한 : 윤동석 부사장의 설명이 끝난 후 그 긴장된 시간에 박 대통령이 압연공장과 고로의 위치에 대해 질문하는 거야. 당시 윤동석 부사장은 공장과 고로를 축소해 만든 모형에 익숙하지 않았거든. 그러니 설명하다 실수할 수도 있었지. 그때 내가 임기응변으로 윤 부사장이 답변을 잘할 수 있게 조작실에서 작은 빨간 등을 깜빡거려 공장과 고로의 위치를 알려줬어.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그런 상황을 눈치챈 육영수 여사가 나갈 때 조작실을 향해 수고가 많다는 듯 웃으며 자상하게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이야.홍 : 1972년에 포항제철에 만들어진 ‘주물선 건설추진반’에 대해 이야기 좀 해주시죠.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한 : 주물선 공장은 초기에 상당 기간 적자를 면치 못할 거라고 전망돼 회사로서는 달갑지 않은 설비였어. 어쨌건 최환용 건설반장 등 추진반 다섯 명이 서울 사무소에 파견돼 휴일도 없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예산을 편성하며 구입 사양서 등을 작성했어. 그때도 잊지 못할 일을 겪었지.주물선은 용광로에서 나온 용선에 철·실리콘 합금인 페로실리콘을 첨가해 덩어리 모양으로 굳힌 선철(銑鐵)을 지칭한다. ‘주물’이란 쇳물을 틀에 넣고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과정이고, ‘선’은 선철을 줄인 말로 쇳물을 의미한다. 주물선은 주물선 출선-전·후 배재 처리-주선 처리-야드 저장-제품 선별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이 제철 전문가들의 설명이다.홍 : 어떤 문제였습니까?한 : 본사에서 ‘70일 공기 단축’ 지시가 떨어진 거야. 그런데 협조해줘야 할 일본 회사가 난색을 표명했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재가 이어져 석유파동이 일어났지. 그때 포항제철은 한 번 세운 목표는 어떤 이유로도 변경할 수 없었어. 비상이 걸렸지. 이영우 부장이 당장 일본으로 건너가 강력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한국에 남은 우리도 병행작업 실시와 돌관 야간작업 등을 숨 가쁘게 진행했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모두 사표를 내고 영일만에 뛰어들겠다며 전쟁에 임한 군인처럼 일했지.홍 : 힘겨운 시간이었겠군요.한 :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운 여름에 미친 사람처럼 현장을 바쁘게 오갔지. 그 험난한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면 하루로는 부족해. 어쨌건 결과적으로 열풍로 건조를 위한 화입식(처음 불을 넣는 일을 축하하는 의식) 전날 부산항에 도착한 건조용 버너를 밤을 꼬박 새워 설치해 열풍로 화입식을 할 수 있었어. 지금도 많은 사람이 말해. “주물선 공장은 포항제철 설비 중 가장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고. 1974년 10월 1일, 70일 공기 단축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그때 일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야. 열풍로는 용광로에 열풍을 불어넣는 장치로 모양은 철판으로 된 원통인데, 지름이 6미터, 높이는 20미터 이상이다. 원통의 외피 속에 내화벽돌이 격자 모양으로 쌓여 있다. 이 안에 있는 내화벽돌층 사이에 용광로의 고로가스를 통과시켜 예열하고, 다음에 벽돌층 사이로 냉풍을 보내 열풍을 만든다. 이 열풍의 온도는 섭씨 600∼800도다. 이렇게 예열한 열풍이 용광로 내로 송풍된다.(『두산백과』에서 인용)홍 : 그 외에도 포항제철 건설 초기에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한 : 그랬지. 날짜까지 떠오르는데 1977년 4월 24일 일요일이었어. 오랜만에 즐기는 휴일이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근처에서 소방차 사이렌이 크게 울리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아보니 회사에 불이 났다고 하더군. 그때는 내가 제1고로 추진반장을 맡고 있던 터라 긴급출동 연락을 받지 못한 거지.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걱정되어 바로 회사로 갔어.홍 : 현장에서 발생한 화재가 컸나요?한 : 급하게 회사로 달려갈 때는 엄청나게 큰 불일 거라고 예상했지. 정문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제1제강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다행히 상황이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 진화작업도 순조로운 것 같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장으로 접근했어. 그런데 소방관들은 보이는데 정비요원들이 어디로 갔는지 없더라고. 제강건설 부서에 근무하며 일본에 연수도 다녀왔고, 전기는 내 전문 분야잖아. 그 감각으로 살펴보니 지하에 있는 케이블이 타면서 전기실로 연기가 퍼지고 있었어.홍 : 심각한 상황이었습니까?한 : 그랬지. 그래서 급하게 정비요원들을 찾았더니 다들 회의 중이라고 하는 거야. 당장 회의실 문을 열고 “지금 뭐하는 거냐”고 소리쳤지. 지하에서 타고 있는 불이 변전소로 옮겨갈 수 있다고 상황을 설명하니, 복구 회의 중이던 사람들이 그때서야 사태가 끝난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어. 내 의견을 받아들인 김준영 이사의 지시로 정비요원들의 응급 대처가 진행되었지. 불이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지하의 케이블을 급하게 절단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전기실 기기가 적지 않게 파손되었어. 그래도 거기서 화재를 잡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지.홍 : 화재의 원인은 무엇이었고, 어떤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웠나요?한 : 크레인 기사가 졸음운전을 하다가 전로(轉爐: 철을 제련할 때 압착된 공기를 불어 넣고 높은 열을 가해 불순물을 산화시켜 흡수함으로써 순수한 금속을 만드는 용광로)에 부어야 할 쇳물을 바닥에 쏟은 거야. 천만다행으로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화재는 포항제철 역사상 큰 피해를 입힌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되었어. 화재가 있었던 그다음 날 복구본부를 만들었지. 김준영 이사가 본부장을 맡았고, 나도 기획조정 담당을 맡아 신속한 복구를 통해 철강 생산이 되도록 빨리 재개될 수 있도록 노력했어. 그때도 밤샘을 밥 먹듯 했지.(웃음)홍 : 포항제철의 탄생과 성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장년 시절을 보내셨군요. 돌아보면 가슴 뿌듯한 기억도 많을 듯합니다.한 : 제1고로 제2대 화입식이 열렸던 날도 잊을 수 없어. 그 프로젝트도 애초엔 공사 기간이 78일로 예정됐지만, 57일 만에 마쳤지. 그게 우리나라 최초의 고로 개수작업이었어. 나를 포함해 작업을 진행했던 선후배들이 목이 쉴 정도의 큰 함성으로 만세를 불렀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전례가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날의 기억은 내 인생의 자부심으로 남았어.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포스코

2023-09-13

석탄공사 직원 포항제철로 가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바다를 지키는 함장이 되고 싶었던 청년의 꿈은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로 꺾이고 만다. 그러나 마냥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950년대의 청년들에겐 ‘고민의 시간’마저 사치였으니까. 20대 중반이던 한경식 선생은 광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꿈을 모색한다. 홍성식(이하 홍) : 해군사관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한경식(이하 한) : 4학년 때 육·해·공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우승하고 객기에 그만 실수했어. 그때는 사관학교 학생이 음주하면 안 되던 시절인데, 들뜬 기분에 서울에서 친구를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셔버린 거지. 그게 문제가 돼 해군사관학교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퇴교하게 되었어. 하지만 해군사관학교를 다닌 경험이 나를 많이 성장시켰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한길로 달려가는 기백과 희생정신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세월이 많이 흐르고 50대 중반이 된 후에는 해군사관학교 13기 동기들이 “너도 사회에서 해군사관학교 출신들 이상으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살았다”면서 동문으로 대접해주니 고맙지.홍 : 해군사관학교 퇴교 후에는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한 :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하니 광주로 가 학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어. 그러다가 전남대학교 전기공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지. 1, 2학년 과정을 면제받은 건 해군사관학교에 다닌 경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어. 사실 내가 어릴 때도 공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어. 대학 다닐 때 학원강사도 하고 입주 가정교사도 하면서 학비를 벌었지.홍 : 해군사관학교 4년과 전남대 2년을 마친 후 첫 직장은 어디였나요?한 :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시험을 치고 들어가 7년쯤 다녔어. 우리나라에 발전소가 생기면서 특별한 프로젝트를 맡길 사람을 뽑는데 그때 입사하게 되었지. 수백 명의 응시자 가운데 다섯 명을 선발했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어. 강원도 태백 장성광업소 전기 파트에서 근무했지.대한석탄공사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1일 설립되었으며, 석탄 광산 채굴과 석탄 가공제품의 매입·매출·수출입 등을 담당했다. 한국석유공사처럼 일부 석탄이나 석유를 정부의 명령에 따라 비축하기도 했다. 한때는 국내 최고의 공기업으로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1980년대 말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 사양화의 길을 걸었다.(‘위키백과’ 참조)홍 : 거기선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한 : 당시는 열악한 한국의 전기 설비를 선진적인 형태로 변화시키던 시기였는데, 그 과정에서 작지만 한몫했다는 긍지가 있어. 당시 내 월급이 한국전력 직원들보다 50퍼센트쯤 많았지. 대한석탄공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나는 나라 발전의 기초가 되는 석탄을 생산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원 복지도 나쁘지 않았지. 사택도 딸려 있어 거기서 딸을 낳았어. 7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서 태백이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했지.홍 : 대한석탄공사에서 포항제철로 옮긴 건 어떤 이유고, 언제쯤인지요?한 : 태백이 워낙 벽지라서 커가는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나도 전기와 관련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어. 그런데 마침 포항제철에서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신문에 난 거야. 부랴부랴 서류를 준비해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시험을 봤어. 운 좋게 합격해서 1968년 5월에 포항제철에 가게 된 거지. 자랑 같지만 입학시험과 입사시험에서 떨어진 적은 없는 것 같아.(웃음) 포항제철 입사시험은 짧은 기간 준비했는데, 거기 내가 예상문제로 공부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논술 문제가 출제됐더라고. 홍 : 발령을 받아 포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어땠습니까?한 : 상상을 벗어나는 풍경이었지. 지금과는 달리 그야말로 깡촌이었어.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인근에 수녀원만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공장 건설에 필요한 전기 시설을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었지. 종일 반트럭(바퀴가 4개 달리고, 뚜껑 없는 적재함이 설치된 소형 트럭)과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리면서. 지금 청년들은 이해하기 힘든 시절이자 상황이었지.홍 :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해주시죠.한 : 1968년 5월 15일 포항 건설본부 전기 담당으로 발령받아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시발택시를 타고 동촌동에 내렸어. 아름드리 소나무밭 오솔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가니 나무와 슬레이트로 지은 2층 건물이 보였어. 그게 이른바 ‘롬멜 하우스’로 불린 포항제철 건설본부였지. 거기에 먼저 온 김명환 소장과 박용진 차장이 있더군. 나는 쉽게 이야기하면 맨 아래 졸병이었지.홍 :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한 :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지는 종합제철소 건설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결심했어. 그건 우리나라 경제를 탄탄한 토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사명감과도 결부되었지. 아직도 기억나. 당시 공장 건설에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였지. 그게 이른바 ‘우향우 정신’이야. 목숨을 걸고 일하던 시기였어. 그때 롬멜 하우스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장 건설’이란 구호가 내걸렸지.홍 : 포항제철 입사 후 맡았던 주된 업무는 뭐였습니까?한 : 처음엔 내 전공인 전기 관련 업무, 그러니까 공사용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 전화 인입 등의 업무만 하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천만에. 하천과 돌산의 건설용 골재원 조사와 시료 채취 후 서울 본사 송부 작업, 주택단지 선정 기본 조사에다가 표토 제거, 착공 준비, 공장이 설 자리에 대형 공장 표시기 제작 설치, 정부 지원사업의 진도도 파악해야 했어.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홍 : 선생님만이 아니라 포항제철이 만들어지던 시기엔 직원들 모두 그렇게 바빴겠지요?한 : 말해 뭘 하겠어. 집을 떠나 포항으로 온 대부분 직원은 당시 동촌동에 있던 사찰인 부연사에서 숙식을 해결했어. 책임자인 박종태 소장은 롬멜 하우스에서 군대용 야전침대를 깔고 혼자 잤지. 그런데 어느 날은 자다가 모기장을 건드렸는지 아침에 보니 모기에 물린 자국이 여기저기 벌겋더군. 그래도 짜증 내지 않고 사람 좋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포스코 50년사’에 따르면 포항제철 건설 초기의 슬로건은 ‘제철보국(製鐵報國)’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1978년 3월 박태준 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창업 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철은 산업의 쌀이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 소재다.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고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곧 제철보국이다.”홍 : 직원들 간의 화합은 어떻게 이뤄나갔는지 궁금합니다.한 : 포항제철 건설 초기 멤버들은 대부분 이전 회사 경력이 있는 직원들이었어. 대한중석, 대한석탄공사, 호남비료 등 여러 회사에서 발탁되거나 공모를 거쳐 채용된 사람들이지. 그래서인지 저마다 개성이 강하고 일 추진 방식이 달랐어. 업무에 관한 이해도와 관련 지식의 깊이도 천차만별이었고. 사실 그로 인한 불협화음이 없지 않았어. 하지만 그때 열두 명의 직원은 소장과 아침마다 체조하며 업무를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힘을 모았어. 우리가 포항제철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겠다는 굳은 의지로 하나가 된 거지.홍 : 지금도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적지 않겠습니다.한 : 당시 가장 어려웠던 업무 중 하나는 매주 건설 현황을 사진과 함께 서울 본사에 보고하는 일이었어. 자체로 진행하는 공사야 문제가 없었지만, 정부 지원을 받는 사업인 항만, 공업용수, 도시토목, 한전 관련 공사, 전화통신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거의 유일했던 교통수단인 반트럭에 올라 종일 돌아다녔어. 사진을 찍으려고 정부 각 지원사업 현장을 찾았고, 관청의 공사감독에게 계약 사항, 공정표, 매주의 실적 등을 물었지. 진땀 흐르는 일이었어. 대체로 협조를 잘해주었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협조 체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이를 건의했지. 그래서 생긴 조직이 ‘현지공사 조정통제위원회’야. 이후엔 매월 한 번씩 회의를 열어 공정을 파악하고 각 부문의 협조를 쉽게 만들었지.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한경식

2023-09-10

나주 소년, 해사 생도가 되다

한국인이면서도 자유롭게 한국어를 말할 수 없던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나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었다. 청장년 시절엔 포항의 허허벌판에 거대한 제철소가 들어서는 역사적 과정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해냈다. 포항제철 건설본부장으로 일했던 한경식(韓璟植) 선생의 삶에는 ‘왕국의 몰락-식민지-해방된 가난한 나라-참혹한 민족 간 전쟁-비약적 경제 발전’으로 요약되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지난 늦봄, 현재 그가 거주하는 전남 순천을 찾아 사흘에 걸쳐 드라마틱했던 인생 편력을 세세하게 들었다. 홍성식(이하 홍) : 고향이 전남 나주라고 들었습니다. 아직 주소가 기억나시는지요?한경식(이하 한) : 나주 영산포 오량리야. 지금은 행정구역상 명칭이 오량동으로 변했다고 해.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났지.홍 : 지금 세대들에겐 까마득한 옛날이라 느껴질 겁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아직 남았습니까?한 :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범한 농부였어.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광복되었지. 그전 일제강점기 때는 동네에서 쇠로 만든 절굿공이와 놋그릇 같은 걸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겼어. 전쟁에 사용할 물자가 필요하니까. 할머니가 아끼던 무쇠 화로를 강탈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런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집 안 곳곳에 숨겨야 했지. 우리 동네에도 이른바 ‘친일파’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숨긴 물건들을 찾아내려고 집집을 뒤지던 게 기억나. 그러니 어린 마음에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었지.홍 : 또 다른 잊히지 않는 추억이 있을까요?한 : 소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송진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걸 모으느라 고생하던 것도 떠올라. 겨우 열 살 안팎의 애들에게는 힘든 일이었지. 게다가 학교에선 우리말을 못 하게 하고 일본어를 억지로 쓰게 하던 시절이었어. 심지어 집에서도 일본어를 쓰라고 교사들이 강요했지. 홍 : 나라를 뺏긴 민족의 서러움을 제대로 겪으신 거군요.한 : 그렇지. 형제끼리도 서로 감시하게 했으니까. 일본은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전쟁 물자 조달에 총력 동원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식민지인 우리나라는 물자 부족으로 비료와 농기구 같은 농업 생산에 필요한 물자까지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노동력까지 징발해가니 농촌사회는 더욱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국사편찬위원회’는 설명한다.홍 : 형제들이 많았습니까?한 : 일곱 남매야. 남자 둘에 여자 다섯. 형님이 한 분 계시고 여동생이 많았어. 우리 집만이 아니라 예전엔 대부분 그렇게 자식을 많이 낳았지. 홍 : 다들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공부는 열심히 했을 듯합니다.한 : 지금처럼 동네마다 학교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아니라서 꽤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했는데도 모두 열심히 다녔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 공부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나이 많은 학생들도 있어서 1등은 하지 못했지만 공부는 제법 잘했어. (웃음)홍 : 1945년 광복 즈음의 기억이 나는지요? 동네 분위기 같은 것 말입니다.한 : 광복되니까 선생님들이 우리말을 하셨어. 그리고 “앞으로 일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나라가 잘되려면 여러분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지.홍 : 이른바 친일파, 일본에 우호적이던 사람들은 광복 이후 어땠나요?한 : 30년 이상 억눌린 감정이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공출에 앞장서며 일본에 협력하던 이들을 잡아서 망신을 주고 단죄하려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서서 말렸어. “저들도 먹고살려고 친일한 것이니 과거는 용서해주자”고 하더라고. 부친이 동네에서 신망이 두터웠거든. 그러니까 성난 사람들도 화를 조금 가라앉히곤 했지.홍 : 중학교는 어디로 진학하셨지요?한 : 고향인 나주를 떠나 광주로 가서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했어.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지. 당시 광주사범학교와 광주농업학교는 성적이 좋아야 갈 수 있었어. 그러니 그 학교에 입학하면 동네 어른들이 크게 칭찬해주었지. 지역에서 조합장을 하던 아버지도 동네 사람들에게 한턱냈어. 내 기억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풍족하진 않아도 자식들을 대처로 보내 공부시킬 형편은 되었던 것 같아.홍 : 선생님이 중학생이던 시절에 전쟁이 터졌겠군요.한 : 맞아. 중학교 2학년 때 전쟁이 터졌어. 전쟁 탓에 학교에 못 가고 집에 와 있는데, “학생들은 학교에 인명 등록을 해야 한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나주에서 광주까지 여덟 시간 넘게 걸어서 갔지. 그런데 학교 농기구 창고 근처에 가니 누군가 두들겨 맞는 소리가 나더라고. 이른바 좌우익의 심각한 대립과 갈등이 학교에도 있었던 거지. 다행히 그때 나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으니 어리다고 인명 등록만 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그즈음 우리 동네에서도 몇몇 사람은 맞아 죽기도 하고 그랬지. 전쟁이란 게 참혹하다는 걸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어.홍 : 전쟁이 끝난 후엔 어땠습니까? 한 : 광주농업학교에서 다시 시험을 보고 광주고등학교에 들어갔어.홍 :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좀 해주시죠.한 : 1950년대 중반이었는데 그때 자취를 했어. 어머니가 귀한 아들 굶으면 안 된다며 쌀을 보내주셨지. 내가 쌀 한 말을 들고 나주에서 광주까지 오고 그랬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자식들 공부시키기가 쉽지 않았지. 신문 배달을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었어. 나주와 광주 사이를 오가는 버스가 다니다 말다 했으니, 집에 오가기도 쉽지 않았지. 다행히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나 학비를 면제받기도 하고, 먼저 광주에 가 있던 누님의 친구가 도와주기도 해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어.홍 : 광주고 졸업 후엔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고 들었습니다.한 : 서울대 공대를 가려고 했는데,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이 그보다 먼저 있었어. 바다를 좋아했기에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지. 어릴 때 고향 동네 길거리에서 만나던 마도로스(matroos)들이 멋져 보였거든. 게다가 해군사관학교는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었어. 나 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지. 그때 사관학교 인기는 어떤 명문대학보다 높았어.1946년 1월 17일 해군병학교로 개교한 해군사관학교는 한국의 해군 및 해병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줄여서 ‘해사’라고 불리며, 경상남도 진해에 자리한다. 한경식 선생이 입교하던 1950년대엔 가정형편이 어려워 일반 대학 진학이 힘든 우등생 다수가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선택하기도 했다.홍 : 해군사관학교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한 : 나는 해사 13기로 입학했어. 스무 살이 넘으면 키가 안 자란다던데 나는 거기서 7센티미터나 컸지. 고등학교 때는 잘 먹지 못하다가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니 그랬던 것 같아. 공부도 열심히 했어. 학년에서 5등 안에는 들었으니까.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한경식

2023-09-06

“지역사를 후손에게 잘 전승하는 게 우리의 소명”

다섯 번째 인터뷰하던 날에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선생과 동해면 신정리 선돌과 금광리 고인돌군을 둘러보고 금광저수지를 산책했다. 함께하는 네 시간 내내 선생은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했다. 선생의 눈에는 지역의 거의 모든 것이 역사의 흔적이었고 이야기보따리였다. 신정리 선돌을 보러 가던 중에 선생이 승용차의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인(이하 황) : 저기가 ‘학삼서원’인데 현판을 김구 선생이 썼어. 그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는지? 김구 선생의 글 원판은 잃어버리고 말았어. 그걸 수소문해보니 어떤 고문서 수집가 손에 들어가 있었어. 그 중요한 걸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 싶어 포항문화원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수집가를 만나게 되었지. 그런데 그 수집가가 값을 너무 비싸게 부르는 바람에 결국 못 사고 말았어. 그뿐 아니라 포항에는 많은 역사와 문화의 이야깃거리가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고 기록이 잘못되어 있기도 해서 안타까워.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이 보실 때 아쉬운 일이 많겠습니다.황 : 연오랑세오녀만 해도 그래. 동해면에 있는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이 처음 개장했을 때 연오랑세오녀가 거북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되어 있었어.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거북이 아니라 바위를 타고 건너갔다고 기록되어 있지. 그래서 내가 바위를 타고 건너갔다고 했더니 고쳐놓더군. 이런 내용은 관련 문헌을 충분히 검토해야 해. 우리가 보존해야 할 역사와 문화유산이 잊히고 없어진 게 많아. 오천 문충리에 가면 포은 정몽주 생가터가 있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승마석뿐이지. 그래도 거기가 정몽주 생가가 아닌가. 정몽주 무덤이 있는 용인에서는 축제도 한다는데, 생가를 복원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을 텐데…. 이육사 시인도 고향은 안동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도구에 있는 동양 최대 규모의 포도 농장에서 그 유명한 ‘청포도’를 구상했지. 또 호미곶에 있는 등대에는 조선 왕실의 배꽃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런 게 사소한 것 같지만 잘 보존해서 시민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전해야겠지.여 : 저도 몰랐던 이야기가 곳곳에 있군요.황 : 어디 그뿐인가. 장기는 예부터 명망 높은 선비들이 귀양을 많이 왔지. 장기에 유배 온 대학자들이 장기는 물론 경북 일대의 학문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 우암 송시열이 장기에 4년 있다가 떠난 뒤 우암의 공덕을 기린 죽림서원이 세워졌고, 다산 정약용도 장기에 220일 머무는 동안 150여 수의 시를 지었지. 장기초등학교에 있는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에는 두 분으로 인해 장기가 최고 수준의 학문을 전수받은 것은 행운이었다고 적혀 있어. 이런 걸 역사 시간에 가르치고, 학생들이 보고 듣고 체험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지. 우리 향토사부터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후대로 이어주는 게 참 중요해. 그런 점에서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 포스코 문화재돌봄 봉사단이 진각국사 사당과 남파 대사 무덤에 가는 길 앞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등 애를 많이 썼어. 정말 고마운 일이지. 여 : 동해면에 목장성(牧場城)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황 : 동해면 흥환리 일대에 제주도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가장 큰 말 목장이 있었어. 과거에 북벌 정책의 하나로 군마를 기르고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거나 중국에 조공으로 바치는 말들을 사육하려고 만든 곳이지. 이곳이 특이한 건 말을 방목해 길렀다는 것이야. 말들이 있던 목장 둘레에 성을 쌓았는데 그게 목장성이야. 원래 둘레가 8킬로미터가 넘었는데 지금은 5킬로미터 정도의 흔적만 남아 있어. ‘감목관(監牧官)의 공덕비’라고, 목장을 관리하는 관리의 공덕비가 있고, ‘울목김부찰노연영세비(蔚牧金副察魯延永世碑)’ 같은 역사적 자료가 될 비도 남아 있지.여 : 포항에 봉수대 터도 꽤 있지요.황 : 모두 열세 개가 있어. 장곡, 대곶, 복길, 사화랑, 도리산, 오봉산 등등. 내가 그걸 두고 몇 번인가 포항시 정신문화자문위원회에서 이야기했지. 포항에서 불빛축제를 할 때 봉수대 터를 복원해서 봉홧불을 올리고, 등댓불도 이어서 밝혀보자고 말이야. 우리 지역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살려내 사람들이 쉽게 접하는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 그게 진짜 역사고 사람들한테 관심을 끌 수 있는 일인데, 좀 아쉽지.금광저수지를 돌면서 선생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동안 역사와 연관된 이야기만 해왔던 터라 교사로서 선생이 기억하는 일화도 궁금해졌다.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머뭇거리던 선생은 세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는 김규호 학생 이야기, 다른 두 이야기는 학생들과 했던 활동이었다.여 : 동해중학교 김규호 학생 이야기는 당시 지역방송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학생이 골수암 판정을 받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더군요.황 : 1998년에 이 사실이 지역 언론을 통해 알려져 당시로서는 거금인 5천만 원이 모금되었고 김규호 학생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 그때 참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었어. 어느 날 한 포스코 직원이 출근하면서 봉투 하나를 주고 가더군. 이름이라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그냥 가버렸어. 당시에 그런 일이 참 많았지. 당시 나는 우리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하다고 생각했어.여 : 포항여자전자고등학교에 계실 때 동해안에서 전승되던 민속놀이 ‘월월이청청’을 복원해 2001년 전국청소년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더군요.황 : 학생 100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공연이었지. 전통 민속놀이를 발굴하고 복원한 것이라 참여한 교사와 학생들 모두 보람을 느꼈어. 이런 활동이 학생들에게 우리 지역과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기회지. 선생은 학생들을 문화재 현장에 데리고 가서 역사를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1980년대부터 6월이 되면 보이·걸스카웃 학생들을 데리고 이 지역의 의병 장헌문(蔣憲文) 대장과 임창규(林唱圭) 의사의 묘소를 참배하는 일을 20년 넘게 계속했다. 선생의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둬 장헌문 대장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여 : 요즘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떻다고 보십니까?황 : 우리 지역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와 유물이 많아. 다행스럽게 지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조금 늘어났어. 하지만 짧은 지식으로 역사를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건 위험해. 사료에 대한 고증이 우선이지. 그렇지 않으면 역사가 다음 세대로 제대로 전달될 수 없어. 역사는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지 미화해서도 폄훼해서도 안 돼.여 :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황 : 지금이라도 우리 정신문화의 풍성함을 찾아야 해. 그게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 우리 선조가 살아왔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기록과 흔적 속에 남아 있지. 우리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해.끝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9-03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다지다

포항이 낳은 큰 인물로 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 1855~1923)이 있다. 석곡은 포항 동해면 출신으로 한의학은 물론 문학과 철학, 천문학 등을 폭넓게 연구한 학자이며 선비 의사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포항시는 석곡을 기리는 기념관을 지난 7월 말 임시 개관했고, 오는 10월에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남구 동해면 도구리 일원에 건립된 이 기념관은 지상 2층 규모다. 석곡의 삶과 학문을 재조명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널리 알려온 이가 황인 선생이다. 황인 선생이 석곡기념관을 건립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곡은 누구이며 그의 발자취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들어보았다.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은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석곡 이규준을 재조명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석곡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황인(이하 황) : 사실은 나도 석곡을 잘 몰랐어. 그런데 우연히 포항 시내에서 한의원을 하는 김학동 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석곡이 참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지. 김학동 원장이 소속된 소문(素問)학회에서 해마다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석곡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다고 하더군.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석곡 묘소에 참배할 때 따라갔지. 현장에 가서 석곡의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석곡이 참 대단한 학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어. 여 : 그때 어떤 말씀을 들으셨는지요?황 : 석곡은 독학했고, 전국을 다니며 대학자들과 토론하면서 학문을 쌓았지. 어느 날 청도의 한 서당원장이 학문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 그런데 그때 거기서 무위당(無爲堂) 이원세(李元世)가 공부를 하고 있었어. 생판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스승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기가 봐도 학문이 대단한 거라. 이원세가 석곡을 붙들고 배움을 청하러 찾아가겠다고 하니 석곡이 대구에 서병오라는 사람 집에 가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이원세가 서병오 집에 8년 정도 머물게 돼. 서병오가 누군가 하면 어린 나이에 대구에서 천재라고 소문이 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눈에 들었고, 나중에는 영천 군수에 오른 사람이지. 서병오가 혈압이 높았는데 누구도 못 고치는 걸 석곡이 고쳐준 뒤로 석곡에게 한의학을 배우게 되었어. 하여간 이원세가 서병오 집에 머물면서 석곡의 제자가 된 거야.여 : 서병오와 이원세 두 분 다 석곡의 제자들인 셈이군요. 그렇다면 그분들을 통해 소문학회가 만들어져서 석곡을 기리게 된 건가요?황 :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이야기가 있어. 나중에 이원세가 부산에 갔을 때, 부산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던 사람들이 이원세를 모시고 함께 공부하게 되었지. 인원이 점점 늘면서 이원세가 스승인 석곡의 학문을 연구하자고 제안해 석곡학회가 창립되었어. 그렇게 석곡학회를 만들긴 했는데, 여기서는 석곡의 한의학 공부만 하는 거라. 하지만 석곡은 수학, 천문학, 유학 등 다방면의 학문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석곡학회를 한의학만 공부하는 소문학회로 바꾼 거지. 이분들이 매년 음력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석곡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면서 석곡 선생을 기려온 거야. 여 : 하지만 포항에서는 아직 석곡이 누구인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황 : 1885년 포항 동해면 임곡리 출신인 석곡은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알려졌어. 원래 유학에 바탕을 둔 학문에서 출발해 성리학까지 통달한 분이지. 사실은 유학과 성리학을 증명하기 위해 한의학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놀라운 일은 이분이 모든 학문을 독학으로 했다는 것이지. 그러면서 삼십 대에 ‘춘추(春秋)’, ‘주역(周易)’, ‘의례(儀禮)’ 같은 경전을 산정(刪定)해 26책으로 된 ‘육경소주(六經疏註)’를 펴냈어. 어디 그뿐인가. ‘논어’, ‘대학’, ‘중용’, ‘예운(禮運)’, ‘곡례(曲禮)’, ’효경(孝經)’, ‘명심보감’ 등도 산정해 많은 책을 펴냈고. 특히 유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벗어나 기일원론(氣一元論), 심성정동일론(心性情同一論) 철학과 심양기론(心陽氣論) 의학의 바탕이 되는 ‘석곡심서(石谷心書)’는 대단한 저서로 인정받지. 여 : 독학으로 그 모든 학문을 습득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산정’은 무엇인지요?황 : 산정(刪定)은 꼭 필요하지 않은 자구(字句)나 문장을 다듬고 정리하는 것을 말해. 석곡은 경전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학문의 견해를 바탕으로 썼지. 그런 자세가 석곡의 탁월함이 아닌가 싶어.여 : 그러려면 경전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물론 석곡의 학문적 입장도 확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석곡은 한의학자로도 유명하다고 하셨지요?황 : 선생은 말년에 한의학 연구에 성심을 다했지. 한의학의 원전이자 이론의 기초라고 일컬어지는 책이 ‘황제내경(黃帝內經)’인데, 선생은 이 책의 본래 내용 가운데 필요 없는 건 정리하고 꼭 필요한 것만 추려서 ‘황제소문절요(黃帝素問節要)’를 쓰셨어. 또 ‘동의보감’을 선생의 이론으로 다시 정리해서 ‘의감중마(醫鑑重磨)’를 펴냈지. 약초에 관한 저서인 ‘본초(本草)’는 지금도 많은 한의학자가 찾는 명저 중의 명저야. 그러니 “북쪽에 사상의학을 주장한 이제마가 있다면, 남에는 이규준이 있다”는 말이 회자되지. 여 : 자료를 찾아보면 석곡은 ‘부양론(扶陽論)’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알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황 : 부양론은 말 그대로 양기를 북돋운다는 말이지. 석곡은 인간의 몸의 중심은 마음(心)이라고 보았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자리한 심장(陽)이며, 심장의 기운이 부족할 때 모든 병이 생긴다는 거야. 이는 중국의 주진형(朱震亨)이 주장한 이론과는 반대되는 이론이지. 거기서는 음기의 부족이 병의 근원이라 보았으니까. 그래서 기운이 약해지면 음의 기운을 돋우는, 즉 신장의 기운을 살리는 처방을 했어. 그런데 석곡은 양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중요한 것은 사람 몸에 양의 기운이 부족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 그래서 어릴 때나 나이 들어서나 양기를 돋우는 약을 복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거야.여 : 선생님 말씀을 들을수록 석곡은 대단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황 : 내가 처음 석곡 묘소에 간 게 2008년이야. 소문학회 회원들이 석곡 묘소의 참배를 다닌 지 14년쯤 되었을 때지. 그 후로 방송에 나갈 때마다 석곡을 이야기했고, 그다음 해 묘소를 참배할 때는 지역 언론사의 기자들과 함께 갔어. 그때 석곡 묘소 참배하는 것을 YTN에서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안상우 박사가 그 방송을 보고 나를 찾아와 석곡의 학문을 번역해주겠다고 해서 큰 힘이 되었어. 그렇게 석곡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지. 여 : 선생님의 그런 노력이 마침내 석곡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지게 되었군요.황 : 여하튼 석곡기념관이 건립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앞으로 많은 시민이 찾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석곡기념관은 소강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8호로 지정된 석곡 선생의 저술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수장고가 있는 1층과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영상관이 있는 2층으로 구성돼 있다. 외부는 전통가옥 구조물인 서까래 형태의 처마를 적용한 모양을 하고 있다. 포항시는 석곡의 일생과 학문, 사상 등을 소개하는 상설 전시와 함께 시문학, 유학, 천문학, 수학 등 석곡의 학문은 물론 후학과 관련한 주제 전시와 소장품 특별전 등 다양한 기획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30

고려 진각국사 배천희·조선의 큰스님 남파 대사 배출한 포항

황인 선생은 포항이 고인돌, 선돌 같은 선사시대 유물 외에도 명망 높은 고승을 낳은 곳임을 발견하고 널리 알려왔다. 특히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배천희(裵千熙)와 조선시대 남파(南坡) 대사에 대한 재조명은 선생의 대표적인 업적이다.(여국현=여) : 선생님은 고려시대 배천희 국사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황인=황) : 배천희 국사는 1307년 흥해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해 19세에 승과에 합격했지. 그 후 10여 개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가 1367년(공민왕 16년)에 국사가 되었고 1382년 76세로 입적하셨어. 당시 국사(國師)는 국가 최고의 정신적 지주를 일컫는 말이니 배천희 국사는 대단한 인물이었지. 이 사실도 우연히 알게 되었어. 어느 날 우리 학교 출신 제자를 만났는데, 그 제자의 남편이 자기 조상 중에 유명한 스님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서 지금도 자기들이 그 스님 무덤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하더군. 여 : 스님은 무덤이 아니라 사리탑 같은 걸로 모시지 않는지요?황 : 나도 그게 이상해 스님이 무슨 무덤이냐고 했지. 사리탑이나 부도가 있어야지 했더니 틀림없이 무덤이 있다고 하는 거야. 제사도 지내고. 그러니 더 궁금했지. 알아보니 천곡사 입구에 사당도 있고, 포항 공원묘원 안에 ‘국사배선생유허비(國師裵先生遺墟碑)’까지 있는 대단한 분이더군. 이분이 흥해에서 태어났다고 왕이 흥해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더군. 나중에 스님이 입적했을 때는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라 명했는데, 그 탑비의 비명(碑銘)을 당대의 문장가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쓰라고 했어. 그것만 봐도 배천희 국사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알 수 있지.여 : 배천희 국사가 고려 말 원나라 간섭기를 벗어난 개혁 시대의 주체적 한국 불교를 이끈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황 : 맞아. 그러니 우리 지역에서 이런 인물이 나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 스님의 무덤은 크기도 하지만 왕이나 큰 스님의 무덤 앞에 세우는 당간지주 모양의 석물이 양쪽에 떡하니 서 있는 게 한눈에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어. 게다가 제자 남편의 말이 수원에 가면 스님을 기리는 비석도 있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가만있을 수 있나. 그 탑을 보고 탁본을 뜨려고 수원까지 갔지.여 : 그 먼 데까지 탑을 보러 가신 것도 놀랍지만 탁본 뜨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황 : 그랬지. 겨울방학 때 찾아갔는데, 엄청 추운 1월 초였어. 물어물어 수원성에 갔더니 허름한 비각에 탑이 있는 거야.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成寺眞覺國寺大覺圓照塔碑)’라는 그 탑은 보물 14호인데 온전치는 않더라고. 우여곡절 끝에 수원시청 문화공보실을 찾아가 배천희 국사에 대한 자료를 주면서 탁본하러 왔다고 했지. 담당자가 일언지하에 거절하길래 그날은 그냥 그렇게 앉아 있다 나왔어.여 : 그럼, 그 먼 길을 가셔서 탁본도 하지 못하고 그냥 오셨나요?황 : 아니지. 그냥 올 수는 없었어.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다시 수원시청에 출근했지. 문화공보실에 가서 그냥 앉아 있다가 문화공보실 직원들에게 커피도 사주고 신문도 보고 이야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냈어. 다음 날에 또 가서 얼굴도장을 찍었지. 그렇게 며칠 출근하다시피 하니 공보실장인가 하는 사람이 진심을 알았는지 탁본을 딱 한 장만 하라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하더군. 그래서 탁본하러 갔는데 수원시청 담당자가 탁본을 보관할 수 있게 두어 장 더 할 수 있느냐 해서 내가 탁본을 더 해줬지. 그렇게 그 비의 탁본이 지금 남아 있게 된 거야. 여 : 문화 유적이나 유물, 그 기록을 남기고 보존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실감합니다. 배천희 국사에 대한 보존 사업은 잘되고 있는지요?황 : 이분이 대단한 분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고 포항시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했지. 2009년에는 국사를 포항시의 인물로 지정해서 선양사업도 했어. 국사의 형인 배전(裵詮)의 후손들도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국사를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고. 유허비와 천곡사 앞에 있던 사당이 허물어져 가는 걸 문중에서 새로 건립했으니 정말 다행이었지.여 : 선생님께서 노력하신 덕분에 포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배천희 국사가 새롭게 조명되고 관련된 유물과 유적들이 보존되었군요. 선생님은 남파 대사의 유적지 보존도 주장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황 : 남파 대사는 조선 중기에 선(禪), 교(敎) 양 종단을 이끌고 승병의 최고 책임자인 수호도총섭(守護都總攝)을 지낸 분이지. 포항 장기면 묘봉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지(石南寺址)에 그분의 비석이 있어. 문살이 훼손되고 대나무 숲 가운데 방치될 것 같아 내가 보존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주장했지.여 : 저도 선생님을 뵙기 전에는 남파 대사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습니다.황 : 남파 대사는 1740년 장기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화묵(華默)이야. 열두 살 때 삭발하고 승려의 계를 받았는데, 승과에 합격한 후 대사(大師)까지 올랐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밀양에 있는 표충사의 수호도총섭을 지낸 분인데, 조선시대 선, 교의 맥을 이은 화엄경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고승이었지. 내가 남파 대사가 주지로 있던 석남사지를 발굴해 문화자원으로 조성하자고 했고, 방치되었던 남파 대사의 비도 보존하자고 주장했어. 그래서 포항시에서 2005년 11월에 비각을 세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지. 남파 대사 비의 비문은 조선 최고의 명필 가운데 한 명인 계오(戒悟) 스님이 쓰셨으니 서체 연구로도 가치가 있지. 그러니 문화재 지정을 해서 보존 대책을 세우는 게 무엇보다 시급해. 그건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포항 사람들 모두의 책임이지.여 : 포항에는 불교문화의 유적이 많은 듯합니다. 보경사, 천곡사, 오어사 같은 사찰의 문화적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황 : 그렇고말고. 신라시대에 창건된 세 사찰은 그 자체로 귀중한 문화유산이지. 보물 제252호인 원진국사비가 있는 보경사는 602년 진평왕 때 창건된 천년 고찰이고,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천곡사에는 선덕여왕의 전설이 있지.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선덕여왕이 세상 좋다는 약은 모두 써봐도 효력이 없다가 한 신하의 권유를 듣고는 동해안 천곡령(泉谷嶺) 아래에 있는 석천(石泉) 약수로 며칠간 목욕한 뒤 완쾌되었다는 거야. 그러자 약수의 효력에 감복한 선덕여왕이 서라벌로 돌아와 자장율사에게 절을 짓게 하고, 그 이름을 천곡사로 했다는 전설이 있어. 그곳엔 고란초(皐蘭草)가 유난히 많이 자라지. 여 : 오어사에 관해서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던데요.황 :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천년 사찰이지. 처음 지었을 때는 항사사(恒沙寺)라 했는데 오어사란 이름을 갖게 된 일화가 재미나. 어느 날 원효대사와 혜공 스님이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변을 봤는데 물고기 두 마리가 튀어나와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가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다는 거야. 두 스님이 그 물고기를 보고는 물을 거슬러 가는 고기가 서로 자기 고기라고 우겼다는 이야기에서 오어(吾魚), 즉 ‘저 고기가 내 고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지.여 : 속세의 장난꾸러기 청년 같은 스님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해학이 느껴지는 일화 같기도 합니다. 오어사에는 특별한 유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황 : 우리나라에 몇 안 남은 동종(銅鐘)과 목비(木碑) 등 불교와 관련된 희귀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어. 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불교 역사의 귀중한 사료의 보고로도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하지.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27

“포항에 고인돌이 많았다는 것은 살기에 좋았다는 뜻”

황보 집성촌을 찾아가던 선생은 우연히 고인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우연은 이후 선생이 포항의 고인돌과 선돌을 비롯한 선사시대 유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여 : 단량의 일화가 선생님께서 포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겠군요.황 :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더 놀라고, 포항이 예사 고장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 집성촌(구룡포읍 성동3리)을 찾아가던 도중에 일어난 일 때문이지. 내가 그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방앗간이 하나 보이더군. 여기에 웬 방앗간이 있나 싶어 가보았더니 방앗간 뒤에 고인돌이 있는 거야. 하나도 아니고 자그마치 네 개나. 그러고는 상정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왼쪽에 언덕이 보이는데, 거기 농가에 또 고인돌이 있고, 또 조금 가다 보면 고인들이 주욱 있더라고.여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고인돌이 있다는 걸 알고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죠?황 : 그렇지. 황보 집성촌을 안 것도 그렇고 방앗간 뒤 고인돌도 그렇고, 그게 다 우연이었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 텐데 내가 국사학을 전공했으니 보이기도 한 거지. 여 : 그저 운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은 우연이었더라도 직접 찾아 나선 선생님의 관심 그리고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낸 고인돌이 자기를 알아본 선생님을 부르는 힘이 더하여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황 : 그렇기도 하겠지. 하여간 이것 참 재미있다 싶은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봤어. 당시 컴퓨터가 있나 인터넷이 있나. 그냥 닥치는 대로 논문집을 뒤져보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지. 그런데 논문집에 이쪽 지방(구룡포)에는 고인돌이 없고 기계(杞溪)에 몇 기(基)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어. 그래서 우선 ‘여기 고인돌이 있습니다’ 하고 문교부에 조사보고서를 냈지.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고인돌이 한두 군데에 있는 게 아니야. 성동1리에 가니 거기는 논 가운데에 고인돌이 여섯 개나 있더라고. 그때부터 내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서 직접 보고 조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지. 안 다닌 데가 없다시피 돌아다녔어. 주말이면 아예 집을 나와 미친놈처럼 논이며 밭이며 산을 헤매고 다녔지.여 : 주말마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았을 것 같군요.황 : 웃지 못할 일이 많았어. 황보 입향조 비석을 탁본하러 뇌성산(磊城山)에 갔을 때 일이야. 내가 그 비를 발견하고는 문화재 관리 지원을 받으려고 탁본하러 갔어. 뇌성산에서 탁본하고 내려오는데 경찰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파출소로 데려가는 거야. 못 보던 사내가 양복을 입고 사진기, 나침반, 지도에 카메라까지 들고 산에서 내려오니 마을 사람들이 간첩이라고 신고한 거지. 별일 없이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런 황당한 일이 한두 번 아니었어.여 : ‘영일만의 3천 년 문화유산’이라는 방송을 보니까 선생님께서는 고인돌을 비롯해 발굴한 문화유산을 전부 지도에 기록해두었더군요.황 : 그랬지. 다 기록했어. 직접 찾아다니며 얻은 자료를 보면 포항 지역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내가 하나하나 다 기록했는데, 사진만 해도 500장이 넘어. 내가 기록한 고인돌 조사 지도를 가지고 방송국에서 영일만 지역의 고인돌 분포도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었어. 그렇게 해서 기계면에서만 65기, 흥해와 동해에 각 30기 등 포항에 213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 그러고 나니 나중에 대학교수들도 내게 찾아와 자료를 받아 갔어. 그런데 그 고인돌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어. 남아 있는 게 얼마 안 돼. 여 : 그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고인돌 외에 포항의 선사시대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말씀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황 : 암각화와 선돌도 많지. 암각화는 대표적인 것으로 1990년 흥해읍 칠포리에서 발견된 게 있어. 약 3천 년 전 청동기시대 유물로 경북 유형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었지. 청하면 신흥리 암각화는 특별한 성혈(星穴)을 보여줘 더 중요한 의미가 있어. 아마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한 게 아닌가 추측하는데 그 성혈이 바위에 여럿 남아 있지.여 : 선돌은 무엇을 말하고, 어떤 것이 있는지요?황 : 선돌은 말 그대로 돌을 세워놓은 것이지. 주로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어떤 믿음을 표현하거나 어떤 사건을 기념하려고 세운 것으로 보면 될 거야. 동해초등학교와 신정리 마을에 세워둔 게 있는데, 동해초등학교에 있는 거는 할배짝지돌, 신정리에 있는 거는 할매짝지돌이라 부르기도 해.여 : 두 이름이 서로 어울리는 걸 보니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처럼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것처럼 들립니다.황 : 그렇지. 그런데 두 선돌에도 사연이 있어. 원래는 할배짝지돌만 발견되었는데, 기록을 살펴보니 할배짝지돌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할매짝지돌이 있더군. 그걸 찾고 싶어서 신정리, 금강리 부근을 몇 년 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지. 그러던 어느 해 신정리 마을청년회장한테 연락이 왔어. 마을 앞 보(洑) 공사를 하다가 도랑에서 커다란 돌을 하나 찾아서 꺼내 놨다고. 그래서 가보니 수년간 찾던 바로 그 할매짝지돌이었어. 그걸 수호신으로 삼아 마을 입구에 세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지.여 : 선생님께서 선돌을 찾아다니시는 걸 알고 신정리 마을청년회장이 연락했군요. 그걸 평범한 돌로 여겨 버리거나 깨버리기라도 했다면 사라지고 말았겠습니다.황 : 그럴 수도 있었지. 사실 여기 와서 내가 고인돌을 찾아다닐 때만 해도 사방에 고인돌이 보였어. 상정, 중산, 공당까지 밭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사방에 고인돌이 늘어서 있었거든.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이 그게 중요한 걸 알았나. 문화재라는 개념이 있었어야 말이지. 밭 간다고 쟁기질하다가 걸리면 치워버리거나 깨버렸고 나중에는 포클레인으로 부수기도 했지. 그렇게 사라진 고인돌이 셀 수 없이 많았어. 여 : 고인돌이나 선돌 같은 거석문화의 유물이 청동기시대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 지역의 고인돌, 선돌이 제대로 보존이 안 된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에 고인돌이 많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일까요?황 : 고인돌은 쉽게 말해 부족을 이끄는 족장의 무덤이야.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큰 규모의 부족이 살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예부터 우리 지역이 그만큼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는 걸 말해주지.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사라졌다는 건 3천 년 된 우리의 역사가 사라진 것이나 다를 게 없으니 가슴 아픈 일이지.고인돌과 선돌, 암각화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을 만들고 세우고 깎아낸 선사시대인들의 삶의 흔적, 곧 그들의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고인돌 하나, 선돌 하나, 암각화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곧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 지워지고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다.우리가 기억하고 보존하고 물려주어야 할 문화는 특정한 물건이나 대상만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전해지는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이들의 삶의 방식이자 역사다. 다행히 선생의 발굴과 발견은 그 후 지역의 많은 관심을 불러와 고인돌을 보존하는 마을 자치 모임이 생기는 등 다양한 노력으로 이어졌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23

구룡포읍 성동리에 황보 씨 집성촌이 있는 까닭은

선생은 황보 집성촌에 찾아가 황보인 가문의 충직한 여종 단량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뿐만 아니라 갑연, 순량 등 여종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碑)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포항이 예부터 충절과 보은의 고장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 : 황보인이라면 조선시대 영의정을 말씀하시는지요?황 : 그렇지. 내가 거길 가보니 진짜 황보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이라.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알아보니 사연이 기가 막혀. 계유정난 때 황보인이 수양대군 손에 죽었다는 건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 그때 한양 황보인의 집에서 황보인의 둘째 아들 흠이 단량이라는 여종에게 황보인의 손자인 황보단(皇甫端)을 데리고 도망쳐 가문의 대를 이어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야. 단량이 그 길로 황보단을 물동이에 넣고는 뒷문으로 도망쳤어. 단량이 황보단을 데리고 경북 봉화의 닥실마을까지 갔다는 거야.여 : 그 먼 길을 어린애를 데리고 사람들 눈을 피해 다녀야 했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황 : 그랬겠지. 어쨌거나 단량은 황보인의 딸이 시집가 있던 봉화에 갔어. 조카를 데리고 찾아온 단량을 본 황보인의 딸과 사위 윤당은 기가 찼겠지. 한편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카를 데리고 있다가는 다 같이 죽을 게 뻔했어. 그래서 단량에게 노잣돈을 주며 땅끝까지 도망가 숨으라고 일렀지. 그 길로 단량이 찾아간 데가 바로 지금의 호미곶면 구만리 짚신골이었어. 거기서 살다가 나중에는 구룡포읍 성동리에 옮겨 평생을 숨어 살면서 황보인의 손자 단을 키웠던 거지. 황보인 가문의 대가 안 끊기고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형성된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야. 여 :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황보인 후손들로서는 단량에게 정말 큰 은혜를 입었군요.황 : 그렇지. 그러니 계집종이었던 단량에게 비석까지 세워주며 기리는 거지. 지금도 구룡포읍 성동리 광남서원(廣南書院)에 가면 단량을 기리는 비,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가 있어. 처음엔 나도 그걸 보고 깜짝 놀랐지. 계집종의 비석이 있으니. 그 당시 노비의 비석을 세운다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었거든. 노비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어. 그러니 계집종의 비석을 세웠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야. 단량이 그만한 일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지.여 : 당시는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한 신분사회였으니 아무리 단량이라 해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황 : 얼마나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인지 몰라.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지. 아, 여기 우리 고장에 이런 대단한 이야기가 있구나.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단량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여 : 단량 말고도 놀라운 이야기가 또 있다는 말씀인가요?황 : 단량비 말고도 포항에는 여종을 기리는 비가 두 개 더 있어. 용흥동 연화재에 있던 충비갑연지비(忠婢甲連之碑)와 흥해 곡강 야산에 있는 충비순량순절지연(忠婢順良殉節之淵)이지. 사연을 들어보면 기가 막혀. 갑연(甲連)은 조선 순조 때 영일현에서 주막을 하던 송 씨 성을 가진 과부의 종이었어. 그런데 나쁜 패거리들이 홀몸인 송 씨를 해코지하려고 하니 송 씨가 더러운 꼴을 안 당하려고 형산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어. 그걸 본 여종 갑연이 주인을 따라 강에 뛰어들어 송 씨는 구해냈는데, 그만 힘이 다해 자기 목숨은 못 건진 거지. 이 이야기가 당시 암행 감찰을 하던 경상도 관찰사 박기수(朴岐壽)를 통해 조정에 알려져 비를 세우게 된 거야.여 : 가슴 아프지만 당시로 보자면 목숨으로 주인을 섬긴 충절을 높이 살 만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순량(順良)은 어떤 인물인가요?황 : 순량은 선조 때 흥해 이씨 집안 아씨의 몸종이었는데, 어느 날 한 한량이 빨래하는 아씨를 보고 희롱을 한 거야. 꼴에 선비라고 시를 써서 수작을 걸었는데, 이 아씨가 아주 대찬 답시를 썼지. “내 일찍이 중국 땅 형남(荊南)의 보배로운 옥덩이로 진나라의 열다섯 성(城)과도 못 바꿀 이였거늘, 어찌 계림의 한 썩은 선비와 같이하리.” 이 글을 본 한량이 화가 나서 친구인 흥해 군수에게 일러바치니 그 군수도 유유상종이라, 사령(使令)에게 이 씨를 추포해오라고 명을 내렸지. 하지만 사령은 양심이 있었던지라 아씨에게 도망가라고 말미를 주는데, 아씨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도망은 왜 가느냐며 유서를 써서 순량에게 주고 그 길로 곡강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거야. 이걸 본 노비 순량도 아씨 없이는 내가 어찌 사나, 그러면서 같이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지.여 : 두 사연 모두 안타까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갑연이나 순량 모두 주인을 따르는 마음이 지극해 보입니다. 대단한 충절이 아니었나 싶군요.황 : 순량의 이야기는 잊히고 말았지만 순량이 목숨을 끊은 지 30년 후에 흥해 군수가 알게 되었지. 그 군수가 순량이 투신한 절벽 맞은편 천연바위에 암각으로 비를 새겨 기려주었는데, 그 비가 바로 ‘충비순량순절지연’ 비야. 그런데 비 제막식 날에 흥해의 곡강이 붉게 변하고 새도 한 마리 안 날았다고 하지.여 : 단량도 그렇고, 갑연, 순량 모두 애절하고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황 : 내가 작년 애린문화상 수상식에서도 말했는데, 여종들을 위한 비를 세우는 것이 당시 신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해도 포항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묻혀 있는 조상들의 이야기를 좀 더 알아보자는 생각에 여기서 살아보자고 마음먹게 되었지. 여 : 선생님께서 포항과 포항 사람들에게 정을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세 여종의 충절 이야기였군요. 저는 세 가지 이야기 가운데 특히 단량의 이야기가 놀랍습니다. 한 가문을, 그것도 역적으로 몰려 대가 끊길 뻔한 가문을 살린 단량이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황 : 조금 아쉬웠던 점은 1978년에 황보인 집성촌에 가보니 비각을 지어 비석을 세웠는데, 황보인 후대가 새로 만든 비석은 오석(烏石)으로 아주 잘해서 비각 안에 넣어두었어. 그런데 옛날 비석은 그대로 볼품없이 담벼락 옆에 서 있더라고. 문중에서는 나름대로 낡은 옛 비석은 그대로 두고 새 비석을 만드는 정성을 보인 것인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거지.여 : 그러니까 원래 비석 대신에 새로 만든 비석을 비각 안에 보관했군요.황 : 그렇지. 내가 문중의 사당 관리인에게 “비각 바깥에 있는 게 원래 단량 비석인데, 이 비가 안에 있어야 안 되겠나?” 했지. 그리고 “이 비석이 오래되었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니 문화재 신청을 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서 문화재 신청을 하게 되었어.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와서 보니 정말로 원래 단량 비석은 비각 바깥에 방치된 채 있고 안에는 황보씨 문중에서 새로 세운 비석이 있는 거야. 세월이 흘러 2015년 3월에야 원래 단량 비석이 비각 안에 가도록 비석 위치를 바꿔놓았지. 끝내 문화재로 지정은 못 받았어. 나는 지금이라도 그 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좋겠어.여 : 그렇군요. 그처럼 의미 있는 유적이라면 이제라도 다시 문화재 신청을 해서 지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충성스러운 여종 단량의 충절과 희생으로 대가 끊기는 화를 피한 황보 가문은 4대째 숨어 살다가 숙종 때 역적 누명이 풀려 황보인과 두 아들인 황보석, 황보흠은 관적을 회복했다. 그 후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을 살려서 키워준 단량의 고마움과 뜻을 기려서 비를 세웠고, 그 비는 현재 구룡포의 광남서원에 있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20

바다가 좋아 선택한 동해면의 한적한 중학교

이 글은 필자가 포항 지역의 사학자 황인 선생과 나눈 다섯 번의 대담과 수차례의 통화 그리고 서면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당시 선생은 임플란트 시술 중이었고, 필자 또한 서울과 포항을 오가야 하는 상황이라 인터뷰가 순조롭지 않을 수 있겠다고 우려했으나 기우였다. 첫 만남의 대담부터 선생은 매번 두 시간이 넘도록 포항의 역사와 문화, 문화재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학자 E. H. 카의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개인 또는 사회가 자신의 역사를 잊거나 혹은 왜곡해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 개인과 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끊기고,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우리 지역은 어떤가. 우리 지역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기록하여 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다행히 우리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힘든 여건에서도 몇몇 분이 그런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향토사학자 황인 선생은 그들 중 한 명이다.황인 선생은 1977년 포항 동해면 동해중학교에 부임한 이래 발굴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포항의 역사와 문화 유물,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탐사, 기록, 보존하고 전하는 일에 헌신해왔다. 선생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선생이 포항과 첫 인연을 맺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께서 1977년 동해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국사학을 전공하셨으니 교사가 아닌 다른 길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교직을 선택하신 것과 당시로 보자면 낯설고 외진 동해를 첫 근무지로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황인(이하 황) : 대학 시절부터 교사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지. 그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 군에 입대해서 대구 의무사령부 군의학교에 있었는데, 한 대학 선배가 대민 지원사업으로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어.여 : 그러니까 야학 같은 것이었군요.황 : 그렇지. 그 선배가 제대할 때 교직을 이수한 내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자리를 내게 소개해준 거야. 지금은 없어졌는데, 효목고등공민학교에서 검정고시 과목을 가르쳤지. 1, 2, 3학년별로 교실 하나, 교무실, 숙직실 하나뿐인 작은 학교였어.여 : 군대 생활도 힘들 텐데 일과 후 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황 : 피곤하긴 했지만 학생들이 워낙 열심히 하고 잘 따라서 보람이 컸어. 학교가 지금의 동대구 고속버스터미널과 동부시외버스터미널 사이에 있었는데, 당시 11월에 치르는 전국 검정고시 합격률이 98퍼센트나 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 게다가 운이 좋았는지 내가 가르친 그해 졸업생이 전국 검정고시에서 1등을 해서 졸업생 이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지원하는 부대 사령관 이름까지 떡하니 나왔지. 사령관도 기분이 좋았던지 별이 박힌 지프차를 타고 부하 장교들을 주루룩 데리고 학교에 찾아와 교사로 있던 부대원들을 격려했지. 여 : 학생들과 선생님이 얼마나 간절히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결과도 좋았으니 참 보람 있는 시간이었겠어요.황 : 그랬지. 그때 나한테 배운 학생들 가운데 한 친구는 영국 유학을 갔고, 교사, 목사, 호텔 총지배인이 되기도 했어. 육십이 넘은 제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같이 회를 먹고, 손자를 봤다고 찾아오기도 하니 정이 많이 들었지. 하여간 그때 가르치며 보람을 느꼈던 것이 나중에 교사를 하게 된 동기가 되었어. 그런 이유로 대학을 졸업하고 바다가 가까운 동해중학교로 오게 되었지. 여 : 어려운 상황에서 배우는 학생들이었으니 절실함과 고마움이 더욱 컸을 것 같습니다. 저도 포항제철에 다니면서 대학 생활을 했고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때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느꼈을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그런데 대구나 포항 도심에서 근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동해중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황 : 나는 그전부터 도시보다 조용한 시골이 좋았어. 특히 바다와 꽃을 좋아해서 학교를 정할 때 바닷가 근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사실 그때 동해는 포항과 한참 떨어진 데다 길도 포장이 안 되어서 한적할 거라 생각하고 지원했어. 당시 교장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교사가 시골 학교로 오겠다 하니 걱정이 되었는지 얼마나 있을 거냐고 먼저 묻더군. 그러면서 학교가 포항에서 오가기도 편하고 사람들 왕래가 많아 외진 시골이 아니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지. 다른 교사들이 부임했다가 시골구석이라고 금세 떠나곤 했던 모양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오히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좋아서 지원했다고 했더니, 그제야 이곳이 외진 데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더라고. 그렇게 해서 동해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여 : 당시 학교생활은 어떠셨어요? 생각만큼 만족스러우셨는지요?황 : 한적한 바닷가 학교는 나한테 더없이 좋았어.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면이 있기도 하더군. 학교 현실에서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는 가난하던 때라 등록금을 잘 거두는 교사, 성적 잘 내고 결석 안 시키는 것으로 교사를 평가하니 내심 갈등이 없지 않았어. 하지만 인생이 어디 다 좋기만 하고 나쁘기만 한가. 좋은 것이 있으면 조금 맘에 안 드는 것도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지. 정년퇴직한 지금 그 시간을 돌아보면 교사로 일해온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지.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어. 여 :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은 포항에서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를 찾아내고 널리 알리는 것일 텐데, 그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사실, 맨 먼저 여쭙고 싶은 질문도 이것인데요.황 : 계기라면 계기랄까. 우연이라는 게 참 이상하더라고. 내가 처음 역사 교사로 부임해서 반에 들어가 보니 황보(皇甫) 성을 가진 학생이 유독 많은 거야. 하루는 학생들한테 물었지. 그랬더니 성동리에 황보 성씨가 많이 모여 살고 자기들 조상인 황보인(皇甫仁)이라는 분의 비석도 있다는 거야. 황보인이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어. 설마 계유정난 때 영의정이었던 그 황보인인가 싶어 눈이 번쩍 뜨였지.선생의 말씀처럼 황보인은 조선의 6대 왕 단종 재위 시절의 영의정이었다. 그는 나중에 세조가 되는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 때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역적의 자손은 삼족을 멸한다는 당시의 법 혹은 관행대로라면 그의 자손들이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텐데,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 말이 역사 교사인 선생에게 놀라움을 안겨준 것은 당연했다.그러나 황보 집성촌이 형성된 배경에는 역사 교사인 황인 선생이 몰랐던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황보인 가문을 살려낸 충성스러운 여종 단량(丹良)의 이야기였다. 여종 단량과 황보인 가문의 이야기는 선생이 포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16

“프로의 뿌리인 아마추어 체육에 더 많은 관심 가져야”

인터뷰는 매번 최인수 선생의 단골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나서 진행했는데 메뉴는 늘 된장 전골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선생은 필자가 물을 따르거나 수저를 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손수했다. 어린 아들에게 밥을 먹이는 아버지 같은 행동이었다. 최인수 선생은 포항시 체육회 부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지역 체육계를 보살피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 : 건강은 어떻습니까?최 : 몇 달 전에 녹내장 수술을 했어. 언젠가부터 눈이 침침하고 초점이 잘 안 맞았는데 나이 탓이려니 하고 방치해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쳤나 봐. 수술 후에도 예전처럼 회복이 안 되는군. 더 나빠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겠지. 그 밖에는 크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한 편이야.김 : 체육회를 떠나신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최 : 바깥에 나가 체육회를 바라보니 체육회가 학교체육과 엘리트 체육 위주로 운영되고 있고 생활체육은 등한시하더군. 현역 시절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어. 그러던 차에 이상구 포항생활체육협의회 회장이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을 맡아달라고 하더군. 체육회를 떠난 지 얼마 안 됐고 생활체육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아 고민했지만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 간의 간격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수락했지.김 : 생활체육협의회에 들어가보니 어떻던가요?최 : 예상은 했지만 체육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조직이나 재정 면에서 미흡하더군. 그나마 2009년 양학동에 국민체육센터가 개관돼 시민들이 체육을 접할 기회가 확대된 게 다행스러웠지. 생체협 지도 선생님들의 처우가 열악한 게 문제였어. 개선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되더군. 그분들한테 참 미안했지.김 :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의 보수는 어느 정도였습니까?최 : 보수라고 할 게 있나? 상임부회장이라는 직책은 무보수에 봉사직이어야 한다는 게 변함없는 생각이야. 어느 날 사무국 직원이 활동비라면서 몇십만 원을 주더군. 당시 생활체육 지도교사가 여섯 명 정도 있었는데, 이분들은 지도 요청이 있으면 먼 곳까지 본인 차량을 이용해야 했어. 그래서 그 돈으로 주유 상품권을 사서 나눠주었지. 그나마 돈이 얼마 안 돼 다달이 번갈아 지급했어.김 : 생활체육협의회 업무가 쉽지는 않았겠습니다.최 : 맨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엘리트 체육 지도자들이 생활체육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었어. 생활체육이 활성화되어야 엘리트 체육도 발전할 수 있지. 그런데 당시 엘리트 체육인들은 그런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양쪽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산악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산행을 했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양쪽이 좀 더 가까워지고 신뢰도 생겼어.김 : 상임부회장 재직 후에는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하셨지요?최 : ‘체사모’라고 부르는 단체지. 포항에 거주하는 체육회 산하 가맹단체 원로들이 모여서 2014년에 만든 단체야. 체육 인재를 양성하고 체육인들의 친목 도모와 포항 체육 발전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어. 내가 8년째 회장을 맡아서 일하는데 회장직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야.김 : ‘체사모’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합니까?최 : 회원은 27명이고 회장과 고문, 자문위원, 정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어. 회원들에게 월 회비와 찬조금을 받아 운영하는데 체육 꿈나무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거나 도민체육대회에 출전하는 포항 선수단에게 격려금을 전달했지. 그 밖에 체육회와 체육인들을 격려하고 후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어.김 : 앞으로 ‘체사모’ 활동도 기대됩니다.최 : 다른 지역의 체육 원로들도 ‘체사모’에 관심을 보이고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경북에서 체육 원로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단체는 ‘체사모’가 유일하거든. 포항 체육을 홍보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장학사업을 확대하고 싶어. 현재 회원은 60∼70대가 주축인데 30∼40대도 가입할 기회를 만들려고 해.김 : 포항은 긴 해안선을 접하고 있어 해양 스포츠가 발달하기에 좋은 환경인 것 같습니다.최 : 그렇지. 포항은 해안선의 길이가 204㎞에 이르는 천혜의 해양도시야. 이를 충분히 활용해 전 연령과 활동 수준에 맞는 맞춤형 해양 레저스포츠를 체험할 기회를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해. 그리고 해양 스포츠팀을 육성하고, 해양 스포츠센터, 계류장 같은 기반시설을 확충해 해양 스포츠를 산업으로 키운다면 포항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겠지. 김 : 프로스포츠도 한번 짚어주시지요. 포항에 스틸러스 축구단이 있습니다만.최 : 포항 스틸러스가 적은 재정으로도 준수한 성적을 내고 있지. 스틸러스가 자생력을 더 키워 포항의 브랜드 가치를 키우고 스포츠 선진 도시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한때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연고지 맨체스터는 인구가 40만 명이야. 포항보다 작은 도시지. 그런 곳에 맨체스터시티와 더불어 두 개의 세계적인 명문 구단이 있어. 포항 스틸러스도 50년 전통을 가지고 있어. 일본 J리그 경우를 보면 우리보다 10년이나 프로리그 출범이 늦었지만 몇몇 구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흑자 경영을 하고 있거든. 지역민들의 사랑이 커서 가능한 일이야. 스틸러스도 포항 시민의 관심과 사랑을 더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김 : 2012년 포항에 정식 야구장이 개장된 것도 포항 체육사에서 중요한 대목인 것 같습니다.최 : 포항에 1만2천 석 규모의 야구장이 건립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지. 이 야구장이 건립되어 포항에 프로야구 유치를 할 수 있었고, 전국 규모의 아마추어 야구도 계속 열 수 있었어. 사회인들도 이 야구장에서 뛰면서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지. 하지만 프로야구의 근간이 되는 고등학교 야구의 현실을 보면 씁쓸함을 금할 수 없어. 경북 제1의 도시 포항의 유일한 고등학교 야구부가 존폐 위기에 놓였거든. 포철공고가 2013년 마이스터 고등학교로 전환하면서 관계 법령에 따라 야구부, 축구부가 포철고로 이관되었지. 마이스터 고등학교는 운동부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야. 그래서 포철고에서 야구부와 축구부를 운영하는데 작년에 학교에서 느닷없이 야구부를 해체하겠다고 선언했지. 충격적인 일이었어. 야구부 학부모와 포철고 동문들이 들고 일어나 야구부 해체가 백지화되긴 했지만 이 사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었어. 상황이 이러니 포철고 야구부에 우수한 선수들이 오겠냐 말이야. 포철고 야구부는 2018년 청룡기에서 준우승을 하는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참 답답한 일이지. 프로스포츠의 화려한 면만 보지 말고 그 뿌리인 아마추어를 육성하려는 의지가 아쉬워.김 :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전해주시지요.최 : 몇 번 강조했는데 시민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사업이 필요해. 올해 울진에서 열린 경북도민체육대회에서 포항이 또 우승했어. 그런데 그 사실을 포항 시민들은 잘 몰라. 도민체육대회가 체육인들만의 잔치가 된 거나 마찬가지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선수를 양성하고 대회에 나가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해. 그리고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말이야. 그러려면 생활체육을 활성화해야 하지. 또 한 가지 당부하자면, 포항이 경북 제1의 도시로서 경북 전체를 아우를 만한 그릇으로 키워야 해. 작은 것은 통 크게 양보하고 다른 시·군의 의견을 경청한다면 향후 포항체육회가 큰일을 도모할 때 힘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끝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13

도민체전의 살아 있는 역사… 44년간 선수와 임원으로 참가

1963년 제1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대구에서 열렸다. 대구와 경북의 행정구역이 분리되기 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정구 선수로 제1회 도민체육대회에 출전한 최인수 선생은 이후 44년간 선수, 혹은 임원으로 도민체육대회에 참가하게 된다.김 : 포항시 체육회에도 오래 몸담으셨지요?최 : 1975년에 포항으로 온 지 얼마 안 돼 체육회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때는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기 전이었고 체육회도 지금처럼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지. 변변한 사무실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거든. 체육을 전공한 사람이 흔치 않은 데다 내가 정구대회에도 출전하다 보니 여러 방면에 쓰임이 있어 보였던 모양이야. 그때 이사직을 수락해 맺은 인연이 2009년 부회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됐어. 김 : 체육회는 주로 어떤 일을 합니까?최 : 종목별로 활동하는 체육인들의 구심 역할을 할 조직이 필요해 체육회를 만들었지.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체육의 역할이 커지면서 체육회의 위상도 단순히 체육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게 되었어. 지금 체육회는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진흥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의 건강과 체력 증진, 여가 선용과 복지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한편으로는 우수 선수를 양성해 경북도민체육대회나 전국체육대회 등에서 포항의 위상을 높이는 목적도 있겠고.광복 직후 사회적 혼란 속에서 포항은 1946년 대구의대 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 경북도내 중학 축구 춘계 리그전에 포항중 등 8개 학교가 참가했다. 같은 시기에 포항중, 동지중, 포항여중 등에서 학교 운동부가 활동하기 시작해 포항 체육 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포항시 체육회는 축구인들이 주축이 되어 1947년 4월 1일 창립되었다. 초대 회장 김병준은 체육회의 재정적 후원자로 체육회 사무실 또한 그의 사업체인 수산회사 내에 있었다. 체육회가 발족한 해에 광복 2주년을 맞아 영흥초등학교 건너편 염전에서 ‘제1회 남선 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포항에 본격적인 체육 활동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했으나 제자리도 잡기 전에 6·25전쟁이 발발해 활동이 정지되고 만다.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포항 체육계는 1965년에 ‘포항시체육회재건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1966년 어려운 재정 형편에도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린 제4회 경북도민체육대회에 450명의 선수단을 구성해 참여함으로써 체육회 결속을 꾀하였고 1973년에 열린 제11회 경북도민체육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종합 우승을 하는 등 중흥기를 맞았다. 1974년 제12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 처음으로 열렸고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발판 삼아 ‘학교체육 육성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체육 저변 확대, 지도자 양성, 체육 시설 확충에 전력을 쏟는 등 포항 체육 진흥의 기틀을 잡았다.1995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함에 따라 체육회도 통합 체육회로 재구성되었고, 2016년에는 포항체육회와 포항생활체육회가 통합되었다. 2020년부터는 시장이 당연직으로 체육회장에 취임하던 것에서 변경되어 선거를 통해 체육회장을 선출했다.김 : 경북도민체육대회 이야기를 좀 해보죠. 선생님은 1회 때부터 선수로 출전하셨지요?최 :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도민체육대회가 열렸지. 10개 정식종목과 5개 시범종목에 33개 시·군이 참가한 것으로 기억해. 대구는 구 단위로 출전했는데 나는 대구상고가 있는 남구 대표로 나갔어. 전국체육대회처럼 성화도 있었는데 경주 토함산에서 채화해 경기장까지 봉송했지. 김 : 그 후로는 어떻게 참가하셨습니까?최 : 1974년까지 남대구 대표로 출전하다가 1975년부터는 포항 대표로 나갔지. 포항 선수로 뛴 것만 해도 20년이 넘어. 선수를 그만두고는 대회 임원으로 참가했으니 거의 반세기 동안 도민체육대회에 나간 것이지.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참가한 줄 몰랐는데 한 해 한 해 쌓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김 : 그렇게 오랫동안 참가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 기억나는 일이 있으십니까?최 : 남동생이 둘 있는데 테니스를 했어. 1996년 도민체육대회 때 삼 형제(인수, 인국, 인호)가 모두 포항 대표로 출전했지. 두 동생이 테니스 선수로 출전하다가 그해에는 정구로 바꿔서 출전했어. 1999년에 포항에서 경북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내가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지휘를 맡았어. 대규모 행사에서 막중한 임무를 맡다 보니 부담이 꽤 컸는데 실수 없이 잘 치른 덕분에 보람이 컸지.김 : 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도 여러 번 개최됐지요?최 : 작년에 열린 대회까지 합하면 모두 여섯 번 개최했어.포항에서 처음 개최한 제12회 도민체육대회는 1974년 5월 18, 19일 이틀간 열렸다. 이 대회는 포항이 치른 최초의 도 단위 체육 행사였다. 성공적인 대회 개최로 지역 체육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지역 체육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두 번째는 1987년 5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열린 제25회 대회였다. 대구시가 광역시로 분리된 직후여서 다른 시·군에서 개최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기에 포항과 경주에서 종목을 나누어 치른 대회였다. 그 후 1990년(제28회), 1999년(제37회), 2010년(제48회), 2022년(제60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 열렸다.김 : 전국체육대회도 포항에서 한 번 열렸지요?최 : 전국체육대회 이전에 1985년에 제14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지방 중소도시 최초로 포항에서 개최되었어. 제15회와 제16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때는 사격, 축구, 체조, 수영 등 일부 종목이 포항에서 진행되었고. 그 후 10년이 지나 제76회 전국체육대회가 1995년 10월 2일부터 7일간 포항에서 열렸지. 전국소년체육대회 때 조성된 체육관, 종합운동장(제1종 육상경기장), 수영장, 사격장 등 경기 시설과 대회를 개최하면서 축적된 운영 경험이 전국체육대회 유치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해. 도청 소재지가 아닌 중소도시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체육대회이자 사실상 경상북도에 열린 최초의 전국체육대회였거든. 1995년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였고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 시대의 원년이기도 했어. 이렇게 뜻깊은 해에 포항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려 포항은 잔치 분위기였지. 다행스럽게 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포항의 위상을 전국에 알렸고 나 자신도 포항 체육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어. 김 : 포항에서 열린 굵직한 체육대회에는 선생님의 노고가 더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대로 보람이 컸을 것 같은데 보상도 있었습니까?최 :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고 자부심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지. 고맙게도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격려해주었어. 2001년에 포항시 최고체육상 공로상을 받은 게 각별히 기억에 남는군. 이 상은 학교장이나 가맹 경기단체의 장 또는 재정적 지원을 한 상공인이 받았는데 일선 교사는 내가 처음 수상하게 돼 무척 영광스러웠어.김 : 그만큼 포항체육회에 기여한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체육회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요.최 : 오랜 기간 체육회에 있으면서 무난하게 일 처리를 해서인지 2005년에 체육회 부회장에 임명되었어. 학교체육 위원회장을 겸하는 자리였지. 부회장을 맡는 동안 학교체육의 기본 방침과 진흥에 대해 자문 역할을 했고 학생스포츠클럽 활성화와 신인 발굴, 꿈나무 육성 등 학교 운동부 운영에 대한 사업 전반을 살폈지.김 : 체육회 부회장은 언제까지 하신 겁니까?최 : 2009년에 부회장직을 내려놓고 체육회를 떠났지. 그 두 해 전에 교직 생활을 마감했고. 시간이 지나니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군.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그동안 체육회에 몸담으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느꼈기에 아쉬운 마음 없이 떠날 수 있었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09

박태준 회장의 특명, 운동부를 창단하라

1980년 5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포철공고에 축구와 야구 중 교기 육성 종목 하나를 선정해 창단하라고 지시했다. 이 업무를 맡은 최인수 선생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충분한 기초자료를 수집한 후에 우수 선수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종목을 선택한다. 김 : 포철공고로 가서 1981년에 야구부를 창단하게 됩니다.최 : 포철공고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듬해에 박태준 회장님이 축구와 야구 중 하나를 정해 교기(校技)로 육성하라고 지시하셨어. 그래서 먼저 선수 확보를 위해 경북도내 중·고등학교 운동부를 대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지. 당시는 대구가 경상북도에서 분리되기 전이었어. 자료를 살펴보니 야구부는 공립 중·고등학교에서 주로 운영하고 축구는 사립학교에서 운영하더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축구를 하는 사립학교는 선수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다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거든. 그만큼 선수 확보가 어렵다는 거지. 반면에 야구는 연계된 상급학교가 따로 없어서 선수 확보가 쉬운 편이고. 그래서 야구를 선정하게 된 거야.김 : 어느 학교가 야구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까?최 : 중학교는 포항중, 경주중, 경주 무산중, 대구중, 경상중, 경복중이 있었지. 고등학교는 경북고, 대구상고, 대구고에 야구부가 있었고.김 : 그래도 신생 학교가 선수를 확보하려면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최 : 오히려 그 반대였어. 포철공고의 장점이 뭐냐면 선수들의 학비와 운동회비를 면제하는 것은 물론, 장비 일체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야구 장비는 꽤 비싸서 선수와 학부모가 부담스러워했거든. 이런 조건을 걸고 선수 확보를 했더니 전국 상위권인 대구중학교 3학년 전원이 포철공고를 지원한 거야. 그랬더니 대구 지역 고등학교에서 난리가 났어. 경북고, 대구고, 대구상고가 합심해 경북교육위원회에 대구 지역 중학교 야구부의 포철공고 진학 포기 협조 요청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 김 : 선생님께서 참 난감하셨겠습니다.최 : 그랬지. 교육감님이 포철공고 교장에게 전화해 조금만 양보하라고 설득하더군. 결국 경북교육위원회 중재로 포항중 야구부 전원은 포철공고로 입학하고 다른 중학교 선수들은 각 고등학교에서 돌아가며 한 명씩 지명하는 방법을 택하지. 전국 최초로 드래프트 제도를 시행한 거야. 포철공고의 양보로 성립된 중재안이었어, 대구 지역 고등학교가 ‘제2의 장효조’라 불리던 대구중 정성룡 선수를 포철공고에 양보함으로써 갈등이 해소되었지.김 : 야구부가 창단된 다음해에 프로야구가 개막합니다. 시기가 참 절묘합니다.최 : 그런 셈이지. 원래 고교야구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야구 붐이 일었어. 야구를 하는 학생들에게도 커다란 동기가 유발되었고 말이야.김 : 야구부의 성적은 어땠습니까?최 : 야구부는 창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성과를 거뒀어. 창단 3년 차에 봉황대기, 청룡기, 전국체육대회, 황금사자기에서 준우승을 했고 무등기에서는 3위에 입상하며 돌풍을 일으켰지. 우승도 곧 할 수 있을 것 같더군.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어. 오죽하면 내가 정년 퇴임사에서 “야구부가 준우승만 네 번 하고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는다”라고 했겠나.김 : 그래도 훌륭한 선수를 많이 배출했지요?최 : 정성룡, 김성범, 최해명, 오봉옥, 강민호, 권혁, 최준석, 김동현, 김정혁, 이민호, 신동주, 김희걸, 김인철 등이 기억에 남아. 강민호는 지금도 삼성 라이온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지.김 : 강민호 선수는 고향이 제주도인데 어떻게 포철공고로 오게 되었습니까?최 : 강민호는 제주 신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철중학교로 진학했어. 제주도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가 제일중학교밖에 없었지. 고등학교 야구부는 아예 없어 야구를 계속하려는 학생은 육지로 진학했고 대부분은 중학교 졸업 후에 그만두었어. 소년체전 때 강민호의 재능을 눈여겨본 포철중학교 감독이 스카웃했지. 강민호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권혁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은 포철공고의 보람이기도 했어. 김 : 야구부를 창단하고 4년 뒤 축구부도 창단됩니다.최 : 그에 앞서 1983년에 포철중학교 축구부가 창단돼. 원래는 그 학생들의 고등학교 진학에 맞춰 1986년에 창단하려고 했는데 박태준 회장님의 지시로 한 해 앞당겨 창단한 거지.김 : 축구는 대부분 연계된 상급학교가 있어 선수 확보가 어렵다고 하셨는데.최 : 당연히 힘들었지. 게다가 1981년에 대구직할시와 경상북도의 행정구역이 분리되는 바람에 선수를 확보할 수 있는 학교가 더 줄었어.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학교가 안동중, 강구중, 풍기중, 울진중 정도였지. 포철중은 3학년이 없어서 불가능했고. 고등학교는 안동고, 경주고, 영덕종고, 동지상고 등이 있어서 이전에도 고등학교끼리 선수 확보 경쟁이 치열했어. 게다가 기존 학교 보호를 구실로 경북축구협회에서도 비협조적이더군. 당시 경북축구협회가 안동에 있었거든. 경북축구협회에 가서 포철공고에 축구부를 창단하려고 한다니까 부회장이 대뜸 창단할 수 없다고 하지 뭔가. 너무 어이가 없어 언쟁을 벌어졌는데 사무국 직원이 뜯어말리느라 혼났지.김 : 그렇다고 축구부 창단을 포기할 수는 없었겠지요.최 : 하는 수 없이 경북체육회에 가서 선수등록부를 보고 연락처로 일일이 전화했어. 그랬더니 소식을 들은 중학교 감독과 코치들이 자기들 모르게 선수를 빼간다고 난리가 났지.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한 후 협조를 구했어. 그렇게 해서 강구중 6명, 풍기중 2명, 울진중 2명을 확보했고, 서울 한양공고 2학년 재학생 4명을 전학시켜 인원을 채웠지. 안동중은 안동고가 있으니 끝까지 거절하더군. 골키퍼를 결국 못 구해 일반 재학생 중 소질 있는 한 명을 선수로 등록해 15명으로 1985년 3월 29일 창단했어. 김 : 포철공고 축구부는 성적이 정말 좋았지요.최 : 엄청났지. 내가 학교에서 나올 때까지 대통령배, 문화체육부장관기, 전국체전, KBS배, MBC배 등 전국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 3위를 각 8회씩 했으니까. 특히 이동국 선수가 입학한 1995년부터 최고 전성기였어. 1997년 KBS배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해병대에서 지원해준 차를 타고 포항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했지. 일본 시즈오카에서 열린 한국, 일본, 캐나다 3개국 고교 축구대회에 포철공고가 한국 대표로 초청받아 참가하기도 했고. 이동국 외에 이창원, 이원재, 남의경, 박원재, 황진성, 오범석, 이수환, 이재동, 신광훈, 김강현, 신화용, 임경훈, 오주포, 김대한, 신수진, 김석근이 포철공고 출신의 최상급 선수들이야. 김 : 이동국 선수의 기량은 출중했지요.최 : 이동국은 원래 포항동부초등학교에 다녔어. 동국이가 4학년 때 포항시 초등학교 육상대회에 나가서 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우승했지. 동부초등학교는 육상부도 없어서 출전하는 데 의의를 두었는데 동국이 덕분에 단체 3위를 했거든. 동국이를 눈여겨본 포항 스틸러스 유스팀 이영환 감독이 동국이에게 축구를 권한 거야. 그래서 포철동초등학교로 전학한 거지. 동국이는 축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차범근 축구상’을 받을 정도로 소질이 뛰어났고, 고등학교 때 전국 최고의 스타가 되었어.김 : 포철공고 운동부가 다른 학교와 비교했을 때 특별하게 운영되었던 게 있습니까?최 : 야구나 축구를 하는 학생 중 상급학교 진학이나 실업·프로팀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이를 대비해 전 선수들이 훈련 후에 기능사 자격 취득을 위한 교육을 이수하도록 했어. 또 선수들의 정신교육과 체력 단련을 위해 매년 해병대에 입소해 유격훈련을 실시했지. 특히 축구는 우수 선수를 선발해 포항 스틸러스에서 브라질 유학을 보내주었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06

대동고를 거쳐 포철공고 교사가 되다

최인수 선생은 1975년에 포항 대동고등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20여 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대구를 떠나 객지로 오기까지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오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을 겪었을 터이다. 김 : 대구에서 포항으로 온 이유와 과정이 궁금합니다.최 : 효성여고에서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덧 겨울이 되었지. 방학인 데다 테니스부 운동도 잠시 쉬는 기간이라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집에 찾아왔어. 고등학교 때 같이 운동한 친구인데 포항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 예전에 복잡한 일 때문에 생각을 정리할 겸 포항에 바람 쐬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송도 근처에서 우연히 이 친구를 만나 크게 대접받은 적이 있었어. 친구가 술 한잔하자기에 그때 진 신세를 갚을 겸 따라나섰지. 당시에 일명 ‘나라시’라고 부르는 장거리 합승 택시가 있었거든. 대구역에서 그걸 잡아타고는 경주에 가자고 하더니 가는 도중에 포항으로 행선지를 바꾸지 뭔가. 제대로 얻어먹으려나 보다 생각하고 아무 말 없이 포항까지 갔어. 술자리가 파한 후(선생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어릴 적 부친이 술로 건강과 재산을 잃는 과정을 본 까닭이다.) 다음 날 오전 10시에 포항전화국 옆 다방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보냈지. 다음 날 아침, 다방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대신 다른 사람이 다가오더군.김 :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최 : 김현호 대동고등학교 교장이었어. 김현호 교장은 포항정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어서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드리며 여기는 어떻게 오셨는지 물었어.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서 사실은 여름에 대구 효성여고에서 열린 전국사립고등학교 교장 회의에 참석했다가 선수를 지도하는 나를 보고 대동고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친분이 있던 내 친구에게 자리를 마련해달라 부탁해서 나를 포항에 데리고 온 거라고 하더군.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마침 친구도 나타났어.김 : 김현호 교장이 선생님을 데리고 오려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요?최 : 1973년에 대동고등학교가 개교했으니 2년이 지난 시점이었지. 신생 학교여서 학생 유치에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이야. 교장은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당시 교사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정구대회 개최를 생각한 거야. 무슨 말이냐면 그 대회에 중학교 교사들을 초청해서 우수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홍보할 구상을 한 거지. 그뿐 아니라 대동고등학교에도 정구부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러던 차에 효성여고에서 나를 보고는 이 계획을 실행할 적임자로 생각했나 봐. 이런 얘기를 하면서 대동고로 오면 안 되겠냐고 간곡히 부탁했어. 친구도 자기와 운동을 같이하며 포항에서 살자고 설득했고. 그렇지 않아도 여고 근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자고 했지.김 : 효성여고에서도 선생님이 필요했을 텐데 전근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최 : 왜 없었겠나? 사립학교 교사가 다른 사립학교로 옮기려면 전(前) 학교 교장의 허가가 있어야 하거든. 대동고로 가겠으니 허락해달라고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펄쩍 뛰었지. 아주 난리가 났어. 몇 번을 찾아가서 사정하고 온 가족이 포항으로 이사했다고 거짓말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어. 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났는데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국에는 못 이기는 척하고 승낙해주더군. 허가서를 주면서 “최 선생, 거기 가면 분명히 후회하고 돌아오고 싶을 거다. 앞으로 3년 동안 최 선생 후임자는 뽑지 않을 테니 그 안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하셨어. 정말 죄송하고 또 고맙더군. 우여곡절 끝에 대동고등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이미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나 있었지.김 : 대동고등학교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최 : 포항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대동고등학교로 가자고 하니까 대동고등학교를 모르는 거야. 동료 기사에게 묻고 물어 학교에 도착하니 입구가 비포장이라 시커먼 진창길이야. 건물 두 개 중 하나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어. 지나가는 학생에게 고등학교 건물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짓고 있는 건물을 가리키더군. 그 순간 효성여고 교장이 한 얘기가 떠올랐어.김 : 다시 대구로 돌아가고 싶었겠습니다.최 : 김현호 교장을 만나 인사를 드리는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어. 김 교장도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았는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3년만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군. 나도 그 난리를 치고 왔는데 자존심 때문에 바로 돌아가기는 싫었어. 그래서 3년은 하고 돌아가자고 생각했지. 그렇게 대동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차츰 학교에 정이 들었어. 얼마 뒤에는 대구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안 하게 되었고 말이야. 김 : 당시 학교의 체육 교육은 어땠습니까?최 : 신생 학교라 시설이 완공되지 않았지만 운동부는 꽤 활성화되어 있었어. 육상부와 조정부가 있었지. 이듬해에 검도부가 창단되는 등 당시에는 체육 교사가 흔치 않았는데도 운동부 육성에 열성적이었어. 그 당시 대동고 외에 동지상고(현 동지고)에도 검도부가 있었고 포항수고와 동지여상(현 동지여고), 포항실업전문대(현 포항대학)에 조정부가 있었지. 1978년에는 포항고에 사격부가 생겼고.김 : 하지만 3년 뒤에는 대동고등학교를 떠나게 되는군요.최 :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포항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혼했어. 학교 앞 주택에 신혼집을 차렸는데 집주인이 교장 선생님의 동생이었어. 동생도 교사였는데 울진 매화중학교로 발령을 받아 내가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지. 그런데 집주인이 갑자기 포항으로 다시 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당장 집을 비워주고 다른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무렵에 포항제철에서 공립이었던 포항공고를 인수했어. 포항제철이 필요한 인력을 직접 양성하겠다는 조치였지. 그게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야. 그런데 포항공고에서 근무하던 교사 중 다른 공립학교로 전근한 이들이 많아서 교사가 부족했지. 그때 포철공고에서 교사로 오면 13평 아파트를 제공해준다는 거야. 그런 이유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지.김 :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습니다.최 : 그게 아니었다면 대동고에 남았을 거야. 김현호 교장은 내가 학교를 옮긴다고 하니 엄청 화를 냈지. 내가 학교에 남아 학생 유치에 도움을 주고 정구대회에도 같이 나가주길 바랐으니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나한테 아예 포항을 떠나라고 하더군.김 : 전후 사정을 얘기해보지 그랬습니까?최 : 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옮긴다는 것을 사실대로 말했으면 오해가 풀렸을 텐데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 그 후 몇 년 동안은 우연히 만나 인사를 드려도 아는 체도 하지 않더군. 참 마음이 아팠어. 그러다가 어느 해, 크리스마스카드에 용서를 비는 말과 함께 대동고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세하게 적어 보냈어. 그제야 관계가 회복되었지. 그 후로는 교직원 국가대표로 일본에 같이 다녀오고 내가 포항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에 취임할 때 축사도 해주셨어. 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02

정구, 소년 가장에게 희망이 되다

포항 역사에서 체육은 중요한 맥을 이룬다. 1945년 조선무술회를 결성한 동암(東庵) 문달식의 인생을 되짚어보면 포항이 김정행, 정성숙, 김재범 같은 한국 유도계의 거물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국가대표로 한국 여자농구를 이끌었던 이귀복, 이춘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동지중·고등학교 영어 교사 남인우가 포항에 농구를 들여온 1951년을 만나게 된다. 포항수산고(현 한국해양마이스터고) 3학년 천인태는 1981년 한 해 동안 7개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해 ‘포항 물개’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정규 풀(pool)이 없어 영일만을 훈련장으로 삼았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보다 푸르고 맑았을 40년 전의 영일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또 한 명……. 선수, 교육자, 체육 행정가로 포항 체육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기고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최인수(崔仁秀)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김도일(이하 김) : 체격에 비해 손이 두껍고 힘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최인수(이하 최) : 그런가? 정구를 오래 해서 그런 것 같아.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 코트에 나가거든. 골프장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가고.김 : 태어나고 자란 곳은 어디입니까?최 : 서울 종로에서 광복 이듬해에 태어났어. 다섯 살 때 6·25전쟁이 발발했는데 그때 대구로 피난 왔지. 피난 중에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 삼덕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전쟁이 끝나서도 서울로 가지 않고 대구에 정착했지. 그 후 초등학교 세 개(동인, 중앙, 삼덕)가 통합돼 동덕초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959년에 2회로 졸업했어. 김 : 전쟁에 대한 기억은 있습니까?최 : 너무 어려서 또렷한 기억은 없어. 집을 나와서 가족들과 산속에 숨어 있는데 멀리서 들리던 총소리는 생각나. 당시 선친이 종로에서 양행점(洋行店, 서양식 잡화점)을 운영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어. 집이 단독주택이었고 말이야. 전쟁이 터지자 지하실에 경찰 고위 간부를 숨겨주었는데 그분이 피난 때 트럭을 제공해주어 편하게 대구까지 온 기억이 나. 김 : 대구 생활은 어땠습니까?최 : 선친이 대구에서도 양행점을 열어 크게 성공했지. 당시 대구에 2대 양행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구백화점 창업주가 운영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선친이 운영하는 것이었어. 장사가 잘된 만큼 부모님은 자식들을 돌볼 겨를도 없이 바빴어. 그러다가 내 바로 밑에 남동생이 있었는데 삶은 달걀과 건빵을 먹은 다음 날 새벽에 장이 막혀 급사했지 뭔가. 선친을 많이 닮아 유독 귀여움을 받던 동생이었지. 그 일을 계기로 선친은 사업을 팽개치고 술에 의지해 살았고, 그러는 사이 연이어 사기를 당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어. 누님의 고등학교 입학금을 못 낼 정도였지. 그때 누님과 내 학비를 벌려고 다방과 술집을 돌아다니며 담배와 껌을 팔았어. 텃새 때문에 맞기도 하고 돈과 물건을 빼앗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체육 교사였던 박근수 선생님께 들켰지. 당시에는 겁이 나서 도망갔는데 다음 날 선생님 앞에 서니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만 나오더군. 나중에 선생님이 사정을 알고 극빈자로 등록해주셔서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지.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장사도 계속할 수 있게 되어 누님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학비를 낼 수 있었고. 내가 평생을 체육계에 몸담을 수 있었던 것도 박근수 선생님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김 : 정구 선수로 활동하셨지요.최 : 1962년에 대구상고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지. 중학생 때 농업 선생님이 덴마크에서 유학하신 분이었어. 그분이 유학 시절에 배운 배드민턴을 학교에 보급하며 대회를 개최했지. 내가 그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보면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 대구 중앙통 한일은행에 정구 코트가 있었는데 대구중, 계성중 정구 동아리 학생들이 그곳에서 운동을 했지. 가끔 그 학생들과 어울려 정구를 같이했어. 대회에 나가기로 한 대구중학교 선수 하나가 갑자기 몸이 아픈 바람에 내가 대신 출전했는데 처음 나간 대회에서 3위를 했지 뭔가. 그때 대구상고 정구부 감독 눈에 들었어.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하면 학비가 전혀 안 든다는 것이 정구 선수가 된 결정적인 이유였지. 김 : 본격적으로 운동선수의 길로 들어선 것이군요. 어땠습니까?최 :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지. 운동도 힘들었지만 선배들한테 기합과 구타를 당하는 게 더 견디기 어려웠어. 거의 매일 3학년이 2학년을, 2학년이 1학년을 집합시켜 가혹행위를 했어. 한번은 맞다가 허리를 다쳐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선수 생명이 끝나는 줄 알았지. 퇴원 후 때린 선배를 찾아가 복수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오히려 선배와 선배의 친구들에게 두들겨 맞고 운동부를 나와버렸어. 나중에 3학년 선배의 중재로 때린 선배와 화해하고 허리도 괜찮아져 운동부에 복귀했지만 지금도 그때의 영향으로 허리가 안 좋아.김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삼호방직에 들어가셨지요?최 : 당시 전매청과 더불어 대구에 실업팀을 운영하는 두 곳 중 하나였지. 선수도 직원이어서 안전관리과에 소속되었어. 아침에 출근해 오전 내내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에 연습 좀 하고 퇴근하는 게 일과였지. 그러다가 대회가 있으면 출전하고. 평생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작은 기술 하나라도 배워야겠다 싶어 무엇이라도 배울 수 있는 직책을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어. 회사 사정도 이해되는 것이 선수들은 대회나 연습 때문에 근무 시간이 들쑥날쑥해서 오히려 방해만 되었겠지. 계속 이런 생활을 하다가는 미래가 없을 것 같아 2년 만에 퇴사한 거야. 김 : 퇴사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최 :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에 경북대학교에서 정구부를 만든다며 입학 제의가 들어왔어. 그런데 입학 조건이 체육특기생이 아니라 일반 학생 자격이었어. 국립대 특성상 제한이 있었던 것 같아. 여전히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쉽게 응하지 못하다가 중학교 은사인 박근수 선생님을 보며 입학을 결심했지. 당시 선생님께서는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계속해 대구한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거든. 박근수 선생님을 롤 모델로 삼은 거지. 예상했지만 학비를 벌면서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어. 코트 관리를 하며 정구장 회원들한테 얼마간의 관리비를 받고 쌍화차를 끓여 새벽에 운동하는 회원들에게 팔기도 했지. 나중에는 회원들이 내 사정을 알고 많은 도움을 주었어.김 : 실업 선수로 있다가 대학 선수가 되신 거네요?최 : 그런 셈이지. 2년간 실업팀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덕분에 크고 작은 대회에서 입상할 수 있었어. 그러다가 3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돼 일본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출전했지. 그 덕분에 이름이 알려지자 도움을 주는 분도 많아졌어. 당시 정구 대신 테니스붐이 일어났는데 이영길 대구정구협회장의 도움으로 대구 아카데미극장 옆에 작은 테니스용품 가게를 열었지. 일본에 갔을 때 스포츠용품 영업사원들이 와서 자사 제품들을 홍보하더군. 그때 알게 된 용품 회사 직원인 고바야시라는 사람에게 정가보다 3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물품을 받아 판매했는데 꽤 잘되었어.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야 해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동생에게 용품점 운영을 맡겼지.김 : 졸업하고 바로 교직에 들어간 겁니까?최 : 197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의 추천으로 테니스부가 창단된 대구 효성여고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어. 가톨릭 계열의 보수적인 효성여고에 총각 선생님이 부임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지. 그만큼 테니스부에 거는 기대가 컸던 모양이야. 대구에는 이미 경북여고와 남산여고에 테니스부가 있어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선수들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했어. 당시 경주여중 테니스부에 좋은 선수가 많았는데 신생 학교인 효성보다는 경북이나 남산을 선호했지. 테니스부에 애정이 많았던 교장은 선수 확보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본인이 생각한 만큼 선수 확보가 안 되자 나를 심하게 질책했어. 또 힘들었던 것은 내가 학교의 유일한 남자 미혼 교사여서 학생들이 수업에는 관심 없고 자꾸 장난을 치려고 하는 거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여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에 얼굴을 붉힌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문제여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해야 하나 고민도 했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