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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포항제철 성공하면서 고시 콤플렉스 털어내”

포항제철은 포항을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건설 초기의 포항제철, 그리고 포항이 철강 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이대공 이사장은 그때의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냈다. 홍 : 포항제철 입지가 선정된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이 : 친구 신명수[전 동방유량 회장]에게 찾아가 물었다. 제철 공장이 들어서면 뭐가 바뀌게 되는지를. 한 달 후에 신명수가 나를 불러서 “일본식으로 제철소가 성공하면 인구가 10배는 늘어날 것”이라고 하며 블록 공장을 해보라고 권했다. 재밌는 게 제철 공장은 블록이 아닌 강철판으로 짓는다. 제철, 압연, 후판 공장 모두 그렇다. 그런데 신명수는 제철소를 블록으로 짓는 줄 알고, 친구인 날 돕기 위해 블록 공장을 하라고 권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블록 공장은 하지 말라고 말을 바꿨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터질 일이다. 그는 구획정리 사업과 건축업도 권했다. 그즈음 포항에서 70만 평 구획정리 사업을 주도한 게 나다. 1968년 말쯤이다.홍 : 그렇다면 사업을 하시다가 포항제철에 입사하셨군요.이 : 제철소가 들어서는 걸 알게 된 후 언론이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곳에 살던 주민들의 불만도 있었다. 조상들이 농사짓던 논과 밭을 낮은 가격에 내놓기가 싫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언론을 상대할 사람, 대민(對民) 업무할 사람, 대관(對官) 업무할 사람이 필요했다. 포항제철 고준식 수석부사장이 김장섭 당시 국회의원에게 이런 일을 해줄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이다. 김장섭 의원의 추천으로 포항제철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당시 나는 월급쟁이보다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야구 배트 수출과 양송이 사업, 구획정리 사업으로 돈을 제법 벌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선배들의 추천과 제의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69년 1월 13일 포항제철에 입사했다.홍 :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포항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됩니까?이 :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고용부터 급격히 증대되었다. 건설 현장에서는 주로 포항 사람들이 일했다. 그들이 받는 일당도 적지 않았다. 음식점과 술집도 번창했다. 건설업체가 포항으로 많이 오게 되니 그 회사 직원들이 퇴근 후면 밥 먹고 술 마시며 지역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포항 시내가 와글와글할 때였다. 한국에 좋은 직장이 많이 없던 시기였기에 일자리를 찾아 외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홍 : 포항제철은 어떤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요?이 : 박정희 대통령이 제철소를 살피러 포항에 11년 동안 13번 왔다. 대통령이 오면 경호를 위해 헬기가 3대 떴다. 어느 헬기에 대통령이 탔는지 알 수 없었다. 건설 과정에서 관계자 격려, 현장 확인을 위한 방문이었다. 시민들도 ‘대통령이 저렇게 큰 관심을 가지는 회사가 포항제철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포항제철처럼 짧은 기간에 성공한 제철소는 없다. 103만 톤으로 시작해 850만 톤, 광양을 포함하면 2,100만 톤까지 철강을 생산했으니. 지금은 4,000만 톤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수출입은행 원금을 다 갚고 벼락처럼 성장했다.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관련 업체도 동시에 발전했다. 1973년 이전엔 남한의 경제 상황이 북한보다 못했다. 1973년부터 남한이 앞서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가 포항제철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1973년은 포항제철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기 시작한 해다.홍 : 1970년대 포항에 포항제철 외에 어떤 업체가 있었는지요?이 : 농수산물 가공업체 정도였지 별게 없었다. 그땐 영일만에 설치된 정치망에서 정어리나 방어가 잡히던 시절이고 그게 산업이라면 산업이었다. 그 정도의 어촌이 포항제철의 등장으로 비약적, 압축적으로 성장한 것이다.홍 : 포항제철 입사 초기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셨는지요?이 : 한마디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마음이었다.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태도도 있었다. 1969년 1월에 입사하니 박태준 회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32평 목조건물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하듯 일하고 있었다. 내가 그 건물을 ‘롬멜 하우스’라 이름 지었고, 지금도 포스코역사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제철소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우향우(右向右)’해서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일하는 것이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이자 우리가 사는 길이라 믿었다. 그 믿음으로 세계적 강국이 되고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땀을 흘렸다. 포항 시민들도 제철소가 자신들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게 되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많은 사람이 포항제철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시 포항제철 작업복을 입고 시내에 나가면 누구나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포항제철 직원이 되길 원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포항제철 건설 초기의 현장 사무소인 ‘롬멜 하우스’를 2010년 3월 11일자 연합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포항제철이 창립됐던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영일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첫 현장 사무소의 별칭이다. 야전 사령부 역할을 하는 2층 목조건물이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무지에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허허벌판에서 세계적인 철강회사를 일궈낸 포항제철 정신의 상징이 된 롬멜 하우스는 포항 포스코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홍 : 포항제철 입사 후에 어떤 일을 맡았습니까?이 : 4-2호봉 신입사원으로 발령이 났다. 서울까지 포함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포항 직원으로는 39번이었다. 홍보와 대민, 대언론, 대관청 업무를 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그때도 포항제철 관련 업체에서 일하는 이들이 수천 명이었다.홍 : 1970년대에 경제발전과 함께 민주화와 인권 문제도 자주 거론됐지요.이 : 우리 사회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있다. 똘똘 뭉쳐 일만 하다 보니 산업화 세력이 보지 못한 부분도 있다. 우리는 당시 정권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열정적으로 일했고 그만한 대우를 받았지만, 같은 시기에 고생한 민주화 세력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홍 : 직접 본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관계는 어땠나요?이 : 1970년대 박태준 회장을 처음 인터뷰한 사람이 「조선일보」정태기[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기자다. 박 회장은 정 기자와의 인터뷰를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할 말은 제대로 하자’고 결심하고는 인터뷰에 응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후 언론계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많은 기자가 해직되었다. 이른바 ‘백지 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그즈음 민주화 세력이 고생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박태준 회장은 정태기 기자와의 인연을 귀하게 여겨 정 기자가 한겨레신문사로 갔을 때 포항제철 관련 업체를 주주로 참여하게 했다. ‘조선일보’ 사진부장 임희순 기자도 생각난다. 그는 내가 부장이던 시절에 포항제철로 옮겨와 많은 역사적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아름다운재단을 만들 때 박태준 회장이 집 판 돈 13억 6천만 원 중 10억 원을 기부했다. 이처럼 산업화 세력도 민주화 세력을 이해하려 했고, 인연도 맺었다.홍 : 포항은 포항제철 건립으로 산업도시가 된 셈이네요.이 : 포항은 포항제철의 성공과 더불어 발전한 도시다. 건설 당시에 강원산업과 현대 등 굴지의 업체가 다 관여했다. 대한민국 10대 건설업체는 대부분 포항에서 일거리를 얻었다. 포항제철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었던 시기가 1970년대다. 그 시절은 2년마다 공장을 확장했다. 고용과 생산량은 높아지고,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포항에 없던 호텔도 생겼다. 미국 ‘유에스 스틸(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은 1980년대에 이미 ‘유에스엑스(USX)’가 됐다. 철강에서 화학, 운송, 파이낸싱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언젠가는 철강의 가격경쟁력이 후진국을 못 따라갈 것을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다. 1970년대에 크게 성장한 포항제철도 이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홍 : 1970년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이 : 서울대 법대에서 나오는 월간지가 있다. 거기에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은행에 입사해서 한국은행 총재까지 한 사람이 ‘고시 콤플렉스’라는 글을 썼다. 한국은행 총재까지 했지만 사법시험에 떨어진 열패감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 글을 읽고 ‘나도 고시 콤플렉스를 평생 안고 살면 어쩌나’고민했다. 그런데 포항제철 제2고로가 만들어진 1976년에 고시 콤플렉스를 털어냈다. 내가 판사나 검사보다 훨씬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10

“양송이 수출 사업 위해 1967년 귀향”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이대공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겪는다. 눈앞에서 진압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역사적 혼란의 시기에 무엇을 고민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보았다. 홍 : 20대 초반에 겪은 4·19는 어땠습니까?이 : 1960년 4월 5일 서울대 법대 입학식을 했다. 이후 18일 고려대에서 시위가 있었다. 19일 철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 1년 선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전단지를 뿌렸다. “나가자, 시위하러 가자”고 하니 교수님이 “공부를 구태여 하겠다는 사람은 강의실에 있고, 그게 아니면 나가라”고 했다. 아마 거리로 나서서 시위에 참여하라는 뜻이었지 싶다.홍 : 그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요?이 : 우리가 앞장섰다. 그때 내 친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동아일보’ 1면 에 실렸다. 동대문경찰서 인근에서 경찰과 맞섰다. 그때 서울 거리에는 돌이 거의 없었는데, 마침 동대문경찰서 근처 공사장에 쌓아놓은 벽돌 더미가 있었다. 경찰이 곤봉으로 시위대를 구타하자 학생들이 공사장의 벽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시위대 대부분은 서울대 법대, 문리대, 미술대 학생들이었다. 학생 수가 진압에 나선 경찰 수보다 많았다. 다른 대학 학생들도 길거리 곳곳으로 나왔다.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향했고, 이화여대 학생들도 모였다. 뜨거운 열정이 사회의 불의를 참고 보지 못했기에 나선 것이었다.홍 : 시위할 때 위험한 장면도 있었겠습니다.이 :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통인동 파출소에서 저지당했다. 바로 앞이 경무대였다. 거기까지 행진한 것이다. 그때 기마경찰이 총을 쐈다. 순간적으로 사격을 해대니 놀란 사람들이 높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자기도 모르는 괴력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총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서울대 법대 동기 하나가 죽었는데,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포항에서도 경찰서가 점거되는 등 시위가 격렬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홍 : 1961년 5·16군사정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 : 가난하고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강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군사 쿠데타는 안 된다는 친구도 있었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壽9641寺) 근처에서 함께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동창과 이에 대한 찬반을 놓고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여러 측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경제 대국도 되었으니 다양한 차원에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홍 :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있었지요.이 : 그때는 사법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어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독과 서독이 분단돼 있을 때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러 갔다. 그때 서독 총리에게 “우리도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서독 총리는 “일본에 전쟁 배상금을 빨리 받아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한일 관계도 재정립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 돈(대일 청구권 자금)이 포항제철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포항제철 건설을 결심한 게 박정희고, 이를 건의한 게 박태준이다. 그것이 지금의 포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홍 : 1960년대 포항의 경제 상황은 어땠습니까?이 : 포항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영일만의 정치망 어장에서 나오는 게 포항의 수입 거의 전부였다. 사람을 채용해줄 회사와 단체가 거의 없었다.홍 : 20대에 영향을 받은 인물은 누굽니까?이 :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이다. 스물아홉 살에 그를 만났다. 20대 중반에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다녔는데 재미가 없었다. 그즈음 사업을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주도 드라이브 정책을 펼칠 때는 나도 수출을 했고, 개발 주도 드라이브를 걸 때는 구획정리 사업을 했다. 그러던 중에 박 회장을 만났다.홍 :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사업을 하셨다니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이 : 일본으로 석유곤로를 만들어 수출했다. 일본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바탕으로 인천에서 만들어 팔았는데, 다른 곤로는 잘 팔리는데 내가 만든 건 판매가 부진했다. 곤로 수출 사업은 실패였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의 조언으로 망개(청미래덩굴) 이파리를 지리산에서 채집해 일본에 팔았다. 망개 이파리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망개떡이 상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냉장 유통이 없던 시대니까 장사가 잘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아이디어 사업이었다.홍 : 그 후에 다른 사업도 하셨는지요?이 : 당시 한국에서는 야구가 인기를 얻기 전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인기가 대단했다. 그걸 감안해 야구 배트를 만들어 수출했다. 그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나중에 포항에서 구획정리 사업을 할 수 있는 밑천이 거기서 나왔다. 사법시험 공부하듯 하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문을 통해 세상과 경제의 흐름을 파악했다. 요즘도 신문을 열 가지 이상 읽고 있다. 신문 읽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와 감각을 준다. 홍 : 사업하던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들려주시죠.이 : 야구 배트는 물푸레나무로 만든다. 수령이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여야 하고, 색깔도 하얀 게 좋다. 가지가 벌어진 나무로 만들면 배트가 부러지기 쉽다. 잘 다듬어진 방망이를 2개월 동안 온돌에서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만든 야구 배트를 일본 회사로 수출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납품된 것의 반 이상을 불합격시키는 것이었다. 아마도 불합격품까지 가져가 일본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팔지 않았을까 싶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두 트럭 분량의 야구 배트를 영등포에서 만들어 인천의 보관창고로 보냈다. 그런데 그날 예고되지 않은 비가 왔다. 비는 배트에 치명상을 입힌다. 저녁을 먹던 내가 인부들과 달려가 포장막으로 야구 배트를 덮었다. 뒤늦게 보관창고에 도착한 다마자와 사장이 20대 청년이던 내게 열 번 넘게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거래가 끝난 상품까지 책임지려는 마음가짐을 좋게 본 것이다. 그날 “앞으로 당신 제품은 검사를 하지 않고 통과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홍 : 포항으로 돌아온 건 언제지요?이 : 1967년 양송이를 재배해 수출하려고 포항으로 왔다. 그 사업을 위한 공장을 만들기 위해 땅을 샀다. 800평을 샀는데 평당 200원쯤 준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아내가 직접 흙벽돌을 찍어 양송이 가공업체를 지었다. 1967년 10월 1일엔 장기영 당시 부총리가 포항에 내려와 포항제철이 들어설 지역을 알렸다. 라디오를 통해 그걸 들었다. 흥미로운 건 바로 그날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됐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포항의 역사가 확 바뀌고 천지가 개벽했다. 아마 새로운 포항 역사의 시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 5만 명이던 인구가 지금 50만 명이 됐으니.홍 : 포항제철 건설 당시의 분위기를 들려주시죠.이 : 공장 부지로 땅이 수용되는 것을 사람들이 반대했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땅이니 낮은 가격에 수용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땅과 관련 없는 이들은 포항제철 건설을 환영했다. 보통 사람들은 제철 공장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시절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양송이 수출업을 하려고 땅을 샀다. 평당 50원에서 500원쯤 하던 시절이다. 지금의 상도, 대도, 해도, 죽도는 모두 섬이었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갈대밭은 평당 50원에 불과했다. 땅을 사려는 사람이 있으면 땅 주인들은 불안한 마음에 대부분 땅을 팔았다. 그런 땅을 내가 양송이 재배와 가공장 설립을 하려고 샀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08

“큰형 이진우의 권유로 경기고, 서울대 법대 진학”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중반 대부분의 포항 사람들은 가난했다. 그럼에도 ‘배워야 살고, 공부만이 빈곤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에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당시 학생들은 어떤 꿈을 꾸며 미래를 그려갔을까? 홍 : 10대 중반 시절의 추억을 말씀해주신다면.이 : 전쟁의 참화 속에서 먹고살 방법이 거의 없었다. 농사도 힘들었다. 우리도 논밭이 없었다. 미군 구호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시기다. 밀가루와 버터 등 미국이 보내주는 여러 가지 생활물품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 포항에 고아들이 많아 선린애육원이 만들어졌다. 포항제일교회가 주도했고 아버지가 앞장섰으며 미군들이 도왔다.홍 : 전쟁 직후엔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이 : 열세 살 국민학교 졸업반 때는 폭격을 피한 공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노천 수업을 했다. 죽음의 공포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교육열은 저마다 특별했다. 대한제국 멸망 후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어른들이 많았다. 교사들은 일제강점기 36년과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했다. 죽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포항국민학교를 다녔다. 한 반이 40~50명이었고 6개 반이었다. 한 학년이 250명쯤 됐다. 전교생은 1천명이 넘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학업에 열정을 가졌다. 이후 포항중학교에 입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지중학교가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홍: 1950년대 포항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어떤 환경에서 공부했는지요?이: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교사들은 조회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다. “배워야 산다”고. 한글을 제대로 습득해 우리말을 쓰고 읽고 익혀야 한다고 그랬다. 독서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앞으로는 미국과 관계를 맺어야 하니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당시 교사들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지금 한국은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만 그때는 대부분 빈곤에 시달렸다. 광복 후의 혼란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교사들은 애국자였고 제대로 교육하겠다는 의욕이 높았다. 학생들을 단호하게 지도한 것도 그런 열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홍 : 그런 상황에서도 즐거운 추억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이 : 당시의 내 또래 학생들은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싸워서 남에게 지면 안 된다는 의식이 있었다. 포항중학교 근처 희망고개에서 적지 않은 싸움이 있었다. 지금처럼 지저분한 싸움은 아니었다. 마주 선 상대 중 한 명의 코피가 터지면 끝나는 깔끔한 싸움이었다. 왕따 같은 건 없었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맞붙곤 했다. 고등학교 때 서울에 가서는 그 싸움 실력을 써먹었다. 1년에 한 번쯤 다툼이 있었는데 내가 다 이겼다. 공부도 코피가 터질 정도로 했다. 참고서가 없어서 교과서 한 권을 다 베끼기도 했다. 국어, 수학, 영어 교과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선행 학습이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2~3학년 교과서를 다 베꼈다. 총기(聰氣)가 있을 때라 내용이 외워졌다.홍 : 당시 교사들은 어떤 태도로 학생들을 가르쳤는지요.이 : 교사들은 학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학생들이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더해졌다. 영어 선생님은 특히 인기가 좋았다. 웅변대회에 나갔던 경험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는 교사와 학생들 간에 신의가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숙제라도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하루에 물구나무 10번 서기’라는 숙제를 내준다면 지금 학생들은 그걸 하겠나.홍 : 고등학교 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이 : 1957년 포항을 떠나 서울 경기고등학교로 갔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형님이 영어의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에 대해 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니 다른 영어 문제를 또 질문했다. 그것도 답했다. 그랬더니 형님이 나를 서울로 데려갈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서울대 사범대에 다니고 있던 누나는 서울대 사대부고에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형님이 서울대 주요 학과를 보면 경기고등학교 출신이 많으니 거길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홍 : 경기고 입시와 서울대 입학 당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이 : 당시 포항엔 입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서울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가니 선택과목이 상업이었다. 그걸 한 달 반 동안 공부해서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합격했다. 경기고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였다. 내가 입학할 당시 경기중학교 학생 대다수가 경기고등학교에 왔고, 다른 학교 출신은 전체의 10%인 60명 정도였다. 경기고 교사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학생들도 대부분 ‘금수저’였다. 서울대 입시에 가보면 경기고 교복을 입은 수험생들이 넘쳐났다. 조선일보에 난 기사 ‘한국의 파워엘리트’에 따르면 당시 경기고 학생 중 60%가 서울대에 갔다. 내가 입시를 본 해에도 전교생 중 360여 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다.홍 : 서울대 법대 진학은 어떻게 결정하셨는지요?이 : 공부를 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원래 법대보다는 천문기상학이나 지질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형님이 말렸다. “너, 그 학문을 공부하면 외국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하는데 힘들다”며. 사실 그때 제대로 된 일기예보가 있었겠나, 지질학과를 나와서 취직이 됐겠나. 그래서 법대로 갔는데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법대 진학은 내 결정이 아니라 형님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었다.홍 : 고등학교 시절에 친한 친구는 누가 있는지요?이 :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이 고등학교 동기다. 그 친구 집을 가보니 건물부터 내부까지 전부 으리으리했다. 나는 대본소집 가난한 아들인데, 친구는 선대부터 큰 부자였다. 요샛말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인데 공부까지 잘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는 가업을 이어받아 회사를 경영했다. 세계적 로펌 김앤장의 창업자 김영무와 전남 목포의 큰 주류업체 사장 아들도 고등학교 동기다. 김영무의 어머니는 고종(高宗)의 영어 통역사였다. 권력과 돈을 가진 집안 아이들이 경기고에 적지 않았다. 김영무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그 당시 집 안에 에어컨과 냉장고가 있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홍 : 사법시험은 보셨나요?이 : 1960년대 초중반엔 사법시험 합격자가 겨우 20여 명이었다. 나도 모든 걸 걸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 김영무는 시험을 보다가 구토를 했는데, 약도 먹지 않고 시험을 마쳤다. 약을 먹으면 정신이 흐려져 공부한 걸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판단에서였다. 서울대 법대 시절엔 나와 동기들 모두가 목숨을 내놓고 공부를 했다.홍 : 1960년대엔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생활하셨지요?이 : 대한민국이 격변하는 시기였다. 대학 때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서울대 도서관이 동숭동에 있었는데 걸어서 10분 거리에서 하숙했다. 법대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놓고 밤낮없이 사법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967년에 포항제철 입지가 결정됐다. 10월 1일이었다. 포항은 그전까진 별다른 생산시설이 없었다. 나는 방학 때도 포항에 가지 않고 서울에서 공부에 전념했다.홍 : 포항의 친구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요?이 : 포항은 조용한 어촌이었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객지로 나갔다. 포항에서는 큰 꿈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03

“6·25전쟁 때 피난민 도와주던 연일 주민들 고마워”

한 사람의 생애는 어떤 방식으로건 그가 살아온 지역과 연관을 맺게 된다.올해 산수(傘壽)에 이른 이대공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업을 한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 10년 정도를 제외하면 인생의 대부분을 포항에서 보냈다.8·15광복 직후와 6·25전쟁, 포항제철의 설립과 발전 과정, 포항공대 설립에 얽힌 이야기 등을 다섯 차례의 대담을 통해 들었다. 홍성식(이하 홍) : 1941년생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격동의 시기를 맞이한 것 같습니다.이대공(이하 이) : 다섯 살 때 광복을 맞았고 열 살 때 전쟁을 겪었으니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가정사도 그랬다. 해방되던 해에 두 살 된 동생이 콜레라로 죽었다. 콜레라에 걸리면 대부분 사망하던 시절이다. 백신도 없었고, 치료제도 없었다. 죽은 동생을 사과 궤짝에 넣고 아버지가 기도하며 입에 엿을 넣어주던 기억이 난다.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니까. 그리고는 공동묘지에 묻었다. 아버지(재생 이명석)는 꿈을 펼치기 위해 열한 살에 영덕에서 대구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부친은 일본에서 공부했고, 책을 많이 읽은 분이다. 그 책으로 대본점을 했고,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극빈자는 면할 수 있었다.홍 : 1940년대 포항 아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요?이 : 해방 이전에는 동네에서 회람판이 돌았다. 일제가 거기에다 뉴스와 회보를 실었다. 일본은 철저히 우리를 통제했다. 우리 집이 그걸 읽고 나면 옆집에 가져다줬다. 좌익과 우익의 대결이 심각한 시절이었다. 큰형님(이진우)이 고등학생이었는데, 우파는 모자를 거꾸로 쓰고 좌파는 바로 썼다. 형님이 해방 이후 시내에 나가서 시위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위험하다고 말렸다. 그러면 형님은 맨발로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데모를 하곤 했다. 사회가 혼란했다.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정치세력들 사이에 형성됐던 ‘애국 대 매국(친일)’이라는 대립 구도는 신탁통치 실시 문제를 계기로 ‘좌익 대 우익’의 구도로 전환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 구도에서 역사적 정당성이나 과거의 친일 경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오직 상대방을 정국(政局) 무대에서 제거하고, 자신들이 의도한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이런 구도를 중심으로 양 진영은 각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격렬하게 대립한다. 한국 전체에서 벌어진 이런 상황은 포항에서도 예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홍 : 어쨌든 학생의 본분은 공부 아닙니까?이 :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식은 모든 아이들이 가졌다. 가난한 시절이지만 교육열이 높았다. 당시 교사들은 지금과 달랐다. 억눌렸다가 해방된 경험을 한 교사들이니 남다른 의욕과 애국심이 있었다. 사도(師道)가 확립되어 있었다. 학부모들도 교사를 존경했다. 회초리도 많이 맞았지만, 교사의 매를 나쁘게 보지 않았던 시절이다.홍 : 유년의 기억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이 : 어릴 때라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으면 발이 페달에 안 닿으니 옆으로 올라타서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가 체인이 벗겨져 톱니바퀴에 다리를 다쳤다. 핏줄이 끊어졌다. 이후로 축구나 달리기 같은 운동을 하면 발이 불편했다. 그게 50대까지 이어졌다. 포항제철에서 은퇴하고 난 후에 미국에 가서야 혈관을 잇는 수술을 했다. 큰 수술이었다. 당시엔 요즘 아이들처럼 혼자서 온라인게임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공동체 놀이를 했다. 달리기를 가장 많이 했고, 낡은 공을 구해 축구도 열심히 했다.홍 : 1940년대엔 가족들 간의 유대감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이 :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다. 지금 내 손자들도 똑같다. 새벽 4시면 일어나 다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아버지가 성경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 세대는 ‘군사부일체’의 이념이 몸에 밴 사회에서 자랐다. 당시 교감 선생님이 매질을 많이 했다.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때렸다.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이 있으면 사람 만들겠다고 그랬던 것 같다. 사명감과 의욕이 없다면 체벌도 할 필요가 없다.홍 : 학교에서 체벌이 허용되던 시대였군요.이 : 약속을 안 지키거나 숙제를 하지 않거나 하면 주판으로 머리를 문지르기도 했는데, 교사들이 사적인 감정으로 한 체벌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낙오자로 만들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치던 시대였고, 아버지의 권위와 선생님의 권위가 인정되던 시절이었다.홍 : 6·25전쟁 때 기억이 있는지요?이 :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난다. 1950년 7월 말에 포항이 함락되었다. 그 전쟁은 명백한 남침이다. 1개월 만에 북한군이 포항까지 내려온 건 준비된 전쟁이었다는 이야기다. 당시에 아버지가 트럭을 빌려 짐을 싣고 피난을 가려 했다. 아버지가 사과 궤짝에 넣어둔 원고와 어머니의 재봉틀을 가지고 간 기억이 또렷하다.홍 : 전쟁 때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이 : 형산강 섬안 인근 다리에서 미군 병사가 피난민들을 제지했다. 피난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했다. 북한군이 들어와 있기에 피난민 중에 스파이가 섞였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등학생인 형이 영어를 알아들었다. 포항이 함락되었던 때다. 콩과 밀을 볶은 비상식량을 둘러메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금의 영일대해수욕장쯤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짐이 많아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의 포항제철 근방에 참외밭이 있었다. 참외가 노랗게 익어 있었으나 아무도 따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쟁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탓이었을 것이다. 홍 : 전투 장면을 보기도 했습니까?이 :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미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당시 포항 인구는 5만 명이 안 되었다. 수도산은 거의 헐벗은 상태인데, 거기로 학도병들이 목숨을 걸고 돌진했다. 풀도 나무도 없어 전부 노출된 상태인데 “돌격~”이라 외치며 뛰어올라갔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교복을 입고서 총을 들고 돌진하는 그들이 안타까웠다. 거기로 북한군이 기관총을 쏘았다. 바라보던 어른들이 “저런, 저런” 하며 발을 굴렀다. 그 학생들은 전국에서 모여든 학도병들이었다. 부당한 일에 대항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걸 보니 숭고함이 느껴졌다. 학생들이 오죽하면 군복도 입지 않고 저러겠나 싶었다. 그들이 포항을 비롯해 우리나라를 지켰다.홍 : 전쟁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이 있는지요?이 : 미군 비행기의 공습도 기억난다. 그때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는 걸 알았다. 비행기가 내려올 때 기총소사를 하는데, 총소리는 비행기가 올라가고 나서야 났다. 소리가 빛보다 느린 것이었다. 영일만에 미군 미주리호(Missouri號)가 들어왔다. 배에서 함포사격을 하는데, 그게 판세를 결정지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인민군이 숨을 수 있었으나, 함포사격은 금방 포탄이 떨어지니 숨을 겨를이 없었다. 사격을 하던 미주리호가 환하게 불을 밝힌 장면이 떠오른다. 포항 시내로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 시내에 떨어져 터지는 폭음까지 생생하게 들었다. 어린 나이에 전투 장면을 실제로 목격한 것이다.홍 : 가족들은 어디로 피난을 갔는지 궁금합니다.이 : 포항이 함락된 후 미군이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연일 쪽으로 갔다. 식량이 모자라서 피난도 오랜 기간 버틸 수가 없었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임에도 피난민을 돕던 연일 주민들이 생각난다. 자신들의 음식을 나눠주던 고마운 이들이었다. 너나없이 힘들었고 정말 피폐한 때였다.홍 :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 같습니다.이 : 포항 시내로 돌아오다가 형산강 다리에서 시체 한 구를 봤다.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포항은 피해가 심각했고 거리마다 고아들이 가득했다. 북한군들은 퇴각하며 불을 지르고, 미군은 소이탄을 쏴 도시를 불태웠다. “찌익~찌익~” 하는 소리가 두려웠다. 당시 포항은 대부분 목조건물이었으니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때 미군 부대와 함께 목사들도 왔다. 포항제일교회(현 소망교회)는 폭격을 맞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미국 ‘타임’지에 실렸다. 미군이 교회 십자가를 보고 폭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이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발전협의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01

우리의 딸들을 위해 정계에 뛰어들어

과거 포항에서 주목받는 여성 예술인은 누가 있었을까. 또 어떤 이유로 여성의 정치 진출이 이루어졌을까. 지역 여성들의 활동상을 갈무리한 ‘포항여성사’는 어떻게 발간되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여성들의 활동 폭은 넓어지고 깊이도 더해진다. 김경희의 목소리에도 힘이 붙는다. 최 : 문화예술 쪽 얘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과거에 여성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니 그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아실 것 같습니다.김 :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포항에 왔다. 그런 사정 때문에 예술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미술 교사를 했었기에 미술 교육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겠다. 미술 쪽은 비용이 많이 들어 학교 현장에서도 힘든 점이 있었다. 재료 살 돈이 없어서 목탄 대신 버드나무를 썼고, 비싼 유화 물감 대신 수채화를 지도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제자들이 열심히 해주어서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다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졌다. 참 고마울 뿐이다. 나와 동연배의 예술인들은 대부분 그러했을 것이다. 예술 각 분야에서 자신의 작업에 최선을 다하며 후배와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이끌어주었다.최 : 다른 예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여성은 누가 있는지요?김 : 재능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다. 다만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타 지역에서 포항으로 온 여성 예술인들도 설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시조 명창 김정미와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이다. 그리고 문인화를 하는 손성범도 있다.시조 명창 김정미는 1978년 포항에 정착해 대한시우회 포항 지회에서 시조창을 가르치며 국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앞장선 국악인이다. 그의 열정 덕분에 포항에서 많은 명창이 배출될 수 있었다.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은 김재출(동해안별신굿 김정희 이수자의 아버지이며 김석출의 동생)과 결혼해 포항으로 온 후 남편에게 소리와 춤을 배웠다.최 : 포항여중, 포항여고 재학 시절에 방정분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지요. 방정분 선생의 역할이랄까,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김 : 방정분 선생은 이화여전 성악과를 졸업하고 1950년대 초부터 포항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당시 학생들은 음악이 낯설 정도로 음악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 그렇기에 방정분 선생이 학생들에게 미쳤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나 또한 그가 꾸려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배우며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포항 여성 예술인들의 활동이 뚜렷해졌다. 문학, 국악, 음악, 미술, 서예, 무용, 연극, 사진 등에서 여러 모임과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더 활성화된다.최 : 정계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결단을 한 것 같은데.김 : 지역에도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누군가는 깃발을 들어야 했다. 남성 정치인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거의 모든 정치적·사회적 현안은 남성 중심적 사고로 관철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여성의 의사가 반드시 반영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고, 주변 사람들과 상의 끝에 어렵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최 :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신다면.김 : 1995년 제2대 지방자치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비례대표 1번을 받아 당선되었다. 이때 도의회에 다섯 명의 여성이 진출했는데 모두 비례대표였다. 나는 교육사회복지위원회 소속으로 의정 활동을 했다. 경상북도 여성발전기금 조례, 여성정책개발원 설치 조례 제정 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최 :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도 앞장섰는데. 김 : 남녀차별금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기본임을 알기에 그걸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여성 중에서 여성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을 바로잡아주려고 애썼다. 결코 남성을 겨냥한 활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성단체가 일을 제대로 하려면 여성 공무원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이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 공무원 편에서 힘이 될 수 있는 일을 도왔다. 우리들의 딸과 그 딸의 딸들을 위해 그들이 차별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앞장섰다.1960~1970년대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단체는 단체 취급도 하지 않던 사회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섰던 김경희. 자유당 말기 변석화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후 맥이 끊겼던 여성의 정계 진출은 김경희가 경상북도 의원에 당선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는 단순히 김경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여성사에 작지 않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최 : 2001년 ‘포항여성사’가 발간됩니다.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김 :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포항여성사’ 발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성의 권익 신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정장식 포항시장의 배려로 사업 계획이 확정되었고, 편찬위원과 집필진이 꾸려졌다. 여성에 대한 기록, 그것도 포항 여성에 대한 생활, 문화, 경제, 교육 등 다방면의 기록을 하나로 모으고 엮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추진했기에 가능했다.2001년 2월 10일, ‘포항여성사’ 발간을 앞두고 여성사 내용에 대한 평가와 포항 여성의 과제 그리고 발전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김경희, 황복희, 김보미, 김귀현, 김조숙자 다섯 명의 여성이 모여 여성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어떤 부분을 더 채워나갈지를 살펴보며 여성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여성들만이 노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시사점을 얻었다. 그리고 여성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좀 더 활발하게 지역사회 발전에 응용할 수 있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하고, 또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최 : 다른 지역보다 여성사가 먼저 발간된 것은 포항 여성계의 저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김 : 그렇게 볼 수 있다. ‘포항여성사’ 발간은 단순히 책 한 권을 내는 사업이 아니라 포항 여성의 역량을 역사적 맥락에서 점검하고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사업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련의 과정을 서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가. 각 분야별로 편찬위원과 집필위원이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1970년대 이전의 자료와 사진을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후대(後代)에 더 중요한 일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해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지역에서 여성들의 활동하는 모습을 하나로 묶어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큰 작업이었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7

“남자들 기죽이는 건 다 해보자”

세상에 첫길을 내려면 여러 사람이 함께 걸어야 한다. 혼자 걸어서는 첫길을 낼 수 없다. 포항 여성사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의 지혜와 힘이 모여 포항 여성의 역사가 서서히 만들어졌다. 물론 일이 이뤄지는 과정에는 누구보다 먼저 고민하고 앞장선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포항 여성들은 언제 어떻게 한마음이 되어 모였으며, 어떤 일을 했을까.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 : 포항의 여러 여성단체 역사를 살펴보면 김경희란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김 : 내 나이 아흔이 다 되어가는데 친목계까지 합하면 17개 단체에 나가고 있다. 새마을부녀회 활동이 출발이 됐고, 가장 오랜 기간 회장을 맡고 있는 단체는 불교여성회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회장을 하고 있으니 장기 집권이 아닌가 싶다. 절은 산 중에 있다. 젊어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다닐 수 있지만 나이 들면 몸이 따라주지 못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쉽게 찾아가 수양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주변 사람들과 그런 취지에서 의논을 했다. 스스로 자유롭게 모여서 기도하는 단체를 만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불교계의 YWCA 같은 불교여성회가 조직된 것이다. 조직이 구체화되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차원태 변호사 건물의 5층을 빌려서 했다. 그런데 인원이 40~50명 되니까 장소가 협소했다. 회관을 지을 생각도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각 건물 2층을 빌려서 모이다가 부산각 지하가 넓어서 그쪽으로 옮겼다. 법회를 한 후 바로 식사를 하기에도 편리해서 지금까지 그곳에 터를 잡고 불교여성회 모임을 하고 있다.한국여성불교연합회 포항불교여성회는 1984년 포항시민회관에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이두 큰스님을 모시고 설법회를 열며 창립총회를 했다. 그 후 전국불교 연합회 포항불교여성회로 개칭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의 평화를 이룩하여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최 : 불교여성회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요?김 : 매년 어린이 심장이식기금을 전달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도 함께 해왔다. 봄가을에는 성지순례도 하는데 이름 있는 절이란 절은 다 다녔다. 회원들은 내가 나눠준 좋은 글을 참 좋아한다. 혼자만 알고 느끼면 뭐가 좋은가. 나는 좋은 것은 모두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깨우침이 가득한 스님들의 좋은 말씀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스님들의 좋은 말씀을 복사해두었다가 매달 모임 때 회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일도 20년 넘게 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모임이 끊어졌지만 그 일이 내 평생의 일임을 알기에 불교여성회는 내가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이어갈 것이다.최 : 1980년대 포항에는 어떤 여성단체가 있었는지요?김 : 봉사 단체가 많았다. 변석화가 초대 회장이었던 대한부인회, 안인화가 초대 회장이었던 포항적십자 봉사대, 박경애가 초대 회장이었던 걸스카우트 포항지부, 홍윤옥 회장이 맡았던 포항YWCA, 그리고 포항차인회 등의 단체가 있었다.최 : 그 많은 단체를 하나로 묶은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맡았더군요.김 : 김보미 포항시 과장이 나를 불러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여성단체를 하나로 묶는 총괄 단체가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했다. 지역의 여성단체들이 서로 협력하고 힘을 모은다는 점에서 아주 긍정적인 제안이었다. 그렇게 포항시 여성단체협의회가 발족되었고, 새마을부녀회장이었던 내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처음에는 사무실도 예산도 없었다. 김보미 과장이 예산을 만드느라 고생이 많았다.1970년대에도 크고 작은 여성단체가 있었지만 친목을 위한 단체가 대부분이었다. 여성이 주축이 되어 여성의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여성단체를 통해서 여성들의 활동 영역이 넓혀지기를 김경희는 원했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했다.최 : 여러 단체를 하나로 결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김 : 여러 사람, 여러 단체를 상대하다 보면 내 생각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끼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의견도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을 품고 여성단체 관계자들을 만나 협의회 결성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렇게 활동한 결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단체 대부분이 협의회에 가입했다. 회원 수가 무려 2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명실공히 포항을 대표하는 여성단체협의체가 결성된 것이다. 이 협의체를 통해 여성의 능력 개발, 사회참여 확대, 성차별 해소, 여성 지위 향상 같은 여성 사업에 한결 더 힘이 실리게 되었다.포항시 여성단체협의회는 보건복지부의 여성단체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추진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 방안도 결국은 여성이 주축이 돼 일궈낸 일이다. 출범의 계기가 어떠하든 여성단체협의회는 많은 일을 해냈다.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해 여성 지도자 양성 과정을 만들었고 여성단체 활동 평가회 등을 개최했다. 회원 단체 간의 정보 교환과 공동 관심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여성의 시정 참여 확대를 위해 포항시의 각종 위원회에 여러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최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업이 있는지요?김 :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지 의논한 끝에 여성문화축제를 해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전국 최초로 여성문화제가 기획되었다. 포항여성문화제에서는 여성백일장, 서예대회, 바둑대회 등 포항 여성들의 기량을 뽐내는 대회를 열었다. 특히 서예대회는 백일장처럼 시간제한을 두고 여성들의 서예 능력을 겨루었다. 행사 당일 문화예술회관 안팎에 화선지를 펼치고 붓을 들던 여성들의 모습이 장관을 이뤘다. 여성들만 참가하는 바둑대회, 패션쇼, 사진전 등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실 남자들 기죽이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게 이런 것인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정말 뿌듯한 것은 포항여성상을 제정한 것이다.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크게 공헌한 여성을 선정해 시상하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렇게 안이화, 손정식, 박경애, 홍윤옥, 김봉순이 제1회 포항여성상 수상자가 되었다. 포항여성상은 포항시가 1997년부터 여성의 권익 증진과 봉사활동에 기여한 지역 여성을 선정해주는 상으로, 2016년 제19회까지 이어졌다. 2017년 이후 포항시는 실질적 양성평등 실현이라는 여성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로 조례를 개정하고 양성평등상을 시상하고 있다.최 : 전문직여성클럽은 어떻게 결성되었는지요?김 : 여성이 힘을 가지려면 공적 체제와 결합해야 한다. 그런 역할을 해줄 공무원이 필요했는데 김보미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그는 그것을 행정의 틀 안에서 소화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나도 그도 서로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그를 만나 여러 가지 일을 해냈다. 전문직여성클럽(Business Professional Women‘s clubs)도 그중 하나다. 전문직 여성을 모아보면 어떻겠느냐고 김보미가 제안했다. 지역에도 전문직 여성들이 꽤 있는데, 그들을 모아서 여성의 권익을 향상하는 데 힘을 보태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전문직 여성들을 만나 뜻을 전했고, 대구 클럽의 후원으로 1989년 포항클럽이 결성되었다.전문직여성클럽(B.P.W) 포항클럽은 1989년 4월, 김경희 초대 회장을 중심으로 김춘희, 김보미, 김희숙, 박영희, 이순자, 이정주, 한정자가 모여 결성되었다. 초창기에는 친목 도모에 머물렀으나 1994년 포항에 전국대회를 유치하며 활기를 띠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 지역 내 여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전문직 진로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최 : 그 밖에 주목할 만한 여성계의 활동이 있는지요?김 : 여성 신년 교례회도 주목할 만하다. 새해에 여성들이 모여 한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논의하는 자리다. 여성 정치인들과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모았다. 여성 언론인도 있고 시장 부인, 국회의원도 있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보태주니 힘이 났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5

새마을복 입고 포항 구석구석 안 다녀본 데 없어

여성단체가 거의 없던 시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새마을부녀회는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적인 통로였다. 그 통로에 첫발을 딛고 열정적으로 걸어갔던 김경희. 세 번째 만남에서는 1970년대 포항에서 일어났던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포항의 변화와 여성들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 :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김 : 새마을운동이 아닌가 싶다. 사실 1970년대 포항은 거의 모든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다. 생활도 그렇고 교육도 그랬다. 그 어려운 시절에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포항이 자생력을 갖추었다고 본다.최 : 약력을 살펴보니 1973년부터 포항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았습니다.김 : 돌아보면 그 자리를 맡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걸 맡았기에 마음껏 일해볼 수 있었다.최 : 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김 : 포항시 24개 동에 새마을부녀회를 알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다녔다. 허구한 날 바깥으로 나다녔으니 다른 집 같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남편이 이해해주지 않았으면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동네마다 가서 과수원이 있으면 함께 과일도 따고, 농사를 짓고 있으면 비료도 함께 날랐다. 새마을복 세 벌을 번갈아 입으며 포항 구석구석 안 다녀본 데가 없다.최 : 새마을부녀회의 목표는 무엇이었는지요?김 : 여성들의 의식을 계몽하고 식생활을 개선하는 게 주안점이었다. 당시에는 여성에게 배움의 기회가 적어 새마을부녀회원들 대부분이 국민학교 출신이었다. 학력과 상관없이 새마을 교육에 참여했던 회원들은 일주일간 교육을 받고 나오면 모두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는데 자부심이 대단했다. 초창기 회원들은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새마을운동은 물질적 풍요는 물론, 정신적 풍요를 동시에 누리는 마을 혹은 공동체를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새마을부녀회’는 1970년대 초 생활개선 구락부, 가족계획 어머니회, 부녀 교실, 저축 금고 새마을 어머니회로 활동하던 각각의 여성단체를 하나로 모아 1977년에 통합 조직하면서 탄생되었다.최 : 지금처럼 교통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식당이 많은 것도 아닌데 어려운 점이 많았겠습니다.김 : 요즘처럼 탈것도 먹을 것도 흔한 시절이 아니었다.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다녀야만 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김보미 포항시 계장〔전 포항시 북구청장〕이다. 김보미와 당시 읍면동 회장이었던 김영자와 함께 장성동 어머니 친목회 행사에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그때는 장성동 주변이 다 산골짝이었다. 비포장도로를 한참 걸어가야 하는 외곽지였다. 그런 곳이니 당연히 먹을 것, 입을 것이 풍족할 수 없었다. 장성동 부녀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그 시절에는 서로 챙길 줄 알았다. 먹을 것이 없으니 집집마다 탁주를 받아와서 커다란 다라이에 바닷가에서 뜯어온 거뭇거뭇한 진저리 해초를 넣고 조선파를 썰어 넣어 간장에 버무렸다. 그걸 가운데 놓고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주민들과 탁주에 진저리 나물을 먹으며 점심을 해결했다. 지금이야 진저리가 거름통으로 들어가지만, 그때는 그걸로 한 끼를 때웠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탁주를 마시고, 흥이 나서 노래도 하고, 그러다 더욱 흥이 나서 또 마시다 보면 너도나도 취해서 시름이 다 사라졌다. 그날 나는 김영자에게 업혀 왔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고 일했다.최 : 새마을부녀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요?김 : 1980년 9월 창립해서 생활개선 사업, 가족계획 사업 등을 추진했다. 생활개선은 말 그대로 주변의 더러운 것들을 하나하나 치우고 정리하는 일이다. 부녀회원들이 동마다 구석구석 하수구 청소를 했고 부엌도 개조했다. 그리고 생활개선을 위해 요리 전문가를 초빙해 포항여고 기숙사에서 포항의 여성 대표들을 먼저 가르쳤다. 포항 여성들의 계몽 교육과 바른 먹거리 식생활 교육도 이루어졌다.최 :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습니다.김 : 산아제한 교육도 새마을부녀회에서 맡았다. 주로 학교 강당 같은 데서 ‘하나만 낳아야지 둘셋 놓으면 거지 만든다’는 내용의 교육을 했다. 피임 교육도 동네별로 했는데, 교육을 하고 나면 동네 아이들이 콘돔을 풍선인 줄 알고 입에 물고 다니기도 했다. 여자들에게는 먹는 피임약을 줬는데, 시어머니가 며느리 혼자 좋은 약을 먹는 줄 알고 며느리가 집을 비울 때마다 두세 알씩 몰래 먹기도 했다. 지금은 아이를 낳지 않아 심각한 문제인데, 그때는 산아제한 때문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다.가족계획 사업의 주요 내용은 피임약 보급, 피임 시술, 사회적 지원, 계몽 홍보 교육 등이었다. 1912년부터 광복 전까지 우리나라 출생률은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다. 그리고 급격한 인구 증가가 국가적인 문제였던 1960~1980년대에 정부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이 지속된 탓에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목표였던 인구 대체 수준 2.1명을 달성한 후에도 빠르게 감소했다. 그리고 1984년에는 1.76까지 떨어졌다. 최 : 새마을부녀회에서 했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보람된 일은 무엇인지요?김 : 1985년 포항에서 전국소년체전이 개최되었다. 종합운동장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출전하는 선수들 밥을 해먹이겠다는 마음에 24개 동 새마을부녀회에서 모두 나와 운동장에 텐트를 쳤다. 그런데 당일 새벽부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앞이 깜깜해졌다. 부녀회 회원들 모두가 나와 팔을 걷어붙였다. 누가 시켰다면 그렇게 했을까. 종합운동장에 고인 물을 손바닥으로 퍼내고 걸레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정말 한마음으로 빗물을 닦았다. 며칠 후 미국에 있는 후배가 신문에서 나를 보았다며 전화를 했다. 우리가 운동장에 고인 빗물을 손으로 퍼나른 이야기가 미국에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최 :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네요.김 : 그만큼 단결도 잘되고 화합도 잘되었다. 그래서 새마을부녀회를 잊을 수 없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준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무슨 일을 했을지 모르겠다. 새마을복 세 벌이 내 인생의 옷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새마을부녀회는 공동기금 마련을 위해 구판장 운영, 절미 저축, 공동 경작 등의 사업을 했으며, 정부에서 추진하는 민간 계몽과 정부 시책 홍보 및 실천 조직으로서 전방위 역할을 했다. 농산물 직거래 활동, 강원도 감자 사주기 운동, 농촌 일손 돕기 자원봉사 등을 매년 실시했으며 새마을 알뜰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건전한 휴가 보내기, 호화 혼수 안 하기 등 근검절약 분위기 조성과 기초 질서 확립 캠페인, 나라 사랑 국기 달기 캠페인을 전개했고, 납세 의무자와 시민의 역할 교육과 우리 동네 개혁 운동을 위한 간담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96년 고철 모으기 캠페인에서는 경상북도 1위를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최 : 어떤 단체보다 희생정신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김 : 현장에서 험한 일을 마다 않고 헤쳐 나갔다. 하수구에 있는 쓰레기도 건져내고 쥐도 잡고. 회원 모두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라 여기며 일했기에 가능했다. 사실 먹고 사는 게 어려웠던 시절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고아원에 가려 한다, 노인들 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십시일반으로 쌀이 모였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곡식 창고는 열쇠로 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여는 것이었단 생각이 절로 든다. 그것뿐이었던가. 여성도 남성만큼 할 수 있다는 패기를 보여주자며 해병대에 가서 1박 2일 훈련도 받았다. 총 쏘는 것도 배우고 험한 훈련도 했다. 다른 지역 부녀회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을 포항에서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렇게 열성적으로 일한 공로로 포항시 새마을부녀회장 1대 김경희, 2대 정경숙, 3대 김숙자, 4대 서차분 그리고 5대 황복희를 비롯해 읍면동 회장으로 활동한 김영자, 박순조, 김미자, 권양자, 정수남 회장이 대통령 훈장을 수훈했다. 새마을부녀회가 있었기에 여성들의 단체가 조직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07-20

아이스케이크 팔아 모은 돈이 여성회관 건립의 종잣돈

두 번째 만남 전에 점심 도시락 2인분을 준비했다. 나와 그의 도시락이 아니라 그와 남편의 도시락이었다. 동갑내기로 60년 이상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의 점심이 늘 걱정이라고 첫 인터뷰를 할 때 지나가는 말로 했다. 두 번째 인터뷰도 점심 전에 마쳐야 한다고 해서 도시락을 드리며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싶은 마음에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쾌하게 웃었고, 포항여성문화회관 건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 : 포항여성문화회관은 시 사업소로 운영되고 있지만 당초 민간 차원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김 : 1970년대 초반 여성단체는 새마을어머니회가 가장 규모가 컸고, 한국부인회 등이 미약하게 활동했다. 여성단체 대부분이 친목과 봉사 위주로 활동할 때였다. 어느 날 포항여고 총동창회 손정식 회장이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여자청년단 총무 자격으로 자리에 함께했다. 다양한 얘기가 오갔는데 무엇보다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시급한 것은 재원이었다. 건물을 지을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성회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독자적으로 자금을 마련키로 합의했다. 모임 회비만으로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는 어려워서 추진위원회 결정으로 송도해수욕장에서 수익 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장사를 시작했다.최 : 장사는 어떻게 했는지요?김 : 아침에 포항극장(현 롯데시네마)에 가서 잔돈을 바꾸고 아이스케이크, 사이다, 빵, 담배 등을 리어카에 담아 송도해수욕장으로 갔다. 그곳에 낡은 텐트를 치고는 가지고 온 것들을 팔았다. 밤에는 팔다 남은 물건들을 모래에 파묻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송도에서 살다시피 했다. 해수욕장에서 맨발로 두 달을 버텼으니 새까맣게 탔다. 매일 교대로 나가며 장사해서 돈을 모았다.최 : 많이 힘들었겠습니다.김 : 손정식 선배가 나 아니면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내가 나선 것이다. 그때 막내가 네 살인가 다섯 살이었다. 매일같이 남편을 설득해 송도에 나갔다. 남편이 아이를 업고 나를 찾아 송도에 오기도 했다. 내가 남편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다. 남편은 나를 믿었고, 그래서 아직도 남편이 고맙다. 남편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유명한 태풍, 사라호도 거기서 맞았다.여성회관 건립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은 손정식이 맡았다. 어렵게 마련한 건립 기금으로 여성회관을 지었지만, 강사 섭외가 쉽지 않았다. 손정식이 수산전문대학(현 포항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강사를 초빙했고, 자신도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손정식은 여성회관 초대 명예 관장으로 여성회관을 운영하며 여성의 삶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그 곁에 김경희가 있었다.최 : 그렇게 자금을 확보해서 여성회관이 죽도동에 건립된 것인가요?김 : 그 자금이 종잣돈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게 건립 자금이 모인 게 화제가 돼 각계각층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시 예산과 지역의 기업 등에서 후원해주지 않았다면 여성회관 건립은 무산되었을 것이다. 최 : 1974년 여성회관이 죽도동에 현판을 내걸었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습니다.김 : 나는 당시 새마을부녀회 회장으로 늘 새마을복을 입고 다녔고, 그날도 복장이 다르지 않았다. 여성회관 개관식에 정말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여성회관 옆에 죽도1동 동사무소가 있었는데 동장 나이가 우리 아버지보다 많아 보였다. 그런데 시장이 와서 갑자기 준비를 덜 했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동장에게 험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경상북도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와 있고 포항에서도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다 와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나에게 “아주머니, 아주머니!”라며 막 부르면서 함부로 대하질 않나. 정말 꾹꾹 참았다. 행사가 끝난 후 관장 사무실에 여성들이 모두 모여 차를 마셨다. 국회의원 부인, 포항시 부시장 부인도 함께 있었다. 내가 여권신장부터 하자고 말문을 열고는, 어떻게 시장이 이런 행사에서 막말을 할 수 있느냐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일찍 시장에게 전화가 왔다. 아마 부시장 부인이 시장 부인에게 말했지 싶다. 시장은 다짜고짜 화를 내며 여자들 앞에서, 그것도 국회의원 부인도 있는데 자신의 험담을 해서 되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조목조목 시장의 언행을 짚어주고는, 시장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하고 전화를 탁 끊었다.최 : 어떻게 그렇게 당찰 수 있었는지요?김 : 바른말 하는데 뭐가 무섭나. 그 후로 시장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행사에 갔다가 만나게 됐다. 새마을어머니회에서 예비 훈련을 받아야 된다고 해서 수백 명이 자비로 군복을 입고 중앙국민학교에서 결성식을 했다. 단상에 올라가보니 시장과 나 단 둘만 있었다. 24개 동 새마을어머니회 여성 전부가 군복을 입고 시장에게 경례를 붙이자 시장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뿌듯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 시장이 낮은 목소리로 “회장님, 미안합니다. 그때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그래서 나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손정식 관장이 나에게 “쪼매난 게 간도 크다”고 했다.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면 바로잡아야 하는 게 내 성격이다. 그래서 별명이 싸움꾼이 된 것이다.그가 여성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말을 듣는 내내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 날의 그를 만날 수 있었다.최 : 여성회관은 1989년 시 사업소로 전환되었지요?김 : 민간단체로 운영하다 보니 예산이 늘 문제가 되었다. 어떻게 해결해보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운영위원 회의에서 여성회관을 시 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시 사업소 직제인 포항시여성복지회관이 된 것이다.여성회관이 민간기관에서 시 직제로 바뀐 후 교육시설은 물론 운영 사업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포항시여성복지회관은 전국 어느 사회교육기관 못지않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그렇게 10년을 운영하게 되자 교육 수요가 확장되고 공간 문제도 대두되었다. 매년 수강생을 1천800명씩 배출하니 더 넓은 공간과 현대식 시설을 갖춘 여성회관의 신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98년 우현동에서 새 회관의 기공식을 갖고 2001년 입주하게 되었다. 현재 포항시여성문화관은 수영장을 겸한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지역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교양강좌를 운영하며 시니어 대상 강좌와 남성 교양강좌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최 : 1988년에 여성복지회관 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관장직을 그만두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김 : 손정식이 명예직 관장으로 있다가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때 그 자리는 공무원 5급 대우가 되었다. 두 달 동안 서울에서 관장 교육을 받고 석 달쯤 관장 업무를 해보니까 내 적성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내 사표를 냈다. 남들은 그 좋은 자리를 왜 그만두느냐고 난리였다. 하긴 그 당시에 여성 공무원이 5급까지 가기도 쉽지 않은데, 일반 여성이 공무원 5급 대우 자리를 스스로 내던진다는 게 이해가 되었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매일 현장을 살피며 일하던 사람이 종일 의자에 앉아 있으니 한 번도 아프지 않던 몸이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과감히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자 거짓말처럼 펄펄 날아다녔다. 그때 숙명처럼 알았다. 나, 김경희는 평생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걸. 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18

전후의 폐허에서 청보리처럼 푸르렀던 포항 여성의 기개

김경희 여사와의 첫 만남은 봄이 막 들어서려는 3월 초였다. 전화로 간단히 인사를 나눴을 때, 그의 나이를 잊어버릴 만큼 목소리에 생기가 넘쳤다. 장소를 섭외하다 시내 쪽이 괜찮겠다는 그의 말에 꿈틀로 내 청포도다방으로 약속을 잡았다. 1935년생 김경희를 만난다.최미경(이하 최) : 포항 토박이라고 들었습니다.김경희(이하 김) : 그렇다. 88년을 포항에서 살았고, 선조들을 되짚어 올라가면 600여 년을 포항에서 살았다. 뼛속까지 포항 사람인 셈이다.최 : 격동의 시기, 아픔이 많은 시절을 겪으셨는데.김 :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국민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학교에 뒤늦게 들어가 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나나 우리 부모 세대나 곡절 많은 세월을 견디고 살아왔다.최 : 6·25 이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신지요?김 : 중앙국민학교에 3785부대가 주둔해 있었고, 여성계에서는 변석화 씨가 활발하게 활동했다.최 : 변석화라면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분을 말하는지요?김 : 그렇다. 변석화 씨가 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한 군인들을 위해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위문 공연도 주선했고 주먹밥도 나눠주었다. 변석화 씨의 딸과 친구여서 우리는 함께 학교 운동장이나 강당 같은 데서 변석화 씨의 연설을 들었다. 사실 연설을 들었던 사람은 어른들이 아닌 우리 같은 아이들이었다. 강당 마룻바닥에 소복이 앉아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연설을 들으며 신나게 박수를 쳤다. 그 시절엔 여성이 앞에 나서는 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변석화 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시대를 앞서간 참 당찬 분이었다. 변석화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포항 최초의 전문의다. 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김두수와 결혼해 남편의 고향인 포항으로 왔다. 연설 솜씨가 뛰어났던 변석화는 높은 인기와 지지에도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낙선했다. 변석화는 산부인과 의사를 하면서 대한부인회 포항시 지부장(1946~1956)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김경희의 기억처럼 6·25전쟁 이후 포항에 주둔한 3785부대 상이군인과 헐벗은 군인들을 위해 가정주부들과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을 끌어와 연극과 합창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다. 김경희는 변석화를 여성 권익을 앞장서서 개척한, 포항여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고 강조했다.최 : 당시 여성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기엔 사회 분위기가 녹록지 않았지요?김 : 딸은 학교에 잘 안 보냈다. 그래서 학교에 보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실 집안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주전부리를 할 거리가 없어서 껌을 씹고 나면 꼭 기둥에 붙여놓았다가 다시 씹곤 했다. 대부분 형편이 어려울 때라 겨울이 오면 교실 안에 난로를 지폈는데, 석탄은 비싸서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주말에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 솔방울을 따서 석탄 대신 뗐다. 봄에는 쑥떡으로 점심 끼니를 대신한 적도 숱했다.최 : 포항에서 다닌 학교 이야기가 궁금하네요.김 : 누가 포항 토박이 아니라고 학교에 모두 ‘포항’이 들어간다.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포항여중과 포항여고가 분리되지 않았고, 포항여고도 4년제, 5년제, 6년제 이렇게 달랐다. 그래서 나는 원래 10회 졸업생인데 12회 졸업으로 되어있다.포항여자중학교와 포항여고는 1939년 3월 13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213호로 포항고등여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43년 제1회 졸업식에서 첫 졸업생으로 51명을 배출하였고, 해방 이후 1946년 포항여자중학교로 교명을 개칭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휴교했고, 그해 8월 14일 폭격으로 학교 건물이 무너졌다. 1951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학제가 변경돼 포항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이 다시 개칭되면서 다음 해인 1952년 3월 31일 포항여중 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최 : 학창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김 :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활달했다.최 : 한흑구 선생의 부인인 방정분 여사가 교편을 잡고 있지 않았나요?김 : 방정분 선생님은 아주 당차고 활기찼다. 이화여전 출신으로 포항여중과 포항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얼마나 허물없이 대했는지 거의 매일 한흑구 선생님 댁에 놀러갔다. 한흑구 선생님이 나를 보고 “경희야, 경희야.” 불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필 ‘보리’를 쓴 한흑구 선생님은 포항 문학계에서는 놓칠 수 없는 분이다. 방정분, 한흑구 두 선생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하게 되었고, 내게 예술적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최 : 이력을 살펴보니 포항여고 졸업 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셨던데.김 : 공부를 잘하기보다는 그림을 잘 그렸기에 서울대 미대에 갔지만 졸업은 못 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자취할 때 숯불을 피웠는데 그게 몸을 망가뜨렸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나를 보고 부모님이 학업을 중단하라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1년을 못 버티고 포항으로 돌아왔다.최 : 모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셨지요?김 : 1950년대 중반에는 미술이나 음악 교과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수학을 가르치는 분이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고, 도덕 선생님이 음악 수업을 맡기도 했다. 당시 포항을 통틀어 피아노가 있는 학교는 포항여고 딱 한 군데였다. 학생들에게 예능 교과 수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교장의 부탁으로 처음에는 특별 교사로 미술을 가르쳤다. 미술사를 가르쳤고 실기도 함께했다. 딱히 교과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내가 전부 만들어 썼다. 세계 명화 같은 것을 오려서 칠판에 붙여놓고 따라 그리기도 하고 물감으로 칠도 했다. 그렇게 2년 동안 포항여고에 있으면서 미술대학에 보낸 학생도 있다. 그리고 포항여고 교장이 김천여고로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도 2년간 학생들에게 미술 전임 교사로 수업을 이어갔다. 그러다 결혼하면서 교직을 그만두었다.최 : 남편의 고향이 포항이 아닌 걸로 들었습니다만.김 : 목포 출신이다. 나만 보고 포항에 왔고, 나로 인해 포항에 정착했다. 남편의 외조가 아니었다면 이후 포항에서 활동했던 많은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최 : 포항여고 동문회에서 중심축 역할을 하셨다지요.김 : 내가 나서기 전에 포항여고 동문회를 만들려고 선배들이 노력했다. 하지만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일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포항여고 1회 졸업생 출신 손정식 선배가 나를 불렀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포항여고 출신들을 만나 동문회를 만들어야겠으니 네가 나를 좀 도와야겠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겁이 없었다. 아니면 무모했던가. 손정식 선배와 7회 졸업생 배순자 선배, 나 이렇게 셋이 모여 무작정 서울로 갔다. 그리고 ‘서울신문’에 광고를 냈다. 포항여고 출신들은 오후 2시까지 비원(祕苑, 창덕궁 후원)으로 모이라는. 그런데 생각해봐라. 갑작스레 신문에 광고 한 줄 냈다고 동문들이 올 리 있겠는가. 셋이서 한참을 앉아 동문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배가 너무 고팠다. 배순자 선배가 소주 한 병에 오징어 한 마리를 사 왔다. 셋이서 오징어를 뜯어 먹고 있는데 하나둘 선배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서울에 있던 포항여고 동문들이 스무 명 가까이 비원에 모였다. 동문회를 조직한다니까 선후배들이 흥이 나서 저녁도 먹고 나이트클럽에도 갔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얼른 숙소로 가야 하는데 배순자 선배가 춤이 좋아서 무대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손정식 선배가 내게 배순자를 데리고 나오라고 해서 수십 명이 춤을 추고 있던 무대에 용감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배순자, 어디 있노! 배순자!”라고 큰 소리를 치며 무대를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서울 지부가 성공적으로 결성된 멋진 밤이었다. 최 : 서울 말고 다른 지역에도 동문회가 결성되었는지요?김 : 그 후에 부산과 대구도 갔다. 부산에서는 동래관광호텔에 모였는데, 사람이 모여 있으면 우선 재미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무대에 올라갔다. 그래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온갖 광대 짓을 했다. 대구 지부는 경산에서 했는데 온천에서 모였다. 그렇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포항여고 출신들을 하나로 묶었다. 외따로 나와 있을 때는 힘을 받지 못하지만 하나로 합쳐지자 포항여고 동문회가 포항의 여성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포항여고 개교 80주년을 기념해 2019년 발간된 ‘연원 80년사’를 보면, 1947년 포항여자중·고등학교 총동창회 창립총회가 개최되며, 초대 회장으로 1회 최복순이 선출된다. 1954년 8월 제2차 정기총회가 개최돼 1회 손정식이 2대 회장으로 선출되며, 1964년에 동창회 전국 지부가 설치된다. 이 내용은 1964년 동창회 전국 지부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다.김경희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진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13

기합 준 박태준, 재경향우회장 맡아준 김창성

포항종합제철 건설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으로 있었으니 박태준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영포목우회와 재경포항향우회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인터뷰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안 : 포항 이야기를 하는데 박태준 회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 : 내가 포항제철 관련 일을 할 때 박태준 회장한테 행실이 안 좋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듣고 기합도 많이 받았지. 그분한테 대들었던 건 도로 문제 때문이었어. 포항제철 물동량이 포항 시내로 들어와서 경주 시내를 거쳐 고속도로로 가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지.안 : 일리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여러 산업도로가 생겨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처음부터 도로에 좀 더 신경을 썼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이 : 내 생각대로 할 수 없었던 건 아마 공사비 때문이었을 거야. 당시에 도로가 포항을 관통하지 않고 연일을 거쳐 안강으로 붙이면 큰 트럭들이 포항 시내로는 안 들어가도 됐지. 그런데 포항 시내로 큰 트럭들이 오가면 매연 나오고 시끄러워서 문제가 된다고 내가 주장했거든. 그 때문에 네가 뭘 아느냐고 기합도 많이 받았지만, 나한테 그만큼 달려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나중에 그러더군. 내가 수많은 사람을 겪어봤지만 박태준 회장 같은 사람이 없어. 세월이 한참 흘러 박태준 회장이 일본에서 돌아와 포항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일 좀 도와라고 하더군. 그래서 3년 정도 도와드렸지. 인연이란 그런 거야.안 : 1970년에 포항을 떠나 건설부에서 공직 생활을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포항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지만 포항에 관심과 애정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이 : 포항에서 민원서류가 오면 나한테 많이 왔는데 온갖 민원이 다 밀려오는 거야. 박명재 전 국회의원이 총무처 인사과장을 맡고 있을 때 나도 과장이었는데 나이는 내가 많지. 박 의원에게 우리 지역 출신 서기관급 이상 명단 좀 달라고 하니 왜 그러냐고 물어. 그래서 민원서류가 이렇게 많다고 했지. 지역 출신이 여남은 명은 되더라고. 우리 집에 모여서 만든 게 영포목우회야. 조선 시대에 공무원을 목민관(牧民官)이라 했잖아. 영일군 포항시 목민관이라 해서 영포목우회라고 했는데, 박 의원이 지은 거야. 지역에서 민원서류가 오면 반포 근처의 우리 집에 모여 의논하기도 했어. 순수한 취지였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지. 그런데 이걸 정치적으로 몰아세우고 두들겨 팬 적이 있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안 : 영포목우회 외에도 재경포항향우회 설립에도 앞장섰다고 들었습니다.이 : 향우회 회장은 목우회와 달리 거물을 앉히고 싶었지. 이름 있는 분이 향우회 회장을 맡아야 향우회에 힘이 실리고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으니까. 물론 재력이 좀 있기도 해야 되겠지. 몇 분을 접촉해보니 아무도 안 맡으려고 하는 거야. 사실 그 자리가 부담이 되긴 하지. 고민 끝에 김창성씨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수락하는 거야. 그분이 누구냐면 김용주 선생의 맏아들이야. 전남방직 회장을 했고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도 했지. 포항 출신 중에서 진짜 거물이야. 그렇게 김창성씨가 초대 회장을 맡고 최성해씨가 초대 총무를 맡아서 향우회 발족을 했지. 지금도 매년 재경포항인 신년교례회를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하고 있어.안 : 건설부에 있는 동안 자료를 수집해 자비로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했다. 방대한 자료를 정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이 : 건설부에서 다양한 근무를 했는데 가장 문제되는 곳이 국토계획국의 토지이용계획과장 자리야. 여기만 가면 모가지가 날아가. 국토를 공업지구, 농업지구 이렇게 지정하는데 돈 장난이 너무 심했지. 아무튼 내가 국회에서 근무한 후 이 자리로 갔는데 국토의 8%가 고시(告示)가 안 됐어. 미고시 지역을 검토해보니 그 지역마다 특성 있는 곳이 있는데, 그걸 중요하게 여겼지. 고시할 때 절이나 관광지가 있으면 손을 못 대도록 분류해. 이런 일을 하면서 땅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채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지. 내가 그 작업을 할 때 후임이 국토지리원으로 진급돼 갔어. 국토지리원에서 주요 명승지 등을 조사하는 일을 했지. 당시에 퇴직하면 자서전 쓰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 직원이 나한테 땅 지명 자서전을 만들라고 아이디어를 줬지.안 : 그럼 포항 자료는 국토지리원의 도움을 받은 것인가요.이 : 국토지리원에 포항을 중심으로 자료를 좀 뽑아달라고 해서 받은 게 180개쯤 돼. 그걸 바탕으로 1천 개 정도 정리했는데 너무 힘이 들더군. 2년쯤 하다가 포기했어. 그러다가 책상에 쌓인 자료를 보면 아쉬워지고. 하다가 버리고 또 하다가 버리고. 그 작업이 습관이 되어버렸지. 안 :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인생의 교훈이 있다면.이 : 삶에 변화가 없으면 인생은 녹슬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녹은 쇠에서 생기는데, 녹이 오래되면 쇠 자체를 못 쓰게 만들지. 이건 법정 스님이 한 말인데, 항상 삶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고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 해. 책을 가까이하고 늘 배우는 자세로 임하면 언젠가는 그때 배운 것들이 인생에 큰 도움을 줄 때가 오는 법이야.안 :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십시오.이 : 앞에서 말했지만 1960년대에 나병 고치는 약을 만드는 대명제약에 1년 정도 다녔어. 대명환이라는 약을 지어서 원주를 중심으로 나환자(한센병)들에게 공급하는 구라(救癩) 사업을 하면서 나환자들을 많이 만났지. 나도 이 일을 하면서 사람이 많이 순해졌지. 그 경험 덕분에 건설부에 가서 큰 득을 본 적이 있어. 한강 북쪽 비행장 건너편 개발을 할 때 한쪽에 나환자촌이 있었어. 개발을 하려고 들어가니 나환자들이 농사도 짓고 공장도 지어서 세를 받으며 살고 있는 거야. 그곳을 철거하려니 나환자들이 가만있겠어? 들고 일어나 진행이 안 되는 거야. 건설부에서는 내가 책임자였고, 환경청, 보사부도 함께 갔지. 나환자를 만나 설득해야 하는데, 누가 나환자를 만나려고 하겠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서 차 한 잔 달라고 하니 나환자들이 깜짝 놀라는 거야. 나환자는 크게 네 부류로 나눠. 물집 같은 것이 툭툭 터지는 결절나, 겉보기에 멀쩡한데 아파 죽는 신경나, 이 두 가지가 혼합된 혼합나, 반점이 나는 반점나. 나는 딱 보면 알지. 내가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나환자 분류를 했어. 그러니 나환자들이 꼼짝 못 하고 일도 잘 풀렸지. 젊었을 때 힘든 일도 성심성의껏 하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법이야.안 :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 : 포항은 특별한 곳이지. 까마귀를 보면 알아. 까마귀처럼 좋은 새가 없어. 까마귀는 효자 새야. 늙은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는 게 젊은 까마귀지. 일본은 까마귀가 길조인데 우리는 싫어해. 몽골 쪽에 기마민족이 살 때는 까마귀가 많았어. 그런데 과거에 몽골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바람에 까마귀를 질색하게 된 거야. 하지만 포항은 까마귀를 좋아해. 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 설화, 오천(烏川), 오도(烏島) 같은 지명에 까마귀 오(烏) 자가 들어가지. 전국에 까마귀 지명을 가진 곳이 몇 없어. 관선 시장 시절에 중앙에서 시화(市花)를 정하라고 할 때 그냥 장미가 되고 말았는데, 장미와 포항이 무슨 관계가 있나. 꽃에도 포항의 뜻을 담아야지. 해가 뜨고 지는 곳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 포항이잖아. 포항은 해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니 해바라기를 시화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인터뷰 내내 그는 기억을 더듬느라 애썼는데, 숫자와 연도에 관한 기억은 대부분 정확했다. 그만큼 과거의 일이 삶의 지문처럼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중간에 그의 휴대전화는 자주 울렸다.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거나 그를 아끼는 지인들 같았다. 그렇게 그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가 들려준 법정 스님의 말처럼 녹슬기를 거부하는 대못과 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았다. 2년 전 그는 미스터 경북 선발대회에서 최고령자로 참가했다. 사진 속의 단단한 그를 보면서 영화 ‘007 스카이 폴’에도 나온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가 떠올랐다. 짧았지만 인상 깊었고, 그래서 이 지면에 다 담지 못한 그의 이야기를 못내 아쉬워하며 대담을 마무리한다.비록 우리의 힘이 옛날처럼 하늘과 땅을 뒤흔들 수는 없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우리다. 모두 하나같이 영웅의 기개를 가진 우리는, 시간과 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해졌다 하여도, 강력한 의지로 싸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겠도다.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11

포항 사람도 모르게 종합제철소 부지 선정 진행

종합제철소가 포항에 들어서면서 한 도시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극비리에 추진된 종합제철소 입지 선정 과정, 그리고 제철소 부지에 있던 원주민 마을에의 이주 과정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어본다.안 : 당시 포항 부자들은 주로 어떤 사업을 했는지요?이 : 거의 도정 공장을 했지. 한때는 대단했어. 내가 영일군 양정계에서 근무하던 1966년 3월까지는 굉장했지. 그런데 외국미가 떨어지고 나니 국내산만으로는 채산이 안 맞아서 공장이 문을 닫았어. 포항 동빈항은 1962년 6월 국제항으로 개항하면서 외국 선박과 외국 원조미를 조달하는 대형 선박이 입항하게 된다. 원조미의 60퍼센트는 포항에서 도정하고, 40퍼센트는 경주, 영천, 영덕 등에서 도정했다. 당시 지역에 변변한 산업 기반이 없었기에 도정업자들이 지역경제를 이끌었는데, 세금도 가장 많이 내고, 은행에서도 큰손 역할을 했다. 특히 현재 영남병원 앞에 자리했던 삼화압맥공장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할 만큼 명성을 날렸다. 압맥은 기계로 누른 납작보리를 말하는데, 보리에 적당한 수분과 열을 가해 눌러줬기 때문에 통보리보다 밥을 지을 때 연료가 적게 들고 소화도 잘됐다. 연료가 부족했던 군대에 보급되던 압맥의 대부분은 삼화압맥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겨는 경주의 축산지로 보냈다. 원조미를 하역하려면 1톤에 보통 14장의 가마니가 필요했고, 원조미 2만 톤이 하역될 때마다 28만 장의 가마니와 엄청난 양의 새끼줄이 있어야 했다. 이를 전량 포항에서 조달했는데, 흥해에서만 일주일에 평균 5천여 장의 가마니를 생산했다.안 : 포스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일군에서 근무할 때 포항종합제철 건설이 결정되었고, 관련 업무를 맡았다고 들었습니다.이 : 1948년에 포항이 읍에서 시로 승격됐지만 사실 시(市) 행세를 못 했어. 거의 모든 업무는 사실상 영일군에서 했다고 봐야지. 어느 날 위에서 울산특별건설부 포항공사사무소를 설치하니 수도, 전기 사용이 가능한 100평 정도의 사무실을 내놓으라는 공문이 왔어. 포항에 그런 건물이라곤 소방서가 유일했지. 안 : 당시에도 소방서가 있었는가요?이 : 일제 때부터 있었지. 경찰서 맞은편에. 경찰서는 나중에 생겼고. 소방서도 위에서 요구하는 100평이 안 됐어. 80평쯤 됐지. 펌프 같은 시설물을 포항국민학교 뒷마당에 갖다 놓고 텐트를 치고 근무했지. 그렇게 해서 소방서가 건설공사 사무실이 됐어. 그런데 그때는 포항종합제철이 들어오는지 아무도 몰랐어. 사무소 현판도 울산공업단지 포항공사사무소라고 했으니 누가 알았겠어. 나중에 정식으로 포항종합제철이라고 새겼어.안 : 제철소 입지 선정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는 얘기인가요?이 : 포항 사람들도 한참 동안 몰랐지. 그냥 큰 공장이 오는 줄 알았어. 1966년 말에 사무실을 구하고 이듬해 기공식을 했거든. 1965년에 한일협정으로 일본에서 지불한 대일청구권자금 일부가 포항제철 건설에 쓰였어. 아무튼 한 1년 동안 시민들은 전혀 몰랐어. 골탕 먹는 건 우리 실무자들이었지. 우리도 그렇게 큰일인 줄 몰랐어. 나는 조례를 만들고, 도에 가서 승인받는 일을 했지. 제철소 기반 조성에 필요한 토지 규모 등을 전부 조사하는데 4, 5개월밖에 안 걸렸을 거야. 포항이 제철소로 선정된 과정은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건설부의 류호문 계장의 역할이 컸다는 게 가장 유력해.안 : 포항이 제철소 부지로 선정된 이유가 궁금합니다.이 : 제철 사업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해. 첫째 물이 풍부해야 해. 포항은 형산강이 있지. 둘째 운송이 자유로워야 해. 그래서 바다를 끼고 있어야 하는데, 포항은 영일만이 있지. 원료도 철도 무거워서 이걸 운송하려면 바다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거지. 한마디로 바다가 없으면 철을 못 만들어.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제철소 후보지를 건설부가 물색했어. 삼천포와 몇 군데를 후보지로 정하고 마지막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공무원과 기술 전문가들이 오천 비행장에 내려 보니 광활한 평야가 있고, 강이 보인단 말이지. 그전에는 포항이 희망을 안 했으니까 위에서는 몰랐는데 이렇게 좋은 데가 있나 싶었던 거지. 300만 평 규모가 되면 공장을 짓겠는데, 300만 평이 넘는단 말이야. 그래서 류 계장이 건설부가 지정한 여섯 군데 후보지에 포항을 추가로 넣었고,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이거 됐네’한 거야. 계획에도 없던 포항이 그렇게 제철소 부지로 지정되었지. 이 모든 과정이 극비리에 지정되는 바람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배수환 영일군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분이 나중에는 포항시장이 되었지.안 : 비밀리에 그것도 단기간에 그렇게 큰일이 진행되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겠다. 가장 힘들었던 업무는 무엇이었습니까?이 : 실무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이주 대책 문제였어. 굉장히 어려웠지. 전문가들이 와서 도면을 보고 ‘이걸 해야 한다’ 하면 우리는 그냥 ‘그래요’ 하고 따라갈 뿐이지 한마디 말도 못 했어. 당시에 나는 주사에 불과했어.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은 전부 장관 바로 밑에 있는 사람들이라 군수도 말을 편하게 못 했지. 그런데 일개 주사와 이야기해보니 잘 통하고 일 처리도 척척 된단 말이야. 공무원 생활하기 전에 사업을 해본 게 큰 도움이 됐던 거지. 그러니 자꾸 나만 찾게 되고 내가 창구 역할을 다 했어. 그래서 나중에 건설부에서 날 데리고 갔지.안 : 제철소 공사하던 중에 건설부로 옮겼나요?이 : 제철소 착공하고 내 손으로 조례 만들고 일을 한참 하다가 1970년에 갔지. 여기서는 3년 6개월가량 일한 거지. 안 : 실무 중에 이주 문제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신다면.이 : 말썽이 있었는데 당시는 군정시대야. 꼼짝 못 할 때였지만 반발이 심한 곳도 있었지. 내가 옆에서 봤을 때는 이주 보상을 받고 다른 데 가도 남을 정도는 된 거 같아. 그때는 집값이란 게 없어. 초가삼간이라는 게 9평이야. 그게 몇 푼이나 되겠어? 보상은 나름대로 했고, 부족한 사람은 특별 상납금 같은 걸 만들어서 해줬지. 그래도 반발이 심한 곳은 불도저 앞에 드러눕기도 하고, 안방에 앉아 끝까지 버티기도 했지. 자기 집을 철거하러 간 공무원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지붕에 올라가서 고함치는 일도 있었고. 이런저런 사연들이 왜 안 있었겠나.안 : 건설 후보지에 마을은 얼마나 있었나요?이 : 많았지. 동촌이라는 큰 동네가 있었어. 지금 포스코 본사 바로 맞은편이지. 그게 마을 가운데야. 굉장히 큰 동네였지. 양색시촌도 있었고. 동촌 맞은편에 인덕이 있었어. 현재 동촌 앞바다가 신항만이지. 길 건너는 청림이고. 청림은 살았고 동촌은 싹 사라졌지. 포스코 고로에서 100미터만 나가면 바다야. 거기는 송림이야. 송림 안쪽은 동네 이름이 송내야. 거기는 부뜸질하는 데라. 불에 뜸질을 한다고 해서 부뜸질이라 해. 요즘 말로 하면 일광욕하는 거지. 여름에 꼭 해야 할 것이 해수욕장에서 부뜸질인데, 그래야 피부병도 없어지고 건강에 좋다고 했지. 우리 어릴 적에는 피부병이 많았어. 멘소래담 이런 거 외엔 약이 없으니까 시꺼멓게 태우는 거라. 해수욕하는 것을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뜸질하러 간다 그랬어. 거기가 포항 시내보다 좋은 부뜸질 장소였어. 바닷가는 송정이고 안에는 송내고. 그래서 송정, 송내 두 마을이 있었지.안 : 이주 문제 외에 다른 문제는 없었나요?이 : 동촌에서 기공식을 하기로 했는데, 마을 뒤 당산목을 베어야 했어. 그런데 그걸 누가 하려고 하겠나. 아무도 안 나서지. 기공식에는 대통령이 오기로 돼 있었지. 내가 공무원 생활하기 전에 목재상도 잠시 했기에 나무하는 사람들을 좀 알아. 대구에 50채 정도의 집을 지을 때 나무를 팔았지. 아무튼 평창에 있는 최수용인가 하는 사람한테 갔어. 나무는 둘이서 톱으로 베야 한다면서 돈을 많이 달라고 하는 거야. 돈은 달라는 대로 준다 하고 데려왔는데 막상 현장을 보더니 여기 사람들이 피하는 이유를 알겠다는 거야. 제단(祭壇)이기 때문에 잡신이 많이 붙는다면서 안 하겠다고 해. 그래서 나무를 베고 난 다음에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후에 굿을 이틀하고 나무를 벴지. 그리고 나서야 기공식을 했어. 그런 일도 일종의 풍속이어서 큰일을 하려면 받아들여야 했지.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공사하다가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되겠어. 큰일을 할 때는 제사도 지내고 밥도 먹여야 해. 기공식을 할 때 박 대통령은 못 오고 장기영 부총리가 왔는데, 대전쯤 올 때 파면 조치가 됐지. 그래도 기공식에 와서 오늘 내가 부총리를 그만둔다고 말하더군. 그 사람이 한국일보 사장을 했지. 그때는 한국일보가 대단했어.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06

“오천면 9급 때 만든 식량증산계획 보고서가 전국 2등 차지”

영일군청. 1916년 신축했으며 6·25전쟁 때 소실되고 1953년에 다시 지어졌다. 육거리에서 포항세무서 방향으로 난 길에 있었다. /사진 출처 : 이재원, ‘사진으로 읽는 포항도심’, 나루 6·25전쟁 이후 포항에 다방은 몇 개나 있었을까? 또 극장은 있었을까? 그리고 농촌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을까? 포항에서 청춘을 보내고, 5·16 직후에 공무원이 된 이석수 선생의 육성을 들어본다. 안 : 군 제대 후 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이 : 더 이상 공부하기는 곤란한 상황이어서 동서의 추천으로 서울에 있는 대명제약에 상임이사로 갔지. 가게 된 동기가 좀 웃겨. 대명제약이 불량배나 상이군인들 때문에 장사를 못 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자꾸 와서 뭐 해달라 요구하고 괴롭히니까 말이지. 그래서 회사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상이군인들도 나한테는 못 덤비니까.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전쟁 상태였지. 질서도 없었고. 경찰도 제대군인이나 상이군인들한테는 힘을 못 썼어. 작대기를 들고 마구 대드니까 경찰도 감당이 안 됐던 거야.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의 무법천지였지. 그렇다고 아주 악랄하거나 못된 행패를 부리진 않았어.안 : 1950년대 중후반 포항의 청춘 문화는 어땠나요.이 : 겨우 간다면 다방 정도지. 커피 마시는 게 최고였어. 술 중에 막걸리는 일꾼들이 먹었고. 좀 노는 사람들은 어쩌다 소주를 먹고. 소주를 맑은 술이라 했지. 정종이나 청주 같은 고급술도 맑은 술인데, 제사 때 같은 특별한 날에나 마시지 보통 때는 못 마셨어.안 : 당시에 극장 같은 문화시설은 없었습니까.이 : 1955년까지 다방이 다섯 개도 안 됐어. 그때 포항 인구가 5만 명이나 됐을까. 극장은 창고 같은 곳이 하나 있었는데 6·25 때 없어졌지.안 :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지역도 다녔을 텐데, 전쟁 후에 다른 도시와 포항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이 : 대구, 밀양, 울산, 경주, 부산은 그나마 괜찮았지. 6·25 때 피해 지역이 아니니까. 나머지는 다 잿더미였지. 포항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유강 쪽도 인민군들이 야전병원을 차렸다고 아군 함포가 다 부숴버렸어.안 : 포항에서 전쟁의 상흔이 사라진 게 언제쯤이었나요.이 : 1960년대 접어들어서였지. 5·16 이후에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고 질서도 잡혀나갔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사람들도 움직였지. 그전까지는 전쟁 때문에 논둑도 엉망이었고 농기구도 별로 없었는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정리되었지. 그전에는 모심는 것도 두세 달 걸렸어. 수리개량사업이 안 돼 있어 물 대는 사람은 대고 못 대는 사람은 못 대고 그랬지.안 : 공무원 생활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이 : 5·16 후 민선 지방공무원 연일 선출 1호야. 군(郡)에서 필요한 인원을 모집하는데, 영일군 지방공무원임용채용시험을 내가 처음 쳤지. 1963년 2월쯤이었고, 3월 15일 발령 났지.안 : 주로 어떤 일을 했나요.이 : 세 명이 성적순으로 발령 났는데 내가 1호였어. 오천면이 첫 발령지인데 행정직 자리가 없어서 9급 지방농업기원보로 발령 났지. 농업직으로 업무를 해보니 가장 중요한 농지 정리가 안 돼 있었어. 그때 농업증산계획을 수립하는 게 중요한데, 수리조합관계, 수리시설관계 등 농지 정리가 돼 있어야 했지. 논둑 정리 같은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 업무고, 동시에 식량 증산을 위해 각종 작물을 재배하는데 그전까지는 주먹구구였지. 그래서 농촌 지도소라는 전문기관이 생긴 거야. 식량 증산을 하려면 땅을 일궈야 하고 비료도 배급해야 하는데, 각 시군에 농산물 증산 운동을 하면서 농작물 재배계획서를 내라고 했지. 각종 작물에 대해 각 읍면에 계획서를 내줘야 하는데 식량 증산 5개년 계획이라고 해. 영일군은 12개 읍면인데, 오천면이 1등 했어. 내가 1등을 한 거지. 비결이 뭐냐 하면, 오천면은 영일군 전체의 농지구획사업 시범지구로 두고 농지구획사업을 하는 거야. 각 작물이 어느 동네에서 얼마만큼 생산되는지 나와야 해. 마을별로 작물 이름이 나오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보고를 못 하는 거야. 벼가 얼마, 옥수수가 얼마, 보리가 얼마인지 나와야 하는데 잘 안 돼. 작물 숫자가 보통 열다섯에서 스무 가지 정도 되지. 그런데 이 숫자가 잘 안 맞는 거야. 내가 주산 4급이야. 글씨도 잘 썼고 보고서도 반듯했지. 그때가 서른한 살이었어. 나이도 많고, 대학도 나왔고, 직장 생활도 했으니까 세상 보는 눈이 있어 공무원 생활에도 적응을 잘한 셈이지.안 : 그때는 식량 증산이 국가적으로 얼마만큼 중요한 일이 였습니까.이 : 식량 증산 계획이 나와야 비료 수급 계획도 나올 수 있고, 이런 계획이 우리나라 농업 정책의 밑바탕이 되었지. 1963년이 시발점이야. 내가 만든 보고서가 영일군에서 경상북도로 가고 농림부까지 간 거야. 전국에서 계획서가 다 올라가는 거지. 그때 내 보고서가 전국에서 2등을 해서, 청와대에 보고해야 했어. 작성자와 담당자 호출이 와서 나하고 농촌국장이 청와대로 갔지. 내가 면서기라 하니까 청와대에서 깜짝 놀랐어. 바로 서울로 오지 않겠냐고 하더군. 그때 서울 갈 형편이 안 됐어. 얼마 후에 영일군에서 날 데려갔지. 처음에는 농업직이니 농산계에서 식량 증산 계획 업무를 했는데 얼마 후에 양정(糧政)계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쪽으로 가라 그래. 안 : 양정계 사고는 무슨 얘기입니까.이 : 암행감사가 오는데 외국미가 들어오는 입항지로 와. 포항이 입항지니까 포항으로 감사가 온 거지. 외국미는 벼로 가져오니까 도정을 전부 포항에서 해야 하고, 도정을 하려면 가마니가 필요해. 우리나라에서 가마니 생산으로 손꼽는 데가 흥해(興海)야. 많이 나올 때는 하룻밤에 1천 장씩 나와. 말이 쉬워 1천 장이지 전부 손으로 짜는데 엄청난 거지. 새끼는 혼자서 꼬지만 가마니는 혼자서 못 짜고 둘이 해야 해. 집집마다 밤새도록 가마니를 짜면 2, 3개 정도 만들어. 원래 농사 때문에 흥해에서 새끼와 가마니를 많이 생산했지만, 연안 고기를 잡는 어장(漁帳)을 만드는 데 필요해서도 많이 만들었지. 그물을 가라앉히려면 추를 달아 내리는데 가마니에 모래를 넣고 가라앉혀. 위에는 나무로 띄우고 밑에는 가마니에 모래나 흙을 넣고 가라앉혀야 해. 그래서 이 동네는 가마니가 무지하게 많이 들어가는 거야. 내가 양정계에서 근무할 때 가마니 짜는 게 기계화되기 시작했어. 그런데 1964년 2월쯤 사고가 났지. 감사원에서 부둣가에 재어 놓은 가마니를 검사하는데 가마니가 없는 거라. 돌리면 꼬부라진 나무가 들어가는 기계가 있어. 가마니 재어 놓은 데를 푹 찔러서 돌리면 안에 있는 게 조금씩 나와. 그러면 쌀 나오는구나, 보리 나오는구나 하는데, 이게 겉돌아요. 감사가 창고 문 쪽에 있는 가마니를 푹 찔렀는데 이게 겉도는 거야. 입구에만 가마니를 재어 놓고 뒤에는 전부 헛것이었어. 앞쪽의 가마니를 밀쳐보니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야. 무려 2, 3천 장이 없었지. 당장 3, 4월에 벼가 들어오면 큰일 아닌가.안 :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이 : 군수가 대책을 세워보라는데 방법이 있나. 그래서 군수한테 비는 수밖에 없다고 했지. 담당관을 조사해보니 어장에 가마니를 다 팔았다는 거야. 겨울어장을 설치했다가 2월이 되면 봄 고기가 들어오니까 어장을 바꿔야 해. 그러니 새로 그물을 가라앉히려면 가마니가 필요했던 거지. 보통 다음 달이면 이왕 채우니까 팔아먹은 건데 채우기 전에 감사가 온 거지. 그래서 사정을 설명하고 일주일 뒤 포항에 오면 완벽하게 채워놓을 테니까 용서해달라고 사정을 하니까 양해가 됐어. 그사이 일주일 만에 가마니 3천 장을 밀어 넣은 거야. 감사관들이 보고 깜짝 놀랐지. 도대체 이 많은 가마니를 어디서 가져왔냐는 거야. 그래서 공장 한 번 보여주고, 불법이지만 이 지역 특성상 어장에 가마니를 줬는데 언제든지 미곡이 들어오면 대응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니까 용서해주더군.안 : 민간에서 만든 가마니를 군에서 사서 보관하는데, 그걸 어장 설치하는 사람들이 급하니까 먼저 빼돌려 쓴 것이네요?이 : 그렇지. 농수산부에 가면 조작계라고 있어. 태평양 쪽에서 오는 배가 목포로 가느냐 동래로 가느냐, 아니면 포항에 가느냐 무전 치는 걸 조작이라고 하는데, 배가 오는 게 조작 담당관 마음대로야. 쌀을 필요에 따라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에 따라 운송비가 차이 나. 그래서 포항에 많이 들어왔어. 포항이 우리나라에서 도정하는 데 최고였으니까.안 : 당시 공무원 월급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마 공무원 초년 시절에는 화폐개혁 전이라 환(圜으로 받았을 것 같은데.이 : 그때는 환으로 받았지. 당시에도 공무원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었는데 정규직은 월급과 함께 밀가루를 받았어. 내가 공무원이 되기 전까지 공무원은 정규직이 얼마 안 되고 촉탁이 많았어. 당시에는 월급으로 현금을 별로 안 주고, 밀가루 같은 걸로 줬지. 국가재건에 재정이 많이 들어가니까. 1970년대 초까지도 월급보다는 물건이 많이 나왔어. 내가 1969년에 서울 갔는데 서울에서는 밀가루를 안 주더군.선생은 월급명세서를 아직 모아놓고 있었다. 슬쩍 본 1970년대의 어느 명세서에 봉급 15만 500원, 수당 2만 원, 일반 공제액 6만 6천477원으로 차인지급액 10만 4023원이라고 적힌 빛바랜 잉크가 그 시절을 말하고 있었다.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7-04

“6·25 이후 한때 오천 미군부대가 포항을 먹여 살려”

학창 시절에 해방과 6·25전쟁이라는 격변기를 통과했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선생은 아픈 허리 탓에 수시로 자세를 바꾸며 그 시절을 힘겹게 회상했다. 학도병 이야기를 할 때는 간간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참혹한 전쟁과 그 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안 : 동지 다닐 때 운동부나 동아리 같은 활동도 하셨는지요?이 : 포항 상업학교는 대구 상업학교를 형님으로 모셨어. 대구 상업학교 교사가 동지의 체육 교사로 와서 럭비를 가르쳤지. 경북에서 럭비 하는 데가 세 군데 있었는데 대구 상업학교, 대구 능인학교, 포항 동지야. 대구 아이들보다 포항 아이들이 덩치가 컸어. 연습 장소가 염밭 쪽인데 거기는 물이 빠지면 부드러우니까 연습하면서 깨지고 넘어져도 다치지 않았지. 대구는 전부 자갈밭이라, 거기에 시합 한 번 갔다 오면 얼굴을 다 버렸지. 포스코 다리를 건너면 그 일대가 전부 염밭이라. 일본이 들어와서 염밭을 일부 죽이긴 했는데, 대도, 해도 다 합쳐봐야 100세대가 안 됐을 걸. 대구 상업학교가 포항 아이들을 그렇게 키웠지.안 : 학창 시절에 6·25가 터졌습니다. 학생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텐데.이 : 남로당 박헌영이 해방될 때 영덕 창수에 와 있었어. 해방되자 박헌영이 포항으로 나오면서 남로당을 조직했지. 그 바람에 포항에서 남로당이 굉장히 강했어. 원래 동해안 이쪽이 그런 기질이 있지. 동학도 여기서 시작됐잖아. 동학혁명이 뭐냐면 쉽게 말해 왕권을 민권으로 바꾸자는 거지. 아무튼 박헌영이 남로당을 만들어서 교육하니 좌익이 많았지. 우리는 중학교 1학년 들어가면서부터 요즘 말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틈바구니에서 공부했어. 포항중학교는 우익인 학생연맹이 많았고, 동지에는 좌익인 학생동맹이 많았어. 6·25전쟁이 터지고 학생연맹이 주관이 되어 학도병이 됐는데, 학도병 지원은 동지가 가장 많았지. 내가 중학교 4학년 때 6·25가 났고 나도 군대를 갔어. 운이 좋아 험한 곳에 가도 손가락 하나 안 다쳤어. 몇 번 울기는 했지만.안 : 중학교 4학년이면 요즘 학제로 고등학교 1학년인데.이 : 4학년 마친 애들은 고등학교 졸업한 걸로 간주했어. 육사도 시험 치면 가고. 중학교 졸업이 고등학교 졸업이었으니까.안 : 그럼 그것으로 학창 시절은 끝이었나요?이 : 6·25전쟁이 끝나고 9개월간 군 생활을 마치고 나서 고2에 자동 편입됐어. 군대도 갔다 오고 나이가 많아서 규율부장을 맡았지. 6·25 전부터 힘이 좋았고 운동도 잘했어. 그런데 전주 이씨 집안이어서 씨름으로 소를 몇 마리 타도 집에는 한 마리도 못 가져왔어.안 : 집에서는 힘쓰는 운동을 못 하게 했는지요?이 : 씨름은 쌍놈이 한다고 해서 못 하게 했지.안 : 규율부장은 힘이 좀 있었는지요?이 : 내가 규율부장을 할 때 오천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100명 이상이 출퇴근했어. 나이는 나와 비슷한데 동지 야간부를 다니니까 아무래도 수준이 좀 낮았지. 그 친구들은 미군부대에서 심부름하고 걸레질하고 빨래도 했어. 미군들이 하기 곤란한 걸 다 했지. 과거에 식모를 정지에 사는 간난이라고 해서 정지간나라고 했는데, 그런 셈이지. 그 친구들 형편이 얼마나 좋냐 하면, 일단 밥을 실컷 먹었어. 그리고 좋은 걸 먹어. 필요한 물건도 다 구할 수 있어. 자전거도 탔는데, 전부 일제 후지(Fuji)야. 미군들은 휴가를 일본으로 갔어. 그러면 하우스 보이들이 자전거 좀 사달라고 부탁을 해. 오천 부대에서 자전거 탄 아이들이 40∼50명씩 나와 봐라, 그 모습이 어떤지. 동지중학교 4, 5, 6회 아이들은 미군을 통해 나온 자전거를 탔어. 내가 규율부장이니까 등교 때 검사하면 주머니에 껌 아니면 초콜릿, 그리고 뭐가 나와도 나왔지. 라이타 돌도 나왔는데, 가져오면 팔아먹기 좋았어. 그렇게 당시에 미군부대를 통해 부속물이 많이 나왔어. 그걸 사려고 오천 부대에 장사꾼이 늘 서 있었지. 미군이 오면 뭐 팔 것 없냐고 물었어. 그러니 하우스 보이 주머니에는 늘 돈이 있었고, 말보르, 카멜 같은 양담배도 있었지. 하우스 보이들이 동지중학교에 많았는데 규율부장이라고 내 몫을 별도로 챙겨줬지.안 : 오천 미군부대도 포항 역사에서 간단치 않은 의미가 있었겠습니다.이 : 포항의 한 시절을 오천 미군부대가 먹여 살린 거지. 당시에 오천면은 큰 면은 아니었지만 화려한 동네였어. 순전히 미군 때문이지. 부대 하나가 주둔하면 동네가 살았어. 청림동도 부자 동네였지. 일단 밥을 안 굶어. 딴 데는 4, 5월이 되면 쌀이 없어 절절매. 해방될 때 여기는 미군 주둔 지역이야. 1950년대 해병대가 들어오고. 미군 주둔 지역이니까 양색시들도 와 있었어. 그 색시들도 알고 보면 하이 클래스야.안 : 양색시가 하이 클래스라는 건 생소한 얘기입니다.이 : 당시 양색시는 적어도 중학교는 나왔어. 기본적인 영어는 할 줄 알았지. 당시 여자들은 국민학교만 나와도 중상 클래스에 들어가. 내가 오천면 서기 할 때 양색시들과 대화하면서 왜 저렇게 됐을까 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 수준 있는 애들이 많았어.안 : 청림동 일대에 그런 술집이 많았는지요?이 : 그게 미군부대 입구에 있어야 미군들이 나오자마자 헌병 눈을 피해서 빨리 들어갈 수 있잖아. 헌병들도 웬만하면 모른 척했지.안 : 포항수산대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했을 텐데 당시 수산대학교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이 : 포항수산대는 하태환 선생이 6·25전쟁 중에 설립했어. 재학 중에는 군대에 안 가도 되니까 학교에 서로 들어가려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포항 사람들은 못 들어갔지. 1, 2회 졸업생들은 서울 사람, 피란민, 대구의 유명한 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지만 실력 있는 사람들이었어. 포항 사람은 10%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외지 사람들이었지.안 : 전쟁 중에 학교를 설립했다는 게 놀랍네요.이 : 그렇지. 어쨌든 학교에 들어가면 2년 동안은 피해 있었지. 그만큼 학교 들어가는 게 힘들었고. 그런데 졸업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버렸거든. 그때는 동지초급대학교라고 했다가 나중에 포항수산초급대학이 됐어. 그런데 학생 수가 너무 적었어. 150명밖에 안 됐지. 어로과, 수산과, 증식과가 있는데 한 과에 50명이 정원이야. 이건 정규 학생이고 나머지는 청강생이라고 해서 한 과에 몇십 명씩 붙어 있어. 정규생은 150명인데 실제로는 300명 이상 됐지.안 : 무슨 과에 다니셨는지요?이 : 나는 고기 잡는 어로과였어. 입학할 때 군대에 갔다 왔고 가정적으로 안정돼 있어서 대학 다닐 때 운영위원회 회장을 했지. 학생회장인 셈이야. 그 덕분에 포항대학교 총동창회장을 20년째 하고 있고.안 : 졸업하고 전공을 살렸는지요?이 : 포항수산대가 2년제였으니까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해야 했는데 내가 바람이 좀 들었지. 일본에 가려다 못 가고, 여러 복잡한 일을 거쳤어. 그러다 군대 영장이 나왔어. 내가 그전에 9개월간 군 생활을 했으니 그걸 증명하는 게 귀향증이야. 부대에서 사진 같은 걸 붙인 거지. 당시 군대는 36개월 복무인데 국방부에 그 자료로 병적확인원을 내면 9개월간 면제를 받는단 말이야. 그런데 국방부에 병적 정리가 안 돼 있으니까 군번이 없다고 해서 인정을 못 받았어. 그 바람에 1956년에 재입대를 했지.안 : 군대 갔다 온 대한민국 남자 상당수가 재입대 영장을 받고 다시 군대 가는 꿈을 꾼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재입대한 군 생활은 어떠했습니까?이 : 훈련소에 갔을 때 마침 연병장에서 씨름판이 벌어졌지. 내가 1등을 하니까 훈련병에서 대번 씨름선수가 되었어. 당시에 돈 안 들이고 운동하는 건 씨름밖에 없다 해서 육본에서 각 부대에 씨름부를 창설하라고 지시가 떨어진 거야. 명절 때는 지방 씨름대회도 나갔지. 내가 마지막으로 1958년 2군 사령부 씨름부에서 우승을 했어. 그때는 덩치도 컸고 씨름 실력이 대단했어. 그렇게 한 2년 군 생활을 하고 있는데 고향 동네에 큰 물난리가 났어. 당시에 여러 사유의 제대가 있었는데, 의가사제대 중에 수해가 나면 그 지역 군인들은 제대시켜줬어. 그래서 의가사제대 신청을 했더니 곧바로 제대라. 그렇게 25개월 정도 군 생활을 했지.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6-29

“동양 최대의 포도농장 덕분에 포항은 덕을 많이 봤지”

인터뷰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진행되었다. 마침 선생은 허리를 다쳐 병원에 다녀온 후라 인터뷰를 제대로 소화해낼지 걱정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동양 최대 규모였던 포항 포도농장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해방 전후 포항을 이끌어갔던 주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안 : 포항 포도농장은 동양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는데, 가 본 적이 있는지요?이 : 포도는 해풍을 맞아야 맛이 좋아져. 미츠와(三輪) 포도농장이라고, 규모가 대단했지. 어릴 때 소풍을 포도농장으로도 갔어. 너무 오래돼 기억이 흐릿한데 여하튼 끝도 없이 큰 포도농장이었지. 그 포도농장이 뭐가 특이하냐면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던 제도를 바꿔버렸어. 집단 농사로 바꿔버린 거야. 우리는 옛날에 집단 농사가 아니거든. 그리고 우리는 농사를 지으면 품앗이를 해. 서로 품을 나누지. 그런데 일본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거야. 우리나라에 없던 현금 지급 제도가 생긴 거지. 나중에 포도농장을 밀어버리고 비행장을 만들었잖아. 그 비행장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살았어. 왜? 비행장 징용 때문이지. 일본으로 가야 할 징용을 전부 그 비행장으로 보낸 거야. 그래서 포항은 일본 강제징용이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지역보다는 덜한 편이었지. 아무튼 포도농장 덕분에 포항은 덕을 많이 봤어. 품앗이가 아니라 돈을 지급하는 식으로 농사 제도가 바뀌었고, 비행장을 만드는 바람에 징용을 덜 가게 됐고. 해방 후에는 미군이 들어와서 미군 덕을 봤지. 6·25 때 해병대가 없었으면 여긴 다 날아갔을 거야. 미군이 와 있었기 때문에 안 넘어갔지.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와인 수입이 힘들어지자 포항에 와인용 포도밭을 만들어 와인을 대량생산했다. 지금 해병사단 안에 있는 일월지와 골프장 일대, 청림동 해병 숙소 일대와 동해, 도구에 걸쳐 약 200만㎡에 이르는 동양 최대였다고 한다. 1931년 6월 25일자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1930년 포도 수확 5만 관(20만㎏)에 포도주(미츠와 포도주-포도 농장주 이름이 미츠와 젠베에(三輪善兵衛)였다) 1천 석(18만ℓ)과 브랜디 100석(1만 8천ℓ)를 생산했다. 제품도 프랑스 고급 와인에 뒤지지 않고, 향도 비할 데 없이 좋을 정도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조선의 경북이란 지역에서 일본 최고의 국산품이 나온다면서 ‘포도는 야마나시(山梨)부터’라는 말이 예부터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조선의 경북’으로 고칠 필요가 있다고 기록했다. 미츠와 농장은 1939년까지 포도주 1천500석(27만 ℓ)을 생산했으며, 그 후 일부 지역에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한때 직원 15명, 한국인 인부가 연인원 3만 2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삼륜포도주공사’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까지 와인을 생산했지만, 그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안 : 해방 무렵 인상 깊었던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이 : 그해 7월 10일 열차가 개통됐지. 그전에도 열차가 있긴 했는데 폭이 좁은 협궤 열차였어. 그 협궤 바깥으로 틀을 짜고 철로를 놓았어. 다 놓고 난 다음에 협궤를 뜯어냈지. 이게 지금도 사용되는 국제 규격이야. 그리고 아마 8월 15일 포항, 경주 간 철로가 개통됐을 거야.협궤는 현재 국제 규격인 표준궤보다 폭이 좁은 철로를 말한다. 포항역은 1918년 11월 1일 협궤노선의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해 1945년 7월 10일 표준궤를 개통하고, 지금은 사라진 구 역사(驛舍)를 신축 준공했다. 당시 철도 시설은 일본의 독점적인 사업이 돼 한국의 이익보다 일본의 독점적인 이익이 되었다. 한국인을 강제 동원하고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부설된 철도는 일제에 높은 수익을 안겼다. 1936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그해 봄, 포항, 영덕, 청송 등지의 500여 명이 만주 이민 열차로 포항역을 떠나는 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남루한 의복에 허술한 보따리에 바가지를 단 것을 지고 이고 어린 자녀들을 혹은 업고 손목을 이끌고 혹은 늙은 부모를 이끌고 창백한 얼굴에 눈물을 머금고 정든 고향과 친척들을 이별하는 비애에 싸여 프레트 홈은 일시에 눈물바다를 이루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안 :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에 유년 시절을 보내셨는데,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한 가지만 더 얘기해주시지요.이 : 정치인 김무성의 부친인 김용주 선생과 나의 부친이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김용주 선생이 포항에서 처음 열린 신식 결혼식에 주례를 섰지. 1938년인가 1939년쯤인데, 그 결혼식에 우리 집안도 초청을 받아서 할머니가 다녀왔어. 김용주 선생은 부산제이공립 상업학교를 나와서 스무 살 때 포항 식산은행에 들어갔지. 몇 년 근무해보니 돈은 고기 잡는 사람이 아니라 파는 사람이 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식산은행을 나와서 운수사업을 했어. 나중에 청어로 생선 기름 만드는 비누공장을 차리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그 사업을 시작했지. 아무튼 돈을 벌어서 사립학교를 인수해 영흥국민학교를 만드는데, 교장으로 있을 때 그 학교 여교사 결혼식 주례를 섰지. 신랑은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회장이라. 할머니에게 신식 결혼식은 뭐가 다르냐고 하니까 색시 얼굴을 실컷 봐서 좋더라고 하는 거야. 그전 결혼식에는 색시 얼굴을 볼 수 없었지.해촌(海村) 김용주는 동빈동에 정어리기름으로 비누 만드는 공장을 세웠다. 당시 영일만 일대에는 정어리와 청어가 많이 잡혔는데, 정어리가 너무 흔해 생선 취급도 받지 못했다. 지금의 송도 다리 건너 왼쪽에 일본인이 경영했던 정어리기름 공장이 있었는데, 이 정어리기름은 주로 식용으로 쓰였지만 비누 및 약품 제조에도 이용되었다. 해촌은 사재를 털어 구 제일교회 앞에 있었던 영흥학당을 정규 과정의 영흥보통학교로 만들었다. 포항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인 셈인데, 해방되면서 공립학교로 바뀌어 개교 100년을 훌쩍 넘겼다.안 : 당시 중등학교 상황은 어떠했는지요?이 : 일본이 들어와서 학교를 세우는데, 처음엔 서울, 평양, 대구 등 세 곳을 중심으로 했어. 대구가 포화 상태가 되자 다섯 개 도시의 책임자를 불러 학교를 세우라고 했지. 포항, 안동, 상주, 김천, 경주가 그곳으로 나름대로 학교의 기능이 필요한 지역이었지. 포항도 학교 하나를 가져가라고 하니까, 경주나 다른 곳도 그렇지만 전부 남자 중학교만 원했어. 안동은 나무가 많아 농림학교를 원하고, 상주는 누에고치를 하니 농잠 중학교, 김천은 당시에 사립학교가 있었고, 그런데 포항은 아무것도 없어. 포항은 여학교를 가져가라고 해서 남자 중학교가 못 오고 여학교가 먼저 왔어. 그래서 포항여중이 1939년에 먼저 생겼고, 포항중학교가 생긴 건 1943년이지.안 : 그럼 포항중학교에 입학했는지요?이 : 시험을 쳐서 포항중학교에 합격했지. 그런데 하태환 선생이 동지중학교를 세웠는데, 큰삼촌하고 연일국민학교 10회 동기였어. 삼촌은 읍사무소 총무계장인가 했고. 동지중학교는 1946년 3월 5일 개교했는데, 그때는 사립을 한 수 낮춰 봤어. 가난한 애들이 가는 데가 사립학교였던 거지. 포항중학교는 좀 괜찮게 사는 애들이 갔고. 그런데 포항중학교에 가려면 여기서 창포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오죽했겠나. 왕복 50~60리라. 그때 동지에서 자기네 학교에 오면 학비를 면제해준다고 삼촌을 통해 제안이 왔어. 그래서 포항중학교 간 지 사흘 만에 동지중학교로 갔지. 당시 동지중학교는 죽도시장 앞에 있는 아파트 부지에 있었어. 원래 그 자리는 일본이 군량미를 실었던 미곡 창고였고. 일본이 떠나고 나니까 학교를 그곳으로 옮겼지. 원래 동지중학교가 어디서 시작했냐면 지금 포스코 1고로 있는 데서 100m만 가면 해변이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야. 거기에 일본 80연대가 있었고, 해방 후에 이 빈터를 깔고 앉은 게 동지중학교지. 그런데 그 주변이 전부 군영 땅이라 동지중학교는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어 죽도시장 건너 미곡 창고로 갔어.안 : 혹시 동지중학교를 설립한 분들 중에 아직 살아 있는 분도 있는지요?이 : ‘6인회’라고 하는데, 그때 대학을 나온 여섯 명을 모아 하태환 선생이 상업학교를 세웠지. 창설 멤버가 6인이야. 다 돌아가시고 한 사람만 살아 있어. 강만철 씨라고 올해 아흔아홉이지. 이분이 스물세 살에 일본 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나중에 초대 도의원을 지냈어. 내 담임이었는데 지금도 가끔 나랑 대화하지. 나는 3월에 입학해 그해 9월에 학적 변경 때문에 2학년이 되었어. 9월 학기제가 3월로 바뀐 게 30년 정도밖에 안 돼.안 : 당시 학창 생활은 어떠했는지요?이 : 힘들었지. 대구 상업학교는 형편이 좋아서 주산도 배우고 전표도 배웠는데, 우리는 실습 용구를 살 형편이 안 됐어. 남들 책을 얻어서 보고, 주판 살 형편이 안 돼 빌려서 썼지. 주판이 꽤 값이 나갔어. 당시에는 상업학교에 많이 진학했어. 상업학교라도 나와야 면서기를 한다고 말이지. 인문계는 관직으로 가고, 상업학교는 은행을 비롯해 경제 쪽으로 갔지. 하태환 선생이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상업학교를 빨리 세운 거야. 이석수 선생.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6-27

“포항에 전국을 제패한 씨름장사가 있었어”

구순을 바라보는 원로와 장시간의 인터뷰가 가능할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자마자 염려는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골격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고, 목소리는 또렷한 중저음이었다. 그는 유강에 사무실을 마련해놓고 지인들과 교류하거나 지역 현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그의 삶을 압축해놓은 듯했다. 넓은 책상과 응접탁자 위에 수십 권의 책과 서류, 메모지로 가득한 것이 노학자의 서재를 보는 듯했다. 그가 악수를 청했는데 악력이 그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그렇게 이석수 선생과 만났다. 안준우(이하 안) : 젊었을 때 힘깨나 썼을 것 같습니다.이석수(이하 이) : 젊은 날에 씨름을 좀 했는데, 처갓집에 소 여러 마리 갖다 줬지.안 : 그 정도면 거의 선수였겠습니다.이 : 선수 생활도 좀 했다. 당시엔 씨름대회가 많았지. 단오, 칠석, 명절 때는 전국 곳곳에서 대회가 열렸어.안 : 포항에서도 씨름대회가 자주 열렸는지요?이 : 포항은 씨름이 센 곳이라서 크고 작은 대회가 자주 열렸어. 기억에 남는 큰 대회는 포항경찰서 건립 기공식 때 열린 대회야. 1953년인가 이듬해인가, 그즈음에 기공식 기념으로 전국씨름대회를 했고 내가 3등을 했지.안 : 전국대회 3등이면 대단했겠습니다. 씨름으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또 있었나요?이 : 포항고 6회 졸업생 박두진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나중에는 씨름협회 회장도 했지. 동지중학교는 경북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어. 동지상고 교사로 씨름을 가르친 김종태라는 사람도 있어. 고향이 영천 금오인데, 힘이 장사라 금오장군이라 불렀지. 동전을 손가락으로 구부릴 정도로 힘이 셌어. 그런데 이북에 몇 번 갔다 온 걸로 알려졌고, 구속되어 결국 사형을 당했지. 다행히 제자나 아는 사람은 포섭하지 않았어. 이북에 그이 이름을 딴 김종태 도로가 있다고 하지.1968년 1월 한반도에 긴장감이 고조된다. 1월 21일 북한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고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터졌고, 이틀 후에는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에서 북한에 나포됐다.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대규모 공안 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한다. 김종태는 이 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된 인물로 1969년 그의 조카 김질락 등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북한은 1961년 9월 1일 개교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의 사형 집행 직후인 1969년 7월 12일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칭했고, 1990년 10월 ‘김종태대학’으로 개칭했다. 또한 ‘평양전기기관차공장’을 김종태의 이름을 따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로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김종태를 얼마나 예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안 :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이 : 1940년에 국민학교에 갔는데 우리 때부터 입학시험을 쳤어. 구술시험이지. 이때부터 한글을 쓸 수 없었어. 1939년까지는 한글이 있었는데, 조선어라고 해서 초등학교에서 일본 말을 가르쳤어. 우리가 입학하던 해부터 한글은 전혀 못 썼어. 학교에서 우리말을 하면 벌금을 내야 했지.안 : 태어난 곳은 유강인데 국민학교는 어딜 다녔는지요?이 : 연일국민학교를 다녔지. 공부를 가장 잘하는 데가 연일국민학교였어. 여기 떨어지면 포항국민학교에 가야 해. 그때는 포항국민학교가 아니라 영일국민학교라 했지. 어떤 지역에 학교가 필요하면 일본 사람이 학교명을 그 지역명으로 세웠지. 포항국민학교, 구룡포국민학교, 그게 전부 일본 사람 거라. 우리가 세운 학교는 그때 포항에 아마 두 개 있었을 거야. 창주국민학교라고 있었는데 그게 우리 거야. 안강국민학교는 일본이 만든 것이고, 안강제일국민학교는 우리가 세운 거지. 우리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남부국민학교가 생겼어. 그때는 포항 제2영일국민학교라 했지.안 : 구술시험은 어떤 식이었는지요?이 : 일본 말로 물었지. 국민학생이니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지. 차렷은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는 일본 말로 무엇이냐, 이런 걸 물었지. 남부국민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연일국민학교 시험 쳐서 떨어지면 영일국민학교, 영일국민학교 떨어지면 양동국민학교로 가야 했어. 참 멀었지. 나중에 포항국민학교가 커졌어. 용흥동 포항의료원 근처에 교회가 있잖아. 그게 우리 어렸을 때 형산면사무소야. 우리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국민학교가 아니고 보통학교라 했지. 중학교는 고등보통학교. 1940년부터 학제가 바뀌는 바람에 많이 달라졌지.안 : 연일국민학교까지는 꽤 멀었겠습니다.이 : 우리 집에서 3.5㎞쯤 됐을 거야. 효자에서 넘어가는 다리는 없었고 잠수교가 있었지. 잠수교가 없어진 지 얼마 안 돼. 포스코가 들어오고 난 뒤에 없어졌지. 잠수교는 비가 오면 물이 이만큼 차서 못 건너가. 비 오는 날이면 학교 가려고 새벽 일찍 밥을 먹어도 큰 다리로 돌아서 갔어. 그 다리를 섬안 다리라 했는데, 현재의 섬안 다리는 아니야. 해도를 그때는 섬안이라 했지. 섬의 안이란 뜻인데, 해도, 상도, 죽도를 섬안이라 했어.안 : 그때는 그 지역이 섬이었는지요?이 : 그렇지. 삼각주 식으로.안 : 과거 포항 지도를 보면 다섯 개 도(島)가 섬 안에 있더군요.이 : 지금 형산(兄山) 맞은편에 제산(弟山)이 있지. 굴 있는 쪽이 제산이고, 건너 형님 산이라고 해서 형산이라. 제산은 동생 산인 셈이지. 형산강 강물이 위에서 내려오면 형산 제산 협곡에 와서 제 맘대로 가지. 제방이 완료된 게 1930년쯤일 거야. 신작로를 만들면서 제방을 하잖아. 제방을 하기 전에는 물이 내려와서 한 시절은 북쪽으로 흐르고, 한 시절은 남쪽으로 흘렀지. 그러니 나중에는 섬이 생기는 거라. 삼각주지. 아무튼 비가 많이 오면 잠수교로 못 가. 비가 조금만 와도 잠겨. 3학년, 4학년 되면 학교 안 가는 아이들도 있지만 부지런한 아이들은 일찍이 가. 섬안 다리를 건너 대송국민학교를 거쳐 연일국민학교로 가지. 학교는 연일국민학교가 주였고, 부수적으로 4년제 학교가 오천, 동해, 대송국민학교야. 4년 마치고 5학년 되면 연일국민학교로 가야 했어. 오천 쪽에 연일국민학교 출신이 많지. 오천에서 연일까지 20리가 넘어. 수업하다가 비가 와서 강물이 넘친다 싶으면 강북 아이들은 빨리 집에 가라 그랬지.안 : 교사들은 어느 쪽 사람이었는지요?이 : 우리 쪽 일본 쪽 반반이었는데. 교장, 교감은 다 일본 사람들이지.안 : 어떤 과목을 배웠는지요?이 : 국어, 산수 같은 걸 배웠지. 그리고 수신(修身)이라고 굉장히 중요한 과목이 있었지.안 : 처음 들어보는 과목입니다.이 : 윤리, 도덕이지. 그 과목이 아주 중요했어. 아침에 학교 가면, 요즘으로 치면 일본 시를 외우는 식이었지. 그때 일본 사람들은 정신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어. 그래서 월요일 첫 수업은 어느 학교 할 것 없이 수신 시간이었지. 일제는 1941년 3월 교육령 일부를 개정해 ‘초등학교 규정’을 공포하고 종래 소학교라는 명칭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의미하는 것은 “동아 및 세계에서의 일본의 역사적 사명을 감안해 국민의 기초를 완수할 수 있는 교육체제를 확립”한다는 것으로, 바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국민을 양성해내는 교육이 목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개편에서 종래 선택과목으로나마 존속하고 있었던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해 조선어의 말살을 시도했다. 시행령을 살펴보면 1조 1항에서 국민학교의 교과는 국민과, 이수과, 체련과, 예능 및 작업과로 나누었으며, 2항에서 국민과는 수신, 국어, 국사 및 지리 과목으로 한다고 규정했다.안 : 일제강점기에는 국민학생들에게도 노역을 시켰습니다. 혹시 기억이 있는지요?이 : 4학년부터 상급반인데 근로소년단이란 것을 만들어 일을 시켰어. 연일국민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데리고 밭농사를 많이 했지. 여름에는 풀을 해서 퇴비를 많이 만들라는 거지. 학교 별로 시합도 붙였지. 운동장도 반 이상 갈아서 작물을 했어. 그래서 우리는 학교 갈 때마다 풀을 베어 말려서 가져갔지. 겨울에는 보리를 밟았어. 4학년부터는 완전히 일꾼 취급을 했어. 소나무를 치고 나면 진이 나오잖아. 그걸 꼬아서 기름을 만드는데, 포항에는 성모병원 올라가는 데 꼬는 곳이 있었어. 일본 말로 ‘소카이’ 기름공장이 거기야. 4학년부터는 소카이 따러 가고, 그다음에는 풀 베러 가고, 겨울에는 심지어 소똥 말린 걸 가져갔지.안 : 어린 학생들에게 그 정도 노역을 시켰다면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었겠습니다.이 : 집집마다 일주일에 며칠간 일하러 나오라, 부역하러 나오라 명령이 떨어졌지. 우리 집에는 한 달에 열 품이 떨어졌어. 열흘 나와서 일하라고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 집은 소하고 구루마(수레)하고 일꾼들하고 가서 사흘만 하면 됐지. 소도 한 대가리, 구루마도 한 대가리, 사람도 한 대가리. 그런 게 없는 사람들이 열흘 일할 때 우리 집은 사흘만 하면 됐어.안 :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는지요?이 : 우리 동네에는 서른 가구 남짓 살고 있었는데, 구루마 있는 집이 세 집 정도 됐어. 구루마 있는 집은 보통 일꾼이 두 명이야. 새끼 일꾼이라고 하지. 우리 집은 논이 많아서 일제 때 공출이 200가마쯤 됐어.안 : 강제징용 피해자는 어느 정도였는지요?이 : 포항은 징용 피해자가 다른 곳보다 적었어. 그 유명한 포도농장 덕분이지. 계속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이석수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조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2021-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