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이승만 눈에 들어 영일군수에 발탁 … 이범석과 가까워

등록일 2023-10-18 18:08 게재일 2023-10-19 14면
스크랩버튼
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최승태 ② 1948년 정부 출범 후 영일군수 취임
1950년 5월 10일 경북도의원 선거에서 이무형(李武炯) 동지 당선을 축하하면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김익로, 세 번째 이무형, 네 번째 박일천,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하태환, 세 번째 최원수(1950. 5. 11. 보경사)

1948년 5월 10일에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는 인구 10만 명 기준의 1개 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였다. 전국 200개 의석 가운데 경상북도가 33개 의석을 차지했으며 영일군(현재 포항시에 해당)은 갑구·을구의 선거구에서 의원 2명을 선출했다.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 갑구에 출마했지만 박순석 목사에 밀려 낙선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돼 1950년 4월 20일까지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끌었다.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과 당시 포항의 정치, 사회 상황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아버지는 광복 후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일군지부장을 맡으면서 지역 우익의 구심이 됐어. 학력이 좋은 데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도 열성적으로 했으니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발탁했다고 보면 될 거야. 경북지역 시장·군수 중에 최연소였지.

일제강점기 때부터 포항에는 좌익이 많았어. 포항을 제2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좌익이 워낙에 득세하니 아버지는 세상이 사회주의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

광복 후 ‘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던 철기 이범석 장군과 가까이 지내셨지. 장군이 중화요리를 잘 먹었고 지식도 꽤 있어 관사에서 가끔 연회를 열 때마다 동순관 주방장에게 요리를 부탁했지.

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이 궁금하군요.

최승태(이하 최) : 아버지는 광복 후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일군지부장을 맡으면서 지역 우익의 구심이 되었지. 학력이 좋은 데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도 열성적으로 했으니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발탁했다고 보면 될 거야. 경북 지역의 시장·군수 중에 최연소였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1946년 2월 8일 서울에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 발족한 단체다. 발족 당시의 임원은 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 고문 김창숙·함태영·조만식 등이다. 전국의 시·도·군까지 조직을 확대하면서 국민운동 단체로서 방대한 조직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조직이 비대해지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 여러 계열의 파쟁으로 인해 발족 직후부터 간부 진영의 개편이 되풀이되었다. 이 단체는 후일 이승만 계열의 우익 국민운동 조직으로 변화하면서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하는 이승만 지지 세력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김 : 혹시 조부께서는 장남(최원수)이 가업을 이어받길 바라지 않았습니까?

최 : 할아버지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 실제로 아버지는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웬만한 한의사 못지않은 수준이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히 한의원을 하고 있을 분이 아니었지. 할아버지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분이었다면, 아버지는 세상의 병을 고치고 싶어 하셨던 분이었어.

 

김 :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 중 상당수가 좌익 활동을 했지요. 최원수 선생은 어떻게 우익 쪽에서 활동하게 되었나요?

최 : 일제강점기 때부터 포항에는 좌익이 많았어. 포항을 제2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한 예로, 일제강점기 때 영일군 경찰서장이 좌익이었는데 경찰서장이 죽자 좌익의 주도로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지. 좌익이 워낙에 득세하니 아버지는 세상이 사회주의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

 

김 : 당시에 좌익이 많았던 이유가 있을까요?

최 : 일제강점기부터 많은 지식인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는데 포항도 다를 바 없었지. 광복 후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사회주의가 확산되기 좋은 상황이었어. 대표적인 이슈가 토지개혁이었지. 남쪽에서 추진하던 토지개혁에 문제가 없지 않았거든. 사회주의 세력이 이걸 파고들었지.

 

김 : 혹시 포항 좌익의 거점 같은 게 있었는지요?

최 : 불종거리에 있던 수복여관, 죽도시장 앞에 있던 종로여관이 좌익의 아지트였어. 나중에 좌익 검거 바람이 불 때 종로여관의 주인이 일본으로 피신했지. 그 바람에 그 집 식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

 

김 : 좌우익 간의 갈등이 심했을 텐데 혹시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요?

최 : 아버지가 군수가 되기 전에 우리 집이 지금 북포항우체국 근처였어. 집에서 청년단체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곤 했는데, 어느 날 어른 머리만 한 큰 돌이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들어왔어. 아마 누가 그 돌을 맞았으면 중상을 입었을 거야. 다행히 방바닥에 돌이 떨어져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 그 자리에 있던 박일천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돌 던진 사람을 잡아왔는데,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라며 풀어주라고 했어.

 

약운(若雲) 박일천(1915∼1998)은 1952년 5월 시의원들이 간접선거로 선출한 포항 최초의 민선 시장이다. 시장 임기는 1952년 5월 5일부터 1953년 6월 30일까지 1년 2개월이었다. 최원수 선생의 신임이 각별했던 동지로 알려져 있다. 박일천은 광복 후 포항 지역 최초의 역사지인 ‘일월향지(日月鄕誌)’(1967)의 발간을 주도했고 포항종합제철 유치 운동, 포항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 등에 앞장섰다.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은 후일 포스텍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1982년 발족한 포항지역발전협의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1998년 작고 후에는 유족들이 유산 2억 원을 포스텍의 발전기금으로 기탁해 미담이 되었다.

 

김 : 그 후에도 선생님 댁이 좌익의 공격을 받았습니까?

최 : 아버지가 영일군수에 취임한 후 관사로 이사 갔어. 지금 포항세무서와 포은중앙도서관 중간에 있는 적산가옥이 군수 관사였지. 그 관사가 수도산에서 가까웠어. 좌익이 수도산에서 나팔을 불며 시위하면 어린 나조차 공포감에 휩싸였어. 그뿐 아니라 좌익이 관사 담벼락에 붉은색 표시를 해놓고 테러 표적으로 삼았지. 어머니는 항상 물을 팔팔 끓여놓고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했어. 좌익 쪽에서 갑자기 공격해 들어오면 끓인 물을 퍼부으려고 말이야. 당시에 우익 활동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지.

 

경상북도 시장·군수협의회. 2열 왼쪽에서 일곱 번째가 최원수 영일군수(1950. 2.)
경상북도 시장·군수협의회. 2열 왼쪽에서 일곱 번째가 최원수 영일군수(1950. 2.)

김 : 최원수 선생이 광복 후 가깝게 지낸 분 가운데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까?

최 : 아버지는 많은 사람과 친분이 있었는데 철기 이범석 장군과 특히 가까웠지.

철기(鐵驥) 이범석(1900∼1972)은 광복군 참모장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했으며 ‘국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1915년 여운형과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관 등을 맡았으며 1919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제2제대(第二梯隊)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에는 제2지대장으로 미국군과 합동작전에 참가했고 1945년에 광복군 참모장이 되었다. 1946년 6월 환국해 정부 수립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했다. 1951년 12월 이기붕 등과 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52년에는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53년 이승만의 족청계(族靑系, 조선민족청년단)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1967년 1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 회담을 성사시켜 통합 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김 : 이범석 장군과 최원수 선생 사이에 기억나는 일화가 있는지요?

최 :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 이범석 장군은 중화요리를 잘 먹었지. 아버지는 이범석 장군 덕분에 중화요리를 잘 먹었고 중화요리에 대한 지식도 꽤 있었어. 아버지가 영일군수 시절에 집이나 군수 관사에서 가끔 연회를 열었는데 그때마다 동순관(同順館, 중화요리 전문점)의 화교 주방장을 불러서 중화요리를 부탁했지. 동순관 주방장이 중화요리를 잘 만들었거든.

 

포항에서 처음 문을 연 중화요리 전문점은 화교가 운영했다. 제1호는 진가현, 강성모가 동업한 동순관으로 후일 부산각(富山閣, 진가현)과 길성관(吉星關, 강성모)으로 분가했고, 이와는 별개로 중흥관(中興關, 왕문옥)이 있었다. 부산각과 길성관, 중흥관이 포항 중화요리 전문점의 트로이카를 이룬 셈이다. 진가현과 강성모는 한국인 자매와 결혼해 동서지간이 되었다. 현재 중앙상가에 있는 길성관이 유일하게 그 맥을 잇고 있다.

 

최승태

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