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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하다

등록일 2022-10-03 19:14 게재일 2022-10-0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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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문 ②<br/>선린병원의 설립 목적과 배경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 창립 모임.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 창립 모임.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선린병원 현관에는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글귀가 붙어 있다. 이 글귀에는 김종원 원장의 인생철학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가 선린병원에서 진료한 환자 숫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게끔 이끈 것일까?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글귀를 이해해야 비로소 김 원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원장이 어떤 여건에서 어떻게 환자들을 대했는지 들어보았다.

 

미 해병대의 도움으로 전쟁고아를 무료로 진료했는데 1956년 미 해병대가 철수하자 문제가 생겼지. 그들이 주고 간 약품과 장비로 몇 년은 버텼는데 무료로 병원을 계속 운영할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1960년에 일반 환자도 받으면서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선린의원을 시작했지.

당시에는 포항에 의료시설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할아버지 원장님의 실력이 전국에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진료를 받으러 올 정도였어. 문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환자였지. 원장님의 철칙은 아파서 찾아온 환자가 있으면 마감 시간이 따로 없다는 거야. 원장님과 간호사들은 독감이 유행할 때는 주일날 예배시간을 빼고는 진료했는데, 그때도 점심시간과 화장실에 가는 시간 빼고는 환자를 보셨어.

 

이 : 김종원 원장님의 우연한 포항 방문이 포항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군요. 선린병원의 설립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김 : 법인으로 전환하기 전에는 전쟁고아와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임산부를 위한 모자 보건사업을 펼치는 것이었지.

이 : 소아진료소가 1953년에 문을 열었고, 그 후 선린의원을 거쳐 재단법인 선린병원이 1962년에 설립되었군요.

김 :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 해병대의 도움으로 전쟁고아를 무료로 진료했는데 1956년 미 해병대가 철수하자 문제가 생겼지. 그들이 주고 간 약품과 장비로 몇 년은 버텼는데 무료로 병원을 계속 운영할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1960년에 일반 환자도 받으면서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선린의원을 시작했지.

동산의료원 소아과장 시절의 김종원(오른쪽 첫 번째).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동산의료원 소아과장 시절의 김종원(오른쪽 첫 번째).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이 : 그때 병원의 진료 환경은 어땠습니까? 지금 포항의 50~60대 중에 원장님의 청진기를 몸에 대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던데요?

김 : 50대, 60대뿐만 아니라 70대까지도 원장님의 청진기 앞에서 배를 보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지. 3대가 내리 원장님 진료를 받은 집안도 많아. 당시에는 포항에 의료시설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할아버지 원장님의 실력이 전국에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진료를 받으러 올 정도였어. 문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환자였지. 하루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혼자 감당하셨어. 통금이 해제되면 병원 복도에 아이들과 엄마들이 줄을 서 있는데 어쩔 거야. 에어컨도 없는 진료실에서 몸이 상하고 심지어 코피를 쏟으며 진료하셨지.

이 : 일요일에는 휴식도 취하고 교회도 가야 했을 텐데, 감기와 열병이 유행할 때는 일요일도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김 : 원장님의 철칙은 아파서 찾아온 환자가 있으면 마감 시간이 따로 없다는 거야. 원장님과 간호사들은 독감이 유행할 때는 주일날 예배시간을 빼고는 진료했는데, 그때도 점심시간과 화장실에 가는 시간 빼고는 환자를 보셨어. 그러다 보니 간호사나 약국 직원들도 퇴근이 늦어졌지만 불평 하나 없었지. 아픈 아이를 그냥 돌려보내면 밤새 고통받을 텐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원장님의 신념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 : 원장님을 가까이서 모신 직원들도 원장님의 신념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원장님은 평소에 어떤 말씀을 자주 하셨나요?

김 : 나뿐만 아니라 직원들 대부분 평생직장처럼 병원에 오래 근무했어. 박봉이었고 근무시간이 따로 정해지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한없는 인술을 베푸는 원장님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지. 그리고 직원들에게 “이권에 절대 개입하지 마라”, “직장을 여기저기 옮겨다니지 마라”, “약속을 지켜라”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대부분 그 뜻을 따랐어.

선린의원의 규모가 커져서 선린병원이 되어서도 김종원 원장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은 여전했다. 1960년대 들어 일반 환자를 받으면서 소아과의 경우 환자들이 하루에 300~400명씩 몰려왔다. 1층 진료실의 반이 소아과 환자들로 북적댔다. 당시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였고, 변변한 응급실도 없던 시절이었다. 선린병원의 진료는 새벽 5시에 시작되었다. 그 시간에 이미 사람들이 몰려오기 때문이었다. 김 원장은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바로 출근했다. 밤새도록 아이가 아파서 울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통금이 해제되고 난 후에도 그는 다른 의사들보다 한 시간 빠른 아침 7시에 진료를 시작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환자들을 진료하고 나면 밤 9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현역에서 물러나 협동원장 시절, 김 원장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일을 많이 한 셈이죠.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꼬박 진료를 했으니까요. 환자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당시 여름에 냉장고가 있습니까, 선풍기가 있습니까? 열사병에 걸려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팠어요. 그럴 때는 물과 소금을 먹으면서 진료했지요.”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 앞에서. 왼쪽 첫 번째가 김종원.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 앞에서. 왼쪽 첫 번째가 김종원.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이 : 하루에 300명이 넘는 어린이 환자를 만나면 몸이 성할 리 없었겠습니다.

김 : 원장님은 일사병은 달고 살았고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 또 코피를 자주 쏟아 큰 수건을 옆에 두고 진료했지. 하루 종일 아이들의 울음소리 속에 지내다 보니 청력도 안 좋았어. 점심식사는 병원 뒤 사택에 가서 얼른 하고 오셨고.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새벽기도회 갔다가 바로 출근하시지. 그리고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 진료하다 보니 무더위에 일사병에 걸려 대야에 얼음덩어리를 띄워 놓고 진료하기도 했어. 1970년대 중반에 몇 번이나 진료실에 에어컨 설치 결재를 올렸다가 반려되자 직원들이 혼쭐날 각오를 하고 원장님 퇴근 후에 작은 에어컨을 설치했지.

 

이 : 아이들에게는 자상했지만 부모들에게는 엄하기도 했다면서요?

김 : 말도 말아. 애들 데리고 진료받으러 온 엄마들이 많이 울고 갔어. 특히 진하게 화장하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온 엄마들에게는 “당신 치장하는 시간에 아이를 잘 살폈다면 애가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서 불호령을 내렸어. 한 번은 해병대 장교를 크게 꾸짖어 보내기도 했어. 그때만 해도 해병대 장교 하면 끗발이 있었는데 원장님이 보호자로 온 그 장교를 세워두고 “당신 이 아이 친아버지 아니지? 어떻게 친아비면 애를 이렇게 방치해놨냐?”면서 호통을 쳤어. 그 일화는 한동안 포항 시내에 퍼져 화제가 되었지.

이 : 원장님이 마약사범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면서요?

김 : 미군들이 철수하면서 두고 간 약품에 치료용 마약 성분이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는 내용을 몰랐지. 그런데 어느 날 경주지청 마약수사반이 병원에 들이닥쳐서 그걸 조사하는 거야. 당시 이명석 선린애육원 원장의 장남인 이진우 검사가 경주지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원장님과 잘 아는 사이인 데다 의도성이 없는 걸로 확인되어서 별 탈 없이 지나갔지.

의사 김종원은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와 선린의원, 선린병원을 거치며 많은 포항 시민들에게 따듯한 인술을 베풀었다. 연탄가스로 일찍 세상을 떠난 김 원장의 4남 걸수의 친구였던 고(故) 정장식 포항시장은 김 원장의 장례식 조사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세 번씩이나 생사를 넘나들던 저의 어머님을 살려주셨습니다. 동빈로 부둣가의 파란색 2층 목조건물이던 세칭 ‘해병대병원’은 의료시설이 열악했던 1960~1970년대 포항 시민의 건강을 보살펴주던 귀한 병원입니다”라고 했다.

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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