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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딸들을 위해 정계에 뛰어들어

등록일 2021-07-27 18:39 게재일 2021-07-28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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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⑤ 여성 예술계의 현실, 정계 진출 그리고 ‘포항여성사’ 발간
제3회 여성문화제 서예휘호대회. /사진 출처 : 포항여성사

과거 포항에서 주목받는 여성 예술인은 누가 있었을까. 또 어떤 이유로 여성의 정치 진출이 이루어졌을까. 지역 여성들의 활동상을 갈무리한 ‘포항여성사’는 어떻게 발간되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여성들의 활동 폭은 넓어지고 깊이도 더해진다. 김경희의 목소리에도 힘이 붙는다.

 

“80년대부터 문학·국악·음악·미술·서예 등 여성 예술인들의 활동이 활발했지. 여성 의사 반영·차별받지 않기 위해 1995년 지방자치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지”

여성단체를 무시했던 사회분위기에 맞섰던 김경희… 도의원에 당선되면서 새 지평을 연다.

 

“여성 권익신장·여성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추진 생활·경제·교육 등 각 분야별로 기록, 지역 여성들의 활동 모습을 하나로 묶었지”

정장식 포항시장과 각 분야별 편찬·집필위원의 지원으로 2001년 ‘포항여성사’가 발간됐다.

최 : 문화예술 쪽 얘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과거에 여성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니 그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아실 것 같습니다.

김 :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포항에 왔다. 그런 사정 때문에 예술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미술 교사를 했었기에 미술 교육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겠다. 미술 쪽은 비용이 많이 들어 학교 현장에서도 힘든 점이 있었다. 재료 살 돈이 없어서 목탄 대신 버드나무를 썼고, 비싼 유화 물감 대신 수채화를 지도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제자들이 열심히 해주어서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다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졌다. 참 고마울 뿐이다. 나와 동연배의 예술인들은 대부분 그러했을 것이다. 예술 각 분야에서 자신의 작업에 최선을 다하며 후배와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이끌어주었다.

최 : 다른 예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여성은 누가 있는지요?

김 : 재능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다. 다만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타 지역에서 포항으로 온 여성 예술인들도 설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시조 명창 김정미와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이다. 그리고 문인화를 하는 손성범도 있다.

시조 명창 김정미는 1978년 포항에 정착해 대한시우회 포항 지회에서 시조창을 가르치며 국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앞장선 국악인이다. 그의 열정 덕분에 포항에서 많은 명창이 배출될 수 있었다.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정채난은 김재출(동해안별신굿 김정희 이수자의 아버지이며 김석출의 동생)과 결혼해 포항으로 온 후 남편에게 소리와 춤을 배웠다.

최 : 포항여중, 포항여고 재학 시절에 방정분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지요. 방정분 선생의 역할이랄까,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김 : 방정분 선생은 이화여전 성악과를 졸업하고 1950년대 초부터 포항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당시 학생들은 음악이 낯설 정도로 음악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 그렇기에 방정분 선생이 학생들에게 미쳤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나 또한 그가 꾸려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배우며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951년 포항여고 교정에서 한흑구와 아내 방정분 여사.   /사진 제공 : 한동웅
1951년 포항여고 교정에서 한흑구와 아내 방정분 여사. /사진 제공 : 한동웅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포항 여성 예술인들의 활동이 뚜렷해졌다. 문학, 국악, 음악, 미술, 서예, 무용, 연극, 사진 등에서 여러 모임과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더 활성화된다.

최 : 정계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결단을 한 것 같은데.

김 : 지역에도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누군가는 깃발을 들어야 했다. 남성 정치인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거의 모든 정치적·사회적 현안은 남성 중심적 사고로 관철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여성의 의사가 반드시 반영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고, 주변 사람들과 상의 끝에 어렵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

최 :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신다면.

김 : 1995년 제2대 지방자치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비례대표 1번을 받아 당선되었다. 이때 도의회에 다섯 명의 여성이 진출했는데 모두 비례대표였다. 나는 교육사회복지위원회 소속으로 의정 활동을 했다. 경상북도 여성발전기금 조례, 여성정책개발원 설치 조례 제정 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최 :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도 앞장섰는데.

김 : 남녀차별금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기본임을 알기에 그걸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여성 중에서 여성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을 바로잡아주려고 애썼다. 결코 남성을 겨냥한 활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성단체가 일을 제대로 하려면 여성 공무원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이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 공무원 편에서 힘이 될 수 있는 일을 도왔다. 우리들의 딸과 그 딸의 딸들을 위해 그들이 차별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앞장섰다.

1960~1970년대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단체는 단체 취급도 하지 않던 사회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섰던 김경희. 자유당 말기 변석화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후 맥이 끊겼던 여성의 정계 진출은 김경희가 경상북도 의원에 당선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는 단순히 김경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여성사에 작지 않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여성문화제 바둑대회.
여성문화제 바둑대회.

최 : 2001년 ‘포항여성사’가 발간됩니다.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김 :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포항여성사’ 발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성의 권익 신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정장식 포항시장의 배려로 사업 계획이 확정되었고, 편찬위원과 집필진이 꾸려졌다. 여성에 대한 기록, 그것도 포항 여성에 대한 생활, 문화, 경제, 교육 등 다방면의 기록을 하나로 모으고 엮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추진했기에 가능했다.

2001년 2월 10일, ‘포항여성사’ 발간을 앞두고 여성사 내용에 대한 평가와 포항 여성의 과제 그리고 발전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김경희, 황복희, 김보미, 김귀현, 김조숙자 다섯 명의 여성이 모여 여성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어떤 부분을 더 채워나갈지를 살펴보며 여성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여성들만이 노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시사점을 얻었다. 그리고 여성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좀 더 활발하게 지역사회 발전에 응용할 수 있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하고, 또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최 : 다른 지역보다 여성사가 먼저 발간된 것은 포항 여성계의 저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 : 그렇게 볼 수 있다. ‘포항여성사’ 발간은 단순히 책 한 권을 내는 사업이 아니라 포항 여성의 역량을 역사적 맥락에서 점검하고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사업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련의 과정을 서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가. 각 분야별로 편찬위원과 집필위원이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1970년대 이전의 자료와 사진을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후대(後代)에 더 중요한 일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해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지역에서 여성들의 활동하는 모습을 하나로 묶어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큰 작업이었다.

김경희

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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