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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 소년, 임학(林學)을 품다”

등록일 2022-08-01 19:44 게재일 2022-08-02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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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우 ①<br/>1950년대 농촌 현실과 농대 진학
경북고 재학 시절의 이삼우(뒷줄)
경북고 재학 시절의 이삼우(뒷줄)

몇 해 전 무궁화 꽃이 피는 한여름에 아이들과 찾은 식물원의 대숲 길을 막 지나온 뒤였다. 손으로 팔꿈치와 목덜미를 훑으며 모기를 쫓던 아이들을 한 노인이 불러 세웠다. “이건 명아주 잎인데 모기 물린 자리에 발라주면 금방 사그라진단다” 하며 작은 잎을 뭉개 아이들의 팔에 발라주었다. 그가 바로 기청산식물원 이삼우 원장이었다. 이후 우리는 우연히 꽤 자주 마주쳤고, 한동안 그에게서 꽃과 나무 이야기를 들었다. 인연이었을까. 다시 만난 이삼우 원장에게 남다른 그의 삶과, 우리나라와 포항의 식물 생태계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납매 향이 숲속 가득 낮게 깔리는 식물원 안 찻집 ‘꽃멀미’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경북고등학교 교실에서 앞산이 훤히 보였어. 민둥산이었어. 어느 날 창밖으로 물끄러미 산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리고 임학을 전공하겠다는 결심을 했어. 어떻게 하든 열심히 배워서 빨리 농촌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토 녹화사업을 거국적으로 했어. 그런데 포항 일원은 이암(泥巖)층인 탓에 형편없는 민둥산이었지. 큰비만 내렸다 하면 산사태가 나고 흙탕물이 곳곳에 범람했어. 사방조림을 시작하고 10년도 지나지 않아 민둥산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

김강(이하 김) : 농대에 진학해서 임학(林學)을 전공하셨습니다.

이삼우(이하 이) : 모든 사람에게 DNA라는 것이 있지. 아마 DNA와도 연관이 있을 것 같네. 우리 집 업(業)이 농업, 그러니까 과수원을 했으니까.

김 : 농업의 DNA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이 : 우리 선고(先考)께서는 요즘 같으면 대형 슈퍼마켓 비슷한, 그런 상회를 하셨거든. 그전에는 교편을 잡으셨고.

김 : 부친 이야기로 올라가야겠군요.

이 : 선고께서는 자수성가한 분이지. 상회를 운영하시다가 후에는 과수원을 운영하셨고. 그 시절에는 과수원 하면 부자였거든. 정미소, 과수원, 양조장을 운영하면 그 마을에서는 일급 부자에 속했어. 아무튼 선고께서 과수원을 운영하는데, 과수원에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지.

김 : 손님이라 함은?

이 : 까막까치도 오고 사과 서리하는 도둑이 많이 설쳤거든. 그러면 내가 원두막에 올라앉아 까치를 쫓고, 몽둥이 하나 들고 사과를 따 먹으러 들어온 청년들을 내쫓기도 했지. 그렇게 성장하다 보니 뭐랄까 농촌 DNA가 생긴 것 같아. 농촌이 늘 마음에 있는. 그렇다고 도시 생활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원생활이 좋아졌지.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지금의 대구가톨릭대학교 자리에 조그마한 사과밭을 가지고 있었어.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선생님이 농촌 이야기, 농업 얘기를 해주셨지.

김 : 중학교 시절에 말이지요? 어떤 학생이셨습니까?

이 : 중학교 졸업식 때 내가 우등생 대표로 상을 탔어. 특등 학생은 따로 있었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봉사활동도 성실히 했지. 3학년 때는 학급 반장도 했고. 담임선생님이 대구농업중학교 출신이었어. 농업 이야기를 종종 하셨지. 농업 DNA가 농업학교를 나온 담임선생을 만난 거라.

김 : 그렇다면 중학교 3학년 때 진로를 결정하셨어요?

이 : 그때 농대 가겠다고 작정했고, 임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지.

김 : 일반적으로 중3, 고3 때 진로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않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 고3 때 나는 주로 교실에 남아 자습을 했지. 경북고등학교 교실에서 앞산이 훤히 보였어. 민둥산이었어. 어느 날 창밖으로 물끄러미 산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리고 임학을 전공하겠다는 결심을 했어. 어떻게 하든 열심히 배워서 빨리 농촌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김 ; 빨리 돌아가 나무를 키워야 한다?

이 : 그렇지. 봄방학 때 한번은 야산에 식목하러 나갔어. 사방조림(沙防造林)을 하는데, 그때는 집집마다 한 사람씩 부역으로 나갔어. 우리 집은 내가 자진해서 나갔는데, 현장에 가보니 대다수가 노인층이었어. 우리 마을 노인들 몫은 내가 대신 심어주곤 했지.

김 : 임업을 전공했으니까 더 잘하셨겠습니다.

이 : 나무 심는 일은 신바람이 나는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 다섯 배 가까이 더 심었지. 이 산을 내가 가꾸면 전부 내 거다, 이렇게 생각했거든.

김 : 포항에서 진행된 조림 행사에 대해 좀 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 :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토 녹화사업을 거국적으로 했어. 그런데 포항 일원은 이암(泥巖)층인 탓에 형편없는 민둥산이었지. 큰비만 내렸다 하면 산사태가 나고 흙탕물이 곳곳에 범람했어. 사방조림을 시작하고 10년도 지나지 않아 민둥산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

사방 사업이란 국토의 녹화와 보전, 재해방지와 경관 회복을 위해 산지 사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고 생태계가 안정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1954년 포항 지역 해안 사방을 실시했고, 1955년 포항 사방 관리처가 설치되었다. 1973년 영일, 의창 사방 사업소로 개편, 1977년 영일지구 사방 사업이 완료되었다. 포항 지역은 식생이 어려운 이암 지대로 사막처럼 황폐화되어 있었으나 사방 사업 후 세계 사방사에서 ‘영일만의 기적’으로 평가될 만큼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는 사방 사업이 성공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근대적 사방 사업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 오도리에 사방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이삼우
이삼우

김 : 나무를 키우면서 가장 먼저 이것을 심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이 있습니까?

이 : 맨 먼저 낙우송과 은행나무 묘목을 생산했지. 은행나무는 식물도감에 1번으로 나오니까. 그리고 낙우송은 하체가 굵어.

김 : 예, 저기 있는 킹트리(king tree)가 낙우송 아닙니까?

이 : 그렇지. 원뿔형으로 아랫도리가 굵고 묵직하니 아주 믿음직해.

김 : 대학교에 남아 학자의 길을 갈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이 : 그게 드라마지. 3, 4학년 때 변수가 생겼어. 내 꿈은 귀향해서 농부도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농촌 계몽도 하는 것이었거든. 그런데 그 길을 벗어날 뻔했지. 대학 시절에 정구부 주장을 했어. 책임감이 커서 정구장 관리도 도맡아 했지. 내 별명이 땜쟁이였어.

김 : 코트 파인 곳을 땜질하는?

이 : 그렇게 봉사하며 열정적으로 운동했는데 종종 게임을 같이 즐기던 교수 한 분이 임업 행정학 교수였어. 그분이 어느 날 우리나라 임업 행정을 한번 공부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 거야. 자기 연구실에 들어와서 석박사 학위도 따고 이 나라 민둥산을 제대로 바꿔야지, 하시면서 말이야.

김 : 좋은 제안이었군요.

이 : 팍 넘어갔지. 좋습니다, 하고 당장 결정했어. 그랬는데 그 교수님이 대학 본부에서 농촌교육학과 신설 특명을 받고 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된 거라.

김 : 같이 가자고 안 하시던가요?

이 : 아니. 내 방 잘 봐줘, 하고 가버린 거야. 지도교수 없는 연구실을 홀로 지키게 되었지만, 이 방 저 방 각종 연구실 들락거리며 여러 분야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어. 그게 운명이지. 돌이켜보면 인생은 무언가 미리 결정된 게 있구나 싶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임업 행정가로 서울 사람이 되었을 텐데. 고향에서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라, 하고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아.

김 : 귀향하셨을 때 부친께서 별말씀 없으셨나요?

이 : 선고께서는 자식들에게 인생의 진로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을 안 하셨어.

김 : 원장님을 믿으셨군요. 당시 농업 상황이 어땠습니까?

이 : 산업화로 우리나라의 근본 토대가 바뀌고 있을 때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이 깨지고 사공상농(士工商農)으로. 농(農)이 최하위로 밀려났어. 농촌 땅값도 참 쌌어.

김 : 농지 말이지요?

이 : 땅 팔고 도시로 떠나가는 이들이 많았기에 땅값이 날로 내려가는 판이었어.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 “형님, 저 대구로 이사 갑니다. 우리 밭 사주이소”라고 부탁하면 “얼마씩 쳐주면 되겠나”라고 했지. 상답(上畓) 값 쳐달라고 하면 흥정도 안 하고 땅문서 두고 가라고 했어. 계약서도 없이. 그런 식으로 농지를 모았어. 은행 융자를 받아서. 그런데 내가 농지를 그렇게 사 모으면서도 땅을 재물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김 : 농부니까, 농사짓는.

이 : 그렇지, 농부니까.

 

이삼우

1941년 포항 청하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청하중학교에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농사를 시작했다. 1969년 기청산농원을 열었고, 이 농원을 모태로 1991년 기청산식물원을 설립했으며, 1991년 노거수회를 창립했다. 사단법인 한국식물원협회 회장(3,4대)과 ‘영일군사’ 편집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관송교육재단 이사장과 기청산식물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수필집 ‘나는 새요 나무요 구름이요’ 등이 있다.

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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