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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폐허에서 청보리처럼 푸르렀던 포항 여성의 기개

등록일 2021-07-13 18:14 게재일 2021-07-1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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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① 6·25전쟁 이후 포항 여성계와 포항여고 동문회 결성
김경희씨가 포항여성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

김경희 여사와의 첫 만남은 봄이 막 들어서려는 3월 초였다. 전화로 간단히 인사를 나눴을 때, 그의 나이를 잊어버릴 만큼 목소리에 생기가 넘쳤다. 장소를 섭외하다 시내 쪽이 괜찮겠다는 그의 말에 꿈틀로 내 청포도다방으로 약속을 잡았다. 1935년생 김경희를 만난다.

 

최미경(이하 최) : 포항 토박이라고 들었습니다.

김경희(이하 김) : 그렇다. 88년을 포항에서 살았고, 선조들을 되짚어 올라가면 600여 년을 포항에서 살았다. 뼛속까지 포항 사람인 셈이다.

최 : 격동의 시기, 아픔이 많은 시절을 겪으셨는데.

김 :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국민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학교에 뒤늦게 들어가 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나나 우리 부모 세대나 곡절 많은 세월을 견디고 살아왔다.

최 : 6·25 이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신지요?

김 : 중앙국민학교에 3785부대가 주둔해 있었고, 여성계에서는 변석화 씨가 활발하게 활동했다.

최 : 변석화라면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분을 말하는지요?

김 : 그렇다. 변석화 씨가 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한 군인들을 위해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위문 공연도 주선했고 주먹밥도 나눠주었다. 변석화 씨의 딸과 친구여서 우리는 함께 학교 운동장이나 강당 같은 데서 변석화 씨의 연설을 들었다. 사실 연설을 들었던 사람은 어른들이 아닌 우리 같은 아이들이었다. 강당 마룻바닥에 소복이 앉아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연설을 들으며 신나게 박수를 쳤다. 그 시절엔 여성이 앞에 나서는 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변석화 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시대를 앞서간 참 당찬 분이었다.

 

“6·25 이후 중앙국민학교에 군인들이 주둔했고, 여성계에는 변석화씨가 있었지.주부들과 연극·공연도 하고… 그런데 그 시절엔 여성이 나서는 걸 못마땅해 했지”

변석화는 1950년 국회의원 선거 출마 등 여성 권익에 앞장 선 포항여성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포항여고 출신 동문회를 만들려고 ‘서울신문’에 광고를 냈지.갑작스런 광고에 동문들이 올리가 없지. 그러다 하나둘, 스무명이 모여 결성됐지”

1947년 포항여자중·고등학교 총동창회가 열리고, 1964년에 동창회 전국 지부가 설치된다.

변석화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포항 최초의 전문의다. 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김두수와 결혼해 남편의 고향인 포항으로 왔다. 연설 솜씨가 뛰어났던 변석화는 높은 인기와 지지에도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낙선했다. 변석화는 산부인과 의사를 하면서 대한부인회 포항시 지부장(1946~1956)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김경희의 기억처럼 6·25전쟁 이후 포항에 주둔한 3785부대 상이군인과 헐벗은 군인들을 위해 가정주부들과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을 끌어와 연극과 합창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다. 김경희는 변석화를 여성 권익을 앞장서서 개척한, 포항여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최 : 당시 여성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기엔 사회 분위기가 녹록지 않았지요?

김 : 딸은 학교에 잘 안 보냈다. 그래서 학교에 보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실 집안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주전부리를 할 거리가 없어서 껌을 씹고 나면 꼭 기둥에 붙여놓았다가 다시 씹곤 했다. 대부분 형편이 어려울 때라 겨울이 오면 교실 안에 난로를 지폈는데, 석탄은 비싸서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주말에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 솔방울을 따서 석탄 대신 뗐다. 봄에는 쑥떡으로 점심 끼니를 대신한 적도 숱했다.

최 : 포항에서 다닌 학교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김 : 누가 포항 토박이 아니라고 학교에 모두 ‘포항’이 들어간다.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포항여중과 포항여고가 분리되지 않았고, 포항여고도 4년제, 5년제, 6년제 이렇게 달랐다. 그래서 나는 원래 10회 졸업생인데 12회 졸업으로 되어있다.

 

포항여자중학교와 포항여고는 1939년 3월 13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213호로 포항고등여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43년 제1회 졸업식에서 첫 졸업생으로 51명을 배출하였고, 해방 이후 1946년 포항여자중학교로 교명을 개칭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휴교했고, 그해 8월 14일 폭격으로 학교 건물이 무너졌다. 1951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학제가 변경돼 포항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이 다시 개칭되면서 다음 해인 1952년 3월 31일 포항여중 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최 : 학창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김 :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활달했다.

최 : 한흑구 선생의 부인인 방정분 여사가 교편을 잡고 있지 않았나요?

김 : 방정분 선생님은 아주 당차고 활기찼다. 이화여전 출신으로 포항여중과 포항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얼마나 허물없이 대했는지 거의 매일 한흑구 선생님 댁에 놀러갔다. 한흑구 선생님이 나를 보고 “경희야, 경희야.” 불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필 ‘보리’를 쓴 한흑구 선생님은 포항 문학계에서는 놓칠 수 없는 분이다. 방정분, 한흑구 두 선생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하게 되었고, 내게 예술적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 : 이력을 살펴보니 포항여고 졸업 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셨던데.

김 : 공부를 잘하기보다는 그림을 잘 그렸기에 서울대 미대에 갔지만 졸업은 못 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자취할 때 숯불을 피웠는데 그게 몸을 망가뜨렸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나를 보고 부모님이 학업을 중단하라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1년을 못 버티고 포항으로 돌아왔다.

최 : 모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셨지요?

김 : 1950년대 중반에는 미술이나 음악 교과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수학을 가르치는 분이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고, 도덕 선생님이 음악 수업을 맡기도 했다. 당시 포항을 통틀어 피아노가 있는 학교는 포항여고 딱 한 군데였다. 학생들에게 예능 교과 수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교장의 부탁으로 처음에는 특별 교사로 미술을 가르쳤다. 미술사를 가르쳤고 실기도 함께했다. 딱히 교과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내가 전부 만들어 썼다. 세계 명화 같은 것을 오려서 칠판에 붙여놓고 따라 그리기도 하고 물감으로 칠도 했다. 그렇게 2년 동안 포항여고에 있으면서 미술대학에 보낸 학생도 있다. 그리고 포항여고 교장이 김천여고로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도 2년간 학생들에게 미술 전임 교사로 수업을 이어갔다. 그러다 결혼하면서 교직을 그만두었다.

최 : 남편의 고향이 포항이 아닌 걸로 들었습니다만.

김 : 목포 출신이다. 나만 보고 포항에 왔고, 나로 인해 포항에 정착했다. 남편의 외조가 아니었다면 이후 포항에서 활동했던 많은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최 : 포항여고 동문회에서 중심축 역할을 하셨다지요.

김 : 내가 나서기 전에 포항여고 동문회를 만들려고 선배들이 노력했다. 하지만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일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포항여고 1회 졸업생 출신 손정식 선배가 나를 불렀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포항여고 출신들을 만나 동문회를 만들어야겠으니 네가 나를 좀 도와야겠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겁이 없었다. 아니면 무모했던가. 손정식 선배와 7회 졸업생 배순자 선배, 나 이렇게 셋이 모여 무작정 서울로 갔다. 그리고 ‘서울신문’에 광고를 냈다. 포항여고 출신들은 오후 2시까지 비원(祕苑, 창덕궁 후원)으로 모이라는. 그런데 생각해봐라. 갑작스레 신문에 광고 한 줄 냈다고 동문들이 올 리 있겠는가. 셋이서 한참을 앉아 동문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배가 너무 고팠다. 배순자 선배가 소주 한 병에 오징어 한 마리를 사 왔다. 셋이서 오징어를 뜯어 먹고 있는데 하나둘 선배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서울에 있던 포항여고 동문들이 스무 명 가까이 비원에 모였다. 동문회를 조직한다니까 선후배들이 흥이 나서 저녁도 먹고 나이트클럽에도 갔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얼른 숙소로 가야 하는데 배순자 선배가 춤이 좋아서 무대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손정식 선배가 내게 배순자를 데리고 나오라고 해서 수십 명이 춤을 추고 있던 무대에 용감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배순자, 어디 있노! 배순자!”라고 큰 소리를 치며 무대를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서울 지부가 성공적으로 결성된 멋진 밤이었다.

포항여고 동창회 창립 기념(1946년 8월 24일·사진 위). 포항여고 신축 공사.  /포항여고 총동창회 제공
포항여고 동창회 창립 기념(1946년 8월 24일·사진 위). 포항여고 신축 공사. /포항여고 총동창회 제공

최 : 서울 말고 다른 지역에도 동문회가 결성되었는지요?

김 : 그 후에 부산과 대구도 갔다. 부산에서는 동래관광호텔에 모였는데, 사람이 모여 있으면 우선 재미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무대에 올라갔다. 그래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온갖 광대 짓을 했다. 대구 지부는 경산에서 했는데 온천에서 모였다. 그렇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포항여고 출신들을 하나로 묶었다. 외따로 나와 있을 때는 힘을 받지 못하지만 하나로 합쳐지자 포항여고 동문회가 포항의 여성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포항여고 개교 80주년을 기념해 2019년 발간된 ‘연원 80년사’를 보면, 1947년 포항여자중·고등학교 총동창회 창립총회가 개최되며, 초대 회장으로 1회 최복순이 선출된다. 1954년 8월 제2차 정기총회가 개최돼 1회 손정식이 2대 회장으로 선출되며, 1964년에 동창회 전국 지부가 설치된다. 이 내용은 1964년 동창회 전국 지부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김경희

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진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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