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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어머니의 내조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존재할 수 없어”

한동웅 선생은 대담 중간에 “나는 아버지를 닮아서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장남의 눈에 비친 아버지 한흑구, 그리고 어머니 방정분 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김 : 한흑구 선생님은 1979년 11월 7일 작고하셨습니다. 그때 상황을 말씀해주신다면.한 : 몸이 불편해진 아버지는 포항의료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서 죽도동 집에 계셨어. 그 무렵 남빈동에서 죽도2동 85-17로 이사를 했지. 그런데 어느 날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시는 거야. 평양 사람이니까 냉면을 얼마나 좋아했겠어. 그 순간 느낌이 이상하더군. 육거리에 있는 로타리냉면의 냉면을 포장해서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더니 맛있게 드셨지.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장롱에 부딪히면서 넘어지셨어. 당시 빈남수 박사가 아버지와 자주 만나며 가정의(家庭醫) 역할을 하셨지. 빈 박사가 집에 와서 아버지를 살펴보더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사흘 후에 돌아가셨어.빈남수(1927∼2003)는 경남 사천 출신으로 의사이자 수필가다.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한국문협 포항지부장 등을 맡으며 포항의 문화예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수필집으로 ‘괄호 밖의 인생’(범우사, 1975), ‘망각의 이방지대’(시인사, 1983)가 있다. 김 : 죽천에 한흑구 선생님 묘소가 있습니다. 한흑구 선생님이 죽천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 궁금합니다.한 : 아버지를 경주 아화에 있는 공원묘원에 모시려고 계약을 마치고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았지. 그런데 앞서 얘기했지만 광복 직후 서울에 있을 때 나에게 없던 삼촌이 생겼잖아. 그 삼촌이 우리 가족을 따라 포항까지 왔어. 오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가 경찰 시험에 합격해 경찰관이 되었지. 빈소에 온 삼촌이 장지를 묻길래 경주라고 했더니 잠깐 기다려 보라는 거야. 삼촌의 처가가 있는 죽천에 가서 다른 장지를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다시 나타나서는 괜찮은 장지를 찾았으니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해. 상중에 상주가 빈소를 떠나서는 곤란하잖아. 하지만 삼촌의 성의를 생각해서 따라나섰지. 현장에 도착해보니 바로 여기구나 싶은 거야. 아버지가 영일만을 얼마나 좋아하셨나. 삼촌이 찾아놓은 장지는 영일만이 한눈에 들어왔어. 그래서 단박에 그곳으로 결정했지.김 : 한흑구 선생님이 품어준 사람 덕분에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영일만이 보이는 곳에 묻히게 되었군요.한 : 그런 셈이지. 아버지 묘소 뒤편에 개나리를 심었어. 갈 수 없는 고향 평남 강서군 연곡리 옛집에 피었던 개나리가 생각나서.김 : 그러고 보면 한흑구 선생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베푸는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한 : 광복 직후 서울 시절과 부산 피난 시절에 문인들에게 술도 사고 밥도 사고 많이 베푸셨지. 이북에 있을 때 서울에서 찾아온 최상수라는 민속학자가 있었다고 했잖아. 그분에게는 신당동에 집 한 채를 장만해주셨어. 포항 미군 부대에 근무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포항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지. 6·25전쟁 때 불타버린 포항여고 교사(校舍) 복구라든가 미해병 기념 소아진료소 지원에도 아버지 손길이 닿았어. 그때는 그런 일이 미군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거든. 아버지가 미군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한흑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체류할 때 평양 친구인 안익태에게 큰 도움을 준다. 안익태가 한흑구를 찾아왔을 때 안익태는 돌아갈 차비조차 없을 정도로 힘든 처지였다. 한흑구는 안익태와 한방에 살면서 눈물겨운 뒷바라지를 했다. 안익태는 그 덕분에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유럽에 진출한다. 이 사연은 한흑구의 두 번째 수필집 ‘인생산문’(1974, 일지사) ‘예술가 안익태’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이 책 ‘책머리에’의 다음과 같은 글은 한흑구와 안익태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안익태 씨와의 젊은 날의 교유록(交遊錄)은 나의 온 기억력을 짜내서 기록하였지만, 우리의 우정에 얽매였던 사연의 백분의 일도 그려내지 못하였다.김 : 장남으로서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한 : 아버지는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의 수필에서 “High thinking, plain living(고상한 이상, 평범한 생활)”이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어. 뜻이 높으면서도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분이었지. 보성전문학교 상과에서 공부하고 미국 생활을 해서인지 현실적인 문제에도 밝았어. 식구들에게는 늘 자상하셨지. 자식들한테 매 한 번 들어본 적이 없고 상급학교 진학도 자식들의 결정을 존중해주셨어. 술에 취해 늦게 귀가했는데 담배가 떨어지면 내 담배를 얻어서 피우기도 하셨지. 그리고 부뚜막에 허리를 굽히고 조리하는 어머니를 편하게 해주려고 지금의 싱크대 같은 것을 직접 만드셨어. 부엌에 남자는 얼씬도 하지 않던 시절에 요리도 자주 하셨지. 김장김치 담그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고 만두를 아주 잘 빚었어. 남빈동 집 마당에 닭 230여 마리를 키우기도 했지. 아버지는 국수를 즐겨 만드셨는데, 그때 닭고기를 넣었어. 그 맛이 그립군.김 : 혹시 한흑구 선생님은 교회에 나가셨습니까?한 : 아버지는 교회에 안 나갔어. 자식들에게 종교는 가지되 광신도는 되지 말라고 하셨지. 나도 은퇴 장로지만 아버지 견해에 동의해.한승곤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였다. 그런데 그의 외아들인 한흑구 선생이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편 한흑구 선생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한흑구 선생이 기독교의 신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흑구 선생이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는 한흑구 연구에서 중요한 사안이라 하겠다. 김 : 한흑구 선생님이 포항에 오신 직접적인 이유는 폐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폐디스토마라는 설과 폐결핵이라는 설이 있습니다.한 : 내가 어릴 때의 일이어서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어. 분명한 것은 영남병원 이상원 원장이 폐결핵으로 진단했다는 거야. 아버지가 새벽에 오천 미군부대로 출근하면서 각혈할 때가 있었어. 이 병의 유일한 치료약은 스트랩토마이신(Streptomycin)이야. 아버지 술친구 중에 평안도 출신인 봉 중사라고 있었는데, 오천 미군부대에서 의료 분야의 일을 했지. 이분이 아버지의 각혈이 멈출 때까지 스트랩토마이신을 구해주었어.김 : 방정분 여사님 얘기를 듣고 싶군요.한 : 황해도 안악(安岳)군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이화여전 성악과를 졸업했어. 이화여전 성악과 동기인 덕희 고모의 소개로 아버지와 결혼했지. 홍난파에게 배우고 음악 활동도 함께했다고 들었어. 어머니가 결혼하고 난 후 한 신문에 평양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아까운 재원을 잃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촉망받는 분이다고 해. 황해도 부잣집의 아홉 번째 딸로 태어났는데 집안에 사연이 있어. 아홉 명의 자식이 모두 딸이었어. 그 바람에 어머니의 생모가 집에서 나가게 되었어. 새어머니가 들어와서 아이를 낳았는데 또 딸이 태어난 거야. 그래서 그분도 집에서 나가게 되었지. 세 번째 어머니가 들어와서 아이를 낳았는데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어. 열한 번째 만에 아들이 태어난 거지. 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민이 포항으로 내려오면 중앙국민학교에 모였거든. 어머니는 혹시 그 남동생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중앙국민학교에 자주 가셨어.김 : 방정분 여사님은 포항여고에서 교편을 잡으셨지요?한 : 동생 동현이가 일곱 살 때 뇌막염으로 유명을 달리했어. 어머니는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바깥일을 선택했지. 남빈동 집에서 포항여고까지 약 20리(7.85킬로미터) 길인데, 어머니 표현으로는 다리에 꿀물이 나도록 걸어 다녔어.김 : 방정분 여사님은 한흑구 선생님에게 어떤 분이었습니까?한 : 어머니의 헌신적인 내조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존재하기 힘들었어. 어머니는 첫째 딸을 먼저 보내고 사 남매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는 힘든 여건에서도 아버지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셨지. 어머니의 일기를 읽어보면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느껴져.김 : 방정분 여사님이 포항에서 자주 교류했던 분이 있다면.한 : 황해도 출신의 여의사 두 분이 포항에 있었어. 한 분은 변석화라고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당찬 분이고, 또 한 분은 홍씨 성을 가진 분인데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 어머니는 두 분과 가깝게 지냈지.김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한 : 사실 나는 아버지를 잘 몰라. 문학을 모르니 문학을 하신 아버지를 어떻게 알겠어? 아버지의 문학관 건립에 관한 소식은 듣고 있지. 고맙기도 하고 기대도 되지만 걱정되는 측면도 있어. 무엇보다 아버지를 깊이 이해해주었으면 싶어. 문학관 건립이 추진되어 문을 열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그 장면을 보려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2022-09-07

하태환의 배려로 동지상고에서 교편 잡아

대학 졸업 후 포항으로 돌아온 한동웅 선생은 우연한 기회에 영일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고, 4년 6개월 후 동지상고로 옮기게 된다. 교사자격증도 없이 시작한 교사 생활은 우여곡절이 계속 이어진다. 김 : 대학 졸업 후 포항에 오셨는데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한 : 그때는 대학 재학 중에 입대하면 1년 6개월 만에 제대할 수 있었거든. 그런데 1년 6개월이란 시간이 아까웠던 거야. 대학을 졸업하고 길을 잘 찾아보면 군 복무 기간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돌이켜보면 내 생각이 짧았던 거야. 군 소집 영장을 피해 다녔으니 진로 선택에 얼마나 큰 제약이 있었겠어. 국가 공무원 시험은 아예 볼 수도 없었지. 좀 쉬면서 때를 기다려 보자는 생각으로 포항에 온 거야. 군 복무는 나중에 동지상고 교사로 근무할 때 50사단에 가서 6주 훈련받고 끝냈어.김 : 포항에 와서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한 : 영어 강사로 바빴지. 영어를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나서 자전거 타고 가정교사를 많이 다녔어. 포항여고 상위 학생들 그룹 과외를 했고, 한영빈 기독병원 원장의 아들도 가르쳤어. 영일군청 앞에 수학학원이 있었는데 포항여고 학생들이 많이 다녔지. 그 학원 대표의 제안으로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했는데 만원을 이루었어.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지만 돈 쓸 시간이 없었지. 학원 바로 앞에 탁주집이 있었는데, 강의를 마치고 나면 거기서 탁주 곱빼기 한 사발 들이키는 게 낙이었어.김 : 교직에는 어떻게 들어갔습니까?한 : 포항수산초급대학에 김익하 교수라고 있었어. 영일중학교의 설립자인 김익로의 사촌으로 당시 영일중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었어.그분이 아버지에게 부탁한 거야. 영일중학교에 영어 교사가 필요하니 나를 좀 보내달라고. 나는 교직에 뜻이 없었어. 당시 대졸자는 신청만 하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주었는데, 내가 선생 하겠냐는 생각에 신청조차 안 했거든. 그런데 조건이 딱 6개월 근무였어.김익하 교수가 아버지에게 어렵게 부탁한 것이어서 승낙했지. 그런데 영일중학교 근무 기간이 4년 6개월이나 되고 말았어.김 :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습니까?한 : 술과 정 때문이었지. 술을 좋아하다 보니 함께 술 마시던 교사들과 정이 들었고 아이들과도 정이 들었어. 이런 일도 있었지. 어느 날 도교육청에서 무자격 교사는 모두 내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나는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 그런데 아이들이 난리가 난 거야. 특히 덩치 큰 규율부 아이들이 선생님 가시면 안 된다며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김 : 영일중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겠네요?한 : 그만두긴 했는데 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못 구해서 결국 다시 부임했어. 여러모로 허술한 세상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지. 아이들을 계속 가르치려면 교사자격증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교원자격 검정고시에 응시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지. 정치외교학과 출신이어서 사회과 교사자격증을 받았어.김 : 영일중학교 축구부가 강하지 않았나요?한 : 그랬지. 1950년대에 전국대회 우승도 했잖아. 굉장한 사건이었지. 교무실에 축구부가 받은 상장이 빼곡하게 있었어. 김 : 동지상고로는 어떻게 옮기게 되었습니까?한 : 동지상고 교사 중에 서석두라고 있었어. 나와는 절친한 친구였지. 장기가 고향인데, 알다시피 유배지인 장기 출신 중에 인재가 많잖아. 서석두도 그중 한 명이야. 포항중학교를 거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수재였지. 술을 좋아하고 노래도 잘 부르던 낭만파였는데 나중에 포항제철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해. 서석두가 장기중학교에 근무할 때 내가 버스 타고 그 먼 장기까지 가서 밤새 술 마시고 학교 숙직실에서 같이 자기도 했어. 그 친구가 동지상고 영어 교사 자리가 비었다고 오라고 한 거지. 서석두는 안타깝게도 수년 전에 작고했어.김 : 동지교육재단을 설립한 하태환 씨 권유로 동지중학교에 입학한 인연이 있는데, 다시 동지상고 교사로 가게 되는군요.한 : 그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 4·19혁명이 일어난 후 지방으로 가서 4·19 정신을 전파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어. 나도 이 흐름에 동참했지. 혁명 후 국회가 자진 해산하고 7월 29일 역사상 처음으로 민의원의원 선거와 참의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 직전이었어. 나는 포항으로 와서 군중으로 가득 찬 육거리에서 연설했지. 한일은행(현 우리은행) 앞에 트럭을 세워두고 그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시공관(현 시립중앙아트홀) 앞에서 누군가 지프차를 세우더니 트럭 앞으로 다가오는 거야. 지팡이를 짚고 오는 사람은 하태환 씨였어. 당시 민의원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니 그 상황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 특히 내 연설은 혁명 전에 자유당 의원이었던 하태환 씨 귀에 거슬리지 않았겠어. 그런데 막상 트럭 앞에 와서는 내 옆에 있던 친구 김박문의 가슴을 지팡이로 찌르며 나무라는 거야. 내가 한흑구의 아들인 줄 아니까 차마 나를 나무라지는 못하고 애꿎은 친구한테 분풀이를 한 거지. 그때 그런 일이 있었는데 하태환 씨가 세운 학교에 내가 지원했으니 어떻게 되었겠어?김 : 동지상고로 가는 게 쉽지 않았겠군요?한 :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가능했잖아. 사연은 이래. 김병윤 씨라고 동지교육재단 설립과 운영에 크게 기여한 분이 있어. 하태환 씨의 손아래 처남인데, 이분이 하태환 씨를 찾아가 나를 동지상고 영어 교사로 채용하자고 말을 꺼냈어. 그랬더니 하태환 씨가 “그 친구는 한흑구 선생 장남 아닌가. 1960년 7월 선거에서 나를 낙선시키려고 한 놈인데 안 돼”라고 했다네. 김병윤 씨가 그때 일은 다 지나갔고 영어를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교사인데 채용하는 게 어떠냐고 다시 건의하니 하태환 씨가 순순히 그렇게 하자고 했다는 거야. 훗날 누군가한테 이 대화를 전해 들었어. 하태환 씨는 그렇게 통이 큰 분이었지.김병윤은 1922년 포항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전문학교 법과를 중퇴하고 포항수산초급대학 증식학과를 졸업했다. 동지교육재단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포항시의회 의원, 포항시체육회 회장, 동지교육재단 이사장, 포항수산초급대학 학장, 포항시장(1959년), 농림부 차관을 역임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포항시·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김 : 친구 김박문 씨는 어떤 분입니까?한 : 포항중학교를 거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지. 죽도시장에서 신성상회를 운영하며 부를 일구었고, 신앙심이 깊어 제일교회 장로를 지냈어. 부친도 제일교회 장로였으니 대를 이어 장로를 한 거지. 재담이 뛰어나 친구들이 좋아했어. 제일교회에서 노인학교 교장을 했는데 재담 덕분에 인기가 높았지. 그래서 교장 임기가 끝났는데 노인들이 계속하라고 하는 바람에 교장을 더했다고 해. 건강이 안 좋은지 근래 연락이 통 안 되네.김 : 동지상고 교사 생활은 어땠습니까?한 : 1968년 8월 31일부로 동지상고 교사로 발령을 받아. 그런데 또 하나의 장애물을 만나게 돼. 나는 사회과 교사자격증을 갖고 영어를 가르쳤거든. 나처럼 중고등학교에서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교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를 상치(相馳)교사라고 해. 그런데 도교육청에서 상치교사가 있으면 안 된다고 자꾸 지적하는 거야. 그 바람에 나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고시검정이라는 걸 치러 영어 교사자격증을 취득해야 했어. 당시엔 고시검정이 사법고시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 결국 이 시험을 치렀고 최종 합격자 21명 안에 들었지. 정치외교학과 졸업생이 학교에서 마음 편하게 영어를 가르치게 되는 과정이 멀고도 험난했어.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2022-08-31

4·19혁명의 선봉에 서다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한 한동웅 선생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3학년 때 4·19혁명이 터지고 청년 한동웅은 대열의 선두에 선다. 그리고 고려대 모의국회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김 : 1951년 전쟁 중에 중학교에 입학하셨더군요.한 :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고 공립을 선호하는 분위기였지. 나는 포항중학교에 지원해 합격했어. 국민학교 때 공부를 별로 안 해서 중학교 입학 성적은 신통치 않았어. 그런데 실제로는 동지중학교에 입학하게 돼. 동지교육재단 하태환 설립자가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거든. 하태환 씨가 아버지에게 나를 동지중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한 거야. 그러면 3년간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했고. 결국 아버지가 하태환 씨의 청을 못 이겨 동지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 김 : 중학교 시절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한 :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했지.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서상원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쳤어. 서상원 선생님은 서상은 전 영일군수의 형이지. 국어 교과서에 아버지의 수필 ‘나무’가 실렸는데, 수업시간에 서상원 선생님이 이 수필의 필자가 누군지 아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었어. 아이들은 묵묵부답이었고, 선생님은 너희들의 친구 한동웅의 아버지라고 말했지. 그 순간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어땠겠어.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전교생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언행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지.김 :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인 1954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한 : 고등학교는 포항고등학교로 가려고 했어. 대학을 가려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야 하니까 당연한 판단이었지.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고. 그런데 동지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인 장부두 선생님이 한사코 안 된다고 하는 거야. 동지중학교와 한 지붕 아래 있는 동지상고로 가라는 거지. 상고로 진학하면 대학 진학에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나는 포항고등학교로 가야 한다고 버티면서도 참 난감하더군. 결국 원서 접수 마지막 날 오후가 되어서야 장부두 선생님이 원서를 작성해서는 교무실 바닥에 탁 던져버리는 거야. 그걸 집어 들고 두호동에 있는 포항고등학교에 서둘러 가서 가까스로 제출했지. 포항고등학교에 가니까 심기철 교장선생님(제2대)이 반갑게 맞아주시더군. 장부두 선생님은 훗날 유성여고를 설립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지.김 : 당시 고등학교의 교육 여건은 어땠습니까?한 : 교사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정상적인 교육이 안 되었어. 체육 교사가 국어를 가르치기도 했지. 그 체육 교사는 국어 시간에 말문이 막히면 “그 어떠냐 하면…”이라고 운을 떼고는 시간을 끌곤 했어. 두호동 210번지에 있던 포항고등학교는 비가 오면 교사(校舍)와 운동장이 물에 잠겨 등교가 불가능한 경우가 더러 있었지. 1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9월에 대신동 74번지 신축 교사로 이전했어. 그때 전교생이 책걸상을 들고 그 먼 길을 걸어가는 진풍경이 펼쳐졌지.김 : 고등학교 시절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신다면.한 : 3·1절과 광복절 때 시가행진을 하는데 어느 고등학교가 선두에 서느냐를 두고 포항고와 동지상고의 신경전이 대단했어. 내가 1학년 때 양교의 규율부장이 맨주먹으로 겨뤄서 승자의 학교가 선두에 서는 걸로 했지. 대결 장소는 포항의료원 앞이었어. 세상에 그런 구경거리가 어디 있겠나. 포항의료원 주변은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지. 그런데 두 사람이 붙자마자 원투 펀치에 포항고 규율부장이 나자빠진 거야. 동지상고 규율부장이 권투를 했거든. 얼마나 맥이 빠지던지 어깨가 축 처져 학교로 돌아가던 게 기억나.김 : 포항고등학교 동기는 누가 있습니까?한 : 당시 포항고는 한 학년에 동(東)반, 서(西)반 두 개 반이 있었고, 졸업동기는 157명이었어. 허화평, 재생(再生) 이명석 선생의 차남 이태우, 로얄와이셔츠 대표 박엽래, 1군 사령관 허정, 비왕산업 대표 임용우가 동기야. 성적은 허화평이 1등이었고, 나도 곧잘 하는 편이었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허화평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은 이태우의 친형 이진우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었어. 그때 우리 동기들은 허화평을 밀었으니 이태우는 섭섭했을 거야.김 : 아버지 영향으로 영어를 좋아하셨겠군요?한 : 아버지 서재에 있던 수많은 영어책 덕분에 영어와 친숙한 환경에서 성장했지. 포항고등학교 시절 정규용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쳤는데 내 영어 실력을 아주 흡족하게 여기셨어. 대학도 처음에는 서울대 영문학과에 가려고 했어. 당시 서울대 인문계에서는 영문학과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거든. 영어를 좋아했고 이왕이면 가장 높은 곳에 지원해보자고 생각한 거야. 결과는 불합격이었지. 서울대 영문학과에 이양하 교수라고 있었어. 평남 강서 출신으로 수필가와 영문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분이지.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아버지가 이양하 교수에게 내 성적을 물어보니 근소한 차로 불합격되었다고 했다더군.김 : 그래서 재수를 선택하신 거군요?한 : 후기를 지원하느냐 재수를 하느냐 고민하다가 재수를 택했어. 그런데 공부가 마음대로 안 돼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여름에 서울에서 재수하던 박춘식이라는 친구가 찾아왔어. 박춘식은 죽도시장에서 가장 큰 미곡상인 의성상회 아들인데, 훗날 고려대 농과대를 졸업하고 포항학원을 세웠지. 그 친구가 나더러 이러면 안 된다며 서울 가서 공부를 제대로 하자고 하더군. 그렇게 서울 가서 뒤늦게 공부에 열을 올렸지. 종로3가 EMI 학원에서 안현필 원장의 강의를 들었는데, 명성대로 실력이 대단했어. 두 번째 대학 지원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택했지. 서울대에 지원했다가 또 떨어지면 낭패니까 안전 지원을 한 거야. 정치외교학은 내 영어 실력이 통할 수 있는 분야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경쟁률이 무려 12 대 1이어서 긴장이 되더군. 다행스럽게도 무난히 합격하고 신세계백화점 옆에 있는 중앙우체국에 가서 아버지에게 합격했다는 전보를 보냈지. 김 : 대학에 입학하니 어떻던가요?한 : 대학교 입학 환영식 때 이흥렬이 직접 작사·작곡한 ‘바위고개’를 불렀는데 참 감동적이었어. “언덕을 혼자 넘자니 / 옛 임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지. 그 감흥을 담아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로 보냈어. 그러고 보면 나도 부모님을 닮아 예술적 감성이 있었던 모양이야.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정치외교학과 신입생 중에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 출신이 거의 8할이더군. 포항 출신은 나밖에 없고. 학과별로 총학생회 대의원을 한두 명씩 선출했는데 나도 당선되었어. 당선되어 총학생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지.김 : 대학 3학년 때 4·19혁명이 겪게 되는데요.한 : 알려진 것처럼 고려대 학생들은 4월 18일 교문 바깥으로 나가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고, 이게 4·19의 도화선이 되었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바깥으로 나갔는데 신설동 로터리에서 학생처장이 자동차 위에 올라가 학교로 돌아가라고 외쳤지만 소용없었어. 나는 대열의 선두에 있었지. 시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학생들을 지지했어. 그런데 국회의사당 앞에서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테러를 당했어. 당시 청계4가에 천일백화점이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다가 체인과 갈고리, 몽둥이를 든 깡패들한테 습격을 당한 거야.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어. 이 사건은 4·19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지. 대열의 선두에 있던 나는 근처 포목점에 숨었는데 깡패가 휘두른 갈고리에 턱을 맞아 피가 많이 흘렀어. 깡패가 사라지자 그제야 경찰이 나타나더군. 깡패와 경찰이 미리 짰다는 이야기지. 나는 경찰차를 타고 이화여대 의과대학 응급실로 가 상처를 꿰맸는데, 하얀 턱뼈가 보일 정도의 부상이었어. 응급처치가 끝난 후 다시 경찰차를 타고 현인동 집까지 왔지. 턱부위의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어.김 : 당시 고려대 모의국회는 대학 사회에서 꽤 유명했지요?한 : 고려대 모의국회는 전국 대학생 행사 중 가장 컸지. 50여 개 대학교 대표가 참가했고,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렸어. 모의국회가 열리면 극장이 미어터졌고, 극장 바깥에 스피커를 달아놓을 정도였어. 나는 2학년 때 모의국회 의사국장, 3학년 때 부의장을 맡았어. 4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의장을 맡고 싶더군. 모의국회 의장 14명 중에 8명이 국회의원이 될 정도로 의장의 위상이 높았어. 경쟁자는 같은 과의 김재묵이었는데, 군 복무를 마치고 늦게 입학해서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았지. 그런데 모의국회 의장은 총학생회장이 결정하게 돼 있었어.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나는 부산 영도 출신의 이상갑을 밀었고, 김재묵은 제주 출신의 고승민을 지지했어. 나는 이상갑의 찬조 연설을 하는 등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고, 개표 결과 거의 두 배 차이로 완승했지.김 : 국회의장은 따놓은 당상이었겠습니다.한 :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져. 5·16군사정변이 터진 거야.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어. 나는 무기력하게 물러설 수 없었지. 정경대 학장을 찾아가 모의국회 전통을 이을 수 있도록 내부무장관을 찾아가 설득할 테니 허락해달라고 했어. 학장이 그렇게 하라고 하더군. 그래서 당시 내무부장관인 한신 장군을 찾아갔지. 을지로2가에 있던 내무부에서 한신 장군을 만나 모의국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어. 한신 장군은 가능하다고 하더니 조건을 다는 거야. 5·16 주체 세력이 내세운 의제를 다루라고 말이야. 그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고 내무부를 나왔지. 대학생들의 순수한 행사에 군사정변 주체 세력이 내세운 의제를 다룬다는 게 말이 되겠어. 그렇게 했다가는 모의국회가 어용국회가 되는 거지. 학교로 돌아와 정경대 학장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잘했다고 칭찬하더군.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2022-08-29

“남빈동 집이 무사하다는 소식 듣고 포항으로 돌아와”

1945년 11월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한 한동웅 선생 가족은 3년여 만인 1948년 가을에 포항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2년이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은 포항 시내까지 밀려온다. 한동웅 선생 가족은 또 짐을 꾸려 부산으로 피난길에 오른다.김 : 광복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에 유년시절을 보냈는데.한 : 남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일신국민학교로 옮겼어. 아버지 수입이 좋았던 덕분에 가정부를 두었지. 가정부한테는 20대 아들이 있었는데 키가 크고 몸이 좋았어. 가정부 아들이 아침에 리어카를 몰고 일을 나갈 때면 나를 학교까지 태워주었지. 혼자 학교 다닐 때는 심심했는데 리어카 타고 다닐 때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하든지. 공부보다 노는 게 훨씬 더 좋았던 시절이지. 김 : 당시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면.한 : 이, 벼룩이 많아 DDT를 막 뿌렸고 독한 약도 많이 먹었어. 회충을 몸 바깥으로 나오도록 하는 데 좋다는 미역도 자주 먹었고. 그땐 콜레라로 죽은 사람이 많았지. 콜레라로 사망하면 집 앞에 새끼줄을 쳤어. 그 앞을 지나가면 한기가 들 듯 으스스했어.김 : 그때 교회는 다니셨습니까?한 : 할머니(박상복 여사)가 돌아가신 후 교회에서 할아버지(한승곤 목사)에게 새 인연을 맺어주었지. 새 할머니를 따라 영락교회에 다녔어. 동생과 둘이서 교회 안을 다람쥐처럼 쏘다니면 할머니가 우리를 찾으러 다녔지.김 :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인데 선생님 댁은 윤택한 편이었으니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많았겠습니다.한 : 우리 집이 괜찮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이북에서 많이 찾아왔어. 38선이 허술한 때여서 가능했지. 아버지는 적잖은 돈을 쥐어주며 그래도 고향이 좋다시며 돌려보냈어. 그런데 한종호라는 먼 친척뻘 되는 청년이 한사코 남쪽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버지는 정 그러면 동생으로 호적을 올리자고 해서 세영(世英)이라는 이름을 짓고 아버지의 친동생이 되었어. 남쪽에서 살아가려면 그렇게 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고 판단한 아버지의 호의가 아닐까 싶어. 나한테 졸지에 삼촌이 생긴 거지.김 : 포항으로 오신 게 1948년이지요?한 : 그해 가을 갑자기 포항으로 오게 되었어. 아버지의 결정이었지. 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는 아버지가 당시 난치병인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걸 치료하려면 바닷가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신선한 해산물을 먹으면 좋다는 의사의 권유 때문이지. 또 하나는 곧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어. 《타임》과 《뉴스위크》를 들고 다녔던 아버지는 시국에 밝았거든. 이 두 가지를 충족할 수 있는 곳이 어디겠어? 남쪽의 바닷가잖아. 아버지가 문인들과 경주에 고적지 순례차 왔다가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는 일행과 떨어져 포항에 잠깐 들렀지. 포항 바다를 본 순간 바로 여기다 싶었던 거야. 그 직후 우리 식구는 서울에서 열두 시간 가까이 열차를 타고 포항으로 왔지.김 : 포항에 와서는 어디서 기거하셨습니까?한 : 해군 제독이 살던 여천동 ㄴ 자 큰 기와집에 잠깐 살다가 남빈동 530번지 집을 사서 이사했어. 방 세 개가 있는 집이었는데, 달전 사람이 70년 전에 지었다고 했지. 집이 오래되어 용마루가 파도처럼 울퉁불퉁했어.김 : 어느 국민학교에 다니셨는지요?한 : 포항국민학교에 다녔어. 여전히 공부는 재미없었지만 미술에는 소질이 있었어. 4학년 때 미술 솜씨가 선생님 눈에 띄어 교실 환경판 그림은 전부 내가 그렸거든.김 : 포항에 오신 한흑구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한 : 전쟁 때 프로펠러 전투기인 F-51 무스탕(Mustang)과 제트 엔진 전투기인 F-86 세이버(Sabre)가 우리 집 위로 계속 지나갔어. 포항 쪽으로 전선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지. 그런데 아군 쪽에서 오폭(誤爆)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어. 인민군이 고지를 점령해 미군 전투기가 출격하면 그사이에 국군이 고지를 다시 점령하는 경우가 있었지. 그렇게 되면 미군 전투기가 국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오폭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던 거야. 통역이 원활했다면 그런 사고가 없었겠지. 그래서 미군이 아버지를 찾아왔고, 아버지는 K-3 미국 공군 통역관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1954년에 포항수산초급대학 교수로 초빙되었지.김 : 남빈동 시절에 기억나는 장면은.한 : 한번은 어머니가 독감에 걸려서 고생을 심하게 하셨어. 이러다가 어머니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하고 식구들이 걱정할 정도였지. 그때 아버지가 미군 부대 폐자재를 갖고 나와서 응접실을 만들었어. 어머니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지. 응접실 선반은 내가 만들었고. 거기에 2천여 권의 책을 진열했어.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갖고 나온 포켓북을 소중하게 여겼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등이 쓴 소설책이 생각나는군. 그 영어책 덕분에 나도 영어와 가까워졌어. 그 후 별채도 만들었어. 별채는 등유로 난방했는데 한번은 아찔한 일이 있었지. 어느 겨울날, 아침 일찍 깨보니 별채가 벌겋게 달아 있는 거야. 깜짝 놀라서 별채로 급하게 뛰어가니 문이 잠겨 있지 뭔가. 큰일 났다 싶어 문을 따고 들어가니 아버지가 이상한 거야. 산소 부족 상태였던 거지. 조금만 늦었으면 큰 화를 당할 뻔했어. 김 :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겪게 됩니다.한 : 포항에 온 실향민들이 죽도시장에 많았어. 평양냉면집은 딱 한 군데 있었지. 8월 10일 아버지가 그 냉면집에서 술을 드시다가 인민군이 달전까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거야. 이튿날 새벽에 아버지가 피난 가야 한다며 짐을 꾸리라고 하시더군. 어머니가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하니까 아버지는 몸만 살면 먹을 것은 생긴다면서 최소한의 짐만 꾸리라고 하셨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은수저 스무 벌을 담요 안에 넣던 기억이 나.김 : 피난은 어느 쪽으로 가셨습니까?한 : 죽도시장에 살던 친한 실향민과 우리 식구까지 합쳐서 모두 73명이 해도를 거쳐 형산강에 도착했어. 강둑을 따라 연일 쪽으로 가는 피난민들의 기나긴 행렬이 보이더군. 형산강 입구는 미군 헌병이 지키고 있었지. 아버지가 헌병과 대화를 나눈 후에 헌병이 형산강을 건너도록 허락하더군. 우리 일행은 오천을 지나 감포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 오천에 K3 비행장이 있으니까 비행장 안전 때문에 그쪽 길은 피난민들이 지나갈 수 없도록 통제했던 것 같아.김 : 울산 방향으로 가셨군요?한 : 그렇지. 울산에 도착하니까 일행의 의견이 갈렸어. 울산이면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온 거지. 결국 우리 식구 다섯 명만 부산으로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울산에 남기로 했어. 울산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부산 동래가 보이더군. 포항에서 출발한 지 일주일 만이었어. 온천 근처 다리 밑에 자리를 잡았지.김 : 부산 분위기는 어떻던가요?한 :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온 산이 하얗더군. 피난민들이 밤에 덮었던 이불을 말리느라 관목 위에 올려놓은 거야. 그 풍경이 장관이었어.김 : 다리 밑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었을 텐데요.한 : 아침에 일어나니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어서 짐을 꾸려서 다리 위로 올라오라고 하는 거야. 다리 위에는 미군 두 명과 쓰리쿼터가 있었어. 그걸 탔는데, 초량동에 있는 동광병원 앞에 도착하더군. 우리 가족은 그 병원의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내게 되었지.김 : 다른 피난민에 비하면 형편이 나았던 편이군요.한 : 그런 셈이지. 그 방에 큰 책상이 있었는데, 서랍을 열면 아버지가 급여로 받은 빳빳한 신권(新券)이 꽉 차 있었어. 그중 한두 장을 빼서 시내에 나가면 놀기 좋았지.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 구경 다니고 영도다리도 건너보고. 도떼기시장(현 국제시장)에 갔던 기억도 나. 그런데 아버지는 자식들도 자립해야 한다는 생활철학이 있었어. 그래서 나더러 동생과 둘이서 장사를 한번 해보라고 하는 거야. 카멜(Camel), 럭키 스트라이커(Lucky Strike), 체스트필드(Chesterfield) 같은 양담배를 구해주더니 길거리에 나가서 팔아보라고 했지. 그걸 들고 길거리에 나갔는데 한 아저씨가 한꺼번에 다 살 테니 따라오라고 하더군. 웬 떡인가 싶어 한 건물 앞까지 따라갔지. 그런데 그 아저씨가 보따리에 담배를 모두 담고는 돈을 가지고 곧 온다며 건물 안으로 사라졌어. 그러고는 안 나타났어. 보기 좋게 사기를 당한 거지.김 : 포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습니까?한 : 11월 어느 날 아버지가 포항 집으로 가자고 하셨지. 남빈동 집이 무사하다면서.김 : 전쟁 때 포항 도심이 초토화되었는데 선생님 댁은 용케 남아 있었군요. 만약 댁이 무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한 : 포항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김 : 포항 집으로 가게 된다니 기분이 어떻던가요?한 : 서울에서 본 전차를 부산에서 다시 보게 되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그런데 포항에 가면 전차를 볼 수 없잖아.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섭섭하더군. 그래서 전차표 한 묶음을 사서 동생 동명이와 둘이서 온종일 전차를 타고 다녔어. 대신동에서 서면, 서면에서 동래온천까지 계속 다녔지.김 : 포항에 도착하셨을 때 풍경이 기억나시는지요?한 : 트럭을 타고 늦은 오후에 포항 효자에 들어섰어. 거기서 시내를 바라보니 폭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거야. 제일교회(현 소망교회) 건물만 솟아 있고 멀리 송도 솔숲이 보이더군.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제공 : 한동웅

2022-08-24

“개나리가 아름다웠던 평남 강서군 연곡리 옛집”

1945년 광복 직후 38선을 넘어 서울로 온 한 가족이 있었다. 이들은 3년 후 바다가 아름다운 포항으로 와서 둥지를 틀었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 갔다. 그리고 고적한 포항으로 돌아와 삶의 뿌리를 내렸다. 지난 2000년 동지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한동웅 선생의 집안 얘기다. 한동웅 선생의 아버지는 문학가 한흑구, 어머니는 중등학교 음악 교사 방정분 그리고 할아버지는 도산 안창호의 동지였던 한승곤 목사다. 포항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한동웅 선생 일가의 발자취는 파란 많은 우리 근현대사의 독특한 전형이다. 다만 포항에 정착한 한흑구가 바다와 술을 벗하며 은자(隱者)로 살아간 까닭에 그 사연을 세상 사람들이 소상히 모를 뿐이다. 한동웅 선생을 만나 193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선생의 삶과 집안의 역정(歷程)을 들어보았다. 김도형(이하 김) : 근황은 어떠신지요?한동웅(이하 한) : 타고난 건강 체질이고 두주불사(斗酒不辭)에 술로는 져본 적이 없어.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나이가 든 탓인지 여기저기 탈이 나네. 구급차 신세를 대여섯 번 졌지. 움직이는 게 좀 불편하지만 거의 매일 40킬로미터 정도 운전하며 바깥바람을 쐬지.김 : 2000년 8월 말에 동지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셨습니다. 그 후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한 : 정년퇴직 후 여러 단체에서 대표를 맡아달라고 요청이 왔어. 사회봉사라 여기고 승낙했는데 한때는 무려 16개 단체의 대표가 되었지. 그렇다고 대표의 명함을 만들지는 않았어. 봉사로 생각하고 대표직을 수락했는데 남들한테 굳이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 대표 중 하나가 평안남도 도민회 회장이야.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남 강서군으로 이사 가서 광복되던 해 10월까지 살았던 인연이지.김 : 포항에도 이북 출신이 있는지요?한 : 지난 3월 평안남도 중앙도민회에서 ‘잃어버린 고향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에 나를 초대하더군. 원래는 실향민 1세대를 불러서 증언을 들으려 했는데 1세대가 살아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1.5세대인 내가 참석하게 된 거야. 아버지가 실향민 1세대고, 나는 1.5세대에 해당하지. 포항에 ‘서부회’라는 이북 출신 모임이 있어. 회원이 십여 명 되었는데, 지금은 세 명만 살아 있지. 모두 구순이 넘었어.김 : 이북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요?한 : 나의 원적은 평안남도 평양시 하수리 96번지야. 생후 한 달여 만에 평남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안말로 이사 가서 1945년 10월까지 살았지. 평양의 기억은 남아 있을 리 없고, 연곡리 시절의 기억은 꽤 갖고 있지. 강서군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향으로 국무총리를 여러 명 배출한 곳이야. 연곡리는 조상 삼대가 살던 곳이지.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간 한흑구는 1934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게 된다. 한흑구는 평양에서 ‘대평양(大平壤’ 등 잡지 편집과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 1937년 4월에 결혼한다. 하지만 그해 6월부터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이 터지면서 한흑구 부자(父子)는 안창호 등과 기소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이듬해 3월 한동웅이 태어났다.김 : 한흑구 선생이 평양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한 : 일본의 박해가 심해서 모든 걸 접고 시골에 가서 좀 쉬자고 생각하셨을 거야. 아버지는 농사를 좋아하셨거든. 소나무를 베어내고 2천여 평 되는 땅에 사과나무와 자두나무를 심었지. 그 과정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어. 일본은 정책적으로 밀주(密酒)와 벌목을 엄격하게 단속했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많은 소나무를 베어냈으니 오죽했겠어. 일본인 면장이 깜짝 놀라 평양시장한테 상황 보고를 했지. 평양시장은 골치 아픈 사람이 갔으니 그냥 내버려두고 동태만 살피라고 했다더군.김 : 연곡리의 추억을 들려주신다면.한 : 내가 살던 집은 ㄴ 자 기와집이었어. 봄이 되면 울타리에 핀 노란 개나리꽃이 아름다웠지. 닭 둥지에 닭이 수시로 달걀을 낳았고, 밤에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겁나서 문밖에 나가지도 못했어. 여름이 되면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강냉이를 삶아 먹었지. 내가 다니던 학교에 마츠다(松田)라는 교장이 있었는데, 칼을 차고 교단에 올라와 훈시했어. 아이들한테 공포감을 심어주려고 그랬을 거야. 마츠다 교장은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거나 재끼(노름)를 했지. 마츠다 교장은 말을 타고 우리 집에 왔는데, 말발굽 소리와 철커덕거리는 사브르(Sabre, 軍刀)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해. 김 : 마츠다 교장이 선생님 댁을 자주 방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한 : 아버지를 감시하고 회유하기 위해서였지. 나는 마츠다 교장이 나타나면 집 옆에 있는 언덕바지로 도망갔어.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고 모기도 성가셨지만 마츠다 교장이 더 무서웠거든.김 : 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한 : 아버지는 낚시를 좋아하셨어. 집에서 5리 떨어진 낚시터를 즐겨 찾았는데 나도 아버지를 따라다녔지. 포항에 와서도 아버지와 낚시를 다녔어. 서울에 있던 최상수라는 민속학자가 연곡리까지 찾아왔던 기억이 나는군. 그분이 바나나를 들고 온 덕분에 난생처음 바나나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어. 사탕은 소련제가 맛이 좋았고.최상수(1918∼1995)는 ‘조선민요집성’, ‘한국의 세시풍속’, ‘한국민속놀이의 연구’ 등을 저술한 민속학자다. 1937년 일본 오사카외국어학교(大阪外國語學校) 영어부를 졸업하였고, 1940∼1950년대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국외국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민속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민속학의 정립에 기여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참조.김 : 남쪽으로 올 때는 어떻게 이동하셨습니까?한 : 아버지는 시국에 밝았어.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 식구들을 놔두고 먼저 월남하셨지. 그리고 11월에 식구들에게 월남하라는 전갈을 보내셨어. 연곡리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염소를 가리키며 네 엄마에게 인사하라고 하시더군. 어머니가 나를 낳고는 젖이 잘 안 나와 젖동냥을 하기도 했는데 이따금 염소젖을 먹이셨나 봐. 눈망울이 선한 염소의 뺨을 비비던 기억이 지금도 선해. 얼마나 마음이 짠하던지. 가재도구를 실은 달구지를 끌고 신작로를 걸어서 강서역으로 향했지. 강서역에서 기차 소리를 처음 들었는데 꿈만 같았어. 기차 타고 개성역에 도착했고, 백천온천에서 하룻밤을 묵었지. 백천온천은 당시 한반도에서 최고로 치던 온천이야. 목욕하고 따뜻한 다다미방에서 잤는데 먹고 남은 강엿을 문지방 위에 올려놓았지. 아침에 일어나니 엿이 녹아서 방바닥까지 내려와 있던 기억이 나.김 : 38선은 어떻게 넘었습니까?한 :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제목의 글이 그렇게 많다던데, 나도 할 말이 좀 있지. 당시 11월은 꽤 추웠어. 낮에 움직이면 인민군에 걸리니까 어둠을 틈타 관목(灌木) 사이로 기어서 남쪽으로 이동했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숨죽이며 움직였어. 인민군이 한 번씩 공포탄을 쏘았는데 총소리에 놀란 꿩들이 갑자기 날아가는 바람에 깜짝깜짝 놀랐지. 그렇게 밤새도록 남쪽으로 이동해 아침 6∼7시쯤 위험 지역을 통과하니 식당 딸린 집 한 채가 보이더군. 그 집에서 쉬면서 백숙을 맛있게 먹었는데,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곧바로 설사를 하고 말았지. 거기서 트럭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했어. 나는 짐칸에 타고 있었지. 그런데 누군가 운전석에 고춧가루를 실어두었는지 그게 바람에 날리면서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어.김 : 38선에 소련군도 있지 않았습니까?한 : 트럭을 타고 한참 가니 아버지와 소련군이 보였어. 아버지가 소련군에게 ‘따바리쉬(товарищ, 동지)’라고 하니까 소련군이 통과시켜주더군. 아버지가 식구들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린 거지. 우리 식구는 미군이 운전하는 쓰리쿼터(three-quarter)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어. 숭례문 인근의 대동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중구 필동 9번지 집에서 짐을 풀었지. 필동은 고위층이 많이 살던 동네로, 우리가 짐을 푼 곳은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살던 집이었어. 방 여덟 개가 있는 이층집이었고 작은 연못과 정원, 불교식 등(燈) 두 개가 있었어. 서울시의 통역관이었던 아버지가 미군정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는 얘기지. 부엌 옆에 온돌방이 하나 있었는데, 키 작은 일본인 노부부가 그 방에 있었어. 아마 그 집의 주인이 아니었나 싶어.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손을 흔들며 떠나던 부부의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한동웅1938년 평양에서 한흑구 선생과 방정분 여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10월 월남해 서울 필동에서 살다가 1948년 가을 가족과 함께 포항에 정착했다.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으며, 3학년 때 4·19혁명에 앞장섰다. 대학 졸업 후 포항으로 돌아와 1962년 3월 영일중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1968년 9월 동지상고로 옮겼고, 2000년 8월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38년 6개월 교직에 있는 동안 교장으로 16년 있었다. 그 후 평안남도 도민회 회장, 포항환경운동연합 공동 대표 등 여러 단체에서 봉사했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사진촬영: 김훈(사진작가)

2022-08-22

“사람은 나무를 닮는다”

꽃샘추위라 했던가. 초여름인 듯 올라갔던 기온이 떨어졌다. 벚꽃은 졌고 이팝나무 꽃이 피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철쭉 꽃망울이 조금씩 색을 입어가던 날 오후에 찻집 ‘꽃멀미’에서 이삼우 원장을 다시 만났다. 마지막 인터뷰였다. 계절 탓인지 혹은 서로에게 익숙해진 탓인지 밝은 목소리로 맞아주셨다. 김 : 노거수회는 원장님께서 기청산식물원만큼 정성을 기울인 모임이라고 들었습니다.이 : 그 이야기에 들어가려면 먼저 들어야 할 것이 있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패전국이 된 독일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 50페니히(Pfennig) 주화에 참나무 심는 여인상을 넣었지. 독일의 국목(國木)이 루브라참나무거든. 그리고 법으로 정했지. 참나무는 230세 되어야 벌채할 수 있다고. 나무는 100세부터 노거수 축에 드는데, 100세부터 229세까지 자란 참나무 노거수가 국토 곳곳에 많아지게 한 거지. 벌기령(伐期齡)이 왜 하필이면 230세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걸작인 것이 게르만 민족이 우수한 민족이 되도록 하는 방편이라고 하더군. 국민들이 참나무 노거수를 무시로 접하면서 이 나무를 닮아 참되고 의연해지기 때문이라는 거야. 나무는 사람을 닮지 않지만 사람은 나무를 닮게 돼 있거든. 결국 서독은 종전 후 불과 10여 년 만에 유럽 일등급 국가가 되었지.김 : 230세라. 우리나라에서 그만한 노거수는 손에 꼽을 정도일 텐데요.이 : 그렇지. 내가 노거수를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은 40년 전이었어. 추수를 앞둔 가을 어느 날, 신광면 토성마을 앞 들판 길을 차를 몰고 지나가고 있었지. 비학산과 동리 집들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거목 한 그루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라. 순간 감탄사가 나왔어. 저 나무 한 그루 덕분에 마을 풍광이 사는구나. 두 아름 반쯤 되는 300여 년 묵은 상수리나무였어.김 : 그렇게 노거수회가 시작된 것입니까?이 : 저런 귀한 생명 문화재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위기의식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틈날 때마다 노거수를 찾아 나섰지. 1987년에 『영일군사』 편집위원장을 맡게 되었는데, 집필위원들이 쓴 원고를 세심하게 검토하려면 현장을 일일이 확인하러 다녀야 했어. 각 마을의 역사를 직접 집필해야 하니 주말마다 자연부락이며 전설이 있을 법한 산천을 조사하게 되었지. 마을 연혁을 조사하다 보니 어느 마을이든 당산목이나 마을 숲이 있는 거라. 당산목은 민초들의 토속신앙 흔적이 구구절절 쌓였거나 정자목이 되어 여름철 노인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런 거목이나 마을 숲이 없었다고 상상해봐.김 : 차를 타고 가다 당산목이 서 있는 마을을 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저 마을은 유래가 깊겠구나, 저 나무 밑에서 마을의 이야기가 비롯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이 : 그게 노거수의 역할이지. 그런데 노거수를 조사하다 보니 온전한 노거수가 점점 사라지는 거야. 노거수에 대한 식견과 애정이 부족한 시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심지어 관에서 노거수를 보호한다고 조치한 일이 오히려 해롭게 하는 경우가 빈번했어. 그냥 방치할 일이 아니라 어떻게든 나서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1990년 『영일군사』 편찬을 끝낸 후 본격적으로 노거수 연구를 해보니 이 사업이 혼자서 감당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서 1991년 이른 봄에 뜻있는 사람들과 노거수회를 창립했지. 노거수 보호 운동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거야. 김 : 30여 년 전이군요. 그동안 많은 일을 해내셨을 것 같습니다.이 : 첫 번째는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찾아내 포항의 첫 번째 천연기념물로 등재한 일이지. 이 군락지는 하늘이 내려준 귀한 선물이야. 처음 눈에 띈 것은 장기면 모포리 소재 뇌성산 기슭이었고, 그 후 영일만 일대를 조사해보니 동해면 흥환, 발산, 대동배리에 꽤 큰 군락지가 있더군. 포항 시내에서도 찾아냈는데, 양학동, 환여동은 물론, 제산, 장기면에도 자생하고 있더라고. 전체적인 규모가 세계적으로 커. 100만 년 전에는 이 일원이 거대한 호수였다는 귀중한 지질학적 의미가 있기도 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발산리 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받게 되었어. 그다음으로는 마북 느티나무를 구해낸 일이야. 노거수회 회원 50여 명이 보호수 도목(道木) 1호인 신광면 마북리 600년생 느티나무를 찾아갔어. 향토순례 행사였지. 비료 주기와 잡목 제거 등 무육(撫育) 작업을 하고 있는데, 신광면 상록회 회장과 마을 주민들이 막걸리와 음료수를 들고 찾아왔어. 그리고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 나무가 곧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는 거야. 우리가 언론기관에 제보하고 협조를 요청해서 이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결국 이식하게 되었지. 그 밖에도 경상북도 수목원이 자리하고 있는 매봉 북쪽 북골 거대한 참나무 숲이 개벌될 것을 무산시켜서 보경계곡 12폭포 계곡이 폭우 때 황폐화되는 것을 막은 일, 보경계곡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는 등 난개발 계획을 막은 일, 죽장면 하옥 계곡 향로봉 서편 자락을 뒤덮은 국내 최대 규모의 참나무 천연림이 산림청의 무육 사업으로 훼손당할 뻔한 것을 막은 일, 해당화 군락지를 무육한 일 등 많은 일을 했지. 김 : 많은 일을 하시는 동안 아쉬운 일도 있었지 싶은데요.이 : 포항 송라면에 화진해수욕장이 있지. 그곳에서 임진왜란 때 벌어진 이야기야. 일본의 수송선 한 척이 화진 인근에 정박하고 노략질을 일삼았어. 송라 아래쪽 청하 월포리에는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있었고, 덕천리에는 찰방(察訪)이 있었거든. 그 시절 청하현은 꽤 잘나가는 곳이었어. 월포리와 덕천리의 군사와 의병이 야밤에 화진에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했고, 장시간 백병전 끝에 양쪽이 거의 몰살했어. 그리고는 경황이 없어 백사장 한구석에 시신들을 대충 묻었지. 그곳을 ‘썩은숭이네고랑’이라 한다는 얘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이 달밤에 ‘썩은숭이네고랑’을 찾아가 제단을 차리고 통곡하며 제를 지냈다는 거야.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민족적 자존심이 팍 상했지. 그래서 노거수회에서 2004년부터 17년간 해마다 위령제를 지냈어. 이 전투의 기록을 찾아내지 못하고 위령비를 세워주지 못한 게 안타까워. 죽장면 입암에 산남의진(山南義陣) 장병들을 추모하는 위령비 건립을 시도했는데 그것도 좌절됐어. 포항의 시목(市木), 시화(市花)를 해국과 모감주나무로 바꾸는 운동이 결실을 맺지 못한 것도 아쉬워. 포항의 시화와 시목이 무엇인지 아는가?김 : 시화는 장미, 시목은 해송 아닌가요?이 : 맞아. 20여 년 전 30여 명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서 정했지. 1차 회의에서는 해송과 해바라기가 선정되었어. 내가 제안한 모감주나무와 해국은 2등으로 밀렸지. 해바라기가 당시 소련의 국화인 데다 해를 따라 얼굴을 돌리는 행태가 아부성이다, 하는 여론이 있어서 1년 후 재심의를 했어. 그 결과가 해송과 장미야. 내 제안은 또다시 2등이 되었지. 그런데 그게 납득이 안 돼. 일단 해송은 잘못된 표기야. 곰솔이 맞지. 그리고 장미는 전국 20여 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상징화로 삼고 있어. 그만큼 희소가치가 없다는 말이지. 그것 말고도 아쉬운 게 여럿 있어. 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노거수와 황보 씨 집성촌 등 소중한 향토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했어. 겸재 정선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청하를 진경산수화의 메카로 조성하고 청하읍성을 복원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더군. 그래도 많은 일을 해냈으니 위안을 삼아야겠지.김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이 : 다른 것은 기억하지 않아도 좋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시게. 노거수를 해코지한 사람은 필히 사고를 당했다는 것, 마을 숲을 훼손한 사람들은 거의 다 오래가지 않아 힘들어졌다는 사실을.마지막 인터뷰가 끝나고 이삼우 원장이 식물원 입구까지 배웅해주셨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 식물원 안으로 들어가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며 한 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 나무와 식물과 땅과 함께하여 그들의 향이, 본성이 몸에 밴 그는 한 그루 노거수였다.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사진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제공:이삼우

2022-08-17

“자연주의 철학을 담고 있는 참느릅나무”

기청산식물원이 여느 식물원과 다른 점은 독특한 철학이 있다는 것이다. 그 철학은 식물원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마다 담겨 있다. 기청산식물원이 조성되는 과정 그리고 식물원의 철학이 깊이 배어 있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 : 기청산식물원 이야기를 좀 더 나누었으면 합니다. 당시 5만 평을 모두 식물원으로 바꾸지는 않았겠지요?이 : 5만 평 넘던 땅을 사반세기 동안 야금야금 절반을 팔았어. 식물원을 조성하고 가꾸는 데 들어간 거지. 식물원은 돈을 펑펑 버는 곳이 아니야. 사람 손이 무진장 들어가니까 인건비가 많이 들고, 특히 기청산식물원은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곳이니까.김 : 잘 버텨야 하는 곳이군요.이 : 이 식물원이 서울이나 부산 인근에 있었으면 굉장하겠지. 최근에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최고의 치유 안식처가 식물원이라고 하잖아. 특히 코로나 난세에는 더 중요한데 말이야. 국내외 명승지만 골라 돌아다니다 보면 심혼이 붕 뜨고, 막상 집에 돌아오면 허탈해지지. 그게 병이 되기도 해. 그런 반면 가까운 식물원에 다녀오면 정신이 맑아지고 생기가 돋아나. 선진국에서는 지역 기업이 식물원 입장권을 다량으로 할인 구매해서 직원들에게 선물한다고 해. 월요일 근무 분위기가 생기로워지니 작업 능률이 확 높아진다면서.김 : 처음 기청산식물원을 열었을 때 반응이 어땠습니까? 특히 포항에서의 반응이 궁금합니다.이 : 포항 사람의 이용률이 가장 뒤졌어.김 : 뜻밖이군요.이 : 포항은 주변에 내연산, 운제산 같은 좋은 산이 있고 바다도 있지. 바로 곁에 경주도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서울, 부산, 대구보다 정서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수준급 환경이 많이 있지. 그래서 식물원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는 것 같아.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포항 사람도 많이 오는데, 그분들이 포항에 이런 데가 있었나 하고 놀라기도 해. 서울 근교의 잘나가는 식물원에는 연간 20만에서 50만 명이 찾아간다고 하더군. 기청산식물원은 아직 3만 명을 못 넘어. 기다리는 거지. 힘겹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김 : 수목원과 식물원은 어떻게 다릅니까?이 : 대학교에 빗대 말하자면 수목원은 단과대학이고 식물원은 종합대학이지. 수목원은 나무 위주로 조성한 곳이고, 식물원은 나무와 초본류를 망라한 곳이니까.김 : 지금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언제쯤입니까?이 : 1991년에 시작해서 10년 정도 걸렸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걱정이 돼. 국립수목원을 제외하고 한국 공사립 식물원 중에서 나무만큼은 가장 나이가 많고 큰 편이지. 처음에는 크게 자란 나무를 솎아 팔면서 조성하니까 재정에 도움이 되었지. 요즘은 나무 가격이 많이 내렸어. 나무 판 돈으로 빈자리를 메우고 뒷정리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어. 번거롭기만 해. 그래서 큰 나무를 그냥 베어버리기도 하는데, 마음이 아파. 베어낼 때마다 미안하다 위로해주고 때로는 막걸리 한잔 치기도 해.김 : 연아송 이야기 좀 들려주시지요.이 : 연아송 일원에 소나무를 수십 그루 심어 키웠어. 수형(樹形)을 다듬어서 잘 팔았지. 그런데 연아송은 삐딱하게 자라서 안 팔리고 홀로 남은 거야. 직원들이 베려고 하기에 내가 불쌍하다고 그냥 두라고 했지. 4, 5년이 지나면서 반전이 일어났어. 휘어진 형상이 김연아 선수의 이나바우어(Ina Bauer) 포즈를 닮지 않았어? 김연아가 세계 빙상 대회에서 첫 그랑프리를 수상했을 때 그걸 기념해 ‘연아송’이라 이름 붙인 거야. 이제는 효녀 노릇을 해.김 : 재미있군요.이 : 굽은 솔이 선산(先山)을 지킨다는 철학을 가르치는 나무가 되었어. 이제는 2억 원을 준다 해도 못 팔지.김 : 다른 이야기 하나 더 해주시지요.이 : 기청산식물원의 자연주의 철학을 나타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참느릅나무야. 기청산식원의 참느릅나무 김 : 참느릅나무, ‘참’ 자가 붙는군요.이 : ‘참’ 자가 붙으면 훌륭하다는 뜻이거든. 왜 참느릅나무를 귀중히 생각하느냐 하면 참느릅나무가 있어야 귀조경이 되기 때문이지. 조경에도 서열이 있어. 귀조경이 1등이야. 꽃이 언제 많이 피는지를 따지는 것은 눈조경이고 2등이지. 원장님 이거 먹는 겁니까, 하고 자꾸 묻는 것은 입조경, 3등이야. 냄새 좋다 하는 것은 코조경, 4등이지. 귀조경을 하는 데는 느릅나무가 최고야. 늦봄부터 초가을 붉은 상사화가 필 때까지 꾀꼬리가 이곳을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거든. 꾀꼬리는 느릅나무가 있는 숲에 서식해. 먹이사슬 때문이지. 그 밖에도 느릅나무한테 배울 점이 많아. 나무 밑을 관찰해보면 작은 식물들이 살고 있어. 느릅나무가 늦게 잎을 내거든. 1년에 6개월만 잎을 피워서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남은 6개월 동안은 아래 것들도 탄소동화작용을 할 수 있게 베푸는 거지. 민초들을 생각하는 자비심 같아. 그러니까 자기는 여위었지. 꾀꼬리는 이 자비로운 나무를 사랑하는가 봐. 해마다 5월 초순이면 찾아오는데 ‘조수미(鳥秀美)’ 왔느냐, 하며 반갑다고 인사를 한다네.김 : 킹트리에 관한 이야기도 부탁드리겠습니다.이 : 킹트리? 낙우송이지. 그 나무가 서 있는 땅은 원래 내 땅이 아니었어. 거기에 물웅덩이가 하나 있었고 늘 물이 흘렀어. 바로 언덕 위에 대처승이 시무(視務)하는 암자가 있었는데 부인이 나더러 빨래하는데 더우니까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 하나 심어달라 하기에 2미터 정도 되는 나무를 심었지. 그런데 낙우송이 물구덩이에서 얼마나 신바람 나게 크는지 몰라. 자기 특기인 호흡근을 솟구쳐 올리면서 말이야. 저 나무를 보는 사람마다 백 살이 넘었다 생각하지. 그런데 쉰두 살을 먹었다는 건 아무도 몰라. 이 낙우송도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어. 어느 해 겨울이었는데, 그날따라 뭔가 찝찝해서 나무를 둘러보러 나갔더니 대형 굴삭기가 낙우송 주변을 흙으로 메우고 있는 거야. 택지 개발해서 판다고 말이야. 그때 이 킹트리가 사라질 뻔했지.김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이 : 작업을 중지시키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달라는 대로 주고 매입했지. 그렇게 이 나무의 생명을 구했어. 그 후 6, 7년 지났을 즈음이었어. 내가 킹트리에게 이렇게 말했거든. “이 친구야, 내가 너 때문에 진 빚이 많아 힘들다. 네가 하다못해 이자는 물어줘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농담 반 진담 반 투정을 했지. 그러고 나서 보름쯤 지났나? KBS에서 찾아왔더라고. ‘나무야 나무야’ 프로그램 제작팀인데 이 나무를 주제로 촬영하겠다는 거야. 추석 특집으로 방영되고 나니까 그다음 날 800여 명이 들이닥쳤어. 1년 이자를 한 방에 갚아버리더군. 의리 있는 나무야. 요즘은 내가 이렇게 말해. “이 친구야, 해마다 이자도 갚고 원금도 좀 갚아줘.”김 : 아직 반응은 없고요?이 : 믿어보는 거지. 의리 있고 능력 있는 지천명 사나이 같은 나무니까.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2022-08-15

“알짜배기를 골라 푸른 강산을 만들고 싶었지”

봄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고개를 내민 수복초와 동강할미꽃에게 눈인사를 하며 식물원으로 들어섰다. 이 비가 그치면 활짝 피리라 말하듯 살포시 벌어진 수선화 꽃대 끝 노란 꽃잎에서 봄을 느꼈고, 겨우내 가다듬은 몸매를 자랑하듯 솟아오른 상사화의 매끈한 잎을 보며 뜨거운 태양과 마주할 상사화 꽃을 떠올려보았다. 식물원 안에 있는 찻집 ‘꽃멀미’ 통나무 의자에 앉아서 모닥불을 보고 있는 사이, 이삼우 원장이 까맣게 그을린 솥에 우려낸 감태잎차를 잔에 담아 건네주셨다. 김 : 부친께서 하시는 과수원에서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자주 하셨다면서요?이 : 많이 했지. 겨울에는 기술자들과 가지치기도 하고. 일해서 번 돈이 제법 두둑했어. 수원역 앞 골목길에 허름한 빈대떡집이 있었는데 방학 끝나고 개학하면 친구들 불러서 한턱내는 거지. 시국과 인생을 논하면서 말이야. 진지하고 멋진 학창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김 : 그런 추억이 구석구석 남아 있겠습니다. 1969년에 기청산농원을 시작하셨지요?이 :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거지.김 : 1991년에 기청산식물원을 개원하셨고요.이 : 농원 이름은 내가 지었어. 국토가 헐벗은 시절이라 푸름에 대한 욕구가 팽배했던 탓인지 청산, 청산 그랬는데 청산은 흔한 이름 같아서 고심 끝에 앞머리에 ‘키 기(箕)’를 붙였어. 키는 찌꺼기를 버리고 알곡을 모으는, 옛날 농가마다 있던 곡식 선별 기구인데, 나는 푸른 것이라고 무조건 취할 것이 아니라 알짜배기를 골라서 이 강산을 푸르게 해야 한다는 뜻을 품었지. 한국에서 최고라는 작명가의 감정까지 받았고.김 :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과 식물원에 자주 오면서도 이 근처에 ‘기청산’이라는 산이 있나 보다 했지요.이 : 따지고 보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지. 킹트리라고 이 식물원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오래된 나무가 서 있는 구역이 야산인데 마치 키 모양이야.김 : 킹트리, 큰 낙우송이 있는 그 산 말이군요.이 : 그래, 그 산. 농사를 처음 지을 때는 고구마, 수박, 배추, 참외, 참깨, 유채 등 갖가지를 재배했어. 일꾼들과 더불어 똥물로 퇴비도 앙구고 소를 몰아 밭갈이도 해봤지. 닥치는 대로 체험한 셈이랄까. 1969년부터는 학교법인 과수원 관리 농장장도 했어. 그러다가 재단 이사장인 선고께서 돌아가신 후 묘한 인연으로 그 과수원을 내가 매입해 운영하게 된 거야. 아버지의 땀과 사랑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900여 평의 농장을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하소연하니까 팔촌 형님이 선뜻 자금을 빌려줘서 구입한 거지. 팔촌 형님은 아버지가 큰 상회를 경영할 때 점원으로 들어와서 훗날 그 상회를 비롯해 양조장까지 인수한 신실한 분이었어.김; 과수원에서 식물원으로 바뀌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이; 과수원은 일 년에 평균 열일곱 번 정도 농약을 쳐야 해. 그런데 농약을 칠 때마다 엄청 괴롭고 힘든 거야. 벌레, 병균과의 전쟁을 치르는 거지. 수입은 괜찮지만 뭔가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때부터 농약을 안 치는 친환경 농법으로 바꿨는데, 완전히 실패했어.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군. 그러고 나니 나무 키우는 업종이 다시 내 마음에 들어오는 거라.김 : 그래서 과수원을 그만두셨나요?이 : 당장 그만두지는 않았어. 나무 생산에 점차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 거지. 그즈음부터 우리나라 산에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했어. 그전에는 민둥산이라 등산을 하면 허탈했는데 녹화에 속도를 내니까 진짜 산 같은 멋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등산을 자주 갔는데, 숨어 있던 야생초목이 눈에 띄더군. 그때 야생식물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우리 조경 세계에 우리 식물을 보급해야겠구나 하는 사명감을 느꼈어. 그래서 ‘향토 고유수목 연구개발 보급농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우리 나무에 대한 연구, 개발, 보급을 시작했지.김 : 과수원 일과 같이하신 거군요.이 : 그렇지. 연구해서 하나둘 개발하는데 굉장히 보람을 느꼈어. 그런데 초창기에는 잘 안 팔려서 힘겨웠지.김 : 나무들 말씀이죠?이 : 그 시절 조경 현장에는 향나무, 히말라야시다, 플라타너스, 이태리포플러 같은 외래종이 주종을 이루었어. 40여 년 전에 이팝나무를 2천여 그루 길러 보급했고, 그 다음에는 느티나무 모종을 십 수만 본 양묘(養苗)해서 대구·경북 일원에 뿌렸지. 수년 뒤에는 내가 판 느티나무 수십 그루를 다시 사와 몇 년간 키워서 판매하는 우스운 일도 있었어. 여기에 있는 나무는 다 팔려서 말야.김 : 모종을 키우고 판매하면서 재미난 일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이 : 나는 나무를 생산할 때 나무가 정당한 모양새를 잡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거든. 나무들이 자라서 비좁아지면 마음이 아파.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들이 팔려갈 즈음 내 마음이 그랬어. 애간장이 다 말라. 이것들을 어쩌나, 솎아 내버릴 수도 없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대구시장이 우리 식물원에 방문한 거야.김 : 대구시장이요?이 : 이상희 씨라고, 고위 관료로서는 식물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야. 나중에 내무부장관도 지냈던 분이지. 자연을 아끼고 우리 나무를 귀중히 생각하는 분이었어. 그분이 대구 시내 조경을 제대로 바꾸기 위해서 구상하는데, 거래하는 나무들이 전부 외래종이니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그러다 업자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청하에 그런 나무를 심어놓고 못 팔아서 끙끙대는 별난 농사꾼이 있다는 말을 들었나 봐. 이분이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곧바로 여기로 와서 오후 5시까지 머물다 가셨지. 지금처럼 식물원이 무성하지는 않았지만 나무들이 자라서 제법 좋아 보였던 거야. 울릉도 후박나무, 참느릅나무, 느티나무 들이 한창 잘 자라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우리나라에 토종나무를 기르는 농장이 거의 없을 때라, 그분이 온종일 나무를 살펴보고 내 얘기를 경청했지. 그렇게 해서 느티나무부터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 이팝나무가 보급되었어. 이팝나무의 가치를 알리려고 당시 식물학계 3대 거장 중 한 분인 이창복 박사를 초청해 강연회도 열었어. 야밤에 식물원 정원에서 포항 유지들에게 삼겹살 대접을 하면서. 김 : 농원을 식물원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이 : 결정적인 계기가 있지. 우리나라에 식물원이라고는 광릉에 있는 국립수목원뿐일 때였어. 그런데 1996년에 식물원협회가 창설되었어. 우리나라도 이제 식물원이 필요할 때가 되었으니 먼저 식물원협회를 만들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거지. 그래서 나의 모교 교수님 중 한 분이 뜻있는 식물계 인사들과 식물학도들을 주축으로 식물원협회를 조직했어. 협회를 창립하고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잖아. 내가 50만 원을 내놓았지. 사과 농사와 조경수 농사로 수입이 괜찮을 때였거든.김 : 당시 50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닌데요.이 : 내가 젊을 때는 돈을 잘 몰랐어. 기부하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1년 뒤 부회장직을 맡게 되니 식물원을 제대로 조성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김 : 식물원협회 부회장이니까요.이 : 그렇지. 그래서 일본으로 벤치마킹하러 갔지. 도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하코네(箱根) 습생식물원이라고, 대지가 한 8, 9천 평 되는데 연간 50만 명이 다녀간다는 거라. 가서 보니 이 정도면 우리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어.김 : 자신감을 얻으셨군요.이 : 거기서 깨우친 것도 있어. 안내요원에게 일본에 등록된 식물원이 몇 개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335개라는 거야. 게다가 등록된 식물원에는 정부에서 풍족하게 지원해주더군. 식물원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물었더니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국민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해. 그 말이 두고두고 머릿속에서 맴도는 거야. 그때부터 식물원 조성과 경영은 물론, 식물 세계에 대한 인문학적 공부를 시작했지.김 : 전공하셨는데 왜 다시 공부를 하셨는지요?이 : 학교 공부는 기초공사지. 파고 들어갈수록 엄청난 세계가 있는 거야. 조물주의 창조 순위가 식물이 세 번째고, 인간은 여섯 번째라는 ‘성경’의 뜻도 깨우치게 되었지. 식물 세계는 인간이 갖고 노는 대상이 아니야. 공존해야 해. 사실 공존도 교만스러운 거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에 붙어서 살고 있잖은가. 식물에 붙어서 뜯어먹는 벌레들을 천시하지만 우리는 벌레보다 더해. 확 깔아뭉개기까지 하잖아. 돈 벌어 호의호식하려고 농약 쳐가면서 다 죽여버리고. 식물 세계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버렸거든.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사진촬영 : 김훈(사진작가)

2022-08-10

청하중 학생들과 함께 보살핀 ‘여인의 숲'

기청산식물원을 찾아가다 보면 소나무 숲이 펼쳐지면서 청하중학교가 나타난다. 100~200년은 되었을 법한 아름드리 노송들이 아래로는 서로의 자리를 지키고 위로는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관송전(官松田)이다. 나무와 나무 틈으로 지붕이 붉은 건물들이 보인다. 청하중학교다. 늦게 하교하는 한 학생이 숲길을 걷는다. 아름답고 넉넉한 숲에서 너희는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 가만히 다가가 묻고 싶지만 깊은 사색에 빠진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발길을 돌려 곧장 식물원으로 향했다. 김 : 농대를 졸업하고 포항으로 오셨습니다. 부친께서 이사장으로 있던 재단 농장에서 농사도 짓고 나무도 기르면서 한편으로는 청하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고 들었습니다.이 : 젊은 나이에 애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어. 난 회초리는 한 번도 안 들었어. 학생들이 궁금한 게 많았던 것 같아.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이 내 양쪽에 주렁주렁 매달리듯 따라오면서 질문을 했어. 교무실까지 따라와서 계속 질문하고 나는 대답하고 그렇게 가르치니까 얼마나 재밌고 신바람 났겠나?김 : 정말 재미있었겠습니다. 청하중학교 연혁을 보니 1951년에 개교했더군요.이 : 1951년 휴전협정 중에 세웠지.김 : 이후에 선친께서 인수하신 건가요?이 : 설립자가 부채가 많아서 우리 선고에게 넘겼어. 선고께서 돌아가신 후 형님이 사업하다 부채가 많아져 학교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그래서 내가 객기랄까, 아버지가 우리 가문을 교육자 집안으로 키워놓았는데 남한테 넘기면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부채를 떠안고 맡게 되었어. 애초에 나는 여력이 생기면 대안학교 비슷한 농업계 고등학교를 세우고 싶었지. 철학이 있고 자존심 강한 인간 교육을 하는 학교를 만들고 싶었어. 청하중학교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학교 숲 부문 대상도 타고, 아름다운 전원학교로 선정되었어. 솔숲 대부분은 기청산식물원 소유인데 식물원이 학교를 품에 안은 형국이지. 이렇게 자연환경이 좋은 학교는 없을걸.김 : 그렇지 않아도 오는 길에 관송전을 둘러보았습니다. 정말 좋더군요. 내친김에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식물원까지 왔습니다. 솔숲 산책로도 좋았습니다. 쉬엄쉬엄 가게 해주고, 무엇보다 직선이 아니어서.이 : 직선으로 산책로를 해놓으면 심리 치유가 안 되거든. 직선은 죽음을 뜻해. 직선적인 사람들을 보면 뭘 부수거나 앞서 해놓은 걸 확 지우고 없애고 그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처럼 물은 흐르다 막히면 잠시 머물러 찰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힘차게 굽이굽이 흘러가지. 점심시간에 학생들의 식후 산책을 유도하기 위해 예산을 엄청 들여 조성했어.김 : 후원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이 : 식물원이 기증받은 것을 교정에 세웠지. 강화플라스틱으로 제작된 거야.김 : 주물이 아니고요?이 : 주물이 아니야. 로댕의 후원자가 일본 사람이었어. 그 사람이 로댕의 양해를 받아 강화플라스틱으로 원작품 그대로 열 개를 만들었는데, 그중 한 개가 한국에 들어온 거지.김 : 그게 지금 후원에 있는 건가요?이 : 그렇지. 흉내 내어 깎은 것이 아니고 그대로.이 : 교육적으로 좋다 싶어 가져다 놓았지. ‘논어’에 이런 말이 있어.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지. 요즘 보면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이 수두룩해. 말이 앞서거나 많아. 되새김질하듯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데 말야. 되새김질하려면 고생하면서 공부해야 해. 정말 중요한 것은 철학적인 것, 즉 인생관이지. 고난이 없으면 나이테 없는 나무와 같아. 그렇게 자라면 태풍에 쉽게 부러지지. 고생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나무가 나이테를 만드는 것과 똑같아.김 : 말씀하신 내용이 원장님의 교육철학이겠군요.이 : 우리 학교의 교육철학은 “공부 선수는 공부 선수대로, 심부름 선수는 심부름 선수대로, 그 소질대로 성장하도록 교육 방향을 정해야 한다”거든. 교직원들한테 항상 하는 얘기가 성적 가지고 따지지 말라는 거야.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의 부족함 때문에 성공하거든. 부족함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그 공백을 메꿔야겠다는 의욕이 있으면 그게 성장이지. 학교에서 배운 게 다가 아니야. 건축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대학교는 기초공사에 해당하지. 참교육 결핍 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공부 잘해서 변호사, 의사 되고 출세만 하면 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데 그게 전부 착각이라. 아이들은 각자 잘하는 방향, 소양대로 키워야 해. 그리고 중요한 것이 체육이야. 건강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니까. 이런 우리 학교의 교육철학이 요즘 다른 학교에서도 많이 활용되고 있어. 우리가 선두주자인 셈이지. 그 덕분인지 우리 지역에서 들어오는 학생 수는 10여 명 남짓한데, 포항 시내와 외지에서 학생들이 몰려와서 한 학년에 두 학급이 유지되고 있어.김 : 처음부터 한 학년이 두 학급이었습니까?이 : 한때 네 학급까지 있었어. 학생 수가 천 명을 넘을 때도 있었지.김 : 원장님이 계시기 전인가요?이 : 내가 인수하기 직전까지 그랬던 것 같아. 인수하고 얼마 안 지나서 도시로 많이 나갔어.김 : 물론 다른 사람한테 넘겨줄 수 없어서 인수한 것도 있겠지만, 나는 사학을 이런 식으로 해야겠다, 혹은 좀 전에 하신 말씀처럼 대안학교처럼 운영해야겠다, 이런 꿈이 있었습니까?이 : 큰 꿈이라기보다 청하중학교를 좋아했지. 학교를 인수한 후 교직원들에게 회초리는 들어도 매질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어. 군기 잡는다고 몽둥이질하는 선생을 종종 봤거든. 그리고 아이들 자존심 상하게 뺨을 때리거나 그와 비슷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어. 내가 겪어보니 회초리를 들 틈이 없더라고. 갸름한 플라스틱 자를 한 번 쓰긴 썼지만. 김 : 청하중학교 학생들과 같이한 보람 있는 일을 소개해주시지요.이 : 워낙 많아서 말이야. 그중 한 가지를 꼽는다면 ‘여인의 숲’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고 기념비까지 제작한 일이지. 이 숲은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 있어. 조선 후기에 이 마을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김설보라는 여인이 마을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땅을 사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등을 심고 숲으로 가꿔 마을에 기증했다고 해. 마을 저수지가 무너지고 하천이 범람해 떠내려가던 사람과 가축이 이 숲에 걸려 피해를 줄였다고 전하지. 내가 청하중학교를 인수하고 나서, 그러니까 36년 전부터 우리 학생들하고 ‘여인의 숲’을 찾아가 보살폈어. 단순히 숲만 가꾸는 것이 아니라 향토의 역사와 지혜로운 조상들의 발자취를 본받게 하고 싶었어. ‘여인의 숲’이라 이름도 지었고. 훗날 포항시에서 예산을 지원해줘 기념비도 건립했지. 참나무의 씨앗, 도토리를 품고 기도하는 손을 형상화한 멋진 비야.‘여인의 숲’은 2011년에 산림청과 생명의숲 국민운동, 유한킴벌리가 개최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했어.김 : 졸업생 가운데 원장님처럼 농업을 하고 싶다는 제자는 있습니까?이 : 요즘 농사짓겠다는 사람이 있겠나?김 : 농사짓는 제자라면 많이 사랑해주실 것 같습니다.이 : 만약 있다면 내가 아마 업고 다니지 싶어. 물론 그다음부터는 플라스틱 자를 들고 가르치겠지만.대담·정리 : 김강 (소설가) / 사진제공 : 이삼우

2022-08-08

“참나무는 금수강산의 핵심이지”

이삼우 원장과 나무와 숲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림(造林) 이야기로 이어졌다. 특히 지난 3월 초 울진, 삼척에서 일어난 대형 산불 때문에 조림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국내 산에 아까시나무와 소나무가 많은 이유, 그리고 앞으로 심어야 할 수종(樹種)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 : 조림 분야는 일반인에게 생소한 것 같습니다.이 : 우리나라 초창기 조림 사업의 주목적은 벌거벗은 산에 푸른 옷을 입히는 것이었지. 산을 푸르게 하는 것이 1단계였는데, 이때 아까시나무와 소나무를 많이 심었어.김 : 그래서 우리나라 산에 아까시나무와 소나무가 많군요.이 : 그렇지. 일단 푸르게 입히자, 했어. 다른 나무는 민둥산에서 잘 못 버티니까.김 : 일단 입히자? 그다음이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요.이 : 그다음은 2단계지. 2단계는 1단계를 바탕으로 참나무라든가 한 차원 높은 나무를 많이 심었지. 해마다 봄 건기가 오면 발생하는 산불만 해도 그래. 참나무 숲이 많으면 대형 산불의 원인인 수관화(樹冠火)가 잘 안 일어나. 왜냐하면 잎이 겨울에 모두 떨어져서 아무리 강풍이 불어도 산불이 공중으로 날아다니지 않거든. 지표에서 일어난 불은 별로 겁이 안 나. 멀리 빨리 퍼지지도 않고, 참나무 잎은 잘 타지도 않아. 상록침엽수로 인한 수관화가 제일 겁나지.김 : 수관화가 뭔가요?이 : 나무 상체에 불이 번지는 걸 말하는데, 주로 소나무를 빽빽하게 심은 지역에서 발생하지. 소나무 가지에 얹혀 있는 마른 잎이나 솔방울 같은 것들이 불덩이가 되어 100미터, 200미터 날아가서 여기저기 퍼트리니 큰불이 되는 것이라. 그래서 소나무를 망국수(亡國樹)라고 해. 산이 헐벗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하지. 헐벗은 산에는 소나무가 잘 살고 그게 또 밀림이 되어 무성하면 대형 산불로 이어지고 헐벗게 되니 망국수라는 거야. 포항도 단계적으로 수종 갱신해야 할 소나무 숲이 많은데, 저대로 놔뒀다가는 나중에 혼쭐날걸.김 :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까?이 : 그렇긴 하지. 그래도 걱정되는 지역이 여러 곳 있어. 특히 도로가 있고 마을이 있는 곳이 그렇지.김 : 시 당국에 조언하지 않으셨습니까?이 : 참나무는 국내 임업 행정가들한테 잡목 취급을 당했지. 내 말을 귀담아들었으면 참나무 숲으로 많이 바뀌었을 텐데. 그러면 울진, 삼척의 대형 산불 같은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왜 참나무라 했는가 하면 ‘참’이라는 말은 영어로 ‘파인(Fine)’이지.김 : 파인(Fine). 예, 훌륭하다, 좋다는 말이죠.이 : 그렇지. 훌륭한 나무다, 이 말이야.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는 말은 비단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거든. 소나무 숲 갖고 어떻게 그게 돼? 소나무 숲은 그저 산 능선이나 척박한 토양 같은 데 띄엄띄엄 있어야 정상이지. 상록이 아닌 참나무에는 졸참, 갈참, 신갈, 떡갈, 상수리와 같은 다양한 품종이 있는데, 봄에 새잎이 돋을 때도 그 색이 특별히 아름다운 연둣빛을 띨 뿐만 아니라 가을 단풍 색상이 품격이 높아서 금수강산 소재로 핵심적이랄 수 있지. 게다가 산불도 잘 안 나고.김 : 원장님이 쓰신 다른 글에서도 읽었습니다.이 : 내가 칼럼으로 수차례 발표한 적이 있어. 그리고 산촌 노인들이 밭둑을 태우다가 산불 냈다고 감방에 잡아넣곤 하잖아? 애초에 대형 산불이 안 나도록 과학적, 생태적 조림으로 대비하면 될 거 아닌가. 예를 들면 은행나무 같은 것.김 : 은행나무요?이 : 산기슭 부분을 선발해 상수리, 떡깔나무나 은행나무로 수림대를 조성하는 거지. 은행나무 낙엽은 불이 잘 안 붙어. 겨울이나 봄에 잎을 주워 불을 붙여 봐. 잘 안 붙어.김 : 소나무 숲이 무성해서 산불이 잘 나는군요. 또 다른 단점이 있습니까?이 : 둘째는 소나무 숲이 무성하면 강물이며 바다 수질 상태가 나빠져. 계곡물을 위시해 강물 정수가 잘 안 돼 결국 바다 정수력이 떨어지고 말지.김 : 왜 안 좋아지나요?이 : 소나무는 침엽수인데 침엽수는 바늘처럼 가늘게 생겨서 퇴적층 만들어지는 속도가 참나무 숲에 비해 10분의 1도 안 되거든. 참나무 낙엽은 넙적넙적해서 빨리 쌓이는데 소나무 낙엽은 그러질 못해. 참나무 숲은 낙엽이 산골짜기 구석구석에 쌓여 눈이나 비가 오면 물을 잔뜩 흡수하는데, 그걸 다시 우려내듯 서서히 배설하지. 김 : 그러면서 정수를 하는군요.이 : 그렇지. 게다가 참나무 잎이며 도토리가 함유하고 있는 특별한 성분으로 정수해서 샛강을 거쳐 바다까지 내려보내는 거야. 졸참나무 같은 것은 단풍색도 고상하니 붉고 멋지지. 가을이 깊어질 때면 상옥에 있는 경상북도수목원부터 하옥의 옥계까지 펼쳐진 참나무 숲이 그야말로 장관이야.김 : 예, 꼭 가봐야겠습니다.이 : 떡갈나무는 단풍이 별로지만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이 말이지. 반세기 전만 해도 일본에는 찹쌀떡 장수들이….김 : “찹쌀떡”, 이러면서 말이지요?이 : 그 시절 우리나라에도 겨울철 늦은 밤이면 종을 딸랑딸랑하면서 찹쌀떡을 팔러 다니는 장수들이 있었는데. 그 찹쌀떡을 떡갈나무 잎으로 싸서 파는 거야. 상하지 말라고.김 : 그래서 떡갈나무군요.이 : 좋은 점이 또 있어. 참나무 종류는 구황식물로도 좋다고. 상수리나무를 봐.김 : 도토리 말씀이지요?이 : 참나무 종류의 열매를 도토리라고 해. 상수리나무는 들판을 내려다보고 열매를 단다고들 하지. 그해 흉년이 들 모양이다 싶으면 도토리가 많이 열리고, 풍년이겠다 싶으면 조금만 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야.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이삼우 원장은 참나무만 좋아한다, 소나무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시게. 그런 뜻은 아니니.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오해야.김 : 그렇지 않아도 여쭈려고 했습니다. 기청산식물원으로 들어오는 길에 청하중학교 앞 관송전(官松田)을 보며 참 좋다, 정말 잘 가꾸셨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소나무를 망국수라 하시니 조금 의아했습니다.이 : 소나무 하나로 밀림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소나무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김 : 솔숲이 학교를 두르고 있어서 청하중학교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겠습니다.이: 내가 청하중학교를 인수하고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꽃나무를 심으며 아름답게 조경한 것이지. 솔숲도 공들여 가꿨어. 솔숲이 있어서 교직원과 학생들 기상이 늘 푸르지. 수령 200년 이상 된 노거수림(老巨樹林)은 아무나 관리 못 해. 조경수로 소나무가 인기를 누릴 때는 이 소나무들을 팔라고 서울에서 의뢰가 들어왔지. 그때 돈으로 한 그루에 1천만 원씩 주겠다고 해. 요즘 돈으로 치면 5천만 원쯤 되겠는데, 서울로 가져가고 싶다고 하더군.김 : 서울로요?이 : 광화문광장에 심겠다고 하길래 안 된다고 했지. 내가 우리나라에서 노거수회를 가장 먼저 창립한 사람이고, 노거수와 마을 숲을 보호해야 한다고 운동을 펼친 사람인데 그럴 수는 없지.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8-03

“청하 소년, 임학(林學)을 품다”

몇 해 전 무궁화 꽃이 피는 한여름에 아이들과 찾은 식물원의 대숲 길을 막 지나온 뒤였다. 손으로 팔꿈치와 목덜미를 훑으며 모기를 쫓던 아이들을 한 노인이 불러 세웠다. “이건 명아주 잎인데 모기 물린 자리에 발라주면 금방 사그라진단다” 하며 작은 잎을 뭉개 아이들의 팔에 발라주었다. 그가 바로 기청산식물원 이삼우 원장이었다. 이후 우리는 우연히 꽤 자주 마주쳤고, 한동안 그에게서 꽃과 나무 이야기를 들었다. 인연이었을까. 다시 만난 이삼우 원장에게 남다른 그의 삶과, 우리나라와 포항의 식물 생태계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납매 향이 숲속 가득 낮게 깔리는 식물원 안 찻집 ‘꽃멀미’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김강(이하 김) : 농대에 진학해서 임학(林學)을 전공하셨습니다.이삼우(이하 이) : 모든 사람에게 DNA라는 것이 있지. 아마 DNA와도 연관이 있을 것 같네. 우리 집 업(業)이 농업, 그러니까 과수원을 했으니까.김 : 농업의 DNA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이 : 우리 선고(先考)께서는 요즘 같으면 대형 슈퍼마켓 비슷한, 그런 상회를 하셨거든. 그전에는 교편을 잡으셨고.김 : 부친 이야기로 올라가야겠군요.이 : 선고께서는 자수성가한 분이지. 상회를 운영하시다가 후에는 과수원을 운영하셨고. 그 시절에는 과수원 하면 부자였거든. 정미소, 과수원, 양조장을 운영하면 그 마을에서는 일급 부자에 속했어. 아무튼 선고께서 과수원을 운영하는데, 과수원에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지.김 : 손님이라 함은?이 : 까막까치도 오고 사과 서리하는 도둑이 많이 설쳤거든. 그러면 내가 원두막에 올라앉아 까치를 쫓고, 몽둥이 하나 들고 사과를 따 먹으러 들어온 청년들을 내쫓기도 했지. 그렇게 성장하다 보니 뭐랄까 농촌 DNA가 생긴 것 같아. 농촌이 늘 마음에 있는. 그렇다고 도시 생활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원생활이 좋아졌지.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지금의 대구가톨릭대학교 자리에 조그마한 사과밭을 가지고 있었어.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선생님이 농촌 이야기, 농업 얘기를 해주셨지.김 : 중학교 시절에 말이지요? 어떤 학생이셨습니까?이 : 중학교 졸업식 때 내가 우등생 대표로 상을 탔어. 특등 학생은 따로 있었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봉사활동도 성실히 했지. 3학년 때는 학급 반장도 했고. 담임선생님이 대구농업중학교 출신이었어. 농업 이야기를 종종 하셨지. 농업 DNA가 농업학교를 나온 담임선생을 만난 거라.김 : 그렇다면 중학교 3학년 때 진로를 결정하셨어요?이 : 그때 농대 가겠다고 작정했고, 임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지.김 : 일반적으로 중3, 고3 때 진로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않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이 : 고3 때 나는 주로 교실에 남아 자습을 했지. 경북고등학교 교실에서 앞산이 훤히 보였어. 민둥산이었어. 어느 날 창밖으로 물끄러미 산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리고 임학을 전공하겠다는 결심을 했어. 어떻게 하든 열심히 배워서 빨리 농촌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김 ; 빨리 돌아가 나무를 키워야 한다?이 : 그렇지. 봄방학 때 한번은 야산에 식목하러 나갔어. 사방조림(沙防造林)을 하는데, 그때는 집집마다 한 사람씩 부역으로 나갔어. 우리 집은 내가 자진해서 나갔는데, 현장에 가보니 대다수가 노인층이었어. 우리 마을 노인들 몫은 내가 대신 심어주곤 했지.김 : 임업을 전공했으니까 더 잘하셨겠습니다.이 : 나무 심는 일은 신바람이 나는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 다섯 배 가까이 더 심었지. 이 산을 내가 가꾸면 전부 내 거다, 이렇게 생각했거든.김 : 포항에서 진행된 조림 행사에 대해 좀 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이 :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토 녹화사업을 거국적으로 했어. 그런데 포항 일원은 이암(泥巖)층인 탓에 형편없는 민둥산이었지. 큰비만 내렸다 하면 산사태가 나고 흙탕물이 곳곳에 범람했어. 사방조림을 시작하고 10년도 지나지 않아 민둥산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사방 사업이란 국토의 녹화와 보전, 재해방지와 경관 회복을 위해 산지 사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고 생태계가 안정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1954년 포항 지역 해안 사방을 실시했고, 1955년 포항 사방 관리처가 설치되었다. 1973년 영일, 의창 사방 사업소로 개편, 1977년 영일지구 사방 사업이 완료되었다. 포항 지역은 식생이 어려운 이암 지대로 사막처럼 황폐화되어 있었으나 사방 사업 후 세계 사방사에서 ‘영일만의 기적’으로 평가될 만큼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는 사방 사업이 성공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근대적 사방 사업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 오도리에 사방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이삼우 김 : 나무를 키우면서 가장 먼저 이것을 심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이 있습니까?이 : 맨 먼저 낙우송과 은행나무 묘목을 생산했지. 은행나무는 식물도감에 1번으로 나오니까. 그리고 낙우송은 하체가 굵어.김 : 예, 저기 있는 킹트리(king tree)가 낙우송 아닙니까?이 : 그렇지. 원뿔형으로 아랫도리가 굵고 묵직하니 아주 믿음직해.김 : 대학교에 남아 학자의 길을 갈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이 : 그게 드라마지. 3, 4학년 때 변수가 생겼어. 내 꿈은 귀향해서 농부도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농촌 계몽도 하는 것이었거든. 그런데 그 길을 벗어날 뻔했지. 대학 시절에 정구부 주장을 했어. 책임감이 커서 정구장 관리도 도맡아 했지. 내 별명이 땜쟁이였어.김 : 코트 파인 곳을 땜질하는?이 : 그렇게 봉사하며 열정적으로 운동했는데 종종 게임을 같이 즐기던 교수 한 분이 임업 행정학 교수였어. 그분이 어느 날 우리나라 임업 행정을 한번 공부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 거야. 자기 연구실에 들어와서 석박사 학위도 따고 이 나라 민둥산을 제대로 바꿔야지, 하시면서 말이야.김 : 좋은 제안이었군요.이 : 팍 넘어갔지. 좋습니다, 하고 당장 결정했어. 그랬는데 그 교수님이 대학 본부에서 농촌교육학과 신설 특명을 받고 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된 거라.김 : 같이 가자고 안 하시던가요?이 : 아니. 내 방 잘 봐줘, 하고 가버린 거야. 지도교수 없는 연구실을 홀로 지키게 되었지만, 이 방 저 방 각종 연구실 들락거리며 여러 분야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어. 그게 운명이지. 돌이켜보면 인생은 무언가 미리 결정된 게 있구나 싶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임업 행정가로 서울 사람이 되었을 텐데. 고향에서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라, 하고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아.김 : 귀향하셨을 때 부친께서 별말씀 없으셨나요?이 : 선고께서는 자식들에게 인생의 진로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을 안 하셨어.김 : 원장님을 믿으셨군요. 당시 농업 상황이 어땠습니까?이 : 산업화로 우리나라의 근본 토대가 바뀌고 있을 때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이 깨지고 사공상농(士工商農)으로. 농(農)이 최하위로 밀려났어. 농촌 땅값도 참 쌌어.김 : 농지 말이지요?이 : 땅 팔고 도시로 떠나가는 이들이 많았기에 땅값이 날로 내려가는 판이었어.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 “형님, 저 대구로 이사 갑니다. 우리 밭 사주이소”라고 부탁하면 “얼마씩 쳐주면 되겠나”라고 했지. 상답(上畓) 값 쳐달라고 하면 흥정도 안 하고 땅문서 두고 가라고 했어. 계약서도 없이. 그런 식으로 농지를 모았어. 은행 융자를 받아서. 그런데 내가 농지를 그렇게 사 모으면서도 땅을 재물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김 : 농부니까, 농사짓는.이 : 그렇지, 농부니까.이삼우1941년 포항 청하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청하중학교에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농사를 시작했다. 1969년 기청산농원을 열었고, 이 농원을 모태로 1991년 기청산식물원을 설립했으며, 1991년 노거수회를 창립했다. 사단법인 한국식물원협회 회장(3,4대)과 ‘영일군사’ 편집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관송교육재단 이사장과 기청산식물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수필집 ‘나는 새요 나무요 구름이요’ 등이 있다.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2022-08-01

“바다와 시장을 무대로 살아온 인생, 후회는 없어”

1990년대 중반 죽도시장은 칠성천 복개와 아케이드 설치 등을 진행하며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시의원이던 최일만 선생은 자신과 수많은 상인의 삶의 터전인 죽도시장의 환경 개선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들었다. 그와 함께 향후 수산업계가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지, 또한 포항의 청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홍 : 시의원으로 일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나요?최 : 당시는 칠성천 복개가 시급한 사업이었어. 지금 공영주차장이 있는 자리지. 시의원에 당선되던 1995년부터 그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어. 또 죽도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것에도 주력했어. 그때는 시의원에게 월급이나 활동비를 주지 않았지. 내 몸과 정신을 성장시킨 죽도시장과 시장의 구성원인 상인들에게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다고 믿어주면 좋겠어.홍 : 그 당시 포항시의원 수는 몇 명이었죠?최 : 지금과 같은 33명이었지. 기초의회는 박정희 정권 때 지방자치제가 없어지면서 사라졌다가 1995년에 부활했어.홍 : 죽도시장 개선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최 : 그즈음 죽도시장과 죽도동의 구획정리는 큰 도로만 되어 있었을 뿐 골목은 옹색한 샛길에 불과했어. 인근 대부분이 갈대밭이라 상습 침수지역이기도 했고. 시의회에 들어가 보니 예산은 적고 주민들의 요구사항은 많더군. 죽도시장 사람들은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사업을 요구했고, 그런 요구에 부응해야 했지. 쉽지 않았어. 시의원은 두 번 한 뒤 스스로 그만뒀어.홍 : 시의원을 해보겠다고 결심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나요?최 : 죽도시장은 포항을 대표하는 시장인데 1990년대까지 시장은 물론, 인근의 주거환경이 정말 열악했어.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힘들게 살았지. 죽도시장과 죽도동 일대의 하수구 시설도 노후돼 해마다 장마철이면 물이 넘치곤 했어. 수리하려고 해도 도시계획에 묶여 문짝 하나 바꾸는 것도 어려웠어. 내가 70년 넘게 살아온 지역의 답답한 환경을 보면서 시의회에 들어가 이런 고충을 이야기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출마를 결심했지.홍 : 평생 장사와 사업을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생각한 것이군요.최 : 사실 나는 좀 덜렁거리는 성격이야. 그런데도 1990년쯤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지. 운이 좋았어. 자식들도 큰 문제 없이 잘 성장했고. 그때가 되니 죽도시장의 영세 상인들과 지저분한 골목이 눈에 띄더군. 시의원이 되면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건의하고 추진했어. 당시 시의원들은 자기 돈을 써가며 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 가슴 뿌듯했던 시절이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지.홍 : 시의원 할 때 포항수산 대표를 겸직한 겁니까?최 : 그렇지 않아. 시의원을 할 때는 전무에게 사장직을 넘기고 나는 회장으로 물러앉았어.홍 : 재선에 성공했지요. 3선엔 왜 도전하지 않았나요?최 : 그때 회갑을 넘긴 나이였어. 목적한 일을 어느 정도 이루었고, 과한 욕심은 사람을 추하게 만들지.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홍 : 죽도시장에서 인생을 다 보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뭡니까?최 : 칠성천이 복개되었던 순간에 행복감을 느꼈어. 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할 때는 노점상 할머니들이 걱정되더군. 죽도시장 골목과 주변 도로에는 적지 않은 70~80대 노인들이 좌판을 펼치고 장사를 하고 있었거든. 아케이드가 생기기 전부터 그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분들을 아케이드를 만든다고 내쫓으면 어떻게 하겠나? 낮에는 정해진 구역에서 물건을 팔고, 저녁에는 좌판을 한쪽으로 치워 청소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약속을 하고 계속 장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지. 그게 고마워서인지 아직도 시장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노점 할머니들이 있어.홍 : 수산업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최 : 포항의 수산업은 1980년대까지는 좋았어. 지금 같은 어려움이 닥친 건 수자원 남획이 그 이유야. 역설적이게도 어법(漁法)이 발달하면서 수산자원이 고갈되고 수산업이 위기를 맞게 되었지. 포항 인근 바다를 오가는 회류성 어종이 크게 줄어들었어. 산란기 조업 금지를 철저하게 지키고, 치어는 잡지 말아야 해. 현대화된 어구로 큰 생선, 작은 생선을 다 잡아들인다면 언젠가는 수산물의 씨가 마를 거야. 오징어와 대게 등을 잡을 수 없는 금어기(禁漁期)를 철저히 지키도록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이런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지. 홍: 키워서 먹는 양식업이 대안이 될 수 있겠습니까?최: 포항 일대에서 물고기 양식을 시작한 게 30년 정도 되었어. 초기에는 광어 양식을 많이 했지. 그런데 구룡포, 감포, 영덕 지역은 물고기 양식에 적합한 수온이 아닌지, 기술 부족 탓인지 잘되지 않았어. 앞으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국영기업 형태로 양식장을 운영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오염 등의 바다 환경 변화로 양식하던 물고기가 집단폐사한다면 개인의 경제력으로는 버텨낼 재간이 없거든. 수산물은 후손들의 귀한 미래 식량이야. 그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국가가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나.홍 :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최 : 1980년대 초에 포항에서 피조개를 양식해보려고 하다가 실패했어. 당시 사업 파트너의 권유로 경상남도 진동에서 피조개 종패(種貝)를 4톤 트럭 10대에 싣고 와 바닷가 뻘밭에 뿌렸는데, 3개월 후에 다 죽고 말았지. 나의 참담한 양식업 실패담이야.홍 : 죽도시장에서 살아온 긴 세월을 돌아보신다면.최 : 한창 공부할 시기에 아버지를 도와 장사를 시작하며 온갖 일을 겪었고, 어느새 여든 살을 훌쩍 넘겼어. 지금도 나는 바다와 시장 일밖에 몰라. 모두들 사는 게 그렇겠지만 살다 보면 좌측통행도 하고 우측통행도 하지. 사업하다가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고, 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사들과 충돌하기도 했어. 짧지 않은 인생이었으니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 나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겠지만 개의치 않으려 해. 홍 : 앞으로 수산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해결되어야 할까요?최 : 바다에서 미래를 찾으려는 청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어업 관련 교육기관을 만들고, 그 기관을 수료하는 젊은이들에게 저금리 대출 등 지원책이 있어야 하지.홍 : 포항의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최 : 크게 성공한 삶도 아니고 모범이 되는 인생도 아니었으니 청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지. 하지만 아버지에 이어 평생 바다와 시장을 접하며 살아온 인생에 후회는 없어. 오랜 시간을 바쳐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을 달인이나 명인이라고 부르잖아. 포항에 그런 젊은이가 많았으면 좋겠어. 한 가지만 더 부탁하자면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해.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7-27

일본 시모노세키로 복어 등 생선 수출

1960년대 후반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죽도시장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포항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났고, 도시 곳곳이 현대화의 과정을 겪는다. 도매시장의 역할을 담당했던 죽도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이전에는 어민들이 잡은 수산물을 서울로 보내기도 어려웠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수출까지 모색하게 된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던 당시 죽도시장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를 포함한 동업자들이 배 4~5척을 구해 일본 시모노세키(下95A2)로 생선을 보냈지. 포항 인근에서 많이 잡히는 방어와 삼치가 주종이었고, 고급 어종인 복어도 인기였어. 저녁 7~8시에 배가 포항을 출발하면 열 시간 정도 항해해 새벽 4~5시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지. 그러면 하역 작업을 해서 입찰 등의 과정을 거치게 돼.홍 : 포항제철 건설과 함께 죽도시장도 큰 변화를 겪게 되지요?최 : 일거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오니 도시와 더불어 시장도 활성화되었지. 죽도시장은 소매도 하지만 도매시장의 역할을 했어. 생선뿐만 아니라 포항 인근에서 생산된 쌀 등의 곡물이 죽도시장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팔려나갔지. 울릉도로도 많이 판매되었고. 왜냐하면 울릉도는 쌀 생산이 안 되니까. 예전엔 수산물을 서울까지 가서 판매한다는 건 엄두를 못 내고, 대구가 근처에서 가장 큰 도시라서 생선 등을 실어다 대구에서 팔곤 했어.홍 : 서울로 생선을 보내는 방법은 따로 있었던 겁니까?최 :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의 경우 소량의 고급 어종을 기차에 실어 보냈어. 판매자가 포항역에 연락하면 화물 담당자들이 물건에 꼬리표를 달아 묶어 보내고, 서울역 화물 담당 직원이 물건을 받았지. 그때 서울역 바로 옆에 도매시장이 있었어. 조금 멀리는 가락동으로도 화물이 갔지. 나도 그 장사를 오래 했어. 서울에 내 물건을 위탁판매 해주던 상인도 있었지. 그로부터 한참 후에 일본으로 수출 길이 열렸어.홍 : 일본으로 생선 수출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최 : 1970년대 초반으로 기억해. 선주들이 지분을 모아 수출업을 해보자는 제의가 있었어. 나를 포함한 동업자들이 배 4~5척을 구해 일본 시모노세키(下95A2)로 생선을 보냈지. 포항 인근에서 많이 잡히는 방어와 삼치가 주종이었고, 고급 어종인 복어도 인기였어. 저녁 7~8시에 배가 포항을 출발하면 열 시간 정도 항해해 새벽 4~5시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지. 그러면 하역 작업을 해서 입찰 등의 과정을 거치게 돼.홍 : 일본을 상대로 사업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최 : ‘마구로(まぐろ)’라고 불리던 생선을 많이 수출했는데, 얼음을 넣어 선어(鮮魚)로 보냈지. 일본에서는 그걸 회로도 먹고 통조림으로도 만든다고 들었어. 일본 사람들이 선호하는 생선은 복어와 방어, 삼치 등이었어. 방어는 6킬로그램짜리부터 10~15킬로그램짜리가 있는데, 일본에서는 12킬로그램짜리를 선호했지. 12~13킬로그램짜리 방어가 가장 높은 가격을 받았어. 생선 수출은 1970년대 초반에 시작해 15년가량 했지. 그 일을 그만둔 건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이야. 어획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홍 : 일본 수출로 수입은 어땠습니까?최 : 장사를 해보면 많이 벌 때도 있고 밑질 때도 있지. 그때도 마찬가지였어.(웃음)홍 : 일본 사람들은 어족자원 보호에 관심이 각별하다고 하던데요.최 : 과거에도 철저했지.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가 포항에서 경찰의 단속에 적발된 적이 있었는데, 어린 청어를 잡았기 때문이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인들은 산란기에 고기 잡는 걸 엄격하게 금했다고 해. 그런 원칙을 지켜야 특정 생선이 멸종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겠나? 일본 사람들이 만든 정책과 법이라도 이런 건 배워야 한다고 봐. 홍 : 수산업 관련 일을 오래 하셨습니다. 그중 독특한 게 있다면 뭡니까?최 : 어간유(魚肝油) 제조업을 했어. 어간유란 명태, 대구, 상어 따위의 간장에서 뽑아낸 지방유를 말하는데 비타민A와 비타민D가 많이 들어 있지. 그때 흰살 생선은 간이 있고 살이 붉은 등 푸른 생선은 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말하자면 상어, 명태, 조기, 아귀 등은 간이 있지만 청어, 삼치, 정어리는 간이 없지.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초반에 10년 정도 어간유를 만들었는데, 당시로서는 희귀한 사업이었어. 지금은 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어간유를 만들 때 악취가 나고, 어간유를 만들고 남은 폐기물을 바다에 버려 해양환경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라진 것 같아. 어간유 외에도 생선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일을 했어. 일제강점기엔 그것들을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해. 오징어, 명태, 가오리에서도 많은 양의 기름이 나와. 그 기름으로 고구마나 감자를 튀겨 먹기도 했지.홍 : 환경 변화로 어획량이 줄어든 수산자원도 많지요?최 : 일본 사람들은 아귀 간을 무척 좋아했어. 나한테 아귀의 간만 잘라서 용기에 담아주면 좋겠다고 부탁한 일본 사람도 있었어. 지금은 귀한 해산물이 된 성게가 송도해수욕장 주변에서 다량으로 잡히던 때도 있었고. 높은 파도가 치면 성게 수백 마리가 까맣게 밀려오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 지금은 수온 변화와 해양 오염으로 그런 풍경은 옛이야기가 됐어. 심각한 문제인 만큼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홍 : 포항에서 한때 고래가 많이 잡혔지요?최 : 맞아. 포항에도 포경선이 있었지. 우리나라에 포경조합은 울산에 하나밖에 없었어. 그런 이유로 대다수의 포경선은 울산에 정박했지. 하지만 고래를 잡으러 항구를 드나드는 배를 포항과 구룡포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어. 내가 어릴 때는 포항에 포경선이 두세 척 있었고, 학산 앞바다에서는 고래 잡는 작살을 누가 잘 쏘느냐 겨루는 대회도 열렸다고 들었어. 1970년대 일본을 상대로 생선을 수출할 때는 고래고기도 한 품목이었지.홍 : 일본으로 수출할 때는 해체해서 운송한 겁니까?최 : 그렇지. 배에 싣기 전에 전부 해체했어. 고래가 워낙 크니까 통째로 운송하기가 어려웠거든. 해체하는 전문 기술자가 따로 없어서 어떤 때는 내가 고래를 부위별로 해체하기도 했어. 그 시절 가장 많이 잡혔던 건 밍크고래야. 밍크고래보다 더 큰 고래는 음력 8~9월 즈음에 잡혔지. 고래도 토속 어종이 아닌 회류성 어종이야. 고래를 잡으려면 울릉도와 독도 사이까지 배를 타고 가야 했어. 우리가 탄 배보다 더 큰 고래도 몇 번 봤다면 믿겠나?홍 : 요즘 고래고기는 비쌉니다. 그때도 그랬나요?최 : 1970년대엔 저렴했지. 밍크고래를 잡으면 학산천 밑 수협 마당에 올려놓고 해체했어. 고래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쌌던 시절이야. 선박 사정으로 수출이 어려울 때는 국내에서 소비해야 하니까 싼 가격에 팔렸어.홍 : 고래는 버릴 게 없다고 하던데 무슨 뜻입니까?최 : 고래 껍데기, 꼬리, 뱃살, 내장, 잇몸, 뼈에 붙은 살 등을 골고루 삶아서 한 묶음으로 만드는데, 이런 걸 수십 개 쌓아놓으면 소매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이 작업장으로 받으러 왔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포항 풍경이야. 땔나무가 비싸서 고래 뼈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지. 고래기름은 비누로도 만들어 썼고. 죽도시장에 고래고기가 담긴 바구니를 늘어놓고 돼지고기처럼 한 근, 두 근 팔던 때가 있었어.홍 : 고래를 잡을 수 없게 된 건 언제부터죠?최 : 1986년부터 전 세계에서 상업적 포경이 금지되지 않았나. 그전까지는 포항에서 고래가 적지 않게 잡혔어. 포획된 고래 중 큰 것은 62~63자, 그러니까 18미터가 넘었지. 그때도 그런 고래는 가격이 상당하니까 몇 자, 몇 치까지 치수를 쟀어. 포경선 선장들이 수첩에 고래를 포획한 날짜와 시간, 고래의 길이와 무게를 정확하게 기록했지.홍 : 포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본 적도 있습니까?최 : 생선을 싣고 두어 번 갔었지. 여권 대신 선원수첩을 챙겨 갔어. 시모노세키의 검역소 앞에 배를 대면 세관원이 올라와 여러 가지를 조사했지. 생선을 선적해 일본을 오가는 주식회사 효창수산이라는 곳에서 전무로 일하던 시절이야. 가끔은 일본 업체에서 우리 물건을 위탁판매했어. 포항에 비슷한 사업을 하는 회사가 세 곳 있었는데, 효창수산이 가장 컸어.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7-20

구획정리로 2층 건물 여러 채 들어서

변변한 건물 하나 없이 뻘밭과 시금치밭 주위로 하천이 흐르던 죽도시장의 1940~1950년대 풍경. 6·25전쟁 직후에는 적지 않은 피난민이 몰려와 시장에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다. 냉장 시설과 운송수단이 없어 어렵게 잡은 생선이 썩어가는 걸 지켜보기만 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문제의 해결책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 반세기 전 죽도시장의 상인과 포항 어민들은 어떤 방식으로 답답한 그들의 상황을 헤쳐 나갔을까? 홍 : 처음 죽도시장에 들어갔을 때의 풍경이 기억나십니까?최 : 물론이지. 주변은 온통 뻘밭, 시금치밭, 갈대가 자라는 하천이었어. 시장 인근에 배를 올리는 도크가 있었지. 송도다리 근처부터 죽도시장 앞까지 조선소가 늘어서 있었고, 그 옆 뻘밭에서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했어. 친구 아버지가 작은 염전을 운영했는데, 소금을 햇볕에 널어 말리고 밑에 볏짚을 깔아 제염(製鹽)을 했지. 돌아보면 아득한 추억이야.홍 : 그게 6·25전쟁 이전이군요.최 : 그렇지. 길가에 작은 좌판을 펴놓고 아버지가 학산에서 생선을 사다 주면 그걸 팔았어. 그 돈으로 형님은 초급대학을 졸업했지. 나는 둘째 아들이야.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돕길 원했어. 밑으로 동생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일하고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온 식구가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야 했던 시절이지.홍 : 6·25전쟁 때도 죽도시장은 운영되었습니까?최 : 온전히는 아니지만 상인들은 장사를 이어갔지. 조선시대에는 포항에 시장이 없었어. 연일과 오천, 흥해에 큰 시장이 있었지. 포항 시민들은 거기서 장을 봤다고 해.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중앙국민학교 옆에 일본인들이 이용하던 작은 시장이 만들어졌지. 그때 죽도시장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1930년대 들어서면서 아주 미약한 형태의 죽도시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들었어. 멀리 보면 죽도시장의 역사가 거의 100년에 이르지.홍 : 전쟁 때 포항에도 피난민들이 왔었는지요?최 : 과거 남빈사거리에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도개교(跳開橋)가 있었고, 칠성천을 따라 포항역 앞까지 배가 오갔어. 그 아래는 뻘밭과 갈대밭이었고. 칠성천에서 시작해 동빈부두까지 모조리 그랬지. 6·25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그곳에 연탄재가 상당히 오랜 기간 매립되었어. 그런 과정을 거치며 죽도시장이 조금씩 커졌지. 전쟁 때 북에서 피난민들이 많이 내려왔어. 그들은 큰 밑천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장사를 했지. 그때는 뻘밭에 좌판을 깔고 앉으면 바로 자기 자리가 되었어. 아이들과 늙은 부모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사에 나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죽도시장에 적지 않았어.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5일부터 8월 20일까지 포항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른바 ‘포항 전투’다. 이는 부산 교두보 전투의 일부이자 당시 벌어진 큰 규모의 교전 중 하나였다. 포항 전투는 3개 북한 사단이 동해안으로 침투하려는 공세를 유엔군이 저지함으로써 유엔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후 고향을 떠나 피신해 있던 포항 시민들은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시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졌다.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포항을 바꾸려는 노력은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계속됐다.홍 : 독립적인 사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까?최 : 어려운 시절이니 젊은이들이 뭘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었어. 그저 먹고살기에 바빴지. 아버지가 고기를 사오면 그걸 건조해서 팔고, 가게 뒷바라지를 거의 7~8년 동안 했어. 그러면서 스무 살을 훌쩍 넘겼지. 1961년에 개정된 법이 ‘1도시 1시장제’였는데, 포항시가 농협(농산물 도매시장), 수협(수산물 도매시장), 채소와 과일을 파는 시장의 허가를 내줬어.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수산물 도매시장 업무 대행을 법인을 설립한 포항수산이 맡았지. 법인 설립에는 생선을 판매하던 사람들, 과일과 채소를 팔던 사람들이 더불어 참여했어.홍 : 시장에서의 청년 시절은 어땠나요?최 : 다른 바닷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포항 역시 운송수단이 부족했어. 낡은 미제 트럭을 빌려 생선을 싣고 와 죽도시장에서 팔았지.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쟁이 이어지면서 시장에는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못했어. 어수선했던 시절이야. 땔나무를 하거나 고기를 잡아도 옮길 방법이 없어 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믿겠나? 나의 20대는 그렇게 우여곡절 속에서 흘러갔지.홍 : 죽도시장의 변화가 시작된 건 언제쯤인지 기억하십니까?최 :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었지. 그전까지는 뻘밭 위에 점포와 좌판을 벌여놓으니 질서도 없고 정확한 경계도 없었어. 그런 곳들을 구획정리해 7평 규모의 2층 건물을 여러 채 지었어. 형편이 좋았던 사람들은 자기 집 외에도 옆집을 사서 소유 토지를 넓히기도 했고. 당시는 아파트가 없던 시절이야. 가게 앞에 물건을 놓고 장사하다가 밤이 되면 살림집으로 개조한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잤어.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웬만한 집은 대부분 방 한두 칸이 전부였지. 공동화장실에선 아침마다 전쟁이 벌어졌어. 대소변을 보려고 길게 줄을 섰고, 소액이지만 돈을 지불한 후에야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어. 상수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때라 구획정리사업 기간 전후로 길가마다 수돗물을 받으려고 물통이 줄지어 서 있었지.홍 : 죽도시장에서 거래되는 생선의 종류는 어떻게 변해왔죠?최 : 과거 포항 바다에서는 고등어, 꽁치, 오징어가 주로 잡혔고, 구룡포에서는 상어도 많이 잡혔어. 거래되는 품목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게 없어. 포항 특산물로 불리는 과메기는 일제강점기 때도 먹었지. 광복 무렵에는 청어 과메기가 많이 만들어졌어. 꽁치 과메기도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니 역사가 반세기를 넘겼지. 흥미로운 건 과메기는 엄청나게 많이 잡히는 청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해 만들었다는 사실이야. 냉장 시설도 운송수단도 턱없이 부족하던 때였으니 그랬지. 서울을 포함한 다른 지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반으로 쪼개 말린 과메기를 택배로 보내게 된 건 20년이 채 안 돼. 홍 : 죽도시장 이야기를 하면서 대게를 빼놓을 수 없지요.최 : 1940~1950년대엔 월포리 앞에서도 대게를 잡았지. 어부들이 대게를 잡아 밤새 삶아서 새벽에 죽도시장 아버지 가게로 가져오면 소매상인들이 그걸 받으러 오곤 했어. 그때는 킹크랩도 곧잘 잡혔는데 가격은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어. 대게가 그렇게 많이 잡히던 때가 아니라서 소비도 잘 안 됐고. 다들 일하느라 바빠서 대게를 삶거나 쪄서 먹을 시간도, 삶의 여유도 없었지.홍 : 그렇다면 언제부터 대게가 유명세를 타게 된 겁니까?최 : 동해의 대게와 홍게가 유명해진 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야. 킹크랩은 이제 거의 전량을 러시아에서 수입하지. 내가 어릴 땐 포항 바다에서 잡힌 대게는 물론, 아이만한 커다란 킹크랩을 먹어보기도 했어. 그리고 거제도나 가덕도만큼은 아니지만 한동안 후포에서 대구가 많이 잡혔어. 포항역 앞에서 트럭에 그걸 싣고 부산, 마산, 진주로 팔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 내가 20대 중반이던 때야. 그때 먹어본 진주의 기막힌 대구뽈찜 맛이 아직 기억나는군.홍 : 오랫동안 몸담은 포항수산의 설립 과정을 설명해주시죠.최 : 포항수산은 내가 30대 때 합자회사로 설립되었어. 설립자는 정영달 씨야. 나는 회사가 만들어지고 1년 후에 지분을 일부 사서 참여했어. 포항수협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고, 포항수산은 당시 갓 만들어졌으니 두 곳의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 포항수협과 포항수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은 꽤 오랜 기간 이어졌어. 그렇지만 발전은 갈등 속에서 오는 것 아닌가? 독점은 횡포를 낳지만, 경쟁은 발전의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해. 그 과정에서 어획 방법이 진일보했고, 국내를 넘어 수산물의 해외 수출 길도 열렸지.홍 : 포항수산에서 맡았던 직책은 뭡니까?최 : 마지막에 대표까지 했어. 정영달 씨가 손을 뗀 후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인수했고, 조세창 씨가 대표를 맡았을 때 내가 전무를 맡았지. 조 대표는 오래 재직하지 못했어. 나는 포항수산 대표로 10년 넘게,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일했어.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7-18

“광복 전부터 갈대밭에 형성된 죽도시장”

전통시장은 서민들의 꿈과 희망이 땀과 눈물을 매개로 영그는 공간이다. 포항 죽도시장 역시 다를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조그만 좌판 몇 개가 뻘밭에 들어서며 시작된 죽도시장의 역사는 포항 근현대사와 궤적을 함께한다. 포항수산 대표와 죽도시장번영회장을 지낸 최일만 선생은 바로 그 죽도시장에서 반세기 넘게 삶을 의탁했다. 그의 삶은 죽도시장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최일만 선생의 일생을 되짚어보는 건 죽도시장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행위와 동일한 의미일 터. 바로 이것이 그를 만나 오랜 시간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던 이유다. 홍성식(이하 홍) :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좀 해주시죠.최일만(이하 최) : 1936년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 120번지에서 태어났어. 당시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후릿배가 적지 않았지. 그물을 배 두 척에 싣고 바다로 나가 펴면 육지에서 배로 연결된 줄을 사람들이 당기는 방식의 어업이야. 선친이 그걸 운영하고 관리했어. 멸치와 조그만 물고기들이 잡혔고, 그걸 주변 숲에서 말리는 걸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지.홍 : 1945년 광복 무렵의 기억은 있습니까?최 : 내가 열 살 때 해방되었어. 일제강점기 10년을 살았는데, 다행인지 우리 동네엔 한국 사람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던 일본인은 없었어. 장흥초등학교(현 대송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 가기 전에는 동네에서 좀 멀리 떨어진 서당에서 천자문을 공부했지. 지금으로 치면 유치원에 해당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훈장님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던 시절이야.홍: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최: 당시 아이들은 대통령이나 장군 같은 거창한 장래 희망을 가지지 못했어. 바다가 가까우니 배를 타고 먼 나라에 가보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지. 다들 먹고살기에 바빠 구체적인 희망을 가지기 힘들었어. 나도 열 살 무렵부터 집안일을 도왔어. 밭에 비료를 뿌리고, 볏단을 지고 날랐지. 그래야 겨우겨우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어. 그즈음에 부친이 후릿배 일을 그만뒀어. 청어를 많이 잡던 시절인데,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버지 배에서 일하던 선원 세 명이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고 하더군. 아버지가 선주로서 책임을 져야 했지. 그 사고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 힘들어졌던 기억이 생생해. 그래서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아버지 일을 많이 도와야 했어.홍 : 1948년에 고향에서 죽도시장 인근으로 이사한 겁니까?최 :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 배의 선원 두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또 발생했어. 아버지가 사건을 마무리한 후 대송면을 떠나 죽도시장 근처 포항 시내로 이사했지. 죽도동 3번지였던 것으로 기억해.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선친께서 어구(그물, 노 등) 파는 일을 시작했지. 그때는 포항 전체를 통틀어도 엔진 없이 노나 돛으로 움직이는 배가 대부분이었어.홍 : 죽도시장의 태동을 곁에서 지켜봤겠군요.최 : 죽도시장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48년 즈음이었어. 광복 전에도 작은 규모지만 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 주위가 사람들이 다니기 힘든 갈대밭이다 보니 규모는 작을 수밖에 없었지. 1948년쯤에는 어시장으로 배가 오갔어. 사람들이 건너다닐 다리가 없었던 탓이야. 시장 반대편 동네로 건너다닐 때는 줄로 연결된 바지선을 이용했지. 1950년대 초반까지 그랬어.죽도시장은 포항시 북구에 자리한 전통시장으로 부지 면적은 14만8천760㎡이고, 점포 수가 1천200여 개에 달한다. 죽도시장 역사의 출발점이 언제인지는 몇 가지 이견이 있다. 하지만 1950년대 포항 내항의 늪지대에 노점상이 모여들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되었고, 1969년 10월 죽도시장번영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과거 죽도시장은 경북 동해안과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이 모여드는 장소인 동시에 유통의 요충지였고, 지금도 그 명성이 유지되고 있다홍 : 죽도시장에 정착한 1948년에는 어떤 생선이 주로 잡혔나요?최 : 청어가 많이 잡혔고 대구도 흔했지. 냉동고와 저장시설이 없어 고기를 많이 잡아도 보관이 어려웠어. 어획된 대부분의 생선은 명태처럼 덕장을 만들어 건조해서 먹었지. 아깝게도 잡은 생선이 썩어서 버리는 경우도 흔했어. 유통망이 거의 구축되지 않은 데다 소금도 비싸서 보관과 판매가 힘들었지.홍 : 당시 죽도시장의 풍경을 떠올려 보신다면.최 : 처음 죽도시장에 들어와 작은 창고 안에 방을 만들었어. 당시에는 땔나무가 귀했지. 영일, 기계, 흥해는 산과 들에 풀이나 나무가 많아서 땔감을 구하기가 쉬웠는데, 포항 시내와 죽도시장엔 땔나무를 구할 곳이 없었어. 그래서 외할머니가 1년에 한 번씩 참나무 숯 수백 포대를 사서 창고에 보관했지. 그 숯으로 풍로를 이용해 식구들이 밥을 지어 먹었어. 남빈동에 가면 연일 쪽에서 마른 솔잎과 장작을 팔러온 나무꾼 40~50명을 볼 수 있었지. 많이 사면 나무꾼이 지게에 지고 집으로 배달해주고, 적은 양을 구입하는 사람은 땔감을 직접 들고 가야 했어.홍 : 전쟁에 대한 기억도 있을 텐데요.최 : 6·25전쟁이 터졌을 때 외할머니가 창고에 보관하던 숯이 모조리 타버렸어. 그뿐만 아니라 폭격으로 죽도시장 대부분이 불에 탔어. 전쟁 때 죽도시장은 지금의 3분의 1 규모였는데 좌판과 점포가 주로 칠성천(七星川) 주변에 모여 있었지. 송정동으로 피난을 갔다가 포항에서 인민군이 물러간 후 외할머니 댁으로 갔어. 그때 훨훨 타고 있는 숯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 포항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군인들의 부탁으로 소에게 먹일 꼴을 베어오던 생각도 나는군.홍 : 친척이나 친구가 전쟁통에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최 :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어. 나는 포항에 폭탄이 떨어질 땐 피난을 가 있어 인민군을 보지 못했어. 다만 친구들과 나무하러 갔다가 길가에서 군인 시체를 본 적은 있지. 그게 국군이었는지, 인민군이었는지는 모르겠어. 아이 때였으니 철모르고 수류탄과 탄피를 주우러 다니기도 했지.홍 : 바닷가 소년이니 수영은 잘했겠습니다.최 : 물에 빠지면 살아남을 정도는 했지(웃음). 형산강은 폭이 넓어. 강 사이에 섬이 있었으니까. 친구들과 헤엄쳐 섬 갈대밭에 가서 갈대를 꺾기도 했지. 그 갈대밭은 사라호 태풍 때 섬이 사라지면서 함께 없어졌어.홍 : 죽도시장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언제 시작한 것인지요?최 : 한국전쟁 직후인 열대여섯 살 때야. 그때 아버지가 어구 장사를 했어. 고향 사람들이 아버지 물건을 사주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운영할 수 있었지. 선친과 내가 일생 경험한 것은 바다와 관련된 일뿐이었어. 당시 죽도시장엔 고등어와 청어 등을 파는 좌판 형태의 가게가 10여 곳 있었어. 냉장 트럭이 없던 시절이라 운송이 어려웠지. 그나마 생선을 자전거에 실어 나르는 것이 현대화된 형태였을 정도였어. 구룡포까지 가서 꽁치와 고등어를 실어오는 것도 큰일이었지. 그걸 좌판에서 손님들에게 팔았어. 그때를 죽도시장 형성기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아. 노인들은 힘에 부치니까 주로 젊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몇 시간씩 걸려 구룡포를 오가며 생선을 실어 날랐지. 당시 포항수협은 학산천 옆 하구에 있었어.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냉동공장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 바다에선 정어리가 엄청나게 잡혔고, 조금 지나서는 청어가 많이 잡혔어.홍 : 70년 전에도 포항에서 청어가 많이 잡힌 모양입니다.최 : 정치망으로 다양한 종류의 고기를 잡았지. 영일만에 포항제철이 들어서기 전에는 어장이 넓었어. 우럭, 장어 같은 토종 어종은 별로 없었고, 계절 따라 움직이는 회류성 어종이 대부분이었어. 소달구지조차 귀한 시절이라 대도동 쪽 바다에서 잡힌 고기는 조그만 배에 실어 날랐지. 당시 포항의 인구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어. 팔지 못한 생선은 잘 덮어뒀다가 다음 날 팔곤 했지. 얼음을 구할 수 없어 생선 보관도 어렵던 시절이었거든. 지금 사람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해양과학용어사전’에 따르면 정치망(定置網)이란 자루 모양의 그물에 테와 깔때기 장치를 한 어구를 어도에 부설해 대상 생물이 들어가기는 쉬우나 되돌아 나오기 어렵도록 만든 어구를 지칭한다. 잠망(蠶網), 장망(張網) 함정어법을 쓰는 어구를 말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유도 함정어법을 쓰는 것만을 뜻한다. 어구를 일정한 장소에 일정 기간 부설해두고 어획하는 어구 어법이며, 단번에 대량 어획하는 데 쓰인다. 대략 수심 50m 이하 연안의 얕은 곳에서만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홍 : 죽도시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최 : 10대 중반에 시장 사람이 되었지. 아버지를 따라 시장에 들어갔는데 무슨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 생계가 어려우니까 궁여지책으로 죽도시장에 자리를 잡았지. 그때 남빈동 사거리 쪽은 집이 몇 채 없었고, 시장 규모도 지금의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최일만1936년 경북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선주이자 수산업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1945년 광복 이후 죽도시장에 들어가 그곳에서 잔뼈가 굵었다. 좌판 생선 판매부터 시작해 해산물 운송, 위탁판매, 양식업, 수출업 등 다양한 수산 관련 일을 하며 죽도시장의 변화를 지켜봤다. 포항수산 대표와 사단법인 죽도시장번영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1995년 포항시의원에 당선되었고, 다음 선거에서 재선했다. 2005년 죽도시장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산업자원부장관 표창을 받았다.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7-13

“어딜 가도 당당한 포항미술협회”

포항은 도시 규모에 비해 미술협회 출범이 늦은 편이다. 협회를 구성하기 위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 20여 명의 인원으로 한국미술협회 포항 지부가 설립되었고, 현재는 25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며 지역 미술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척박한 땅에서 미술의 싹을 틔우고 경북 최대의 미술 단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들어본다. 배 : 포항미술협회가 출범하기 전에 활동하던 미술 단체가 있었습니까?김 : 포항일요화가회는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 동호회일 거야. 지역에서 미술인이 드물던 1970년대에 활동했지. 내가 포항에 오기 전부터 활동하고 있더라고. 나더러 그림 지도를 해달라기에 흔쾌히 함께했어. 회원들이 꽤 많았는데 포항사진협회를 만든 박원식 사진가도 회원으로 활동했어. 유채화를 주로 그렸던 기억이 나.배 : 포항일요화가회는 어떤 활동을 했나요?김 : 일주일에 한 번씩 야외 스케치를 나갔는데 인근에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많이 다녔어. 일요화가회전은 전시가 귀했던 시절에 시민들에게 그림을 접할 기회를 제공했지. 박수철 선생처럼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화가도 있었고. 포항에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활동한 최초의 미술 단체로 보면 돼. 포항일요화가회는 포항 최초의 미술 동호인 단체다. 197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다가 1979년 창립식을 가졌다. 김두호가 지도교사로 활동했으며 박수철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미술인뿐 아니라 포항제철 직원, 관공서 기관장 등 다양한 분야의 회원들이 참여해 미술 문화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배 : 포항미술협회가 조직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김 : 협회를 조직하려면 5개 분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만한 인원이 없었지. 서양화, 한국화, 서예 분과의 몇몇이 다였어.배 : 미술협회의 필요성이 대두된 계기는 무엇입니까?김 : 당시 경북의 지방자치단체마다 미술협회가 하나씩 생겨나는데 가장 큰 도시인 포항에만 없는 거야. 포항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미술협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배 : 당시 경주 미술계는 어떤 분위기였나요?김 : 경주에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원로 작가들이 있어서 포항보다 훨씬 앞섰어. 포항은 그림 분야가 빈약했기 때문에 경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지.배 : 1987년 포항미술협회가 출범했습니다.김 : 조희수 선생이 초대 지부장을 맡았어. 지금 아흔이 넘었을 거야. 경주에 계시는데 그림에만 전념하다 보니 생활이 어려웠어. 1980년대 초반에 선생님 자녀가 포항 환여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는 바람에 조희수 선생도 포항에 정착했지. 그때 우리와 교류가 많았어.배 : 포항미협 창립 당시 인원은 몇 명입니까?김 : 서양화, 한국화, 서예, 도자기, 디자인 5개 분과가 있었고, 각 분과에 5명 정도 되었을 거야. 그렇게 인원을 확보했고 그 후로 차츰 인원이 늘어나서 여기까지 온 거지.배 : 선생님은 1995년부터 2년간 포항미협 지부장을 맡으셨더군요?김 : 포항미협의 기틀이 잡혀 있을 때였지.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회원들이 잘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어. 부지부장이던 배현철 선생이 많이 도와주었지.배 : 배현철 선생과는 대동중·고등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으셨죠?김 :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의 최영조 교수가 서라벌예대 선배인데 학교에 자리가 없냐고 연락이 왔어. 포항에 가고 싶어 하는 제자가 있다고. 당시 내가 맡은 미술 수업이 너무 많아서 학교에 미술 교사를 더 뽑자고 얘기했지. 다행히 학교에서 내 뜻을 수용해주더군. 그렇게 오게 된 사람이 배현철 선생이야. 배 선생은 작가로서 참 괜찮은 사람이야. 지금도 시골 화실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지. 배 : 지부장을 역임하던 무렵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나요?김 :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 미술협회 지부장과 인연이 되어 연변에서 전시를 했어. 포항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에 소개한 첫 사례였지. 그리고 일본의 자매도시 후쿠야마(福山) 시립미술관 초대전도 기억에 남아. 히로시마(広島)의 시모카마가리(下蒲刈) 란토가쿠(籣島閣) 미술관의 순회 전시도 갔고. 해외 어딜 내놔도 될 만큼 협회 규모가 커졌으니 뿌듯한 일이지.배 : 선생님의 귀한 자료가 거의 없어 안타깝습니다.김 : 모아둔 팸플릿이며 그림이며 사진 자료는 1998년 태풍 애니 때 모두 잃어버렸어. 당시 기상관측 이래 최대의 폭우라고 했는데, 어마어마했지. 대잠못 둑이 무너져 도로가 침수되고 단전에 단수는 물론 전화도 안 되었어. 대동중학교 부임하면서부터 20여 년 사용한 화실이 상가 1층이었는데 완전히 물바다가 되어버렸지. 작업실 바닥에 깔아놓은 그림이며 팸플릿은 흙탕물 범벅이 되어 모두 내버려야 했어. 그나마 유화 작품 몇 점은 말려서 닦으니까 좀 괜찮더라고.배 : 포항미술협회에서 현재 지역 미술사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지역 미술의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포항 미술이 이제는 많이 성장했지요?김 : 지금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크지. 회원만 200명이 넘으니까. 이제는 어딜 가도 당당해.배 : 후배 작가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김 :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지. 하지만 어떻게 그려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고 그린 그림이 올바른 그림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림은 손끝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려야 해.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이 즐거움과 희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작가들의 몫이겠지.끝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

2022-07-11

“내 그림의 변함없는 주제는 자연이야”

김두호 선생과의 인터뷰에 제자들이 동석했다.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추억담이 이어지면 김두호 선생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씩 덧붙이곤 했다. 그는 배려하는 데 익숙했고 낮은 목소리에는 사족이 없었다. 선생의 그런 태도는 작품과 다르지 않다. 그가 흔들림 없이 추구해온 미술 세계는 자연이다. 그가 좋아하는 물과 돌과 산을 그린 화폭에는 푸른 정적이 흐른다. 파도가 치는 바다도 그렇고, 바람 부는 겨울 들판에도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정적이 감돈다. 이 점은 그의 그림에 기교가 없는 듯이 보이게 한다. 배 : 첫 번째 개인전은 언제 어디서 했는지요?김 : 용다방이라고, 중앙상가 우체국 앞 건물 2층에 있었어. 그때는 갤러리가 없어서 다방이나 시공간 부설 전시관,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전시했지. 1978년 2회 개인전은 최동하외과 지하의 수갤러리에서 했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포항에서 전시시설을 갖춘 첫 번째 갤러리야.배 : 포항의 최초 전시 공간은 1952년 문을 연 청포도다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1970년대까지 다방이 전시장 역할을 했는데, 다방에서 전시가 자주 열린 이유가 궁금합니다.김 : 다방 업주 입장에서는 손님이 몰려 돈이 되었고, 예술 공간이라는 인식이 생기니까 품격도 있어 보였을 거야. 화가로서는 임대료 없이 관람객을 만날 수 있으니까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지. 내가 첫 전시를 했던 용다방 주인은 여성이었는데 그림을 아주 좋아했어.배 : 선생님께서 거쳐간 개인전 공간은 포항 전시 공간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더군요. 1974년 용다방에서 시작해 1978년 수갤러리, 1985년 육거리 천마화랑, 1993년 아솜터갤러리, 2000년 포항대백갤러리 그리고 2010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하셨습니다.김 : 1970년대는 주로 다방에서 전시했고, 1980년대 넘어오면서 작은 갤러리들이 생기긴 했는데 지속적으로 운영되지는 못했어. 대백갤러리가 1991년 개관되어 전시가 많이 열렸고, 1995년 개관한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장두건 선생의 전시가 처음 열렸어.배 : 장두건 선생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나요?김 : 장두건 선생이 포항에서 개인전을 한 1986년쯤 처음 알게 되었지. 한국화 붐이 한창 일어날 때였어. 장 선생이 은퇴하고 고향인 흥해읍 초곡리에 오면서 지역 작가들과 교류가 많아졌어. 그만한 경력을 가진 대가가 포항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워. 후배들도 존경하며 많이 따랐고.배 : 1970∼80년대 포항에서는 주로 어떤 분들이 전시를 했나요?김 : 판매를 위한 수묵화 전시가 많았어. 서양화 전시는 대부분 미술 교사가 했지. 친구 이방웅은 동지중학교와 유성여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풍경화 등 구상화를 주로 전시했어. 포항고등학교에 있던 김건규 선생은 나중에 대구로 갔는데 포항에서도 개인전을 했지. 미술 교사들이 미목회(美睦會)를 만들어 전시도 했어. 나도 참여했고.배 : 선생님의 그림을 보면 자연을 일관되게 추구해왔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김 : 그렇지. 내 그림의 소재는 풍경이야. 나는 자연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그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위와 물이지. 태어난 곳이 포항 바닷가여서 그런지 물을 대할 때면 마음이 편안해져. 개울이나 계곡도 많이 그렸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어. 배 :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무엇인가요?김 : 송도 솔숲에서 그림을 많이 그렸어. 송도는 소나무 숲이 좋고 동빈내항 쪽으로 보면 갈대가 많았어. 가을이면 갈대숲이 멋들어지게 펼쳐졌지. 갈대 주변이 그림 소재로 너무 좋은 거야. 조선소 역시 그림 소재로 최고였어. 교직에 있으면서 주로 그린 풍경이 조선소야. 배를 들어올리는 모습이나 파손된 배가 소재로 좋아서 여러 점을 그렸지. 그때 그려놓은 조선소 풍경이 몇 점 남아 있어.배 : 조선소가 그리기 좋았던 이유는요?김 : 조선소 주변 분위기가 좋았어. 지금처럼 정비된 조선소가 아니고 허름했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레일을 놓고 배를 만들고 수리했지. 정돈된 것보다 허름한 조선소 분위가 좋더라고.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 당시 내가 봤을 때는 그만한 풍경이 없었어. 어딜 다녀 봐도 송도 조선소 분위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사라져서 아쉬워. 정비된 조선소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는 어려운 것 같아.배 : 바다와 솔숲이 어우러진 송도야말로 선생님께서 선호하는 소재가 한곳에 모인 곳이군요. 요즘도 송도 숲에 나가보시나요?김 : 지금도 한 번씩 가봐.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옛 풍경이 기억에 남아 있어 감회가 새롭지.배 :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은 못 본 것 같습니다.김 : 인물화는 대학 시절, 모델을 그린 것 말고는 거의 안 그렸어. 마음에 안 들더라고. 인물화를 그리려면 꾸며야 하는데 나는 그런 작업은 별로야. 억지로 만드는 느낌은 내 그림 속에 별로 없어.김 : 자연을 그릴 때는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군요?배 : 물과 바위는 변함이 없으면서 깊은 느낌이 있지.다음의 글은 김두호의 미술 세계를 잘 설명해준다.김두호의 그림에는 잘 보이게 하려는 과장이나 기교가 없다. 그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그림은 자연을 담담하게 담아내려 한다. 온갖 기교와 눈속임 방법을 동원하여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 없이 순수하게 그렸다는 말이다. 따지면 자연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허위와 허식이 없다. 계절과 시기에 따라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참 순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임창섭, 「自然은 자연이고, 그의 그림은 그림이었다」, 『아름다운 여정-포항 원로 작가 김두호전』, 포항시립미술관, 2010, 10쪽. 배 : 그림도 삶도 과욕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자연을 닮아가는 것일까요? 공모전을 일부러 멀리하셨다고요?김 : 대학 시절 목우회(1958년 설립된 한국 구상미술 작가들의 미술 단체)에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어. 심사를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들 중 목우회 회원들이 했는데 계산 빠른 친구들은 교수들을 찾아다니는 거야. 그런 친구들은 큰 상을 타고, 나처럼 그림만 그리는 사람은 운이 좋아야 입선이야. 그걸 몇 차례 겪고 나니 그림 세계가 이래서는 안 된다 싶더라고. 그 후로 공모전 출품은 안 했어. 상을 타려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상을 위해 그리는 그림이 과연 순수한 것인지를 한동안 고민하다가 나름의 결론을 내린 거야.배 : 그림을 그리는 자체로 충분하다는 말씀이군요.김 : 경력을 쌓기 위한 개인전도 마찬가지야. 요즘은 개인전을 하려면 돈도 많이 들어. 물론 열심히 하는 건 좋아. 그렇지만 수상과 경력 쌓기가 목적인 전시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 작업 자체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야.배 : 자연이라는 소재는 변함없더라도 소재를 대하는 태도나 화풍에는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김 : 물론 그림마다 같을 수는 없어. 형태나 색깔을 바꾸게 되지. 왜 파란색을 많이 쓰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더군. 나는 파란색을 좋아해. 색상과 소재를 선택하는 기준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지. 나는 후배들에게 무언가 독보적인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소재를 그려야 한다고 말해. 시대의 조류에 마냥 따라가지 말고, 시류를 반영하더라도 결코 얽매이지 말라고 하지.배 : 선생님은 자연주의적 화풍을 지키면서 색다른 경향을 보여주셨지요. 1970년대 후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앙데팡당(Ind00E9pendants)전 출품작은 선도적인 현대 회화 경향으로 평가받았고, 1980년대 중반 대구중앙미술관 초대전의 말린 생선 그림은 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 기억됩니다.김 : 앙데팡당전에는 실험적인 작품이 주로 전시되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빨래집게를 그려 시간의 연속성을 표현한 작품인데 아쉽게도 사진이나 팸플릿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대구중앙미술관 초대전에 출품한 말린 생선 그림은 반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 그 작품은 소장하고 있어.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

2022-07-06

가난한 학생들 무료로 가르치며 포항에 미술 기반 닦아

김두호는 1970년대부터 포항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에 목말랐던 학생들은 그의 화실에 모여들었고,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의 화실은 학생들이 미술에 대한 갈증을 푸는 공간이었다. 포항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의 미술 모임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김두호가 배출한 제자들은 현재 포항 화단의 구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배 : 1970년대는 미술을 전공한 교사가 드문 시절이죠?김 : 예체능 계열 전부 전공 교사가 드물었지. 교사들의 수업시수를 고르게 하려고 다른 과목을 떼어 맡기기도 했어. 수업시수가 적은 예체능 교사들은 더 그랬고. 대동중학교에 부임하니 한문도 가르치라고 하는 거야. 나는 음악을 맡겠다고 했지.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어서 중학생은 가르칠 수 있겠다 싶었거든. 그때 음악 과목은 서무실 여직원이 맡아 가르쳤는데 교사 자격을 가진 내가 한다니까 학교에서 반기더군. 그렇게 1학년 음악을 2년 정도 가르쳤어.배 : 음악은 언제 배우셨어요?김 : 혼자 익힌 거야. 그때는 건반을 제법 두드렸는데 나이가 들어 손이 굳으니 그전처럼 안 되더군. 악보 보는 눈과 손이 같이 가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손이 못 따라가.배 : 당시 미술을 전공한 교사로 배원복 선생이 있었지요?김 : 타지에서 온 교사는 간혹 있었지만 포항 출신으로 미술을 전공한 교사는 배원복 선생과 나뿐이었어. 배원복 선생은 내가 부임할 즈음 교감이 되었고, 뒷날 교장까지 했지. 유화를 전공했는데 한국화를 주로 그렸어.배원복(1926~2015)은 포항 흥해 출생으로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주예술학교를 1회(1949)로 졸업했다. 경주와 포항에서 4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했으며 포항미술협회 제5대 회장을 역임했다.배 : 당시 대동중학교 미술반 수준이 상당했다고요?김 : 미술반원이 꽤 많았고 다들 열심히 했어. 대회에 나가면 매년 단체 우승을 할 정도로 실력이 우수했지. 지금도 활동하는 제자들이 많아. 미술반을 운영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어.배 : 여러 학교 학생들이 선생님 화실로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김 : 학생들이 딱히 미술을 배울 곳이 없었으니까. 그때 개인 화실이 있었는데 방과 후에 학생들이 오면 지도해줬어. 그림 공부의 기본인 수채화와 소묘를 주로 가르쳤지. 그때 배운 학생 중 몇 명은 미술 교사가 되었어. 그 제자들도 이제 거의 정년퇴임을 했을 거야.김두호의 화실에 다녔던 최복룡 전 포항미술협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미대 입시생 상당수가 김두호의 화실을 찾았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학생들은 대구나 부산, 서울의 미술학원에 다녔지만 대부분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다. 김두호는 미대 지망생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지금 포항 미술계가 두텁게 형성된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배 : 당시 그림을 그리던 고등학생들이 화란회(畵蘭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김 : 모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는 내가 교사 초기 시절이었으니까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였지. 1970년대 김건규, 백해룡, 이방웅 교사와 미술대회를 많이 만들었어. 아마 그때 대회나 전시에 열심히 참여한 학생들이었을 거야. 화란회는 김두호의 지도를 받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창립된 포항 지역 고등학교 미술 학도들의 모임이다. 몇 년 후 없어졌지만 1970년대 포항 미술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체다. 현재 포항에서 활동하는 중견 작가 가운데 이상락, 김왕주, 최복룡, 이경형, 김직구, 박계현 등이 화란회 출신이다.배 : 선생님은 가난한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쳤다고 제자들이 말하더군요. 수업료 대신 연탄을 드렸다는 제자도 있고, 미술실에서 밥을 해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김 : 배고픈 시절이었으니까 다들 어렵게 공부했지. 내가 맡아서 가르쳤다기보다 그림 그릴 공간조차 없으니까 돈 없는 학생들이 찾아오면 편하게 그림 그리라고 허락했을 뿐이야. 오며 가며 지도도 했고.배 :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니 미술 환경이 좋을 수가 없었겠습니다.김 : 먹고살기 어려우니까 부모들이 그림 그리는 걸 말렸지. 그림 그리면 배고파서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도 많이 들었어. 그림 그리면 굶어 죽는다고 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는 미술에 우호적이지 않았거든. 안타까운 일도 있었어. 대동중학교 미술반에 그림을 워낙 좋아하고 소질도 뛰어난 한 학생이 있었는데 부모가 반대했어. 그런데 그 학생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자살해버린 거야.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지. 그 학생의 부모가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면서 나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 왜 미술을 가르쳤냐는 거지. 미술반을 만들어 지도한 내 잘못이 아닌가 자책을 많이 했어.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배 : 미술반 활동을 반대하는 학부모가 많았겠군요.김 : 수업시간에 그림을 좀 그린다 싶으면 미술반으로 불러서 지도했거든. 그런데 그 사건 후에 학부모들이 찾아와서 자기 아이는 지도하지 말라는 거야. 내가 뭐라고 말할 처지나 되나? 포항제철이 들어서고 지역의 살림살이가 전반적으로 나아지면서 그런 학부모들이 찾아오지는 않았어. 그림 그리면서 겪은 일 중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 제자의 자살이야.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목숨을 바친 거잖아. 그 아이의 너무나 짧았던 생애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마음이 아파. 그림을 계속 그렸다면 좋은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더 안타까워.배 : 교직과 병행하면 작업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작품 활동을 꾸준하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김 : 교사 생활을 하게 되면 작업 시간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어. 그래서 그림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했지. 죽장에서 교직 생활할 때도 비록 그곳이 조용한 시골이지만 사람들이 모여 지내다 보니 개인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대동중학교로 옮겨 바로 화실을 구했지. 그림 그리려고 술도 끊었어. 대동중학교에 근무할 때 동료 교사 둘과 친분을 쌓았는데 저녁마다 술판을 벌이는 거야. 당시 포항국민학교 옆이 거의 술집이었어. 퇴근하면 늘 거기 가자고 하는 거야. 나는 퇴근 후에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술만 마시면 어떻게 되겠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최동하 외과의원을 찾아갔지. 최동하 원장은 나중에 포항의료원장을 지냈는데, 그의 아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 최 원장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다시 술 먹으면 죽는다는 소견서를 적어달라고 부탁했어. 그걸 동료들에게 보여주고는 술을 딱 끊은 거야. 그 후로 수업을 마치면 바로 작업실로 갔지.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

2022-07-04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야”

세상에 홀로 남겨진 김두호. 그때부터 세상살이는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그림만이 그를 위로했다. 다행히 어려운 시기마다 손을 내밀어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어느 때인들 예술가에게 호락호락한 시절이 있었던가?삶이 고단할수록 예술혼은 치열했다. 대학 입학부터 귀향까지의 여정을 들어 본다. 배 : 대입 관문은 통과했다지만 서울 생활이 녹록치 않았을 텐데요. 대학 등록금도 그렇고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김 : 대학 가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어. 친구 하숙집에 얹혀살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군분투했지. 생활비며 미술 재료비를 전부 혼자 해결해야 했으니까. 막막하던 차에 서병언 선배를 만나게 되었지. 선린애육원 원장이던 서두필 장로의 아들로 당시 서울대 공대를 다니고 있었어. 생활비를 마련하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기다려보라고 하더군. 나중에 연락이 와서 가보니 어느 가정에 아이들이 모여 있는데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지.배 : 미술을 지도했나요?김 : 국어, 산수, 과학, 사회 과목을 가르쳤어. 그렇게 번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생활비로도 썼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친구 하숙집 방에 돌아오면 하늘이 노랄 정도였어. 내가 대학을 졸업한 건 어떤 면에선 기적이지.배 : 이명석 선린애육원 원장도 도움을 많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김 : 내가 선린애육원에 있을 때 원장이셨어. 수도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뒤에 서서 잘 그린다고 칭찬을 해주셨지. 이명석 원장님은 대학 다닐 때도 도움을 많이 주셨어. 학비를 마련해준 적도 있고, 한 번씩 찾아와서 도움을 주셨어. 미술 교사 시절에는 작업실을 마련하도록 해주셨고. 원장님은 내가 못 잊을 분이야. 그리고 부례문 선교사도 학비 일부를 도와주셨지. 그렇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배 : 대학 졸업 후에는 서울에 계셨더군요?김 : 졸업 후에 서라벌예술대학 장리석 교수가 고향으로 가지 말고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어. 서울에 있어야 그림을 그리지 고향 가면 못 그린다고 말이야. 원래는 포항에 가서 교직 생활을 하려고 했거든. 당시는 미술과 졸업만 해도 교사 자리를 구할 수 있었어. 그래도 교수의 말을 믿고 서울 서대문에 아폴로미술학원을 냈지.배 : 장리석 교수가 김 선생님을 많이 아꼈나 봅니다.김 : 나를 좋게 봤나 봐. 그림으로 성공하라고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라고 하신 것 같아. 장리석(1916∼2019)은 평양 출신으로 1960년부터 서라벌예술대학 강단에 섰다. 그의 교수법은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학생들의 작품에 과감한 가필(加筆)로 유명했다. 뭉툭뭉툭한 붓 터치와 강렬한 색채의 대비에 의한 가필에 고등학교에서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고 올라온 학생들의 세밀한 그림은 다시 손보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렸다고 전한다.배 : 학원 운영은 어땠습니까?김 : 학원 근처에 이화여고가 있어서 미술반 학생들이 많이 왔어. 이젤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학원생들이 많았지. 수입이 괜찮아서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되었어. 그런데 종종 화실에 놀러 오던 지인이 실내 디자인을 해보자고 하는 거야. 당시 명동에 미장원이나 옷가게가 우후죽순 생겼거든. 디자인만 해주면 된다는 거야.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는 그 말만 믿고 종로3가 단성사 앞에 사무실을 마련했어. 충무로, 종로, 명동에 상권이 마구 생겨날 때라 처음에는 수입이 괜찮았지. 그러다 그 지인이 이번엔 보건사회부와 상공부가 주관하는 불량 상품 전시회를 맡아보자고 제안하더라고. 사업권은 본인이 따낼 수 있으며, 계약금의 절반 이상은 남을 거라고 하면서 말야. 당시 서울시청 앞에 국립공보관 건물이 굉장히 넓었는데 그곳을 가득 채우는 일이니 사업이 꽤 컸지.배 : 불량 상품 전시회라니 독특한 행사였네요.김 : 그때는 불량 상품이 수두룩했으니까. 문제는 보건사회부 직원들이야. 저녁마다 공무원 대여섯 명이 오면 술을 사줘야 하는데 술값이 말도 못 해. 그것도 연못에 배를 띄우고 술을 먹는 생전 처음 보는 술집에만 가는 거야. 배 : 불량 공무원이었네요?김 : 기막힌 일이 많았어. 도중에 다른 업체가 보건위생과 직원을 구워삶아 사업을 따내려고 달려든 거야. 선린애육원 이명석 원장의 아들인 이진우 국회의원을 찾아가서 사정을 토로하니 보건사회부에 전화를 넣더군. 그제야 상대 업체가 손을 뗐는데 국회의원 힘이 대단하다고 느꼈어. 그렇게 일은 시작되었는데 그 넓은 전시공간을 채우기에는 시간이 촉박했어. 또 박정희 대통령이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얼마나 재촉하는지. 거기다 선금은 공무원 회식비라며 10퍼센트를 떼고 주더군. 그 돈으로 판자며 각목, 못 같은 재료를 사서 밤낮으로 일했어.배 : 불량 상품은 어떻게 모았는가요?김 : 보건사회부 직원들이 시중에 수집하러 돌아다녔어. 그러니 물품제조 업체 관계자들이 찾아와서 야단인 거야. 자기네 회사 물건이 전시되면 아무도 안 산다고 난리를 치는 거지. 공사하랴 그런 업체 막으랴 정말 가관이었어. 행사를 끝내고 정산해보니 적자가 났더군. 학원을 운영하며 모아둔 돈까지 날렸지. 세상 물정 모르고 욕심을 부린 탓이었어. 그때 학원은 수강생이던 미대 졸업생에게 맡기고 서울 생활을 끝냈지.김두호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게 만든 불량 상품 전시회는 역설적이게도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상공부와 보사부가 공동 주최로 국립공보관에서 지난 10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여는 ‘불량상품전시회’에는 하루 평균 1만 5천여 명씩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전시장을 꽉 메운 관람객은 한결같이 이번 전시회를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면서 ‘조금 일찍 했더라면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고 악덕 상인이 지금쯤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신문, TV, 방송 등에 요란한 광고를 내는 소위 일류 메이커의 제품 등 총 1천539종이라는 엄청난 양의 불량상품이 전시된 회장엔 저녁때가 되어도 ‘고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부끄러운 인기 최고」,『조선일보』1970년 9월 13일자.배 :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어디로 가셨나요?김 : 대구에 대학 동기인 최병소가 있었거든. 지금도 대구에서 활동하는 친구인데, 대구 상서여상 미술 교사였어. 교직에 몸담기 전에 운영하던 학원이 있었는데 그걸 맡아달라고 부탁하더군.최병소(1943∼ )는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1970년대 박현기, 이강소 등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운동의 획을 그은 대구현대미술제 주축 멤버로 활동했다. 미술대학 재학 시절의 김두호. 배 : 포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습니까?김 : 대구로 가면서 권영호 선생한테 어디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싶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권영호 선생이 죽장중학교 권태환 교장과 연결해주더군. 권태환 교장이 대구에 와서 나를 만났고, 그 직후 죽장중학교 발령을 받았어. 사실 권영호 선생이 대구여고 미술 교사 자리를 권했지만 응하지 않았어. 포항에서 미술 교사를 하고 싶었거든.배 : 죽장은 지금도 포항 도심에서 버스로 한 시간 넘는 거리인데 당시엔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생활은 어떠셨어요?김 : 교장 사택에 비어 있는 아랫방을 사용했어. 최소 3년은 근무하기로 약속했는데 2년도 못 버텼어. 학교에 전화기가 없어서 우체국까지 가서 공중전화를 썼지. 막상 들어가 보니 너무 외진 데다 그림 그릴 여건이 안 되는 거야. 밤마다 동료 교사들이 어울리는데 거절하기도 쉽지 않고. 이따금 학생들 견문을 넓혀주려 대구로 사생대회를 다녔는데, 최병소가 나더러 골짜기에 살더니 촌놈 다 되었다고 말했을 정도지.배 : 그래서 대동중학교로 옮기신 건가요?김 : 포항에서 활동하던 서예가 박인호가 대동중학교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어. 박인호 선생과의 인연은 대구에서 시작되었지. 대구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할 때 포항여고 다니던 딸을 데리고 왔더군. 그 딸이 주말마다 대구에 와서 내 지도를 받았지. 그때 박인호 선생이 고향으로 가서 활동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어. 대동중학교로 부임하는 과정은 일사천리였어. 동인교육재단 초대 이사장이 김경섭 동인병원 원장인데 그 아들이 중학교 동창이었어. 미술 교사 자격증이 있느냐기에 그렇다고 하니 바로 김현호 교장(1969년 대동중학교 초대 교장, 1972년 대동고등학교 초대 교장 역임)과 연락이 닿았고, 마침 그때가 2월 말이어서 며칠 후에 출근했지.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

2022-06-29

송도 숲에서 스케치하며 화가의 꿈 키워

김두호는 포항 미술의 여명을 밝힌 서창환을 만나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화가의 꿈을 꾼다.인터뷰 내내 서창환 선생에 대해 감사를 표했고, 그림에 대한 기억의 근원은 모두 서창환 선생에게로 닿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미대 입시를 준비하라며 석고상까지 빌려준 권영호도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이다.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배 :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화폭에 담은 풍경을 기억하시나요?김 : 송도 숲이지. 포항중학교 다닐 때 서창환 선생님이 미술반 학생들을 데리고 토요일마다 송도 숲에 갔어. 그때 그림을 많이 그렸고 실력도 늘었지. 유화는 구경도 못 할 때여서 수채화를 주로 그렸어.배 : 야외 스케치는 몇 명 정도 나갔나요?김 : 대여섯 명씩 같이 갔어. 미술반 학생은 열 명 이상 됐지만 빠지기도 했으니까. 이젤도 없이 스케치북을 들고 갔어. 연필 스케치를 한 다음에 미술실에서 채색하기도 하고, 송도 숲에서 바로 채색할 때도 있고. 미술실에서 그릴 때는 4절지에 주로 그리고, 송도 숲에 갈 때는 8절 스케치북을 가지고 갔지.배 : 미술 도구는 학교에서 지원해줬나요?김 : 학교에서는 미술실만 제공하고 재료는 우리가 준비했어. 당시에는 물감도 비쌌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물감이나 재료를 구하기가 힘들었어. 다들 가난하던 시절이지.배 : 포항중학교 미술반원 가운데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나요?김 : 노태룡과 이방웅, 나 정도로 기억해. 선배 몇몇이 그림을 더 그렸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미대에 진학하는 경우는 드물었어. 학교는 달랐지만 권영호 선생도 서창환 선생님 도움을 받았지. 1950∼60년대 미술교육 현장의 풍경은 다음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선생님들도 관심이 없고 “나가서 그려라” 하고 한 시간 쉬었다. 준비물을 안 가져오면 화장실 청소를 했다. 특별히 관심이 있는 선생님은 수업을 좀 했는데 그것도 서예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림 감상 쪽은 선생님들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 가르칠 수도 없었다.- 양민영, 『제1차·제2차 교육과정기 한국 미술교육의 역사적 풍경』, 한국학술정보, 2019, 81쪽배 : 서창환 선생은 평생 나무와 숲을 그린 화가로 알려졌습니다. 김두호 선생님도 평생 자연을 주제로 작업하셨지요?김 : 그렇지. 서창환 선생님은 평생 나무와 숲을 그렸고, 나도 평생 자연을 그리고 있지. 서 선생님의 초기 그림은 굉장히 사실적인 편이었는데 대구에 가서 바뀌었어. 상세하기보다 큰 덩어리로 그렸고, 주로 흰 나무를 그렸지. 작품에서 경건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건 종교의 영향이 아닌가 싶어. 선생님이 북한에서 부유하게 살다가 토지개혁 때 추방당해 포항까지 오면서 어려움이 많았지. 그때마다 기도로 극복했다고 말씀하셨거든.배 : 서창환 선생님이 대구로 가신 이후에도 만나셨는지요?김 : 대구로 가신 다음에도 날 잊지 않으셨어. 포항에 전시하러 한 번씩 오시면 반드시 나를 불러 “요새도 그림 그리고 있지?” 하고 물어봐. 그러면 “예, 하고 있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지. 지난 4월, 서창환 선생을 기리는 제자들의 작품전이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는데 제자 여덟 명 중 나를 맨 처음에 넣어놨어. 대구 제자들만 해도 충분할 텐데, 포항에서는 유일하게 내가 포함되었지. 포항에 계실 때 댁에 자주 들러 인사를 나눴던 사모님의 의중도 있지 않았나 싶어. 서 선생님 덕분에 그림에 입문해 지금까지 왔으니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하지.서창환은 제자 김두호를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까? 서창환이 김두호의 개인전에 부친 축사로 짐작해본다.자신의 영예보다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그이기에…. 그는 구상계열의 작가로서 가장 즐겨 그리는 물의 소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의 붓끝을 거치면 심오한 물의 세계로 변해버리는 것은 그의 성품과 무관하지만은 않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은 화려함을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사물의 내면의 세계를 솔직하고 순박한 심정으로 그려냄으로써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깊이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기법이라 하겠다.- 1993. 9. 7. 서양화가 서창환배 : 포항중학교를 졸업하고 포항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경주로 전학 가셨지요?김 : 선린애육원에서 포항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경주로 갔어. 선린애육원에 있을 때 대구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 부례문(Rev. Raymond C. Provost, Jr)을 알았는데, 그분이 포항에 와서는 경주로 오라고 하는 거야.알고 보니 경주 문화중·고등학교를 인수했더라고. 경주로 전학 오면 대학 진학을 도와주겠다고 해서 문화고등학교로 옮긴 거야.서라벌예술대학에 합격했을 때 부례문 선교사가 등록금을 대주었지.부례문 선교사는 1948년 한국에 선교사로 건너와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 6·25전쟁을 겪었다.대구 선교부로 배치되어 그의 아내 부마리아 간호사와 함께 전쟁고아와 결손가정, 성직자 자녀를 위한 한국장학재단을 설립해 그들을 지원했다.1960년대, 경주 문화학교가 파산 위기에 이르자 교장으로 취임해 미국 교회의 후원을 통해 무너진 학교 건물을 다시 세우고 학교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부례문 부부는 능력은 있지만 가난해서 공부할 수 없었던 수많은 지역 청소년들을 후원했다. 배 : 예나 지금이나 미대 진학을 위한 실기시험 준비가 만만치 않은데, 경주에서 입시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김 : 문화고등학교는 미술실이 없었어. 따로 지도하는 사람도 없어 순전히 독학으로 했지. 우연히 다시 만난 권영호 선생의 도움이 컸어. 권 선생은 경주에서 태어났지만 포항에서 학교를 다녔어. 내가 포항중학교에 다닐 때 수산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송도 숲에 자주 그림을 그리러 왔어.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사람이었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학과로 진학했다가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혀 미술로 전향한 것으로 알아. 구룡포중학교 미술 교사로도 있었고. 포항에서 활동한 초기 서양화가라고 할 수 있어.권영호(1936~2012)는 1960년대 포항 화단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포항수산고등학교(현 포항해양과학고)를 졸업했으며, 서라벌예술대학을 나와 1961년 구룡포중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고향이 경상도인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을 모은 ‘문동미우회(文童美友會, 서라벌동문전으로 명칭이 바뀜)’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1963년에는 포항 인근 미술대학 출신 모임인 ‘향미전’을 창립해 노태용, 원용일, 박명순, 이방웅, 김순란, 정외자와 함께 포항 화단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6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포항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포항 미술사에 중요하게 남아 있다.배 : 권영호 선생이 입시를 어떻게 도왔나요?김 : 경주로 전학 가서 통 못 만나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포항 시내에서 만났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입시 준비를 하고 싶은데 석고상이 없어 힘들다고 하니 선뜻 학교에 있는 줄리앙 석고상을 빌려주겠다는 거야. 그때는 대입 실기로 소묘를 봤거든. 그 석고상을 빌려와서 혼자 연습했어. 요즘은 연필로 그리지만 그때는 목탄으로 그렸거든. 제대로 되는 건지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연습했지. 그렇게 서라벌예대 시험을 보러 가니까 마침 줄리앙을 그리라고 하는 거야. 다들 너무 잘 그려서 붙겠나 싶었는데 다행히 합격했더라고.배 : 소묘를 그리면서 권영호 선생과 의견을 나누기도 했나요?김 : 그런 건 못 했어. 그냥 석고상만 빌려와서 내 나름대로 해본 거지. 권 선생과는 인연이 각별해. 마산에 작업실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서 가깝게 지냈지. 권 선생이 술을 좋아했어. 만나면 술이었지. 성격도 호탕했고.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

2022-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