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공 ④<br/>포항제철 입사 그리고 포항의 변화
포항제철은 포항을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건설 초기의 포항제철, 그리고 포항이 철강 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이대공 이사장은 그때의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냈다.
“사업으로 돈을 제법 벌었지만 선배들의 제의로 1969년 1월 포항제철에 입사했지.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사람들 대부분 건설현장서 일 했지. 외지인들도 몰리고…. 대통령이 관심을 가졌던 포항제철, 전 세계서 짧은시간에 성공한 제철소가 됐지. 조선·가전·자동차 등 철강관련 업체도 발전했고…. 포항과 나도 더불어 발전했지”
홍 : 포항제철 입지가 선정된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 : 친구 신명수[전 동방유량 회장]에게 찾아가 물었다. 제철 공장이 들어서면 뭐가 바뀌게 되는지를. 한 달 후에 신명수가 나를 불러서 “일본식으로 제철소가 성공하면 인구가 10배는 늘어날 것”이라고 하며 블록 공장을 해보라고 권했다. 재밌는 게 제철 공장은 블록이 아닌 강철판으로 짓는다. 제철, 압연, 후판 공장 모두 그렇다. 그런데 신명수는 제철소를 블록으로 짓는 줄 알고, 친구인 날 돕기 위해 블록 공장을 하라고 권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블록 공장은 하지 말라고 말을 바꿨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터질 일이다. 그는 구획정리 사업과 건축업도 권했다. 그즈음 포항에서 70만 평 구획정리 사업을 주도한 게 나다. 1968년 말쯤이다.
홍 : 그렇다면 사업을 하시다가 포항제철에 입사하셨군요.
이 : 제철소가 들어서는 걸 알게 된 후 언론이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곳에 살던 주민들의 불만도 있었다. 조상들이 농사짓던 논과 밭을 낮은 가격에 내놓기가 싫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언론을 상대할 사람, 대민(對民) 업무할 사람, 대관(對官) 업무할 사람이 필요했다. 포항제철 고준식 수석부사장이 김장섭 당시 국회의원에게 이런 일을 해줄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이다. 김장섭 의원의 추천으로 포항제철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당시 나는 월급쟁이보다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야구 배트 수출과 양송이 사업, 구획정리 사업으로 돈을 제법 벌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선배들의 추천과 제의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69년 1월 13일 포항제철에 입사했다.
홍 :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포항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됩니까?
이 :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고용부터 급격히 증대되었다. 건설 현장에서는 주로 포항 사람들이 일했다. 그들이 받는 일당도 적지 않았다. 음식점과 술집도 번창했다. 건설업체가 포항으로 많이 오게 되니 그 회사 직원들이 퇴근 후면 밥 먹고 술 마시며 지역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포항 시내가 와글와글할 때였다. 한국에 좋은 직장이 많이 없던 시기였기에 일자리를 찾아 외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홍 : 포항제철은 어떤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요?
이 : 박정희 대통령이 제철소를 살피러 포항에 11년 동안 13번 왔다. 대통령이 오면 경호를 위해 헬기가 3대 떴다. 어느 헬기에 대통령이 탔는지 알 수 없었다. 건설 과정에서 관계자 격려, 현장 확인을 위한 방문이었다. 시민들도 ‘대통령이 저렇게 큰 관심을 가지는 회사가 포항제철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포항제철처럼 짧은 기간에 성공한 제철소는 없다. 103만 톤으로 시작해 850만 톤, 광양을 포함하면 2,100만 톤까지 철강을 생산했으니. 지금은 4,000만 톤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수출입은행 원금을 다 갚고 벼락처럼 성장했다.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관련 업체도 동시에 발전했다. 1973년 이전엔 남한의 경제 상황이 북한보다 못했다. 1973년부터 남한이 앞서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가 포항제철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1973년은 포항제철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기 시작한 해다.
홍 : 1970년대 포항에 포항제철 외에 어떤 업체가 있었는지요?
이 : 농수산물 가공업체 정도였지 별게 없었다. 그땐 영일만에 설치된 정치망에서 정어리나 방어가 잡히던 시절이고 그게 산업이라면 산업이었다. 그 정도의 어촌이 포항제철의 등장으로 비약적, 압축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홍 : 포항제철 입사 초기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셨는지요?
이 : 한마디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마음이었다.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태도도 있었다. 1969년 1월에 입사하니 박태준 회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32평 목조건물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하듯 일하고 있었다. 내가 그 건물을 ‘롬멜 하우스’라 이름 지었고, 지금도 포스코역사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제철소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우향우(右向右)’해서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일하는 것이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이자 우리가 사는 길이라 믿었다. 그 믿음으로 세계적 강국이 되고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땀을 흘렸다. 포항 시민들도 제철소가 자신들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게 되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많은 사람이 포항제철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시 포항제철 작업복을 입고 시내에 나가면 누구나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포항제철 직원이 되길 원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포항제철 건설 초기의 현장 사무소인 ‘롬멜 하우스’를 2010년 3월 11일자 연합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포항제철이 창립됐던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영일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첫 현장 사무소의 별칭이다. 야전 사령부 역할을 하는 2층 목조건물이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무지에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허허벌판에서 세계적인 철강회사를 일궈낸 포항제철 정신의 상징이 된 롬멜 하우스는 포항 포스코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홍 : 포항제철 입사 후에 어떤 일을 맡았습니까?
이 : 4-2호봉 신입사원으로 발령이 났다. 서울까지 포함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포항 직원으로는 39번이었다. 홍보와 대민, 대언론, 대관청 업무를 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그때도 포항제철 관련 업체에서 일하는 이들이 수천 명이었다.
홍 : 1970년대에 경제발전과 함께 민주화와 인권 문제도 자주 거론됐지요.
이 : 우리 사회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있다. 똘똘 뭉쳐 일만 하다 보니 산업화 세력이 보지 못한 부분도 있다. 우리는 당시 정권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열정적으로 일했고 그만한 대우를 받았지만, 같은 시기에 고생한 민주화 세력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홍 : 직접 본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관계는 어땠나요?
이 : 1970년대 박태준 회장을 처음 인터뷰한 사람이 「조선일보」정태기[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기자다. 박 회장은 정 기자와의 인터뷰를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할 말은 제대로 하자’고 결심하고는 인터뷰에 응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후 언론계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많은 기자가 해직되었다. 이른바 ‘백지 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그즈음 민주화 세력이 고생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박태준 회장은 정태기 기자와의 인연을 귀하게 여겨 정 기자가 한겨레신문사로 갔을 때 포항제철 관련 업체를 주주로 참여하게 했다. ‘조선일보’ 사진부장 임희순 기자도 생각난다. 그는 내가 부장이던 시절에 포항제철로 옮겨와 많은 역사적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아름다운재단을 만들 때 박태준 회장이 집 판 돈 13억 6천만 원 중 10억 원을 기부했다. 이처럼 산업화 세력도 민주화 세력을 이해하려 했고, 인연도 맺었다.
홍 : 포항은 포항제철 건립으로 산업도시가 된 셈이네요.
이 : 포항은 포항제철의 성공과 더불어 발전한 도시다. 건설 당시에 강원산업과 현대 등 굴지의 업체가 다 관여했다. 대한민국 10대 건설업체는 대부분 포항에서 일거리를 얻었다. 포항제철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었던 시기가 1970년대다. 그 시절은 2년마다 공장을 확장했다. 고용과 생산량은 높아지고,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포항에 없던 호텔도 생겼다. 미국 ‘유에스 스틸(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은 1980년대에 이미 ‘유에스엑스(USX)’가 됐다. 철강에서 화학, 운송, 파이낸싱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언젠가는 철강의 가격경쟁력이 후진국을 못 따라갈 것을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다. 1970년대에 크게 성장한 포항제철도 이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홍 : 1970년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이 : 서울대 법대에서 나오는 월간지가 있다. 거기에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은행에 입사해서 한국은행 총재까지 한 사람이 ‘고시 콤플렉스’라는 글을 썼다. 한국은행 총재까지 했지만 사법시험에 떨어진 열패감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 글을 읽고 ‘나도 고시 콤플렉스를 평생 안고 살면 어쩌나’고민했다. 그런데 포항제철 제2고로가 만들어진 1976년에 고시 콤플렉스를 털어냈다. 내가 판사나 검사보다 훨씬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대공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