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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짜배기를 골라 푸른 강산을 만들고 싶었지”

등록일 2022-08-10 18:41 게재일 2022-08-11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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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우 ④ 기청산식물원 개원에 얽힌 사연
기청산식물원.

봄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고개를 내민 수복초와 동강할미꽃에게 눈인사를 하며 식물원으로 들어섰다. 이 비가 그치면 활짝 피리라 말하듯 살포시 벌어진 수선화 꽃대 끝 노란 꽃잎에서 봄을 느꼈고, 겨우내 가다듬은 몸매를 자랑하듯 솟아오른 상사화의 매끈한 잎을 보며 뜨거운 태양과 마주할 상사화 꽃을 떠올려보았다. 식물원 안에 있는 찻집 ‘꽃멀미’ 통나무 의자에 앉아서 모닥불을 보고 있는 사이, 이삼우 원장이 까맣게 그을린 솥에 우려낸 감태잎차를 잔에 담아 건네주셨다.

 

농원 이름을 내가 지었어. 국토가 헐벗은 시절이라 푸름에 대한 욕구가 팽배했던 탓인지 청산, 그런데 청산은 흔한 이름 같아서 고심 끝에 앞머리에 ‘키 기(箕)’를 붙였어. 한국서 최고라는 작명가의 감정까지 받았지. 아버지가 땀과 사랑으로 일군 900여평의 과수원도 운영 했었지.

1996년에 식물원협회가 창설됐어. 1년 뒤 부회장직을 맡고 일본으로 벤치마킹하러 갔지. 가서 보니 우리나라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어. 그때부터 식물원 조성과 경영, 식물 세계에 대한 인문학적 공부를 시작했지.

김 : 부친께서 하시는 과수원에서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자주 하셨다면서요?

이 : 많이 했지. 겨울에는 기술자들과 가지치기도 하고. 일해서 번 돈이 제법 두둑했어. 수원역 앞 골목길에 허름한 빈대떡집이 있었는데 방학 끝나고 개학하면 친구들 불러서 한턱내는 거지. 시국과 인생을 논하면서 말이야. 진지하고 멋진 학창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

김 : 그런 추억이 구석구석 남아 있겠습니다. 1969년에 기청산농원을 시작하셨지요?

이 :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거지.

김 : 1991년에 기청산식물원을 개원하셨고요.

이 : 농원 이름은 내가 지었어. 국토가 헐벗은 시절이라 푸름에 대한 욕구가 팽배했던 탓인지 청산, 청산 그랬는데 청산은 흔한 이름 같아서 고심 끝에 앞머리에 ‘키 기(箕)’를 붙였어. 키는 찌꺼기를 버리고 알곡을 모으는, 옛날 농가마다 있던 곡식 선별 기구인데, 나는 푸른 것이라고 무조건 취할 것이 아니라 알짜배기를 골라서 이 강산을 푸르게 해야 한다는 뜻을 품었지. 한국에서 최고라는 작명가의 감정까지 받았고.

김 :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과 식물원에 자주 오면서도 이 근처에 ‘기청산’이라는 산이 있나 보다 했지요.

이 : 따지고 보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지. 킹트리라고 이 식물원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오래된 나무가 서 있는 구역이 야산인데 마치 키 모양이야.

김 : 킹트리, 큰 낙우송이 있는 그 산 말이군요.

이 : 그래, 그 산. 농사를 처음 지을 때는 고구마, 수박, 배추, 참외, 참깨, 유채 등 갖가지를 재배했어. 일꾼들과 더불어 똥물로 퇴비도 앙구고 소를 몰아 밭갈이도 해봤지. 닥치는 대로 체험한 셈이랄까. 1969년부터는 학교법인 과수원 관리 농장장도 했어. 그러다가 재단 이사장인 선고께서 돌아가신 후 묘한 인연으로 그 과수원을 내가 매입해 운영하게 된 거야. 아버지의 땀과 사랑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900여 평의 농장을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하소연하니까 팔촌 형님이 선뜻 자금을 빌려줘서 구입한 거지. 팔촌 형님은 아버지가 큰 상회를 경영할 때 점원으로 들어와서 훗날 그 상회를 비롯해 양조장까지 인수한 신실한 분이었어.

김; 과수원에서 식물원으로 바뀌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이; 과수원은 일 년에 평균 열일곱 번 정도 농약을 쳐야 해. 그런데 농약을 칠 때마다 엄청 괴롭고 힘든 거야. 벌레, 병균과의 전쟁을 치르는 거지. 수입은 괜찮지만 뭔가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때부터 농약을 안 치는 친환경 농법으로 바꿨는데, 완전히 실패했어.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군. 그러고 나니 나무 키우는 업종이 다시 내 마음에 들어오는 거라.

김 : 그래서 과수원을 그만두셨나요?

이 : 당장 그만두지는 않았어. 나무 생산에 점차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 거지. 그즈음부터 우리나라 산에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했어. 그전에는 민둥산이라 등산을 하면 허탈했는데 녹화에 속도를 내니까 진짜 산 같은 멋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등산을 자주 갔는데, 숨어 있던 야생초목이 눈에 띄더군. 그때 야생식물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우리 조경 세계에 우리 식물을 보급해야겠구나 하는 사명감을 느꼈어. 그래서 ‘향토 고유수목 연구개발 보급농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우리 나무에 대한 연구, 개발, 보급을 시작했지.

김 : 과수원 일과 같이하신 거군요.

이 : 그렇지. 연구해서 하나둘 개발하는데 굉장히 보람을 느꼈어. 그런데 초창기에는 잘 안 팔려서 힘겨웠지.

김 : 나무들 말씀이죠?

이 : 그 시절 조경 현장에는 향나무, 히말라야시다, 플라타너스, 이태리포플러 같은 외래종이 주종을 이루었어. 40여 년 전에 이팝나무를 2천여 그루 길러 보급했고, 그 다음에는 느티나무 모종을 십 수만 본 양묘(養苗)해서 대구·경북 일원에 뿌렸지. 수년 뒤에는 내가 판 느티나무 수십 그루를 다시 사와 몇 년간 키워서 판매하는 우스운 일도 있었어. 여기에 있는 나무는 다 팔려서 말야.

김 : 모종을 키우고 판매하면서 재미난 일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 나는 나무를 생산할 때 나무가 정당한 모양새를 잡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거든. 나무들이 자라서 비좁아지면 마음이 아파.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들이 팔려갈 즈음 내 마음이 그랬어. 애간장이 다 말라. 이것들을 어쩌나, 솎아 내버릴 수도 없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대구시장이 우리 식물원에 방문한 거야.

김 : 대구시장이요?

이 : 이상희 씨라고, 고위 관료로서는 식물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야. 나중에 내무부장관도 지냈던 분이지. 자연을 아끼고 우리 나무를 귀중히 생각하는 분이었어. 그분이 대구 시내 조경을 제대로 바꾸기 위해서 구상하는데, 거래하는 나무들이 전부 외래종이니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그러다 업자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청하에 그런 나무를 심어놓고 못 팔아서 끙끙대는 별난 농사꾼이 있다는 말을 들었나 봐. 이분이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곧바로 여기로 와서 오후 5시까지 머물다 가셨지. 지금처럼 식물원이 무성하지는 않았지만 나무들이 자라서 제법 좋아 보였던 거야. 울릉도 후박나무, 참느릅나무, 느티나무 들이 한창 잘 자라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우리나라에 토종나무를 기르는 농장이 거의 없을 때라, 그분이 온종일 나무를 살펴보고 내 얘기를 경청했지. 그렇게 해서 느티나무부터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 이팝나무가 보급되었어. 이팝나무의 가치를 알리려고 당시 식물학계 3대 거장 중 한 분인 이창복 박사를 초청해 강연회도 열었어. 야밤에 식물원 정원에서 포항 유지들에게 삼겹살 대접을 하면서.

김 : 농원을 식물원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이 : 결정적인 계기가 있지. 우리나라에 식물원이라고는 광릉에 있는 국립수목원뿐일 때였어. 그런데 1996년에 식물원협회가 창설되었어. 우리나라도 이제 식물원이 필요할 때가 되었으니 먼저 식물원협회를 만들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거지. 그래서 나의 모교 교수님 중 한 분이 뜻있는 식물계 인사들과 식물학도들을 주축으로 식물원협회를 조직했어. 협회를 창립하고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잖아. 내가 50만 원을 내놓았지. 사과 농사와 조경수 농사로 수입이 괜찮을 때였거든.

김 : 당시 50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닌데요.

이 : 내가 젊을 때는 돈을 잘 몰랐어. 기부하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1년 뒤 부회장직을 맡게 되니 식물원을 제대로 조성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김 : 식물원협회 부회장이니까요.

이 : 그렇지. 그래서 일본으로 벤치마킹하러 갔지. 도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하코네(箱根) 습생식물원이라고, 대지가 한 8, 9천 평 되는데 연간 50만 명이 다녀간다는 거라. 가서 보니 이 정도면 우리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어.

김 : 자신감을 얻으셨군요.

이 : 거기서 깨우친 것도 있어. 안내요원에게 일본에 등록된 식물원이 몇 개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335개라는 거야. 게다가 등록된 식물원에는 정부에서 풍족하게 지원해주더군. 식물원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물었더니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국민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해. 그 말이 두고두고 머릿속에서 맴도는 거야. 그때부터 식물원 조성과 경영은 물론, 식물 세계에 대한 인문학적 공부를 시작했지.

김 : 전공하셨는데 왜 다시 공부를 하셨는지요?

이 : 학교 공부는 기초공사지. 파고 들어갈수록 엄청난 세계가 있는 거야. 조물주의 창조 순위가 식물이 세 번째고, 인간은 여섯 번째라는 ‘성경’의 뜻도 깨우치게 되었지. 식물 세계는 인간이 갖고 노는 대상이 아니야. 공존해야 해. 사실 공존도 교만스러운 거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에 붙어서 살고 있잖은가. 식물에 붙어서 뜯어먹는 벌레들을 천시하지만 우리는 벌레보다 더해. 확 깔아뭉개기까지 하잖아. 돈 벌어 호의호식하려고 농약 쳐가면서 다 죽여버리고. 식물 세계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버렸거든.

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사진촬영 : 김훈(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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