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최승태 ⑤ 서실 운영과 ‘국민 천자문’ 발간
사회생활을 하면 누구나 은퇴하게 되는데 정치인도 예외일 수 없다.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물러나 어떤 일을 했으며, 무엇을 남겼을까? 그리고 그의 장남 최승태 선생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며 최승태 선생과의 대담을 마무리했다.
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최승태(이하 최) : 아버지는 동양 고전에 조예가 깊고 붓글씨를 잘 썼어.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였지. 아버지는 말년에 서울 장충동 쪽에 목운서실(木雲書室)을 열고 서예를 가르쳤어. 사실 그 서실은 정치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지. 유진산을 비롯해 고흥문 국회부의장, 유진오 고려대 총장, 권중돈 국방부장관 등 아버지와 친분이 깊은 분들이 드나들었어. 그리고 1977년에 ‘국민 천자문’을 냈지.
동양 고전에 조예가 깊고 붓글씨를 잘 썼던 아버지께서 말년에 서울에서 연 목운서실은 정치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지. 그러다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천자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1977년에 ‘국민 천자문’을 냈지. 그 책이 지금 딱 한 권 남았어.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분이고 아버지는 세상의 병을 고치려 한 분이지. 신념과 원칙을 중요하게 지키며 꿋꿋이 사신 아버지가 존경스러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포항에 오게 되었어.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의 사람들, 야당 사람들을 챙긴 거지. 한때 울진종합터미널을 운영했는데 1984년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천만인 서명운동때도 민주화운동에 동참했어.
지도자가 올바로 이끌어야 세상이 편안해지겠지. 앞으로 나라와 지역에 좋은 지도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김 : 처음 들어보는 책입니다.
최 : 쉽게 말해 아버지가 ‘천자문’을 직접 만들었어. 오랜 옛날 중국에서 만든 ‘천자문’은 우리 현실과 맞지 않으니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천자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야.
김 : 그 책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최 : 딱 한 권 남았어.
최승태 선생이 건네준 국배판형의 ‘국민 천자문’은 “천신음우(天神陰佑) 단조시기(壇祖始基)─ 하느님과 신령님이 음으로 도와서 단군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를 세우셨다”로 시작해 “사기동몽(使其童蒙) 서기편습(庶幾便習)─ 어린이와 초학자로 하여금 배움에 편리함이 있음을 바라는 바이다”로 끝이 난다.
저자 서문에서 최원수 선생이 이 책을 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국민 천자문’은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산업, 문화, 역사, 윤리 등 각 부문에 걸쳐 사자이행(四子二行) 팔자(八字)를 일구절(一句節)로 하고 국민 생활감정에 알맞게 뜻이 통하도록 하여 쉽고 빠르게 습득할 수 있고 이용가치가 많은 것으로 엮어 보았다. 우리 어린이나 초학자들이 이 책만 제대로 익히게 되더라도 붓글씨를 배움과 아울러 신문이나 잡지 등 한자가 섞인 여러 간행물을 용이하게 해독할 것이요, 각자의 인생관, 국가관이 은연중 확립될 것이며 민족정신의 함양과 나아가 민주국가의 공민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
유진오가 쓴 추천사에서는 최원수 선생의 성품과 서예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목운(木雲)은 해방 전후를 통하여 독립과 건국에 그의 청춘을 기울였고 건국 후에는 초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허다한 공적을 세운 것으로 믿고 있다. 원래 성품이 온아하면서 강직하여 권력을 멀리하고 오직 안빈낙도하는 청백한 기품으로 정계에서도 언제나 야측(野側)에서 시종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십수 년 전부터 정계를 물러나면서 고전의 연구와 함께 서예에 정진해온바 그 유려하면서 단정하고 웅휘하면서 자유자재한 필법은 이미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하겠고 역대 명필들의 진수를 두루 섭렵하면서 독창적인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김 : ‘국민 천자문’에 최원수 선생이 펼치고자 했던 뜻과 남기고 싶은 말씀이 담겼다고 봐도 되겠군요. 이제 최원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장남의 눈에 비친 부친은 어떤 분이었는지요?
최 : 앞서도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분이고 아버지는 세상의 병을 고치려 한 분이지. 아버지는 신념과 원칙을 중요하게 여겼던 분이고 그 때문에 말 못 할 고초를 겪었어. 비록 가슴에 품은 큰 뜻을 모두 펼치지 못했지만 신념을 지키며 꿋꿋이 사신 아버지가 존경스러워.
김 : 최원수 선생은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셨는지요?
최 : 지병이 악화되면서 1987년 초에 내가 살고 있던 울진으로 모셨지. 작고하신 후에 울진에 묘를 썼다가 2010년에 포항 죽도성당 추모관으로 옮겼어.
김 : 이제 최승태 선생님의 삶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군요.
최 : 내 인생이야 할 이야기가 특별히 있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포항에 오게 되었어. 포항에 있는 아버지의 동지들이 아버지의 정치적 기반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 아버지는 서울과 포항을 오가는 형편이었으니 포항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그런데 그 역할을 누가 하겠어. 장남인 내가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포항에 오게 되었어.
김 : 포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최 :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의 사람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야당 사람들을 챙긴 거지. 당시 야당 생활은 참 고달팠거든. 밤마다 그 사람들과 어울려 소주에 노가리를 씹으며 울분을 달랬지.
김 : 선생님도 고초를 많이 겪었겠군요.
최 : 오죽했겠어. 우리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경찰에서 일일이 확인했지. 내가 타지에 갔다 오면 정보과 형사들이 어디에 갔다 왔냐며 꼭 물었고.
김 : 그 과정에서 각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최 : 1983년에 YS가 단식할 때였어. YS가 민주화를 위해 결연한 각오로 목숨을 걸었지. 그런데 세상은 그런 엄중한 상황을 모르는 거야. YS의 최측근인 김덕룡 의원한테서 단식 상황을 적은 자료를 받아 포항 해도의 한일인쇄소에서 복사했지. A3 크기의 유인물을 포항과 영덕, 울진 곳곳에 뿌렸어. 그때 그 일을 김기철과 함께했지.
김 : 김기철 선생과는 언제 인연이 되었습니까?
최 : 1982년 겨울이었을 거야. 서울에 있는 김덕룡 의원한테서 전화가 왔어. 자신이 신뢰하는 김기철이라는 후배가 포항으로 가게 되니 잘 챙겨달라고 하더군. 그때 인연이 돼 지금까지 동고동락하고 있어.
김 : 김기철 선생과도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최 : 김기철은 1986년 6월에 결혼했어. 3선 포항시의원을 한 차동찬이 부인이야. 오거리 남도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는데 주례를 계훈제 선생이 맡았고 당시 유명한 야당 인사와 민주화운동 인사가 대거 왔었지. 그 바람에 전투경찰 2개 중대가 예식장 주변에 배치되었어. 결혼식을 마치고 계훈제 선생과 영일대해수욕장 횟집에서 식사를 함께한 기억이 나는군.
김 : 선생님께서는 울진에도 계셨지요?
최 : 한때 울진종합터미널을 운영했어. 울진에 있을 때 울진여고에 사격장을 지어주기도 했지.
김 : 울진에서도 민주화운동을 하셨습니까?
최 : 당연하지. 1984년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천만인 서명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열렸어. 안동에서도 그 대회가 열렸는데 울진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려면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야 했어. 그래서 냉동차에 20여 명을 태우고 울진에서 안동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없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중간에 내려서 숨을 돌리고 다시 안동으로 갔었지.
김 : 선생님의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요?
최 : 1남 3녀를 두었어. 아들 준석이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포항 해병대에 입대해 만기 제대했지. 그 후로 LA에서 사업하고 있는데 준석이 사업장은 포항 출신 미국 유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어.
김 : 선생님 가문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방을 마련해주셨군요. 이제 선생님과의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최 : 이제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아버지가 짧은 기간이나마 정치 지도자로서 이뤄낸 일의 의미는 결코 작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도자가 올바로 이끌어야 세상이 편안해지겠지. 앞으로 나라와 지역에 좋은 지도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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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태
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