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최승태 ④ 1950년대 초의 정치적 혼란과 시련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굵직한 성과를 내면서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1950년대 초의 혼란한 정치 상황은 그의 정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맡았던 이승만과 이범석의 관계가 벌어지며 최원수 선생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범석이 광복 직후에 족청(族靑,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해서 이끌었는데, 이승만이 이범석을 경계하면서 1953년에 족청계를 숙청하지. 그 바람에 이범석과 가까웠던 아버지도 화를 입게 된 거야. 공천을 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1954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 당시 선거는 정상적인 선거라고 하기 힘들었어. 불법이 난무했지. 자유당 공천을 받아야 당선될 수 있었어.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는 그때부터 기울어버린 거야.
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 곁의 여러 정치인 중에 박일천 포항시장이 있습니다.
최승태(이하 최) : 박일천 시장은 아버지가 마음 깊이 믿었던 분이지. 그분이 시장에 당선된 1952년 선거는 아주 치열했어. 시의원이 선출한 포항 최초의 민선 시장이라는 역사성도 있었고.
김 : 시장 선거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습니까?
최 : 시의원 20명이 시장을 선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지. 영일 갑구 국회의원인 아버지와 포항시 국회의원인 김판석의 힘이 크게 작용했어. 시장 선거를 앞두고 매일 우리 집에서 대책 회의를 했지. 뚜껑을 열어보니 박일천이 11명, 상대 후보는 9명을 확보했어. 아슬아슬했지. 이를 두고 시중에서는 ‘11파, 9파’라고 했어.
김 : 다시 최원수 선생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954년 5월 20일 총선거에서 정당 공천제가 처음 시행됩니다. 이 선거에서 최원수 선생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자유당 공천을 받은 박순석 후보에게 패합니다. 이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시지요.
최 : 이범석이 광복 직후에 족청(族靑,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해서 이끌었는데, 이승만이 이범석을 경계하면서 1953년에 족청계를 숙청하지. 그 바람에 이범석과 가까웠던 아버지도 화를 입게 된 거야. 사실 아버지는 의정 활동을 잘했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계속할 거라고 했어. 결국 공천을 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1954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 당시 선거는 정상적인 선거라고 하기 힘들었어. 불법이 난무했지. 자유당 공천을 받아야 당선될 수 있었어.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는 그때부터 기울어버린 거야.
조선민족청년단은 1946년 10월에 미군정의 전면적인 후원을 받으며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이다. 비정치, 비군사, 비종파를 내세우며 10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을 조직했다. 사상적으로는 민족 지상, 국가 지상을 내걸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편 좌익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1948년 11월부터 이승만의 지시로 청년단체 통합이 추진되어 새로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해산 뒤에도 족청 출신들은 ‘족청계’라고 불리는 세력을 형성해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1953년 12월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이들이 자유당에서 제명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김 : 이범석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자유당에서 축출되자 이범석과 가까웠던 최원수 선생의 정치 인생에도 암운이 드리우는군요.
최 : 그런 셈이지. 이승만이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한 후 아버지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어. 하지만, 그 후로 이승만과 자유당도 몰락의 길을 가게 되지.
김 : 만약 최원수 선생이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했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요?
최 : 포항과 흥해 사이에 있는 소티재를 편평하게 해서 포항과 흥해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게 아버지의 꿈이었어.
김 : 그 일이 가능했다면 굉장히 큰 사업이었겠군요.
최 : 아버지는 큰 구상을 하시는 분이었으니까.
김 : 1954년 총선에서 이채로운 건 하태환이 포항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겁니다.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면 당선이 거의 힘든 상황에서 하태환의 당선은 이변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하태환은 최원수 선생의 외사촌 동생이라고 들었습니다.
최 : 그렇지. 하태환이 일본의 리쓰메이칸대학에 다닐 때나 동지교육재단을 세울 때 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었어. 1954년 총선은 불법이 난무해서 시민들의 불만이 높았지. 다리 한쪽이 불편했던 하태환은 지프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 지프차가 동빈내항에 빠져버리는 사건이 있었어. 장안에 화제가 된 그 사건으로 하태환한테 동정표가 많이 갔을 거야. 그 선거에서도 아버지가 하태환을 많이 도왔지.
하태환(1913∼1991)은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아 재선 의원이 된다(하태환에 관한 이야기는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1’(2021)에 실려 있다). 하태환과 함께 동지교육재단을 설립한 그의 처남 김병윤(1922∼2013)은 포항시장(1959∼1960, 간선)을 거쳐 1971년 제8대 총선(포항·울릉, 민주공화당)에서 당선된다.
김 : 최원수 선생은 그 후로 선거에서 잇달아 패하게 됩니다.
최 : 포항에서는 자유당과 공화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면 당선이 힘들었지. 아버지는 야당을 지키며 고생을 많이 하셨어.
김 : 정치를 하면서 다른 일도 하셨는지요?
최 : 사업을 계속하셨지. 광복 직후에는 포항신문사를 경영했고, 그 후에 대한조선, 덕수양조장, 동운여객, 미흥방직 등을 운영했어. 사업에 전념했다면 크게 성공했을 거야.
김 : 최원수 선생 곁에서 여러 정치인을 보셨을 텐데 기억이 남는 분이 있습니까?
최 : 박경석 의원은 동아일보 기자 시절부터 아버지가 아끼던 고향 후배였지. 박경석의 중매를 아버지가 섰어. 아버지가 유진산 신민당 총재에게 박경석을 잘 부탁드린다고 했고, 유진산이 장홍염 의원에게 박경석을 소개해 박경석과 장홍염 의원의 딸이 결혼하게 된 거야.
유진산(1905∼1974)은 7선의 거물 정치인이며, 장홍염(1910∼1990)은 전남 신안군 출신의 재선(제1, 2대) 국회의원이다. 박경석(1937∼2019)은 포항 송라면 지경리 출신으로 포항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동아일보 정치부장 등을 거쳤다. 1980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로 당선되었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정당 후보로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서 출마해 서종렬 민한당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김 : 박경석 의원의 친동생이 박경용 시인이지요?
최 : 박경용은 어릴 때부터 내 친구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同時) 당선되었으니 문학적으로 비범한 친구지. 박경석 의원이 모범생이고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박경용은 예술가 기질이 강했어. 박경석 의원이 한번은 나한테 “경용이가 머리는 나보다 좋다”고 하더군. 박경석 의원은 동생 경용이를 그렇게 아꼈어.
박경용(1940∼)은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을 거쳐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출생지인 송라(松羅)가 그의 아호다. 1958년 동아일보에 시조 ‘청자수병(靑瓷水甁)’, 한국일보에 동시 ‘풍경(風磬)’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시집 ‘어른에겐 어려운 시’, 시조선집 ‘적(寂)’, 시선집 ‘소리로 와서’ 등을 발간했으며, 세종문학상(1969)과 대한민국문학상(1984) 등을 수상했다. 포항에서 한흑구 선생이 주도한 흐름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 : 선생님 친구 가운데 떠오르는 분으로 또 누가 있는지요?
최 :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포항에서 출마한 변석화라는 여의사가 있어. 남편이 김두수라는 의사였지. 그분 차남이 김여탁이라고 내 친구야. 김여탁은 포항국민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MIT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어.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 개발을 할 때 대덕연구단지에 왔다가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바람에 난처한 처지가 되었지.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했어.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나하고 통화해. 여탁의 형 김여대는 대우중공업 부사장이었는데 우리나라가 동구권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가교 역할을 했어. 안종식이라는 친구도 빼놓을 수 없군. 청하 출신으로 포항수산고를 졸업하고 파독 광부로 갔다가 미국 LA에서 봉제업으로 크게 성공했지. LA에 있는 한국 교민들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마당발이기도 해. 포항시와 미국 롱비치(LongBeach)시가 자매결연할 때 이 친구가 다리를 놓았지.
최승태
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