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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모노세키로 복어 등 생선 수출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2-07-20 18:35 게재일 2022-07-21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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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만 ③<br/>포항제철 건설과 죽도시장의 성장
죽도시장 어판장(1976).

1960년대 후반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죽도시장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포항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났고, 도시 곳곳이 현대화의 과정을 겪는다. 도매시장의 역할을 담당했던 죽도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이전에는 어민들이 잡은 수산물을 서울로 보내기도 어려웠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수출까지 모색하게 된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던 당시 죽도시장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일거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오니 도시와 더불어 시장도 활성화되었지. 죽도시장은 소매도 하지만 도매시장의 역할을 했어. 생선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생산된 곡물이 시장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팔려나갔지.

나를 포함한 동업자들이 배 4~5척을 구해 일본 시모노세키(下<95A2>)로 생선을 보냈지. 포항 인근에서 많이 잡히는 방어와 삼치가 주종이었고, 고급 어종인 복어도 인기였어. 저녁 7~8시에 배가 포항을 출발하면 열 시간 정도 항해해 새벽 4~5시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지. 그러면 하역 작업을 해서 입찰 등의 과정을 거치게 돼.

 

홍 : 포항제철 건설과 함께 죽도시장도 큰 변화를 겪게 되지요?

최 : 일거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오니 도시와 더불어 시장도 활성화되었지. 죽도시장은 소매도 하지만 도매시장의 역할을 했어. 생선뿐만 아니라 포항 인근에서 생산된 쌀 등의 곡물이 죽도시장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팔려나갔지. 울릉도로도 많이 판매되었고. 왜냐하면 울릉도는 쌀 생산이 안 되니까. 예전엔 수산물을 서울까지 가서 판매한다는 건 엄두를 못 내고, 대구가 근처에서 가장 큰 도시라서 생선 등을 실어다 대구에서 팔곤 했어.

홍 : 서울로 생선을 보내는 방법은 따로 있었던 겁니까?

최 :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의 경우 소량의 고급 어종을 기차에 실어 보냈어. 판매자가 포항역에 연락하면 화물 담당자들이 물건에 꼬리표를 달아 묶어 보내고, 서울역 화물 담당 직원이 물건을 받았지. 그때 서울역 바로 옆에 도매시장이 있었어. 조금 멀리는 가락동으로도 화물이 갔지. 나도 그 장사를 오래 했어. 서울에 내 물건을 위탁판매 해주던 상인도 있었지. 그로부터 한참 후에 일본으로 수출 길이 열렸어.

홍 : 일본으로 생선 수출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최 : 1970년대 초반으로 기억해. 선주들이 지분을 모아 수출업을 해보자는 제의가 있었어. 나를 포함한 동업자들이 배 4~5척을 구해 일본 시모노세키(下<95A2>)로 생선을 보냈지. 포항 인근에서 많이 잡히는 방어와 삼치가 주종이었고, 고급 어종인 복어도 인기였어. 저녁 7~8시에 배가 포항을 출발하면 열 시간 정도 항해해 새벽 4~5시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지. 그러면 하역 작업을 해서 입찰 등의 과정을 거치게 돼.

홍 : 일본을 상대로 사업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

최 : ‘마구로(まぐろ)’라고 불리던 생선을 많이 수출했는데, 얼음을 넣어 선어(鮮魚)로 보냈지. 일본에서는 그걸 회로도 먹고 통조림으로도 만든다고 들었어. 일본 사람들이 선호하는 생선은 복어와 방어, 삼치 등이었어. 방어는 6킬로그램짜리부터 10~15킬로그램짜리가 있는데, 일본에서는 12킬로그램짜리를 선호했지. 12~13킬로그램짜리 방어가 가장 높은 가격을 받았어. 생선 수출은 1970년대 초반에 시작해 15년가량 했지. 그 일을 그만둔 건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이야. 어획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홍 : 일본 수출로 수입은 어땠습니까?

최 : 장사를 해보면 많이 벌 때도 있고 밑질 때도 있지. 그때도 마찬가지였어.(웃음)

홍 : 일본 사람들은 어족자원 보호에 관심이 각별하다고 하던데요.

최 : 과거에도 철저했지.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가 포항에서 경찰의 단속에 적발된 적이 있었는데, 어린 청어를 잡았기 때문이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인들은 산란기에 고기 잡는 걸 엄격하게 금했다고 해. 그런 원칙을 지켜야 특정 생선이 멸종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겠나? 일본 사람들이 만든 정책과 법이라도 이런 건 배워야 한다고 봐.

죽도시장 칠성천으로 운반되는 고래(1967).
죽도시장 칠성천으로 운반되는 고래(1967).

홍 : 수산업 관련 일을 오래 하셨습니다. 그중 독특한 게 있다면 뭡니까?

최 : 어간유(魚肝油) 제조업을 했어. 어간유란 명태, 대구, 상어 따위의 간장에서 뽑아낸 지방유를 말하는데 비타민A와 비타민D가 많이 들어 있지. 그때 흰살 생선은 간이 있고 살이 붉은 등 푸른 생선은 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말하자면 상어, 명태, 조기, 아귀 등은 간이 있지만 청어, 삼치, 정어리는 간이 없지.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초반에 10년 정도 어간유를 만들었는데, 당시로서는 희귀한 사업이었어. 지금은 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어간유를 만들 때 악취가 나고, 어간유를 만들고 남은 폐기물을 바다에 버려 해양환경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라진 것 같아. 어간유 외에도 생선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일을 했어. 일제강점기엔 그것들을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해. 오징어, 명태, 가오리에서도 많은 양의 기름이 나와. 그 기름으로 고구마나 감자를 튀겨 먹기도 했지.

홍 : 환경 변화로 어획량이 줄어든 수산자원도 많지요?

최 : 일본 사람들은 아귀 간을 무척 좋아했어. 나한테 아귀의 간만 잘라서 용기에 담아주면 좋겠다고 부탁한 일본 사람도 있었어. 지금은 귀한 해산물이 된 성게가 송도해수욕장 주변에서 다량으로 잡히던 때도 있었고. 높은 파도가 치면 성게 수백 마리가 까맣게 밀려오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 지금은 수온 변화와 해양 오염으로 그런 풍경은 옛이야기가 됐어. 심각한 문제인 만큼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홍 : 포항에서 한때 고래가 많이 잡혔지요?

최 : 맞아. 포항에도 포경선이 있었지. 우리나라에 포경조합은 울산에 하나밖에 없었어. 그런 이유로 대다수의 포경선은 울산에 정박했지. 하지만 고래를 잡으러 항구를 드나드는 배를 포항과 구룡포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어. 내가 어릴 때는 포항에 포경선이 두세 척 있었고, 학산 앞바다에서는 고래 잡는 작살을 누가 잘 쏘느냐 겨루는 대회도 열렸다고 들었어. 1970년대 일본을 상대로 생선을 수출할 때는 고래고기도 한 품목이었지.

홍 : 일본으로 수출할 때는 해체해서 운송한 겁니까?

최 : 그렇지. 배에 싣기 전에 전부 해체했어. 고래가 워낙 크니까 통째로 운송하기가 어려웠거든. 해체하는 전문 기술자가 따로 없어서 어떤 때는 내가 고래를 부위별로 해체하기도 했어. 그 시절 가장 많이 잡혔던 건 밍크고래야. 밍크고래보다 더 큰 고래는 음력 8~9월 즈음에 잡혔지. 고래도 토속 어종이 아닌 회류성 어종이야. 고래를 잡으려면 울릉도와 독도 사이까지 배를 타고 가야 했어. 우리가 탄 배보다 더 큰 고래도 몇 번 봤다면 믿겠나?

홍 : 요즘 고래고기는 비쌉니다. 그때도 그랬나요?

최 : 1970년대엔 저렴했지. 밍크고래를 잡으면 학산천 밑 수협 마당에 올려놓고 해체했어. 고래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쌌던 시절이야. 선박 사정으로 수출이 어려울 때는 국내에서 소비해야 하니까 싼 가격에 팔렸어.

홍 : 고래는 버릴 게 없다고 하던데 무슨 뜻입니까?

최 : 고래 껍데기, 꼬리, 뱃살, 내장, 잇몸, 뼈에 붙은 살 등을 골고루 삶아서 한 묶음으로 만드는데, 이런 걸 수십 개 쌓아놓으면 소매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이 작업장으로 받으러 왔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포항 풍경이야. 땔나무가 비싸서 고래 뼈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지. 고래기름은 비누로도 만들어 썼고. 죽도시장에 고래고기가 담긴 바구니를 늘어놓고 돼지고기처럼 한 근, 두 근 팔던 때가 있었어.

홍 : 고래를 잡을 수 없게 된 건 언제부터죠?

최 : 1986년부터 전 세계에서 상업적 포경이 금지되지 않았나. 그전까지는 포항에서 고래가 적지 않게 잡혔어. 포획된 고래 중 큰 것은 62~63자, 그러니까 18미터가 넘었지. 그때도 그런 고래는 가격이 상당하니까 몇 자, 몇 치까지 치수를 쟀어. 포경선 선장들이 수첩에 고래를 포획한 날짜와 시간, 고래의 길이와 무게를 정확하게 기록했지.

홍 : 포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본 적도 있습니까?

최 : 생선을 싣고 두어 번 갔었지. 여권 대신 선원수첩을 챙겨 갔어. 시모노세키의 검역소 앞에 배를 대면 세관원이 올라와 여러 가지를 조사했지. 생선을 선적해 일본을 오가는 주식회사 효창수산이라는 곳에서 전무로 일하던 시절이야. 가끔은 일본 업체에서 우리 물건을 위탁판매했어. 포항에 비슷한 사업을 하는 회사가 세 곳 있었는데, 효창수산이 가장 컸어.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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