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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전쟁고아의 길잡이가 된 미술

예술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도시의 매력을 찾아낸다. 도시는 예술가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고 예술가의 눈에 띈 도시는 작품 속에 남는다. 지역의 근현대사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예술사를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척박한 환경에서 지역에 미술의 뿌리를 내리고 화단(畫壇)을 꽃피운 이가 있다. 6·25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포항에서 미술을 배우고, 1970년대 고향으로 돌아와 3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한 김두호 선생. 포항 미술의 산증인 김두호 선생을 만났다. 배은정(이하 배)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김두호(이하 김) : 특별한 건 없고 화실에 나와서 그림을 그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화폭에 담지. 간혹 제자들이 찾아오면 차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배 : 선생님은 지역 미술과 함께해온 분입니다. 포항의 현대미술은 언제, 누구에게서 시작되었습니까?김 : 포항 미술의 태동기는 1950~60년대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포항 출신인 장두건 선생이 한국 화단의 거두였다면, 포항에서 활동한 1세대로는 포항중학교 미술 교사였던 서창환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야. 당시는 포항에서 미술 활동을 한 분이 많지 않았어. 장두건 선생이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가로 포항 미술을 빛낸 분이라면, 서창환 선생은 포항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며 지역 미술을 개척한 분이지.초헌(草軒) 장두건(1918∼2015)은 포항에서 태어나 메이지(明治)대학교 법학과와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한국 미술계의 거장으로 꼽히며, 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학과 학과장, 성신여대 예술대학 학장, 동아대 예술대학 학장을 거쳤다.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1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포항미술관에 장두건 상설전시관(초헌관)이 있다. 2005년부터 장두건미술상이 운영되고 있다.서창환(1923∼2014)은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나 일본 니혼(日本)대학교 예술학부를 졸업했다. 1946년 월남해 영주농고를 거쳐 1947년 포항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1959년 경북중학교로 부임하면서 대구에 정착했다. 구도자의 자세로 나무와 숲을 주로 그렸으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배 : 선생님께서 처음 접한 미술 작품을 기억하십니까?김 : 나를 직접 가르친 서창환 선생의 그림을 기억해. 대학에 들어가서야 다른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어. 서양화보다 수묵화가 친숙하던 시절이었지. 포항에서는 한때 수묵화의 인기가 굉장히 높았어. 포항종합제철이 건립되면서 외지 사람들이 포항에 몰려 들어올 때 수묵화 붐이 일었어. 덕분에 수묵화가 잘 팔렸지. 외지에서 온 동양화가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그림을 많이 그렸어. 여관에 방을 얻어놓고 그렸고, 주로 다방에서 전시하며 팔았지. 당시 권영호(전 경남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선생이 무분별한 동양화 전시를 못마땅하게 여겨 불매 운동을 벌이기도 했어. 본격적인 서양화 전시는 1981년 포항향토미술회가 만들어지면서 이루어졌을 거야.포항에서 동양화 붐이 일어난 것은 1960년대이고, 1970∼80년대에 극성을 부렸다. 당시 상황은 ‘포항시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1970년대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지역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표구화랑들의 극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표구화랑이란 작품 표구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매매도 겸하는 점포로서, 이들 업주는 당시 지역의 급속한 경제성장에서 발생하는 반사이익을 노려 지역민들의 미술에 대한 무지를 악용, 서울에서 활약하는 동양화가들을 불러들여 다방이나 여관방을 주무대로 작품 매매를 일삼았다. 이들의 무제한적인 미술 상행위는 그 후 오랫동안 지역 미술계나 미술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는 독소가 됐다.-『포항시사』제3권, 2010, 106쪽.배 : 장두건 선생이 포항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셨고, 서창환 선생은 이북 출신으로 포항에서 활동하셨다면, 김두호 선생은 포항 출신으로 포항 미술의 터전을 만든 셈이군요. 당시 포항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김 : 내 호적에 구룡포로 기재되어 있는데 정확한 건 잘 몰라. 당시 부모님이 구룡포에서 살았던 것 같아. 구룡포 읍사무소에 내 호적을 만들어놨더라고.배 :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김 : 나는 열두 살 때 전쟁고아가 되었어. 6·25전쟁 때 포항에 인민군이 들어오는 바람에 동해면 임곡까지 걸어서 피난 갔지. 형산강 너머로는 인민군이 못 넘어왔거든.배 :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누가 돌봐주었나요?김 : 구룡포에 아버지 친구가 있었어.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친구와 나누던 이야기가 기억나. 아버지 고향은 충북 청주인데, 열다섯 살 때 부모님이 혼인을 강요하니 고향을 등지고 친구와 도망갔다는 거야. 처음엔 둘이서 만주에 갔다가 나중에 구룡포로 왔다고 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친구분 집에서 좀 살았어. 그런데 어떤 분이 내게 “여기 있으면 학교도 못 다닌다”고 하더군. 학교 보내준다는 말에 그분을 따라나섰는데 선린애육원에 넣어주었어. 거기서 포항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를 졸업했지. 그때 안 따라갔으면 학교도 못 다녔을 거야.배 : 부친의 친구분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김 : 엿장수였어. 그 형편에 남의 자식을 학교에 보낼 생각은 할 수 없었겠지.배 :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나요?김 : 어머니는 동생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어. 그 후 아버지도 돌아가셨지. 그런 곡절을 겪으면서 선린애육원에 들어가게 된 거야. 동생도 일찍 죽었어. 동생이 있었으면 내 삶에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외톨이로 오늘까지 살아온 거야.배 :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역경이었을 것 같습니다.김 : 오죽했겠어. 그림 덕분에 극복했던 것 같아. 어릴 때부터 재생지에 혼자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 학교에서도 그림 잘 그린다고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지만 과정이 만만치 않았어. 고독한 전쟁이었지. 겨우 대학은 졸업했지만, 졸업만 한다고 되나.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고생을 꽤 했지. 대학 졸업하고 곧바로 포항으로 왔으면 고생을 덜했을 텐데….배 : 주민등록이 잘못돼 정년퇴임도 빨리하셨다고요.김 : 주민등록에는 1937년생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41년생이야. 일제 때 태어나서 소화(昭和) 몇 년으로 기입되어 있었거든. 1960년대 주민등록법이 시행되면서 모든 국민은 주민등록을 하게 했지.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할 때였는데, 구룡포 읍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을 만들라는 거야. 2월이라 미대 입시로 바쁠 때였어. 구룡포에 갔는데 기한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사람이 많았어. 직원에게 부탁해놓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소화(昭和) 연도를 서기(西紀)로 옮기면서 1937년생으로 잘못 적은 거야. 전화해서 고쳐달라고 하니 재판을 해야 한다더군. 학원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재판까지 할 틈이 어디 있었겠어? 젊을 때야 나이 몇 살 더 먹고 덜 먹는 게 중요하다고는 생각 못 했지. 그 바람에 공짜로 네 살이나 더 먹어버린 거야. 교직에서 정년도 빨리 맞게 되었고.배 :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운 시기가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죠?김 : 1956년 3월 포항중학교 입학식 날, 강당에서 누가 나를 부르더군. 누군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보니 서창환 선생님이었어. 손을 들고 나가보니 나더러 클럽 활동 시간에 미술반에 꼭 들어오라는 거야. 그래서 미술반에 들어가니 선배들이 많더라고. 서창환 선생님이 나더러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하면서 선배들에게 나를 잘 이끌어주라고 말씀하셨지. 그게 계기가 되어 평생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야.배 : 서창환 선생님이 어떻게 먼저 알아보신 걸까요?김 : 국민학교 6학년 때 포항 지역 학생 전시가 있었는데, 내가 수업시간에 그린 그림을 담임을 맡았던 김두익 선생님이 출품한 모양이야. 나는 그런 전시가 있는지도 몰랐고 무슨 그림이 출품되었는지도 몰라. 그때 서창환 선생님이 내 그림을 유심히 봤던 거지. 미술반에 들어가 보니 선배들이 꽤 많았는데 다들 서창환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서창환 선생님이 포항중학교에 있으면서 배출한 화가는 나와 노태룡, 이방웅 등이 있어. 나와 이방웅은 서라벌예술대학을 갔고, 노태룡은 홍익대에 갔어. 김두호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6·25전쟁 무렵 부모님을 잃고 선린애육원에서 성장했다. 포항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를 졸업했고, 포항고등학교에 다니다가 한 선교사의 권유로 경주문화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죽장중학교, 대동중·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포항미술협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1995∼1996년 지부장을 맡았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화폭에 담아낸 ‘서정적인 구상’을 지향하면서 개성적인 필치로 독자적인 미술 세계를 구축했다.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 앙데팡당(Indé pendants)전, 1986년 대구중앙미술관 초대전, 1992년 일본 히로시마(広島) 시모카마가리(下蒲刈) 란토가쿠(籣島閣)미술관 초대전, 1997년 중국 옌지(延吉)시 화원 초대전 등 국내외의 많은 전시회에 출품했으며, 2010년 포항시립미술관 초대 개인전 등 7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제5회 경북예술상 본상, 제6회 애린문화상 등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박경숙(미술평론가)

2022-06-22

궁핍한 땅에 애린과 문화의 씨를 뿌린 이명석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박이득 선생은 이분의 행적은 꼭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생(再生) 이명석(1904∼1979). 일제강점기, 광복, 분단, 전쟁 등 혼란과 파멸, 궁핍의 시기에 포항에서 애린(愛隣) 정신을 실천하고 문화예술의 씨를 뿌린 분. 1904년 영덕 삼사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고)와 일본 간사이(關西)미술원에서 수학했으며, 1933년 포항에 정착한 후 줄곧 포항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임종석(임) : 포항의 원로들이 옛이야기를 꺼내면 한결같이 이명석 선생을 언급합니다.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박이득(박) : 그분의 품이 그만큼 넓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자기 한목숨 부지하기 힘든 시절에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며 문화예술의 씨를 뿌리고 키웠으니. 그렇다고 그분이 풍족하게 살았던 것도 아닌데.임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박 : 6·25전쟁 때 포항 시가지가 초토화되고 골목마다 전쟁고아들이 넘쳐났지.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불러모아 밥을 먹이고 교육했는데 그 기관이 선린애육원이고 애린공민학교야. 그런 기관을 세우고 뒷바라지하셨지.임 : 고아들 먹일 양식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박 : 이명석 선생은 고아들을 굶길까 싶어 늘 걱정이었지. 미군이 주둔하던 오천 부대를 거의 매일 들러서 C-레이션 같은 먹을거리를 구했어. 미군이 선린애육원을 방문해서 고아들과 어울리고 수도산에 함께 소풍도 갔는데 이런 일도 다 주선했고. 애린공민학교에서 고아들과 성인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지.임 : 나환자를 보살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박 : 나환자들이 천시를 받으며 거리를 떠돌아다녔지. 이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정착촌을 만들어준 거야. 누가 그런 마음을 낼 수 있었겠어. 나환자촌이 조성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명석의 장남인 이진우(전 국회의원) 형과 한밤중에 나환자촌을 방문한 적이 있어.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 늦은 밤의 방문이라 힘들게 길을 찾고 있는데 긴 횃불 행렬이 보이는 거야. 나환자들이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횃불을 만들어 길을 밝혀준 거지. 그들을 만났더니 이명석 선생 잘 계시냐며 안부를 묻고 또 묻더군. 얼마나 고마워하던지.임 :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셨지요?박 : 다들 먹고살기 힘들 때 문화예술 단체를 만들어 예술인들을 격려하고 후원도 하셨지. 포항문화원의 전신인 포항문화협회를 결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인호, 김삼일도 힘을 보탰어. 1952년에 발족한 포항문인협회에도 큰 힘이 되었고, 포항예총의 기반도 닦았지. 포항 문화 행사의 효시인 개항제가 1966년 처음 열렸는데 대회장이 이명석 포항문화원장이었어. 그분의 역할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지. 사회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지역에 건강한 문화예술을 뿌리내려 보자는 열정은 뜨거웠고, 이걸 이끌어준 분이 이명석 선생이지.임 : 당시 문화계 인사들이 청포도다방에서 자주 모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박 : 이육사가 포항의 미츠와(三輪)포도원에 왔다가 ‘청포도’란 시를 구상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 사진작가인 박영달이 문화계 인사들의 사랑방인 다방의 문을 열면서 그 이름을 이육사의 ‘청포도’에서 착안한 거야. 그 다방에서 이명석, 한흑구, 박영달이 자주 어울리며 포항의 예술 시대를 열었고, 나는 그때를 ‘청포도 살롱 시대’라고 부르지.임 : 이명석 선생의 발자취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박 : 지금은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포항시민헌장’을 이명석 선생이 기초했고 손춘익이 완성했어. “대한의 새벽날이 밝아오는 이 고장”으로 시작하는 ‘포항시민의 노래’와 포철공고, 오천중학교 등 10여 개 학교의 교가를 작사하기도 했지. 그만큼 지역에 대한 애정이 깊었어. 여러 사람이 이명석 선생의 감화를 받았는데, 특히 손춘익과 김삼일, 나는 선생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모셨어. 김삼일은 포항 근현대사 100년을 다룬 연극 ‘형산강아 말해다오’를 2014년 무대에 올리면서 이명석, 하태환, 박일천 등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의 삶을 다뤘지.1998년 포항 지역 문인들이 뜻을 모아 이명석이 자주 찾던 수도산 덕수공원에 문화 공덕비를 건립했다.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이사장 이대공, 이명석의 삼남)은 이명석의 뜻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1년부터 애린문화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으며, 재생백일장도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이명석의 일대기를 정리한 단행본 ‘재생 이명석’은 2018년 발간되었다.대담을 마무리하며 포항의 옛 풍경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부분 사라져버린 포항의 아름다웠던 풍경을 선생만큼 실감 나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선생의 수필 한 대목을 옮긴다.물의 땅 영일만과 형산강가에서 자라고 늙어 파파노인이 되어 가는데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자꾸만 고향이 그리운지 모르겠다. 나는 고향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고향을 잃어버렸다. 언제 어떻게 고향을 잃어버린지도 모르겠다.형산강 언덕에 서서 어디를 둘러보아도 내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의 고향이 아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고향은 어디로 갔을까? 형산강 그 푸른 강변의 연가는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이른 봄 영일만의 그 물빛으로 토하는 봄의 소리는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박이득, ‘영일만, 그 푸른 해변의 노래’ 월간문학, 2017년 2월호, 231쪽 임 : “고향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고향을 잃어버렸다”는 문장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박 : 포항 시내를 걷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있어. 어릴 때 마음껏 뛰어놀던 그 아름다운 자연이 시멘트로 아스팔트로 거의 다 뒤덮였으니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고향에서 향수병을 앓고 있는 셈이지.임 : 사라진 옛 풍경 중에 송도를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가끔 접하게 됩니다.박 : 시내와 송도 사이에 검정색 콜타르를 칠한 나무 다리가 있었는데 이걸 검둥다리라 불렀지. 검둥다리를 건너면 길 양편에 수십 년 된 측백나무 가로수가 하늘을 덮고 있었어. 여기를 지나가면 한기를 느낄 정도였지. 숲의 터널을 지나가면 높다란 모래언덕이 나타났고, 여기에 올라서면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어.임 : 송도 송림의 풍경은 어땠습니까?박 : 내가 어릴 때 송도 송림이 10만 평쯤 되었을 거야. 큰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빽빽해서 혼자 다니기는 무서울 정도였어. 다람쥐, 청설모, 노루, 꿩이 뛰어다녔고 온갖 새들이 울어댔지.임 : 해도(海島)에서 성장하셨으니 그곳 풍경이 눈에 선하겠습니다.박 : 해도뿐만 아니라 송도, 죽도, 대도, 상도는 온통 갈대밭이었지. 갈밭 습지는 새들의 낙원이자 동해안에서 가장 큰 철새 도래지였어. 개개비, 물떼새, 도요새, 청둥오리, 기러기, 두루미가 계절마다 하늘을 덮었는데 한마디로 장관이었지. 여기에 염전이 많아 동해안의 최대 소금 산지이기도 했고.임 :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군요.박 : 포항은 강과 섬, 호수의 도시지.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 도심으로 배가 다니고 조개를 잡고 낚시도 하고 멱을 감았어. 그 후로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물이 오염되고 강과 호수를 매립하거나 복개하면서 옛 풍경을 거의 잃어버렸지.임 :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박 : 복개한 도심 하천을 복원한다는 소식이 있던데 잘되었으면 좋겠고, 포항의 옛 풍경을 되찾을 수 있도록 시민 모두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 포스코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되겠고. 해도 갈밭 사이로 숭어 새끼들이 헤엄쳐 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끝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박이득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2021-11-09

“동지교육재단 교가 작사자는 시인 정지용”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하태환(1916∼1991)은 중·고등학교 네 곳과 전문대학을 설립한 교육자다. 정치인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세상에 남긴 유산은 교육 쪽에 무게가 좀 더 실린다. 그의 분신인 동지교육재단과 포항대학 설립에 얽힌 일화를 들어본다. 임종석(임) : 선생님은 하태환 선생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박이득(박) : 우리 아버지가 포항 해도(海島) 토박이어서 이름 있는 분들이 집 안에 자주 드나든 덕분에 그들의 행적을 남들보다 많이 알게 되었지. 하태환 선생은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여서 우리 집에 자주 오셨어.임 : 1930년대에 유학을 갔는데 이유가 궁금합니다.박 : 지금이나 그때나 대개 가정 형편이 좋아야 외국 유학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분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 그런데 10대 후반에 고생스러운 무전여행을 하다가 서울 용산에서 한강 다리를 건너기 위해 한강 둑에 다다랐을 때 보트 놀이를 즐기던 대학생들을 보게 된 거야. 그 모습을 보고는 고학을 해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그게 계기가 되어 두 형이 자리잡고 있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지.임 : 호(號)가 평보(平步)인데 어떤 뜻입니까?박 : 1935년 하태환 선생이 교토 료요(兩洋)중학교 4학년일 때 간사이(關西) 지역에 큰 태풍이 닥쳐. 그때 학교 건물이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큰불이 났지.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갔으면 되는데 미처 피하지 못한 하급생을 구하려다 다리를 다치고 말았어. 그래서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가 되었지.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자신의 호를 생각했다고 해. 수학의 기하공리(幾何公理) 중에 세 개의 꼭짓점은 평면을 이룬다는 명제가 있어. 두 발과 지팡이가 세 개의 꼭짓점이 되어 평면의 삼각형을 만들며 걷는다고 자신의 호를 ‘평보’라고 지었다고 해. 비록 다리는 불편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걷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지. 임 : 하태환 선생은 동지중·고등학교와 동지여자중·고등학교, 포항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네 곳을 운영하는 학교법인의 명칭도 동지교육재단입니다. 동지(同志)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했나 봅니다.박 :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모아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 그래서 학교 이름도 동지라고 한 거야. 나를 볼 때마다 “포항중학교 가면 안 돼. 동지로 와야 해”라고 말했지. 하태환 선생은 일본 교토에 있는 리쓰메이칸대학을 다녔는데, 이 도시에 도시샤(同志社)대학이라고 있어. 시인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1917∼1945)가 이 대학 영문학과에 다녔고, 두 분의 시비가 이 대학 교정에 있어. 하 선생은 도시샤대학을 무척 좋아했나 봐. 그래서 이 대학의 이름을 자신이 세운 학교에 적용한 측면도 있지. 과거 한동안 동지중학교의 교표(校標)가 세 개의 역삼각형이 교차한 모양이었는데 도시샤대학의 교표와 비슷해. 그리고 내가 동지중학교에 입학해서 교가를 배우는데 작사자와 작곡자 이름이 없었어.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서 동지상고 김영 교장을 우연히 만나 얘기를 듣게 되었지. 김 교장이 조심스럽게 교가 작사자가 정지용 시인이라고 말하는 거야. 솔직히 깜짝 놀랐지. 정지용 시인이 ‘납북 문인’으로 묶여 있어서 그의 이름을 꺼내는 게 금기시될 때 이야기거든.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교가 작사자를 밝히지 못하다가 납·월북 문인이 해금된 후에야 공개되었지.임 : 그렇다면 정지용 시인에게 교가 작사를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되겠군요.박 :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고향인 포항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싶으니 교가를 지어달라고 정지용에게 부탁했고, 개교 전에 교가를 받아서 갖고 있었던 거지. 두 사람 사이의 공통분모는 일본 교토에서 유학했다는 것이고. 그런데 6·25전쟁이 터진 후 정지용이 납북되고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납북 문인’으로 분류되었어. 그리고는 납·월북 문인 작품이 해금될 때까지 정지용을 언급할 수 없게 된 거야.동지교육재단의 교가 작곡자는 해방공간에서 이름이 높았던 이건우(1919∼1998)다. 이건우는 김순남(1917~1986), 윤이상(1917~1995)과 함께 활동했으며,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사정으로 동지교육재단 각급 학교는 개교 이후 오랫동안 교가의 작곡자를 공개할 수 없었고, 납·월북 예술인이 해금된 후에야 공개했다.박 : 개교하기 전에 교가의 작사자와 작곡자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교가를 부탁할 수 있겠지. 더군다나 전쟁이 터지고 남북이 분단된 상황인데. 그런데도 교가를 원곡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은 하태환 선생이 남다른 소신과 뚝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동지교육재단 교가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과 작곡가가 만들었으니 최고의 교가가 아닐까.임 : 말씀을 듣고 보니 동지교육재단이 평범한 교육기관으로 출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박 : 동지를 모아서 학교를 설립했고 동지들이 교편을 잡았지. 그렇게 만든 학교가 자유당 아성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1950년대 동지교육재단의 교직원과 학생 중 적어도 70%는 설립자 하태환의 열렬한 지지자였어. 학부모와 포항 시민도 동지교육재단에 거는 기대가 컸지.임 : 포항대학은 수산초급대학으로 시작하는데 혹시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려는 시도는 없었는지요.박 : 애를 많이 썼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뜻대로 안 되었지.임 : 하태환 선생에 대해 더 하실 이야기는 없습니까?박 : 리쓰메이칸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는데 문학에도 안목이 높았지. 한흑구 선생을 포항수산초급대학 교수로 모셨고, 포항전문대학을 나온 손춘익이 1966년 조선일보와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니까 동지상고 교사로 채용했어. 사람 보는 눈이 있고, 사람을 챙길 줄 알았지. 임 : 동지교육재단이 한때 농구부를 운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박 : 1951년 남인우라는 영어 교사가 동지중학교에 부임하면서 동지중학교와 동지여중에 농구부를 만들었어. 1950년대 중반에 동지여중이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해 전국을 깜짝 놀라게 했지. 그 핵심 선수가 이귀복, 이춘자야. 둘 다 영흥국민학교를 졸업했고, 나와는 국민학교 동기지. 당시 서울에 농구부가 있는 여자고등학교는 이화여고와 숙명여고 두 곳뿐이었어. 두 사람은 이화여고에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했는데 내가 다니던 인창고등학교와 가까이 있어서 내가 이화여고로 찾아가기도 했지. 두 사람은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맹활약했어. 그때가 우리나라 여자 농구의 전성기였거든. 여자 농구의 전설인 박신자와 함께 세계대회 2위를 차지하기도 했지. 윤보선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청와대 방문도 했고.임 : 체육 이야기가 나온 김에 거의 잊혔지만 기록에 남겨야 할 체육계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박 : 1950년대 영일중학교가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한 걸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연일읍에 초가집밖에 없던 시절의 이야기지. 영일중학교가 축구 명문인 서울 중동중학교와 결승전에서 맞붙었는데 다들 중동이 이길 거라고 예상했지만 영일중학교가 1 대 0으로 이긴 거야. 축구계가 발칵 뒤집혔어. 대체 영일중학교가 어디에 있는 학교냐고 물어보고 난리가 났지.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더니 패싸움이 벌어진 거야. 그때 영일중학교 설립자이자 국회의원인 김익로가 경찰을 동원해 영일중학교 선수들이 경기장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조치했지. 아마 대한민국 건국 후에 읍(邑) 단위 중학교가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기록일 거야. 우승한 선수들을 계속 키워주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어. 박이득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11-02

역사의 파도 넘어 포항에 정착, 수필 명작 남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한흑구는 해방공간의 소용돌이에서 남한으로 향한다. 미군정에서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잡지만 이를 내팽개치고 포항에 정착한다. 평양에서 미국을 거쳐 다시 평양에서 서울로 향한 ‘검은 갈매기’의 여정은 포항 바닷가에서 마무리된다.임종석(임) : 한흑구는 귀국 후 평양에서 활동하게 되는군요.박이득(박) : 광복 무렵 고당(古堂) 조만식(1883∼1950)을 만나 활동해. 하지만 공산당이 한흑구처럼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은 평양 외곽으로 격리하지. 한흑구와 조만식을 따르던 젊은이들이 조만식에게 남한으로 가자고 권하지만 조만식은 북쪽에 남겠다고 해. 그리고는 트럭 한 대를 구해 젊은이들에게 남한으로 가라고 하지. 한흑구는 그 트럭을 타고 남한으로 왔는데, 그때 조만식과 함께 오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여러 번 말했어.한흑구의 부친인 한승곤과 흥사단을 이끈 안창호, ‘조선의 간디’라 불린 조만식은 한흑구를 이해하는 열쇠 말이다. 그리스도교에 바탕한 안창호와 조만식의 사상과 행동에는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 안창호가 별세하자 조만식이 일제의 방해를 뚫고 장례위원장이 되어 장례를 집행한 것도 짚어볼 대목이다. 조만식이 월남을 거부한 상황은 아래 글이 상세하게 설명한다.그해(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한국의 신탁통치를 가결하자 여기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진영과 찬성하는 공산주의 진영이 나뉘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민주당(당수 조만식)의 결말을 가져왔다.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와 김일성은 수차에 걸쳐 조만식에게 신탁통치를 지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조만식)는 끝까지 거부하였고 이로써 1946년 1월 5일 소집된 소위 평남인민정치위원회는 위원장인 조만식을 축출하고 그를 ‘반민족주의자’로 날조 매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참여했던 이윤영 등 민족진영은 월남하여 서울에서 조선민주당을 재건함으로써 평양에서의 민족진영 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1월 5일 회담 이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조만식은 그를 구출하려는 청년들이나 그를 방문한 미군정청의 브라운에게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겠소”라며 월남을 거부한 채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였다. -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임 : 남한으로 온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박 : 미군정이 들어서고 서울시장의 통역 담당 보좌역으로 발탁돼. 당시에 그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어. 그런데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 자리가 편안할 리 있었겠나. 온갖 청탁과 유혹, 압박이 있었겠지. 한흑구 성품에 그걸 어떻게 견뎌내겠어. 결국 서울시장에게 부탁해 미군정 도서관으로 옮기게 돼. 이때 영미시를 번역해 발표하고 나중에 이 원고를 묶어 출간했지. 미군정 때 서울에서 문학 하는 사람치고 월급 받는 사람은 한흑구가 거의 유일했어. 한흑구가 월급 받는 날이면 문인들이 모여 거하게 한잔했다고 해. 한흑구는 월급의 반쯤은 배고픈 문인들에게 나눠주었어. 이승만이 한흑구에게 공보처장을 권했는데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고 자신은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임 : 포항과는 연고가 없을 텐데 어떤 이유로 오게 되었습니까?박 : 문인들과 고적지를 순례하려고 경주에 왔다가 포항이 좋은 곳이라는 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일행과 떨어져 포항에 잠시 온 게 계기가 되었지. 한흑구가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당시엔 난치병이었어. 의사가 바닷가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요양하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영일만을 보고는 바로 여기다 싶었던 거야. 그래서 서울로 간 후 곧바로 식구를 데리고 포항으로 왔지. 그때가 1948년이었어.한흑구가 포항의 바다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그의 첫 수필집인 ‘동해산문’(일지사, 1971) 서문에서 느낄 수 있다.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동해변으로 온 지가 꼭 20년이 되었다.거의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어 보았다.인생 자체를 항해에 비하지만, 나는 바닷가에 혼자 서서, 나의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임 : 포항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셨습니까?박 : 처음에는 미군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1958년에 포항수산초급대(현 포항대)에서 교수로 모셔갔고, 여기서 정년을 맞아. 그후에 효성여대에서도 강의했지.임 : 지역 문화예술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박 : 포항에 정착한 뒤 ‘서울 문단’과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지만 ‘서울 문단’과 이어진 유일한 통로였지. 지역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어. 시인 박경용, 아동문학가 손춘익, 김일광과 함께 ‘흐름회’를 만들어 문화예술계를 이끌었지. 한흑구 덕분에 지역 문화예술의 수준이 높아졌고, 한흑구 없이는 포항의 문화예술을 이야기하기 힘들어.문단에서 한흑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동해산문’에 실린 서정주의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는 1930년대에 6여 년의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돌아온 뒤 몇 해 동안 우리 시단에 그 글을 보이더니, 이래 1945년의 해방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우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지내 왔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시 붓과 소주를 벗해 서울에 나타나서 1950년의 6·25 사변 가까울 무렵까지 우리를 기쁘게 하더니, 또 이내 어디론지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 뒤에 들으니 신라 고도 경주에서 산 하나 넘어 포항의 바닷가에서 누가 그를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20여 년, 그는 그의 글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벙글거리는 항시 동안(童984F)의 얼굴도 우리 앞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동해 바닷가의 이십 수년의 정신의 체험을 문장화하여 이 정선(精選)한 수필집을 우리에게 다시 보이게 되었다. 한흑구의 문학적 위상은 다음의 글에서 가늠할 수 있다.그의 작품 활동은 그 시대의 신문이나 잡지에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매우 활발했으며, 그것도 문학 전반에 걸쳐진 것으로 보이나, 특히 1930년대에서 비롯되는 미국시 및 그 밖의 역시(譯詩) 활동은 8·15해방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휘트먼과 흑인시의 번역 소개는 물론, 미국 문학 및 작가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져 있음은 당시의 다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도미(渡美) 유학까지 했었던 경력으로 미루어 그의 전신자적(轉信者的) 역할은 보다 정확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김학동,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일조각, 1981, 206∼207쪽.임 : 환갑이 지나서야 ‘동해산문’, ‘인생산문’ 두 권의 수필집을 냈습니다.박 : 출간 과정에서 손춘익이 역할을 많이 했지. 한흑구는 책을 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서상은, 손춘익, 김삼일, 김일광이 한흑구를 잘 모셨지.임 : 부인 방정분 여사도 지역에서 교편을 잡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셨지요.박 : 한흑구는 누님 두 분과 여동생이 있었어. 이화여전 성악과를 다니던 여동생이 동기동창을 한흑구에게 소개했지. 그분이 방정분(1913∼1989) 여사야. 황해도의 이름난 부잣집 딸이었고 홍난파와 같이 공연도 했어. 포항의 공립학교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지. 포항제일교회 합창단을 만들기도 했고.임 : 가까이서 느낀 한흑구는 어떤 분이었습니까?박 : 점잖은 신사였지. 얼마나 이야깃거리가 많겠어.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는 잘 안 했어. 그것이 아픈 일이든 좋은 일이든. 자기 자랑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지. 포항에 한흑구가 왔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야.일제강점기에 많은 문인이 친일 대열에 합류하지만 한흑구는 이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는 헌사를 바쳤다. 미국 시절부터 상당한 양의 시와 수필, 소설, 평론, 번역시를 발표했지만 그의 이름으로 발간된 책은 두 권의 수필집과 한 권의 편역서(‘현대미국시선’(1949))뿐이다. 2009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흑구 문학선집’이 나왔고, 2012년에 두 번째 문학선집이 출간되었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를 아는 사람은 많을 수 없지만, 그를 접하게 되는 순간 그 품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실감하게 된다. 한흑구의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박이득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11-01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은 바닷가에 날아온 검은 갈매기

수필가인 박이득 선생은 포항문인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한국예총 포항지회장을 맡으며 지역 문화예술의 수준을 높이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문화예술 분야에 많은 이야기가 있겠으나 우선 흑구(黑鷗) 한세광(1909∼1979)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어보았다. 그의 삶과 문학에는 그만한 무게와 깊이가 있는 까닭이다. 임종석(임) : 한흑구는 문학적 위상에 비해 조명과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필 ‘보리’로 유명한 분이시지요.박이득(박) : ‘보리’는 1955년 동아일보에 발표했는데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수필 문학의 백미(白眉)지.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흑구, ‘보리’ 부분박 : 한흑구를 이해하려면 그분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특히 부친 한승곤(1881∼1947)을 알아야 해. 평양에서 최초로 목사가 된 분으로 기독교계에서 명성이 높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에 평양 산정현교회 제1대 담임 목사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1911년에 ‘105인 사건’이 터져.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이지. 이때 평양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 항일세력이 많이 검거돼. 이 사건에 연루된 한승곤은 1913년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에서 흥사단(興士團)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데 의사장(議事長) 등 중책을 맡지.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와 가까웠고, 장이욱(1895∼1983)과 함께해. 장이욱은 서울대학교 총장을 하고 미국대사도 한 분이야. 독립운동사 자료를 보면 한승곤, 안창호, 장이욱이 함께한 사진이 있어. 1936년 귀국한 한승곤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흥사단 동지들과 투옥돼. 1947년에 돌아가셨고,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지.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다. 1937년 5월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운운’이라는 인쇄물을 산하 국내 35개 지부에 발송했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모두 181명이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최윤세, 이기윤은 옥사하고, 김성업은 불구가 되었다. 안창호도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별세했다. 다른 수감자들은 5년여에 걸쳐 석방되지만 사건 관련자 상당수가 친일파로 전락하고, 흥사단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미군정청 통역관 시절의 한흑구(1946). 임 : 한흑구가 미국으로 간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겠습니다.박 : 그렇게 봐야지. 평양에서 태어난 한흑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가 1929년 스무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노스파크대학교(North Park Univ.)에서 영문학을,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Temple Univ.)에서 신문학을 공부해. 검은 갈매기, 흑구(黑鷗)라는 필명은 일본 요코하마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 갑판에서 떠올린 거지.하룻밤을 자고 나서 갑판에 올라, 갈매기가 다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배꼬리 쪽을 살펴보았더니, 웬일인지 검은색의 갈매기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긴 나래를 펴고 쫓아오고 있었다. 그 검은 갈매기 한 마리는 하와이에 올 때까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그냥 한 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옛것을 버리고 새 대륙을 찾아서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이런 구절을 일기에 쓰다가, 문득 나의 필명(筆名)으로 사용하기로 생각했다. (중략)나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여야 하는 갈매기와도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한흑구, ‘나의 필명(筆名)의 유래’(1972) 부분임 : 네 살 때 헤어진 아버지를 스무 살에 만나러 미국으로 가는군요. 미국 생활도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박 : 나라 잃은 처지에 이역만리에서 고학했으니 오죽했겠어. 간혹 거친 흑인들과 부딪쳤는데 주먹이 강해서 밀리지 않았지. 선천적으로 체력이 좋았고 축구도 잘했어. 고향 친구인 안익태를 만나 한동안 함께 지내며 도움을 주는데, 그 이야기는 수필에 실려 있지.그 수필은 ‘인생산문’(일지사, 1974)에 실린 ‘예술가 안익태-젊은 시절의 교우기’를 말한다. 이 글을 보면 한흑구가 안익태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한(한흑구) 군! 자네 학교 음악과에 잘 말해서 나를 장학생으로 좀 넣어주게나. 자넨 총장을 잘 알지 않나.”안은 침착한 태도로 말하였다.안의 말대로 나는 찰스 베리(Charles Buery) 총장을 만나 안을 소개해서 내가 다니고 있던 템플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에 외국인 장학생으로 무난히 넣을 수 있었다.임 : 이 시기에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요.박 : 교민단체에서 발간한 ‘신한민보(新韓民報)’라는 신문과 흥사단 계열에서 발간한 ‘동광(東光)’이란 잡지에 여러 편의 시와 번역시, 평론, 소설을 발표했지.‘신한민보’는 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로 창간되었으며,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교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안창호와 관련이 깊고, 1914년에 춘원 이광수가 이 신문의 주필로 내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에 가지 못하고 귀국한 일화가 있다.‘동광’은 1926년 5월 20일자로 창간된 종합잡지다. 안창호가 1913년 미국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흥사단을 배경으로, 또 같은 계열의 단체로 1926년 1월에 조직된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성격을 띠고 발행되었다(최덕교, ‘한국잡지 백년 2’, 현암사, 2004.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이광수가 창간을 주도했고 주요한이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임 : 모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1934년에 귀국하는데, 그 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게 됩니까?박 : 한흑구의 모친은 한흑구가 귀국한 1934년에 작고해. 한흑구는 평양에 머물면서 ‘대평양(大平壤)’과 ‘백광(白光)’의 창간에 참여하고 문학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백광’에는 쟁쟁한 문인들이 참여했어. 이효석이 평양에 왔을 때 한흑구가 ‘백광’에 원고를 부탁했고 이효석이 승낙했는데 마감을 안 지키더라는 거야. 그래서 한흑구가 이효석을 찾아가 받아낸 원고가 ‘낙엽을 태우며’라는 수필이라고 해. 미국에서 돌아온 한흑구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친다. 1935년 한 해만 보더라도 ‘신인문학’에 시 ‘밤의 사막’(3월), ‘님은 나의 산’(6월) 등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에 ‘D.H. 로렌스(Lawrence)론’(1935. 3. 14∼15), ‘조선중앙일보’에 ‘윈덤 루이스(Windham Lewis)론’(1935. 9. 17∼9. 22), ‘조선문단’에 ‘바이런(Byron)의 생애와 그의 시’(1935. 5)를 발표했다.1934년에 창간된 ‘대평양’과 1937년에 창간된 ‘백광’은 평양에 기반한 종합잡지다. ‘대평양’은 1934년 11월 11일 창간된 종합잡지로 편집 겸 발행인은 전영택, 주간은 한흑구다. 한흑구는 창간호에 창간사, 시, 소설, 논문, 잡문 등 10편 이상을 수록했다(최덕교, 위의 책 참조).‘백광’은 1937년 1월부터 그해 6월까지 통권 6호를 발간했으며, 평양에서 조선 전역을 상대로 발행된 최초의 종합잡지다. 전영택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편집 실무는 주간이었던 백선행의 양아들 안일성과 한흑구가 담당했다(‘한국 근대문학 해제집 III-문학잡지(1927~1943)’, 현암사, 2017, 117∼119쪽 참조). 한흑구는 창간호에 ‘명사순례기’와 소설 ‘인간이기 때문에’를 발표했다.한흑구의 고향 선배인 소설가 전영택(1898~1968)은 1930년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했고 한흑구와 가까웠다. 두 사람은 귀국 후에 평양에서 ‘대평양’과 ‘백광’의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임 : 연보를 보면 1937년에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속되는데 어떤 이유입니까?박 : 흥사단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수양동우회 사건’이지. 부친 한승곤도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초를 당해. 그런 맥락에서 한승곤, 한흑구 부자(父子)를 이해하려면 흥사단을 깊이 알아야 해. 박이득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10-26

역사의 격랑을 거치며 정치인들 운명도 엇갈려

1960년 4·19혁명 후에 국회가 자진 해산하면서 7월 29일 민의원·참의원 의원을 동시에 선출하는 총선거가 실시된다. 제5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서는 3개 선거구 모두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다. 포항시 이상면(42·대학 중퇴), 영일군 갑구 최태능(51·농업·중졸), 을구 최해용(39·수산업)이 당선자다. 초대 참의원 선거는 대선거구제로 치러지는데 포항 지역 출신 후보 중에는 민주당 이원만(55·무역협회장), 무소속 김장섭(49·변호사·민의원)이 당선된다. 임종석(임) : 4·19혁명 후의 정치 상황으로 들어가기 전에 초대 포항시장을 한 최기봉이 어떤 분인지 들어보았으면 합니다.박이득(박)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에 초대 포항시장으로 8개월 정도 근무했지. 포항시장으로 있으면서 시 행정을 현대식으로 바꿔놓은 공이 있어. 포항시장을 마치고 나중에 워커힐호텔 사장이 되었지.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이 한국에서는 놀 곳도 쉴 곳도 없으니까 주로 일본으로 갔어. 일본에 가서 쉬고 놀며 돈을 쓰니까 한국에서도 그런 게 가능하도록 워커힐호텔을 만든 거야. 워커힐은 미군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국고도 채우기 위해 만든 일종의 국책 호텔인 셈이지. 최기봉이 그 호텔 사장을 맡았으니 정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던 거라고 할 수 있겠지.임 : 4·19혁명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민주당이 포항시, 영일군 지역구를 휩쓸게 됩니다. 포항, 영일 지역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지요. 당시의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겠는데, 그 와중에 자유당 소속이던 김장섭이 4대 민의원 의원에 이어 처음 치른 참의원 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는 게 눈에 띕니다.박 : 앞서도 말했지만, 김장섭은 어릴 때부터 수재로 소문이 파다한 인물이었지. 일본에 유학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어. 일제강점기 때부터 판사·검사를 했고 1954년에 서울지검 검사장을 했지. 제1공화국 말기에는 내무부와 농림부에서 차관을 지냈고. 1960년 제4대 총선 보궐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는데 4·19혁명 후에 참의원 의원에도 당선되지. 1963년 6대 총선과 1967년 7대 총선에서도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는데, 포항, 영일 지역에서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정치 생명을 이어간 거의 유일한 인물이야. 오천중학교와 동해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어. 일 처리가 깔끔하고 점잖아서 시중의 평가가 좋았지.임 : 선생님은 김장섭과 인연이 없습니까?박 : 젊은 날에 친구인 이대공이 김장섭의 둘째 아들인 김종원과 인사를 시켜주더군. 한때 김종원과 가깝게 지냈지.임 : 제5대 민의원 의원을 지낸 최태능은 어떤 인물입니까?박 : 흥해 출신으로 휘문고를 나왔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 인맥이 넓었고 주변 사람에게 후해 인심을 많이 얻었어. 제헌의회 때부터 4대 민의원까지 영일군 갑구에서 계속 출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4·19 후에 5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지. 하지만 5·16이 일어나면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국회의원 임기가 불과 9개월 정도밖에 안 돼. 그 후 흥해중학교 재단 이사장을 맡아 인재 양성에 힘쓰지.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별 비례대표제가 도입되고 지역구 의석은 감소되며, 지역사회에서는 포항시, 영일군, 울릉군을 합해 국회의원 1인을 선출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김장섭 후보가 당선되었다.임 :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고, 그해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포항에서는 민주공화당 김장섭, 민중당 하태환, 신민당 최원수, 민주당 이상면이 출마해 김장섭이 당선되는군요.박 : 포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출마해 선거가 치열했지.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볼만한 선거였어. 득표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고.이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김장섭 4만 7천868표, 민중당 하태환 3만 9천488표, 신민당 최원수 2만 411표, 민주당 이상면 1천361표를 득표해 김장섭이 당선된다. 김장섭이 종합제철 공장을 월포에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1번으로 내건 게 이채롭다.임 : 제7대 선거에서 비례대표를 선출하는데 포항 출신인 민주공화당 이성수가 순위 23번으로 당선됩니다.박 : 이성수는 대송 사람이지. 어릴 때 별명이 장개석이었어. 그만큼 머리가 좋았다는 이야기지. 대송국민학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이 바쁘거나 몸이 아프면 이성수가 대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해.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해서 1년 단기 국민학교 교사 단기 양성소가 있었는데 이성수는 그곳을 거쳐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다시 중등 교사 양성소를 거쳐 중등 교사도 했지. 그러다 6·25전쟁이 터지고 서울대학교 사범대에 들어갔어. 그 당시 학번을 6·25학번이라고 불렀지. 이성수는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로 나와 또 한 번 당선돼. 1981년 선거는 포항시, 영일군, 울릉군을 한 선거구로 묶어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로 치르는데 민주정의당 이진우 1위, 한국국민당 이성수가 2위로 당선되지. 이성수는 공부 욕심도 많고 일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어.임 : 이진우 의원 이야기가 나왔는데 박이득 선생님께서 한때 모셨던 인연도 있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분이지요?박 : 포항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1등을 도맡아 한 수재였지. 공부만 잘한 게 아니라 음악도 잘했고 글도 잘 썼고 외국어에도 능통했지. 다방면에 뛰어났지. 이명석 선생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서울 영등포지청과 경주지청에서 근무했어. 경주지청에 5~6년 근무했는데 그때 포항 사람들이 이진우 검사 덕을 좀 봤을 거야. 가끔 포항에 오면 사진작가 박영달 선생이 운영하던 청포도다방에 들러서 단골이던 부친과 한흑구 선생에게 깍듯이 인사했지.임 : 이진우 의원이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습니까?박 : 서울에서 연합 성가대 지휘를 맡기도 했어. 피아노, 클라리넷, 색소폰, 나팔 4개 악기를 다루었고. 과거 포항시민의 노래와 포항고등학교, 포철공고 교가도 작곡했지. 특히 포항시민의 노래는 이명석 작사에 이진우 작곡이야. 부자지간에 작사 작곡을 한 거지. 그 노래는 유명한 음악가인 박태준이 심사해서 선정되었어. 문장도 정확하고 글솜씨도 뛰어났지. 후배 검사가 쓴 글에 일본어 잔재가 보이면 “문장이 그게 뭐냐. 국어 공부 좀 해”라고 나무라기도 했어. 국어순화운동을 하기 위해 전국 강연을 다니기도 했고. 수필집도 여러 권 냈는데, 그의 수필 ‘눈을 들어 하늘 보라’는 아름다운 작품이야. 이진우는 제11대, 제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으며,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 청와대 정무제1수석비서관, 제14대 국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임 : 많은 정치인이 있습니다만 사정상 한 분만 더 하고 정치 이야기는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이기택 의원도 잘 아시지요?박 : 7선 의원을 한 큰 정치인이지. 청하국민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 갔어. 고려대학교 학생회 회장을 하고는 큰누나와 자형이 경영하던 태광산업에 들어갔지. 그리고 1967년 7대 총선에서 신민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돼. 만 29세 때 국회의원 배지를 단 거야. 비례대표로 당선되었으니 다음 선거는 지역구를 노리지 않겠어. 이기택이 원래 염두에 둔 지역구는 고향인 영일군이었지. 그래서 나를 포함해 포항 출신 몇 사람을 부르기도 했어. 그런데 8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 내부 사정으로 부산 동래구에 출마하게 된 거야. 여기서 당선되고 9대, 10대에도 잇달아 당선되면서 부산과 신민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었지. 박이득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2021-10-24

최원수, 변석화… 시대를 앞서간 인물

지혜로운 원로는 그 지역의 작은 도서관이자 박물관이다. 박이득 선생을 만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은 정치, 경제, 문화, 체육 등 다방면의 이야기를 구성진 말솜씨로 풀어냈다. 우선 정치 부문의 이야기를 전한다. 일제강점기, 광복, 전쟁, 혁명, 군사정변 등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를 헤쳐나간 포항 정치인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포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임종석(이하 임) : 선생님께서는 포항 역사를 가장 잘 아는 원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정치 분야부터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선생님은 많은 정치인을 지켜보거나 보좌하셨는데 정치를 잘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박이득(이하 박) : 철이 없다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시근머리 없다’고 하지. 정치를 잘하려면 ‘시근머리’가 있어야 해.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냉철하게 살펴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해. 물론 그게 쉽게 될 리는 없겠지. 내가 여러 정치인을 모셨는데, 그들이 부족한 점을 둘러보게 하게나 보듬어주는 게 내 일이었어.임 : 그럼 본격적으로 정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948년 5월 10일에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현재 포항시에 해당하는 당시 영일군 갑구·을구 선거구에서 의원을 선출하게 되지요.박 : 제헌의원 선거는 처음 하는 선거라 비교적 조용히 치른 편이지. 2대 선거부터는 출마자도 많고 양상도 복잡해져. 육거리를 중심으로 영일군 갑구와 을구로 나누었는데, 갑구는 박순석, 을구는 김익로가 당선되었어.제헌의원 선거는 정당정치가 틀이 잡히지 못해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정당은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뿐이었고, 사회단체들이 정당과 유사한 성격을 띤 채 치러졌다. 영일군 갑구 당선자 박순석(45·무소속)은 경성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였고, 김익로(44·무소속)는 소학교 졸업 학력의 신문국장이었다. 박순석은 2대 선거에 낙선한 후 3대·4대 민의원 선거에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되고, 김익로는 2대·3대에 잇달아 당선되며 역시 3선 의원이 된다.박 : 박순석은 지역에서 정치에 진출한 최초의 기독교계 인물이 아닌가 싶어. 김익로가 열정적인 활동가였다면 박순석은 점잖은 편이었지. 국회의원이 된 김익로는 지략이 뛰어났어. 당시에 땔감이 부족하니까 사람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베고는 했지. 그러다가 경찰에 걸리면 파출소로 연행되었어. 김익로가 그 소식을 듣고는 파출소를 찾아다니며 “시골 사람들이 생나무라도 베어야 먹고살지”라며 풀어주라고 했다는 거야. 그 장면을 보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어. 국회의원은 저렇게 해야 한다면서 김익로를 칭송했지. 김익로가 국회의원이 되어 가장 잘한 일은 영일중학교를 설립한 거야. 나중에 최상하 선생이 학교를 인수해 더 번듯하게 키웠지. 김익로가 또 잘한 일은 국책사업으로 오어지(吾魚池)를 만든 거야. 오어사와 보경사는 포항을 대표하는 고찰(古刹)이잖아. 못을 막아 오어지가 조성된 덕분에 오어사의 경치가 더욱 수려해지고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 나중에 항사(恒沙) 위쪽으로 못을 막았는데, 그것이 오천(烏川) 주민들의 식수원으로도 쓰였어.임 :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제헌의원 임기가 2년으로 정해졌기 때문이지요. 당시 지역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1949년 8월 15일 포항읍이 시로 승격된 것입니다. 기존의 영일군 갑구·을구에 포항시가 더해져 선거구가 3개가 됩니다. 13명이 출마한 포항시 선거구에서는 대한청년단의 김판석(30)이 당선되고, 8명이 출마한 영일군 갑구에서는 최원수(39)가, 역시 8명이 출마한 을구에서는 김익로가 당선됩니다. 이 중에 최원수라는 인물이 눈에 띕니다. 그는 일본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예과 2년을 중퇴했고 영일군수를 지냈으며, 포항신문사 사장을 맡았더군요.박 : 일제강점기 때 포항에서 머리 좋기로 소문난 두 명이 있는데 최원수와 김장섭이지. 최원수는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제1고보(京城第一高普)를 다녔는데 졸업은 못 했어. 이상(理想)이 높은 큰 지도자 타입이지. 죽장중학교와 기계중학교 그리고 청하중학교의 전신인 해아(海阿)중학교를 모두 최원수가 설립했지. 점잖은 분이었고 하태환과는 먼 친척이었어. 2대 선거에 당선된 후로는 번번이 낙선하고 말아. 이 지역에서는 정치적으로 비주류였기 때문이지. ‘포항시사’에 소개된 최원수의 행적이 범상치 않다.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수석으로 합격되었다고 하니 파격의 대경사로 흥해 고을이 떠들썩하였다. 3년간 수학하다가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학교를 중퇴한 후 고향에 돌아와서 손에 책을 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 부친 최봉래 공(公)이 “내가 한약의생 경영하니 너도 한약방을 경영하여 나의 후계자로 양성하고저 한다”고 타이르니 20세 미만의 소년이 “아버지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 전념하십시오. 저는 이 나라 이 세상의 병을 고치는 데 전념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그 포부를 알 만하다고 할 것이다. (중략)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포항시 승격 추진 운동을 전개하여 이일우, 박동주, 박일천 등과 더불어 시 승격 진정차 상경하니 내무부 어느 국장이 농담조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되면 영일군수의 산하에서 이탈 행정구역이 독립되는데 군수가 솔선하여 시 승격 운동을 하러 상경하여 진정하는 예(例)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어찌 최 군수는 앞장서서 진정을 하러 다닙니까” 하고 물으니 최원수 군수가 말하기를 “내가 백 년 동안 영일군수로 있는 것도 아닌데 포항은 내 고장이라 영일군의 발전보다 포항이 시가 되어 번영하는 것이 국가백년지대계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포항시사’, 1987, 879∼880쪽임 :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살펴보면 포항시, 영일군 갑·을 3개 선거구에 모두 29명이 출마합니다. 그중 유일한 여성 출마자인 변석화(41)라는 인물이 궁금합니다.박 : 포항시 선거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는데 포항 최초의 여의사지. 남편이 역시 의사인 김두수라고, 포항시의사회 회장을 여러 번 했어. 변석화는 말솜씨가 탁월했는데 그만큼 명석한 인물이었어. 선거 유세장에서도 뛰어난 언변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고 소문이 자자했지. 그때 당선되었다면 박순천 같은 큰 정치인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다음의 글을 보면 변석화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지역민들이 한결같이 포항의 여성 선구자로 꼽고 있는 변석화는 1908년에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33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세브란스의대 출신 김두수와 결혼, 시댁이 있는 포항에 정착했다.변석화는 결혼 후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해방과 6·25전쟁으로 혼란한 시기에 이 고장 여성과 청소년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여성이 사회적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시절, 포항 제1의 갑부 집안사람이면서 부부 의사로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건국 후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의료정책연구소, ‘우리나라 근현대 여성사에서 여의사의 활동과 사회적 위상’, 2012, 75∼76쪽임 : 광복 이후에 포항 정치계에 걸출한 인물들이 활약했다는 것을 선생님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3대 총선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당시 정치 지형에 대해 잠시 들어보았으면 합니다.박 : 1951년 12월 23일에 자유당이 창당되는데 포항에서는 아무래도 자유당 계열이 강했지. 자유당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이 민주당 계열이 되는데, 어떤 면에서 민주당의 발상지는 전라도가 아니라 대구라고 봐야 해. 그때는 대구가 대한민국 최고의 야당 도시였어.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대구, 경북은 공화당의 중심에 서게 되지.박이득1942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와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포항 MBC, ‘영남일보’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10-17

“송도에 염전이 있었고 칠성천에 맑은 물이 흘렀지”

어느 도시나 변화를 겪게 되지만 포항은 철강도시가 되면서 변화의 속도가 어느 도시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사라진 마을도 있고 새로 조성된 동네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서서히 사라지지만, 사진은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진의 가치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난다.조 : 그동안 사진전을 모두 여섯 번 하셨더군요.이 : 첫 번째 개인전은 1973년 중앙동 맥심다방에서 했지. 그때는 다방이 문화계의 사교장이었거든. 다방에 사람들이 가득 찰 정도로 성황이었어. 다방에서 사람들이 담배를 얼마나 피워대는지 담배연기가 온몸에 배었지. 여섯 번째 개인전은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2012년 8월 포항시립미술관에서 했어. 지역에서 관심을 많이 보여주어서 여러모로 고마웠지. ‘포항시사’ 3권(2010, 113쪽)에서는 이도윤의 첫 번째 개인전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1973년 지역에서는 최초로 본격 개인전을 열었다. 그전까지 박영달, 김상용, 박원식 등이 개인 전시를 했으나 본격적으로 하지 못하고 청포도다방이나 자기 사진실에서 10여 폭 미만의 작품을 걸어두고 지인들이 찾아오면 작품을 설명해주는 수준에 그쳤다. 이 시기에 이도윤이 최초로 본격 개인전을 열어 자신의 사진 예술의 전부를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변변한 전시공간 하나 없던 때라 번화가에 있는 다방의 벽면을 빌린 조촐한 자리였으나 당시 수준으로 제법 형식과 틀을 갖춘 전시회였으며, 전시장에 예술사진을 관람하는 관람객이 붐벼 큰 바람을 일으킨 전시회라는 평가를 얻었다.조 : 전시회를 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이 : 기분이라기보다는 사진은 기록이라는 나의 소신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돼. 글 쓰는 사람은 글로,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으로, 사진 찍는 사람은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런 마음, 그런 자세로 사진을 찍고 전시회를 하고 사진집을 낸 거야. 스무 살 이전부터 사진을 시작해서 사진에 나의 온 생이 들어 있어. 내 삶에서 사진을 빼면 이야기할 게 없어. 사진이 전부야. 아직 전시할 사진이 많은데 힘들어 하지 못하고 있어. 누가 기획을 해주면 좋을 텐데. 내가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이 모두 포항의 역사인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모르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야.조 :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숙연해집니다. 이번 대담을 기회로 선생님의 사진 세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전시도 가능해졌으면 합니다.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선생님은 포항에 정착한 후로 포항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고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누구보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습니다.이 : 이야기를 듣고 보니 포항제철 구경 간다고 형산강 나루터로 자전거 타고 가던 사람들이 생각나네.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포항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있었지. 나는 가슴 설레며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고. 마을이 통째로 없어지는가 하면 염전과 논밭에 새로운 길과 마을이 생겼지.조 : 해도 염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이 : 해도뿐만 아니라 송도에도 염전이 있었지. 송도 가는 다리를 놓기 전에 송도에도 염전이 있었어. 아마 송도에 염전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다리를 놓기 전에는 배를 타고 송도에 들어갔어. 동빈내항에서 낚시도 하고 아이들이 헤엄치고 놀기도 했어. 근래 운하를 만들어서 물길을 트고 준설도 하면서 수질이 좀 깨끗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지.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송도의 그 좋던 명사십리가 사라지고 환경문제가 심각해져 과거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관광도시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포항제철 덕분에 포항이 경제적으로 융성해지고 그 파급효과가 대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야.조 : 혹시 송도에 다리 놓을 때 찍은 사진이 있는지요?이 : ‘소달구지’라는 작품이 송도 다리 공사할 때 찍은 것이지. 기초를 쌓을 때 나무다리를 먼저 놓아야 하거든. 강원도에서 나무를 싣고 왔는데 바다로 온 것인지 강을 따라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소달구지로 건져서 싣고 갔어. 송도 다리가 엉성해서 차가 지나다가 빠졌는데, 해녀들이 건져내기도 했지.조 : 칠성천 주변은 어땠습니까?이 : 내가 포항에 왔을 때는 칠성천에 맑은 물이 흘렀지. 포항제철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칠성천이 점점 오염되더군. 도시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 어쨌든 칠성천 주변에는 늘 활기가 넘쳤어. 부둣가에 배가 들어오면 생선을 내리잖아.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생선을 줍거나 훔쳐서 팔기도 했어. 그래서 배가 들어오는 날은 아이들이 바글바글했지. 나는 그걸 찍으러 시장을 돌아다녔고. 동빈동과 남빈동은 오징어 덕장이었어. 그물과 그물을 잇대서 오징어, 노가리, 가자미 등을 말렸지. 그곳에서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지. 축축하고 비린내 가득한 그물 밑에서도 아이들은 즐겁게 놀고 잘 자랐어. 굿도 잊을 수 없지. 굿이 너무 재미있어서 항구에서 몇 날 며칠을 자며 구경했어.조 : 말씀을 들어보면 1970년대 포항은 산업도시로 변모하면서 활력이 넘쳐나는 곳이 아니었나 싶군요.이 : 그렇게 볼 수 있지. 도시에 역동성이 있었고 사진작가인 나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포항제철 건설과 함께 새마을운동이 맞물려 돌아갈 때지. 포항에서도 새마을운동을 많이 했는데 부인들이 열심히 했어. 부녀자들이 리어카를 끌고 악착같이 일했지. 포항 MBC 앞에서부터 시내까지 다 논밭이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다 없어졌어. 외지 사람들도 포항에 많이 왔어. 대구, 영천, 구미 사람들이 회 먹으러 단체로 기차와 버스 타고 몰려오고 그랬지. 포항역과 시외버스 터미널에 사람들이 북적거렸거든. 죽도시장과 중앙상가가 번창할 수밖에 없었지.조 :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 사진은 선거 때 찍은 사진이군요. 이 : 중앙상가에 있는 포항우체국 앞이군.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우체국 계단에서 연설했어. 눈에 잘 띄고 동서남북 길이 열려 있고 소리도 잘 퍼져나가니 집회와 연설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지. 포항의 정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장소야.조 : 이 사진은 큰 공사 현장입니다.이 : 포항제철 배수로 공사할 때 찍은 거네. 포항제철소 안에 이런 관이 수천 개 박혀 있을 거야. 정말 힘들고 대단한 공사였지. 지금도 그렇지만 포항제철에는 아무나 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수 없어. 그때 포항제철 직원들이 얼마나 큰 사명감을 갖고 일했는지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조 : 포항 구석구석이 선생님의 사진 속에 담겨 있군요. 포항의 사진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사진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이 : 내 호주머니에는 늘 필름이 가득 들어 있었어. 자나 깨나 필름을 보면서 분석하고 공부했지. 사실은 포항의 사진 역사를 쓰려다가 여러 사정으로 못 쓰고 있어. 이걸 쓰려면 포항에 사진이 맨 처음 전수된 시기와 전수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드네. 선배들한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어. 내 손으로 이걸 해보고 싶은데 이제는 욕심이 아닐까 싶군.이도윤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10-05

박영달과 구왕삼의 영향으로 성장한 포항 사진

포항의 사진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어떤 사진작가들이 영향을 미쳤을까? 또한 어떤 단체와 교육과정을 통해 사진을 접하게 되었을까? 그 밖에 포항에서 맨 처음 열린 사진 촬영대회는 언제인지 등에 대해 이도윤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조 : 포항의 사진 역사에 대해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포항시사’를 살펴보면 사진이 다른 장르보다 먼저 사단법인이 결성됩니다. 사단법인 포항사진작가협회가 1965년 9월 4일 인준되었고, 그 과정에서 박영달 선생이 역할을 하셨더군요.이 : 내 선배 세대로 박영달을 선생을 비롯해 김상용, 박원식, 김덕수, 허치권 선생이 있었지. 박영달 선생과 친목 모임을 함께하면서 여름에 기타 들고 오어사, 보경사에 가기도 했어. 사실 포항 사진은 대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6·25전쟁 이후에 대구는 사진의 수도였거든. 많은 작가들이 대구를 무대로 활동했지. 대구의 구왕삼 선생이 한 달에 한 번 포항에 와서 사진 강의를 했어. 구 선생은 좋은 작품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도록 직접 작품을 보여주면서 가르쳤지. 대구 사진의 선구자인 신현국 선생도 포항에 공모전 심사가 있으면 다녀갔는데 그분 영향도 있었고. 그 후 포항의 사진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어. 허치권의 ‘내 것 사이소’, 박영달의 ‘시집가는 날’, ‘노도의 위험을 뚫고’가 동아 사진콘테스트에서 입상했지. 박영달은 1913년에 태어나 1986년에 작고한 사진작가다. 1958년 조일국제사진살롱에서 입상한 것을 비롯해 국내외 유수의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했다. 미술평론가 박경숙에 따르면 박영달은 1938년 대구일보 포항지사 기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이후 47년간 포항을 지키며 한국 사진 예술사와 포항 문화 예술계에 굵은 발자취를 남겼고, 그런 측면에서 포항 문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운영한 ‘청포도다방’은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2016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박영달 회고전이 열렸다. 구왕삼은 1909년에 태어나 1977년 작고한 사진작가로 이명동, 임응식 등과 리얼리즘 사진 이론을 전개하며 사진 평론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동요 작곡, 음악 평론 등 음악 분야에서도 폭넓은 활동을 했다. 신현국은 1924년에 태어나 1997년 작고한 사진작가이며 매일신문 사진부장으로 활동했다. ‘생존’등의 사진집을 남겼다.조 : 구왕삼 선생은 “사진은 무성(無聲)의 시(詩), 시(詩)는 유성(有聲)의 사진”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구 선생이 리얼리즘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선생님의 사진관(觀)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이 : 사진은 화가가 데생하듯이 그리는 게 아니고 ‘사진이 아니면 안 된다. 사진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찾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카메라를 들어야 해. 나는 사진을 살롱 사진과 리얼리즘 사진으로 구분하지. 쉽게 말해 살롱 사진은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고, 리얼리즘 사진은 휴머니즘이고 살아 움직이는 사진, 순간을 놓치면 재현할 수 없는 사진이야. 내가 왕성하게 활동할 무렵에는 살롱 사진이 드물었어.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쉽게 하는 사진은 안 하고 싶어. 구왕삼 선생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런 면에서 구 선생의 사진관과 맥을 같이한다는 의견에 동의해. 구왕삼, 최민식 선생의 사진은 정말 배워야 할 가치가 있어. 두 분의 사진에는 휴머니즘이 생생하면서도 깊이 있게 살아 있지.최민식은 1928년에 태어나 2013년 작고한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인간을 소재로 한 사진을 평생 찍었다. 제1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선 이후 국내외 여러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하였으며 옥관문화훈장(2000) 등 많은 상을 받았다. 1968년 개인 사진집 ‘인간(Human)’제1집을 펴낸 후 2010년 제14집까지 출간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사진집을 냈다.조 : 선생님은 어느 분한테 사진을 배우셨습니까?이 :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이름을 떨쳤던 이명동 선생께 배웠지. 이 선생한테 사진을 배우러 서울에 가기도 했고, 이 선생이 포항에 오면 내 집에서 숙박도 했지. 그분은 김두한이 연설하다 단상을 엎은 사진도 찍었어. 두들겨 맞을 각오를 하고 찍었지. 1960년 3·15 마산 의거 때는 카메라를 세 대 메고 다녔던 분이야. 카메라를 뺏길 것에 대비해 예비 카메라를 들고 다녔지. 사진 찍는 사람은 그런 근성이 있어야 해. 매일신문 신현국 선생을 찾아가 그분 암실에서 현상하는 방법을 배웠어. 사진 현상은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 하거든. 신 선생도 배울 게 참 많은 대단한 분이었지. 한국 사진 역사 그 자체라 불리는 이명동은 1920년에 태어나 2019년 타계했다. 6·25전쟁 때 육군 7사단 종군 기록 사진가로 활동하며 무공훈장을 받았고, 4·19혁명을 비롯한 격변의 현장을 앵글에 담았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 창설을 이끌었으며 월간 ‘사진예술’을 창간했다.조 : 과거에 사진작가를 포함해 예술인들의 모임이나 단체가 있을 법했겠습니다.이 : ‘나울회’라고 있었지. 문학, 미술, 서예, 사진, 음악 이렇게 다섯 분야의 사람 중에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 모인 단체였어. 예술에 대한 뜻과 생각을 너울지듯이 펼치자는 취지로 모였지. 1971년에 창립전을 열었고. 고문은 최영태 교수가 맡았고, 서예가 신대식 선생이 많이 도와주었어. ‘나울회’가 포항예총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조 : 선생님은 모임이나 단체를 만든 적이 없는지요?이 : 나는 서클을 만들었지. 1978년 ‘칠광회’를 시작으로 ‘포영회’, ‘영상동인회’를 만들었어. 이 서클을 통해 좋은 후배와 제자를 길러내고 싶었지. 아마 포항에서 제자를 길러낸 사진작가는 내가 처음일 거야. 이 서클이 계속 이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사진도 후배들이 잘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은 내가 작업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경이 좋아졌잖아. 역설적이게도 환경이 좋아지면서 진정한 사진의 길은 어려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력이 회복된다면 사진 강의를 더 하고 싶군.조 : 그러잖아도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지요?이 : 포항전문대학(현 포항대학교)과 선린전문대학(현 선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 정식 교과는 아니고 사회교육원에서 사진 수업을 했어. 여성문화회관에서도 강의를 했고.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지. 포항의 두 대학 사진반에서 사진 촬영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어. 재미있는 건 두 대학의 사진반 학생들이 경주 동국대학교 사진반 학생들과 연락해 한데 뭉친 거야. 그렇게 모여서 즐겁게 놀고 사진도 열심히 하더군. 교수들도 많이 도와주고. 참 좋을 때였지.조 : 여성에게 사진을 권한다는 선생님의 칼럼을 읽었습니다.이 : 사진은 여성이 하기에 좋은 것 같아. 여성이 꼼꼼하고 섬세하잖아. 카메라의 세세한 부분을 이해하는 데 잘 맞고 감성적으로 여성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여성문화회관과 포항종합제철 직원 부인들 대상으로 ‘주부를 위한 카메라 다루는 법’이라는 강좌를 개설해 강의했지.조 : 그렇게 강의를 하고 후학을 양성한 이유가 궁금합니다.이 :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사진을 오래 하다 보면 사명감이 생겨. 일종의 역사의식 같은 것이지. 예쁜 꽃만 찍는 것은 사진이 아니야.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어서는 안 돼. 생활 현장에서 생생한 삶의 모습을 포착해야지. 작가로서 사진에 대한 이런 신념을 사회에 알리고 확산해야 한다고 생각해.조 : 포항에서도 사진 촬영대회가 열렸을 텐데 최초로 열린 대회는 언제입니까?이 : 1968년 개항제가 열렸는데, 꽤 큰 규모의 문화 행사였지. 그 행사 중에 포항에서 처음으로 사진 촬영대회가 열렸던 걸로 기억해.‘포항시사’ 3권(2010, 113쪽)에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1968년 포항에서 처음 문화제가 열렸으니 제1회 개항제가 그것이다. 제1회 개항제는 이명석이 주도했으며 오실광(초대 상공회의소 회장), 김유(상의의원), 정명바우(상의의원) 등 지역 상공인들이 크게 도왔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처음 보는 문화제요 예술제인데다 개항제 행사의 일환으로 미인대회를 겸한 모델대회가 열렸는데 포항에서 모두가 처음 있는 일이라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였다고 한다.당시 번화가 인근으로 포항 시민의 최고 휴식처인 수도산에서 2차에 걸쳐 모두 50여 명의 사진작가들이 치열한 사진 촬영 경합을 벌였는데, 당시만 해도 촬영대회 자체가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번화가에서 뜻밖에 열리는 행사였으므로 매우 성공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 등 장비가 열악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사진 예술에 대한 관심을 드높인 의미 있는 행사라고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도윤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2021-10-04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야 진짜 사진이지”

평생 예술을 한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기 마련이다. 이도윤 선생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작가 정신은 무엇일까? 그에게 대한민국 미술대전(國展)과 국제사진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의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조 : 사진작가로 살아간다는 게 참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이 : 아내 도움이 컸지. 육거리에서 사진관을 할 때였는데 한 여성이 사진을 가르쳐달라고 왔더군. 그게 인연이 되었지. 내가 사진에 빠져 사는 바람에 가정에는 거의 신경을 못 썼어. 연탄 한 장, 쌀 한 가마니가 얼마인지도 몰랐지. 사진 촬영대회가 있을 때면 아내가 항상 따라가고 사진 작업도 많이 도와줬어. 좁고 꽉 막힌 암실에서 작업할 때는 아내가 30분에 한 번씩 노크해. 내가 살았나 죽었나 농담을 던지며. 사진작가 이도윤은 내 아내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조 : 암실 이야기를 하셨는데 흑백 사진은 작업하기가 상당히 까다롭지요?이 : 요즘 디지털 작업과는 비교가 안 돼. 한 예로 흑백 사진을 만드는 마지막 과정에 수세(水洗)가 있는데 정착액을 씻어내는 것이지. 이게 참 중요하고도 어려워. 흐르는 물에 종이 인화지를 두 시간 정도 담궈야 하거든. 수세를 제대로 안 하면 사진이 금방 변해. 사이즈가 작은 사진은 대야에 담그면 되는데 큰 사진은 어디에서 하겠나. 수돗물도 귀한 시절인데.그래서 냇가에 가서 수세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 나는 새벽 1시에 인화지를 자전거에 싣고 형산강에 가서 인화지를 강물에 담그고 돌을 얹어 한참 놔두고 수세를 했지. 요즘 그렇게 하라고 하면 누가 하겠나. 솔직히 요즘 사진은 사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게 있어. 시간이 나면 한국사진작가협회에 나가서 흑백 사진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안타까워.조 : 선생님 사진을 보면 인물의 솜털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이 : 섬세한 표현을 하기 위해 중형 카메라를 사용했지. 중형 카메라는 필름이 크기 때문에 확대 사진을 만들면 사진 품질이 소형 카메라로 촬영한 것보다 좋을 수밖에 없어. 사진을 만들 때도 인화 과정에서 흔들리면 안 되니까 차가 안 다니는 새벽에 작업했지.조 :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두 번 입선하셨지요?이 : 사진으로 국전(國展)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였지. 지방에서는 특출나게 좋은 사진이 아니고는 입상이 힘들었어. 1975년 24회 국전에서 ‘리듬’으로 입선했고, 1979년 28회 국전에서 ‘출어 준비’로 입선했지. 1982년에 사진 부문이 분리되면서 대한민국 사진대전으로 명칭이 바뀌었어. 사진을 왜 국전에서 뺐는지 항의 서한을 보내려니까 사진계의 선배인 박영달 선생이 윗사람들한테 밉보인다고 말리더군. 그래도 내가 항의 서한을 썼지.조 :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 공모전에서도 여러 차례 상을 받으셨습니다.이 : 국내에서 상을 받으니까 국제 공모전에도 도전하고 싶더군. 마침 프랑스와 대만에서 공모전이 있다고 사진작가협회에서 공고가 났길래 영어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작품을 보냈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군. 그 당시 사진 하는 사람들은 국제대회에 거의 관심이 없었어.조 : 선생님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카메라에 담아오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이 : 사람의 내면이 살아 있는 모습을 포착해야 진짜 사진이라고 생각해.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가면 찍을 수 있는 풍경 사진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진이라 하기가 어렵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게 진짜 사진이고 사진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나는 리얼리즘이 결여된 사진은 사진으로 보지 않아. 그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한 점도 있지만 사진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야 하고 리얼리즘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어.조 : 선생님 작품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리듬’이라는 작품이 눈에 띄던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이 : 포항제철소에서 기름 탱크 작업을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인데 국전 입선작이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 피아노 건반을 디디는 것 같잖아. 음악적인 리듬이 생각나 제목을 ‘리듬’이라 붙였고 호평을 받은 작품이지. 후배 작가 몇 명은 ‘리듬’을 보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도 해. 이 사진에는 에피소드가 있어. 가로 사이즈는 짧고 세로는 길어서 세로 파노라마로 표구해서 국전에 냈거든. 그런데 사진은 액자로 내야지 동양화처럼 표구로 내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야. 결국 표구 때문에 감점이 돼 입선에 그친 아쉬움이 있지.조 : ‘돼지몰이’는 1980년 프랑스 국제사진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지요?이 : 심사위원들이 아주 세밀하게 작품을 검토하고 상을 주었어. 작품 속의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는 작대기를 쥐고 돼지를 쫓는 모습, 그리고 돼지의 발걸음까지 섬세하게 살펴보더군. 조 : ‘쟁탈’은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이 : 그 작품은 여남 바닷가에서 찍었지. 당시에 카메라가 표준 렌즈밖에 없었어. 갈매기가 물을 차고 탁 들어가는데 렌즈 안에 갈매기가 작게 담기면 생동감이 떨어질 것 같아 목까지 물이 차는 줄도 모르고 바다로 들어갔지. 그렇게 온몸을 던져 겨우 한 장 얻어낸 거야.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렸지. 그런 일이 다반사였어.조 : 그 밖에 생각나는 사진이 있으신가요?이 : 하루는 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키가 훤칠한 청년이 나에게 다가오더군.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담소’라는 작품의 한 사람이 자신의 할머니고 등에 업힌 아기가 본인이라는 거야. 1980년대에 연일에서 찍은 사진이지. 그래서 청년에게 그 작품을 준 생각이 나. 1980년 동아국제사진살롱 입선작인 ‘빨래하러 가는 길’은 한국적이면서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이지. 나는 “사진도 연극처럼 무대를 만들어서 혼을 집어넣고 스토리를 만든다. 그러나 연출 냄새가 나지 않고 일상생활에 어울리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라고 배웠어.조 : 어느 글에선가 “사진가의 길이 내 삶을 구제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며 사진가의 자세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을 것이다. 종교처럼 신앙심을 갖고 카메라를 잡을 것이다”라고 하셨더군요.이 : 사진에 젊음을 바치고 나의 생을 건다고 생각했지. 쉽게 말해 사진에 미쳤던 거야. 사진을 안 하고 다른 걸 했더라면 더 잘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나는 사진에 관해 세 가지 소신이 있어. 첫째 인간의 삶을 표현하고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기록한다. 둘째 리얼리즘 정신을 일관되게 추구한다. 셋째 사진은 종교처럼 내 생을 걸 만큼 중요하다.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이도윤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

2021-09-28

“포항의 변화를 사진에 담은 것은 작가로서 행운”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힘에 겨운 듯했다. 선생님은 여든이 넘어 고관절 수술을 하는 바람에 1년 가까이 댁에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인터뷰를 제대로 할 수가 있을까 고민을 안고 중앙상가에 있는 선생님의 스튜디오(천연사진관)를 찾아갔다. 1년 동안 비워두었다는 스튜디오는 뜻밖에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깔끔한 양복을 걸친 선생님의 모습에서 꼿꼿한 작가 정신이 느껴졌다. 조혜경(이하 조) : 경남 남해 출신인데 포항에 터를 잡은 이유가 궁금합니다.이도윤(이하 이) : 사람 사는 곳이 어디 가나 비슷하지. 부산 용두산 아래 자형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용두산에 불이 나는 바람에 공원으로 바뀌었어. 그때 문득 내가 살아야 할 곳, 떠돌지 않고 정착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어느 누가 가라고 한 게 아니라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어. 포항, 경주, 안동, 서울 네 곳을 두고 고민했는데 기차를 타니까 포항이 불쑥 떠오르더군. 그래서 포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어. 돌이켜 생각해보면 경주도 괜찮은 곳인데. 이런 선택을 두고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여하튼 포항은 바다와 산이 있는 내 고향과 닮아 친근감이 들었어.조 : 포항에 오신 게 언제쯤이지요?이 : 1967년이지. 그때 포항 인구가 5만에서 6만 명 정도 되었나. 조용하고 한적했지. 동빈내항에 돛단배가 다닌 게 인상적이었어.조 : 당시에 사진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이 : 카메라가 귀한 시절이었어. 사진 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고. 중학교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자형한테 간 게 사진을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 그때 자형은 한 백화점의 전무로 있었거든. 부산 서면에 크고 유명한 사진관이 여러 개 있었는데 어린 촌놈이 그 사진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을 보고는 신기하게 여겼지. 자형 소개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배웠는데, 사진이 평생의 직업이 되리라고는 그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조 : 어린 나이에 객지 생활을 하셨군요.이 : 그런 셈이지. 고향이 경남 남해군 상주면인데 남해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길이 멀었어. 상주에서 남해, 남해에서 노량, 노량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야 했지. 그때 아버지와 둘이서 남해읍까지 50리 밤길을 걸어서 갔어. 지금 생각해도 아득히 먼 길이지. 남해읍에서 아버지가 감 두 개를 사서 손에 꼭 쥐어주었어. 어린 자식을 객지에 보내려니 맘이 아파 국밥이라도 먹이고 싶은데 시골에 무슨 돈이 있겠어. 빈속에 배 타면 멀미를 할까 봐 걱정되었던 거지.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려.조 :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만 예술가도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선생님의 부모님은 어떠셨나요?이 :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나는 6남매의 차남이야. 자식이 많으니 먹여 살릴 일이 큰 걱정이었고 농사일로 늘 바빴지. 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분이었고, 해 뜨기 전에 논밭에 나가 일하던 어머니는 미인이었어. 동네에서 제일 곱고 참한 분이었고, 생전에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던 따뜻한 분이었지.조 : 부산에 가보니까 어떻던가요?이 : 덜컥 겁이 나더군. 이 넓은 곳에서 살 곳을 못 찾으면 미아가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배는 고프지, 가방이랑 보따리를 메서 어깨는 내려앉지, 사람들은 숱하게 많지, 눈앞이 캄캄했어. 그 순간 손에 감 하나가 딱 잡히는데 배 타기 전에 아버지가 준 그 감인 거라. 한 개는 먹고 한 개는 남겨두었는데 그게 손에 몰캉 만져지면서 와락 눈물이 나더군. 이제 진짜 혼자구나, 내 길은 내가 알아서 가야 하는구나 생각하며 울고 나니까 앞으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더라고.조 : 다시 사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혹시 처음 사용했던 카메라는 기억하시는지요?이 :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 ‘캐논 큐엘(QL)’이 첫 카메라였지. 수동으로 초점을 맞추는. 한 번 찍고 레버를 돌려야 다시 찍을 수 있는 것이었지. 초점도 렌즈 왼쪽에 초점 링을 돌려가면서 맞춰야 했고. 나중에는 ‘아사이 펜탁스’를 갖게 되었는데 꽤 비싼 카메라였지.조 : 저는 어릴 때 예식장에 가면 사진사가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찍는 카메라가 기억납니다.이 : 사오(4×5)판 뷰카메라를 말하는군. 검은색 주름상자로 초점을 맞추는 카메라인데 사용하는 필름이 사오(4×5)인치여서 그렇게 불렀지. 그 카메라는 렌즈에 셔터가 달렸어. 조명은 마그네슘 전구 조명을 썼고. 손에 전선을 감아쥐고 하나 둘 셋 하면 팡 터지는 조명이었지. 그다음에 셔터를 누르면 동시에 조명이 터지는 셔터 방식으로 바뀌었어. 그렇게 아날로그 카메라가 번성하다가 디지털로 바뀌었지. 나는 지금 디지털 카메라 캐논 5D를 사용하고 있어. 사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많이 발전했지. 과거처럼 온갖 고생하며 사진 하라고 하면 할 사람이 있을까 싶군.조 : 요즘은 사진을 하게 되면 보정 작업 때문에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컴퓨터는 다루시는지요?이 : 뒤늦게 대학에 다니면서 보고서를 내야 하니까 컴퓨터를 안 배울 수 없었지. 컴퓨터는 겨우 보고서를 작성하는 정도의 실력밖에 안 돼.조 : 포항에 와서 사진관은 어디에서 열었습니까?이 : 육거리였지. 1967년 새파란 총각 때 이야기야. 육거리를 중심으로 작은 상점이 올망졸망 모여 있던 시절이야. 그때 포항에 사진관이 대여섯 개 있었어. 대구사진관은 나루끝에 있었고, 포항사진관, 문화사진관, 태양사진관이 있었지. 다른 사진관은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사진관 주인들은 나보다 서너 살이 많았는데 다들 돌아가셨어. 세월이 참 무상하네.조 : 사진관을 내면서 힘들지는 않았습니까?이 : 왜 안 힘들었겠어. 객지에서 왔으니 텃세가 있었지. 부산에서 사진을 배우고 왔기에 포항에서 사진 하는 사람들보다 아무래도 솜씨가 나았지. 그래도 어떡하나, 여기 있는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려고 애를 많이 썼지. 그러면서 사진에 더 빠져들었어.조 : 사진에 빠져들었다는 말씀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군요.이 : 우리 집 아이 둘이 어릴 때 이야기야. 하루는 둘이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다가 인형을 사려고 내렸는데 버스가 아이들을 못 보고 후진하는 바람에 사고를 내고 말았어. 버스 밑으로 들어간 아이들을 얼른 빼내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버스 기사는 운전대만 붙잡고 벌벌 떨고, 아이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 다행히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놀라고 아팠겠나. 병원에서 다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아이들을 보고 나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묻지도 않고 그 모습을 담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댔지. 그 일로 아직도 가족들한테 한소리를 듣지. 나는 그런 사람이야.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사진을 고집했지.조 : 살아 숨 쉬는 사진, 이 표현에 선생님의 사진관(寫眞觀)이 담겨 있지 않나 싶군요. 그런 맥락에서 선생님은 포항 사람들의 삶과 포항의 역사를 담은 사진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이 : 사실 포항은 짧은 기간에 엄청 변한 곳이지.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얼마나 변했나. 내가 포항에 올 때만 해도 제철공장이 들어선다는 걸 몰랐어.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니까. 육거리를 제외하고는 개발된 곳이 거의 없었는데 포항제철이 세워지면서 급속도로 개발되었지. 그렇게 포항의 큰 변화를 지켜보면서 사진을 찍게 된 것은 작가로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이도윤194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포항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1973년 포항 맥심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그리운 포항,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제사진전 우수상, 아시아태평양 사진전과 유네스코 사진전 우수상, 중화민국 사진전 3회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포항지부장, 영상동인회 전국 회장, 선린대학·포항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 대담·정리 : 조혜경(시인) / 인물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9-26

칠십 넘어 독립 소극장 만든 영원한 현역

바다를 배경으로 여름밤의 신나는 연극 무대를 만들고 소외계층에 연극을 보여주기 위해 ‘찾아가는 연극’도 하게 된다. 그리고 고희(古稀)를 넘어 평생 꿈꾸던 일을 실천에 옮긴다. 그에게 은퇴는 없다. 헌 : 포항바다국제연극제는 포항을 대표하는 연극 행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습니까?김 : 포항이 바다의 도시 아닌가. 여름밤 바다의 정취를 살리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연극팬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보자는 취지로 2001년에 시작했어. 포항연극협회 회장이던 신상률 선생과 나 그리고 ‘은하’의 백진기 대표를 중심으로 여러 연극인이 의견을 모았고 이 과정에서 백진기 대표가 애를 많이 썼지. 처음에는 환호공원에서 인근 아파트 주민들과 소박하게 시작하다가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나 공연무대를 중앙상가 실개천으로 확대했고 영일대해수욕장 임시 공연장으로 무대를 넓혀나갔어. 그러고 보니 이 행사를 시작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네.헌 : 바다국제연극제가 연극의 대중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군요.김 : 그렇게 볼 수 있지. 시민들 입장에서는 여러 나라의 수준 높고 다양한 연극을 편하게 볼 수 있으니까. 헌 : 2003년부터 포항시립극단이 ‘찾아가는 연극’을 하게 되는데, 이 프로그램도 연극의 대중성 확보를 위해 만든 것으로 볼 수 있겠군요?김 : ‘찾아가는 연극’은 문화예술 소외계층을 위해 만들었지. 연극을 보고 싶어도 여건이 안 돼 평생 연극 한 편 못 보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돼. 지역에서 연극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포항시립극단의 공공성도 확보하자는 취지였어. 무대장치와 음향장비, 의상 등 공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준비해서 시민들이 그동안 접하지 못했거나 접할 수 없었던 작품을 공연한 거야. 시민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지. 이런 시도는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겠지.헌 :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렸습니까?김 : 설해순 작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를 2003년 3월 23일 포항청소년수련관에 가장 먼저 올렸고, 이듬해 차범석 작 ‘옥단어’를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 올렸지. 그리고 선린애육원 복지관과 신광면사무소 회의실 등에서 공연을 이어갔고.헌 : 선생님께서는 지역의 정체성(正體性)을 살려나가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고, 또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셨지요?김 : 창작 뮤지컬 ‘연오랑 세오녀’가 대표적이지 않나 싶군. 포항문화예술회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서 무대에 올렸지. 지역에서 예술하는 사람들이 지역의 역사를 깊이 공부하고 또 지역의 정체성을 살려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맥락에서 포항을 대표하는 설화인 ‘연오랑 세오녀’는 언젠가 때가 되면 무대에 올리고 싶었어. 포항시 일월동 일월지(日月池)라는 지명을 통해 민족의 정서와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오늘날 시민과 관객들에게 유대감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지.헌 : ‘연오랑 세오녀’ 외에도 지역성을 담은 작품을 소개해주신다면.김 : ‘연화재의 통곡’이란 작품이 있어. 신라시대 포항의 대표적인 전설인데 정절을 지키다 숨진 한 많은 여자의 일생의 통해 인간의 숭고한 영혼과 포항의 정체성을 표현한 작품이지. 포항 장기에 유배 온 정약용을 다룬 ‘다산 정약용’도 있고.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선 포항 출신 산남의진(山南義陣) 창의장군인 의병장 최세윤을 다룬 작품도 빠트릴 수 없겠네.헌 : 이런 작품들은 포항의 자부심과 긍지를 세우는 문화적 토대가 되지 않았나 싶군요. 포항 100년사를 연극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겠군요? 김 : ‘의병장 최세윤’의 시대적 배경이 1908년에서 1916년까지고, ‘아! 그날의 함성, 포항의 3·1운동’은 1916년에서 1919년까지 이어지지. 그리고 1920년에서 2009년까지 다룬 작품이 ‘형산강아 말해다오’야. 내가 연출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이어보면 자연스럽게 포항 100년사가 되는 셈이지. 10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 안에 면면히 흐르는 일관된 정신, 가치를 연극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 물론 평가는 관객이 하는 것이지만.헌 : 2013년 3월에 ‘김삼일 자유소극장’이 문을 열게 됩니다. 칠십이 넘어서 선생님만의 공간을 만든 것인데, 이 나이면 대개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더 의욕을 내서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 관객을 불러모았습니다. 이유가 궁금합니다.김 : 대학에서 은퇴하고 조용한 곳에 연구실을 내는 학자들은 간혹 있지만 나이 칠십이 넘어서 나처럼 활동하는 연극인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이곳에서 관객과 함께 마음껏 꿈꾸겠다, 이렇게 마음먹었네. 2020년까지 8년간 ‘김삼일 자유소극장’에서 마음껏 행복했지.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 것은 연극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 소극장은 나의 마지막 꿈이었어. 물론 소극장을 경영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헌 : ‘김삼일 자유소극장’의 개관 기념작은 어떤 작품입니까?김 :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백조의 호수’를 각색한 ‘노배우의 고백’을 무대에 올렸어. 포항은 물론 서울까지 소문이 나더군. 마침 내가 연극에 입문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에 무대에 올린 뜻깊은 작품이지.헌 : 작품이 범상치 않을 것 같습니다. 작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김 : 바실리치라는 노배우가 주인공이야. 러시아 연해주 한 지방 극장의 명배우 바실리치는 나이 칠십을 바라보지. 극장 지배인과 관리인은 그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불법 해고를 하려고 해. 하지만 바실리치는 자신이 걸어온 배우 생활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주연으로 무대에 섰던 ‘오셀로’ 등 유명 작품을 재공연하지. 그 작품 속에서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내일은 다시 태양이 뜰 것이다”라고 말해. 이날 무대에서 노배우 역을 맡은 배우 최희만의 대사를 잊을 수 없어. “이곳에 내 전부를 바쳤어. 그 모든 게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이 무대가 내 인생 45년을 삼켜버렸어”라며 최희만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자 관객들도 함께 울더군. 나에게 연극은 그런 것이야. 관객들에게 진한 삶의 냄새를 느끼게 하는 것. 그 감동을 함께하는 것 말이야.헌 : 끝으로 연극계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지요.김 : 현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꿈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것, 그것이 멋진 인생이 아닌가 싶어. 김삼일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9-12

전국에서 두 번째로 시립극단 창단한 포항

포항에 시립극단이 창단된 것은 포항을 넘어 전국 연극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포항시립극단은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상임 연출자인 김삼일 선생은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린다. 포항시립극단이 공연을 전면 유료화한 것도 문화계에서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헌 : 1983년에 포항시립극단이 창단되는데 그 의미가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 전국에서는 두 번째로, 중소 도시로서는 처음으로 시립극단이 창단됩니다.김 : 어떻게 하면 극단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시립으로 하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지. 지역에서 민간이 극단을 계속 끌고 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어. 사실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고. 신상률 선생과 내가 정충검 포항시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포항시립극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는데 다행히 정 시장이 수용해주더군. 그 점에서 정 시장에게 고맙지. 1983년 5월 ‘은하’를 주축으로 신상률 선생이 초대 단장을 맡고 내가 상임 연출을 맡아 민간 자율단체 성격의 포항시립극단이 탄생하게 된 거야. 덕분에 전국 여러 도시에서 시립극단이 생겼지.헌 : 포항시립극단의 상임 연출을 맡으면서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됩니다.김 : 1985년 6월 청주에서 열린 제3회 전국연극제에서 차범석의 ‘대지의 딸’을 연출해 대통령상과 여자 연기상(이휘향)을 차지했지. 포항 연극이 대단하다고 전국 연극판에 소문이 안 날 수 없었어. 사실 이 작품의 무대가 포항 이웃 마을 안강이거든. 배우들의 대사도 경상도 사투리였지. 지역 문화예술을 꽃피우고자 노력하며 지역과 관련된 주제에 천착한 결과였다고 봐. 1985년은 ‘은하’가 창단된 지 20주년이 되기도 했어. 그동안 기쁨도 있었지만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무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단원들의 연극에 대한 순수한 열정 덕분이라고 생각해.헌 : 1989년에는 포항에서 제7회 전국연극제를 개최하게 됩니다.김 : 감개무량한 일이었지. 이 연극제를 앞두고 포항시민회관은 700석 규모로 확충하고 조명과 음향도 신예화하면서 연극제 참가자들에게 호평을 받았어. 보름 동안 열린 연극제에서 ‘은하’는 차범석 작 ‘산불’로 연출상과 문공부장관상, 여자 연기상(황영란)을 차지했지.헌 : 전국연극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어땠습니까?김 : 연극제에 학생 4천여 명이 다녀갔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많은 숫자야. 포항에서 전국연극제가 열리고 ‘은하’가 큰 상을 차지하면서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지.포항시립극단은 1990년까지 극단 ‘은하’와 합동 공연을 지속하다가 1991년부터 분리된 채 공연했다. 1990년 ‘노비문서’(백진기 연출), 1991년 ‘우리읍내’(신계호 연출), 1992년 ‘칠수와 만수’(이협수 연출), 1993년 1992년 ‘모닥불’(이원욱 연출), 1994년 ‘등신과 머저리’(류충렬 연출), ‘베비장전’(백진기 연출), 1995년 ‘어물전의 새벽’(이협수 연출), 1998년 ‘어머니’(이협수 연출) 등이다. 1999년 김삼일은 포항시립극단의 상임 연출자로 복귀하면서 그해 ‘작은 할머니’(엄인희 작) 와 ‘번지 없는 주막’(김상렬 작) 두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 특히 ‘번지 없는 주막’은 30여 년 만에 새롭게 각광받은 악극 형식의 공연으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헌 : 2004년 제14회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의미가 컸겠습니다.김 : 그렇게 볼 수 있지. 마침 환갑을 막 넘겼을 때 그 상을 받았으니. 방송 생활 때문에 공백기가 있었지만 포항시립극단 상임 연출자로 복귀하면서 매해 정기공연과 사실주의 연극, 해외 명작 공연 등 연극에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였어.‘조선일보’는 2004년 4월 1일자에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로 김삼일이 수상한 이유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연극의 불모지 포항에서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연극 열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지방 연극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그의 수상 소식은 포항의 연극인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헌 : 지역에서 연극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도운 분은 없었는지요?김 : 여러 사람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영일고등학교 최상하 교장을 꼽을 수 있지. 최 교장은 포항 연극의 숨은 공로자라 할 수 있어. 사실 연극인들은 무대를 준비하는 것도 벅찬데 관객을 확보하기 위해 홍보까지 해야 하니 오죽 힘들겠어.그런데 최 교장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학생들을 직접 인솔해 단체 관람을 하겠다고 하더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거야. 이게 계기가 되어서 다른 학교에서도 단체 관람이 이어졌고 포항 연극계에는 큰 힘이 되었지. 최 교장은 단순히 연극인들을 돕기 위해 단체 관람을 이끈 게 아니라 학생들의 인성 교육에 연극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 거야.헌 : 공짜표와의 전쟁 선포, 포항 연극계에 이런 일도 있었다면서요?김 : 당시 포스코는 국내 최고 수준의 효자음악당(현 효자아트홀)을 건립하고 서울의 유명 공연물을 유치해 무료 공연을 했거든. 포스코 직원들이나 시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지역의 문화예술계에서 보자면 심각한 위협이 되는 거야. 힘든 여건에서 분투하고 있는 지역 문화예술을 외면하고 지역 극단의 창작물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지. 이런 상황에서 2010년 하반기부터 포항시립극단의 공연을 전면 유료화했고, 그 결과 유료 관객과 입장 수입이 증가하게 되었어.당시 ‘경북매일신문’은 ‘포항시립연극단 유료 공연 시행 1년’이라는 제목으로 포항시립극단의 성공적인 유료화를 다루었다.“포항시립연극단(상임 연출 김삼일)이 지난해 11월 포항시립예술단 3개 단체(교향악단, 합창단, 연극단) 가운데 제일 먼저 유료화를 시행한 뒤 지난 1년 동안 유료 관객 1만 3천762명에 총 입장 수입 4천516만 원을 올려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특히 지난 11월 24일부터 12월 4일까지 포항시립 중앙아트홀(객석수 270석)에서 11일간 18회의 장기 공연을 한 셰익스피어 작, 김삼일 연출 ‘햄릿’은 4천64명의 유료 관객이 모여드는 기적을 연출하는 등 대성공을 거둬 시민들로부터 재공연을 해야 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경북매일신문 2010년 12일 20일자헌 : 공연을 전면 유료화한다는 것은 작품에 자신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포항시립극단이 작품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맘때쯤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렸습니까?김 : ‘햄릿’을 비롯해 셰익스피어 4대 비극과 ‘베니스의 상인’, ‘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을 공연했지. 이 7대 작품을 20일에서 한 달까지 장기 공연했어. 포항시립극단 작품 공연 유료화와 함께 세계 고전 명작의 장기 공연 시대를 열었지. 김삼일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9-07

열정 하나로 지역에 연극의 뿌리내려

포항 최초의 극단 ‘은하’는 연습 장소가 없어 고생하다가 포항에 현대식 공연장인 시공관(市公館)이 건립되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무관심과 예산 지원 부족으로 또다시 위기에 처한다. 그 전말을 들어보았다. 헌 : 당시 포항에서 연극 연습할 장소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김 : 있을 리가 없었지. 연습 장소가 마땅치 않아 동빈부두에서 하다가 수도산, 북부해수욕장을 찾아다니다가 심지어 상원동 골목에서 연습하기도 했지. 하루는 골목에서 연습하고 있었는데 처음 뵙는 분이 대뜸 묻는 거야. “여기서 와 이라노”라고. 그분이 바로 이명석 선생이었지. 이명석 선생이 나를 시내에 있는 청포도다방에 데리고 가 박영달 선생을 소개해주셨어. 박영달 선생이 주시던 삶은 달걀 기억이 나는군. 이명석 선생이 연습 장소뿐만 아니라 많은 도움을 주셨어.헌 : 그런 상황에서 1960년 포항 육거리에 현대식 공연장인 시공관이 개관한 것은 포항 연극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겠습니다.김 : 당시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큰 사건이었지. 대구도 공회당 같은 곳에서 연극을 하고 음악·무용 발표회를 했는데, 인구 6만 명밖에 안 되는 포항에서 600여 석의 현대식 극장이 들어선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어.헌 : 포항 최초의 장막극(長幕劇, 2막 이상으로 이루어진 긴 연극)을 그곳에서 올렸지요?김 : 시공관 명칭을 시민회관으로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범석의 ‘별은 밤마다’를 무대에 올렸지. 1966년 9월로 공연 날짜를 잡고 포항문화원과 포항소방서 강당에서 연습했던 기억이 나는군.헌 : 1980년대 후반에 시민회관 매각설이 돌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김 : 1988년에 실제로 시민회관 매각설이 시중에 돌아다녔고, 연극인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 만약 시민회관이 민간에 매각되면 연극인들은 사실상 둥지를 잃게 되는 것이니까. 신상률 선생과 의논 끝에 포항시민회관에 1989년 제7회 전국연극제를 유치하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 다행스럽게 그 일이 성사되면서 국비로 시민회관 내부를 전면 보수하고 조명과 음향 시설도 현대식으로 교체하면서 매각 이야기는 쑥 들어갔어. 연극인들의 힘으로 포항시민회관을 지켜낸 것이지.헌 : 다시 극단 ‘은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은하’는 언제 첫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되는지요?김 : 최동주의 창작극 ‘비와 대화’를 1965년 7월 애린예식장에서 올렸지. 연출은 백야 선생이 맡았어. 애린예식장 좌석이 150개였는데 200명은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지. 그런데 관객은 겨우 4명뿐이었어. 이명석 선생이 인사말을 하면서 호통을 쳤지. 대체 준비를 어떻게 했길래 관객이 4명뿐이냐고. 김삼일은 이런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계속 연극에 매진하면서 지역에 조금씩 연극의 뿌리를 내렸다. ‘포항 연극 100년사’에 그 과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고 1966년 하유상 작, 김삼일 연출 ‘어느 날의 환상’ 공연을 준비한다. 이 작품은 남자 배우 3명이 등장하는데 김삼일과 정정화가 2명의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연기자가 없어 녹음으로 대체하여 공연한다. ‘은하’ 극장의 제2회 공연 ‘어느 날의 환상’은 공연장인 애린예식장에 200여 명의 관객이 몰려 성황을 이룬다. 이에 힘입어 ‘은하’ 극장은 한 해 동안 유치진 작 ‘토막’과 ‘조국’, 차범석 작 ‘별은 밤마다’, 유진 오닐의 ‘고래’ 등 5편의 연극을 이어 공연했다. 특히 ‘별은 밤마다’는 단막극만 해오던 ‘은하’ 극장이 최초로 도전한 2막극으로, 포항시민회관 700석의 객석을 모두 채우고 입석까지 1천여 명의 관객이 모여들어 ‘은하’ 극단이 이후 매년 연극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헌 : 선생님의 연극 인생에서 이해랑 선생과의 인연이 아주 중요한데,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김 : 1966년 신문에서 ‘이해랑 이동극장 단원 모집’ 광고를 봤어. 이 극장에 들어가고 싶더군. 그래서 면접을 보려고 서울에 갔다가 이해랑 선생과 처음 만난 거야. 면접 후에 이해랑 선생이 지방에도 좋은 연극인이 있어야 한다며 포항에서 연극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지.‘이해랑 이동극장’은 어두침침한 소극장에서 뛰쳐나와 넓은 광장에서 대기를 마시며 연극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계몽성 연극 운동으로 시작했는데, 활동 3년 만에 이해랑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막을 내렸다.헌 : 대구에서도 성우 생활을 하셨지요?김 : 1966년에 KBS 대구방송국에서 성우 선발 공고가 나서 응시해 합격했지. 대구에서는 성우, 포항에서는 연극을 하게 된 거야. 그런데 3년 후에 KBS 포항방송국 기자 발령이 나더군. 그 바람에 낮에는 취재 현장을 다니고 저녁에는 ‘은하’ 대표 겸 연출가로 활동했지.헌 : 앞으로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만 그동안 들은 이야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연극에 대한 열정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여러모로 힘든 여건을 헤쳐나가기가 어려웠을 텐데요.김 : 그래도 그때는 열정 하나로 버틸 수 있었어. 이 무렵 우연히 세계적인 극작가 미국의 유진 오닐이 어촌의 허름한 부두 극장에서 연극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나와 비슷한 처지잖아. 유진 오닐이 나에게 위안도 되고 힘도 되었지.헌 : ‘은하’가 국립극장에서도 공연을 했더군요.김 : 1967년 5월 문화공보부 주최 전국 신인예술상 경연대회 본선에 진출해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지. 지방 극단으로는 최초로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했으니 쾌거였지.헌 : 이맘때 재경 유학생들과 연극을 했던데 어떤 내용인지요?김 : 1967년 12월로 기억해. 포항과 대구를 오가며 연극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지. 덕수동 포항문화원에 들렀는데 이명석 문화원장이 2층 강당에서 재경 유학생들이 연극 연습을 하고 있으니 도와주라고 하시더군. 그날부터 합류해 그들의 연기 지도를 하고 연출도 맡았지. 2개월 정도 연습이 끝나고 1968년 2월 무대에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어. 그해 겨울에는 안톤 체호프 작 ‘청혼’을 준비해 이듬해 2월 국제극장 무대에 올렸는데 500석을 가득 메우는 성황을 이뤘지.1960년대 재경 유학생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이들의 열정은 포항의 황량한 거리를 연극의 열기로 채웠다. 1970년대 초반 재경 유학생회는 ‘심맥회’라는 이름을 짓고 서울에서 정기모임을 가졌다. 1973년 겨울에는 ‘심맥회’ 회원들이 기획, 연출, 출연한 연극 ‘수업료를 돌려주세요’를 포항문화원 강당에 올려 박수갈채를 받았다. 헌 :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은하’가 흔들리게 되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김 :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역사회에서 연극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예산 지원도 신통치 않은 게 가장 컸지. 나는 이때 KBS 포항방송국 기자로 일하면서 ‘은하’ 대표와 연출가 업무를 겸하고 있었거든. 한계에 부딪혔다고 해야 할까. 과로로 입원까지 했어. 어쩔 수 없이 1975년부터 1978년까지 4년 동안 ‘은하’는 정기 공연을 중단하고 말았지.헌 : 그 후의 상황은 어땠습니까?김 : 1979년 5월 포항시민회관에서 김천중 연출로 쥘 르나르 작 ‘홍당무’를 올렸는데 2천여 명의 관객이 몰릴 정도로 대성공이었어. 김천중은 서울 극단 ‘산울림’의 조연출로 활동했는데 직장 문제로 포항에 오면서 나와 최희만 등과 의기투합해 ‘홍당무’를 무대에 올렸지. 이 작품은 ‘은하’의 재기작이 된 셈이야. 여기에서 힘을 얻어 포항에서는 처음으로 뮤지컬 ‘철부지’를 공연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지. 그해 한국연극협회 포항지부가 인준되었고 1981년까지 내가 지부장을 맡았어. 1980년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연출했던 기억도 나는군. 이 공연에서 어머니 역을 맡은 정옥희가 연기력을 인정받았어. 이듬해 차범석의 ‘왕교수의 직업’을 포함해 4편의 작품을 연출했는데 ‘은하’의 힘으로 포항 연극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지.이를 계기로 1981년 10월 22일 극단 ‘은하’는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제1회 향토문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서울신문은 ‘문화 불모지에 꽃 피운 연극예술’ ‘정열만을 지주 삼아 17년, 관객 4명이 4천 명으로’ 등을 내용으로 문화면 머리기사에 ‘은하’를 소개했다. 김삼일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9-05

장생포에서 포항까지, 그리고 극단 ‘은하’ 창단

울산 장생포에서 살던 소년 김삼일은 작은 고래와 헤엄치고 놀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낸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그의 삶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와중에 연극을 만나게 된 것은 인생의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헌 : 울산 장생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데 장생포는 고래가 유명한 곳이지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김 : 나는 우체국에서 근무했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었지. 지금 포항 동빈내항은 수심이 얼마 안 돼 큰 배가 못 들어오지만 과거 장생포항은 수심이 깊어 큰 상선들이 많이 들어왔어. 다섯 살 때부터 수영을 배웠고 수영이라면 자신이 있지. 집에서 방문을 열면 바다가 환히 보였어. 내가 어릴 적에는 참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잡혔지. 고래가 내항으로 들어와 장관을 이루면 우리도 고래 옆에서 같이 헤엄쳤어. 작은 돌고래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그렇게 같이 놀 수 있었고 수많은 갈매기가 그 위를 날아다녔지.헌 : 말만 들어도 환상적인 장면이군요. 그렇다면 연극은 어떻게 접하게 되었습니까?김 : 6·25전쟁이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는데 나 또한 그렇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전쟁이 터졌는데 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피난 가게 되고 유랑극단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어. 포항도 인민군에게 함락되어 안전한 곳이라고는 울산과 부산밖에 없었지. 그런데 우리 집이 피난민들의 거처가 된 거야. 우리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장생포에서 하나뿐인 고래 삶는 집으로 유명했어. 솥에 고래고기를 삶아서 우리 식구와 피난민들이 함께 나눠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유랑극단 사람들도 다른 피난민들처럼 우리 집 마당과 고래 창고에서 잠을 자고 밥도 같이 먹었지. 먹고 자는 일이 해결되자 그들은 고마운 마음에 돈을 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 30대 초반의 삼촌이 연극 소품을 구해주었고. 그러다 삼촌이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주인공도 했지. 나도 어쩌다 극 중에 꼬마 역할이 있으면 참여하게 되었어.헌 : 전쟁 중에도 연극은 했고 그것이 선생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네요.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김 : 울산 장생포동 205번지가 우리 집이었는데 150m 떨어진 곳에 농막이 하나 있었어. 그 농막에서 삼촌이 발성 연습을 했지. 삼촌이 연극에 완전히 빠진 거야. 휴전이 되어 유랑극단이 떠나자 삼촌이 유랑극단을 조직해서 방어진 읍내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지. 삼촌이 신파극단 주인공으로 활약하면서 나도 덩달아 연극에 대한 열망이 커졌어. 국민학교 시절, 독립군으로 열연하는 삼촌을 보고 감동을 받았지. 삼촌처럼 멋진 연기자가 돼 무대에 서보고 싶은 꿈을 품게 된 거야. 그런데 삼촌은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그 농막에서 일찍 돌아가셨지. 그 터는 지금 그대로 남아 있어.헌 : 전쟁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요?김 : 1954년에 장생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3년 후에 울산 대현중학교를 졸업했지. 그리고는 울산 농림고등학교 축산과에 입학했는데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말았어.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실패했거든. 이 바람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쌓여 반항의 나날을 보냈고, 부산 영도에 있던 할머니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가게 되었지. 영도 대평동에 있는 대평약방에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가기로 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어. 온종일 일만 해야 하는 탓에 야간 고등학교에 가는 건 엄두를 낼 수 없는 거야. 그러니 얼마나 실망하고 불안했겠어. 그때 4·19혁명이 터졌지. 대평약방 주인이 자유당 부위원장을 지냈거든. 학생들이 약방 앞에 몰려와 항의하고 난리가 났지. 나는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고 약방이나 지키고 있는 처지를 비관하다가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지. 헌 : 포항에는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습니까?김 : 1959년 그 유명한 사라호 태풍이 지나간 이듬해 식구들이 포항으로 이사를 왔어. 포항은 정조부 때부터 8대에 걸쳐 200여 년 조상이 살았던 곳이야. 우리 가족이 정착한 곳은 항구동인데, 당시 항구동은 오징어, 노가리, 가자미 등을 말리는 천혜의 생선 건조장이었지. 식구들이 포항에 먼저 와 있었고 나는 부산에서 포항으로 가게 되었지. 부산에서 동해남부선을 타면 종착역이 포항역이었거든. 포항역에 내리니까 식구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어. 그렇게 포항에 와서 생선 말리는 일 등을 하며 생계를 도았지.헌 : 학업은 어떻게 이어갔습니까?김 :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았으니까 어떻게든 다시 다녀야 했지.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울산으로 가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울산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고, 1964년 경희대학교 사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헌 : 그리고는 다시 포항에 오시게 되는데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김 : 경희대학교에 입학한 후 KBS 포항방송국에서 전속 성우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했는데 합격되었지. 그렇게 취업이 되고 나서 포항수산대학 경영학과에 재입학했어. 성우 생활과 대학 생활을 병행한 거지. 이때 평생 스승으로 모신 극작가 겸 연출가 신상률 선생과 인연이 되었고, 대학학보사 기자로 일하면서 편집 주간인 한흑구 선생을 만났어.헌 : 학창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없습니까?김 : 6·3한일협정반대운동 때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잡혔지. 밤샘 조사를 받고 풀려나 근신 처분을 받은 기억이 나는군.헌 : 당시 학생들의 문화 활동은 어땠습니까?김 :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문화 활동을 열심히 했지. 대표적인 예로 KBS 포항방송국에서 포항학생방송서클이 진행하는 방송을 내보낸 거야. 포항수산대학에서는 김영호와 내가 주축이 되고, 포항고 양정봉, 동지상고 안석수, 포항여고 최순향과 이순예, 포항수고 김성태가 중심이 되었지. 그 외에도 봄가을에 이명석 선생이 운영하는 애린공민학교 강당에서 예술제를 개최했어. 시 낭송, 연극, 독창, 기악 연주 등 다양하게 했지. 소박하긴 해도 이런 활동 하나하나가 포항 문화예술의 씨를 뿌린 게 아닌가 싶어.헌 : 선생님은 연극계에 어떻게 입문하게 되었습니까?김 : 1964년에 대구에서 극단 ‘태백산맥’이 창단되면서 배우를 뽑았어. 그때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태백산맥’의 창단 멤버가 되었고, 그해 10월 크라브첸코의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의 주인공 역을 맡았지. 이때 평생의 연극 동료가 되는 탤런트 이원종과 연출가 이필동을 만났고.헌 : 포항에서 본격적으로 연극이 시작된 것은 언제인가요?김 :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1963년 12월 KBS 포항방송국이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기 위해 극작가와 성우를 모집하거든. 이듬해 신상률 선생이 극작가로 당선되고, 나를 포함해 전영치, 공설자, 강신홍, 김옥자가 성우로 뽑히지. 신상률 선생이 연출을 맡아 주 1회 30분 분량의 드라마를 제작했어. 한 회를 만들기 위해 성우들끼리 모여 1주일 내내 연습했지.헌 : 라디오 드라마와 연극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요?김 : KBS 포항방송국 차철훈 국장이 극단을 만들어 지역을 계몽해야 한다고 했지. 그런 격려도 있었고 나를 비롯한 동료들도 연극에 대한 열정이 있었어. 그렇게 KBS 포항방송국 성우들이 주축이 돼 1964년 12월 극단 ‘은하’를 창단하게 된 거야. 세찬 겨울바람이 부는 영일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저 하늘의 은하수처럼 우리 극단도 영원하자’는 취지였어. 창단 선언문은 내가 썼지.여기 불모지에 꽃을 심으렵니다.그 꽃이 시들어지고 또 짓밟혀 쓰러져도그치지 않고 또다시 심으렵니다.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샘물을 찾아우리는 발버둥 쳐 푸른 화원을 이 고장에 이룩해 보렵니다.- 극단 ‘은하’ 창단 선언문헌 : 1964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군요?김 : 그해 내 인생에도 포항 연극계에도 의미 있는 일이 잇달아 있었지. 김삼일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31

청년들의 계몽운동으로 시작된 포항 연극

한국 연극사는 1908년에 시작되고, 포항 연극사는 1914년에 시작된다. 불과 6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포항 연극은 100년을 넘어 올해 107주년을 맞이했다. 예술의 변방에서 한평생 연극의 길을 걸었던 한 사람의 인생을 들어본다. 세찬 겨울바람이 부는 영일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은하수처럼 영원하고 싶었던 김삼일 선생의 이야기다.포항 하면 포항제철소가 있는 곳으로나 알려졌을까, 문화예술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척박한 땅이다. 굳이 말한다면 가까운 영일만에서 일제강점기부터 고래가 잡힌 덕에 수산업으로 돈의 유통이 다소는 경기를 돋우었는지 아니면 인근 백사장에서 재배되는 부추와 해송(海松)이 특산물이라는 특징이 있었을 뿐, 포항은 저만치 밀려난 변두리 포구에 불과했다. 그런데 전국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되자 심사위원들은 물론 연극계에서도 그 예상치 못한 결과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포항에 무슨 연극이 있었지?” 하는 믿기지 않은 의구심이 더 컸었다. - 차범석, ‘김삼일론’ 부분헌 :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김 : 가끔씩 지인과 만나 밥 먹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며 그렇게 소일하고 있지.헌 : 선생님을 뵙기 위해 포항 연극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봤는데 올해로 포항 연극이 태동한 지 107주년이 되더군요. 포항 연극의 역사가 이렇게 오래되었는지 솔직히 놀랐습니다.김 : 그럴 수밖에 없겠지. 지역사를 정리한 ‘일월향지(日月鄕誌)’를 보면 1922년 영일 유학생 회장 허방 일행이 여름방학을 맞아 포항시 동빈동 성재수댁 마당에 가설무대를 설치해 놓고 5막극 연극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나와. 바로 이것을 포항에서 공연한 첫 번째 근대 연극 공연으로 보는 것이지. 일본 도쿄에서 신극의 개척자 김우진과 홍해성, 홍난파 등이 연극 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발족한 게 1920년인 걸 고려한다면 포항에서 연극이 얼마나 일찍 태동했는지를 알 수 있지.헌 : 포항의 연극 역사를 살펴보니 포항기독교청년회가 연극 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더군요.김 : 1922년 포항교회(현 소망교회)에서 포항기독청년회가 창립되었고, 이 단체가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지. 연극 공연을 비롯해 음악회, 동화 구연, 웅변대회, 좌담회 등을 주도하면서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어. 창주(滄洲, 현 구룡포)청년회에서도 1924년 12월 10일 구룡포 바닷가에서 마련된 극장에서 촌극과 음악회를 했다는 기록이 ‘포항시사’에 남아 있지. 여남청년회도 교육기관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연극 공연을 했다는 신문 기사도 있어.영일군 형산면 여남청년회는 1925년 3월 8일 오후 7시 지방 발전과 교육기관 설립을 위한 모금 활동의 일환으로 연극 공연을 했는데 많은 성금이 탑재되었다. 얼마나 우리 교육에 목말라했기에 절약 농가가 속출하고 만주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는 동포들이 많은 시기에 기부금을 스스로 내놓았는지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 ‘동아일보’ 1925년 9월 18일자헌 : 일제강점기 때 청년들이 연극을 통해 민족 계몽에 앞장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 밖에 다른 기록도 남아 있는지요?김 : 영일군 기계청년회에서도 청년회 운영 자금을 만들기 위해 연극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당시 신문에 남아 있지. 하지만 1930년대부터 일본의 억압으로 민족 사상을 고취하는 연극은 약화되기 시작했고 1940년대에는 거의 말살되다시피 했어. 그러다가 광복 후에 청년들의 연극 운동이 다시 불붙기 시작해.헌 : 기계청년회 활동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신다면.김 : 포항·영일 지역에서는 기계 청년들이 선봉 역할을 하면서 연극을 통해 광복의 감격을 만끽했지. 기계면 봉계리 치동마을 청년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라는 희곡을 집필해 1945년 10월부터 4개월 동안 마을 창고에서 연습한 후 1946년 정월 보름부터 치동마을에서 공연을 해. 유승광 전 포항시 북구청장에 따르면 봉계리 치동마을의 연극 공연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1955년 정월 보름 마을 창고에서 막을 올려 대성공을 거두지만 창고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공연하는 것은 풍기문란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당초 2회 공연에서 1회로 줄여 당시 시대상을 고발한 계몽극 공연을 했다.그리고 1957년 2월 기계면 봉계리 비료 창고에서 장막극 ‘백합이 지던 날’(각본·연출 이기우, 감독 김연대)을 공연했고, 그 수익금은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야학당 운영비에 보탰다.1962년 추석에는 기계면 현내리 이상완의 창고에서 ‘종아 울어라’라는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은 인기가 많아 기북, 죽장, 신광 등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연극 공연을 했던 기계면 현내리 창고는 현재 음악실로 운영되고 있다.헌 : 포항 연극사에는 일제강점기 때 아동극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더군요.김 : 일제강점기 말기에 접어들면 문화예술 말살 정책으로 친일 연극이 판을 쳐. 그때 포항남부국민학교에 연극에 조예가 깊은 교사가 있었는데 신영식이라는 분이야. 이분이 우리글 우리말을 잘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쳤지. 신영식 선생은 희곡 ‘눈 내리는 겨울밤’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연습을 시켰는데, 이때 발탁된 아이가 KBS 대구방송국장을 역임한 최규열, 동지상고 교장을 역임한 김태영 등이지.헌 : 지역 방송계의 원로인 최규열 선생이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군요. 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 후로 포항 연극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김 : 권영호가 있지. 경주 강동 사람인데 1950년대 중반 포항수고에 입학했어. 그리고 포항수고 학생들을 모아 연극부를 만들었지. 연극에 소질이 있고 열정도 있었던 거지. 창단 공연으로 유치진의 ‘별’을 올렸는데 직접 연출도 하고 출연도 했어. 포항수고 연극부를 이끌고 포항을 비롯해 구룡포, 감포, 안강, 영천, 강구, 영덕, 축산, 후포, 평해, 죽변, 울진 등지로 순회공연을 다녔어. 지금은 엄두도 안 나는 일이지. 당시에 이 지역 사람들이 연극 공연을 한 번이라도 본 일이 있겠어. 그러니 ‘별’을 보고 얼마나 좋아했겠어. 권영호는 미술에도 소질이 있었지. 5막의 배경이 되는 거대한 장치를 혼자 힘으로 모두 제작했다는 거야. 동지여중 연극부를 지도해 희곡 ‘피묻은 선죽교’로 포항시 연극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어. 여하튼 권영호는 대단한 인물이야.헌 : 지금 고등학교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군요.김 : 권영호의 역할은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야. 포항여고에 연극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도 권영호 덕분이지. 권영호의 연극 열정이 포항여고로 옮겨 간 것이니까. 1956년부터 포항여고는 해마다 예술제를 개최했어. 당시 학교 연극부에서는 엉터리 악극단을 공연하는 게 유행이었지. 여성 연극인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고. 포항여고 출신 공설자가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제1기 성우 시험에 합격했는데 포항 연극 최초의 여성 연기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지. 원로 연극인 김삼일 김삼일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29

“포항공대가 건학 이념을 실천하기를 기대해”

포항공대는 박태준 회장의 교육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아낌없는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의 미래에 투자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노벨상 수상자를 낼 수 있는 대학, 첨단 학문을 연구해 미래 먹을거리를 찾아낼 수 있는 대학을 만드는 것이라는 의지가 포항공대 설립을 현실화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포항공대의 오늘을 있게 했는지 궁금했다. 홍 : 포항공대 설립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시죠.이 : 학교 허가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기 위한 학사 계획을 제출해야 했다. 어떻게 학생을 뽑고, 어떤 연구시설을 지을 것인지, 또 어떤 연구자를 교수로 임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상황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분들이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었다. 당시 서울대 공대 학장은 서울대 전체 컴퓨터 용량보다 더 큰 용량의 컴퓨터를 갖추고자 하는 우리의 열정적인 창학(創學) 의지를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분야에서 240명의 학생만 선발하라는 조언도 했다. 당시 문교부 대학정책실장도 큰 도움을 주었다. 포항공대 설립에 힘을 보탠 사람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사원 주택 부지 10만 평을 포항제철 연수원 부지와 기꺼이 바꿔준 조선내화 회장, 4만 평의 땅을 기증한 천신일 세중 회장, 훨씬 비싼 땅을 후대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땅과 맞바꿔준 황대봉 대아그룹 회장 등이 포항공대가 만들어질 수 있게 도움을 준 분들이다.홍 : 포항공대 설립 과정에 여러 사건과 일화가 있을 듯합니다.이 : 주거지역을 학교 지역으로 바꾸는 허가를 낼 때는 당시 이상배 경북도지사가 도움을 줬다. 만약 포항공대 설립 허가가 나지 않으면 다시 주거지역으로 바꾼다는 조건부 허가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문교부 간부와 내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문교부 대학정책실장과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조언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포항공대는 돈을 벌기 위해 만든 대학이 아니라 돈을 쓰기 위해 만든 대학이었다. 포항제철이란 국영기업이 교육에 투자하려는 뜻을 이해한 많은 사람의 도움이 빠른 시간 안에 학교 설립을 가능하게 했다.홍 : 포항공대 초대 학장인 김호길 박사 이야기도 궁금합니다.이 : LG가 경남 진주에 4년제 대학을 만든다고 해서 재미과학자협회장이던 김호길 박사가 한국에 왔다. 하지만 그 작업이 지지부진했다. 그러자 김 박사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연암공전이 4년제 대학이 될 것이라 알고 들어왔는데 정부가 속였다. 그러니 국호를 대한민주공화국이 아니고 대한사기공화국으로 바꾸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대단한 기백이고 또한 괴짜가 아닌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해서 모시려 했는데 거절하다가 포항제철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믿고 포항공대 초대 학장이 되었다.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김호길(1933~1994) 박사는 물리학자이자 교육행정가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메릴랜드대학 교수와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선임과학자, 연암공과대학교 학장을 거쳐 1985년 포항공대 초대 학장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가속기물리학자이자, 한국 첨단 과학기술 교육의 기틀을 닦은 과학교육 개혁가로도 평가받는다.홍 : 그런 분을 초대 학장으로 모신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이 : 박태준 회장과 김호길 박사가 처음 면담할 때 자리를 함께했다. 노벨상을 받는 학교를 만들겠다, 고부가가치 연구에 중점을 두겠다, 철강이 아닌 다른 먹을거리도 찾아내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대뜸 김호길 박사가 박 회장에게 “당신은 쇠만 만드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뭘 아는 사람이네요”라고 했다. 하긴 전두환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못 할 것도 없었다. 나는 중간에서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앞으로 20년 후 포항제철 부속 포항공대가 아닌, 포항공대 부속 포항제철이 되면 박 회장이 내 밑으로 들어오시라”는 말에 박태준 회장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내게 지시했다. “초창기에는 김호길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 다른 사람 찾지 말고 무조건 김호길 박사를 학장으로 모셔오라”고.홍 : 김호길 학장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겠습니다.이 : 김호길 박사와 독일 아헨 공대(RWTH Aachen University)에 갔을 때다. 김 박사는 박태준 회장이 기업을 운영하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교육 전문가가 아닌데 좋은 대학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런 의문을 씻어준 일화다. 우리가 머물던 아헨의 호텔로 박 회장이 전화를 걸었다. 마침 국제철강협회 일로 영국 런던에 있을 때였다. 박 회장이 내게 “포항공대에 오려는 학자들이 많으냐? 그분들은 주로 무슨 질문을 하더냐”라고 묻길래, “박 회장은 교수들 조인트도 까느냐라고 물어서 철강 공장에서 신는 안전화 앞부분엔 철이 들어가 있다. 그걸 확인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조인트를 까는 것이 아니다. 유치원 젊은 교사들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사람이 박태준 회장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 회장이 크게 웃었다. 이 대화를 옆에서 듣던 김호길 박사가 “기업의 최고 경영자와 부하 직원이 이처럼 격의 없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는 분위기를 보니 포항공대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홍 : 교수 초빙 과정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이 : 포항공대는 처음부터 학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최고 연봉을 받던 다른 사립대 교수보다 월급을 20퍼센트 더 지급했다. 학교가 세워질 즈음 나와 김호길 학장 둘이서 세계를 돌며 스무 군데가 넘는 대학을 다녔다. 한국 교수가 많은 대학 도시들이었다. 미국 보스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다. 포항공대와 인근에 연구 조건, 생활 조건, 자녀들의 교육 조건까지 고려한 여러 시설을 만들었다. 연구자 우선의 풍토가 생긴 것이다. 교수들은 자녀 교육을 제일 중요시했다. 이를 예언한 듯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까지 포항에 만들어 최고의 교육 환경을 조성했다. 교수로 올 분들에게 “서울 이상의 자녀 교육 인프라를 갖춘 도시가 포항”이라고 홍보했다. 최근에 한전공대를 만드는 팀들이 찾아와 포항공대 설립 노하우를 묻기에 가장 먼저 교수 자녀들을 위한 교육 환경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홍 : 포항공대가 첫 입학생을 받은 게 1987년인가요?이 : 그렇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학생들이 왔다. 서울대 공대 커트라인인 학력고사 280점 이상 학생에게만 응시 자격을 줬다. 그게 어떤 효과를 가져왔냐면 ‘포항공대는 불합격한 학생도 280점 이상의 고득점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응시 자격을 제한하는 게 기회균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으나, 로펌에 문의하니 문제될 게 없다는 답변이 왔다.홍 : 지금 포항공대에 거는 기대는 어떤 건지요?이 : 건학 이념의 실천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학교, 고부가가치 연구를 통해 포스코의 경영 다각화에 도움을 주는 학교가 되길 바란다. 1989년에 노벨상 수상자 부부 10명을 포항에 초청했다. 그들을 포항제철이 만든 초등학교로 모셨다. 노벨상 수상자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만약에 아빠와 엄마의 팔이 세 개라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나요”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1~2학년들은 신이 나서 손을 들고 “높은 선반에 놓인 과자를 쉽게 먹을 수 있어요”, “농구를 하면 최고의 선수가 될 것 같아요”라며 시끌벅적 대답을 내놓는데 고학년 교실로 갈수록 손을 들고 대답하는 아이가 없었다. 그때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이 “왜 학년이 높을수록 학생들이 경직돼 있나요? 이 학교에선 1년에 유리창이 몇 장이나 깨지죠?”라고 물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한 장도 깨지지 않는다”고 답하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이 학교 학생들 중에선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에피소드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홍 : 앞으로 한국 교육이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이 : 아이들의 적성을 살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르치는 사람들부터 다음 세대의 발전 포인트가 어디에 있고, 어떤 인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미래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 중 가장 가치 있는 게 교육에 대한 투자라고 믿는다. 박태준 회장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기도 하다. 교육에 투자하는 건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다.홍 : 끝으로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시죠.이 :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서는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한 번쯤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우선 먹기 좋은 달콤한 곶감보다 현재는 고생되지만 앞날의 열매를 수확하려 노력을 아끼지 않는 청년들을 응원하고 싶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24

“포항공대 건설본부 설립 후 22개월 만에 포항공대 만들어”

포항제철을 이야기할 때 박태준 회장을 빼놓을 수 있을까? ‘철강왕’ 박태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대공 이사장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오랜 시간 박 회장의 진면목을 지켜볼 수 있었다. 홍 : 박태준 회장과 오랜 시간 일했습니다.이 : ‘포항제철=박태준’이 아닐까. 무섭게 가차 없이 일처리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한 번은 포항제철에서 철근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모든 현장마다 철근을 풍족하게 책정했으니 과다 계상된 철근을 빼내 외부에 파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포항 언론인들에게 듣고 내가 적발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박태준 회장이 다른 기업에서 대표로 있을 때 물건을 빼돌리던 조직폭력배들과 맞붙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었다. 과거에 큰 공을 세운 직원이었던 것이다. 내 보고를 들은 박 회장은 “그는 목숨을 걸고 고생하며 회사에 공헌한 사람인데, 내보내더라도 명예롭게 퇴직시켜야 한다”고 했다. 결국 철근을 빼돌린 사람은 절도가 아닌 사물함 정리정돈 불량으로 회사를 나가게 되었다. 박 회장의 뜻을 알아차린 그가 눈물을 보이던 모습이 기억난다.홍 : 박태준 회장의 품성을 보여주는 다른 일화도 있는지요?이 : 1973년 포항제철을 만들 때의 이야기다. 직위가 높건 낮건 목표치를 정해 현장에서 콘크리트 타설 일을 했다. 목표가 한 달에 700㎥였는데, 단 1㎥가 모자란 699㎥를 타설한 사람을 대기발령했다. 냉정함을 보여 모든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연말에는 그 직원을 사면했다. 박 회장은 원리원칙과 따스함, 냉철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다. 한 번은 여자 문제를 일으킨 간부 직원 한 명이 미국으로 연수를 간 적이 있다. 징계와 관련된 인사 명령을 내리면 귀국하지 않을 것을 알고 해외 지사장 회의를 개최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귀국시켰다. 한 여성의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포항제철 해외 지사장 모두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홍 : 이사장님 삶에서 포항제철은 어떤 의미인가요?이 : 아이덴티티(identity)이자 자부심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뤄가던 획기적인 일터였다. 마지막에는 오해로 인해 곤혹스러움도 겪었지만 내 인생 자체였다. 2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내가 곧 회사고, 회사가 곧 나’라는 생각으로 살았다.홍 : 포항과 포항제철은 어떤 관계입니까?이 : 불가분의 관계다.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 본사를 포항으로 정했다. 더 큰 규모의 광양이 아니었다. 애초에 포항제철 건설은 정부가 주도했다. 그럼에도 의도하지 않게 토지 매입 단계 등에서 많은 포항 시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본사를 포항에 두고 세금을 포항에 내려고 했다. 한때 포항제철은 지방세를 1,000억 원 이상 납부했다. 그게 포항 발전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홍 : 광양제철소 건설 때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이 : 광양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광양제철소가 들어서는 지역은 개펄이 많았다. 거기서 조개 등을 캐 생활비를 벌고, 아이들의 학비를 해결하던 지역민들이 보상을 요구했다. 얼마만큼의 조개를 채취했고, 어느 정도의 돈을 벌었는지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었다. 어판장이나 수협에도 그런 자료는 없었다. 재판을 한다면 광양 주민들이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박태준 회장은 “가능하면 지역민들의 요구대로 해주라”고 말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보상금의 규모가 수백억 원이었다. 박 회장은 땅과 개펄에서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홍 : 지금의 포항제철을 지켜보는 심경은 어떤가요?이 : 박 회장은 돌아가실 때까지 포항제철이 정치에 휘둘리는 것을 아쉬워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다. 박 회장 때부터 포항제철 고위 간부들은 사돈의 팔촌도 특별대우를 해서 회사에 취직시켜주지 않았고 지금도 그 원칙을 지켜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좋은 전통은 지켜가야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홍 : 포항제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 : 이제는 철강 일변도로 나가지 말고 선진국의 철강 기업들처럼 경영 다각화에 힘썼으면 하는데,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교육사업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예전에 포항공대를 만든 것도 그런 뜻에서다. 기초과학을 통해 노벨상 수상자를 내고, 응용과학을 통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포항제철이 지향해야 할 미래다. 창업 정신을 기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떤 정치적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박태준 회장이 종이 마패를 만들던 심정으로 임직원 모두가 사심 없이 일하기를 기대하고 부탁한다. 홍 : 포항제철이 포항공대를 만들기 위한 준비는 언제부터 했습니까?이 : 포항공대 건설본부 설립은 1985년 2월 5일이다. 설립 3년 전부터 당시 포철장학회에서 기획하고 준비했다. 내가 포항제철연수원장으로 있을 때 박태준 회장이 찾아와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기초과학을 가르치고 배워 노벨상 수상자를 빨리 배출해야 하고, 응용과학을 통해 고부가가치 연구를 해야 한다는 뜻을 들었다. 지속적으로 포항제철을 발전시키기 위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건설본부 조직이 만들어졌다. 내가 본부장을 맡았다. 그 시기에 포항의 산업체 근로자를 위시해 시민 11만여 명이 포항에 4년제 대학을 만들어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그때는 4년제 대학 설립이 쉽지 않았다.홍 : 포항공대를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이 : 박태준 회장이 현직에 있을 때 여러 번 이야기했다. “나는 쇠 만드는 공장과 함께 사람 만드는 공장도 세웠다”고. 쇠 만드는 공장은 제철소, 사람 만드는 공장은 14개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 그리고 포항공대를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게 박 회장의 의지였다. 포항공대 건설본부장으로 일하며 박 회장의 지시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다녀왔다. 귀국 후에 박 회장이 “거기 대학들은 얼마나 됐느냐”고 물어서 “600년이 넘었습니다”라고 답하니 “우리도 그처럼 6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대학을 만들자”며 격려했다.홍 : 교육에 대한 철학과 학교 설립 의지가 대단했군요.이 : 옥불탁불성기(玉不琢不成器),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아무리 좋은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포스코교육재단에 박태준 회장의 휘호가 남아 있다. 나 역시 포스코교육재단에서 오래 일했다.홍 : 포항공대가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겠습니다.이 : 세계 각국의 여러 대학을 다녔다. 벤치마킹한 건 캘리포니아공대다. 그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고 고부가가치 연구도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1984년쯤 박태준 회장 부부가 그 대학 부총장을 만나 “우리도 이처럼 좋은 대학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전하니, 한국을 낮춰보고 “준비와 설립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우려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기가 생겼고, 결국은 건설본부 설립 후 1년 10개월 만에 포항공대를 만들었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2021-08-23

“박태준 회장 물러나고 검찰 조사받아”

지금보다 한 세대 전 직장인들은 개인생활을 희생하며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떤 보람과 긍지가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건지 요즘 청년들은 궁금해한다.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 직장생활의 기쁨과 환멸에 대해 들어봤다. 더불어 1993년 포항제철이 겪은 위기에 관해서도 물었다. 홍 : 누구보다 바쁜 인생을 살았습니다. 혹시 취미가 있으신가요?이 : 스쿠버다이빙을 좋아한다.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이라 대여섯 살 때부터 동빈내항에서 수영을 했다. 배를 매어놓은 밧줄을 잡고 개헤엄을 쳤다. 한 번 시작하면 한두 시간을 물에 있었다. 1971년에 포항 해병대 장교를 알게 돼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했는데, 최근에도 시간이 나면 가끔 하고 있다.홍 : 중년이 된 이후에 젊은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이 : 1990년대 들어서면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세력이 부각되었고, 아주 다양한 문화가 등장했다. 직업도 다양해졌고, 청년들이 다음 세대의 먹을거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모습도 보았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를 중심으로 모든 걸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마디로 사회가 다양화되고 진취적으로 변한 것 같다.홍 : 1980~1990년대에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해주시죠.이 : 포항제철은 1980년대 후반에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과 미래를 논의한 적이 있다. 철강만 만들어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박태준 회장의 판단에서였다. 미국 철강회사들도 사업을 다각화했다. 향후 철강산업이 사양화된다는 걸 내다본 것이다. 이에 박 회장이 소프트뱅크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정보통신과 소프트웨어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해서였다. 그즈음 손정의 사장이 한국에 두 차례 들어와 포항, 광양, 서울 등지에서 원격 영상회의를 함께했다. 평소 박태준 회장은 한 달에 30권의 책을 읽었다. 읽은 책에서 참고할 게 있으면 메모해 임원들에게 보여줬다. 철강업이 사양화되고 후발국에 밀린다는 걸 책을 통해 예측했을 것이다. 사업의 다각화를 위한 소프트뱅크와의 양해각서 체결은 박 회장의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에 “10년 후에는 첨단산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포항제철과 광양제철 사업 수입의 몇 배가 될 것”이란 박 회장의 말을 대부분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 소프트웨어 산업이 이렇게 성장할 것이라고 쉽게 예측할 수 없었던 탓이다.홍 : 1980년대 후반에 포항에서도 노동운동이 시작되었지요?이 : 1987년에 노조 담당 상무가 되었다.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 시기다. 포항제철은 일사불란한 분위기였는데 노동조합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급진적인 노동문화가 생겨나던 때여서 힘들었다. 노동조합과 타협, 이해관계 조정 등을 위해 노력했다. 새벽까지 노조와 협상하고 소주도 마시고 그랬다.홍 : 잊을 수 없는 일화 하나 더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이 : 1973년 6월 9일 아침 7시 30분 세계가 포항을 주목했다.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제대로 나오는지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기대를 만족시키듯 쇳물이 쏟아졌고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데 오직 박태준 회장 한 사람만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진이 찍혔다. 다른 언론사 사진기자들은 쏟아지는 쇳물에 포커스를 맞추는데 그때 누군가 박 회장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런데 그 사람이 퇴직할 때 사진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다며 그 사진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을 돌려달라고 하니 거절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사진을 찍은 카메라는 당신 것이 아니고 회사 소유이며, 근무시간에 찍은 것이니 당신은 업무 수행 중이었다. 그러니 사진의 소유권은 당신이 아닌 회사”라고 설득해 결국 돌려받았다. 그 사진은 포항제철 역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6월 9일은 철의 날이다. 이날은 1973년 6월 9일 한국 현대식 용광로에서 처음 쇳물이 생산된 날을 기념해 제정되었다. 포항제철만이 아니라 국내 철강업계 역사로 볼 때도 의미가 큰 날이다. 포스코 뉴스룸은 “1968년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설립된 이후 5년여 만인 1973년 6월 9일 처음으로 쇳물을 생산하게 되었다. 바로 그날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용광로에서 생산된 쇳물 덕분에 지금의 포스코, 한국의 철강업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후 포항제철은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는 가운데 세계 최대의 제철소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됐고, 1992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 완공을 통해 철강 생산 2천100만t의 25년 대역사가 마무리되었다”고 쓰고 있다. 홍 : 1993년 포항제철에 위기가 왔지요?이 :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정치적 울타리가 없어졌다. 박태준 회장이 정치권으로 간 것은 포항제철을 잘 지키며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사심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포항에 20년 이상 내려와 있는 박 회장을 그리워한 딸이 결혼하면서 보내온 편지가 기억난다. 1992년 10월에 광양제철소 준공식이 끝난 후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박태준 회장에게 했다. 박 회장은 “나는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니 전면에 나서기 어렵다”고 사양했다. 여러 사람들이 “제의를 수락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으나 박 회장은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박태준이 김영삼에게 비판적’이라는 말이 세간에 돌았다.홍 : 검찰 조사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이 : 1993년 6월에 박태준 회장과 나를 포함한 포항제철 주요 간부들이 출국금지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리 정보를 알게 된 박 회장은 그전에 일본으로 갔다. 우리 임원들 중 누구도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다. 내가 부정한 돈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나름대로 검찰 조사 준비를 철저히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무혐의였다. 추정컨대 정치권에서 우리를 밉게 봤던 것 같다.홍 : 검찰 조사 때 어떤 일이 있었나요?이 : 대검에서 조사받을 때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었다. 신발도 고무신으로 바꿔 신었다. 지금 시각으로는 명백한 인권침해고 불법행위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내 수첩에 청와대와 안기부 인사의 전화번호가 왜 적혀 있는지도 따져 물었다. 검찰은 내가 제시한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국세청과 출입국관리소에 직접 전화까지 했다. 40시간가량 잠을 재우지 않으니 힘들었다. 어쨌건 검찰청에 들어간 다음 날 자정쯤 가져간 넥타이와 허리띠를 가져다주며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그날 저녁 화장실에서 만난 포항제철 임원 한 명이 “저녁을 먹지 않은 사람은 오늘 나간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구속할 것이 아닌데 집으로 갈 사람에게 밥을 먹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홍 : 인생의 큰 고비로 여겨지는데, 또 기억나는 일은 없는지요?이 : 후배 윤석만(전 포스코 사장)이 생각난다. 1993년 내가 검찰의 감시를 받는 와중에 그가 집 앞으로 찾아와 전화를 걸었다. “지금 전화가 도청되고 있을 텐데 어쩌려고 하느냐” 물으니 “선배님은 기독교 장로고, 저는 불교 신자 아닙니까. 여기에 있건 감옥에 가건 다 신의 뜻인데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범하고 능력도 뛰어나고 의리까지 보여준 사람이다. 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17

“박태준 회장의 신임 덕분에 48세에 부사장 승진”

‘우향우 정신’과 ‘종이 마패’는 급격하게 성장하던 포항제철의 상징처럼 회자된다. 많은 시민이 포항제철과 연관되어 살아가던 당시의 포항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홍 : 포항제철이 한창 건설되던 시기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이 : 포항제철은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만들어진 기업이다. 조상들이 겪은 수난의 대가로 건설하는 포항제철은 실패해서는 안 되는 회사였다. 박태준 회장의 ‘우향우 정신’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포항제철의 앞날이 어두웠다면 몇 사람의 사표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박 회장은 진짜로 영일만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 장군이 말한 ‘생즉사 사즉생’과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포항제철과 관련된 기록영화 ‘고난과 시련 그리고 영광’에는 박 회장이 “목숨을 걸고”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홍 : 1980년대는 포항이 성장가도를 달리던 시기였죠.이 : 포항제철이 포항과 광양에 양대 제철소를 짓고 그야말로 세계 굴지의 제철소로 도약하던 시기였다. 광양제철소는 박태준 회장의 결정과 의지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에 서거해 광양제철소 완공을 보지 못했다. 광양제철소 완공은 1992년 10월이었다. 입지 선정 때 광양에 하느냐, 아산에 만드느냐로 의견이 갈렸다. 아산은 배가 접안하기 어렵고, 수로 확보도 어려웠다. 광양제철소 건설을 결정한 건 전두환 대통령이다. 포항과 광양을 합쳐 철강 생산량 2,100만 톤을 달성했다. 포항제철 건설을 시작한 지 24년 6개월 만이었다.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에도 고도성장하면서 일면 조업, 일면 건설을 지속했다.홍 : 포항제철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어느 정도였습니까?이 : 철강업은 국가기간산업이라 파급효과 역시 상당하다. 포항제철이 생기면서 자동차, 조선, 가전, 건설업 등 관련 사업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경우 제철업이 석유화학 사업보다 관련 사업 파급도가 더 크다. 나는 40대에 이사가 됐고, 1985년에 상무, 1989년에 부사장이 돼 최선을 다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홍 : 포항 시민들은 포항제철에 우호적이었나요?이 : 대부분의 시민들이 포항제철에 협조하고 박수를 보내며 응원했다. 독불장군으로 우리만 잘한 게 아니다. 포항시, 경상북도, 대한민국이 함께했다. 특히 광양제철소 건설은 동서 화합에도 일조했다. 국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포항제철의 역할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홍 : 포항제철이 지역 발전에 기여한 내용도 궁금합니다.이 : 영세했던 협력업체들이 튼튼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철강산업공단도 형성되었다.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업계에서 주목받았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에게 “우리도 포항제철과 똑같은 공장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이나야마 회장이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포항의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좋아졌다. 다수의 협력업체들이 중견기업으로 도약했다. 조선내화는 내화벽돌을 만들었는데, 포항제철에 고열고압 벽돌을 납품하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포항 시내가 활기를 띠고, 교육열도 더욱 높아졌다. 포항제철은 박태준 회장의 의지를 발판 삼아 지역에 14개의 유·초·중·고등학교를 만들었다.홍 : 포항제철이 비약적 성장을 이룬 바탕에는 뭐가 있을까요?이 : 미국의 하버드대학, 스탠포드대학 MBA 과정에 포항제철의 성공 사례가 과목으로 개설됐다. 거기서도 우리의 성공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의 노무라연구소와 미쓰비시연구소에서도 포항제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연구했다. 원료를 저렴하게 구입했고, 공사 기간을 단축했으며, 기술 습득이 빨랐던 게 이유였다. 초기에 열간압연(熱間壓延) 공장에서 빠르게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박태준 회장의 일본 인맥과 유창한 일본어가 큰 역할을 했다. 원활한 소통을 통해 신뢰감을 준 것이다.홍 : 제철소가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겠습니다.이 : 경상북도에서 조사한 걸 봤는데 포항제철에서 일하는 지역민은 30퍼센트쯤 되었고, 광양제철소에서는 호남 사람들이 40퍼센트가량 일했다. 그만큼 고용효과가 컸다. 비단 제철소에 근무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관련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들이 드나드는 식당과 주점, 숙박업소 등을 모두 합하면 직간접적으로 포항제철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민들의 숫자는 엄청났다.홍 : 1970~1980년대 노동자들의 일상이 궁금합니다.이 : 퇴근 후 당구장에도 가고 음식점과 술집 등에서 여가 시간을 즐겼다. 포항제철에서 만들어낸 경제적 부를 포항시에서 소비하고 도시를 발전시켰다. 1970년대부터 효자동에 주택단지도 만들었다. 당시 포항제철 작업복은 철강과 같은 쇳물 색깔이었다. 그 옷이 포항 시내에 넘쳐났다. 그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풍경도 장관이었다. 작업복을 입고 술집에 가지 말라는 회사의 지시를 철회해달라고 업소 주인들이 부탁하기도 했다.홍 : 1980년대 정권의 경영 간섭은 없었나요?이 : 천만다행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는 경제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포항제철의 인사나 경영 등에서 압력을 받은 적은 없다.홍 : 전설처럼 전해지는 ‘종이 마패’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이 :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회장을 믿고 국영기업체인데도 조달청이 아니라 포항제철에서 필요한 물품을 직접 구입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래야 물품을 구입할 때 중간에서 누가 장난을 치지 못하니까. 박태준 회장이 자율권을 가지고 경영할 수 있도록 해준 배려가 ‘종이 마패’에 담긴 뜻으로 볼 수 있다. 박 대통령 서거 후에는 외압을 막으려고 박태준 회장이 정계에 진출했다.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포항제철을 바깥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정계 진출이었다.포항제철 건설 초기에 회사를 외압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 ‘종이 마패’는 박태준 회장의 메모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서명한 문서다. ‘포스코 50년사’에는 “이 한 장의 종이가 제철소 설비와 원료를 구매할 때 정치자금이나 리베이트(rebate)를 요구하는 이들을 막아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박태준 회장의 지갑 속에 늘 간직돼 있던 종이 마패는 현재 포스코역사관에 보관 중이다. 홍 : 한 직장에서 24년을 보냈습니다. 어땠나요?이 :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 과장 때 박태준 회장에게 발탁돼 차장, 부장, 이사, 상무, 부사장으로 평균 3년마다 진급했다. 마흔여덟 살에 부사장이 되었다. 전례가 드문 초고속 승진이었다. 모든 외압은 박태준 회장이 막아줬다. 내 사번이 39번이다. 포항제철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입사했다. 과장 때인 1973년부터 시작해 1993년까지 만 20년을 임원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이다. 모두 박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항제철에서 나오던 ‘쇳물’이란 월간지에 박태준 회장의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우스개처럼 글을 써서 호되게 야단을 맞은 것 외에는 어려움 없이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었다.홍 : 1980년대 직장 문화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이 : 그때는 죽기 살기로 일했기 때문에 오전 근무만 하는 토요일에 회식을 했다. 그런데 회식할 때도 반드시 비상연락망은 가동시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박태준 회장이 호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대라 호출기를 차고 다녔다. 그러니 회식 때도 마음 놓고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홍 :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이 : 우리 세대는 회사와 나라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헌신감과 사명감으로 일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지금 젊은이들은 다양성을 추구한다. 우리 세대는 눈앞의 목표를 보고 달렸는데, 이제는 다양한 길이 열려 있는 것 같다. 내 자식들만 봐도 그렇다. 돈벌이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이런 풍조가 세계적인 흐름 같기도 하다.이대공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

2021-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