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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하나로 지역에 연극의 뿌리내려

등록일 2021-09-05 19:03 게재일 2021-09-06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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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일 ③<br/>극단 ‘은하’의 고군분투와 위기
차범석 작 ‘별은 밤마다’ 공연을 하고 있는 극단 ‘은하’(1966).

포항 최초의 극단 ‘은하’는 연습 장소가 없어 고생하다가 포항에 현대식 공연장인 시공관(市公館)이 건립되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무관심과 예산 지원 부족으로 또다시 위기에 처한다. 그 전말을 들어보았다.

“연습 장소가 마땅찮아 동빈부두·수도산을 찾아다니다가 심지어 골목서 연습 했지

그러다 골목에서 이명석 선생을 만났지. 연습 장소뿐만 아니라 많은 도움을 주셨어”

“1960년 포항 육거리에 시공관이 개관한 것은 당시 문화예술 분야서 큰 사건이었지.

전국 신인예술상 경연 본선에 오른 ‘은하’는 지방 극단 최초 국립극장 연극도 했지”

헌 : 당시 포항에서 연극 연습할 장소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 있을 리가 없었지. 연습 장소가 마땅치 않아 동빈부두에서 하다가 수도산, 북부해수욕장을 찾아다니다가 심지어 상원동 골목에서 연습하기도 했지. 하루는 골목에서 연습하고 있었는데 처음 뵙는 분이 대뜸 묻는 거야. “여기서 와 이라노”라고. 그분이 바로 이명석 선생이었지. 이명석 선생이 나를 시내에 있는 청포도다방에 데리고 가 박영달 선생을 소개해주셨어. 박영달 선생이 주시던 삶은 달걀 기억이 나는군. 이명석 선생이 연습 장소뿐만 아니라 많은 도움을 주셨어.

헌 : 그런 상황에서 1960년 포항 육거리에 현대식 공연장인 시공관이 개관한 것은 포항 연극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겠습니다.

김 : 당시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큰 사건이었지. 대구도 공회당 같은 곳에서 연극을 하고 음악·무용 발표회를 했는데, 인구 6만 명밖에 안 되는 포항에서 600여 석의 현대식 극장이 들어선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어.

헌 : 포항 최초의 장막극(長幕劇, 2막 이상으로 이루어진 긴 연극)을 그곳에서 올렸지요?

김 : 시공관 명칭을 시민회관으로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범석의 ‘별은 밤마다’를 무대에 올렸지. 1966년 9월로 공연 날짜를 잡고 포항문화원과 포항소방서 강당에서 연습했던 기억이 나는군.

헌 : 1980년대 후반에 시민회관 매각설이 돌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김 : 1988년에 실제로 시민회관 매각설이 시중에 돌아다녔고, 연극인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 만약 시민회관이 민간에 매각되면 연극인들은 사실상 둥지를 잃게 되는 것이니까. 신상률 선생과 의논 끝에 포항시민회관에 1989년 제7회 전국연극제를 유치하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 다행스럽게 그 일이 성사되면서 국비로 시민회관 내부를 전면 보수하고 조명과 음향 시설도 현대식으로 교체하면서 매각 이야기는 쑥 들어갔어. 연극인들의 힘으로 포항시민회관을 지켜낸 것이지.

헌 : 다시 극단 ‘은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은하’는 언제 첫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되는지요?

김 : 최동주의 창작극 ‘비와 대화’를 1965년 7월 애린예식장에서 올렸지. 연출은 백야 선생이 맡았어. 애린예식장 좌석이 150개였는데 200명은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지. 그런데 관객은 겨우 4명뿐이었어. 이명석 선생이 인사말을 하면서 호통을 쳤지. 대체 준비를 어떻게 했길래 관객이 4명뿐이냐고.

 

‘조국’ 공연을 마친 ‘은하’ 단원과 관계자들. 윗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김삼일(1966).
‘조국’ 공연을 마친 ‘은하’ 단원과 관계자들. 윗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김삼일(1966).

김삼일은 이런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계속 연극에 매진하면서 지역에 조금씩 연극의 뿌리를 내렸다. ‘포항 연극 100년사’에 그 과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고 1966년 하유상 작, 김삼일 연출 ‘어느 날의 환상’ 공연을 준비한다. 이 작품은 남자 배우 3명이 등장하는데 김삼일과 정정화가 2명의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연기자가 없어 녹음으로 대체하여 공연한다. ‘은하’ 극장의 제2회 공연 ‘어느 날의 환상’은 공연장인 애린예식장에 200여 명의 관객이 몰려 성황을 이룬다. 이에 힘입어 ‘은하’ 극장은 한 해 동안 유치진 작 ‘토막’과 ‘조국’, 차범석 작 ‘별은 밤마다’, 유진 오닐의 ‘고래’ 등 5편의 연극을 이어 공연했다. 특히 ‘별은 밤마다’는 단막극만 해오던 ‘은하’ 극장이 최초로 도전한 2막극으로, 포항시민회관 700석의 객석을 모두 채우고 입석까지 1천여 명의 관객이 모여들어 ‘은하’ 극단이 이후 매년 연극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헌 : 선생님의 연극 인생에서 이해랑 선생과의 인연이 아주 중요한데,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김 : 1966년 신문에서 ‘이해랑 이동극장 단원 모집’ 광고를 봤어. 이 극장에 들어가고 싶더군. 그래서 면접을 보려고 서울에 갔다가 이해랑 선생과 처음 만난 거야. 면접 후에 이해랑 선생이 지방에도 좋은 연극인이 있어야 한다며 포항에서 연극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지.

‘이해랑 이동극장’은 어두침침한 소극장에서 뛰쳐나와 넓은 광장에서 대기를 마시며 연극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계몽성 연극 운동으로 시작했는데, 활동 3년 만에 이해랑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막을 내렸다.

헌 : 대구에서도 성우 생활을 하셨지요?

김 : 1966년에 KBS 대구방송국에서 성우 선발 공고가 나서 응시해 합격했지. 대구에서는 성우, 포항에서는 연극을 하게 된 거야. 그런데 3년 후에 KBS 포항방송국 기자 발령이 나더군. 그 바람에 낮에는 취재 현장을 다니고 저녁에는 ‘은하’ 대표 겸 연출가로 활동했지.

헌 : 앞으로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만 그동안 들은 이야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연극에 대한 열정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여러모로 힘든 여건을 헤쳐나가기가 어려웠을 텐데요.

김 : 그래도 그때는 열정 하나로 버틸 수 있었어. 이 무렵 우연히 세계적인 극작가 미국의 유진 오닐이 어촌의 허름한 부두 극장에서 연극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나와 비슷한 처지잖아. 유진 오닐이 나에게 위안도 되고 힘도 되었지.

헌 : ‘은하’가 국립극장에서도 공연을 했더군요.

김 : 1967년 5월 문화공보부 주최 전국 신인예술상 경연대회 본선에 진출해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지. 지방 극단으로는 최초로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했으니 쾌거였지.

헌 : 이맘때 재경 유학생들과 연극을 했던데 어떤 내용인지요?

김 : 1967년 12월로 기억해. 포항과 대구를 오가며 연극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지. 덕수동 포항문화원에 들렀는데 이명석 문화원장이 2층 강당에서 재경 유학생들이 연극 연습을 하고 있으니 도와주라고 하시더군. 그날부터 합류해 그들의 연기 지도를 하고 연출도 맡았지. 2개월 정도 연습이 끝나고 1968년 2월 무대에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어. 그해 겨울에는 안톤 체호프 작 ‘청혼’을 준비해 이듬해 2월 국제극장 무대에 올렸는데 500석을 가득 메우는 성황을 이뤘지.

1960년대 재경 유학생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이들의 열정은 포항의 황량한 거리를 연극의 열기로 채웠다. 1970년대 초반 재경 유학생회는 ‘심맥회’라는 이름을 짓고 서울에서 정기모임을 가졌다. 1973년 겨울에는 ‘심맥회’ 회원들이 기획, 연출, 출연한 연극 ‘수업료를 돌려주세요’를 포항문화원 강당에 올려 박수갈채를 받았다.

 

제1회 포항 개항제에서 대회사를 하고 있는 이명석 포항문화원장(1966).
제1회 포항 개항제에서 대회사를 하고 있는 이명석 포항문화원장(1966).

헌 :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은하’가 흔들리게 되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 :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역사회에서 연극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예산 지원도 신통치 않은 게 가장 컸지. 나는 이때 KBS 포항방송국 기자로 일하면서 ‘은하’ 대표와 연출가 업무를 겸하고 있었거든. 한계에 부딪혔다고 해야 할까. 과로로 입원까지 했어. 어쩔 수 없이 1975년부터 1978년까지 4년 동안 ‘은하’는 정기 공연을 중단하고 말았지.

헌 : 그 후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김 : 1979년 5월 포항시민회관에서 김천중 연출로 쥘 르나르 작 ‘홍당무’를 올렸는데 2천여 명의 관객이 몰릴 정도로 대성공이었어. 김천중은 서울 극단 ‘산울림’의 조연출로 활동했는데 직장 문제로 포항에 오면서 나와 최희만 등과 의기투합해 ‘홍당무’를 무대에 올렸지. 이 작품은 ‘은하’의 재기작이 된 셈이야. 여기에서 힘을 얻어 포항에서는 처음으로 뮤지컬 ‘철부지’를 공연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지. 그해 한국연극협회 포항지부가 인준되었고 1981년까지 내가 지부장을 맡았어. 1980년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연출했던 기억도 나는군. 이 공연에서 어머니 역을 맡은 정옥희가 연기력을 인정받았어. 이듬해 차범석의 ‘왕교수의 직업’을 포함해 4편의 작품을 연출했는데 ‘은하’의 힘으로 포항 연극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지.

이를 계기로 1981년 10월 22일 극단 ‘은하’는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제1회 향토문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서울신문은 ‘문화 불모지에 꽃 피운 연극예술’ ‘정열만을 지주 삼아 17년, 관객 4명이 4천 명으로’ 등을 내용으로 문화면 머리기사에 ‘은하’를 소개했다.

김삼일

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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