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공⑥<br/>포항제철의 미래와 위기
지금보다 한 세대 전 직장인들은 개인생활을 희생하며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떤 보람과 긍지가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건지 요즘 청년들은 궁금해한다.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 직장생활의 기쁨과 환멸에 대해 들어봤다. 더불어 1993년 포항제철이 겪은 위기에 관해서도 물었다.
“1973년 6월 9일 한국 현대식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졌고, 모두가 환호했지. 포항제철 첫 쇳물 생산을 기념 ‘철의 날’로 제정됐지. 제철소 설립 5년여만이었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였지. 노동조합이 등장하고 새벽까지 협상을 하고…. 1993년에도 위기였지. 주요 간부들 출국금지에 검찰조사까지 받고…. 힘들었지”
홍 : 누구보다 바쁜 인생을 살았습니다. 혹시 취미가 있으신가요?
이 : 스쿠버다이빙을 좋아한다.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이라 대여섯 살 때부터 동빈내항에서 수영을 했다. 배를 매어놓은 밧줄을 잡고 개헤엄을 쳤다. 한 번 시작하면 한두 시간을 물에 있었다. 1971년에 포항 해병대 장교를 알게 돼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했는데, 최근에도 시간이 나면 가끔 하고 있다.
홍 : 중년이 된 이후에 젊은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이 : 1990년대 들어서면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세력이 부각되었고, 아주 다양한 문화가 등장했다. 직업도 다양해졌고, 청년들이 다음 세대의 먹을거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모습도 보았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를 중심으로 모든 걸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마디로 사회가 다양화되고 진취적으로 변한 것 같다.
홍 : 1980~1990년대에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해주시죠.
이 : 포항제철은 1980년대 후반에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과 미래를 논의한 적이 있다. 철강만 만들어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박태준 회장의 판단에서였다. 미국 철강회사들도 사업을 다각화했다. 향후 철강산업이 사양화된다는 걸 내다본 것이다. 이에 박 회장이 소프트뱅크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정보통신과 소프트웨어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해서였다. 그즈음 손정의 사장이 한국에 두 차례 들어와 포항, 광양, 서울 등지에서 원격 영상회의를 함께했다. 평소 박태준 회장은 한 달에 30권의 책을 읽었다. 읽은 책에서 참고할 게 있으면 메모해 임원들에게 보여줬다. 철강업이 사양화되고 후발국에 밀린다는 걸 책을 통해 예측했을 것이다. 사업의 다각화를 위한 소프트뱅크와의 양해각서 체결은 박 회장의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에 “10년 후에는 첨단산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포항제철과 광양제철 사업 수입의 몇 배가 될 것”이란 박 회장의 말을 대부분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 소프트웨어 산업이 이렇게 성장할 것이라고 쉽게 예측할 수 없었던 탓이다.
홍 : 1980년대 후반에 포항에서도 노동운동이 시작되었지요?
이 : 1987년에 노조 담당 상무가 되었다.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 시기다. 포항제철은 일사불란한 분위기였는데 노동조합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급진적인 노동문화가 생겨나던 때여서 힘들었다. 노동조합과 타협, 이해관계 조정 등을 위해 노력했다. 새벽까지 노조와 협상하고 소주도 마시고 그랬다.
홍 : 잊을 수 없는 일화 하나 더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 1973년 6월 9일 아침 7시 30분 세계가 포항을 주목했다.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제대로 나오는지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기대를 만족시키듯 쇳물이 쏟아졌고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데 오직 박태준 회장 한 사람만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진이 찍혔다. 다른 언론사 사진기자들은 쏟아지는 쇳물에 포커스를 맞추는데 그때 누군가 박 회장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런데 그 사람이 퇴직할 때 사진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다며 그 사진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을 돌려달라고 하니 거절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사진을 찍은 카메라는 당신 것이 아니고 회사 소유이며, 근무시간에 찍은 것이니 당신은 업무 수행 중이었다. 그러니 사진의 소유권은 당신이 아닌 회사”라고 설득해 결국 돌려받았다. 그 사진은 포항제철 역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6월 9일은 철의 날이다. 이날은 1973년 6월 9일 한국 현대식 용광로에서 처음 쇳물이 생산된 날을 기념해 제정되었다. 포항제철만이 아니라 국내 철강업계 역사로 볼 때도 의미가 큰 날이다. 포스코 뉴스룸은 “1968년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설립된 이후 5년여 만인 1973년 6월 9일 처음으로 쇳물을 생산하게 되었다. 바로 그날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용광로에서 생산된 쇳물 덕분에 지금의 포스코, 한국의 철강업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후 포항제철은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는 가운데 세계 최대의 제철소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됐고, 1992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 완공을 통해 철강 생산 2천100만t의 25년 대역사가 마무리되었다”고 쓰고 있다.
홍 : 1993년 포항제철에 위기가 왔지요?
이 :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정치적 울타리가 없어졌다. 박태준 회장이 정치권으로 간 것은 포항제철을 잘 지키며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사심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포항에 20년 이상 내려와 있는 박 회장을 그리워한 딸이 결혼하면서 보내온 편지가 기억난다. 1992년 10월에 광양제철소 준공식이 끝난 후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박태준 회장에게 했다. 박 회장은 “나는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니 전면에 나서기 어렵다”고 사양했다. 여러 사람들이 “제의를 수락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으나 박 회장은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박태준이 김영삼에게 비판적’이라는 말이 세간에 돌았다.
홍 : 검찰 조사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 1993년 6월에 박태준 회장과 나를 포함한 포항제철 주요 간부들이 출국금지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리 정보를 알게 된 박 회장은 그전에 일본으로 갔다. 우리 임원들 중 누구도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다. 내가 부정한 돈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나름대로 검찰 조사 준비를 철저히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무혐의였다. 추정컨대 정치권에서 우리를 밉게 봤던 것 같다.
홍 : 검찰 조사 때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이 : 대검에서 조사받을 때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었다. 신발도 고무신으로 바꿔 신었다. 지금 시각으로는 명백한 인권침해고 불법행위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내 수첩에 청와대와 안기부 인사의 전화번호가 왜 적혀 있는지도 따져 물었다. 검찰은 내가 제시한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국세청과 출입국관리소에 직접 전화까지 했다. 40시간가량 잠을 재우지 않으니 힘들었다. 어쨌건 검찰청에 들어간 다음 날 자정쯤 가져간 넥타이와 허리띠를 가져다주며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그날 저녁 화장실에서 만난 포항제철 임원 한 명이 “저녁을 먹지 않은 사람은 오늘 나간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구속할 것이 아닌데 집으로 갈 사람에게 밥을 먹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홍 : 인생의 큰 고비로 여겨지는데, 또 기억나는 일은 없는지요?
이 : 후배 윤석만(전 포스코 사장)이 생각난다. 1993년 내가 검찰의 감시를 받는 와중에 그가 집 앞으로 찾아와 전화를 걸었다. “지금 전화가 도청되고 있을 텐데 어쩌려고 하느냐” 물으니 “선배님은 기독교 장로고, 저는 불교 신자 아닙니까. 여기에 있건 감옥에 가건 다 신의 뜻인데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범하고 능력도 뛰어나고 의리까지 보여준 사람이다.
이대공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