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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자원봉사자들의 에너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국민의 5대 의무 중에 자원봉사가 포함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 자원봉사자가 사회적 자본의 중심축이라고 하시는 분, 현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분, 교육, 워크숍, 회의는 전국 어디든 다니면서 출근은 칼같이 하시는 분. 자원봉사센터 직원들이 떠올리는 권순남 소장의 모습이다. 그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사진은 몇 장 없는 권순남 선생의 이야기를 정리해본다.최미경(이하 최) : 정말 많은 봉사활동을 하셨는데 사진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권순남(이하 권) : 어느 해 크리스마스였나. 성모자애원 아이들에게 선물을 들고 간 적이 있었어. 대개 아이들이 과자를 받으면 바로 먹기 바쁜데 자애원 아이들은 과자를 앞에 두고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지. 내가 한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과자 싫어해?”라고 묻자, “사진 찍고 먹어야 하잖아요”라고 대답하더군. 그때 ‘이 아이들은 누가 무엇을 가지고 와도 사진 먼저 찍어야 손을 댈 수 있다는 걸 배웠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내렸어. 나는 그 후로 되도록 사진을 남기지 않는 습관이 생겼지. 최 :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군요.권 : 한번은 보호관찰소의 한풍남 소장에게 연락이 왔어. 포항, 영덕, 울릉, 경주에 있는 1천800여 명의 보호관찰소 학생들을 상담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어. 각계 전문가들을 초청해 집단 상담이나 개인 상담을 하지만 재발 방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센터에 도움을 요청한 거야. 그 후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2개월간 정식 교육을 했지. 그렇게 수료한 60명의 청소년 상담원을 한 달에 한 번 보호관찰소 학생들과 1 대 1로 연결해 상담을 진행했어.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라고 당부했지. 소외된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안으라고. 그랬더니 상담원들은 아이들이 도망치면 잡으러 가고, 다시 오면 새벽까지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이들을 끌어당겼어. 아이들은 힘들고 외로울 때 잡아주고 사랑을 주면 반드시 변해. 그렇게 하면 다시 탈선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걸 나는 믿었지. 어렵게 청소년들을 선도해 나간 결과 청소년 재범률이 40% 이상 줄었고 전국으로 확산되었어.자원봉사활동을 진작시키려면 법에 근거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1990년대 초 자원봉사단체들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 하반기에 자원봉사 단체들과 전문가의 노력으로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가 발의한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이 2005년 6월 국회를 통과했고, 2006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신입 관리자 교육’, ‘자원봉사 바로 알기’, 김인하(성동구자원봉사센터소장), 2012.최 :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 10년 만에 제정되었군요.권 : 자원봉사의 범위와 기본적인 사항 그리고 개념을 확립하고 자원봉사자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지. 현장에서 활동하다가 다쳤을 때 그들의 인권을 보장해줄 법적인 안전망도 필요했어.최 :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권 : 2002년 전국 250개 센터의 중앙협회 회장직을 맡았어. 10년 동안 정치적인 문제로 자원봉사활동 기본법을 통과시켜주지 않자 2003년부터 직접 국회에 들어갔어. 이 법과 관련된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이틀이 멀다 않고 찾아갔고, 공청회도 했지. 그리고 2년 가까이 법 제정을 반대하는 기관, 단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원봉사센터는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고 민간이 투자한다는 설명을 했어. 자원봉사센터를 키워서 정치적인 목적에 쓰지 않겠다며 정치인들을 설득했고, 전국에 있는 자원봉사센터도 거기에 맞는 교육을 해야 했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 그때 교통비만 6천만 원 가까이 쓴 것 같아. 그렇게 국회를 들락거리니 한 의원이 왜 이렇게 국회에 자주 오냐고 물었어. 그래서 사정을 말하니 이상득 의원을 찾아가 보라고 하더군. 포항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새벽 4시인가 5시였어. 터미널에는 노숙자와 취객뿐이었지. 가장 환한 곳을 찾아보니 텔레비전 앞이었어. 의자에 앉아 이상득 의원에게 할 말을 정리하고 날이 밝자마자 국회로 갔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았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나왔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절실함 덕분인지 2005년 6월 기본법이 통과되었다고 연락이 왔지. 1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어. 전국에서 모인 자원봉사센터 소장들과 봉사자들이 박수 치고 만세 부르고 난리가 났지. 최 : 자원봉사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권 : 2007년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고야. 세계 해양과학자들이 바다를 다시 살리려면 15년은 걸린다고 했어. 그런데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이 기회만 있으면 태안으로 왔지. 바위 구멍에 고인 기름을 파내고 부직포로 기름을 걷어냈어. 전부가 한마음이었지. 그렇게 3년 만에 복구되었어. 전 세계가 놀랐지. 기적이었어. 그 기념으로 자원봉사 전국대회를 태안에서 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이 길을 선택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어. 솔직히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을 때, 오해와 억측에 시달렸을 때,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후회도 했어. 하지만 태풍 수해 현장, 대구 지하철 폭발사고 현장 등 숱한 재난 현장을 다니며 자원봉사자들의 에너지로 세상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최 : 20년간 자원봉사센터 소장으로 재직했는데,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일하신 비결이 있는지요?권 : 모든 사람에게는 장단점이 있어. 그런데 단점만 보면 같이 일할 수 없지. 나는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내 주목하고 그것을 살려 그들 스스로 일할 기회를 많이 주었어. 그렇게 신뢰를 쌓아갔지. 또 센터를 운영하면서도 끊임없이 배웠어. 어디든 배울 기회만 있으면 달려갔고. 그런 배움을 통해 젊은 사람들과 호흡하며 에너지를 얻었지.최 : 자원봉사의 발전을 위해 꼭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권 : 예전보다 자원봉사센터의 필요성과 인식에 대해 많이 개선되었지만 자원봉사센터 직원의 업무는 많고 처우는 열악해 여전히 어려운 점이 많아. 자원봉사센터 운영 지원 지침이 지켜지지 않는 지방자치단체도 많고, 때로는 지침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 이상으로 예산을 책정하기 어려워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정책과 정치적인 이유로 자원봉사센터의 거버넌스가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도 있어. 그래서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예산 비율을 일정하게 확보하여 지방자치단체가 센터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해.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자원봉사센터가 제대로 자리 잡고 지원받는 것이 필요하고.다섯 번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 권순남 선생의 휴대전화는 수시로 울렸다. 여든이 넘었는데도 찾는 이가 많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돕고 함께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마지막 인터뷰를 마칠 즈음에도 전화벨이 울렸다.최 : 선생님을 찾는 분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권 : 지금 전화한 이는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이상섭 국장이야. 주말에 비가 온다는데 예정된 프로그램을 바꾸는지 묻는군.최 : 무슨 프로그램인지요?권 : 자원봉사센터 초기부터 함께한 이들이 있어. 김현옥, 김영남, 안승화, 구자영, 유길준, 박윤애……. 자원봉사기본법의 중요성에 대해 밤낮없이 전국을 돌며 함께 고민하며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인데, 내가 퇴직하고 나서는 1년에 한 번씩 모여 여행을 해. 그게 이번 주말이라서 포항에 오기로 했는데 내가 운전을 하지 못하니까 이상섭 국장이 운전과 가이드를 맡기로 했어. 재작년에는 충남 보령에 있는 안성학 소장네에 놀러 갔었지. 나에겐 사람이 재산이야. 인연은 돈으로 살 수 없어. 모두가 마음으로 모이고 진심이야.최 :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혹시 지금 더 생각나는 분들이 있으신지요?권 : 20년 가까이 센터를 운영하면서 감사한 사람들이 참 많아. 매년 1월 1일 호미곶에서 떡국 나눔 행사를 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어. 200명 가까운 봉사자들이 전날부터 와서 떡국을 준비하는데 숙박할 곳이 없어. 그래서 대보초등학교 교실에 석유난로 두 개를 켜고 마룻바닥에서 쪽잠을 자. 그분들이 꼭두새벽부터 바람 찬 호미곶에서 달걀 프라이 3천 개를 지지고, 파를 썰어 1만 명의 떡국을 준비하지. 그분들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해 미안해.최 : 앞으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권 : 어떻게 하면 인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고민이야. 나를 내려놓고, 나를 지우는 것, 옷도 버리고 필요 없는 모든 걸 버리는 것. 그러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오랜 기간 나와 자원봉사활동을 한 소중한 이들과 함께 즐겁고 화사하게 죽음을 준비해보려고 궁리 중이야.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끝

2023-07-26

시민사회에 뿌리내리는 자원봉사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완벽해야 한다”는 게 권순남 선생의 소신이다. 미국 뉴욕에서 세계 자원봉사 지도자 워크숍이 열렸을 때 권 선생은 자비로 참여한다. 그 열정으로 숱한 시련을 극복하며 우리 사회에 자원봉사의 가치를 확산해 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최미경(최) : 1997년에 세계 자원봉사 지도자 워크숍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권순남(권) : 전 세계 자원봉사 리더들이 미국 뉴욕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어. 정부의 담당 부서를 찾아가 “자원봉사센터만 만들어놓으면 뭐 하느냐. 운영체계와 시스템을 배워야 한다. 30명 이상 한국에서 출발해야 동시통역사를 붙여준다고 하니 전국에 있는 자원봉사센터 소장과 리더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 하지만 1997년은 IMF가 터진 해였어. 정부도 기업도 지원할 수 없으니 알아서 가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지. 누가 자기 돈으로 뉴욕까지 워크숍을 가겠는가. 하지만 나는 가야 했어. 적금 하나를 헐어 혼자 뉴욕행 비행기를 탔지. 최 : 아무런 후원도 없이 혼자 뉴욕에 간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권 : 무서울 게 없었지. 사명감이 있었으니까. 뉴욕 힐튼호텔에서 워크숍이 진행된다는 정보만 가지고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어. 택시를 타려니 표를 하나 주며 기다리라고 하더군.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답답했어. 한 시간쯤 있으니까 흑인 기사가 왔어. 우여곡절 끝에 밤 11시쯤 호텔에 도착했지. 그런데 프런트에 예약자명을 대니 내 이름으로 예약된 건 없다고 해. 아시아 지역 이사로 워크숍에 참석 중이던 이강현 박사가 내가 묵을 룸을 예약하기로 했거든. 그는 워크숍에 참석하고 있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지. 로비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강현’으로 예약자를 찾으니 룸이 있었어. 이강현 박사가 한국 대표 참가자들의 방을 자신의 이름으로 예약해놓은 걸 뒤늦게 알았지. 자정이 지나서야 체크인을 하고 침대에 누웠어.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긴장한 탓에 잠이 오지 않더군. 새벽 5시부터 호텔 조식이 나온다는 말에 다음 날 일찍 방을 나섰지. 그런데 세계에서 수천 명이 워크숍에 왔는데 음식이 남아나겠어? 토스트와 과일 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지고 우유와 오렌지주스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 별수 없이 우유 한 잔 마시고 오전 9시부터 워크숍을 강행했지.그날 워크숍은 조를 나눠 진행되었다. 청소년, 노인, 일반, 장애인 등 다양한 대상과 주제로 세분화되었고, 권순남 선생은 7명과 한 조가 되어 청소년 자원봉사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권 :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득한데 말이 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지. 돈을 들여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못 얻고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어. 조의 리더부터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머리에서 가슴까지 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어.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지.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에 더듬더듬 말했어. “나는 한국에서 왔다. 여기 공부하러 왔다. 영어는 읽는 것은 되지만 말은 안 된다.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달라.”최 : 참여자들 반응은 어떻던가요?권 :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자 경력자였어.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다 같이 박수 치며 “우리가 권순남을 도와주자”고 하더군. 각자 청소년 자원봉사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대한 의견을 냈고, 리더는 사람들의 의견을 정리했어. 나는 다른 사람 말은 하나도 안 들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지. 그때 리더가 큰 종이를 토론 참여자들에게 나누어주었어. 나는 “한국 청소년들은 입시 중심으로 자원봉사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여러분들이 고민해달라”고 적었어.권순남 선생은 워크숍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명함을 전달했다. 한국에는 자원봉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자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정성이 통했는지 워크숍이 끝나고 두 달 후 뉴욕에서 워크숍 결과지와 청소년 자원봉사 키트 자료가 왔다. 이후 권 선생은 대학생과 청소년 자원봉사에 더욱 매진했다. 또한 한동대 도형기 교수를 센터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고, 사회복지과·심리학과 교수들이 자원봉사 리더 교육에 참여해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준비는 대학교 내 자원봉사 시스템을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최 : 한국의 학부모와 교사들은 학생들의 공부에만 집중하잖아요. 이런 환경에서 봉사활동을 이끌어낸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권 : 그랬지. 5년 정도 중·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청소년 봉사에 대해 설명했지만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어. 고민하던 차에 포항고등학교 청소년연맹에 소속되어 있던 최현우 선생님을 자원봉사센터 청소년단장으로 모셨지.최 : 흔쾌히 승낙하셨나요?권 : 최현우 선생님이 퇴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항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센터로 모시고 와서 도와달라고 했어. 학교에는 자원봉사 전담 교사가 없으니 각 학교별 청소년연맹 선생님을 자원봉사 지도자로 섭외해달라고 부탁했지. 어렸을 때부터 봉사활동을 해야 봉사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깨우칠 수 있다는 내 생각에 최현우 선생님도 동의하셨어. 최 선생님은 청소년연맹에 있던 선생님 10명을 불러 자원봉사 지도자 교육을 했지.1998년 권순남 선생은 최현우 청소년단장과 청소년자원봉사단을 꾸려 발대식을 가졌다. 봉사단의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 조끼와 배지를 제작하고 청소년 자원봉사활동 사례 발표회와 청소년봉사단 예술대축제를 진행했다. 포항의 청소년 자원봉사 사례는 전국 최초였으며, 타 시·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최 : 청소년과 대학생 자원봉사단뿐 아니라 다양한 봉사단을 구성하셨지요?권 : 청소년 봉사자들에게는 즐거움이 필요했어. 그래서 문화예술경연대회(예술대축제)를 준비했는데 장소가 필요했지. 롯데백화점 포항점에 가서 행사 취지를 설명하자 옥상을 빌려주었어. 음향 시설이 되어 있는 곳이라 금상첨화였지. 백화점 상품권도 후원받았어. 감사한 마음에 자원봉사 모범 기업으로 올리자 롯데백화점 점주들이 스스로 봉사팀을 만들었어. 최 : 포스코 사회봉사단도 창단되었죠?권 : 포스코를 찾아가서 자원봉사에 대해 이야기하니 이미 부서별로 동네와 MOU를 맺어 농기구를 수리해주는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기업 바깥으로 나가서 하는 것만 봉사가 아니라 직원 간의 소통 그리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봉사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설득했지. 그렇게 포스코 자원봉사자 교육이 시작되었어. 이강현 박사, 이윤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거물급 강사를 모시고 포스코 과장급, 팀장급을 모아 자원봉사의 가치와 인식 개선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지.최 : 자원봉사센터를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권 : 1996년 재단법인 한울타리에서 포항시로부터 운영을 위탁받아 12월 16일 자원봉사센터를 개소하고 소장으로 업무를 시작했는데, 개소 후 3년간 정말 힘들었어. 중앙정부의 시책으로 개소했지만 자원봉사센터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이해도가 낮았고 예산 지원도 적어 센터 직원의 급여와 사업비가 늘 부족했지. 게다가 자원봉사센터에 대한 홍보가 되지 않아 오해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도 있었고.최 : 어떤 오해인가요?권 : “자원봉사를 하는 데 왜 돈이 필요하냐”, “그렇게 조직을 키워서 정치에 입문하려고 하냐?” 등등의 오해와 억측이었어. 지역 언론도 터무니없는 기사로 센터를 매도하고 참 힘든 일이 많았지. 결국 1999년 3월에 나와 직원 모두 사표를 제출하고, 법인도 포항시에 반납했어.1996년부터 1998년까지 포항시자원봉사센터는 청소년자원봉사단, 주부자원봉사단, 도서관자원봉사단 등 크고 작은 봉사단을 조직했고 일반 교육사업부터 관리자교육, CEO 교육 등 자원봉사에 관련된 다양한 교육을 주관했다. 또한 자원봉사 박람회, 이동자원봉사센터, 자원봉사인형극, 행복마을만들기, 자원봉사물결운동 등 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행했다. 권순남 선생의 이러한 노력은 포항시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위탁법인을 찾는 과정을 거쳐 볼런티어21(현 한국자원봉사문화) 포항지부와 1999년 4월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권 선생은 지부장이자 소장으로 본부의 운영 매뉴얼과 교육콘텐츠를 지원받아 좀 더 전문적으로 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권 : 일보다 사람들에게 자원봉사센터를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웠어. 시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예산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면 부정적으로 인식할 때가 더 많았지.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행정기관이나 시의회에 우리가 부탁하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없겠다 싶더군.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이 ‘무형의 거대 자본’이라는 사실과 자원봉사센터는 ‘인적자본’을 축적하고 가동하는 시스템임을 증명하려고 더 많이 고민하고 투자를 진행했지. 센터를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은 기본이고, 밤 12시에도 모여 프로그램을 고민했어. 자원봉사자를 요청하는 기관에 봉사자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자원봉사에 관한 정보와 자원을 제공하니 점차 시민사회로부터 인정받게 되었지. 정말 감사한 것은 우리 센터 직원들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불만 없이 최선을 다해준 거야.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2023-07-23

“엄마 인생의 마지막 꿈이라면 도와줄게”

영흥초등학교에서 자원봉사에 눈을 뜬 권순남 선생은 더 넓은 세계로 걸어 나온다. 포항JC 부인회 활동으로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은 권 선생은 포항시로부터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제안받는다.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수행하려면 자신의 삶을 센터에 오롯이 바쳐야 하는데 권 선생은 어떤 선택을 할까?최미경(이하 최) : 부군께서 포항JC에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포항JC 활동과 관련해 각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권순남(이하 권) : 어느 날 남편과 이야기를 하다가 울릉도 아이들이 한 번도 기차를 타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어. 아이들의 소원이 기차를 타 보는 거라는 얘기를 듣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었지. 1977년이었어. 울릉도 아이들은 난생처음 기차를 타 보았고 서울 방송국 견학도 했지. 최 : 부군의 JC 활동에 내조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권 : 남편이 나를 믿어준 만큼 나도 힘을 보탰지. 1970년대 말 남편이 청년회의소 경북지구대회를 포항에서 유치하고 싶어 했어. 포항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재정적인 면에서 걱정이 앞섰지. 그래서 포항JC 임원 부인 7명을 모아 연말 송년회를 열자고 했어. 젊은 남성들이 지역사회를 위해 애쓰는데,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느냐며 마음을 모았어. 그런데 우리 여성들이 뭘 할 수 있겠어? 그때만 해도 사회활동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니 마땅한 대안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더군. 그러다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지. ‘살림살이의 기술’이 바로 그것이었어. 김밥 잘 싸는 사람. 감주 잘 만드는 사람. 동동주 만들어올 사람……. 이렇게 하나씩 맡아 송년회를 준비했지. 나는 과일을 대신할 과자 안주를 맡았는데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어 고민이었어. 서울에 가서 외국 음식 요리책을 구입해서 보니 이쑤시개에 치즈, 체리, 메추리알 이런 것을 끼운 게 눈에 띄더군. 그런데 막상 해보니 모양새가 영 나질 않았어.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양배추에 쿠킹 포일을 씌워 이쑤시개에 끼운 과자 안주를 멋지게 만들어냈지. 테이블 세 개를 연결해서 그 위에 각자 준비해간 음식을 세팅해놓고 포항JC 회장에게 오라고 전화했어. 120여 명의 포항JC 회원 중 60여 명이 참석했는데 차려놓은 음식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지. 월례회에는 몇 명 정도 참석하느냐고 묻자 30~40명 정도라고 했어. 왜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일을 마치고 오면 주변 식당이 문을 닫아서 저녁도 못 먹고 회의한다고 하더군. 그러니 열정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곳에 오겠어? JC 회원들이 송년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다음해에는 자기 아내도 끼워달라고 해서 회원 아내들을 모아 팀을 짰지. 혼자는 어렵지만 모두 함께하니 회비 30만 원으로 100만 원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송년 파티를 통해 권순남 선생은 포항JC 경북지구대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남편을 도왔다. 포항JC는 경북지구대회뿐 아니라 1990년 8월 전국대회까지 유치했다.최 : 전국대회는 경북대회와는 수준이나 규모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권 : 숙박이 가장 큰 문제였어. 전국에서 천여 명의 JC 회원이 오는데 포항에는 이들을 수용할 숙박 시설이 없었어. 포항공대로 찾아가서 총장님을 만났지. JC 전국대회를 통해 포항공대와 포스코를 홍보하면 어떻겠냐고 했어. 포항공대도 득이 되고 지역사회에도 득이 되니 포항공대 강당과 기숙사를 빌려주면 고맙겠다고 부탁했지. 다행스럽게 총장님이 부탁을 들어주셨어. 그렇게 포항공대 방학에 맞춰 JC 전국대회를 개최했어.최 : 다른 문제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권 : 두 번째 문제는 음식이었어. 한 번에 천 개의 도시락을 만들어본 식당이 포항에는 없었거든. 흰밥, 고기, 전, 김치가 들어간 도시락 샘플을 만들어 승리식당에 찾아갔지. 샘플처럼 천 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어. 그런데 당일 1200명이 온 거야. 어떻게 했겠어? 한 시간 동안 포항JC 부인들이 도시락 200개를 만들었지. 그리고 포스코를 견학하고 돌아온 전국 JC 회원들에게 천 개의 아이스 수건을 내놓았어. 견학 후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새까매진 얼굴과 손을 씻을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지. 그래서 전국대회 며칠 전에 천 개의 수건을 구입해 포항JC 부인들을 모두 불러 수건을 하나하나 접어서 말았어. 그렇게 꺼낸 아이스 수건과 수제 도시락을 받아든 전국 JC 회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지. 포항에서 열린 JC 전국대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후 여성들이 사회에 나와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깨닫고 포항JC 임원 부인뿐 아니라 회원 부인도 함께할 수 있는 포항JC 부인회를 1981년 결성하게 되었다. 포항JC 부인회는 복지시설을 대상으로 나눔 운동을 전개했고 장애인 재활 후원사업도 진행했다.최 : 그 큰 행사를 포항에서 치렀다는 자긍심이 대단하셨겠어요?권 : 예쁘게 보일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 회장 부인만 잘 차려입고 나오라고 하고, 30명 정도의 JC 부인은 새벽부터 나와서 머리를 질끈 묶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 모두가 사명감을 갖고 일했기에 신이 났어.그 일을 계기로 1982년 국제청년회의소 세계대회를 서울에서 유치하게 되었다. 권순남 선생은 사람의 힘을 믿었다. 좋은 의도를 갖고 좋은 방향으로 함께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늘 믿었다. 그러한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연대를 만들었다.권 : 1996년 4월 포항시 공무원이 나를 찾아왔어. 당시 시장이 박기환이었는데 포항JC 활동을 오래한 분이었지.최 : 그러니까 박기환 시장님이 권순남 선생님의 활동을 알고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부탁한 거군요.1995년 정부는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88올림픽이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둬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질서정연하고 자발적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에 전 세계가 감동했고 올림픽 역사상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5년 행정자치부 최형우 장관이 자원봉사에 관심을 갖고 자원봉사자 교육과 투입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 미국 등 5개국을 벤치마킹했다. 그 결과 자원봉사를 관리할 수 있는 센터가 필요하고, 그 센터는 정부가 지원하고 민간이 운영해야 한다고 보고되었다. 이를 통해 행정자치부에서 16개 시·도에 시범센터를 운영할 수 있도록 자원봉사센터를 설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권 : 포항시 차원에서 자원봉사센터를 만들어야 했고 이를 추진할 사람이 있어야 했지. 적임자를 물색하다가 내가 추천되었는데 나는 상근직은 부담스러웠어.최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권 : 갑작스러운 제안에 답을 줄 수가 없었어. 당시 내가 하는 교복 사업이 잘되고 있었거든. 성업 중인 사업을 정리하고 봉사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웠지.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원봉사센터가 전무했기에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걱정이 앞섰어. 처음에는 4~5개월 정도 도와주겠다고 했지. 교복 사업의 비수기(7~10월)에는 도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거든. 그런데 시에서는 도와달라고 계속 연락해왔어. 고민 끝에 가족회의를 했어. 딸들에게 “엄마가 지금 고민하는 일은 무보수다. 그러니 너희가 재정적으로 후원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 남편에게는 “자원봉사센터가 시범 운영된다고 하니 나는 꼭 성공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정에 충실하기 어려울 텐데 이해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최 :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하군요.권 : 두 딸은 이 일이 엄마 인생의 마지막 꿈이라면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말해주었어. 남편도 당신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가 말려도 하는 사람이니까 편하게 일하라고 했고. 남편과 두 딸의 말에 큰 용기를 얻었지.최 :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요?권 : 전국을 다녔어. 자원봉사센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대구, 부산, 서울로 다녔지. 그리고 좋은 자료를 찾기 위해 애썼어. 어떻게 하면 봉사를 체계적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사회복지에 관한 전공 서적을 구입했는데 전부 영어로 되어 있더군. 그렇게 자원봉사에 관한 것이라면 다 찾아다니고 뒤졌어. 그러던 중에 이강현 박사를 만났지.이강현 박사는 우리나라 자원봉사 역사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주요 자원봉사 단체와 조직, 제도와 정책이 대부분 그의 아이디어와 기획을 거쳐 탄생했다. 19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자원봉사 전문기구인 ‘한국자원봉사연합회’를 만들었고, 1996년 자원봉사 관리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볼런티어21(현 한국자원봉사문화)’을 창립했다. 2008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자원봉사협의회(IAVE) 회장에 뽑혀 7년간 국제사회의 자원봉사 운동을 이끌었다.최 : 정말 열정적이셨군요.권 : 한 달에 한 번 서울에서 리더십 교육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서강대에서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자원봉사 지도자 교육을 한다는 것을 알고 2년간 매주 서울에 갔지.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완벽해야 했으니까. 교육이란 교육은 다 듣고 다녔고 세미나, 포럼, 연구발표를 한다면 어디든지 찾아갔지.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2023-07-19

“아이들이 허기져 쓰러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효성여대 약학과에 입학한 권순남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 입주 가정교사, 공장 노동자 등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혼자 감당하기엔 힘겨워 결국 졸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권순남 선생의 결혼 이후 사회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최미경(최) : 자녀는 몇 명을 두셨는지요?권순남(권) : 딸만 둘이야. 당시 풍조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였는데 남편이 새마을지도자회 회장이어서 정부 말을 참 잘 들었던 것 같아. 최 : 1970년대는 ‘새마을’을 많이 붙였지요?권 : 그랬지. 새마을어머니회, 새마을부녀회처럼 ‘새마을’을 붙이는 게 혁신이라 믿었던 것 같아.권순남 선생은 예절과 도의를 강조한 아버지에게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결혼한 후에는 아이를 잘 키우고 내조를 잘하면 된다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기에 사회활동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한다.최 :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세요.권 : 큰애가 영흥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 몇 번이고 어머니회에 나오라고 했는데, 시부모님이 싫어하셔서 미루다가 큰애의 학교생활이 궁금해 처음으로 나갔지. 회의를 진행하던 중 회비를 20~30원 정도 걷는다길래 회비의 용도를 물었더니 학교 선생님들을 위해 쓴다고 하더군. 내가 그 자리에서 박봉의 선생님들을 위해 쓰는 것도 좋지만 어머니회에서 걷는 회비는 아이들을 위해 쓰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의견을 내놓았지.최 : 처음 어머니회에 가서 그런 발언을 하셨다니 눈총을 받지는 않으셨나요?권 : 당시에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건 일반적이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영흥초등학교는 학부모의 교육 수준이 다른 학교에 비해 낮은 편이었어. 해도는 원래 섬이었는데 진펄을 메워 거주지가 만들어졌지. 그곳에서 ‘반티(함지 그릇을 일컫는 경상도 사투리)’ 장사를 많이 했어. 생계에 급급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거든. 내 눈에는 그런 것만 보였지. 이런 내가 어머니회에 처음 가서 던진 말에 좋게 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일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었지. 어느 날인가, 학교에 다녀온 큰애의 운동화가 엉망이었어. 깨끗하게 신고 간 운동화가 엉망이 되었기에 어디 가서 놀다가 왔냐며 종아리를 쳤지. 그런데 학교에 가보니 운동장에 물이 빠지지 않았어. 비가 그친 지 이틀이 지나도 학교 운동장이 마르지 않았던 거야. 시어른에게 물어보니 염전 위에 세운 학교라 배수 처리가 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이런 교육 환경은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에 영흥초등학교 어머니회 회장과 시청 담당자를 찾아갔어.최 : 공무원 반응이 어땠나요?권 : 시청 담당 공무원은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교육청에 가라고 하고, 교육청에 가니 예산이 없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말했지. 남편이 영흥초등학교 체육진흥회장을 맡고 있던 터라 새마을운동 차원에서 하천으로 물이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어. 임시방편으로 아이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학교 입구 쪽만 우선 조치했지.최 : 당시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교육 현장에서 주로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권 : 큰애가 3학년 때 학교 어머니회 회장을 맡았어. 이제는 내 아이디어로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학교 운동장을 뒤집어 자갈을 깔고 숯과 모래를 그 위에 올리면 삼투압에 의해 물이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이걸 도와줄 일손이 부족했어. 여기저기 알아보니 오천에 있는 해병대 공병부대를 부르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곧바로 해병대 사단장 부인을 만나러 갔지.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사단장을 만나면 물어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군.그날 밤 권순남 선생은 사단장 부인에게 전화를 받았다. 다음 날 계획서를 들고 찾아오라는 연락이었다. 권순남 선생은 밤새 한숨 못 자고 학창 시절 과학 시간에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사단장에게 영흥초등학교 운동장 복토 공사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권 : 사단장을 만나고 나오면서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상대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 첫 번째 감동 포인트는 전교생 위문편지 쓰기였지. 여학생은 오빠라고 시작하고, 남학생은 형님이라고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쓰게 했어. 그리고 어머니회를 중심으로 치약, 칫솔, 비누, 타올 등을 모았어. 마지막으로 위문 공연을 준비했지. 이렇게 준비된 것을 갖고 해병대로 찾아가 장병들을 앞에서 3부에 걸친 위문 공연을 진행했어. 1부에서는 남학생 둘, 여학생 둘이 편지를 읽은 후 장병들에게 전달했고, 2부에서는 학생들이 리코더를 불고 노래도 하고 고적대가 준비한 위문 공연을 했어. 붕대를 감고 있던 상이용사들이 어린 학생들의 노래와 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리더군. 그리고 3부에서 위문품을 전달했지. 이 모든 과정이 해병대 사령관을 비롯한 장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마침내 운동장 복토 공사 승낙이 떨어졌어.그해 여름방학 한 달 동안 해병대 공병부대에서 트럭 3대가 매일 아침 영흥초등학교로 왔다. 각 트럭마다 20명씩 탑승했으니 매일 군인들 60명이 영흥초등학교에서 종일 땀 흘리며 공사를 진행했다. 권순남 선생은 어머니회를 소집해 간식 조를 짰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6조, 한 조에 5명씩 임원을 배치해 장병들이 간식을 먹으며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권 : 그때는 사람들이 순수하고 헌신적이었어. 여름방학 내내 해병대 장병들도 어머니회도 애를 참 많이 썼지. 그렇게 운동장이 개선되니 신이 나고 재미있었어. 그래서 어머니회가 더 활성화된 것 같아. 이 밖에 권순남 선생은 학부모들과 도서 모으기 캠페인을 전개해 학교 안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고 고적대도 만들어 지원했다.최 : 영흥초등학교 고적대가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고 들었습니다.권 : 음악을 전공한 한영대 교사가 영흥초등학교로 온 것을 알게 되었어. 우리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자며 한영대 교사와 의기투합했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영흥초등학교 고적대였어. 악기 살 돈이 없어 군악대의 오래된 악기를 가져오고, 동지상고·포항수고 악대부에 고장 나거나 못 쓰는 악기도 가져왔지. 어느 늦은 밤 학교에 갔는데, 한 교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어. 한영대 교사가 집에 가지도 않고 헌 북을 고치고 있더군. 교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가만있을 수 없었어. 대회를 앞두고 고적대 아이들의 유니폼을 제작하려고 모금을 했지. 영흥초등학교 고적대는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경상북도 우수상을 받았고, 그다음 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어.최 : 결식 학생들을 돕는 절미(節米) 운동도 진행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시작하셨나요?권 : 한번은 학교에서 식목 행사를 한다고 해서 어머니회에서 30명 정도 나무를 구입해 학교에 갔지. 조회 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이 운동장에 픽픽 쓰러졌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사정을 알아보니 아침밥을 못 먹은 아이들이 허기를 못 견디고 쓰러진 거였어. 한 반에 50명 넘는 아이들의 가정실태조사를 교사가 일일이 할 수 없었기에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학교에 다니는지 알 수 없었지. 그래서 어머니회에서 아이들의 주거환경을 살펴보기로 했어. 초가집이나 양철집에 사는 아이도 있었고, 텐트를 치고 사는 아이도 있었어. 텐트 안에 들어가니 흙바닥에 나무 판때기를 놓고서 석유곤로로 밥을 해먹고 가마니때기를 깔고 잠을 잤어. 그런 가정이 예닐곱 군데였어. 그중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상이용사 집이 네 군데였고, 어머니가 가출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품팔이해서 겨우 먹고사는 가정이 세 곳이었지. 참담한 상황이었어.권순남 선생은 그들을 도우려 일주일간 고민하다 신주머니 100개를 만들어 어머니회에 나누어주었다. 세끼 밥을 안칠 때마다, 쌀 한 숟가락을 덜어 그 신주머니에 넣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한 달간 모은 신주머니 100개를 자루에 담으니 열두 자루가 나왔다.권 : 어머니회 임원들을 불러서 쌀자루를 하나씩 주고 저학년부터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찾아가 전해주라고 했어. 그렇게 쌀자루를 들고 간 임원들은 돌아올 때면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 허기져서 아이들이 쓰러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3년 동안 절미 운동을 했어. 권순남 선생은 자녀들이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시어른이 하던 직물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사업을 할 때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원하고, 고아원·양로원·장애인 시설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했다.최 : 남편의 이해 없이는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잖아요. 부군께서는 선생님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권 : 남편은 건축을 전공했어. 시어른이 사업을 물려받으라고 하자 장사는 싫다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그 사업을 받았어. 그이는 포항JC에서 임원을 하며 봉사활동을 했어. 봉사에 대한 가치관이 나와 비슷해. 내가 하는 일을 믿고 응원해주었지.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2023-07-16

내 꿈을 영글게 한 전쟁고아들

지금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원봉사지만 과거에는 아주 낯설었다. 여기에 누군가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낯섦은 자연스러움이 되었다. 권순남(權順南) 선생은 자원봉사활동 초기부터 합류해 갖은 고생 끝에 자원봉사활동의 기틀을 다졌다. 강원도에서 태어난 권 선생은 어떻게 포항에 와서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일을 겪으며 자원봉사의 뿌리를 내렸는지 5회에 걸쳐 이야기를 전한다. 최미경(이하 최) : 광복 후 포항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권순남(이하 권) :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이야. 어머니 고향은 울진이고 아버지는 안동이었는데, 통천이 살기에 좋다고 아버지가 그곳에 터를 잡았지. 어린 시절 우리 집 앞은 포항 송도처럼 소나무 숲이 우거졌어. 광복 후에 언니와 나는 큰아버지를 따라 안동에 와서 2년간 살았고, 아버지는 우리보다 늦게 안동으로 왔다가 포항에서 그물 공장을 크게 하는 친구의 권유로 포항에 오게 되었지.최 : 그러면 어머니는 언제 통천에서 나오셨나요?권 : 나오지 못했어. 당시 어머니는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갓난아기를 데리고 나오기가 힘들었어. 어머니는 나와 언니가 걱정돼 아버지를 안동으로 먼저 보냈고, 자신은 막내가 좀 더 크면 같이 나오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막힐 줄 누가 알았겠어. 최 :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나요?권 : 포항에는 아홉 살 때 왔는데, 가을이었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아는 분 편에 어머니가 쓰신 쪽지를 전해 받았어. “아버지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그때 가겠노라”고 적혀 있었지. 그래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어린 마음에 내가 열심히 해서 이름을 날려야 어머니가 오겠구나 싶어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면 한 장만 써도 될 것을 세 장씩 썼지. 그런데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가 귀한 시절이라 공책을 많이 쓴다고 선생님한테 맞기도 했어.최 : 공부뿐 아니라 뭐든 열심히 하셨을 것 같아요.권 : 어렸을 때는 단순했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목표였고. 그게 몸에 밴 것 같아.최 : 초등학교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권 : 입학 시기를 놓쳐 열 살 때 포항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어. 그때는 1학년에도 나이 든 학생이 더러 있었어. 시골에 사는 아이들은 부모님을 돕느라 더 그랬지. 한번은 교문 앞에서 매번 지각하는 같은 반 아이를 만났어. 땀을 뻘뻘 흘리며 교문에 들어선 그 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안 보이는 데서 무명 보자기를 풀어 신고 왔던 짚신 대신 까만 고무신을 갈아 신더군. 내가 그 아이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신광이라고 했어. 신광이라면 정말 먼 거리였지. 그 아이의 짚신과 내 구두를 번갈아 보니 왠지 미안하고 슬펐어.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최 :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권 : 중학생 때였어. 친구가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집이 무척 컸어. 영화에서나 보던 저택이었지. 집에 들어서자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이 있었는데 나는 시녀라고 생각했고, 친구가 대단한 부자구나 싶었어. 넓은 거실에 앉아 있는데 시녀가 따뜻한 우유와 비스킷을 가지고 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군. 놀러 왔는데 왜 기다리라고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깜짝 놀랐어. 그때는 배급으로 우유를 받았는데 모두 분말이었어. 우리 어머니는 그걸 어떻게 먹는지 몰라 늘 쪄 주셨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찐 우유는 딱딱하게 굳어 먹을 수가 없었어. 도시락통을 운동장에 들고 나가 돌멩이로 치다 보면 점심시간이 다 지나갔지. 깨진 우유 조각 몇 개를 입 안에 넣고 녹여 먹곤 했는데 하얀 우유를 유리컵에 담아왔으니 놀랄 수밖에. 비스킷은 아까워 먹지도 못하고 동생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어. 잠시 후 친구가 와서 “이제 도와주자”라며 나를 뜰로 데리고 나갔어. 그곳에 어린아이 50여 명이 겨울 햇살 아래 쪼그려 앉아 있었어. 나는 “저 아이들 소풍 왔어?”라고 친구에게 물었지. 그러자 친구가 “고아들이야”라고 대답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고아라는 말을 몰랐어. 그래서 고아가 무슨 뜻인지 묻자 친구는 6·25전쟁 때 부모를 잃은 아이라고 설명해주더군. 그제야 그곳이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아이들을 유심히 보니 코 흘리는 아이, 손이 하얗게 튼 아이, 양말을 안 신은 아이도 있었어. 그 아이들이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엄마 잃은 아이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정말 아팠어. 만약 아버지가 이북에서 오지 않았다면 나도 저 틈에 앉아 있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지. 최 : 어떤 꿈인가요?권 : 돈을 벌고 싶었어. 이 아이들에게 집을 지어주자, 살아갈 수 있게 희망을 주자, 그런 마음이었지. 돈을 가장 빨리 벌 수 있는 게 의대 아니면 약대에 가는 거였어. 그래서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봉사의 가치를 알게 되었지.최 : 봉사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권 : 그 아이들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었어. 그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고, 하고싶다는 에너지 말이야. 과자를 사주고 싶은 마음에 몸이 꽁꽁 어는 줄도 모르고 크리스마스 전날 새벽 추위를 뚫고 초롱을 들고 다녔어. 여름방학에는 학교에서 배운 뜨개질로 모자와 목도리를 짜고 양말과 장갑을 짰지. 손가락장갑은 시간도 많이 들고 어려워서 벙어리장갑만 짰어.최 : 장갑을 짜려면 털실이 필요했을 텐데 어디서 구하셨나요?권 : 친구들의 못 입는 스웨터를 받아 실을 풀고, 해병대 군악대에 다니는 오빠에게 해져서 구멍 난 양말을 모아달라고 부탁했지. 그렇게 모은 실로 1년간 틈틈이 짜면 장갑, 목도리, 양말이 50개 정도 되었는데 크리스마스 때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어. 정말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것이지만 뭔가를 나눈다는 게 무척 행복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어. 1956년 권순남은 헌 스웨터를 수거해 리폼한 뜨개실로 모자, 장갑, 양말 등을 만들어 성모자애원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이 일은 그녀의 자원봉사 생활의 서막이었다.최 : 가정형편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권 : 6·25전쟁으로 포항이 초토화되어 포항 시민 대부분이 집을 다시 지어야 했어.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지. 1955년에 아버지는 강원도 삼척에서 목재를 싣고와 지금의 제일안경 자리에 2층 목조건물을 지어 금은방을 했어. 그해 겨울, 포장마차를 하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해서 아버지가 우리 목조건물 옆에 자리를 내주었지. 그런데 포장마차 주인이 포장 텐트 안에서 램프에 기름을 붓다 화재를 냈어. 불은 빠르게 건물로 옮겨붙었고 1년도 안 된 목조건물이 전부 타버렸어. 그때 모든 걸 잃었지.최 : 학교는 어떻게 다니셨나요?권 : 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선생님 두 분이 입학금 4만 5천 원을 대신 내주셨어.최 : 뭐든 열심히 해서 학교에서 사랑을 많이 받는 학생이었을 것 같아요.권 : 운동을 잘해서 운동부 코치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했지. 그래서 육상부와 배구부를 동시에 했어. 포항여고 육상부 선수 4명은 경북 대표로 뛸 정도였고 배구부는 경북에 적수가 없었어. 고3 때인 1959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군산여상과 붙었지. 서울에 있는 포항여고 졸업생들이 몰려와 응원했지만 포항여고는 3 대 0으로 완패했어. 그때만큼 맥 빠지는 일이 없었지. 포항에 오자마자 운동을 접고 공부만 하겠다고 결심했어.1950~60년대 군산여상 하면 배구, 배구 하면 군산여상이라고 할 정도로 군산여상 배구부는 막강했고, 군산여상 배구부 선수는 대부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최 : 고3 가을이라면 대입 시험이 4~5개월 정도 남았는데 가능했나요?권 : 나는 성공해야 했어. 목표가 있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버지가 대학에 못 보낸다고 하시더군. 당시 교감 선생님이 우리 집사정을 듣고 전국을 다니며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대학을 찾아보셨지. 효성여대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 중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등록금을 분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말에 면접을 보고 합격했어.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2023-07-12

“어자원 보호해야 구룡포의 미래도 있어”

1970년대 3만 5천 명이던 구룡포 인구는 현재 7천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만선의 풍족함을 선사하던 바다는 어족 자원이 고갈되었다. 강신규 선생과의 인터뷰는 바다에 대한 걱정으로 흘러갔다. 선생과 구룡포 골목을 걸으며 과거의 유산과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은 두세 걸음마다 멈춰 주민들과 인사했다. 배 : 골목을 거닐면 과거의 풍경이 겹쳐 보이겠습니다.강 :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구룡포는 전성기였어. 어황도 좋았고 인구 유입도 많았지. 셋방 하나에 두 식구가 살았을 정도였어. 근대역사문화거리에 있는 버스터미널(현재 구룡포길 85-1 인근)에서 대구와 감포, 부산까지 다녔지. 근처에 버스 안내양과 운전기사가 묵었던 여인숙이 아직 남아 있어. 그만큼 경기가 좋았지. 수도가 없을 때라 대구에서 수돗물을 공수해 아이들 분유를 데워 먹였어. 식수는 구룡포교회 뒤쪽 우물에서 길어다 먹었고.배 : 근대문화역사거리에는 누가 살았나요?강 : 근대문화역사거리 입구를 바라보고 오른쪽 도로가에는 배를 수리하는 철공소가 많았어. 근대문화역사관 앞 골목은 부자들이 모여 살았지.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일본인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 선박을 운영하며 구룡포어업조합 감사로 활동)가 지은 집인데, 광복 후에 수산업계의 거부(巨富)였던 고치원 씨가 살았어.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그분은 일찍 망하려면 수산업을 하고 늦게 망하려면 교육을 하라고 했지. 배 : 구룡포에도 빈부의 차가 컸나 봅니다.강 : 구룡포시장과 구룡포초등학교 앞은 모래사장으로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어. 강원도에서 먹고살려고 온 어부가 많았지. 동부초등학교(현 아라예술촌) 너머 용주리(현 구룡포 6리)는 특히나 가난했어.배 : 선생님은 어릴 때 구룡포에서 눈에 띄는 아이였겠군요.강 : 항상 누구 집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부친 귀에 여과 없이 들어가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아버지는 늘 바빠서 교회나 가야 볼 수 있었어. 내 아들도 강두수 손자라는 말을 듣고 자랐고. 손녀들은 아버지를 왕할배라 부르며 따랐지.배 : 가업을 물려받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강 : 아버지 그늘에 들어가기 싫었어.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서울 구로 3공단(현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완구진흥공단에서 근무했어. 당시 완구 수출이 활발했는데 봉제완구를 솜이 아니라 짚으로 채우는 황당한 불량품이 쏟아졌지. 공단이 품질을 보증한 제품만 수출하는 시스템이 된 거야. 구룡포로 돌아와 수협에 잠깐 근무하다 다시 서울로 가서 장로회신학대학 학생과에서 일했어.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이었는데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자 그 분위기가 싫어 다시 고향으로 왔지.배 : 수산업 관련 일은 전혀 안 하셨나요?강 : 오징어 조미 가공업과 어선 운영을 잠깐 했어. 꽁치 배는 처가 도움을 받아서 하다가 1년여 만에 접었지. 손발이 맞는 선원을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뱃일을 천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뱃님’이라 불러야 해. 선원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어. 결국 1990년대에 아버지 그늘로 들어가 냉동공장 사업을 했지.배 : 강두수 선생은 포경업을 접고 어떤 일을 하셨나요?강 : 포경업은 1980년대 초반에 끝났어. 그즈음 장생포의 백경호 선주가 아버지에게 배로 돈 벌어 하늘에 다 보낸다고 했어. 고기를 잡아도 선박 기름값 대면 남는 게 없었거든. 1986년 법적으로 포경이 중단되면서 일부는 연근해 어업 등으로 업종을 바꿨고, 우리는 폐선을 했어. 다른 허가를 받아봐야 쓸데없다고 본 거야. 고래잡이는 하지 못했지만 쥐치와 꽁치, 명태 등을 잡았어.배 : 1990년대에 포경선 수입을 알아보기도 했다고요?강 : 김대중 정부 시절, 고래 자원 조사가 시작되었어. 고래 자원 실태를 파악하는 시험선 신청을 받았지. 그때 포경 관련 자료가 필요해 찾아봤는데 거의 없더라고. 동네 사진관에 걸린 귀신고래 사진을 찍어서 올렸지. 그때 일본에서 포경선을 수입하려고 실제로 알아보기도 했어.1986년 국제포경위원회의 포경 금지로 중단된 이후 학계 차원의 고래 자원 조사가 이어지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첫 고래 자원 조사가 시작되었다.국립수산진흥원은 “그동안 2차례에 걸친 고래 자원 조사를 근거로 한국 연안에 서식하고 있는 고래를 조사한 결과, 긴부리 참돌고래 6만여 마리, 짧은부리 참돌고래 2만 2천여 마리, 밍크고래 2천500여 마리 등 8종 11만여 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해양부는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내년 6월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포경위원회(IWC)에 보고, 상업 포경 재개를 위한 근거 자료로 활용할 방침이다.‘고래 11만 마리 동·남해 서식 추정’, ‘경향신문’ 1999년 7월 13일배 : 냉동공장 사업은 어땠습니까?강 : 정부 지원 대출을 받아 호미곶 강사 2리에 냉동공장을 지었어. 완공이 늦어지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지. 건축업자를 잘못 만난 데다 완공 직전에 화재까지 났어. 상환일은 다가오는데 이자 갚기도 힘들었어. 그 사업으로 가세가 기울었지.배 : 강두수 선생이 1998년 4월 7일 작고하셨습니다. 그때 상황을 말씀해 주시지요.강 : 심장 질환으로 선린병원에서 6개월간 입원해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선린병원 김종원 원장과 친분이 있어서 몸이 불편한 이웃들을 선린병원으로 많이 모셨다고 들었어. 너희 아버지 덕에 살았다는 어르신도 있었고. 결국 당신도 선린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셨지.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어. 나도 자동차에서 숙식하면서 병시중을 했고. 아버지는 장로로 기억되기를 원하셨지. 배 : 지금 어선의 사무장을 맡고 계시지요?강 : 어선의 조업을 뭍에서 돕는 역할이야. 출항에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어획물을 경매시장에 판매하지. 새로 충원된 외국인 선원의 정착을 돕기도 해. 얼마 전 베트남에서 나이 어린 선원이 와서 간단한 세간 장만을 도왔지. 말이 안 통해서 소통하느라 혼났네. 과거에는 중국인이 많았다면 요즘은 베트남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많이 와. 바다 일이 워낙 힘들어서 그런지 오래 견디는 선원들이 많지 않아.배 : 구룡포항에 정박한 배가 많은데 조업 상황은 어떤가요?강 : 조업 나가는 배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기름값과 인건비를 감당하는 것 같아. 강풍이나 풍랑주의보가 뜨면 배는 쉬지만 선원들 월급은 지급해야지. 대게 값이 좋을 때는 선주도 돈을 벌지만 나머지는 별로야. 비용을 아끼려고 선주가 선장을 겸하는 ‘자배 자선장’을 하거나 외국인 선원을 고용하고 있어.배 : 어업 종사자로서 관계기관에 건의할 사안이 있으신가요?강 : 당장 눈앞의 이익을 쫓기보다 바다부터 관리해야 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다에 쓰레기를 휘몰고 다니는 조류가 있어. 육지의 쓰레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온갖 것들이 뒤엉켜서 흘러 다녀. 잘 가던 선박의 속도가 갑자기 떨어지면 대부분이 쓰레기 조류를 만난 거지. 항구에 오래 정박된 폐선도 문제야.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어선은 썩지도 않고 화약약품 때문에 바다가 오염되지.배 : 지속 가능한 어업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겠습니다.강 : 우리나라 방파제는 너무 높아서 물의 흐름을 막아. 일본처럼 방파제를 낮게 해서 파도가 넘나들 수 있도록 해야 해. 해류가 항만을 돌아야 크릴새우가 모이는데 지금은 방파제가 해류를 막으니 크릴새우도 고래도 없지. 선박도 안전하고 생태계도 살리는 해법을 찾아야 해. 선장들의 말을 들어보면 구룡포는 지금이 IMF야. 오징어나 홍게가 끊임없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 휴식년을 지정해서 어자원을 보호하고 바다를 청소하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해. 이런 식으로 잡기만 하면 안 돼. 구룡포의 다음 세대를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봐.강신규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끝

2023-07-09

1925년 초가 세 칸에서 시작한 구룡포교회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촌에는 무속신앙이 강하다. 예측 불가능한 바다에서 일하려면 무속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신규 선생의 집안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줏단지를 깨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사업을 일으킨 뒤에는 지역 교회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설립 100주년을 앞둔 구룡포교회(2011년 늘푸른교회로 명칭 변경)와 구룡포의 신앙에 관해 들어보았다.배 : 해안 지역은 무속신앙이 강할 수밖에 없었지요?강 : 바닷가에는 샤머니즘이 강해. 바다 일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되니까. 특히 바람을 다스리는 영등(영두)할머니를 끔찍하게 섬기지. 영등할머니가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을 일으키고, 며느리와 함께 올 때는 비가 내린다고 해. 다시 태어나도 영등을 통해야 하고, 아들도 점지해준다니 섬길 수밖에. 당시만 해도 배는 남자들만 타는 전유물이었어. 출항 전에 여자가 어선에 오르거나 그물을 밟으면 안 된다고 했지.배 : 지금도 예전 풍습이 남아 있지요?강 : 새해 첫 수산물 거래를 앞두고 초매식(初賣式)을 해. 처음 매매하는 생선으로 제상을 차리고, 수협 조합장과 이사들이 절을 하고 풍어와 무사 안녕을 기원하지. 매년 이어지는 풍습이야. 그리고 풍어제도 있어. 용왕당에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지. 올해도 어황이 안 좋으니 동네에서 무당을 불러 1박 2일 굿을 했어. 등록된 무속인이 와서 전복과 해삼, 성게도 많이 잡고 어촌계원들의 안전을 빌었지. 예전에는 선박이 나갈 때마다 고사를 지냈어. 무속인이 와서 징을 치고 축수(祝手)를 했지. 부친이 교회 장로여서 굿을 못 하게 했지만 선원들은 가만있지 않았어. 배 : 선주도 굿을 말리지 못했군요?강 : 목사까지 와서 무속을 금했지만 선원들은 듣지 않았어. 바다에 생명을 맡겨야 하는 선원들로서는 오랜 믿음을 깨기가 쉽지 않았던 거지. 고기잡이를 나가는 선원들은 포항이나 발산, 흥안으로 배를 옮겨 무당을 불러서 고사를 지내고 출항했어. 그렇게까지 하는데 별수 있나. 부친이 경비는 보낸 걸로 알아. 교회는 날씨가 좋아도 일요일에는 출항을 금했지만, 선원들은 그럴 수 없었지.배 : 선원들은 생계가 걸린 일이니 물러서지 않았나 봅니다.강 : 그렇지. 생계 때문에 날씨만 좋으면 바다로 나가야 했지. 포경선 선원들은 흥안리와 발산리에서 걸어왔어. 후동리에 있는 하수종말처리장을 지나 산길을 넘었지. 지금이야 등산로라도 있지. 당시엔 빨리 걸어도 두 시간 걸리는 거리를 새벽에 걸어왔어.배 : 교회에 다니는 선원은 없었나요?강 : 한때 동해에서 장어가 엄청나게 잡힌 적이 있는데 발산리에 있는 작은 교회에 교인들의 헌금이 1억 원이 넘었다고 해. 예배를 보고 나가면 사고도 안 나고 고기도 잘 잡힌다는 소문이 돌자 신도가 많아진 거지.배 : 강두수 선생이 교회에 헌신한 이유가 궁금합니다.강 : 대구고등성경학교(1919년 개교 당시는 ‘대구동산 성경학교’라 불림)를 다녔으니 말해 뭐해. 이 학교의 교육 목표가 장래 교회 인도자 양성이라고 하더군. 아버지가 1955년에 장로가 되시고 나서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어. 부친은 베풀기를 즐겨 기부를 많이 했어. 상정, 장길리, 석병 등에 교회를 개척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지. 아버지를 비롯해 신도들이 흙을 나르며 물심양면으로 도왔어.배 : 구룡포의 교회 역사가 100년이 다 되어 간다고 들었습니다.강 : 1925년에 구룡포교회가 설립되었지. 연혁을 보면 대구 동산기독병원에서 박덕일 목사를 파송해 설립했어. 용주리에 초가 세 칸 예배당으로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제대로 된 건물이 없어서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봤다고 해. 광복 후에는 구룡포 5리에 있던 일본인 사찰을 인수해 예배를 봤지.구룡포교회는 일제강점기 대구 동산기독병원(동산의료원)에서 조직된 전도회를 통해 개척되었다. 동산의료원 선교사들이 건립한 교회는 대구·경북에 100개가 넘는다고 전한다. 동산기독병원 전도목사였던 박덕일 목사는 구룡포교회의 초대 목사로 파송되었다.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제2대 플레처 원장은 부임 후 전도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그는 우리말이 서툰 선교사들보다 현지인이 전도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고 박덕일(1930년까지 시무) 목사를 1921년 1월에 동산기독병원 전도목사로 임명했다.전도회 최초 개척교회는 1921년 11월에 박덕일 목사가 개척한 고령군 덕곡면 반성교회이며, 병원 전도회가 147개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하나 기록상으로는 127개 교회로 되어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 교회 가운데 대구 시외에 있는 교회는 영천금교회, 구룡포교회, 경주아화교회, 청도신읍교회, 장기교회, 건천제일교회, 칠곡동명교회 등이다.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블로그 “다시 보는 동산 역사 : 1921년 ‘동산 기독병원 전도회’ 설립,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배 : 구룡포교회를 구심으로 인근에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고요?강 : 교회에 큰 종탑이 있었는데 종소리가 온 동네로 퍼져 나갔어. 새벽 4시에 종소리가 울리면 배 나갈 시간으로 알았으니까. 구룡포교회가 ‘어머니 교회’가 되어 인근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했어. 1960~70년대 신도는 300명에 가까웠어. 인구가 3만 5천 명 정도 되던 때지. 어려운 시절이지만 십시일반으로 서로 도왔어. 1990년대 이후 교세가 점차 약해졌지.배 : 교인들이 예배당을 짓는 사진이 있군요.강 : 교인들이 모래와 자갈을 옮겨가며 건물을 지었지. 교인들의 인력 봉사로 1949년 상정교회, 1953년 장길리교회, 1961년 석병교회, 1979년 삼정교회가 설립되었어. 교회를 개척하는 일 자체가 포교였고 신앙생활이었던 거지. 부친은 교회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붙였어. 전도사들 학비도 대주었다고 해. 사업이 기울던 1990년대는 빚을 내 헌금했을 정도야. 교회에 그렇게 애정을 쏟으니 구룡포교회를 강두수 교회라고 말하는 교인도 있었어.배 :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교회 풍경이 있나요?강 : 어머니가 교회에 가서 고무신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어. 그때 사진이 있는데 워낙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어 내가 나를 못 찾겠어. 1948년에 구룡포교회 부설 유치원이 설립되었는데 나도 거길 다녔지. 아버지가 그 유치원을 설립할 때 자금을 대셨고 초대 원장을 맡은 걸로 알아.배 : 유치원에 다닐 때 추억이 있나요?강 : 당시엔 두세 살 차이가 나는 아이들과 함께 유치원을 다녔어. 홍역이나 천연두가 무서웠던 시절이어서 아이가 태어나도 어느 정도 자라서야 호적에 올렸거든. 찾아보니 내 사진은 남아 있는 게 없는데 친하게 지내는 후배 사진은 있더라고. 원복을 맞춰 입은 모습을 보면 여유 있게 잘살던 시절이다 싶어. 다른 기록은 2011년 교회를 신축하면서 거의 사라졌어. 당회록도 1940~50년대 기록은 소실되었어.배 : 강두수 선생은 교육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강 : 구룡포 수산고등학교에 교육용 선박을 기증했어. 연안에서 운항 기술을 가르칠 저인망 실습선이었어. 20~25t 어선이 대부분이던 시대였지만 실습선은 30t 넘는 목선이었어. 구룡포수협조합장을 할 때 기증하셨을 거야. 실습을 안 할 때는 외삼촌이 속초로 몰고 나가 고기를 잡아왔어. 아버지는 나한테 교육자가 되고 싶지 않은지 물어보셨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어.배 : 기증한 선박은 실습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다.강 : 그랬을 테지. 구룡포 수산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있었는데 실력이 꽤 좋았어. 성적은 뛰어나도 타지로 갈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는 친구들이 수산고로 진학했지. 수산고등학교 항해과를 나와서 부산 해양대학을 거쳐 상선을 모는 선장도 배출되었고. 내가 대학 다닐 때 원양어선을 타고 제법 큰돈을 버는 친구도 있었지.강신규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

2023-07-05

“큰 권한을 누렸던 구룡포수협 조합장…선거도 치열해”

어업인들은 그들만의 단단한 조직력을 자랑한다. 수산 단체는 거친 바다에서 서로의 생명을 보호하고 불법 어로와 과잉 조업으로부터 어족 자원을 관리하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구룡포 지역 어업인들의 구심점인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2년 설립된 구룡포어업조합에서 출발해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법이 공포·시행되면서 구룡포어업협동조합이 공식 발족했다. 지금과 같은 협동조합 시대가 열린 것이다. 치열한 선거를 거쳐 강두수 초대 조합장이 취임했다. 배 : 부친께서 구룡포수협 초대 조합장을 지내셨지요?강 : 구룡포수협은 호미곶과 구룡포, 장기 일원을 업무 구역으로 하고 있어. 동해안 최대의 어업 전진기지를 관할하지. 아버지는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어. 정확한 임기를 몰라서 수협에 확인해보니, 1대 임기는 1962년 4월부터 1965년 3월 9일까지, 3대는 1968년 4월부터 이듬해 8월 20일까지였어.배 : 구룡포수협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요?강 : 구룡포수협의 모태는 일제강점기에 있던 ‘어업조합’이야. 줄여서 ‘어조’라고 했지. 엄격하게 말해 수협은 아니지만 어민들의 자조(自助) 단체 역할을 했고 수협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어.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 공원으로 가는 돌계단 끝에 일본인 공덕비가 있잖아. 일제강점기에 신사(神社)가 있던 자리로, 현재는 6·25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사당이 있어. 공덕비 주인이 어업조합을 설립했지.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 공원으로 가는 가파른 돌계단 끝에 이름이 지워진 비석이 있다. 광복 후 시멘트로 덧입힌 공덕비의 주인인 도가와 야사브로(十河 彌三郞)가 구룡포어업조합의 창립자다. 구룡포수협은 역사를 거슬러 어업조합까지의 연혁을 따진다면 1922년 11월 9일 일본인 도가와 야사브로에 의해 설립되어 구룡포, 병포, 삼정, 석병, 강사, 호미곶 등 현재 지역의 북쪽 6개 마을로 출발했다. 도가와 야사브로는 구룡포어업조합을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조합장이 되었는데, 구룡포 근대사를 이야기하면서 그를 빼놓기는 어려울 정도로 구룡포 일본인의 중심인물이다.한편, 일반적으로 수협으로 약칭되는 수산업협동조합 조직은 1962년부터를 말한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착수되면서 정체 상태에 있던 수산업도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다. 구룡포어업조합을 대신해 협동이라는 이름의 구룡포어업협동조합이 공식 발족했고 강두수 초대 조합장이 취임했다.‘구룡포수협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 2016, 132쪽·351쪽배 : 수협 초창기의 조합장 권위는 어느 정도였습니까?강 : 대단했지. 구룡포 읍장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거야. 돈을 취급하는 곳이니까 힘이 있었지. 구룡포 전체 수입원의 80%가 구룡포수협에서 나왔어. 수협 직원도 선망의 직업이었고. 수협 판매과장에게 중매인들은 꼼짝 못 했어. 누구에게 물건을 판매할지를 결정했거든. 판매과장의 권한이 그 정도였는데 인사권을 가진 조합장은 어떻겠어? 어족 자원이 풍부할 때니까 권한이 정말 대단했지. 행사장을 가도 단상의 자리 배치부터 달랐어. 행정기관에서 공무원들끼리 치르는 행사보다 조합장이 초청받는 행사가 더 성대했지. 조합장은 인사권뿐 아니라 재정권도 있었으니까.배 : 재정권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권한인가요?강 : 조합장이 수협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결재권을 가졌어. 그때는 어황이 좋아서 선박에서 나오는 수수료가 어마어마했거든. 우뭇가사리(천초)와 해조류, 전복, 해삼이 많았는데, 어촌계에서 나오는 수입도 수협에서 관리했어. 어획물을 잡거나 채취해서 타지로 반출하려면 수협에 수수료를 지불하고 전표를 끊어야 했지.배 : 전표 없이는 본인의 어획물을 팔지 못했다고요?강 : 수협에서 초소를 만들어 관리했어. 당시 구룡포로 오가는 길은 비포장도로 하나뿐이었거든. 구룡포로 들어오고 나가는 양쪽에 초소가 하나씩 있었어. 초소를 통과하려면 전표가 있어야 했지. 원칙적으로 불법 반출이 불가능했지만, 뒷돈을 주고 뒤로 빼돌리는 일이 흔했어.배 : 일본으로 수출도 많이 했다고요?강 : 우뭇가사리와 성게는 전부 일본으로 수출했어. 오퍼상들이 와서 공동구매를 했지. 두원리에서 대동배까지 어촌계에서 나오는 수산물을 모두 쓸어갔어. 그때부터 일본은 기르는 어업으로 갔던 거야. 우리는 어자원 보호라는 개념이 없으니 어린 운단(말똥성게)과 성게까지 돈만 되면 모조리 팔았어.배 : 조합장의 권한이 크니 선거 역시 치열했겠습니다.강 : 1960년대는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가 성했지. 조합장 선거도 마찬가지였어. 초대부터 3대 조합장 선거는 대의원이 했거든. 어촌계원들이 뽑은 대의원들이 투표권을 가지는 방식이야. 대의원이 20여 명이었으니까 대의원을 납치한다고 했을 정도로 대의원 쟁탈전이 치열했어. 조합장 선거에 나가면 기둥뿌리 뽑힌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지. 아버지는 선거와 관련해 가족들과는 상의 한마디 없이 출마 사실만 통보했어. 전국적으로 조합장 선거가 과열되자 조합장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두되었다.당국이 비공식으로 추산한 매표 자금은 3천만 원선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M특수조합에서는 200만 원이 총대(총회 대의원) 매수 자금으로 뿌려졌다고 관계자는 말하고 있다. 당국자들은 이번에 실시했던 조합장 선거가 전례 없이 무질서했으며 매표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일부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관계 당국은 조합장 선거가 이처럼 타락한 것은 수산 금융의 대폭 확대에 따라 수산 자금의 배정 등에 조합장의 재량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 조합장의 권한을 축소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수협조합장 선거 당선 무효 사태’, ‘경향신문’ 1968년 3월 27일 배 : 부친의 상대는 누구였습니까?강 : 2대 조합장이 된 문용화 씨였어. 당시 농촌에서 소달구지가 있으면 부자라고 한 것처럼 어촌에서는 어선이 있으면 부자라고 했지. 6대 조합장까지는 모두 어선을 소유한 선주라고 알고 있어. 꽁치며 오징어며 어족이 풍성하던 시절이었지. 지금은 수산업 수입이 줄고 금융 쪽 수입이 많아. 내가 근무하던 1980년대에 법이 개정되면서 조합장 직선제가 도입되었지.배 : 부친이 조합장을 지낸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가 구룡포의 전성기였지요?강 : 그랬지. 지금 구룡포 인구가 7천 명 정도인데, 당시는 3만 명이 넘었어. 배만 타면 돈이 생기니 술집이며 기생집이 수두룩했지.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시절이었어. 추운 날에도 술에 취해 길바닥에 자는 사람들이 흔했지. 구룡포길 153번길은 ‘산가쿠마치’라고 불리는 술집 거리였어. 가파르고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낡은 집들이 모두 요정이었지. 구룡포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선원들이 찾는 술집이 많았어. 여자들이 한복을 입고 조명 아래 줄을 서 있었지.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지만 불을 켜놓고 술장사를 했어. 그 시절 구룡포에는 극장이 두 개나 있었어.배 : 지금도 없는 극장이 50년 전에 있었다고요?강 : 극장이 두 개 있었는데 부친이 인수해서 외삼촌이 경영했어. 우리 쌍둥이 형제가 돈통을 하나씩 맡아 용돈벌이를 했지. 영화관이었지만 쇼단과 서커스단도 왔는데, 공연을 앞두고 관객 몰이꾼이 북을 치고 돌아다니며 홍보했지. 극장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마트와 호텔이 들어섰어. 마트 자리 규모가 컸는데, 낡은 간판이 아직 남아 있지.배 : 극장에서는 어떤 영화를 상영했나요?강 : 기억이 다 나지 않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인기는 당시에 최고였어. 좌석이 부족해서 통로 계단이나 바닥에도 관객이 빼곡했어. 여름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다닥다닥 붙어 서서 봤지. 영화를 보려고 호미곶, 양포, 흥안, 발산에서 두세 시간씩 걸어왔어.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영화가 끝나면 또 밤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지.배 : 필름은 어떻게 배급받았나요?강 : 대구의 배급사에서 버스로 필름 통을 받았어. 영사기에 걸어서 2, 3일간 상영하고 다른 걸로 바꿨지. 흑연을 태워서 반사경에 빛을 비추는 ‘카본식 영사기’였는데, 초점이 멀어지면 관객들이 안 보인다며 소리치고 그랬지.배 : 당시 구룡포의 거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겠군요.강 : 그런 셈이지. 영화가 히트하면 배우들이 와서 쇼를 하기도 했어. 한창 인기를 누렸던 태현실과 액션 영화 ‘9인의 해병’에 출연했던 황해, 최무룡도 극장에 왔어. 배우들을 보려고 관객이 구름처럼 몰렸지. 배우들이 와서 노래를 불렀는데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인기였어.배 :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가까이서 보셨겠어요.강 : 식사도 같이했지. 포항에 왔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구룡포에서 하루 더 공연하던 식이었어. 숙박 시설이 여의치 않으니 여인숙에서 잠을 잤는데 주연만 방을 따로 주고, 다른 스텝들은 한방에서 묵었어. 바깥에서 아무렇게나 자기도 했으니 비 오는 날을 싫어했지. 수익은 손님 수를 계산해 극장과 기획사가 나눠 가졌어.강신규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

2023-07-02

“크릴새우 따라 영일만에 고래가 몰려왔지”

동해의 다른 이름은 ‘고래 경(鯨)’을 쓴 ‘경해(鯨海)’다. 옛 문헌에는 동해를 ‘경해(鯨海)’로 표기한 사례가 적지 않다. 고래잡이는 조선시대까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포경선이 동해로 진입하면서 거침없이 진행되었고 결국 일본이 독차지했다. 한국인의 본격적인 포경은 광복 이후 시작된다.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잡이는 1951년 구룡포 강두수의 해승호(海勝號)가 제1호 허가를 받으며 시작되었다. 그렇게 구룡포항은 고래잡이 어항으로 변모했고, 장생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 포경의 원조가 되었다. 배 : 선생이 태어난 1947년에 촬영한 사진인데 한국 포경사에 기록될 만한 자료를 소장하고 계시더군요.강 : 1947년 12월 24일 영어호(永漁號)가 39자나 되는 귀신고래를 포획한 기념사진이야. 39자면 11.8m나 되지. 사진 아래에 ‘강두수 씨 포경선 영어호 귀신고래 포획 기념’이라고 적혀 있어. 구룡포항 남방파제 옆에 있는 수협 탱크 자리일 거야. 몸집이 워낙 큰 고래라 구룡포항에 둘 자리가 없어서 방파제에 올린 거지. 동해에서 포획된 마지막 귀신고래라고 들었어. 사진 속에 아버지는 안 계시고 큰아버지가 계셔.배 : 큰아버지도 포경업에 종사했나요?강 : 큰아버지는 안 하셨고 아버지가 포경선 세 척을 운영했어. 나도 사진처럼 큰 고래를 본 적이 있어. 구룡포항까지 끌어오지 못하고 병포리 조선소에 올려놓은 걸 봤지. 조선소에서 반을 해체하고 나머지는 위판장으로 가져와서 작업했어. 고래 둘레가 어른 키보다 컸으니 어마어마했지. 고래는 힘이 좋아. 한번은 호미곶에 주둔하던 미군이 지나가다 돕겠다고 나선 적이 있는데, 고래가 꼬리를 치니까 군용 지프도 뒤로 밀리더라고.배 : 강두수 선생이 포경업을 시작한 것은 언제였나요?강 : 광복 즈음에 일본인에게 포경선을 넘겨받아 시작했다고 들었어. 정식 허가를 받은 것은 1951년 해승호야. 1935년에 건조된 제9영어호와 1953년에 건조된 제13영어호도 있었는데 모두 목조선이었어. 1972년에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는 퇴출되었지만 해승호는 남아 있었어. 그 밖에도 꽁치 배가 2척 더 있어서 흑산도까지 가서 조기와 꽁치를 잡았어. 아버지는 포경선으로 시작해서 다양한 사업을 일궈내셨지.포항의 포경업이 강두수에서 시작되었음은 ‘포항시사’에서도 확인된다.포항 지역은 울산 방어진과 더불어 포획 고래두수가 많아 고래어장이 성업을 이루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구룡포 근해에 고래 어장이 형성되어 강두수의 해승호가 1951년 12월 20일 허가를 득하여 포경업을 시작한 사실이다. 그 후 주길호, 제9영어호 등을 투입하여 구룡포항을 고래잡이 어항으로 변모시켰다. 포경허가번호 1호, 2호, 3호는 구룡포에 소재하였는데 우리나라 근대 포경의 원조라 할 만큼 이 지역의 포경업이 발달했다.제3장 수산업, 포항시사, 포항시, 2010, 419쪽배 : 목조선으로 그 큰 고래를 잡았다는 얘기인가요?강 : 목선에 망통(고래를 찾기 위한 전망대)과 총을 설치해 포경선으로 썼다고 들었어. 포경선은 모두 구형 동력선이었지. 지금과 같은 디젤 엔진이 아니라 소구기관 엔진(이른바 ‘야키다마’라고 한다)을 사용했어. 먼저 열을 가하는 과정이 필요한 엔진이지. 디젤 엔진으로 교체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들어서야. 처음에는 운전할 줄 몰라 애를 먹었지.우리나라 포경업은 1960년대 중반부터 포획 두수가 증가해 1970년대 중후반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다. 1976년 8월 28일 자 ‘경향신문’에 당시 50대인 강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구룡포항에서 27년간 고래잡이만 했던 강두수 씨(58)는 지금은 읍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다. 20t급 부경호로 잡은 고래만 수백 마리라고 자랑한다. 길이 5m 정도의 고래 한 마리가 50만 원 정도, 운 좋은 날이면 아침나절 출항하여 어둡기 전에 1마리를 잡는다.‘해풍 따라 마을 따라-구룡포’, ‘경향신문’ 1976년 8월 28일배 : 포경선을 타본 적이 있나요?강 : 학창 시절 포경선을 타고 바다에 나간 적이 있어. 할머니가 배를 타면 안 된다고 야단쳤지만 삼촌에게만 귀띔하고 몰래 탔지. 어린 나이의 호기심이었어. 선박에는 아무나 안 태우거든. 누가 멀미라도 하면 신경이 그리로 쏠리니까. 포경선은 당일 돌아오니 슬쩍 다녀오곤 했지. 어선에서 먹는 밥은 짭조름했어. 식수가 귀한 시절이라 바닷물로 먼저 쌀을 씻고 나서 민물을 넣어 앉혔거든. 목선이지만 장작불을 피워 밥을 지었어. 연기가 얼마나 나는지 조리장 얼굴이 시커멓게 되었지. 파도가 센 날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면 다리가 뻐근했어.배 : 포경선에는 누가 탔나요?강 : 포수와 선장, 갑판장과 기관장, 조리장 등 대개 예닐곱 명이었어. 선장이 망통에 올라가 고래가 있는지를 살폈어. 체구가 작고 재바른 나도 망통에 올라가서 구경했지. 고래를 잡으려면 선장과 포수의 호흡이 중요해. 고래는 수면 바로 아래로 다니는데 윤슬과 구분이 안 되거든. 고래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해. 고래를 잘 보는 이들은 시력이 탁해진다고 술도 안 먹었어. 고래를 발견하면 ‘눈값’도 받았지. 포경선은 아무나 못 탔어. 포경선 선원은 고급 인력에 속했지. 그래서 다른 배를 타다가 포경선에 태워달라고 사정하는 선원도 있었어. 새벽에 나갔다가 해가 빠지면 돌아오니 일하는 시간도 좋고. 그때는 주로 대보와 감포까지 나가서 고래를 잡았어. 구룡포 해안선을 따라 귀신고래가 자주 출몰했지.일명 ‘눈값’의 구체적인 액수는 포경선 선원이던 고(故) 김복엽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고래를 잘 찾아내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명포수만큼이나 대우를 받았다. 선원들의 월급은 육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비슷했지만 고래를 잡는 성과에 따라 돈을 더 받을 수 있었다. 고래를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는 월급의 15%를 얹어줬고, 1마리를 잡을 때마다 월급의 10%에 해당하는 돈을 추가로 더 받았다.‘4장 해방 후의 수산업과 어업조합’, ‘구룡포수협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 2016, 246쪽배 : 고래를 포획하는 장면도 보셨나요?강 : 포경선은 총포 허가가 있어야 해. 대포로 작살을 쏴 고래를 잡았어. 촘촘한 금 저울에 화약을 부어 작살을 쏘았지. 작살 촉이 고래 살에 박히면 자동으로 날개가 펴져 빠지지 않았어. 창끝은 고래의 심장을 향해 있었지. 바다도 땅처럼 딱딱해서 작살을 사선으로 쏘아야 해. 위에서 바로 꽂으면 작살이 구부러지지.배 : 구룡포에서 고래가 많이 잡혔던 이유는 뭘까요?강 : 만(灣) 지형에 크릴새우가 많아서야. 크릴새우가 지나가는 길목에 고래가 몰려들었지. 물을 들이켰다 크릴새우만 남기고 뱉는데, 크릴새우가 풍부하니 고래 살집이 좋았지. 당시는 고래가 해안 가까이에서 잡혔기 때문에 포경선에서 육지가 보였어.배 : 고래를 잡아오면 해체는 어떻게 했나요?강 : 고래 해체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어. 작업자의 체온에도 고래 살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자루가 긴 칼로 빠르게 해체했지. 고래 해체 작업을 하면 신선한 육회를 먹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소금 한 줌, 소주 한 병 가져와서는 고래 바로 옆에서 먹었어. 그때는 비교적 저렴하게 고래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어. 고래 고기는 열두 가지 맛이 난다지. 젖먹이 동물이라 그런지 몇 해를 냉동공장에 보관해도 표면만 걷어내면 뒤탈이 없었어.배 : 주로 포획된 고래 종류는 뭔가요?강 : 밍크고래가 주로 잡혔고, 몸집이 큰 나가수(참고래)도 더러 잡혔어. 맛 차이는 크게 없었고. 대형 고래는 기름을 얻기 위해 필요했어. 표피층이 두꺼워서 기름이 많이 나왔지. 겨울에 잡힌 고래는 지방층이 두꺼워 기름이 더 많았어. 고래기름은 드럼통에 담아 팔았지. 정제해서 화장품 원료로 쓴다더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영업 중인 고래식당 사장은 칠십 대인데도 피부가 고와.배 : 당시 포경업자들은 큰돈을 벌었겠군요?강 : 밍크고래 몸통이 어른 앉은키 정도 되었지. 당시 밍크고래 한 마리가 30만~50만 원 정도였어. 날씨가 안 좋으면 한 달에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운이 좋으면 하루에 두 마리도 잡았어.강신규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

2023-06-28

일본인에 포경선 인수받아 자수성가한 아버지

“그 어른 참 대단한 분이셨지.” 구룡포항에서 만난 한 어민이 ‘강두수’ 석 자를 듣고 한 말이다. 구룡포에서 오래 살았다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라고 덧붙였다. 구룡포의 수산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자본과 기술력으로 형성되었다. 광복 후 지역 수산업계는 한국인으로 재편되는데, 그 과정에서 구룡포 수산업을 주도한 인물 중에 강두수가 있다. 그는 포항과 구룡포에서 고래잡이를 처음으로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자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구룡포 수산업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60~70년대, 구룡포 수산업을 이끌었던 강두수의 생애를 그의 아들 강신규 선생을 만나 들어보았다. 배은정(이하 배) : 고향 구룡포에서 지내고 계시지요?강신규(이하 강) : 배를 타지 않지만, 뱃일은 하고 있어. 어선의 사무장을 맡아 출항을 돕고 잡아온 고기를 새벽 경매시장에 내다 팔지. 선원을 충당하는 것도 내 일이야.배 : 1947년생인데, 어린 시절의 구룡포를 기억하시나요?강 : 구룡포항은 지금과 다르게 모래사장이었어. 모래사장을 매축(埋築)해 항구를 만든 거지. 구룡포항 맞은편 대로변의 적산가옥에서 살았어. 천장이 높은 다다미방으로 여름에는 통풍이 잘되고 겨울에는 햇볕이 들어 따뜻했어. 지금은 식당으로 쓰이고 있지. 다락방은 예전 그대로였는데, 최근에 다 정리했다더군. 1960~70년대의 구룡포는 포항보다 부촌이었고, 우리 집도 부유한 편이었어. 어릴 적에 친구들이 양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닐 때 나는 보온 도시락을 갖고 다녔으니까. 점심시간이 되면 외삼촌이 교실로 가져다주었지.배 :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강 : 할머니, 부모님과 함께 살았어. 위로 누나가 셋인데 둘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나와 일란성 쌍둥이인 형이 그다음이야. 열 살 아래 남동생이 있었고. 어쩌다 보니 둘째 누나와 나, 막내만 살아 있군. 할머니와 아버지, 동생은 몸집이 컸지만 나와 쌍둥이 형은 왜소했어. 우유가 귀한 시절이어서 마을 아주머니들에게 젖동냥을 했지. 그분들을 ‘젖엄마’라고 불렀는데 열두 명이나 되었어. 쌍둥이 형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연탄가스 사고로 먼저 저세상에 갔고. 어머니는 7남매의 맏이였는데, 막내 외삼촌이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어. 배 : 윗대부터 구룡포를 터전으로 살았나요?강 : 대보에서 살다가 개종하면서 구룡포로 왔다고 들었어. 할머니가 허씨였는데 한마디로 여장부였지.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장작을 피워 무쇠솥에 밥을 안치던 분이야. 당시는 무속이 강해서 다들 갯바위에 초를 피우고 기도했어. 그러다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선교사의 말을 듣고 개종했지. 찬장 위에 둔 신줏단지를 깨뜨리고 담배도 끊고 교회를 다녔다고 하니 대단한 분이지. 대보 1리에 강씨 문중 입향조 묘가 있지만 개종한 뒤로는 발길이 뜸했어.배 : 구룡포에서 태어나서 줄곧 고향에서 보내셨나요?강 : 구룡포교회 부설 유치원과 지금은 폐교된 동부초등학교를 다녔어. 동부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줄면서 구룡포초등학교와 통폐합돼 구룡포생활문화센터 아라예술촌으로 바뀌었지. 중·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다녔어.배 : 대구로 유학을 가셨군요?강 : 고모가 대구 남산동에 방을 구해 우리 쌍둥이와 사촌들을 보살폈지. 내가 중·고교를 다니던 때가 1960년대인데, 대구는 4·19혁명의 도화선인 2·2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곳이야. 어린 나이에 시위에 휩쓸렸다가 경마 진압대에 붙잡힌 적이 있어. 당시는 말을 타고 시위를 진압했거든. 다행인지 하숙집 주인이 경마 진압대여서 다시 가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줬지.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한달음에 달려와서 다듬잇방망이를 휘둘렀어. 얼마나 놀랐는지 2층 방에서 뛰어내렸지. 부친의 성미가 불같았거든. 자식에게 굉장히 엄해서 눈도 똑바로 못 쳐다봤지. 그런 아버지도 꼼짝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할머니였어. 누나 셋에 쌍둥이 아들이 둘이어서 할머니가 쌍둥이 아들을 엄청 챙겼어. 할머니에게 우리 쌍둥이는 귀한 손자였기 때문에 손도 못 대게 했지.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 치마폭에 자주 숨었어.배 : 강두수 선생과 할머니가 닮으셨나 봅니다.강 : 방학이 되면 바람도 쐴 겸 외삼촌 배를 탔는데, 한번은 저인망어선을 타고 속초 앞바다로 가서 노가리와 기름가자미, 참가자미, 도루묵을 잡았지. 그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왔어. 얼마나 놀랐던지 그 추운 겨울날 구룡포로 돌아가려고 거의 전쟁을 치렀지. 속초 비행장에서 ‘세기 항공(1960년대 후반 영업했던 국내 항공사)’을 타고 김포로 갔어. 거기서 서울로 이동해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갔지. 대구에서 차를 대절해 구룡포로 왔고. 그런데 돌아가셨다는 할머니가 두 눈 뜨고 살아 계시더군. 할머니 말씀이, 결혼하라고 불렀다는 거야. 쌍둥이는 같은 날에 결혼해야 잘 산다면서 말이지.배 : 젊은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어요.강 : 할머니를 이길 수는 없었지. 결국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형과 같은 날 결혼했어. 결혼하던 날이 마침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 구간이 개통되던 날이었어. 웨딩카를 타고 고속도로를 난생처음으로 달렸지. 그 뒤로도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에 놀러 다녔던 기억이 나. 1970년대 구룡포에는 자동차가 드물었거든.배 : 살림살이도 할머니가 하셨나요?강 : 할머니와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 배가 출항하기 전에 준비할 게 많거든. 바다에 나가면 주로 고기를 잡아먹지만 그래도 김치나 된장, 채소를 싣고 갔어. 우리 집에서는 해마다 김장을 몇백 포기씩 했지. 출항하면 김치를 단지에 넣어 갔거든. 메주를 뜰 때면 온 동네에 콩 냄새가 퍼졌지. 물 긷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집 안에 우물이 있었지만 해수가 섞여 짭조름했지. 배 : 부친은 어떤 사람인가요?강 : 아버지는 몸집만큼이나 배포가 컸어. 일을 밀어붙이는 힘도 강했지. 집에서 바깥일은 함구했고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 않았어.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어. 할머니의 먼 친척이 지금은 포항제철이 들어선 동네에 살았거든. 아버지는 그 집에서 대구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해. 선교사가 사위로 삼아 미국에 데리고 가려 했지만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해. 아버지는 공부에 한이 맺힌 분이었어. 자식들이 진학할 학과도 아버지가 정해줬지. 판검사의 위세가 대단할 때라 나한테는 법대를 추천하셨어. 나중에 들으니 수협조합장 시절에 워낙 시달렸다고 하더군. 자식이 법대에 가면 하다못해 경찰이라도 되겠다 싶었던 거지. 강두수 초대 구룡포 조합장 배 : 기독교 학교를 다닌 부친이 어떻게 수산업에 종사하게 되었나요?강 : 구룡포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산회사에서 행정을 보신 것 같아. 생전의 부친 말씀이 그 시절엔 일본어를 못하면 수산업을 할 수 없었어. 광복 후 일본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수산 행정에 공백이 생기자 일본어를 잘하는 부친이 그 일을 도맡았을 거야. 기독교 학교를 다녔으니 영어 실력도 있었고. 당시 구룡포에서 영어와 일어를 잘하고 수산업 실무에 밝은 사람이 누가 또 있었겠어. 부친은 일본인에게 포경선을 인수해 자수성가했지.당시 상황을 ‘구룡포수협사’는 이렇게 전한다.강점기 시절 구룡포의 부를 지배하고 독점했던 일본인들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가치가 높은 적산을 적은 돈으로 인수하여 큰 이익을 남기는 기회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단숨에 지역을 이끌어가는 유지로 성장할 수 있었고 큰 부를 누리게 되었다. 해방 후 어업을 통해 구룡포 지역의 유지로 성장하였던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이상택, 안원수, 최사준, 신석주, 이완백, 고치원, 강두수, 문용화 씨 등이다. ‘해방 후의 수산업과 어업조합’, ‘구룡포수협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 2016, 225쪽 배 : 강두수 선생이 운영한 어선은 몇 척인가요?강 : 포경선 세 척과 꽁치 배 두 척이 있었어. 흑산도까지 가서 조기와 꽁치를 잡았지. 포경선 생김새는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제1동건호를 보면 돼. 실제로 고래를 잡던 어선이야. 고종사촌인 김건호 형님이 기증했지.강신규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

2023-06-25

인간 상록수의 못다 이룬 꿈

지금 포항에서는 의과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20여 년 전에도 포항에서는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의 합병과 더불어 의과대학 설립 및 의대 부속병원 건립의 꿈이 무르익었고, 그 중심에 김종원 원장이 있었다. 김종원 원장은 지인들에게 자신은 소망을 거의 다 이루었는데 두 가지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다. 하나는 북에 두고 온 세 아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포항에 의과대학과 의대 부속병원을 설립하지 못한 것이었다.김 원장은 교육사업에도 굵은 발자취를 남겼다. 1983년 포항간호전문대를 인수해 선린대학을 세웠으며, 1997년에는 의과대학 설립을 위해 자산 규모 1천억 원이 넘는 경북 최대 종합병원인 선린병원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했다. 의과대학 신설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한동대학교가 회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 지금 인터뷰 장소인 선린대학 본관은 고인의 호를 따서 ‘인산관’이라 부르고, 고인의 유품이 전시된 기념관도 있습니다. 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선린대학으로 바꾸셨는데 의료 인력 양성에 관심이 많으셨나 봅니다.김 : 당시 선린병원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현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실이 공립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함으로써 이루어졌지. 경북도립 포항간호기술학교는 1969년 개교 이래 교육정책의 변화에 따라 포항간호전문학교(1972년)와 포항간호전문대학(1979년)으로 개편되어 운영되다가, 1982년 말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모든 공립 간호전문대학을 사립화한다는 문교부의 발표가 있자 8개에 달하는 대구·경북 지역의 기관과 개인들이 학교를 인수하려고 뛰어들었어. 문교부의 방침이 나오자마자 선린학원 설립 이사회를 열고 김종원 원장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본격적인 인수 절차를 밟았지. 대아그룹의 황대봉 회장도 인수를 추진하다가 평소 친분이 있던 김종원 원장님의 뜻을 알고는 흔쾌히 양보했어.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성공적으로 인수한 다음에는 내가 선린학원에 파견되어 부지 물색 등 행정 절차를 밟았지. 선린대학교는 이후 보건 계열의 명문 학교로 자리를 잡았어.이 : 한동대학교 기증과 의과대학 설립 추진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나요?김 : 1995년 3월 한동대학교가 개교한 후에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지. 어느 정도였냐면 상수도 요금을 못 냈어. 이듬해 김영길 한동대 총장이 김 원장님을 찾아왔어. 그때 원장님은 일선에서 물러나 협동원장으로 계셨지. 김영길 총장은 한동대학교의 학생 수가 470여 명밖에 안 돼 등록금 수입으로는 학교 운영이 어렵다고 했어. 그러면서 선린병원의 재정적 도움을 받기 위해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를 합치자고 제안한 거야. 병원이 학교에 흡수되는 형태인데, 그렇게 되면 한동대학교 선린병원이 되는 거지. 이 : 그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재분리 절차를 밟게 되지 않습니까?김 : 당시 원장님은 평생의 꿈인 의과대학 설립과 부속병원이 가능하다 싶어 김영길 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대도 컸었지. 한동대학교는 선린병원과 합치면서 금융기관으로부터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돼 학교 재정에 숨통이 트였어. 그런데 의과대학 신설은 지역 할당제라는 정부 방침 때문에 사실상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야. 의대를 세우고 부속병원이 되어야 비과세 혜택을 보는데 그게 아니다 보니 병원이 수익사업체가 되면서 수십억 원의 세금 폭탄을 맞게 되고, 그 바람에 잘나가던 선린병원의 경영에 큰 어려움이 닥쳤지. 그래서 다시 학교와 병원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어. 그 과정에서 학교와 병원이 소송전을 벌이며 불편한 관계가 되었지. 그렇게 분리해서 선린의료원이라는 의료법인을 만들었지만 건물 이전 등기 비용이 없을 정도로 경영이 어려워졌어. 김 원장님은 의과대학 설립의 꿈도 이루지 못하고 병원 경영도 어렵게 되는 걸 보시고 소천하셨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이 : 한동대학교를 통한 의과대학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한동대학교에서는 원장님께 고마움이 크겠군요.김 : 김영길 총장님이 원장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했는데 이런 내용이 있어. “한동대 개교 직후 초면인 저에게,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은 지역 사람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국내외 오지와 북한에 의료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며, 풍전등화의 재정 위기 상태인 학교에 평생을 바쳐 키워 오신 선린병원을 한동대에 기증하셨고 그 뜻이 학교엔 큰 버팀목이 되었다.”이 : 사단법인 한국상록회는 국가와 민족에 헌신하고 봉사하며 올곧은 삶을 살아온 사회 원로를 ‘인간 상록수’로 추대하고 있는데, 김 원장님이 이 상을 받으신 것도 한동대에 선린병원을 기증하신 것 때문인가요?김 : 그렇지. ‘인간 상록수’는 한국상록회 전국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상이지. 1999년에 “평생 일군 재산인 선린병원을 후학 양성을 위해 한동대학교에 기증해 무소유를 실천하셨다”며 김 원장님을 제14대 인간 상록수로 추대하셨어.2007년 3월 26일,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인술을 베푼 김종원 원장은 한 줌의 재로 돌아가셨다. 김 원장은 1984년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을 비롯해 1984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로부터 사회봉사상을 받았고, 1985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제14회 월남상 수상에 이어 1991년에는 포항시민상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제14회 인간 상록수상 수상자로 추대되기도 했다. 고인의 장례는 선린병원, 한동대학교, 선린대학, 포항북부교회(현 기쁨의 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포항노회 등 5개 기관 연합장으로 치러졌으며, 3월 28일 본원 발인 예배에 이어 포항북부교회 발인 예배 후 1983년부터 교육사업을 펼쳤던 선린대학교 교정을 거쳐 봄볕 따사로운 경주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김화문 기쁨의 교회 원로장로와의 인터뷰는 네 차례에 걸쳐 기쁨의 교회와 선린대학교 인산관에서 진행되었다. 인터뷰에는 기쁨의 교회 김정치 원로장로와 한동식 장로가 함께 배석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수고해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저는 거룩하게 사회사업을 위해 이 병원을 한동대학에 기증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잠시 맡겨주셨던 것을 이제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뿐입니다.”- 《빛과 소금》 1998년 11월호.“이제 본인은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하여 양질의 의료 인력을 양성토록 추진할 것이며 보건계열 학과를 증설하고, 나아가서는 의과대학까지 발전시켜 고급 인력을 길러 지역은 물론 국가 발전에 기여하겠습니다.”- 1983년 1월 문교부 제출 선린학원 설립 허가 신청서 중에서.끝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10-12

인술(仁術)의 큰 산이라 하여 ‘인산(仁山)’이 되다

김종원 원장은 단순히 명의(名醫)가 아니라 한평생 사랑과 헌신의 인술(仁術)로 일관한 의인(義人)이었다. 인산(仁山)이라는 호(號)를 가진 그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한 후 집 앞 교회에 가서 100여 가지의 제목을 놓고 기도한 다음 병원으로 출근했다. 집과 교회, 병원을 오가는 절제 있고 규칙적인 생활이어서 병원 직원들은 그의 출근을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진료실이 높이 있어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으로 걸어 다녔다.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고 지각도 하지 않았으며, 날이 밝기 전에 집에서 나와 종일 환자를 돌보고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삶을 평생 살았다.자신의 진료실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어 일사병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신학생과 고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해 학업의 길을 가게 했다. 아내 송공현 여사의 가계부를 보면 콩나물값까지 빼곡하게 적으면서도 수입의 60퍼센트 넘게 교회 헌금과 지인들의 장학금 지원으로 지출했다.그가 이 세상에 남긴 업적 가운데 하나는 선린병원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1997년에 1천억 원이 넘는 병상 700개 규모의 선린병원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함으로써 당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한동대를 살리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병원과 학교를 사회에 내놓고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서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다가 떠났다.재산 소유나 증식의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모두 거부하고 천명(天命),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다.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에게 헌신하며 살아간 것이다. 후배 의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즈니스 하지 마라. 히포크라테스 정신으로 진료하라”고 말했다. 힘들고 어려운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치료하고 헌신하는 자세야말로 큰 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의 호가 ‘인술의 큰 산’을 뜻하는 인산(仁山)인 것은 아닐지. 이 : 원장님은 ‘명의’란 말로 단순화하기에는 너무나 의미가 깊고 큰 생을 사셨습니다. 지금 선린대학교의 본관 건물을 설립자의 호를 따서 인산관(仁山館)으로 붙였는데, 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김 : 호는 김 원장님을 40여 년 동안 지켜본 서영욱 동산의료원 원장이 1999년에 지어주셨지. 서 원장님이 1960년대 말에 선린병원에 들렀다가 부드러운 종이가 없어 신문지로 코피를 막고 진료하던 김 원장님을 보신 모양이야. 그걸 보고서 아프리카 오지의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인물이라며 ‘인술의 큰 산’이라고 하셨지. 사람이 항상 갖추어야 하는 다섯 가지 도리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가운데 인이 으뜸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야.이 : 김종원 원장님은 오래전에 자신의 전 재산을 병원과 대학 등 사회에 모두 환원하셨습니다.김 : 김 원장님보다 검소하게 사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어. 그분은 기독교 신앙관이 투철해서 재물은 잠시 맡았다가 주고 가는 것이라는 청지기관(觀)을 지녔지. 북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며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살아서 되겠나” 하시며 절약과 검소한 생활 원칙을 지키며 사셨어.이 : 본인의 선행을 알리는 것도 꺼리셨다면서요?김 : 원장님은 평소 일기를 썼는데 혹시 자신의 자서전이나 추모집을 발간할 때 근거자료가 될까 싶어 없애버렸지. 언론의 인터뷰는 한사코 거절하셨고. 한동대학에 병원을 기증했을 때도 서울에서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모두 돌려보냈어. 선행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셨지. 매달 수십여 곳에 도움을 주면서도 어느 누구에게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없어. 이 : 김 원장님이 평소에 근검하고 절약한 일화를 좀 들려주시지요.김 : 병원 수입을 철저히 투명하게 관리했어. 정작 본인이 받은 급여로는 교회 선교비와 장학금으로 썼지. 사모님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가계부를 꼬박꼬박 적으셨어. 내가 경리 업무를 맡았을 때인데, 매일 수입 지출 장부와 현금통을 퇴근하면서 원장님이 사시는 사택에 갖다주고 아침 출근길에 찾아왔지. 아침에 장부를 받아보면 밤새 검토해서 한 푼도 허투루 사용되지 않도록 붉은색 사인펜으로 표시를 해두었어. 병원에 딸린 사택은 낡고 허름해서 비가 자주 샜지. 주일날 교회에 계시다가도 비가 오면 사모님에게 전화해서 서재에 보던 책이 있는데 비에 젖을 수 있으니 그걸 옮겨달라고 통화하는 걸 듣기도 했어.김종원 원장의 감동적인 삶은 다음의 기사가 잘 요약하고 있다.종합병원을 세웠으면서도 재산이라고는 병원에서 준 관사 하나와 매달 받는 월급이 전부. 월남할 때 업고 온 젖먹이 외아들이 객지에서 숨져 갈 때도 환자를 돌보느라 아들에게 달려갈 수 없었던 사람. 고아와 환자를 위해 몸 바친 훈훈한 이 할아버지 인술의 한평생.- 《주부생활》 1987년 1월호.이 : 경북 동해안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 원장이면서도 참 청빈한 삶을 사셨군요. 막사이사이상(The Ramon Magsaysay Award)을 수상한 장기려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었다고 들었습니다.김 : 두 분 다 북에서 남으로 오셨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같이 다녔고 평양의학대학에서 의사로 재직할 때 김종원 원장님은 소아과, 장기려 선생님은 외과에 계셨지. 두 분이 친해서 왕래가 잦았는데, 인술을 베푼 훌륭한 의사라는 공통점도 있지.이 : 장기려 선생님이 김 원장님을 만나러 포항에 오셨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세요.김 : 한번은 부산에 계시던 장기려 선생님이 포항에 오셨는데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 김 원장님이 죽도시장에서 양복을 한 벌 사서 입혀드렸지. 장 선생님은 양복을 입어보고는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부산으로 가셨어. 그 후 김 원장님이 부산에서 장기려 선생님을 만나 그 옷이 괜찮았는지 물었더니 포항역에 있던 노숙자에게 훌렁 벗어주고 부산으로 갔다는 거야.김종원과 장기려의 인연인산(仁山) 김종원의 삶은 성산(聖山) 장기려의 삶과 여러모로 겹친다.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쟁통에 월남한 후 부산 영도에 병원을 세워 피난민을 무료로 진료했고,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도 치료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김종원도 1914년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태어나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장기려와 함께 평양의학대학병원에 근무하다 월남한 후 대구를 거쳐 포항에서 전쟁고아를 위해 세워진 무료 진료소에 자원했다.김종원이 북에 아들을 두고 온 것처럼 장기려도 아내와 네 자녀를 두고 단신으로 내려와 부산에 정착했다. 장기려는 노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집 한 칸 없이 소외된 사람들을 섬긴 ‘작은 예수’라 불렸으며, 김종원도 아낌없이 베푸는 무소유의 의술을 펼쳤다.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10-10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청진기를 놓지 않아

한 사람이 특정 분야에 오랫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마음먹는 것도 어렵지만 실제로 행동하기는 더 어렵다. 김종원 원장은 전쟁고아와 어린이들을 치료하고 보살피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루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하고, 그것도 모자라 틈나는 대로 포항의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의료봉사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김 원장이 그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김 원장이 전쟁고아와 어린이들에게 헌신했던 이유와 상황에 대해 들어보았다. 이 : 김종원 원장님은 어린이와 고아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김 : 소아과 의사라는 점도 있지만 진심으로 어린이를 사랑하셨어. 그리고 세 아들을 북에 두고 온 것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겠지. 그 심정을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보호자가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게 눈에 띄면 호통을 치는데, 세상에 어느 의사가 그렇게까지 하겠어.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지. 그래서 아이들, 특히 고아들을 만나면 늘 따듯하게 보듬어주셨어.이 : 어린이 환자들에게는 어떻게 대하셨나요?김 : 원장님은 어린이와 고아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있었어.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는데, 그 피조물이 이렇게 아프다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한테도 같은 맥락에서 차별 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원장님의 인술은 깊은 철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어.이 : 아픈 아이가 진료를 받으러 오면 무엇부터 하시던가요?김 : 병원 진료실에 아이가 들어오면 안아서 등을 토닥이며 이름부터 불러주지. 그러고는 축복의 말씀을 해주고 나서 아이 엄마를 보고는 “아이를 어떻게 돌봤기에 이렇게 아프게 되었냐”며 한마디 하시지. 화장하고 오는 엄마들에게는 냄새와 알레르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아프다며 꾸짖는 바람에 병원 복도에서 화장을 지우는 엄마들도 많았어. 요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진풍경이지.이 :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의 초대 소장을 맡으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를 치료했는지 혹시 들어보셨는지요?김 : 내가 선린병원에 오기 9년 전의 일이지. 주변 사람들한테 들은 바로는, 소아진료소는 기증품으로 겨우 버텨 나갈 정도였는데 한 명이라도 더 돌보고 싶은 욕심에 전쟁고아를 무려 1천여 명이나 받았다고 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지. 그만큼 6·25전쟁 때 포항 전투가 치열했다는 얘기야. 길거리 곳곳에 고아와 남편을 잃은 산모들이 즐비했다고 하거든. 김 원장님은 어떻게든 한 아이라도 더 치료하고 보살펴주고 싶었던 거지. 포항뿐만 아니라 경주와 안강에서도 고아들이 몰려들었다고 들었어. 1960년 선린의원.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이 : 병원 진료 외에도 고아들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셨다면서요?김 : 원장님은 휴일이면 선린애육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해. 당시 선린애육원은 120여 명의 전쟁고아를 돌보는 시설이었는데 잦은 병치레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어. 원장님은 틈나는 대로 선린애육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살폈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흥해애육원과 가톨릭애육원(성모자애원)까지 가서 아이들을 보살폈지.이 : 소아진료소가 1956년 4월 미 해병의 철수로 존폐의 기로에 섰을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김 : 원장님은 당장 약품을 구입해야 했기에 선린의원으로 이름을 바꿔 일반 환자들을 받기 시작했지. 하지만 여전히 고아가 최우선이어서 고아들에게는 무료 진료를 고수했어. 진료소는 1960년 6월 선린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62년 8월 재단 이사회를 구성해 선린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했지만 병원 경영이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재단법인 소유로 못박았지.이 : 김 원장님은 무리하게 진료하다가 몸이 많이 상했다고 들었습니다.김 : 의사이면서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는 분이었지. 요즘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 아닐까 싶어. 진료뿐만 아니라 온갖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지. 한번은 고아원의 겨울나기 준비를 하는데, 장작을 패다가 왼쪽 눈에 나뭇조각이 날아들어 동공을 다친 적도 있어. “환자 두고 갈 수 없다”넷째 걸수의 죽음김종원 원장에게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 그의 막내아들이 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그는 손에서 청진기를 놓지 않고 환자를 돌보았다. 유일하게 함께 월남한 막내아들 걸수가 서울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입시 공부를 하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다. 사고 소식을 접한 김 원장은 “내 아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나를 바라보는 환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면서 진료실을 지켰고, 끝내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다.김화문 장로에 따르면 “지금 서울에서 아들이 죽어간다”고 하자, 김 원장은 “내가 거기 간들 살릴 수 있나? 살릴 수 있으면 달려가지. 그런데 살릴 수 없는 애 때문에 내가 가버리면 하루에 300명 넘게 오는 애들은 누가 진료하노”라고 했다.김 원장의 부인인 송공현 여사가 급히 서울로 간 후 병원 직원과 북부교회 신도들은 김 원장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뒤늦게 서울로 올라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김 원장을 보고는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40대였던 김 원장의 머리가 며칠 사이에 허옇게 세어버린 것이다. 이 같은 아픔 탓인지 김 원장은 나이 어린 환자들을 보면 눈가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히곤 했다. 걸수는 경주공원묘역 양지바른 곳에 묻혔고, 수십 년이 지난 2007년 봄날 김 원장은 먼저 떠난 자식의 곁에 묻혔다.“폭격으로 군데군데 파인 포항 시내 웅덩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너 명의 고아들을 보자 북에 두고 떠나온 세 아들 얼굴이 겹쳐지더군요. 그래서 영영 만나지도 못할 아들들 대신 고아들을 내 자식으로 생각하고 영원히 돌보기로 결심했었죠.”“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헤매는 아이들을 보면서 북한에 두고 온 우리 아이들도 저러고 있겠구나…. 허름한 폐가라도 들어가 출산하려는 임산부들이 내 가족 같습니다.”“그런데 내가 여기서 월급이나 받아가지고 밥이나 먹고 살아서 되겠는가 싶어서…. 내 작은 기술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해보자는 마음으로….”- 김종원 원장 생전 육성 고백 중에서/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10-05

하루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하다

선린병원 현관에는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글귀가 붙어 있다. 이 글귀에는 김종원 원장의 인생철학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가 선린병원에서 진료한 환자 숫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게끔 이끈 것일까?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글귀를 이해해야 비로소 김 원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원장이 어떤 여건에서 어떻게 환자들을 대했는지 들어보았다. 이 : 김종원 원장님의 우연한 포항 방문이 포항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군요. 선린병원의 설립 목적은 무엇이었나요?김 : 법인으로 전환하기 전에는 전쟁고아와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임산부를 위한 모자 보건사업을 펼치는 것이었지.이 : 소아진료소가 1953년에 문을 열었고, 그 후 선린의원을 거쳐 재단법인 선린병원이 1962년에 설립되었군요.김 :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 해병대의 도움으로 전쟁고아를 무료로 진료했는데 1956년 미 해병대가 철수하자 문제가 생겼지. 그들이 주고 간 약품과 장비로 몇 년은 버텼는데 무료로 병원을 계속 운영할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1960년에 일반 환자도 받으면서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선린의원을 시작했지. 이 : 그때 병원의 진료 환경은 어땠습니까? 지금 포항의 50~60대 중에 원장님의 청진기를 몸에 대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던데요?김 : 50대, 60대뿐만 아니라 70대까지도 원장님의 청진기 앞에서 배를 보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지. 3대가 내리 원장님 진료를 받은 집안도 많아. 당시에는 포항에 의료시설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할아버지 원장님의 실력이 전국에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진료를 받으러 올 정도였어. 문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환자였지. 하루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혼자 감당하셨어. 통금이 해제되면 병원 복도에 아이들과 엄마들이 줄을 서 있는데 어쩔 거야. 에어컨도 없는 진료실에서 몸이 상하고 심지어 코피를 쏟으며 진료하셨지.이 : 일요일에는 휴식도 취하고 교회도 가야 했을 텐데, 감기와 열병이 유행할 때는 일요일도 없었다고 들었습니다.김 : 원장님의 철칙은 아파서 찾아온 환자가 있으면 마감 시간이 따로 없다는 거야. 원장님과 간호사들은 독감이 유행할 때는 주일날 예배시간을 빼고는 진료했는데, 그때도 점심시간과 화장실에 가는 시간 빼고는 환자를 보셨어. 그러다 보니 간호사나 약국 직원들도 퇴근이 늦어졌지만 불평 하나 없었지. 아픈 아이를 그냥 돌려보내면 밤새 고통받을 텐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원장님의 신념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이 : 원장님을 가까이서 모신 직원들도 원장님의 신념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원장님은 평소에 어떤 말씀을 자주 하셨나요?김 : 나뿐만 아니라 직원들 대부분 평생직장처럼 병원에 오래 근무했어. 박봉이었고 근무시간이 따로 정해지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한없는 인술을 베푸는 원장님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지. 그리고 직원들에게 “이권에 절대 개입하지 마라”, “직장을 여기저기 옮겨다니지 마라”, “약속을 지켜라”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대부분 그 뜻을 따랐어.선린의원의 규모가 커져서 선린병원이 되어서도 김종원 원장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은 여전했다. 1960년대 들어 일반 환자를 받으면서 소아과의 경우 환자들이 하루에 300~400명씩 몰려왔다. 1층 진료실의 반이 소아과 환자들로 북적댔다. 당시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였고, 변변한 응급실도 없던 시절이었다. 선린병원의 진료는 새벽 5시에 시작되었다. 그 시간에 이미 사람들이 몰려오기 때문이었다. 김 원장은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바로 출근했다. 밤새도록 아이가 아파서 울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통금이 해제되고 난 후에도 그는 다른 의사들보다 한 시간 빠른 아침 7시에 진료를 시작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환자들을 진료하고 나면 밤 9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현역에서 물러나 협동원장 시절, 김 원장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술회했다.“일을 많이 한 셈이죠.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꼬박 진료를 했으니까요. 환자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당시 여름에 냉장고가 있습니까, 선풍기가 있습니까? 열사병에 걸려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팠어요. 그럴 때는 물과 소금을 먹으면서 진료했지요.”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 앞에서. 왼쪽 첫 번째가 김종원.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이 : 하루에 300명이 넘는 어린이 환자를 만나면 몸이 성할 리 없었겠습니다.김 : 원장님은 일사병은 달고 살았고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 또 코피를 자주 쏟아 큰 수건을 옆에 두고 진료했지. 하루 종일 아이들의 울음소리 속에 지내다 보니 청력도 안 좋았어. 점심식사는 병원 뒤 사택에 가서 얼른 하고 오셨고.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새벽기도회 갔다가 바로 출근하시지. 그리고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 진료하다 보니 무더위에 일사병에 걸려 대야에 얼음덩어리를 띄워 놓고 진료하기도 했어. 1970년대 중반에 몇 번이나 진료실에 에어컨 설치 결재를 올렸다가 반려되자 직원들이 혼쭐날 각오를 하고 원장님 퇴근 후에 작은 에어컨을 설치했지.이 : 아이들에게는 자상했지만 부모들에게는 엄하기도 했다면서요?김 : 말도 말아. 애들 데리고 진료받으러 온 엄마들이 많이 울고 갔어. 특히 진하게 화장하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온 엄마들에게는 “당신 치장하는 시간에 아이를 잘 살폈다면 애가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서 불호령을 내렸어. 한 번은 해병대 장교를 크게 꾸짖어 보내기도 했어. 그때만 해도 해병대 장교 하면 끗발이 있었는데 원장님이 보호자로 온 그 장교를 세워두고 “당신 이 아이 친아버지 아니지? 어떻게 친아비면 애를 이렇게 방치해놨냐?”면서 호통을 쳤어. 그 일화는 한동안 포항 시내에 퍼져 화제가 되었지.이 : 원장님이 마약사범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면서요?김 : 미군들이 철수하면서 두고 간 약품에 치료용 마약 성분이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는 내용을 몰랐지. 그런데 어느 날 경주지청 마약수사반이 병원에 들이닥쳐서 그걸 조사하는 거야. 당시 이명석 선린애육원 원장의 장남인 이진우 검사가 경주지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원장님과 잘 아는 사이인 데다 의도성이 없는 걸로 확인되어서 별 탈 없이 지나갔지.의사 김종원은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와 선린의원, 선린병원을 거치며 많은 포항 시민들에게 따듯한 인술을 베풀었다. 연탄가스로 일찍 세상을 떠난 김 원장의 4남 걸수의 친구였던 고(故) 정장식 포항시장은 김 원장의 장례식 조사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세 번씩이나 생사를 넘나들던 저의 어머님을 살려주셨습니다. 동빈로 부둣가의 파란색 2층 목조건물이던 세칭 ‘해병대병원’은 의료시설이 열악했던 1960~1970년대 포항 시민의 건강을 보살펴주던 귀한 병원입니다”라고 했다.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10-03

전쟁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포항으로 이끌어

포항의 정신을 상징하는 사람으로 선린병원을 세운 김종원 원장을 꼽을 수 있다. ‘할아버지 원장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김종원 원장은 이 땅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인술을 베푼 의인(義人)이었다. 김종원 원장이 1953년 포항에 세워진 미해병 기념 소아진료소의 운영을 맡은 이후 2007년 숨을 거둘 때까지 포항의 의료와 교육 분야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62년부터 김종원 원장을 가까이서 모신 김화문 기쁨의 교회 원로장로에게 김 원장의 감동적인 삶을 들어보았다. 이한웅(이하 이) : 할아버지 원장님(김종원)을 곁에서 오랫동안 모셨지요?김화문(이하 김) : 1962년에 처음 뵈었으니 2007년 작고하실 때까지 45년간 모셨지. 내가 기쁨의 교회 전신인 북부교회에 학생으로 출석할 때 원장님을 교회 장로님으로 먼발치에서 뵈었어. 그러다가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가 선린의원을 거쳐 정식 법인병원으로 출발하던 1962년에 조직을 갖추려다 보니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야. 그때 나는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항대학의 전신인 포항수산초급대학 상학과 2학년이었는데, 영덕 강구에 있는 동일제관이라는 통조림 제조공장에서 실습을 하고 있었지. 그때 북부교회 이성도 집사님한테서 연락이 온 거야. 선린병원 원장 장로님이 찾으시는데 한번 찾아뵈라고 말이야. 선린병원이 설립될 때 병원 직원은 대부분은 병원과 가까운 북부교회 성도였어. 경리나 회계 쪽으로 직원이 급하게 필요했던 거지. 마침 나는 부기 2급에 상학과를 다니고 있어 유리한 조건이었던 것 같고, 교회에서 원장님이 눈여겨보신 것 같아. 그렇게 김종원 원장님과 만난 후 원장님이 2007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인연이 이어졌지.이 : 병원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어떤 것이었습니까?김 : 처음부터 경리 업무를 맡지는 않았아. 직원 수가 많지 않아 초기에는 모든 직원이 1인 3역, 1인 4역을 했지. 의약분업이 실시되기 전이라 병원 내에 약국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약봉지를 포장하고 배달하는 일부터 시작했어. 그 후에 경리와 회계 업무를 하고, 또 원무 등 병원 행정 업무를 두루 거치게 되었지.이 : 1962년 선린병원이 개원할 때 포항의 분위기는 어땠나요?김 : 6·25전쟁 후 전쟁고아를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가 미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더 이상 약품과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일반 환자를 받아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위해 선린병원을 세웠어. 그런데 원장님의 철학이 영리를 추구하는 개인병원은 안 된다고 해서 돈의 흐름이 투명한 재단법인을 세웠지. 그래서 초기에는 직원들이나 원장님이나 봉급을 제때 받을 수 없었어. 마침 전후 복구가 활발히 진행될 때여서 1962년 5월에 포항이 국제개항장으로 지정되고 6월에는 도립 보건소가 설치된 데 이어 8월에 선린병원이 문을 열었지.이 : 장로님은 선린병원과 한동대 통합 업무를 위해 잠시 한동대학교에서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선린병원에서 보내셨군요.김 : 선린병원이 법인으로 전환된 후 32년간 선린병원에서 김 원장님을 모셨지. 정년 퇴임하고는 한동대학 법인 사무처장으로 5년 있었고. 거기서 나오니까 원장님이 “나 죽을 때까지 같이 있어야지”라고 해서 다시 선린병원에 들어가서 2010년에 퇴직했지.이 : 김종원 원장님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김 : 원장님을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렇게 부르면서 익숙해진 거지. 물론 처음부터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고, 환자로 온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할아버지라고 불러서 그렇게 된 거야. 사실 나한테는 아버지뻘이지. 원장님이 북한에 두고 온 맏아들 정수가 1938년생으로 나하고 나이가 같아. 그래서 유독 나를 챙기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이 : 원장님이 북한에 아들 셋을 두고 온 사연이 궁금하군요.김 : 원장님은 북에 두고 온 세 아들 생각이 나서 그런지 주일날이면 교회 중고등학생들을 앉혀두고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많았어. 애들을 참 좋아했지. 그때 월남하신 이유를 들려주셨어.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김일성대학 의과대학의 전신인 평양의학대학 소아과 의사로 근무할 때 두 차례나 공산당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해. 한 번은 환자가 남쪽으로 내려가 치료를 받겠다고 해서 진단서를 발급했는데, 이 사람이 38선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원장님이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고 했어. 그때 마침 원장님이 평양에 파견된 러시아 고문의 아들을 치료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풀려났다고 해. 또 한번은 6·25전쟁 때 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유엔 한국민사지원단(UNCACK) 병원에 근무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치료해준 것이 문제가 되었지. 1·4후퇴를 앞두고 인민군이 다시 평양으로 들어올 태세였는데 인민군에게 잡히면 처형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해. 그래서 걸을 수 있는 세 아들은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고 아내와 맏딸 정숙, 젖먹이 막내아들 걸수만 데리고 야밤에 고모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급히 온 거야. 세 아들을 곧 찾으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나지 못했지. 그 후 원장님은 고모 가족과 2주 만에 대구에 도착해 동촌 근처 동촌교 밑에서 피난 생활을 하셨어. 이 : 그럼 북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는 안 하시던가요?김 : 왜 안 했겠어. 원장님이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하시다가 포항으로 오신 것도 북에 두고 온 아들 생각 때문이지.이 : 그 이야기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고, 이산가족 상봉도 있었는데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셨겠군요.김 : 당연히 했지.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 씨와는 각별한 사이였어. 평양에 있을 때 같은 집에서 살았지. 임 원장도 1·4후퇴 때 단신 월남해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잖아. 김 원장님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해마다 찾아왔지. 내가 김 원장님을 모시고 서울에서 임 원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아들 삼형제의 안부도 확인했고 상봉할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포기하셨어. 혹시라도 본인의 신분이 노출되어 북한에 있는 아들들이 피해를 볼까 봐서였지.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어. “공산당,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 그 후 미국 시민권을 가진 맏딸 정숙이와 사위가 평양을 방문해 세 아들과 만나고 원장님께 전하는 편지를 받아왔어. 원장님은 그 편지를 참 소중하게 품고 다니셨지.이 : 김 원장님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시면서 어떻게 남한의 의사가 되었습니까?김 : 원장님이 대구 동촌교 다리 밑에서 피난 생활을 하며 근처 공립병원에 일을 봐주다가 우연히 북한에서 함께 근무한 간호사를 만났지. 이 간호사가 자신이 근무하는 동산병원의 황용운 원장 서리를 소개해주었어. 원장님은 마침 북한에서 가지고 온 청진기와 평양의전 졸업장이 있어서 동산병원의 부탁으로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게 되었지.이 : 포항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원장님이 포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김 : 전쟁고아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지. 동산병원에 근무할 때 미국 선교단체와 동산병원, 미 해병대 그리고 경동노회 등 기독교계가 포항의 전쟁고아를 치료하는 진료소를 설립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러던 차에 함께 남한으로 온 고모 가족이 포항에 있어서 찾아가다가 시내 우체국 근처의 포탄 웅덩이 속에 고아 여러 명이 들어가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거야. 그때 북한에 두고 온 세 아들이 떠오른 거지. 그 직후 대구로 가서 포항의 소아진료소를 자원했다고 해.김화문김화문 기쁨의 교회 원로장로는 김종원 원장을 그림자처럼 모신 인물이다. 그 시기는 1962년부터 2007년까지 45년 동안이다. 김 장로는 포항고를 졸업하고 포항수산초급대학 2학년 재학 중에 통조림공장에 실습을 나갔다가 김 원장의 부름을 받아 선린병원에 입사했다. 1938년생인 김 장로는 김 원장이 북한에 두고 온 아들 셋 가운데 장남 정수와 나이가 같다. 1962년 선린병원의 약국 보조사원으로 일을 시작한 김 장로는 경리과장, 원무과장을 거쳐 사무국장, 법인 사무처장을 거쳤다. 선린대학교 설립과 한동대학교 법인(사무처장) 업무를 맡았으며, 정년 후에는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를 오가며 김 원장을 모셨다. 2007년 김 원장이 별세한 후에도 선린의료원에서 근무하다 2010년 퇴직했으며, 대동신협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2022-09-28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았으면

20대, 30대를 전장과 해병 훈련소에서 청춘의 뜨거운 시절을 모두 보낸 사람. 서른이 넘어서는 ‘해병대의 도시’ 포항에 정착해 후배들에게 해병 정신을 북돋으며, 전우회 활동을 통해 또 다른 사회적 봉사를 하고 있는 이봉식 선생. 그는 아흔둘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스무 살 청년처럼 보인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그는 어떤 당부를 하고 싶을까? 홍 : 포항으로 이주할 때는 아직 창창한 시절이었겠습니다.이 : 내가 서른한 살 때인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어. 막내는 포항에서 낳았지. 아내도 교사를 그만둔 때라 생활이 어려웠어. 포항으로 오기 전엔 해병 훈련소가 있는 진해에서 살았고, 아이들도 거기서 학교를 다녔지. 그런데 갑작스럽게 포항으로 왔어. 지금 돌아보면 포항과 나 사이에 특별한 인연의 끈이 있었던 모양이야. 제대 후 선배들이 “전매청 과장 자리를 줄 테니 서울로 오라”고 했는데도 안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야.홍 : 포항과의 60년 넘는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군요.이 : 젊었을 땐 술을 좋아했고 친구들도 좋아했지. 성품이 그러니 술 한잔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많은 이곳이 좋았어. 그래서 해병대 전우들을 떠나지 못하고 포항에서 이렇게 살고 있군. 포항에 정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여기 와서 삶의 이런저런 보람과 즐거움을 많이 느끼며 살았으니까.홍 : 훈련소 시절에 해병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건 무엇인가요?이 : 해병대에는 전통이 있어. 그게 해병대 정신이기도 해.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이걸 강조했어. 강인한 체력과 정신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었지. 해병대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내 임무였어. 그래서 교육을 혹독하게 했어. ‘이걸 감당하지 못하면 해병 전통을 이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어. 해병대 1기는 하루에 한 끼를 먹고도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았어. 싸우면 이긴다는 게 해병의 긍지야. 그걸 훈련병들에게 인식시키는 게 훈련소 교관이던 내 임무였어. 아직도 젊은 시절과 마찬가지로 해병대에 대한 애정은 물론이고, 함께 싸우고 고생한 전우에 대한 사랑이 여전해. 그런 마음이 나를 포항으로 이끈 것이기도 하고.홍 : 포항으로 오고 나서 1960~1970년대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이 : 군대를 나와 고향으로 가느냐, 서울로 가느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포항으로 왔지. 그때까지 포항은 두 번 와본 게 전부였어. 20대 중반 때 부대 인수 작업을 하려고 왔더랬지. 당시엔 부대에 울타리도 없고, 미군들이 비행장을 꾸리고 있던 자리인데 그저 넓기만 했어. 그 인수 작업을 한다고 몇 달 동안 포항에 있었지. 포항에 오게 된 건 누구의 권유라기보다 스스로 해병대와의 인연을 끊지 못해서였어.홍 : 어떤 인연인가요?이 : 11년간 해병 생활을 하다 보니 해병대 사단이 있는 포항에 마음이 갔어. 당시엔 포항으로 해병부대가 속속 옮겨오던 때이기도 했고, 동기와 후배들이 많았지. 그들이 “함께 포항에서 지내자”는 얘기를 했었고, 마음이 움직였어. 해병대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였지. 오천 인구가 3천 명 정도일 때 포항으로 왔어. 사격장 근처 마을에 방을 얻어 살림을 시작했어. 가진 것 없이 낯선 고장에서 생활을 이어갔지. 그때는 포항의 길 대부분이 비포장이었어. 먼지가 풀풀 날리던 과거 포항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 친구가 차린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다른 일을 하기도 했어. 고생이 심했던 시절이야.홍 : 포항에 정착한 이후의 기억을 들려주시죠.이 : 오천에서 시내로 나오려면 지금 포스코가 있는 동촌을 지나야 했지. 온통 비포장길인데 걸어서도 나오고, 차를 얻어 타고도 나왔어. 차가 달리면 길 양쪽으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지. 당시 건설업에 손을 댄 친구가 있어서 그 일을 돕기도 했어. 형산강을 건너는 다리도 나무로 만들어졌던 시절이지. 다리 옆을 보면 갈대밭이 우거져 있었어. 지금 고속터미널 자리와 오거리 앞이 전부 갈대밭이었지. 죽도시장에서 할머니들이 생선 몇 마리를 놓고 팔던 게 기억나는군.홍 : 그 시절엔 다들 가난했지요.이 : 경작할 논밭이 넓은 것도 아니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을 배를 가진 사람도 드물었어. 그러다 보니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사는 이들이 많았지. 그런 상황이었으니 한때는 ‘내가 포항에 괜히 온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했어. 하지만 젊을 때였고 일단 결심하고 왔으니 잘살아보려고 노력했지. 아내도 오천에 작은 가게를 열어 시내에서 물건을 떼와 팔았어. 하지만 자존심을 버리지는 않았지. 목숨을 건 전투에서 살아남은 해병대 1기로서 당당하게 살고자 했어. 면장, 지서장, 우체국장 등도 좋은 자리가 생기면 나를 부르곤 했지. 홍 : 포스코가 건립되는 과정도 봤겠습니다.이 : 1960년대 중반에 대규모 월남 파병이 있었고, 그 무렵 포스코가 포항에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공장 건설을 위해 기술자들이 측량하고 그러니까 포항 사람들도 마음이 들떴고, 전국에서 건설업자들이 몰려들고 그랬지. 그러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났어.홍 : 어떤 일을 하며 포항에서의 청장년 시절을 보냈나요?이 : 작은 금융회사를 차려 직원 두세 명을 두고 일했어. 그때는 신고만 하면 그런 업종을 허가해줬지. 그런데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일이 내 성격에 맞지 않았어. 게다가 같은 업종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도 했고. 중도에 손해를 보고 접었어. 포스코가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하청업체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는데, 내가 무슨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군대밖에 모르던 사람이니 쉽지 않았지.홍 : 죽도시장에서 점포도 운영했다면서요.이 : 지금은 현대화된 모습이지만, 내가 젊은 시절의 죽도시장은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도 발이 빠질 정도였어. 상인들은 고래고기와 생선 등을 노점에서 팔았지. 말 그대로 서민들의 애환이 가득한 곳이었어. 거기서 육계 사업을 했어. 닭을 사와서 파는 일이었지. 아이들 교육하고, 밥 굶지 않을 정도로 살았어. 나만 아니라 대부분의 포항 사람이 그랬지.홍 : 다른 일은 하지 않았나요?이 : 포항에서 만난 친구가 보경사 미술관 운영을 맡아달라고 해서 그걸 했어. 22년 전이었으니까 일흔을 앞두고 있을 때지.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일했어. 종무소 옆 사무실에 불교 관련 미술품이 많았는데 그걸 관리하고 판매하는 일이었지. 10여 년쯤 했어.홍 : 61년을 살았으니 이제 포항이 고향 같겠습니다.이 : 그렇지. 지내오면서 적지 않은 해병대 전우들, 기자들, 기관장들과 친분이 쌓였어.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는데, 그런 걸 오랜 세월 겪으면서 이제 포항이 제2의 고향이 되었어. 이웃이 다 친척 같고 그래. 내가 나이는 많지만 아직도 해병대 1기 자격으로 해병부대에 가서 부대원들에게 강연을 하곤 해. 잊지 않고 초청해서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해병대가 고맙지.홍 : 해병 후배들을 위한 강연은 언제부터 한 건가요?이 : 40대부터 시작해 2년 전까지 했어. 반세기 동안 한 거지. 나는 해병대와의 인연을 간직하고 평생 살았어. 포항의 해병부대에서는 신병들만이 아니라 사단 전체 모임을 열어 강연을 부탁하기도 했어. 강당에 1천여 명을 모아놓고 해병대 1기는 어떻게 훈련하고, 어떤 각오로 전투에 임했는지를 들려주곤 했지. 지금 해병대에 오는 젊은이들은 아주 명석해. 그런 후배들 눈빛을 보면서 내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지.홍 : 포항 6·25회 회장이시지요?.이 : 15년 전에 맡았어. 지금은 고문이야. 해병대를 포함해 전역한 군인들은 사회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지. 포항이 수해를 입었을 땐 빠른 복구가 필요해. 그럼 누가 나서겠어? 토사에 밀려 쓰러진 벼를 세우는 이들이 바로 해병대야. 해병대 사단 차원에서 민간을 지원하는 것이지. 그런 일이 있을 땐 사단장에게 전화해 “참 보기가 좋습니다”라고 얘기해. 총을 들고 싸울 때는 용감하게, 대민지원을 할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게 해병대지.홍 : 해병대는 대민봉사에도 열심이지요.이 : 해병전우회는 일사불란하게 연락해서 포항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는 교통정리도 하지.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내가 해병대 출신인 것이 자랑스러워. 요즘도 포항시에서 전승행사, 문화행사 등이 개최되면 해병전우회가 행사를 돕기도 해. 그런 것이 해병대를 홍보하는 효과도 있겠지.홍 :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이 :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았으면 해. 6·25전쟁 때 참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어. 해병대원을 포함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세상을 떠난 군인들의 희생을 기억해주면 좋겠어. 끝/대담·정리 : 홍성식 기자

2022-09-26

제대 후 운명처럼 포항으로 이주

한 사람이 한 도시와 인연을 맺는다는 건 ‘운명적’이다. 해병대 1기로 입대해 6·25전쟁을 거치며 온갖 수난과 고통을 겪었음에도 이봉식 선생은 전역 후에 자신이 살 곳으로 ‘해병대의 도시’ 포항을 선택한다. 만 18세에 해병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후배 해병을 교육하며 30대 초반까지 살았던 그는 어떤 이유로 고향이나 서울이 아닌 포항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하게 된 걸까? 홍 : 지금의 부인을 찾아서 부산을 헤맨 것도 전쟁이 한창이던 때군요.이 : 그렇지. 그즈음 해병대가 적 소탕 작전을 하며 북쪽으로 올라갔는데 춘천까지 가면서 수많은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어. 죽은 대원도 많았고 부상병도 많았지. 남한에 내려온 중공군과 인민군 중 다시 북한으로 올라가지 못한 부대와 전투를 벌인 거야. 그들이 방공호를 파고 숨어 있으면 우리는 눈이 쌓인 곳까지 올라가 치열하게 싸웠어.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많았지. 이렇게 하면서 1951년 3월 하순에 홍천까지 올라갔어. 이후 후퇴해서 홍천 가리산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는데, 산 정상에 우리 부대가 주둔했어. 중공군이 못 내려오도록 진지를 치고 방어를 한 거지.홍 : 그 유명한 가리산전투가 벌어진 겁니까?이 : 중공군은 통상 야간에 습격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총소리가 나서 순찰을 가다가 총에 맞았어. 쇄골 쪽을 만져보니 피가 흐르는 거야. 높은 지역에 있으니 부상당한 나를 데리고 내려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잖아. 천만다행으로 총알이 뼈에 스치기만 했는지 목숨을 위협하는 큰 부상은 아니었어. 부대원들 8명이 달라붙어 나를 산에서 데리고 내려오는데 온통 바위산이고 고지대니 끌고 오기가 정말 힘들었을 거야. 두세 시간 걸려 겨우 내려오니 저만치 헬기가 대기해 있더군. 그걸 타고 대구 제1군병원으로 갔지.홍 : 다친 군인들이 많았겠습니다.이 : 많은 해병이 죽고 다쳤어.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니 부상병이 많아 병실이 모자라더군. 복도에다 매트리스를 깔고 부상병을 받을 정도였지. 나는 해병대니까 진해로 후송해야 한다고 해서 다시 진해로 갔어. 해군병원 군의관이 “심각한 부상이 아니니 20일 후면 퇴원해도 좋다”고 하더군. 그 후 치료받고 회복되었지. 해병대사령부가 부산 용두산 꼭대기에 있을 때인데 퇴원하고 거기서 일주일가량 대기했어. 다들 “전투가 없는 부산에 있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나는 우리 대대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 내 목숨을 살린 전우들 곁으로 가는 게 맞잖아. 전투를 치르며 부대원들과 정도 깊이 들었고.홍 : 전쟁터로 돌아가니 상관들이 뭐라고 하던가요?이 :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마음으로 돌아갔어. 철이 없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가보니 ‘해병대 5대 작전’으로 불리는 도솔산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어. 대대본부에 가니까 “어? 너 여기 왜 왔어”라고 하더군. “후방에는 못 있겠습니다. 제 부대로 가겠습니다”고 하니 “그렇다면 대대본부에서 임시 작전선임 겸 근무선임하사를 하라”고 하더군.홍 : 전투병이 아닌 행정병이 된 거군요.이 : 험한 전투를 계속해야 하는데 대대 본부요원이 별로 없었어. 소대 병력이 거의 대부분 부상당하거나 죽을 경우에 시체를 수습하고 부상자 후송을 하는 인력이 필요했지. 심지어 대대장도 탄약통을 짊어지고 다닐 정도로 어려운 전투였어. 그런 전투를 15일 동안 치렀지. 그렇게 도솔산전투를 직접 겪고 인민군을 북쪽으로 퇴각시켰어. 도솔산전투가 끝난 후 다시 부대 편성을 하니 7월 초가 되었지.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부대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했어.홍 : 이승만 대통령 방문 때는 어땠습니까?이 : 연대본부로 오라고 해서 갔어. 1~3대대 선임하사들이 전부 갔지. 한참 앞에서 대기하니 들어오라고 하더군.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해병대는 무적이다’라고 쓴 글을 받았어. 우리가 “이게 뭐냐”고 물으니 “대통령이 하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그때는 그게 귀한 줄 몰랐어. 대대에 갖다주며 “이걸 주던데요”라고 하니까 대대장이 챙겼지. 내가 가지고 있었다면 혼란스러운 전쟁통에 잃어버릴 수도 있었을 거야. 여하튼 그 후 우리 부대는 서울을 지키러 갔어. ‘강한 부대가 수도를 지켜야 한다’는 상부의 뜻이 있었겠지. 그래서 해병 1연대가 중동부 전선에서 철수했어. 전쟁 때 많은 전우가 죽었지. 휴전할 때까지 29기가 입대했는데, 그 기수까지는 지금도 참전 수당 35만 원가량을 받고 있어.홍 : 그 후 해병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이 :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한 후에 서해 쪽으로 옮겨갔어. 파주 장단지구지. 거기서 사천강 전투가 있었어. 적이 밤이면 밤마다 포를 쏘아댔지. 힘든 전투였어. 나는 대대본부에 있었기에 일선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많은 희생을 지켜봤어. 지금 해병대 2사단이 있는 김포 앞을 해병대가 지킨 거야. 그러던 와중에 휴전되어 전쟁이 끝난 줄 알았는데, 조금이라도 점령지를 넓히려고 서로가 포를 쏘았어. 그러다가 전투가 멈췄지.홍 : 원산에서 만난 부인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이 : 전쟁이 잠잠해지니까 원산에서 만난 아가씨 생각이 났어. 큰아버지가 괴산 부군수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지. 그래서 편지를 썼더니 2년 만에 답장이 왔어. ‘외박을 가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파주 장단에서 청주를 거쳐 증평으로 완행열차를 타고 갔지. 아가씨 집은 증평에서도 20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국민학교로 오세요’라고 해서 가보니 그 학교 교사였어. 20리를 가려고 자전거 점포에 들러 사정을 설명하고 자전거를 빌렸지. 선물하려고 당시에는 귀했던 간고등어를 사서 싣고 갔어. 홍 : 가보니 지금의 부인이 있던가요?이 : 학교에 도착하니 아내가 교무실에서 걸어 나오는데 2년 전에 잠깐 본 얼굴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어. 어쨌건 아내 나이 스무 살 때 처음 만나고 스물두 살에 다시 만난 거야. 아내가 “우리 집으로 갑시다”라고 청해서 고개를 넘어 자전거를 끌고 집에 도착하니 아내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었어. 나중에 처남은 매형이 해병대에 있으니 해병이 되겠다고 해서 해병 간부후보생이 되었지. 항공병과였는데, 포항으로 와서 월남전에 두 번이나 참전했어. 헬기 조종사였고 해병대 중령으로 제대했지.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권유로 미국에 가서 헬기를 사오기도 했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군포에서 안개 속을 비행하다가 사망했지. 아내의 유일한 동생이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었지.홍 : 전쟁이 부인과의 결혼을 맺어준 것이군요.이 : 올해로 만난 지 73년이고, 결혼한 지 71년이 되었어. 4남매를 낳았고 자식들 모두 포항에 살고 있어. 어디서 인터뷰를 청해오면 항상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개그맨 유재석이 진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가서도 말했지. 아내는 큰 대회에서 상을 받을 만큼 글씨를 잘 썼어. 지금 부모를 보살핀다고 셋째가 와 있는데, 그 애 나이가 예순넷이야. 힘에 부쳐 셋째가 자리를 비울 때면 막내아들이 제 엄마를 돌봐주고 있어. 나도 아내를 챙겨야 하니까 외출하는 게 쉽지 않군.홍 : 자식 넷을 뒀으니 손자 손녀도 많겠습니다.이 : 많은 건 아니고 네 명 있어. 증손자도 있고. 모두 포항에 사니까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아. 세상 어디에도 피붙이처럼 서로를 위해주는 사람들이 없잖아.홍 : 1953년 휴전 이후 1962년까지 해병대 교관으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이 : 신병훈련소에서 구대장을 했지. 그 시절 해병대에는 일본 해군에서 복무한 사람들이 꽤 많았어. 지금은 대부분 사망했고, 살아 있다면 백 살을 넘었겠지. 휴전되면서 진해 덕산 비행장을 비워주고 훈련소를 경화동 앞으로 옮겼어. 거기에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을 훈련장으로 2~3년 사용했지. 그러다가 훈련소 일부를 전투 훈련을 하는 상남훈련대로 또 이전했어. 내가 훈련소를 떠나 보급 계통에서 일한 건 2년 정도야. 보급소대 선임하사도 했고 보급중대 관리도 했어. 1961년 10월 28일 제대하고 3~4일 만에 바로 포항으로 왔지.홍 : 제대 후 포항으로 오게 된 이유가 있나요?이 : 글쎄 말이야. 서울에서 해병대 선배가 좋은 직장을 마련해놓고 오라고 하는데도 가족들 데리고 포항으로 왔어. 이건 운명이라고밖에 못 하겠네. 내가 열아홉 살 때부터 죽음과 삶을 함께한 해병대 근처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겠지. 처음엔 포항 오천 사격장 근처로 이사 왔어. 해병대와 결별하면 되는데 왜 해병대가 있는 포항으로 왔는지 모르겠어. 먹고살 길도 마땅치 않았고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친구들이 포항에 많았지.대담·정리 : 홍성식 기자 / 사진 출처 : 해병대사령부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2022-09-21

원산에 상륙해서 만난 첫사랑

6·25전쟁은 남북한 거의 전체를 포연에 휩싸이게 했다. 경북과 강원도 동해안은 물론, 서울 수복 이후 전투 지역이 된 북한 원산도 전쟁의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피어나는 법. 해병대 1기 이봉식 선생에게도 이 와중에 사랑이 싹텄다.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선생의 목소리가 열에 들떴다. 홍 : 인천 상륙 때 인민군의 저항이 거세지는 않았습니까?이 : 상륙 전에 오랜 시간 포를 쏘고 항공 폭격을 한 탓에 우리가 육지로 올라갈 때는 인민군이 기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어. 가끔 포 소리가 들리기는 했는데, 저항이 생각보다 격렬하지는 않았지.홍 : 미군과 한국 해병대 중 누가 선두에 섰나요?이 : 동시에 인천으로 들어갔어. 아까 얘기했듯이 상륙정이 해병대를 내려놓고 돌아가 다시 군인들을 싣고 가는 방식이었고, 미군과 우리 군대 모두가 그렇게 했지. 육지에 도착해서 엄폐물을 찾아 뛰어가 엎드리고……. 다행히 내 주변에서는 상륙하면서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었어. 그렇게 육지에 오른 후 참호를 파고는 저녁을 먹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어. 다음 날 새벽 5시에 기상해 시가전을 준비하고는 “각기 구역을 맡아 수색하며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어.홍 : 인천 시내는 어떻던가요?이 : 시내로 들어서니 많은 사람이 죽어 있었고, 시체가 불에 탄 채 널브러져 있었어. 우리 부대도 오전 11시쯤 대원 하나를 잃었지. 내가 분대장이었으니 죽은 전우를 위생병에게 맡겨 옮기도록 했어. 진격하다 보면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이 있고, 중공기와 인공기를 흔드는 사람도 있었어. 우리가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던 거지. 중간에 인민군들이 손을 들고 나오기도 했는데 그들은 압송해서 포로수용소로 보냈지.홍 : 인천을 지나 서울로 간 겁니까?이 : 우리 부대가 인천을 출발해 김포를 거쳐 산개해서 서울로 밀고 올라가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어. 그동안 치열한 전투도 여러 번 겪었지. 인천이 막히니 낙동강에서 전투를 벌이던 인민군 4개 군단이 북으로 돌아가려 했어. 그때 포로가 된 인민군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냈지. 감당을 못할 정도로 포로가 많았어. 서울로 들어가니 이미 중앙청 등이 수복돼 있더군. 나는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걸리는 장면을 봤어. 서울이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게 1950년 9월 28일이야.홍 : 그 후 어떤 전투에 참여했고, 어떤 전투가 기억에 남는지요?이 :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이를 축하하는 행사를 진행했지. 이후 해병 부대는 전부 인천으로 이동했어. 인천에 있는 한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해 다음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부상자를 치료하고 인력을 충원했어. 부대 재편성을 한 거지. 재편성은 7~8일밖에 안 걸렸어. 대대 병력이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재편성을 마치니 북으로 간다고 하는 거야. 다시 승선해서 전투함을 타고 동해 쪽으로 갔어. 2~3일쯤 지나니 금강산이 보이더군.홍 : 거기가 어디였죠?이 : 인천상륙작전 후에 후속 부대들이 우리가 서울을 점령하던 시기에 북한으로 가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갔어. 그걸 따라서 우리도 진격했지. 지난번처럼 인천에 이어 원산으로 상륙하나 보다 했지. 그런데 막상 배에서 내리니 작전 명령이 안 나왔어.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일단 먼저 원산에 상륙한 거지. 우리는 원산에서도 전투를 벌일 줄 알았어. 그런데 인민군은 이미 흥남 쪽으로 후퇴했더라고. 해병대는 원산에서 하선했고 백사장에 천막을 쳤어. 전쟁 중이었지만 경치가 정말 좋더군. 각 분대와 소대별로 잠자리를 마련하고, 3대대 본부에 배속된 일부는 근처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갔어.홍 : 그즈음에 지금의 부인을 만난 건가요?이 : 맞아. 학교에 진을 치고 있으니 전령이 분대장인 나한테 밥을 가져다주더군.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분대장님 반찬이 없어 저쪽 집에서 김치를 얻어왔는데 거기 예쁜 아가씨가 있더라고요. 한번 가보시죠”라고 하더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 그럼 한번 둘러볼까” 하며 갔는데, 조그만 처녀가 야무지게 생긴 거야. 할 말은 별로 없었어. 그냥 “물 한 잔 얻어 마시자”라고 했지. 그런 다음 고향을 물어보니 충청북도 괴산이라고 하더군. 나도 충청도 사람이니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지. 어떻게 괴산에서 여기까지 왔냐고 물으니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왔는데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나고 나는 다음 날 출격 명령을 받아 평양으로 가게 되었지.홍 : 평양에서도 전투가 있었나요?이 : 전선은 형성돼 있었는데, 평양 도심에 들어가도 인민군의 공격이 없었어. 적들은 전혀 안 보이고 시체만 가끔 눈에 띄더군. 우리 부대가 정찰을 꼼꼼히 하는데도 적이 없었어. 평양 인근 아주 험악한 산악 지역까지 살폈지. 그래도 100리 안팎에서는 인민군이 발견되지 않았어. 홍 : 그 작전은 해병대 단독 작전이었습니까?이 : 맞아. 해병대가 단독으로 들어갔지. 인민군이 없으니 한국 해병대 3대대가 전투 준비만 하고 있었어. 그런데 곧 상급 부대에서 소식이 들려왔어. 중공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거야. “중공군 4개 군단이 밀려오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거였지. 우리는 마음을 다잡았어. ‘이번 전투는 힘겨울 것이 분명하지만, 전투 태세를 확실히 해서 명령 없이는 후퇴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중공군이 올 때만 기다렸어.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며칠 후에 후퇴 명령이 내려와서 좀 놀랐지.홍 : 당시가 겨울이었지요?이 : 12월인데 눈이 많이 왔어. 북한은 그때쯤이면 폭설이 내린다고 하더라고. ‘작전상 후퇴’ 명령이 떨어지면서 퇴각했는데, 몇몇 중공군이 발견되면 방어를 하면서 후퇴했지. 그게 한 40리쯤 되었을 거야. 밤을 새우면서 전투하며 이틀에 걸쳐 후방으로 내려왔어. 원산이 보이는 곳까지 왔는데 중공군이 원산 쪽으로 장거리포를 쏘는 거야. 우리 부대는 포격이 쏟아지는 중간 지점에 있었지. 다행히 큰 교전은 없었고, 적이라고 해도 패잔병들과 맞붙어 한국군의 희생은 적었어. 그렇게 12월 말에 원산에 도착했지. 원산 시내에서 20~30리쯤 떨어진 지역으로 오니 미군들이 군용트럭 수십 대를 대기시켜놨어. 우리를 군함까지 태울 트럭이었지.홍 :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이군요.이 : 그때 그곳에 우리 해병대 병력은 4개 중대 700명가량이었어. 나중엔 들은 이야긴데 중공군은 4개 군단, 즉 16개 사단이었어. 엄청난 병력이지. 그들이 인해전술을 쓰면서 내려온 거야. 우리가 아무리 해병 정신으로 맞서 싸운다고 해도 이기기가 힘들었겠지. 그러니 38선 이남으로 신속하게 작전상 후퇴한 거야. 원산에 오니 항구 앞이 난리였어. 민간인들도 앞다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니까. 저 멀리서는 중공군이 쏘는 포 소리가 들리고….홍: 흥남 철수처럼 원산도 혼란스러웠겠습니다.이: 그렇지. 나도 배를 타야 하는데 며칠 전에 김치를 얻어온 집 처녀가 걱정되는 거야. 그래서 전령을 보내 “빨리 남쪽으로 가야 하니 아무것도 챙기지 말고 몸만 나오라”고 전했지. 지금 아내가 된 사람과 어머니, 남동생이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원산항으로 왔더라고. 그런데 민간인은 쉽게 배에 탈 수 없는 거야. 내가 나서서 겨우 승선시키고 나도 부산으로 갔어. 그때 원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가슴 아픈 역사지.홍 : 부산에 도착해서 그분을 찾았겠습니다.이 : 원산에서 출발해 이틀 만에 부산에 도착해 M1 소총을 메고 피난시킨 처녀가 있을 법한 피난민 수용소를 찾아다녔지. 그때 부산에 수용소가 서른 곳이 넘었는데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 몇 군데를 헤매다가 못 찾고 우리 부대는 진해로 가게 되었어. 거기 육군대학에서 부대 재편성을 했는데, 해병대 신병 5~6기생이 교육을 받았어.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우리 부대에 강원도 중동부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지. 그 명령에 따라 영덕에서부터 청송을 넘어 대관령과 양구까지 밀고 올라갔어. 인민군 패잔병들과의 전투도 계속되었지.대담·정리 : 홍성식 기자 / 사진 출처 : 해병대사령부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2022-09-19

내 생에 잊을 수 없는 상륙작전

해병대 창설 초기였던 1949년과 6·25전쟁 시기에는 해병대를 포함한 한국 군인들에게 변변한 무기 하나 없었다. 젊은 열정과 청년의 애국심이 가장 큰 무기였다. 그럼에도 해병대 1기생과 2기생들은 누구보다 용감하게 전투에 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미국 해병대와 함께한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미군 못지않은 용맹스러움을 발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이봉식 선생은 함상에서 유엔군을 지휘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고 한다. 홍 : 후배인 해병대 2기는 언제 입대했는지요?이 : 내가 입대한 뒤 3개월 보름 후 2기 450명을 뽑았어. 해군에 가입대(假入隊)한 인원 중에서 가려낸 것이지. 3개 중대 규모였어. 그러고 나니 해병대는 1기와 2기를 합쳐 750명 정도 되었지. 우리가 훈련과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할 때는 해군에서 군복을 제공했어. 해군 세라복과 모자를 썼지. 수료식 후에는 진해 시내로 나가 아주 잠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홍 : 해병대 1기생들의 훈련 이후는 어땠습니까?이 : 훈련을 마친 후에는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곧 전투에 나가야 했어. 우리가 “교육을 마치자마자 전투에 나갑니까”라고 물으니 “빨치산 1개 중대가 지리산에서 밤마다 파출소와 형무소를 습격하니까 너희가 가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어. 그때부터 해병대의 전투가 시작된 거지. 1949년 9~10월 사이에 2개 중대가 진주로 이동해 지리산에서 빨치산과 싸웠어. 지리산이 얼마나 험한 산이야. 어느 파출소가 약탈당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바로 거기로 출동해 전투를 하는 거야. 그게 12월까지 이어졌는데 3명 정도 전사했지. 그 뒤에는 해병대 1기와 2기생이 5개 중대로 편성돼 750명이 되었는데, 여기에 분대장, 소대장, 조교, 사령부 요원을 더해 1천여 명이 1949년 12월에 상륙선을 타고 진해에서 제주도로 갔어.홍 : 1기생과 2기생 사이에도 군기가 있었는지요?이 : 당연히 있어. 지금도 겨우 4개월 후배지만 2기생이 1기생에게 꼭 예의를 갖춰 대하지.홍 : 제주도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요?이 : 사령부는 시내에 있었고 우리는 모슬포에 있었어. 낮에는 교육받고 수색할 곳이 있으면 한라산 큰 숲이 우거진 곳을 찾아 상황을 살피고 전투를 했어. 그때 제주도의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홍 : 전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겠습니다.이 : 1950년 봄까지 제주도에 있었어. 그런데 여름 어느 날 전쟁이 터졌다는 거야. 사령부의 상관들이 “북한에서 인민군이 쳐들어왔다”고 하더니 며칠 후에는 “서울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우리는 현장에 있던 사병들이니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 그런데 “인민군이 수원까지 내려왔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정보는 들을 수 있었어. 국군과 인민군의 전투가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이후에 알게 됐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진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는 죽기 살기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다짐뿐이었지.홍 : 또 어떤 이야기를 들었습니까?이 : 중대장과 대대장 등은 “전투 지역이 낙동강까지 내려왔다”, “대구와 포항을 기점으로 낙동강 전선이 확대되었다”, “부산을 뺐기면 제주도밖에 남지 않으니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고 했어. 그때 인천상륙작전 얘기를 들었어.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한반도의 허리를 쳐서 남한으로 내려온 인민군을 막아야 한다고 했지. 안 그러면 북한에 진다는 거야. 내가 속한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어. 작전은 미국 해병대가 주력이 되지만, 한국 해병대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지.홍 : 인천상륙작전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이 : 그렇지. 한국 군대에 군함이 있나, 제대로 된 무기가 있나. 아무것도 없었어. 지급받은 총도 낡은 M1과 카빈 소총이 전부였으니.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기존의 해병에다가 제주에서 뽑은 청년들로 1개 연대를 편성했지. 그때 군사훈련 경험이 있는 해병대 1기와 2기생이 분대장으로 선발되었어. 1950년 여름에 제주도에서 3기생 2천 명과 4기생 1천 명을 뽑았지. 대부분 제주 사람들이었고, 50~60명가량은 포항 사람이었어. 1개 연대를 만들어야 미 해군과 합동 상륙작전을 할 수 있으니 짧은 기간에 많은 군인을 뽑은 거야. 사실 3기생 가운데는 무학력자도 많았어. 17~18세 학도병들을 선발하기도 했고. 그런 3, 4기생들을 우리가 맡아 교육했지. 상부에서는 그들에게 해병대 정신을 심어주라고, 강한 군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재촉했어. 사실 제주도 출신 해병들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에 한국 해병대가 참전하지 못했을 거야. 홍 :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만.이 :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부대 편성을 하는 와중에 북한 인민군이 통영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통영을 뺏기면 부산까지 위험했지. 그래서 해병대 1기생 100여 명이 통영상륙작전에 투입되었어. 나도 거기에 갔지. 해병 250명 정도가 통영으로 갔어. 그런 와중에 나는 3, 4기생 교육 임무를 맡아 제주로 돌아왔어. 지금도 기억나는군. 당시 나는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10중대 1소대 1분대장이었어. 3기생과 4기생을 20일 동안 교육했지. 각 소대에 총이 겨우 1정씩만 보급되던 어려운 시절이었어. 미군들이 사용하던 것이라 옷도 크고, 신발도 크고. 그래도 어떡하겠나? 줄일 것은 줄여서 사용했지.‘해병대 50년사’는 통영상륙작전을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한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해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년 8월 17일 일곱 척의 해군 함정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해 이틀 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후,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홍 :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이 :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했어. 미군의 지원이 컸지. 미군은 1개 사단이고 한국은 1개 연대로 구성한 부대가 움직였어. 그렇게 합쳐서 인천 항구로 들어갔지. 보급품을 받았는데 처음 보는 음식이 많았어. 어떻게 먹는지를 몰라서 끙끙대던 생각이 나는군. 제주도에서 상륙함정을 타고 그해 9월 10일쯤 부산항 4부두에 내렸어. 그다음에야 우리가 인천으로 간다는 걸 알게 되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해병들은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어. 장비를 싣고 부산항을 떠나 인천으로 가는 미군 배에 올랐지. 사나흘 걸려 인천에 도착해 미군과 합류했어.홍 : 그때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말해주시죠.이 : 인천상륙작전 3~4일 전부터 서해에서 인천을 향해 포를 쏘고 비행기가 폭격을 했어. 순양함과 수송함 등 군함 260척이 모였지. 어느 순간 그것들이 다 도착하고 나서는 더 이상 군함의 이동이 없었어. 우리가 인천에 도착하고 하루쯤 지났을까?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서 20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정박한 군함에 맥아더 장군이 승선해 있는 게 보였어. 대량의 함포를 쏘고 상륙 지점으로 폭격이 떨어지던 시점이었지. 한국 해병대 1~4기 대부분이 거기 모여 있었어. 어찌 보면 대단한 장관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은 참 자랑스러운 일이야. 내 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지. 전 세계 전쟁사에서 인천상륙작전만큼 경이로운 작전이 없었다고 하잖아. 그만큼 어려운 작전이었어.홍: 인천상륙작전 당일은 어땠나요?이: 작전 당일 오후 5시에 상륙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왔어. 한국 해병대 제1진 3대대 1열과 미 해병대가 함께 육지로 올라갔어. 뒤이어 군인들을 실은 배가 부둣가에 부대를 내려놓고 다시 돌아가 군인들을 싣고 오는 방식의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어. 우리 부대는 인천 월미도 앞에서 분대가 산개해 방공호를 파고, 밤 9시쯤에 전투식량을 먹었던 기억이 나.대담·정리 : 홍성식기자 / 사진 출처 : 해병대사령부‘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2022-09-14

“최강의 군인이 되고자 했던 해병대 1기”

해병대는 짙푸른 동해와 서민들의 삶이 생동하는 죽도시장과 함께 포항을 상징하는 선명한 이미지다. 1959년 해병 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전하면서 시작된 포항과 해병대의 인연이 어느새 63년에 이르렀다. 해병대 1기로 입대해 6·25전쟁 때 목숨을 건 전투를 수십 차례 치른 이봉식(91세) 선생은 인생의 3분의 2가 넘는 61년을 포항에서 살았다. 위국헌신(爲國獻身)이란 군인의 본분이 흐려진 시대에 이봉식 선생이 들려주는 생생한 ‘해병대 이야기’와 ‘6·25의 기억’은 비단 군인만이 아닌 포항 시민들도 충분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홍성식(이하 홍) : 태어나신 곳이 어딘가요?이봉식(이하 이) : 충청북도 보은이야. 바다와는 아주 멀고 강이 지척인 농촌에서 태어났지. 1931년 2월 19일생인데 우리 나이로 아흔둘이 되었네.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어. 위로 누이가 두 분이야. 이제는 형제가 거의 죽고 막냇동생이 천안에 살고 있어.홍 : 1931년에 태어나 광복 이전까지 유년시절은 어땠습니까?이 : 일제강점기 때는 농사를 지으면 일본인들이 전부 가져갔어. 우리 집은 광복이 되었지만 생활에 큰 변화가 없으니까 광복 직후에 고향을 떠났어. 1941년 가을에 일본군이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나.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이 우리에게 도전했구나”라고 말했다는데, 태평양전쟁이 터졌지. 그때 난 열한두 살이었고, 한국도 어수선했어. 농촌에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객지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학교엔 다니기가 쉽지 않았어.홍 : 그 시절에 대부분 그렇듯 힘든 유년이었군요.이 :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가장 노릇을 했는데 대전에 가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철수한 후 한국의 치안은 엉망이었어. 어리지만 이렇게 나라가 흔들려서야 되겠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 그즈음 해군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봤어. 그게 1949년었으니까 내가 열아홉 살 때지. 당시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에 가서 모택동(毛澤東)을 만나고 소련에 가서는 스탈린과 면담을 해 빨치산 2개 중대를 한라산과 지리산 등지에 파견했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들이 형무소를 파괴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도 빨리 군대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내가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한 이유가 그거야.홍 : 육군이 아니라 해군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이 : 육군에서도 모집했지. 그런데 어린 마음에 군악대를 동원해 시가지에서 나팔을 불고 행진하는 해군이 멋져 보였어. 겨우 열아홉 살짜리가 세상을 알았겠나? 보기도 좋고 이왕 군대 갈 거면 해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두 살 밑 동생에게 “나는 군대에 가서 어떻게든 견딜 테니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입대했어. 이후 동생들과 어머니는 대전에 있다가 고향인 보은으로 돌아갔어.홍 : 그즈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이 : 3월 하순에 경남 진해로 갔어. 입대 날짜는 1949년 4월 15일이야. 아직도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해. 가보니 전국에서 해군에 가려는 인원이 1천400여 명이 넘었어. 입대하고 며칠을 기다리는데 광고 하나가 나붙었어. 입대한 사람들 중 해군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남고, 해병대 300명을 뽑으니 지원하라는 거야. 그들이 해병대 1기가 된다는 거였지. 군복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광고가 붙었던 거야. 해병대는 육지에서도 싸우고 바다에서도 싸운다고 하니 매력적으로 들렸어. ‘그럼 좋다. 나는 해병대로 간다’고 마음먹었지. 신체와 체력이 좋은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손을 들었고, 해병대 1기 300명 안에 뽑혔어.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창설돼 1기 훈련생을 선발한다. 이어 1952년에는 해병 제1전투단이, 1954년에는 해병 제1여단이 생겨났다. 1955년 1월 15일 창설된 해병 제1상륙사단은 1959년 3월 28일 경기도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전했다. 베트남전쟁 시기인 1965년에는 해병대 청룡부대가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다.홍 : 어린 시절에도 성격이 괄괄하고 싸움도 하고 그러셨는지요?이 : 그러지는 않았어. 마음은 여렸지만 정신은 확고했지. 나이는 적지만 나라와 애국이 뭔지도 생각해봤고. 일제 치하에서 혹독한 시절을 보낸 게 그런 마음을 들게 했을 거야. 어쨌건 해병대 1기에 뽑혀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으로 갔어. 거기는 일제 때 해군이 주둔하던 자리인데 막사가 10여 동 있고 강당도 있었어. 부대 편성을 간단히 하고 보급품을 받은 기억이 나는군. 그렇게 해서 해병대 1기로 출발한 거지.홍 : 훈련이 혹독했을 것 같습니다.이 : 창설 시기나 시간이 흐른 지금이나 해병대의 훈련은 고된 것으로 유명해. 해병대 1기 300명에게 군번을 0번부터 299번까지 부여하더군, 내 군번이 174번이야. 150명씩 2중대로 편성해 며칠간 예비훈련을 하고, 4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중화민국의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와서 해병대 1기 창설을 축하했지. 그때 비행장에 300명이 줄을 섰는데 가족들도 오고 그랬어. 하지만 우리 식구들은 오지 못했지. 그때는 교통수단이 시원찮았고, 내 경우엔 식구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입대했으니까. 여하튼 바로 이 4월 15일이 한국 해병대의 시작이었어.홍 : 막 생긴 부대라 여러 어려움이 있었겠습니다.이 : 4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처음 창설된 부대라서 보급품이 엉망이었어. 보리와 쌀을 섞은 적은 양의 밥과 콩나물국, 된장 정도만 공급되었지. 그런데 훈련의 강도는 엄청났어. 이런 말은 시대에 안 맞는 이야기지만 얼마 전 신문에 ‘해병대 1기가 4개월간 훈련받을 동안 3천600대를 맞았다’는 기사가 나오더군. 그 증언을 한 사람이 현재 포항에 살고 있는 내 동기생이야. 해병 신병 교육훈련장에 가서 그때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요즘 해병들은 이해 못 할 거야. 과거 해병대는 매를 많이 맞았어. 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라고 가하는 체벌이었으니 지금 돌아보면 그저 허허 웃고 말지. 홍 : 군대 장비도 제대로 없었을 것 아닙니까?이 : 일본군이 버리고 간 철모와 목총을 분배받았어. 1개 분대가 12명인데 6명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구형 99식 소총을 받고 6명은 목총을 받았지. 그러니 우습게도 총을 실제로 쏘는 게 아니라 총 쏘는 흉내만 내는 거야. 이렇게 교육을 받으면서 차차 제대로 된 보급품을 수령받았어. 하지만 정신교육만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지. 새벽 5시에 일어나 한 시간 이상 진해 시가지에서 구보를 했어. 다녀오면 젊은이들인데도 파김치가 되는데 이걸 4개월 동안 반복하니까 나중에는 모두가 살이 빠져 뼈만 남았지. 하지만 스스로 무쇠처럼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홍 : 그런데도 훈련 중 낙오된 경우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이 : 다들 ‘하면 된다’는 정신이 원체 강해서 낙오자가 없었어. 훈련 중 다쳐서 입원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야. 그때 해병대 1기 300명의 훈련을 이끌던 사람이 일본 해군 출신이었지. 이 사람이 지금 100세인데 아직 살아 있어. 언젠가 해병대 예비역중앙회 총재가 된 그를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식당에서 만났는데, 우리가 “그때 왜 그렇게 때렸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랬기에 너희가 진짜 해병이 된 거야”라고 대답하더군.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그랬어. 강한 해병대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거지.해병대사령부가 펴낸 ‘해병대 50년사’에는 해병대 창설의 이유와 초기 상황이 실려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의 지리적 여건상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 1949년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했다”는 것. 초대 사령관은 신현준 중령이었고,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해군 13기에서 특별 모집한 해병대 병 1기생 300명으로 한국 해병대는 출발을 알렸다.홍 : 한여름엔 훈련이 어렵지 않았나요?이 : 배고픈 게 무엇보다 힘들었어. 오전 네 시간, 오후 네 시간씩 훈련받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또 야간 교육을 했지. 팔꿈치에는 피멍이 들고, 군복이 너덜너덜하게 해져 곳곳을 꿰매 입었어. 사실상 맨살로 훈련받은 셈이야. 해병대가 최고로 강한 군대가 되려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게 훈련을 시키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어.이봉식1931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 소년 시절부터 가장 역할을 했다. ‘위기에 처한 국가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열정으로 만 18세이던 1949년에 해병대 1기로 입대해 한국 전쟁사에 주요 전투로 기록된 인천상륙작전과 통영상륙작전, 도솔산전투와 가리산전투 등에 참여했다. 전투 중에 총상을 입었지만 후방이 아닌 전우들이 싸우고 있는 전투 지역으로 복귀를 자원했다. 휴전 후에는 진해 해병대훈련소에서 신병 교육 등을 담당하며 1961년까지 복무했다. 전역 후에는 ‘해병대의 도시’인 포항으로 이주해 지금까지 61년째 살고 있다. 40대 때부터 90대에 이르기까지 50년간 포항 해병1사단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강연에 초청받아 자신의 경험과 해병 정신을 후배들에게 들려주었다. 현재는 해병대전우회 영포지구 원로회 회장과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경상북도지부 고문으로 있으며, 대민봉사와 어려운 해병 전우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기자·촬영 : 김훈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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