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내 꿈을 영글게 한 전쟁고아들

등록일 2023-07-12 20:03 게재일 2023-07-13 12면
스크랩버튼
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br/>권순남 ①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포항여고 졸업까지
권순남 선생
권순남 선생

지금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원봉사지만 과거에는 아주 낯설었다. 여기에 누군가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낯섦은 자연스러움이 되었다. 권순남(權順南) 선생은 자원봉사활동 초기부터 합류해 갖은 고생 끝에 자원봉사활동의 기틀을 다졌다. 강원도에서 태어난 권 선생은 어떻게 포항에 와서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일을 겪으며 자원봉사의 뿌리를 내렸는지 5회에 걸쳐 이야기를 전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이야 포항엔아홉살 때 왔지

중학생 시절 대저택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그때 처음 고아들에 대해 알게 됐어

함께 오지 못한 어머니 생각에 뭉클했지 뭔가 돕고 싶단 에너지가 솟구쳤어

자투리 털실들을 얻어다가 모자와 목도리·양말과 장갑을 짜서 나누어줬어

고교땐 운동을 잘해서 전국체전도 출전했지만 3학년이 되며 공부에 매달렸지

교감선생님이 등록금을 내지않아도 되는 대학을 찾아 효성여대에 합격했어

최미경(이하 최) : 광복 후 포항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권순남(이하 권) :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이야. 어머니 고향은 울진이고 아버지는 안동이었는데, 통천이 살기에 좋다고 아버지가 그곳에 터를 잡았지. 어린 시절 우리 집 앞은 포항 송도처럼 소나무 숲이 우거졌어. 광복 후에 언니와 나는 큰아버지를 따라 안동에 와서 2년간 살았고, 아버지는 우리보다 늦게 안동으로 왔다가 포항에서 그물 공장을 크게 하는 친구의 권유로 포항에 오게 되었지.

최 : 그러면 어머니는 언제 통천에서 나오셨나요?

권 : 나오지 못했어. 당시 어머니는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갓난아기를 데리고 나오기가 힘들었어. 어머니는 나와 언니가 걱정돼 아버지를 안동으로 먼저 보냈고, 자신은 막내가 좀 더 크면 같이 나오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막힐 줄 누가 알았겠어.

포항여중 육상부 시절. 앞줄 왼쪽 첫 번째 권순남.
포항여중 육상부 시절. 앞줄 왼쪽 첫 번째 권순남.

최 :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나요?

권 : 포항에는 아홉 살 때 왔는데, 가을이었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아는 분 편에 어머니가 쓰신 쪽지를 전해 받았어. “아버지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그때 가겠노라”고 적혀 있었지. 그래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어린 마음에 내가 열심히 해서 이름을 날려야 어머니가 오겠구나 싶어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면 한 장만 써도 될 것을 세 장씩 썼지. 그런데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가 귀한 시절이라 공책을 많이 쓴다고 선생님한테 맞기도 했어.

최 : 공부뿐 아니라 뭐든 열심히 하셨을 것 같아요.

권 : 어렸을 때는 단순했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목표였고. 그게 몸에 밴 것 같아.

최 : 초등학교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권 : 입학 시기를 놓쳐 열 살 때 포항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어. 그때는 1학년에도 나이 든 학생이 더러 있었어. 시골에 사는 아이들은 부모님을 돕느라 더 그랬지. 한번은 교문 앞에서 매번 지각하는 같은 반 아이를 만났어. 땀을 뻘뻘 흘리며 교문에 들어선 그 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안 보이는 데서 무명 보자기를 풀어 신고 왔던 짚신 대신 까만 고무신을 갈아 신더군. 내가 그 아이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신광이라고 했어. 신광이라면 정말 먼 거리였지. 그 아이의 짚신과 내 구두를 번갈아 보니 왠지 미안하고 슬펐어.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최 :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권 : 중학생 때였어. 친구가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집이 무척 컸어. 영화에서나 보던 저택이었지. 집에 들어서자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이 있었는데 나는 시녀라고 생각했고, 친구가 대단한 부자구나 싶었어. 넓은 거실에 앉아 있는데 시녀가 따뜻한 우유와 비스킷을 가지고 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군. 놀러 왔는데 왜 기다리라고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깜짝 놀랐어. 그때는 배급으로 우유를 받았는데 모두 분말이었어. 우리 어머니는 그걸 어떻게 먹는지 몰라 늘 쪄 주셨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찐 우유는 딱딱하게 굳어 먹을 수가 없었어. 도시락통을 운동장에 들고 나가 돌멩이로 치다 보면 점심시간이 다 지나갔지. 깨진 우유 조각 몇 개를 입 안에 넣고 녹여 먹곤 했는데 하얀 우유를 유리컵에 담아왔으니 놀랄 수밖에. 비스킷은 아까워 먹지도 못하고 동생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어. 잠시 후 친구가 와서 “이제 도와주자”라며 나를 뜰로 데리고 나갔어. 그곳에 어린아이 50여 명이 겨울 햇살 아래 쪼그려 앉아 있었어. 나는 “저 아이들 소풍 왔어?”라고 친구에게 물었지. 그러자 친구가 “고아들이야”라고 대답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고아라는 말을 몰랐어. 그래서 고아가 무슨 뜻인지 묻자 친구는 6·25전쟁 때 부모를 잃은 아이라고 설명해주더군. 그제야 그곳이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아이들을 유심히 보니 코 흘리는 아이, 손이 하얗게 튼 아이, 양말을 안 신은 아이도 있었어. 그 아이들이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엄마 잃은 아이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정말 아팠어. 만약 아버지가 이북에서 오지 않았다면 나도 저 틈에 앉아 있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지.

1958년 경상북도 여자고등학교 배구대회 포항 우승 기념,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권순남.
1958년 경상북도 여자고등학교 배구대회 포항 우승 기념,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권순남.

최 : 어떤 꿈인가요?

권 : 돈을 벌고 싶었어. 이 아이들에게 집을 지어주자, 살아갈 수 있게 희망을 주자, 그런 마음이었지. 돈을 가장 빨리 벌 수 있는 게 의대 아니면 약대에 가는 거였어. 그래서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봉사의 가치를 알게 되었지.

최 : 봉사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권 : 그 아이들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었어. 그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고, 하고싶다는 에너지 말이야. 과자를 사주고 싶은 마음에 몸이 꽁꽁 어는 줄도 모르고 크리스마스 전날 새벽 추위를 뚫고 초롱을 들고 다녔어. 여름방학에는 학교에서 배운 뜨개질로 모자와 목도리를 짜고 양말과 장갑을 짰지. 손가락장갑은 시간도 많이 들고 어려워서 벙어리장갑만 짰어.

최 : 장갑을 짜려면 털실이 필요했을 텐데 어디서 구하셨나요?

권 : 친구들의 못 입는 스웨터를 받아 실을 풀고, 해병대 군악대에 다니는 오빠에게 해져서 구멍 난 양말을 모아달라고 부탁했지. 그렇게 모은 실로 1년간 틈틈이 짜면 장갑, 목도리, 양말이 50개 정도 되었는데 크리스마스 때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어. 정말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것이지만 뭔가를 나눈다는 게 무척 행복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어. 1956년 권순남은 헌 스웨터를 수거해 리폼한 뜨개실로 모자, 장갑, 양말 등을 만들어 성모자애원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이 일은 그녀의 자원봉사 생활의 서막이었다.

최 : 가정형편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권 : 6·25전쟁으로 포항이 초토화되어 포항 시민 대부분이 집을 다시 지어야 했어.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지. 1955년에 아버지는 강원도 삼척에서 목재를 싣고와 지금의 제일안경 자리에 2층 목조건물을 지어 금은방을 했어. 그해 겨울, 포장마차를 하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해서 아버지가 우리 목조건물 옆에 자리를 내주었지. 그런데 포장마차 주인이 포장 텐트 안에서 램프에 기름을 붓다 화재를 냈어. 불은 빠르게 건물로 옮겨붙었고 1년도 안 된 목조건물이 전부 타버렸어. 그때 모든 걸 잃었지.

최 : 학교는 어떻게 다니셨나요?

권 : 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선생님 두 분이 입학금 4만 5천 원을 대신 내주셨어.

최 : 뭐든 열심히 해서 학교에서 사랑을 많이 받는 학생이었을 것 같아요.

권 : 운동을 잘해서 운동부 코치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했지. 그래서 육상부와 배구부를 동시에 했어. 포항여고 육상부 선수 4명은 경북 대표로 뛸 정도였고 배구부는 경북에 적수가 없었어. 고3 때인 1959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군산여상과 붙었지. 서울에 있는 포항여고 졸업생들이 몰려와 응원했지만 포항여고는 3 대 0으로 완패했어. 그때만큼 맥 빠지는 일이 없었지. 포항에 오자마자 운동을 접고 공부만 하겠다고 결심했어.

1950~60년대 군산여상 하면 배구, 배구 하면 군산여상이라고 할 정도로 군산여상 배구부는 막강했고, 군산여상 배구부 선수는 대부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최 : 고3 가을이라면 대입 시험이 4~5개월 정도 남았는데 가능했나요?

권 : 나는 성공해야 했어. 목표가 있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버지가 대학에 못 보낸다고 하시더군. 당시 교감 선생님이 우리 집사정을 듣고 전국을 다니며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대학을 찾아보셨지. 효성여대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 중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등록금을 분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말에 면접을 보고 합격했어.

 

권순남

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