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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전부터 갈대밭에 형성된 죽도시장”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2-07-13 19:39 게재일 2022-07-1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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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만 ①<br/>죽도시장의 초기 형성 과정
수십 년간 동고동락한 죽도시장 상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 환하게 웃는 최일만 전 죽도시장번영회장.

전통시장은 서민들의 꿈과 희망이 땀과 눈물을 매개로 영그는 공간이다. 포항 죽도시장 역시 다를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조그만 좌판 몇 개가 뻘밭에 들어서며 시작된 죽도시장의 역사는 포항 근현대사와 궤적을 함께한다. 포항수산 대표와 죽도시장번영회장을 지낸 최일만 선생은 바로 그 죽도시장에서 반세기 넘게 삶을 의탁했다. 그의 삶은 죽도시장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최일만 선생의 일생을 되짚어보는 건 죽도시장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행위와 동일한 의미일 터. 바로 이것이 그를 만나 오랜 시간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던 이유다.

주위가 사람들이 다니기 힘든 갈대밭이다 보니 규모는 작을 수밖에 없었지. 1948년쯤에는 어시장으로 배가 오갔어. 사람들이 건너다닐 다리가 없었던 탓이야. 시장 반대편 동네로 건너다닐 때는 줄로 연결된 바지선을 이용했지. 1950년대 초반까지 그랬어.

청어가 많이 잡혔고 대구도 흔했지. 냉동고와 저장시설이 없어 고기를 많이 잡아도 보관이 어려웠어. 어획된 대부분의 생선은 명태처럼 덕장을 만들어 건조해서 먹었지. 아깝게도 잡은 생선이 썩어서 버리는 경우도 흔했어.

홍성식(이하 홍) :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좀 해주시죠.

최일만(이하 최) : 1936년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 120번지에서 태어났어. 당시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후릿배가 적지 않았지. 그물을 배 두 척에 싣고 바다로 나가 펴면 육지에서 배로 연결된 줄을 사람들이 당기는 방식의 어업이야. 선친이 그걸 운영하고 관리했어. 멸치와 조그만 물고기들이 잡혔고, 그걸 주변 숲에서 말리는 걸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지.

홍 : 1945년 광복 무렵의 기억은 있습니까?

최 : 내가 열 살 때 해방되었어. 일제강점기 10년을 살았는데, 다행인지 우리 동네엔 한국 사람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던 일본인은 없었어. 장흥초등학교(현 대송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 가기 전에는 동네에서 좀 멀리 떨어진 서당에서 천자문을 공부했지. 지금으로 치면 유치원에 해당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훈장님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던 시절이야.

홍: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최: 당시 아이들은 대통령이나 장군 같은 거창한 장래 희망을 가지지 못했어. 바다가 가까우니 배를 타고 먼 나라에 가보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지. 다들 먹고살기에 바빠 구체적인 희망을 가지기 힘들었어. 나도 열 살 무렵부터 집안일을 도왔어. 밭에 비료를 뿌리고, 볏단을 지고 날랐지. 그래야 겨우겨우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어. 그즈음에 부친이 후릿배 일을 그만뒀어. 청어를 많이 잡던 시절인데,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버지 배에서 일하던 선원 세 명이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고 하더군. 아버지가 선주로서 책임을 져야 했지. 그 사고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 힘들어졌던 기억이 생생해. 그래서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아버지 일을 많이 도와야 했어.

홍 : 1948년에 고향에서 죽도시장 인근으로 이사한 겁니까?

최 :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 배의 선원 두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또 발생했어. 아버지가 사건을 마무리한 후 대송면을 떠나 죽도시장 근처 포항 시내로 이사했지. 죽도동 3번지였던 것으로 기억해.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선친께서 어구(그물, 노 등) 파는 일을 시작했지. 그때는 포항 전체를 통틀어도 엔진 없이 노나 돛으로 움직이는 배가 대부분이었어.

홍 : 죽도시장의 태동을 곁에서 지켜봤겠군요.

최 : 죽도시장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48년 즈음이었어. 광복 전에도 작은 규모지만 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 주위가 사람들이 다니기 힘든 갈대밭이다 보니 규모는 작을 수밖에 없었지. 1948년쯤에는 어시장으로 배가 오갔어. 사람들이 건너다닐 다리가 없었던 탓이야. 시장 반대편 동네로 건너다닐 때는 줄로 연결된 바지선을 이용했지. 1950년대 초반까지 그랬어.

죽도시장은 포항시 북구에 자리한 전통시장으로 부지 면적은 14만8천760㎡이고, 점포 수가 1천200여 개에 달한다. 죽도시장 역사의 출발점이 언제인지는 몇 가지 이견이 있다. 하지만 1950년대 포항 내항의 늪지대에 노점상이 모여들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되었고, 1969년 10월 죽도시장번영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과거 죽도시장은 경북 동해안과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이 모여드는 장소인 동시에 유통의 요충지였고, 지금도 그 명성이 유지되고 있다

홍 : 죽도시장에 정착한 1948년에는 어떤 생선이 주로 잡혔나요?

최 : 청어가 많이 잡혔고 대구도 흔했지. 냉동고와 저장시설이 없어 고기를 많이 잡아도 보관이 어려웠어. 어획된 대부분의 생선은 명태처럼 덕장을 만들어 건조해서 먹었지. 아깝게도 잡은 생선이 썩어서 버리는 경우도 흔했어. 유통망이 거의 구축되지 않은 데다 소금도 비싸서 보관과 판매가 힘들었지.

홍 : 당시 죽도시장의 풍경을 떠올려 보신다면.

최 : 처음 죽도시장에 들어와 작은 창고 안에 방을 만들었어. 당시에는 땔나무가 귀했지. 영일, 기계, 흥해는 산과 들에 풀이나 나무가 많아서 땔감을 구하기가 쉬웠는데, 포항 시내와 죽도시장엔 땔나무를 구할 곳이 없었어. 그래서 외할머니가 1년에 한 번씩 참나무 숯 수백 포대를 사서 창고에 보관했지. 그 숯으로 풍로를 이용해 식구들이 밥을 지어 먹었어. 남빈동에 가면 연일 쪽에서 마른 솔잎과 장작을 팔러온 나무꾼 40~50명을 볼 수 있었지. 많이 사면 나무꾼이 지게에 지고 집으로 배달해주고, 적은 양을 구입하는 사람은 땔감을 직접 들고 가야 했어.

홍 : 전쟁에 대한 기억도 있을 텐데요.

최 : 6·25전쟁이 터졌을 때 외할머니가 창고에 보관하던 숯이 모조리 타버렸어. 그뿐만 아니라 폭격으로 죽도시장 대부분이 불에 탔어. 전쟁 때 죽도시장은 지금의 3분의 1 규모였는데 좌판과 점포가 주로 칠성천(七星川) 주변에 모여 있었지. 송정동으로 피난을 갔다가 포항에서 인민군이 물러간 후 외할머니 댁으로 갔어. 그때 훨훨 타고 있는 숯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 포항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군인들의 부탁으로 소에게 먹일 꼴을 베어오던 생각도 나는군.

홍 : 친척이나 친구가 전쟁통에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최 :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어. 나는 포항에 폭탄이 떨어질 땐 피난을 가 있어 인민군을 보지 못했어. 다만 친구들과 나무하러 갔다가 길가에서 군인 시체를 본 적은 있지. 그게 국군이었는지, 인민군이었는지는 모르겠어. 아이 때였으니 철모르고 수류탄과 탄피를 주우러 다니기도 했지.

홍 : 바닷가 소년이니 수영은 잘했겠습니다.

최 : 물에 빠지면 살아남을 정도는 했지(웃음). 형산강은 폭이 넓어. 강 사이에 섬이 있었으니까. 친구들과 헤엄쳐 섬 갈대밭에 가서 갈대를 꺾기도 했지. 그 갈대밭은 사라호 태풍 때 섬이 사라지면서 함께 없어졌어.

홍 : 죽도시장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언제 시작한 것인지요?

최 : 한국전쟁 직후인 열대여섯 살 때야. 그때 아버지가 어구 장사를 했어. 고향 사람들이 아버지 물건을 사주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운영할 수 있었지. 선친과 내가 일생 경험한 것은 바다와 관련된 일뿐이었어. 당시 죽도시장엔 고등어와 청어 등을 파는 좌판 형태의 가게가 10여 곳 있었어. 냉장 트럭이 없던 시절이라 운송이 어려웠지. 그나마 생선을 자전거에 실어 나르는 것이 현대화된 형태였을 정도였어. 구룡포까지 가서 꽁치와 고등어를 실어오는 것도 큰일이었지. 그걸 좌판에서 손님들에게 팔았어. 그때를 죽도시장 형성기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아. 노인들은 힘에 부치니까 주로 젊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몇 시간씩 걸려 구룡포를 오가며 생선을 실어 날랐지. 당시 포항수협은 학산천 옆 하구에 있었어.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냉동공장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 바다에선 정어리가 엄청나게 잡혔고, 조금 지나서는 청어가 많이 잡혔어.

홍 : 70년 전에도 포항에서 청어가 많이 잡힌 모양입니다.

최 : 정치망으로 다양한 종류의 고기를 잡았지. 영일만에 포항제철이 들어서기 전에는 어장이 넓었어. 우럭, 장어 같은 토종 어종은 별로 없었고, 계절 따라 움직이는 회류성 어종이 대부분이었어. 소달구지조차 귀한 시절이라 대도동 쪽 바다에서 잡힌 고기는 조그만 배에 실어 날랐지. 당시 포항의 인구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어. 팔지 못한 생선은 잘 덮어뒀다가 다음 날 팔곤 했지. 얼음을 구할 수 없어 생선 보관도 어렵던 시절이었거든. 지금 사람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해양과학용어사전’에 따르면 정치망(定置網)이란 자루 모양의 그물에 테와 깔때기 장치를 한 어구를 어도에 부설해 대상 생물이 들어가기는 쉬우나 되돌아 나오기 어렵도록 만든 어구를 지칭한다. 잠망(蠶網), 장망(張網) 함정어법을 쓰는 어구를 말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유도 함정어법을 쓰는 것만을 뜻한다. 어구를 일정한 장소에 일정 기간 부설해두고 어획하는 어구 어법이며, 단번에 대량 어획하는 데 쓰인다. 대략 수심 50m 이하 연안의 얕은 곳에서만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홍 : 죽도시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최 : 10대 중반에 시장 사람이 되었지. 아버지를 따라 시장에 들어갔는데 무슨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 생계가 어려우니까 궁여지책으로 죽도시장에 자리를 잡았지. 그때 남빈동 사거리 쪽은 집이 몇 채 없었고, 시장 규모도 지금의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

최일만

1936년 경북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선주이자 수산업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1945년 광복 이후 죽도시장에 들어가 그곳에서 잔뼈가 굵었다. 좌판 생선 판매부터 시작해 해산물 운송, 위탁판매, 양식업, 수출업 등 다양한 수산 관련 일을 하며 죽도시장의 변화를 지켜봤다. 포항수산 대표와 사단법인 죽도시장번영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1995년 포항시의원에 당선되었고, 다음 선거에서 재선했다. 2005년 죽도시장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산업자원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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