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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읍을 시로 승격시키고, 호리못을 만들어

등록일 2023-10-22 16:56 게재일 2023-10-23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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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최승태 ③ 영일군수, 국회의원 시절의 업적
호리못(용연지) 공사 현장에서. 불도저는 부산에서 온 것이다(1953).

최원수 선생은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되어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끈 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영일군 갑구)에서 당선된다. 군수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합쳐 5년 3개월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공직 생활을 했는데, 그마저도 전쟁 때문에 온전한 의정 활동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하지만 그가 해낸 굵직한 일을 살펴보면 진정한 지도자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영일군수의 위상은 대단했어. 경상북도 시장·군수 회의에 가면 큰 목소리를 낼 정도였지. 영일군이 농지가 넓고 어획량이 많았거든. 그리고 군수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컸어. 영일군에 포항읍과 구룡포읍 2개 읍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포항읍을 시로 승격한 것은 큰 의미가 있지.

1950년 5월 30일 국회의원 당선 직후 전쟁이 터졌어.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 기반의 경제였잖아. 사람들이 먹고살려면 농사가 잘돼야 하고 농사가 잘되려면 농업용수를 확보해야 했지. 하지만 그때 농지는 대부분 천수답이었어. 그래서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막대한 예산을 끌어와 용연지를 만든 거야. 그 덕분에 흥해의 경작 면적이 영일군 전체의 40% 가까이 된 걸로 기억해. 흥해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공적비를 세워주었지.

김도형(이하 김) : 당시 영일군수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최승태(이하 최) : 경상북도 시장·군수 회의에 가면 큰 목소리를 낼 정도로 대단했지. 영일군이 농지가 넓고 어획량이 많았거든. 그리고 군수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컸어. 경찰서장이 아버지를 깍듯이 모셨지. 경찰서 정보과의 힘이 셌는데 정보2계 담당이 거의 매일 아버지를 찾아와 동향 보고를 했어.

 

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업적이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최 : 영일군에 포항읍과 구룡포읍 2개 읍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포항읍을 시로 승격한 것은 큰 의미가 있지. 사실 당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될 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야. 하지만 아버지가 워낙에 열정적으로 시 승격을 추진했고, 정부 인맥도 좋아서 시로 승격되었던 것 같아.

 

포항시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영일군의 광복 당시 행정구역은 포항읍을 포함해 2읍 13면 1출장소 237정동리(町洞里)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까지도 경북의 1부, 22군, 11읍, 240면이 1943년 10월 행정구역과 같은 수로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영일군의 경우도 정부 수립 때까지 읍면의 수는 변동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포항읍은 1949년 8월 14일 포항부로 승격되어 영일군에서 분리되었고 8월 15일 ‘지방자치법’ 법률 제32호에 의해 포항시로 개칭되었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2010, 165∼166쪽 참조>

 

포항 흥해읍 신광면 용연지에 있는 최원수의 공적비.
포항 흥해읍 신광면 용연지에 있는 최원수의 공적비.

다음의 일화는 최원수 영일군수의 안목과 추진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포항시 승격 추진 운동을 전개하여 이일우, 박동주, 박일천 등과 시 승격 진정차 상경하니 내무부 어느 국장이 농담조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되면 영일군수의 산하에서 이탈 행정구역이 독립되는데, 군수가 솔선하여 시 승격 운동을 하러 상경해 진정하는 예(例)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최 군수는 앞장서서 진정을 하러 다닙니까” 하고 물으니 최원수 군수가 “내가 백 년 동안 영일군수로 있는 것도 아닌데 영일군의 발전보다 포항이 시가 되어 번영하는 것이 국가백년지대계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1987, 879∼880쪽>

 

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지요?

최 : 아버지는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셨지. 특별한 연회 외에는 외식을 거의 하지 않았어. 할아버지처럼 아버지도 원칙주의자였지. 그리고 영일군 공무원들이 탄복할 정도로 글씨체가 좋았어.

 

김 : 최원수 선생은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영일군 갑구에 출마해 당선됩니다. 그 직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극도의 혼란 속에서 의정 활동을 하게 됩니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최 : 우선 흥해 신광에 있는 포항에서 가장 큰 저수지 용연지(龍淵池, 호리못)를 만든 것을 꼽을 수 있겠지.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 기반의 경제였잖아. 사람들이 먹고살려면 농사가 잘돼야 하고 농사가 잘되려면 농업용수를 확보해야 했지. 하지만 당시 농지는 대부분 천수답이었어. 그래서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농림부에서 막대한 예산을 끌어와 용연지를 만든 거야. 그 덕분에 흥해의 경작 면적이 영일군 전체 경작 면적의 40% 가까이 된 걸로 기억해. 흥해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공적비를 세워주었지.

 

용연지는 1952년 8월 15일 착공해 1961년 12월 30일 준공되었다. 저수량은 657만t이며, 용수로는 2만 8천368m에 이른다. 공적비는 1990년에 세워졌으며 “흥해읍 매산리 외 52개 마을 농민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다.

 

김 : 전쟁 중에 대규모의 저수지를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최 : 오죽했겠어. 그 정도 공사를 하려면 불도저가 있어야 했지만 당시 포항에는 한 대도 없었어. 부산에서 불도저를 갖고 와 공사를 했지.

 

김 : 최원수 선생의 이력을 보면 학교를 몇 군데 설립한 게 눈에 띕니다.

최 : 해아중학교(현 청하중학교)와 죽장중학교, 기계중학교 세 곳을 설립했지. 아버지는 지역과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학교 설립에 앞장섰지.

 

해아중학교(현 청하중) 공사 현장에서 최원수 의원(6·25 전쟁 직후).
해아중학교(현 청하중) 공사 현장에서 최원수 의원(6·25 전쟁 직후).

김 : 학교를 세우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최원수 선생은 어떻게 짧은 기간에 학교 세 곳을 세우셨는지 궁금하군요.

최 : 아버지는 학교를 하루빨리 개교하는 게 중요하니까 문교부에 일단 학교 설립 인가부터 내달라고 요청했지. 그뿐 아니라 동지중·고등학교가 설립 인가를 받는 과정은 물론 학교 건물을 지을 때 미군 부대에서 자재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도 아버지가 큰 도움을 주셨어. 동지교육재단의 설립자인 하태환씨가 아버지와 외사촌이라는 인연도 있었지.

 

김 : 최원수 선생은 용연지를 조성해 경제적 기반을 다졌고, 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쓰셨군요.

최 : 그렇지. 나라와 지역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려면 경제와 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어.

 

김 : 그 밖에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요?

최 : 6·25 전쟁이 터지고 보도연맹 사건이 있었잖아. 트럭에 실려가던 억울한 보도연맹원들을 아버지가 여럿 구해냈어. 좌익으로 찍히면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억울한 좌익 연루자를 여러 명 살려냈지.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빨치산이 포항에서도 암약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죽장이야. 죽장은 산악지대와 연결되면서 민가도 있으니까 궁지에 몰린 빨치산이 식량을 거둬가기에 좋은 곳이었지. 국군과 경찰로서는 죽장이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어. 그때 그 유명한 경찰 김종원이 죽장을 소개(疏開)하려고 하자 아버지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울 일이 있냐며 강력하게 반대했어. 죽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김종원과 대판 싸웠지. 아버지는 당시 비호(飛虎)라고 불리던 김동헌을 경찰지서장으로 투입해 양민은 보호하면서 빨치산을 제압했어. 아버지가 그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죽장에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지 몰라. 죽장 사람들이 아버지가 죽장을 살렸다며 공덕비를 세워주었지.

 

김종원(1922∼1964)은 광복 이후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경찰이다. 1951년 2월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이 발생하자 3월 29일 국회의원 신중목이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4월 7일 합동진상조사단이 거창군 신원면으로 가던 도중,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부하들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합동조사단에 공포를 쏘아 현장 접근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실행했음을 밝혀냈다. 김종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뒤 군에 복직과 동시에 파면 뒤 경찰로 이직했다. 1952년 7월 전북경찰국장을 시작으로 경북경찰국장 등을 거친 뒤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 등을 역임했다. 치안국장 재직 시절에는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의 배후로 밝혀져 파면된 뒤 구속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최승태

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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