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권순남 ② 사회활동의 시작, 영흥초 어머니회
효성여대 약학과에 입학한 권순남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 입주 가정교사, 공장 노동자 등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혼자 감당하기엔 힘겨워 결국 졸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권순남 선생의 결혼 이후 사회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최미경(최) : 자녀는 몇 명을 두셨는지요?
권순남(권) : 딸만 둘이야. 당시 풍조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였는데 남편이 새마을지도자회 회장이어서 정부 말을 참 잘 들었던 것 같아.
큰애 영흥초 3학년 때 어머니회 회장을 맡았어. 물이 빠지지 않았던 학교운동장 복토공사를 하려고 해병대 사단장을 찾아가고 아이들과 위문편지·공연·위문품 전달 등의 노력으로 승낙을 받았지. 그렇게 해병대 장병들의 도움으로 운동장이 개선되니 어머니회도 더 활성화 됐지. 학교에 작은 도서관도 만들고, 한영대 교사와 고적대 아이들을 지원해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어.
식목일 조회시간에 아이들이 운동장에 픽픽 쓰러진거야. 가정실태조사를 했더니 참담했어. 그래서 3년 동안 절미운동도 했었지….
최 : 1970년대는 ‘새마을’을 많이 붙였지요?
권 : 그랬지. 새마을어머니회, 새마을부녀회처럼 ‘새마을’을 붙이는 게 혁신이라 믿었던 것 같아.
권순남 선생은 예절과 도의를 강조한 아버지에게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결혼한 후에는 아이를 잘 키우고 내조를 잘하면 된다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기에 사회활동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최 :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권 : 큰애가 영흥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 몇 번이고 어머니회에 나오라고 했는데, 시부모님이 싫어하셔서 미루다가 큰애의 학교생활이 궁금해 처음으로 나갔지. 회의를 진행하던 중 회비를 20~30원 정도 걷는다길래 회비의 용도를 물었더니 학교 선생님들을 위해 쓴다고 하더군. 내가 그 자리에서 박봉의 선생님들을 위해 쓰는 것도 좋지만 어머니회에서 걷는 회비는 아이들을 위해 쓰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의견을 내놓았지.
최 : 처음 어머니회에 가서 그런 발언을 하셨다니 눈총을 받지는 않으셨나요?
권 : 당시에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건 일반적이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영흥초등학교는 학부모의 교육 수준이 다른 학교에 비해 낮은 편이었어. 해도는 원래 섬이었는데 진펄을 메워 거주지가 만들어졌지. 그곳에서 ‘반티(함지 그릇을 일컫는 경상도 사투리)’ 장사를 많이 했어. 생계에 급급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거든. 내 눈에는 그런 것만 보였지. 이런 내가 어머니회에 처음 가서 던진 말에 좋게 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일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었지. 어느 날인가, 학교에 다녀온 큰애의 운동화가 엉망이었어. 깨끗하게 신고 간 운동화가 엉망이 되었기에 어디 가서 놀다가 왔냐며 종아리를 쳤지. 그런데 학교에 가보니 운동장에 물이 빠지지 않았어. 비가 그친 지 이틀이 지나도 학교 운동장이 마르지 않았던 거야. 시어른에게 물어보니 염전 위에 세운 학교라 배수 처리가 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이런 교육 환경은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에 영흥초등학교 어머니회 회장과 시청 담당자를 찾아갔어.
최 : 공무원 반응이 어땠나요?
권 : 시청 담당 공무원은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교육청에 가라고 하고, 교육청에 가니 예산이 없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말했지. 남편이 영흥초등학교 체육진흥회장을 맡고 있던 터라 새마을운동 차원에서 하천으로 물이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어. 임시방편으로 아이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학교 입구 쪽만 우선 조치했지.
최 : 당시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교육 현장에서 주로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권 : 큰애가 3학년 때 학교 어머니회 회장을 맡았어. 이제는 내 아이디어로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학교 운동장을 뒤집어 자갈을 깔고 숯과 모래를 그 위에 올리면 삼투압에 의해 물이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이걸 도와줄 일손이 부족했어. 여기저기 알아보니 오천에 있는 해병대 공병부대를 부르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곧바로 해병대 사단장 부인을 만나러 갔지.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사단장을 만나면 물어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군.
그날 밤 권순남 선생은 사단장 부인에게 전화를 받았다. 다음 날 계획서를 들고 찾아오라는 연락이었다. 권순남 선생은 밤새 한숨 못 자고 학창 시절 과학 시간에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사단장에게 영흥초등학교 운동장 복토 공사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
권 : 사단장을 만나고 나오면서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상대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 첫 번째 감동 포인트는 전교생 위문편지 쓰기였지. 여학생은 오빠라고 시작하고, 남학생은 형님이라고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쓰게 했어. 그리고 어머니회를 중심으로 치약, 칫솔, 비누, 타올 등을 모았어. 마지막으로 위문 공연을 준비했지. 이렇게 준비된 것을 갖고 해병대로 찾아가 장병들을 앞에서 3부에 걸친 위문 공연을 진행했어. 1부에서는 남학생 둘, 여학생 둘이 편지를 읽은 후 장병들에게 전달했고, 2부에서는 학생들이 리코더를 불고 노래도 하고 고적대가 준비한 위문 공연을 했어. 붕대를 감고 있던 상이용사들이 어린 학생들의 노래와 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리더군. 그리고 3부에서 위문품을 전달했지. 이 모든 과정이 해병대 사령관을 비롯한 장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마침내 운동장 복토 공사 승낙이 떨어졌어.
그해 여름방학 한 달 동안 해병대 공병부대에서 트럭 3대가 매일 아침 영흥초등학교로 왔다. 각 트럭마다 20명씩 탑승했으니 매일 군인들 60명이 영흥초등학교에서 종일 땀 흘리며 공사를 진행했다. 권순남 선생은 어머니회를 소집해 간식 조를 짰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6조, 한 조에 5명씩 임원을 배치해 장병들이 간식을 먹으며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권 : 그때는 사람들이 순수하고 헌신적이었어. 여름방학 내내 해병대 장병들도 어머니회도 애를 참 많이 썼지. 그렇게 운동장이 개선되니 신이 나고 재미있었어. 그래서 어머니회가 더 활성화된 것 같아.
이 밖에 권순남 선생은 학부모들과 도서 모으기 캠페인을 전개해 학교 안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고 고적대도 만들어 지원했다.
최 : 영흥초등학교 고적대가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권 : 음악을 전공한 한영대 교사가 영흥초등학교로 온 것을 알게 되었어. 우리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자며 한영대 교사와 의기투합했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영흥초등학교 고적대였어. 악기 살 돈이 없어 군악대의 오래된 악기를 가져오고, 동지상고·포항수고 악대부에 고장 나거나 못 쓰는 악기도 가져왔지. 어느 늦은 밤 학교에 갔는데, 한 교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어. 한영대 교사가 집에 가지도 않고 헌 북을 고치고 있더군. 교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가만있을 수 없었어. 대회를 앞두고 고적대 아이들의 유니폼을 제작하려고 모금을 했지. 영흥초등학교 고적대는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경상북도 우수상을 받았고, 그다음 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어.
최 : 결식 학생들을 돕는 절미(節米) 운동도 진행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권 : 한번은 학교에서 식목 행사를 한다고 해서 어머니회에서 30명 정도 나무를 구입해 학교에 갔지. 조회 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이 운동장에 픽픽 쓰러졌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사정을 알아보니 아침밥을 못 먹은 아이들이 허기를 못 견디고 쓰러진 거였어. 한 반에 50명 넘는 아이들의 가정실태조사를 교사가 일일이 할 수 없었기에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학교에 다니는지 알 수 없었지. 그래서 어머니회에서 아이들의 주거환경을 살펴보기로 했어. 초가집이나 양철집에 사는 아이도 있었고, 텐트를 치고 사는 아이도 있었어. 텐트 안에 들어가니 흙바닥에 나무 판때기를 놓고서 석유곤로로 밥을 해먹고 가마니때기를 깔고 잠을 잤어. 그런 가정이 예닐곱 군데였어. 그중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상이용사 집이 네 군데였고, 어머니가 가출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품팔이해서 겨우 먹고사는 가정이 세 곳이었지. 참담한 상황이었어.
권순남 선생은 그들을 도우려 일주일간 고민하다 신주머니 100개를 만들어 어머니회에 나누어주었다. 세끼 밥을 안칠 때마다, 쌀 한 숟가락을 덜어 그 신주머니에 넣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한 달간 모은 신주머니 100개를 자루에 담으니 열두 자루가 나왔다.
권 : 어머니회 임원들을 불러서 쌀자루를 하나씩 주고 저학년부터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찾아가 전해주라고 했어. 그렇게 쌀자루를 들고 간 임원들은 돌아올 때면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 허기져서 아이들이 쓰러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3년 동안 절미 운동을 했어.
권순남 선생은 자녀들이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시어른이 하던 직물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사업을 할 때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원하고, 고아원·양로원·장애인 시설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했다.
최 : 남편의 이해 없이는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잖아요. 부군께서는 선생님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권 : 남편은 건축을 전공했어. 시어른이 사업을 물려받으라고 하자 장사는 싫다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그 사업을 받았어. 그이는 포항JC에서 임원을 하며 봉사활동을 했어. 봉사에 대한 가치관이 나와 비슷해. 내가 하는 일을 믿고 응원해주었지.
권순남
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