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수 ⑥<br/>포항 현대사의 거목, 그리고 영포목우회와 재경포항향우회
포항종합제철 건설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으로 있었으니 박태준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영포목우회와 재경포항향우회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인터뷰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박 회장에게 기합도 많이 받았지만, 그만큼 달려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그러더군.
의원 출마하실 때 일 좀 도와라고 하더군. 그래서 도와드렸지. 인연이란 그런 거야”
“부담때문에 모두 고사했던 향우회 회장 자리를 김창성씨가 흔쾌히 수락하는 거야.
그렇게 발족을 한후 지금도 매년 재경포항인 신년교례회를 광화문에서 하고 있어”
“변화가 없으면 인생은 녹슬어. 녹은 쇠에서 생기고, 녹이 오래되면 쇠 자체를 못 쓰지.
법정 스님 말처럼, 젊은 세대들은 항상 삶에 변화를 주고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 해”
안 : 포항 이야기를 하는데 박태준 회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 내가 포항제철 관련 일을 할 때 박태준 회장한테 행실이 안 좋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듣고 기합도 많이 받았지. 그분한테 대들었던 건 도로 문제 때문이었어. 포항제철 물동량이 포항 시내로 들어와서 경주 시내를 거쳐 고속도로로 가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지.
안 : 일리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여러 산업도로가 생겨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처음부터 도로에 좀 더 신경을 썼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이 : 내 생각대로 할 수 없었던 건 아마 공사비 때문이었을 거야. 당시에 도로가 포항을 관통하지 않고 연일을 거쳐 안강으로 붙이면 큰 트럭들이 포항 시내로는 안 들어가도 됐지. 그런데 포항 시내로 큰 트럭들이 오가면 매연 나오고 시끄러워서 문제가 된다고 내가 주장했거든. 그 때문에 네가 뭘 아느냐고 기합도 많이 받았지만, 나한테 그만큼 달려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나중에 그러더군. 내가 수많은 사람을 겪어봤지만 박태준 회장 같은 사람이 없어. 세월이 한참 흘러 박태준 회장이 일본에서 돌아와 포항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일 좀 도와라고 하더군. 그래서 3년 정도 도와드렸지. 인연이란 그런 거야.
안 : 1970년에 포항을 떠나 건설부에서 공직 생활을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포항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지만 포항에 관심과 애정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 포항에서 민원서류가 오면 나한테 많이 왔는데 온갖 민원이 다 밀려오는 거야. 박명재 전 국회의원이 총무처 인사과장을 맡고 있을 때 나도 과장이었는데 나이는 내가 많지. 박 의원에게 우리 지역 출신 서기관급 이상 명단 좀 달라고 하니 왜 그러냐고 물어. 그래서 민원서류가 이렇게 많다고 했지. 지역 출신이 여남은 명은 되더라고. 우리 집에 모여서 만든 게 영포목우회야. 조선 시대에 공무원을 목민관(牧民官)이라 했잖아. 영일군 포항시 목민관이라 해서 영포목우회라고 했는데, 박 의원이 지은 거야. 지역에서 민원서류가 오면 반포 근처의 우리 집에 모여 의논하기도 했어. 순수한 취지였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지. 그런데 이걸 정치적으로 몰아세우고 두들겨 팬 적이 있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안 : 영포목우회 외에도 재경포항향우회 설립에도 앞장섰다고 들었습니다.
이 : 향우회 회장은 목우회와 달리 거물을 앉히고 싶었지. 이름 있는 분이 향우회 회장을 맡아야 향우회에 힘이 실리고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으니까. 물론 재력이 좀 있기도 해야 되겠지. 몇 분을 접촉해보니 아무도 안 맡으려고 하는 거야. 사실 그 자리가 부담이 되긴 하지. 고민 끝에 김창성씨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수락하는 거야. 그분이 누구냐면 김용주 선생의 맏아들이야. 전남방직 회장을 했고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도 했지. 포항 출신 중에서 진짜 거물이야. 그렇게 김창성씨가 초대 회장을 맡고 최성해씨가 초대 총무를 맡아서 향우회 발족을 했지. 지금도 매년 재경포항인 신년교례회를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하고 있어.
안 : 건설부에 있는 동안 자료를 수집해 자비로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했다. 방대한 자료를 정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 건설부에서 다양한 근무를 했는데 가장 문제되는 곳이 국토계획국의 토지이용계획과장 자리야. 여기만 가면 모가지가 날아가. 국토를 공업지구, 농업지구 이렇게 지정하는데 돈 장난이 너무 심했지. 아무튼 내가 국회에서 근무한 후 이 자리로 갔는데 국토의 8%가 고시(告示)가 안 됐어. 미고시 지역을 검토해보니 그 지역마다 특성 있는 곳이 있는데, 그걸 중요하게 여겼지. 고시할 때 절이나 관광지가 있으면 손을 못 대도록 분류해. 이런 일을 하면서 땅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채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지. 내가 그 작업을 할 때 후임이 국토지리원으로 진급돼 갔어. 국토지리원에서 주요 명승지 등을 조사하는 일을 했지. 당시에 퇴직하면 자서전 쓰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 직원이 나한테 땅 지명 자서전을 만들라고 아이디어를 줬지.
안 : 그럼 포항 자료는 국토지리원의 도움을 받은 것인가요.
이 : 국토지리원에 포항을 중심으로 자료를 좀 뽑아달라고 해서 받은 게 180개쯤 돼. 그걸 바탕으로 1천 개 정도 정리했는데 너무 힘이 들더군. 2년쯤 하다가 포기했어. 그러다가 책상에 쌓인 자료를 보면 아쉬워지고. 하다가 버리고 또 하다가 버리고. 그 작업이 습관이 되어버렸지.
안 :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인생의 교훈이 있다면.
이 : 삶에 변화가 없으면 인생은 녹슬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녹은 쇠에서 생기는데, 녹이 오래되면 쇠 자체를 못 쓰게 만들지. 이건 법정 스님이 한 말인데, 항상 삶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고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 해. 책을 가까이하고 늘 배우는 자세로 임하면 언젠가는 그때 배운 것들이 인생에 큰 도움을 줄 때가 오는 법이야.
안 :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십시오.
이 : 앞에서 말했지만 1960년대에 나병 고치는 약을 만드는 대명제약에 1년 정도 다녔어. 대명환이라는 약을 지어서 원주를 중심으로 나환자(한센병)들에게 공급하는 구라(救癩) 사업을 하면서 나환자들을 많이 만났지. 나도 이 일을 하면서 사람이 많이 순해졌지. 그 경험 덕분에 건설부에 가서 큰 득을 본 적이 있어. 한강 북쪽 비행장 건너편 개발을 할 때 한쪽에 나환자촌이 있었어. 개발을 하려고 들어가니 나환자들이 농사도 짓고 공장도 지어서 세를 받으며 살고 있는 거야. 그곳을 철거하려니 나환자들이 가만있겠어? 들고 일어나 진행이 안 되는 거야. 건설부에서는 내가 책임자였고, 환경청, 보사부도 함께 갔지. 나환자를 만나 설득해야 하는데, 누가 나환자를 만나려고 하겠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서 차 한 잔 달라고 하니 나환자들이 깜짝 놀라는 거야. 나환자는 크게 네 부류로 나눠. 물집 같은 것이 툭툭 터지는 결절나, 겉보기에 멀쩡한데 아파 죽는 신경나, 이 두 가지가 혼합된 혼합나, 반점이 나는 반점나. 나는 딱 보면 알지. 내가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나환자 분류를 했어. 그러니 나환자들이 꼼짝 못 하고 일도 잘 풀렸지. 젊었을 때 힘든 일도 성심성의껏 하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법이야.
안 :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 포항은 특별한 곳이지. 까마귀를 보면 알아. 까마귀처럼 좋은 새가 없어. 까마귀는 효자 새야. 늙은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는 게 젊은 까마귀지. 일본은 까마귀가 길조인데 우리는 싫어해. 몽골 쪽에 기마민족이 살 때는 까마귀가 많았어. 그런데 과거에 몽골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바람에 까마귀를 질색하게 된 거야. 하지만 포항은 까마귀를 좋아해. 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 설화, 오천(烏川), 오도(烏島) 같은 지명에 까마귀 오(烏) 자가 들어가지. 전국에 까마귀 지명을 가진 곳이 몇 없어. 관선 시장 시절에 중앙에서 시화(市花)를 정하라고 할 때 그냥 장미가 되고 말았는데, 장미와 포항이 무슨 관계가 있나. 꽃에도 포항의 뜻을 담아야지. 해가 뜨고 지는 곳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 포항이잖아. 포항은 해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니 해바라기를 시화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인터뷰 내내 그는 기억을 더듬느라 애썼는데, 숫자와 연도에 관한 기억은 대부분 정확했다. 그만큼 과거의 일이 삶의 지문처럼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중간에 그의 휴대전화는 자주 울렸다.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거나 그를 아끼는 지인들 같았다. 그렇게 그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가 들려준 법정 스님의 말처럼 녹슬기를 거부하는 대못과 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았다. 2년 전 그는 미스터 경북 선발대회에서 최고령자로 참가했다. 사진 속의 단단한 그를 보면서 영화 ‘007 스카이 폴’에도 나온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가 떠올랐다. 짧았지만 인상 깊었고, 그래서 이 지면에 다 담지 못한 그의 이야기를 못내 아쉬워하며 대담을 마무리한다.
비록 우리의 힘이 옛날처럼 하늘과 땅을 뒤흔들 수는 없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우리다. 모두 하나같이 영웅의 기개를 가진 우리는, 시간과 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해졌다 하여도, 강력한 의지로 싸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겠도다.
이석수
1933년 경북 영일군 연일읍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포항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타지에서 목재상과 제약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다. 1963년 2월 오천면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건설부 소속으로 행정사무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행정서기관, 건설부 과장, 국장 등을 거쳐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다. 퇴직 후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로 일하다가 1995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이나 퇴직 후에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큰 일은 26년간 자료를 모아 자비로 ‘이석수의 포항 땅 이야기’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약 3천 꼭지의 포항 땅에 얽힌 이야기와 최신판 사진이 수록돼 있다. 대통령 근정포장(건설사업유공), 황조근정훈장 등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대담·정리 : 안준우(소설가)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