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와 투철한 기독교 신앙관<br/>김화문 ④
김종원 원장은 단순히 명의(名醫)가 아니라 한평생 사랑과 헌신의 인술(仁術)로 일관한 의인(義人)이었다. 인산(仁山)이라는 호(號)를 가진 그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한 후 집 앞 교회에 가서 100여 가지의 제목을 놓고 기도한 다음 병원으로 출근했다. 집과 교회, 병원을 오가는 절제 있고 규칙적인 생활이어서 병원 직원들은 그의 출근을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
진료실이 높이 있어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으로 걸어 다녔다.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고 지각도 하지 않았으며, 날이 밝기 전에 집에서 나와 종일 환자를 돌보고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삶을 평생 살았다.
자신의 진료실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어 일사병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신학생과 고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해 학업의 길을 가게 했다. 아내 송공현 여사의 가계부를 보면 콩나물값까지 빼곡하게 적으면서도 수입의 60퍼센트 넘게 교회 헌금과 지인들의 장학금 지원으로 지출했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업적 가운데 하나는 선린병원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1997년에 1천억 원이 넘는 병상 700개 규모의 선린병원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함으로써 당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한동대를 살리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병원과 학교를 사회에 내놓고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서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다가 떠났다.
재산 소유나 증식의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모두 거부하고 천명(天命),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다.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에게 헌신하며 살아간 것이다. 후배 의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즈니스 하지 마라. 히포크라테스 정신으로 진료하라”고 말했다. 힘들고 어려운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치료하고 헌신하는 자세야말로 큰 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의 호가 ‘인술의 큰 산’을 뜻하는 인산(仁山)인 것은 아닐지.
김 원장님은 북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며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살아서 되겠나” 하시며 절약과 검소한 생활 원칙을 지키며 사셨어. 평소 일기를 썼는데 혹시 자신의 자서전이나 추모집을 발간할 때 근거자료가 될까 싶어 없애버렸지. 한동대학에 병원을 기증했을 때도 서울에서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모두 돌려보냈어. 선행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셨지. 매달 수십여 곳에 도움을 주면서도 어느 누구에게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없어.
이 : 원장님은 ‘명의’란 말로 단순화하기에는 너무나 의미가 깊고 큰 생을 사셨습니다. 지금 선린대학교의 본관 건물을 설립자의 호를 따서 인산관(仁山館)으로 붙였는데, 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 : 호는 김 원장님을 40여 년 동안 지켜본 서영욱 동산의료원 원장이 1999년에 지어주셨지. 서 원장님이 1960년대 말에 선린병원에 들렀다가 부드러운 종이가 없어 신문지로 코피를 막고 진료하던 김 원장님을 보신 모양이야. 그걸 보고서 아프리카 오지의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인물이라며 ‘인술의 큰 산’이라고 하셨지. 사람이 항상 갖추어야 하는 다섯 가지 도리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가운데 인이 으뜸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야.
이 : 김종원 원장님은 오래전에 자신의 전 재산을 병원과 대학 등 사회에 모두 환원하셨습니다.
김 : 김 원장님보다 검소하게 사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어. 그분은 기독교 신앙관이 투철해서 재물은 잠시 맡았다가 주고 가는 것이라는 청지기관(觀)을 지녔지. 북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며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살아서 되겠나” 하시며 절약과 검소한 생활 원칙을 지키며 사셨어.
이 : 본인의 선행을 알리는 것도 꺼리셨다면서요?
김 : 원장님은 평소 일기를 썼는데 혹시 자신의 자서전이나 추모집을 발간할 때 근거자료가 될까 싶어 없애버렸지. 언론의 인터뷰는 한사코 거절하셨고. 한동대학에 병원을 기증했을 때도 서울에서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모두 돌려보냈어. 선행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셨지. 매달 수십여 곳에 도움을 주면서도 어느 누구에게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없어.
이 : 김 원장님이 평소에 근검하고 절약한 일화를 좀 들려주시지요.
김 : 병원 수입을 철저히 투명하게 관리했어. 정작 본인이 받은 급여로는 교회 선교비와 장학금으로 썼지. 사모님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가계부를 꼬박꼬박 적으셨어. 내가 경리 업무를 맡았을 때인데, 매일 수입 지출 장부와 현금통을 퇴근하면서 원장님이 사시는 사택에 갖다주고 아침 출근길에 찾아왔지. 아침에 장부를 받아보면 밤새 검토해서 한 푼도 허투루 사용되지 않도록 붉은색 사인펜으로 표시를 해두었어. 병원에 딸린 사택은 낡고 허름해서 비가 자주 샜지. 주일날 교회에 계시다가도 비가 오면 사모님에게 전화해서 서재에 보던 책이 있는데 비에 젖을 수 있으니 그걸 옮겨달라고 통화하는 걸 듣기도 했어.
김종원 원장의 감동적인 삶은 다음의 기사가 잘 요약하고 있다.
종합병원을 세웠으면서도 재산이라고는 병원에서 준 관사 하나와 매달 받는 월급이 전부. 월남할 때 업고 온 젖먹이 외아들이 객지에서 숨져 갈 때도 환자를 돌보느라 아들에게 달려갈 수 없었던 사람. 고아와 환자를 위해 몸 바친 훈훈한 이 할아버지 인술의 한평생.
- 《주부생활》 1987년 1월호.
이 : 경북 동해안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 원장이면서도 참 청빈한 삶을 사셨군요. 막사이사이상(The Ramon Magsaysay Award)을 수상한 장기려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김 : 두 분 다 북에서 남으로 오셨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같이 다녔고 평양의학대학에서 의사로 재직할 때 김종원 원장님은 소아과, 장기려 선생님은 외과에 계셨지. 두 분이 친해서 왕래가 잦았는데, 인술을 베푼 훌륭한 의사라는 공통점도 있지.
이 : 장기려 선생님이 김 원장님을 만나러 포항에 오셨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세요.
김 : 한번은 부산에 계시던 장기려 선생님이 포항에 오셨는데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 김 원장님이 죽도시장에서 양복을 한 벌 사서 입혀드렸지. 장 선생님은 양복을 입어보고는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부산으로 가셨어. 그 후 김 원장님이 부산에서 장기려 선생님을 만나 그 옷이 괜찮았는지 물었더니 포항역에 있던 노숙자에게 훌렁 벗어주고 부산으로 갔다는 거야.
김종원과 장기려의 인연
인산(仁山) 김종원의 삶은 성산(聖山) 장기려의 삶과 여러모로 겹친다.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쟁통에 월남한 후 부산 영도에 병원을 세워 피난민을 무료로 진료했고,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도 치료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김종원도 1914년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태어나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장기려와 함께 평양의학대학병원에 근무하다 월남한 후 대구를 거쳐 포항에서 전쟁고아를 위해 세워진 무료 진료소에 자원했다.
김종원이 북에 아들을 두고 온 것처럼 장기려도 아내와 네 자녀를 두고 단신으로 내려와 부산에 정착했다. 장기려는 노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집 한 칸 없이 소외된 사람들을 섬긴 ‘작은 예수’라 불렸으며, 김종원도 아낌없이 베푸는 무소유의 의술을 펼쳤다.
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