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만 ②<br/>1960년대 죽도시장의 변화 과정
변변한 건물 하나 없이 뻘밭과 시금치밭 주위로 하천이 흐르던 죽도시장의 1940~1950년대 풍경. 6·25전쟁 직후에는 적지 않은 피난민이 몰려와 시장에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다. 냉장 시설과 운송수단이 없어 어렵게 잡은 생선이 썩어가는 걸 지켜보기만 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문제의 해결책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 반세기 전 죽도시장의 상인과 포항 어민들은 어떤 방식으로 답답한 그들의 상황을 헤쳐 나갔을까?
전쟁 때 북에서 피난민들이 많이 내려왔어. 그들은 큰 밑천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장사를 했지. 그때는 뻘밭에 좌판을 깔고 앉으면 바로 자기 자리가 되었어. 아이들과 늙은 부모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사에 나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죽도시장에 적지 않았어.
그런 곳들을 구획정리해 7평 규모의 2층 건물을 여러 채 지었어. 형편이 좋았던 사람들은 자기 집 외에도 옆집을 사서 소유 토지를 넓히기도 했고. 당시는 아파트가 없던 시절이야. 가게 앞에 물건을 놓고 장사하다가 밤이 되면 살림집으로 개조한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잤어.
홍 : 처음 죽도시장에 들어갔을 때의 풍경이 기억나십니까?
최 : 물론이지. 주변은 온통 뻘밭, 시금치밭, 갈대가 자라는 하천이었어. 시장 인근에 배를 올리는 도크가 있었지. 송도다리 근처부터 죽도시장 앞까지 조선소가 늘어서 있었고, 그 옆 뻘밭에서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했어. 친구 아버지가 작은 염전을 운영했는데, 소금을 햇볕에 널어 말리고 밑에 볏짚을 깔아 제염(製鹽)을 했지. 돌아보면 아득한 추억이야.
홍 : 그게 6·25전쟁 이전이군요.
최 : 그렇지. 길가에 작은 좌판을 펴놓고 아버지가 학산에서 생선을 사다 주면 그걸 팔았어. 그 돈으로 형님은 초급대학을 졸업했지. 나는 둘째 아들이야.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돕길 원했어. 밑으로 동생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일하고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온 식구가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야 했던 시절이지.
홍 : 6·25전쟁 때도 죽도시장은 운영되었습니까?
최 : 온전히는 아니지만 상인들은 장사를 이어갔지. 조선시대에는 포항에 시장이 없었어. 연일과 오천, 흥해에 큰 시장이 있었지. 포항 시민들은 거기서 장을 봤다고 해.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중앙국민학교 옆에 일본인들이 이용하던 작은 시장이 만들어졌지. 그때 죽도시장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1930년대 들어서면서 아주 미약한 형태의 죽도시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들었어. 멀리 보면 죽도시장의 역사가 거의 100년에 이르지.
홍 : 전쟁 때 포항에도 피난민들이 왔었는지요?
최 : 과거 남빈사거리에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도개교(跳開橋)가 있었고, 칠성천을 따라 포항역 앞까지 배가 오갔어. 그 아래는 뻘밭과 갈대밭이었고. 칠성천에서 시작해 동빈부두까지 모조리 그랬지. 6·25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그곳에 연탄재가 상당히 오랜 기간 매립되었어. 그런 과정을 거치며 죽도시장이 조금씩 커졌지. 전쟁 때 북에서 피난민들이 많이 내려왔어. 그들은 큰 밑천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장사를 했지. 그때는 뻘밭에 좌판을 깔고 앉으면 바로 자기 자리가 되었어. 아이들과 늙은 부모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사에 나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죽도시장에 적지 않았어.
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5일부터 8월 20일까지 포항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른바 ‘포항 전투’다. 이는 부산 교두보 전투의 일부이자 당시 벌어진 큰 규모의 교전 중 하나였다. 포항 전투는 3개 북한 사단이 동해안으로 침투하려는 공세를 유엔군이 저지함으로써 유엔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후 고향을 떠나 피신해 있던 포항 시민들은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시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졌다.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포항을 바꾸려는 노력은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계속됐다.
홍 : 독립적인 사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까?
최 : 어려운 시절이니 젊은이들이 뭘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었어. 그저 먹고살기에 바빴지. 아버지가 고기를 사오면 그걸 건조해서 팔고, 가게 뒷바라지를 거의 7~8년 동안 했어. 그러면서 스무 살을 훌쩍 넘겼지. 1961년에 개정된 법이 ‘1도시 1시장제’였는데, 포항시가 농협(농산물 도매시장), 수협(수산물 도매시장), 채소와 과일을 파는 시장의 허가를 내줬어.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수산물 도매시장 업무 대행을 법인을 설립한 포항수산이 맡았지. 법인 설립에는 생선을 판매하던 사람들, 과일과 채소를 팔던 사람들이 더불어 참여했어.
홍 : 시장에서의 청년 시절은 어땠나요?
최 : 다른 바닷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포항 역시 운송수단이 부족했어. 낡은 미제 트럭을 빌려 생선을 싣고 와 죽도시장에서 팔았지.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쟁이 이어지면서 시장에는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못했어. 어수선했던 시절이야. 땔나무를 하거나 고기를 잡아도 옮길 방법이 없어 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믿겠나? 나의 20대는 그렇게 우여곡절 속에서 흘러갔지.
홍 : 죽도시장의 변화가 시작된 건 언제쯤인지 기억하십니까?
최 :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었지. 그전까지는 뻘밭 위에 점포와 좌판을 벌여놓으니 질서도 없고 정확한 경계도 없었어. 그런 곳들을 구획정리해 7평 규모의 2층 건물을 여러 채 지었어. 형편이 좋았던 사람들은 자기 집 외에도 옆집을 사서 소유 토지를 넓히기도 했고. 당시는 아파트가 없던 시절이야. 가게 앞에 물건을 놓고 장사하다가 밤이 되면 살림집으로 개조한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잤어.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웬만한 집은 대부분 방 한두 칸이 전부였지. 공동화장실에선 아침마다 전쟁이 벌어졌어. 대소변을 보려고 길게 줄을 섰고, 소액이지만 돈을 지불한 후에야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어. 상수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때라 구획정리사업 기간 전후로 길가마다 수돗물을 받으려고 물통이 줄지어 서 있었지.
홍 : 죽도시장에서 거래되는 생선의 종류는 어떻게 변해왔죠?
최 : 과거 포항 바다에서는 고등어, 꽁치, 오징어가 주로 잡혔고, 구룡포에서는 상어도 많이 잡혔어. 거래되는 품목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게 없어. 포항 특산물로 불리는 과메기는 일제강점기 때도 먹었지. 광복 무렵에는 청어 과메기가 많이 만들어졌어. 꽁치 과메기도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니 역사가 반세기를 넘겼지. 흥미로운 건 과메기는 엄청나게 많이 잡히는 청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해 만들었다는 사실이야. 냉장 시설도 운송수단도 턱없이 부족하던 때였으니 그랬지. 서울을 포함한 다른 지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반으로 쪼개 말린 과메기를 택배로 보내게 된 건 20년이 채 안 돼.
홍 : 죽도시장 이야기를 하면서 대게를 빼놓을 수 없지요.
최 : 1940~1950년대엔 월포리 앞에서도 대게를 잡았지. 어부들이 대게를 잡아 밤새 삶아서 새벽에 죽도시장 아버지 가게로 가져오면 소매상인들이 그걸 받으러 오곤 했어. 그때는 킹크랩도 곧잘 잡혔는데 가격은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어. 대게가 그렇게 많이 잡히던 때가 아니라서 소비도 잘 안 됐고. 다들 일하느라 바빠서 대게를 삶거나 쪄서 먹을 시간도, 삶의 여유도 없었지.
홍 : 그렇다면 언제부터 대게가 유명세를 타게 된 겁니까?
최 : 동해의 대게와 홍게가 유명해진 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야. 킹크랩은 이제 거의 전량을 러시아에서 수입하지. 내가 어릴 땐 포항 바다에서 잡힌 대게는 물론, 아이만한 커다란 킹크랩을 먹어보기도 했어. 그리고 거제도나 가덕도만큼은 아니지만 한동안 후포에서 대구가 많이 잡혔어. 포항역 앞에서 트럭에 그걸 싣고 부산, 마산, 진주로 팔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 내가 20대 중반이던 때야. 그때 먹어본 진주의 기막힌 대구뽈찜 맛이 아직 기억나는군.
홍 : 오랫동안 몸담은 포항수산의 설립 과정을 설명해주시죠.
최 : 포항수산은 내가 30대 때 합자회사로 설립되었어. 설립자는 정영달 씨야. 나는 회사가 만들어지고 1년 후에 지분을 일부 사서 참여했어. 포항수협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고, 포항수산은 당시 갓 만들어졌으니 두 곳의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 포항수협과 포항수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은 꽤 오랜 기간 이어졌어. 그렇지만 발전은 갈등 속에서 오는 것 아닌가? 독점은 횡포를 낳지만, 경쟁은 발전의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해. 그 과정에서 어획 방법이 진일보했고, 국내를 넘어 수산물의 해외 수출 길도 열렸지.
홍 : 포항수산에서 맡았던 직책은 뭡니까?
최 : 마지막에 대표까지 했어. 정영달 씨가 손을 뗀 후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인수했고, 조세창 씨가 대표를 맡았을 때 내가 전무를 맡았지. 조 대표는 오래 재직하지 못했어. 나는 포항수산 대표로 10년 넘게,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일했어.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전문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