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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시장을 무대로 살아온 인생, 후회는 없어”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2-07-27 18:37 게재일 2022-07-2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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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만 ⑤<br/>죽도시장에서 보낸 인생 회고
죽도시장(1992).
죽도시장(1992).

1990년대 중반 죽도시장은 칠성천 복개와 아케이드 설치 등을 진행하며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시의원이던 최일만 선생은 자신과 수많은 상인의 삶의 터전인 죽도시장의 환경 개선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들었다. 그와 함께 향후 수산업계가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지, 또한 포항의 청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1990년쯤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지. 운이 좋았어. 그때가 되니 죽도시장의 영세 상인들과 지저분한 골목이 눈에 띄더군. 시의원이 되면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건의하고 추진했어.

앞으로는 국영기업 형태로 양식장을 운영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바다 환경 변화로 양식하던 물고기가 집단폐사한다면 개인의 경제력으로는 버텨낼 재간이 없거든. 수산물은 후손들의 귀한 미래 식량이야. 그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국가가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나.

홍 : 시의원으로 일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나요?

최 : 당시는 칠성천 복개가 시급한 사업이었어. 지금 공영주차장이 있는 자리지. 시의원에 당선되던 1995년부터 그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어. 또 죽도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것에도 주력했어. 그때는 시의원에게 월급이나 활동비를 주지 않았지. 내 몸과 정신을 성장시킨 죽도시장과 시장의 구성원인 상인들에게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다고 믿어주면 좋겠어.

홍 : 그 당시 포항시의원 수는 몇 명이었죠?

최 : 지금과 같은 33명이었지. 기초의회는 박정희 정권 때 지방자치제가 없어지면서 사라졌다가 1995년에 부활했어.

홍 : 죽도시장 개선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최 : 그즈음 죽도시장과 죽도동의 구획정리는 큰 도로만 되어 있었을 뿐 골목은 옹색한 샛길에 불과했어. 인근 대부분이 갈대밭이라 상습 침수지역이기도 했고. 시의회에 들어가 보니 예산은 적고 주민들의 요구사항은 많더군. 죽도시장 사람들은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사업을 요구했고, 그런 요구에 부응해야 했지. 쉽지 않았어. 시의원은 두 번 한 뒤 스스로 그만뒀어.

홍 : 시의원을 해보겠다고 결심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나요?

최 : 죽도시장은 포항을 대표하는 시장인데 1990년대까지 시장은 물론, 인근의 주거환경이 정말 열악했어.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힘들게 살았지. 죽도시장과 죽도동 일대의 하수구 시설도 노후돼 해마다 장마철이면 물이 넘치곤 했어. 수리하려고 해도 도시계획에 묶여 문짝 하나 바꾸는 것도 어려웠어. 내가 70년 넘게 살아온 지역의 답답한 환경을 보면서 시의회에 들어가 이런 고충을 이야기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출마를 결심했지.

홍 : 평생 장사와 사업을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생각한 것이군요.

최 : 사실 나는 좀 덜렁거리는 성격이야. 그런데도 1990년쯤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지. 운이 좋았어. 자식들도 큰 문제 없이 잘 성장했고. 그때가 되니 죽도시장의 영세 상인들과 지저분한 골목이 눈에 띄더군. 시의원이 되면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건의하고 추진했어. 당시 시의원들은 자기 돈을 써가며 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 가슴 뿌듯했던 시절이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지.

홍 : 시의원 할 때 포항수산 대표를 겸직한 겁니까?

최 : 그렇지 않아. 시의원을 할 때는 전무에게 사장직을 넘기고 나는 회장으로 물러앉았어.

홍 : 재선에 성공했지요. 3선엔 왜 도전하지 않았나요?

최 : 그때 회갑을 넘긴 나이였어. 목적한 일을 어느 정도 이루었고, 과한 욕심은 사람을 추하게 만들지.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

홍 : 죽도시장에서 인생을 다 보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뭡니까?

최 : 칠성천이 복개되었던 순간에 행복감을 느꼈어. 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할 때는 노점상 할머니들이 걱정되더군. 죽도시장 골목과 주변 도로에는 적지 않은 70~80대 노인들이 좌판을 펼치고 장사를 하고 있었거든. 아케이드가 생기기 전부터 그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분들을 아케이드를 만든다고 내쫓으면 어떻게 하겠나? 낮에는 정해진 구역에서 물건을 팔고, 저녁에는 좌판을 한쪽으로 치워 청소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약속을 하고 계속 장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지. 그게 고마워서인지 아직도 시장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노점 할머니들이 있어.

홍 : 수산업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최 : 포항의 수산업은 1980년대까지는 좋았어. 지금 같은 어려움이 닥친 건 수자원 남획이 그 이유야. 역설적이게도 어법(漁法)이 발달하면서 수산자원이 고갈되고 수산업이 위기를 맞게 되었지. 포항 인근 바다를 오가는 회류성 어종이 크게 줄어들었어. 산란기 조업 금지를 철저하게 지키고, 치어는 잡지 말아야 해. 현대화된 어구로 큰 생선, 작은 생선을 다 잡아들인다면 언젠가는 수산물의 씨가 마를 거야. 오징어와 대게 등을 잡을 수 없는 금어기(禁漁期)를 철저히 지키도록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이런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지.

죽도시장 어판장에서의 생선 하역(2020).
죽도시장 어판장에서의 생선 하역(2020).

홍: 키워서 먹는 양식업이 대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최: 포항 일대에서 물고기 양식을 시작한 게 30년 정도 되었어. 초기에는 광어 양식을 많이 했지. 그런데 구룡포, 감포, 영덕 지역은 물고기 양식에 적합한 수온이 아닌지, 기술 부족 탓인지 잘되지 않았어. 앞으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국영기업 형태로 양식장을 운영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오염 등의 바다 환경 변화로 양식하던 물고기가 집단폐사한다면 개인의 경제력으로는 버텨낼 재간이 없거든. 수산물은 후손들의 귀한 미래 식량이야. 그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국가가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나.

홍 :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최 : 1980년대 초에 포항에서 피조개를 양식해보려고 하다가 실패했어. 당시 사업 파트너의 권유로 경상남도 진동에서 피조개 종패(種貝)를 4톤 트럭 10대에 싣고 와 바닷가 뻘밭에 뿌렸는데, 3개월 후에 다 죽고 말았지. 나의 참담한 양식업 실패담이야.

홍 : 죽도시장에서 살아온 긴 세월을 돌아보신다면.

최 : 한창 공부할 시기에 아버지를 도와 장사를 시작하며 온갖 일을 겪었고, 어느새 여든 살을 훌쩍 넘겼어. 지금도 나는 바다와 시장 일밖에 몰라. 모두들 사는 게 그렇겠지만 살다 보면 좌측통행도 하고 우측통행도 하지. 사업하다가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고, 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사들과 충돌하기도 했어. 짧지 않은 인생이었으니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 나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겠지만 개의치 않으려 해.

홍 : 앞으로 수산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해결되어야 할까요?

최 : 바다에서 미래를 찾으려는 청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어업 관련 교육기관을 만들고, 그 기관을 수료하는 젊은이들에게 저금리 대출 등 지원책이 있어야 하지.

홍 : 포항의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최 : 크게 성공한 삶도 아니고 모범이 되는 인생도 아니었으니 청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지. 하지만 아버지에 이어 평생 바다와 시장을 접하며 살아온 인생에 후회는 없어. 오랜 시간을 바쳐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을 달인이나 명인이라고 부르잖아. 포항에 그런 젊은이가 많았으면 좋겠어. 한 가지만 더 부탁하자면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해.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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