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일 ⑤<br/>포항바다국제연극제 탄생에서 ‘김삼일 자유소극장’ 개관까지
바다를 배경으로 여름밤의 신나는 연극 무대를 만들고 소외계층에 연극을 보여주기 위해 ‘찾아가는 연극’도 하게 된다. 그리고 고희(古稀)를 넘어 평생 꿈꾸던 일을 실천에 옮긴다. 그에게 은퇴는 없다.
“연극팬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보자는 취지로 ‘포항바다국제연극제’를 시작했지 여러 나라의 수준 높고 다양한 연극을 선보였어, 연극 대중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지”
“문화예술 소외계층 위한 ‘찾아가는 연극’과 지역 정체성을 살릴 작품도 만들었지 칠십 넘어 만든 ‘김삼일 자유소극장’에서 관객과 마음껏 꿈꾸자, 이렇게 마음먹었네”
헌 : 포항바다국제연극제는 포항을 대표하는 연극 행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습니까?
김 : 포항이 바다의 도시 아닌가. 여름밤 바다의 정취를 살리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연극팬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보자는 취지로 2001년에 시작했어. 포항연극협회 회장이던 신상률 선생과 나 그리고 ‘은하’의 백진기 대표를 중심으로 여러 연극인이 의견을 모았고 이 과정에서 백진기 대표가 애를 많이 썼지. 처음에는 환호공원에서 인근 아파트 주민들과 소박하게 시작하다가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나 공연무대를 중앙상가 실개천으로 확대했고 영일대해수욕장 임시 공연장으로 무대를 넓혀나갔어. 그러고 보니 이 행사를 시작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네.
헌 : 바다국제연극제가 연극의 대중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군요.
김 : 그렇게 볼 수 있지. 시민들 입장에서는 여러 나라의 수준 높고 다양한 연극을 편하게 볼 수 있으니까.
헌 : 2003년부터 포항시립극단이 ‘찾아가는 연극’을 하게 되는데, 이 프로그램도 연극의 대중성 확보를 위해 만든 것으로 볼 수 있겠군요?
김 : ‘찾아가는 연극’은 문화예술 소외계층을 위해 만들었지. 연극을 보고 싶어도 여건이 안 돼 평생 연극 한 편 못 보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돼. 지역에서 연극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포항시립극단의 공공성도 확보하자는 취지였어. 무대장치와 음향장비, 의상 등 공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준비해서 시민들이 그동안 접하지 못했거나 접할 수 없었던 작품을 공연한 거야. 시민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지. 이런 시도는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겠지.
헌 :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렸습니까?
김 : 설해순 작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를 2003년 3월 23일 포항청소년수련관에 가장 먼저 올렸고, 이듬해 차범석 작 ‘옥단어’를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 올렸지. 그리고 선린애육원 복지관과 신광면사무소 회의실 등에서 공연을 이어갔고.
헌 : 선생님께서는 지역의 정체성(正體性)을 살려나가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고, 또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셨지요?
김 : 창작 뮤지컬 ‘연오랑 세오녀’가 대표적이지 않나 싶군. 포항문화예술회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서 무대에 올렸지. 지역에서 예술하는 사람들이 지역의 역사를 깊이 공부하고 또 지역의 정체성을 살려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맥락에서 포항을 대표하는 설화인 ‘연오랑 세오녀’는 언젠가 때가 되면 무대에 올리고 싶었어. 포항시 일월동 일월지(日月池)라는 지명을 통해 민족의 정서와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오늘날 시민과 관객들에게 유대감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지.
헌 : ‘연오랑 세오녀’ 외에도 지역성을 담은 작품을 소개해주신다면.
김 : ‘연화재의 통곡’이란 작품이 있어. 신라시대 포항의 대표적인 전설인데 정절을 지키다 숨진 한 많은 여자의 일생의 통해 인간의 숭고한 영혼과 포항의 정체성을 표현한 작품이지. 포항 장기에 유배 온 정약용을 다룬 ‘다산 정약용’도 있고.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선 포항 출신 산남의진(山南義陣) 창의장군인 의병장 최세윤을 다룬 작품도 빠트릴 수 없겠네.
헌 : 이런 작품들은 포항의 자부심과 긍지를 세우는 문화적 토대가 되지 않았나 싶군요. 포항 100년사를 연극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겠군요?
김 : ‘의병장 최세윤’의 시대적 배경이 1908년에서 1916년까지고, ‘아! 그날의 함성, 포항의 3·1운동’은 1916년에서 1919년까지 이어지지. 그리고 1920년에서 2009년까지 다룬 작품이 ‘형산강아 말해다오’야. 내가 연출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이어보면 자연스럽게 포항 100년사가 되는 셈이지. 10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 안에 면면히 흐르는 일관된 정신, 가치를 연극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 물론 평가는 관객이 하는 것이지만.
헌 : 2013년 3월에 ‘김삼일 자유소극장’이 문을 열게 됩니다. 칠십이 넘어서 선생님만의 공간을 만든 것인데, 이 나이면 대개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더 의욕을 내서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 관객을 불러모았습니다.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 : 대학에서 은퇴하고 조용한 곳에 연구실을 내는 학자들은 간혹 있지만 나이 칠십이 넘어서 나처럼 활동하는 연극인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이곳에서 관객과 함께 마음껏 꿈꾸겠다, 이렇게 마음먹었네. 2020년까지 8년간 ‘김삼일 자유소극장’에서 마음껏 행복했지.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 것은 연극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 소극장은 나의 마지막 꿈이었어. 물론 소극장을 경영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헌 : ‘김삼일 자유소극장’의 개관 기념작은 어떤 작품입니까?
김 :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백조의 호수’를 각색한 ‘노배우의 고백’을 무대에 올렸어. 포항은 물론 서울까지 소문이 나더군. 마침 내가 연극에 입문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에 무대에 올린 뜻깊은 작품이지.
헌 : 작품이 범상치 않을 것 같습니다. 작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 : 바실리치라는 노배우가 주인공이야. 러시아 연해주 한 지방 극장의 명배우 바실리치는 나이 칠십을 바라보지. 극장 지배인과 관리인은 그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불법 해고를 하려고 해. 하지만 바실리치는 자신이 걸어온 배우 생활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주연으로 무대에 섰던 ‘오셀로’ 등 유명 작품을 재공연하지. 그 작품 속에서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내일은 다시 태양이 뜰 것이다”라고 말해. 이날 무대에서 노배우 역을 맡은 배우 최희만의 대사를 잊을 수 없어. “이곳에 내 전부를 바쳤어. 그 모든 게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이 무대가 내 인생 45년을 삼켜버렸어”라며 최희만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자 관객들도 함께 울더군. 나에게 연극은 그런 것이야. 관객들에게 진한 삶의 냄새를 느끼게 하는 것. 그 감동을 함께하는 것 말이야.
헌 : 끝으로 연극계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지요.
김 : 현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꿈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것, 그것이 멋진 인생이 아닌가 싶어.
김삼일
1942년 울산 출생으로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전속 성우 1기생이다. 1964년 대구에서 여러 연극인과 극단 ‘태백산맥’을 창단했고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에 주인공 역으로 연극에 입문했다. 1965년 포항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했으며 1983년부터 2012년까지 포항시립연극단 연출자를 지냈다. ‘햄릿’, ‘산불’, ‘원효대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 160여 편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다. 2004년 조선일보 이해랑연극상, 2005년 MBC 제1회 홍해성 연극상, 2009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연극상, 1985년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김삼일 자유소극장’을 운영했으며, 대경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대담·정리 : 김동헌(시인) /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