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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가 아름다웠던 평남 강서군 연곡리 옛집”

등록일 2022-08-22 19:44 게재일 2022-08-2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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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웅 ①<br/>두고 온 고향
한동웅.
한동웅.

1945년 광복 직후 38선을 넘어 서울로 온 한 가족이 있었다. 이들은 3년 후 바다가 아름다운 포항으로 와서 둥지를 틀었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 갔다. 그리고 고적한 포항으로 돌아와 삶의 뿌리를 내렸다. 지난 2000년 동지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한동웅 선생의 집안 얘기다. 한동웅 선생의 아버지는 문학가 한흑구, 어머니는 중등학교 음악 교사 방정분 그리고 할아버지는 도산 안창호의 동지였던 한승곤 목사다. 포항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한동웅 선생 일가의 발자취는 파란 많은 우리 근현대사의 독특한 전형이다. 다만 포항에 정착한 한흑구가 바다와 술을 벗하며 은자(隱者)로 살아간 까닭에 그 사연을 세상 사람들이 소상히 모를 뿐이다. 한동웅 선생을 만나 193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선생의 삶과 집안의 역정(歷程)을 들어보았다.

 

정년퇴직 후 여러 단체에서 대표를 맡아달라고 요청이 왔어. 사회봉사라 여기고 승낙했는데 한때는 무려 16개 단체의 대표가 됐지. 그 대표 중 하나가 평안남도 도민회 회장이야.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남 강서군으로 이사 가서 광복되던 해 10월까지 살았던 인연이지.

내가 살던 집은 봄이 되면 울타리에 핀 노란 개나리꽃이 아름다웠지. 닭 둥지에 닭이 수시로 달걀을 낳았고, 밤에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겁나서 문밖에 나가지도 못했어. 여름이 되면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강냉이를 삶아 먹었지.

 

김도형(이하 김) : 근황은 어떠신지요?

한동웅(이하 한) : 타고난 건강 체질이고 두주불사(斗酒不辭)에 술로는 져본 적이 없어.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나이가 든 탓인지 여기저기 탈이 나네. 구급차 신세를 대여섯 번 졌지. 움직이는 게 좀 불편하지만 거의 매일 40킬로미터 정도 운전하며 바깥바람을 쐬지.

 

김 : 2000년 8월 말에 동지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셨습니다. 그 후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한 : 정년퇴직 후 여러 단체에서 대표를 맡아달라고 요청이 왔어. 사회봉사라 여기고 승낙했는데 한때는 무려 16개 단체의 대표가 되었지. 그렇다고 대표의 명함을 만들지는 않았어. 봉사로 생각하고 대표직을 수락했는데 남들한테 굳이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 대표 중 하나가 평안남도 도민회 회장이야.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남 강서군으로 이사 가서 광복되던 해 10월까지 살았던 인연이지.

 

김 : 포항에도 이북 출신이 있는지요?

한 : 지난 3월 평안남도 중앙도민회에서 ‘잃어버린 고향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에 나를 초대하더군. 원래는 실향민 1세대를 불러서 증언을 들으려 했는데 1세대가 살아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1.5세대인 내가 참석하게 된 거야. 아버지가 실향민 1세대고, 나는 1.5세대에 해당하지. 포항에 ‘서부회’라는 이북 출신 모임이 있어. 회원이 십여 명 되었는데, 지금은 세 명만 살아 있지. 모두 구순이 넘었어.

 

김 : 이북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요?

한 : 나의 원적은 평안남도 평양시 하수리 96번지야. 생후 한 달여 만에 평남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안말로 이사 가서 1945년 10월까지 살았지. 평양의 기억은 남아 있을 리 없고, 연곡리 시절의 기억은 꽤 갖고 있지. 강서군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향으로 국무총리를 여러 명 배출한 곳이야. 연곡리는 조상 삼대가 살던 곳이지.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간 한흑구는 1934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게 된다. 한흑구는 평양에서 ‘대평양(大平壤’ 등 잡지 편집과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 1937년 4월에 결혼한다. 하지만 그해 6월부터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이 터지면서 한흑구 부자(父子)는 안창호 등과 기소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이듬해 3월 한동웅이 태어났다.

 

김 : 한흑구 선생이 평양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 일본의 박해가 심해서 모든 걸 접고 시골에 가서 좀 쉬자고 생각하셨을 거야. 아버지는 농사를 좋아하셨거든. 소나무를 베어내고 2천여 평 되는 땅에 사과나무와 자두나무를 심었지. 그 과정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어. 일본은 정책적으로 밀주(密酒)와 벌목을 엄격하게 단속했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많은 소나무를 베어냈으니 오죽했겠어. 일본인 면장이 깜짝 놀라 평양시장한테 상황 보고를 했지. 평양시장은 골치 아픈 사람이 갔으니 그냥 내버려두고 동태만 살피라고 했다더군.

 

김 : 연곡리의 추억을 들려주신다면.

한 : 내가 살던 집은 ㄴ 자 기와집이었어. 봄이 되면 울타리에 핀 노란 개나리꽃이 아름다웠지. 닭 둥지에 닭이 수시로 달걀을 낳았고, 밤에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겁나서 문밖에 나가지도 못했어. 여름이 되면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강냉이를 삶아 먹었지. 내가 다니던 학교에 마츠다(松田)라는 교장이 있었는데, 칼을 차고 교단에 올라와 훈시했어. 아이들한테 공포감을 심어주려고 그랬을 거야. 마츠다 교장은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거나 재끼(노름)를 했지. 마츠다 교장은 말을 타고 우리 집에 왔는데, 말발굽 소리와 철커덕거리는 사브르(Sabre, 軍刀)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해.

광복 후 서울 신당동의 민속학자 최상수의 집에서. 앉아 있는 어린이가 한동웅, 뒷줄 오른쪽이 한흑구 선생이다.
광복 후 서울 신당동의 민속학자 최상수의 집에서. 앉아 있는 어린이가 한동웅, 뒷줄 오른쪽이 한흑구 선생이다.

김 : 마츠다 교장이 선생님 댁을 자주 방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 아버지를 감시하고 회유하기 위해서였지. 나는 마츠다 교장이 나타나면 집 옆에 있는 언덕바지로 도망갔어.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고 모기도 성가셨지만 마츠다 교장이 더 무서웠거든.

 

김 : 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한 : 아버지는 낚시를 좋아하셨어. 집에서 5리 떨어진 낚시터를 즐겨 찾았는데 나도 아버지를 따라다녔지. 포항에 와서도 아버지와 낚시를 다녔어. 서울에 있던 최상수라는 민속학자가 연곡리까지 찾아왔던 기억이 나는군. 그분이 바나나를 들고 온 덕분에 난생처음 바나나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어. 사탕은 소련제가 맛이 좋았고.

 

최상수(1918∼1995)는 ‘조선민요집성’, ‘한국의 세시풍속’, ‘한국민속놀이의 연구’ 등을 저술한 민속학자다. 1937년 일본 오사카외국어학교(大阪外國語學校) 영어부를 졸업하였고, 1940∼1950년대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국외국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민속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민속학의 정립에 기여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참조.

 

김 : 남쪽으로 올 때는 어떻게 이동하셨습니까?

한 : 아버지는 시국에 밝았어.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 식구들을 놔두고 먼저 월남하셨지. 그리고 11월에 식구들에게 월남하라는 전갈을 보내셨어. 연곡리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염소를 가리키며 네 엄마에게 인사하라고 하시더군. 어머니가 나를 낳고는 젖이 잘 안 나와 젖동냥을 하기도 했는데 이따금 염소젖을 먹이셨나 봐. 눈망울이 선한 염소의 뺨을 비비던 기억이 지금도 선해. 얼마나 마음이 짠하던지. 가재도구를 실은 달구지를 끌고 신작로를 걸어서 강서역으로 향했지. 강서역에서 기차 소리를 처음 들었는데 꿈만 같았어. 기차 타고 개성역에 도착했고, 백천온천에서 하룻밤을 묵었지. 백천온천은 당시 한반도에서 최고로 치던 온천이야. 목욕하고 따뜻한 다다미방에서 잤는데 먹고 남은 강엿을 문지방 위에 올려놓았지. 아침에 일어나니 엿이 녹아서 방바닥까지 내려와 있던 기억이 나.

 

김 : 38선은 어떻게 넘었습니까?

한 :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제목의 글이 그렇게 많다던데, 나도 할 말이 좀 있지. 당시 11월은 꽤 추웠어. 낮에 움직이면 인민군에 걸리니까 어둠을 틈타 관목(灌木) 사이로 기어서 남쪽으로 이동했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숨죽이며 움직였어. 인민군이 한 번씩 공포탄을 쏘았는데 총소리에 놀란 꿩들이 갑자기 날아가는 바람에 깜짝깜짝 놀랐지. 그렇게 밤새도록 남쪽으로 이동해 아침 6∼7시쯤 위험 지역을 통과하니 식당 딸린 집 한 채가 보이더군. 그 집에서 쉬면서 백숙을 맛있게 먹었는데,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곧바로 설사를 하고 말았지. 거기서 트럭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했어. 나는 짐칸에 타고 있었지. 그런데 누군가 운전석에 고춧가루를 실어두었는지 그게 바람에 날리면서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어.

 

김 : 38선에 소련군도 있지 않았습니까?

한 : 트럭을 타고 한참 가니 아버지와 소련군이 보였어. 아버지가 소련군에게 ‘따바리쉬(товарищ, 동지)’라고 하니까 소련군이 통과시켜주더군. 아버지가 식구들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린 거지. 우리 식구는 미군이 운전하는 쓰리쿼터(three-quarter)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어. 숭례문 인근의 대동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중구 필동 9번지 집에서 짐을 풀었지. 필동은 고위층이 많이 살던 동네로, 우리가 짐을 푼 곳은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살던 집이었어. 방 여덟 개가 있는 이층집이었고 작은 연못과 정원, 불교식 등(燈) 두 개가 있었어. 서울시의 통역관이었던 아버지가 미군정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는 얘기지. 부엌 옆에 온돌방이 하나 있었는데, 키 작은 일본인 노부부가 그 방에 있었어. 아마 그 집의 주인이 아니었나 싶어.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손을 흔들며 떠나던 부부의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

 

한동웅

 

1938년 평양에서 한흑구 선생과 방정분 여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10월 월남해 서울 필동에서 살다가 1948년 가을 가족과 함께 포항에 정착했다.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으며, 3학년 때 4·19혁명에 앞장섰다. 대학 졸업 후 포항으로 돌아와 1962년 3월 영일중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1968년 9월 동지상고로 옮겼고, 2000년 8월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38년 6개월 교직에 있는 동안 교장으로 16년 있었다. 그 후 평안남도 도민회 회장, 포항환경운동연합 공동 대표 등 여러 단체에서 봉사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사진촬영: 김훈(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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