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공 ⑤<br/>포항제철의 성공과 지역사회 기여
‘우향우 정신’과 ‘종이 마패’는 급격하게 성장하던 포항제철의 상징처럼 회자된다. 많은 시민이 포항제철과 연관되어 살아가던 당시의 포항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80년대는 포항·광양에 제철소를 짓고 세계 굴지의 제철소로 도약하던 시기야
박태준 회장의 결정과 의지로 만들어진 광양제철소는 동서 화합에도 일조했지
원료를 저렴하게 구입하고 공사기간을 줄이며 기술 습득이 빨랐던게 ‘성공 비결’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문서인 ‘종이마패’는 외압으로부터 회사를 보호해 줬었어”
홍 : 포항제철이 한창 건설되던 시기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이 : 포항제철은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만들어진 기업이다. 조상들이 겪은 수난의 대가로 건설하는 포항제철은 실패해서는 안 되는 회사였다. 박태준 회장의 ‘우향우 정신’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포항제철의 앞날이 어두웠다면 몇 사람의 사표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박 회장은 진짜로 영일만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 장군이 말한 ‘생즉사 사즉생’과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포항제철과 관련된 기록영화 ‘고난과 시련 그리고 영광’에는 박 회장이 “목숨을 걸고”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홍 : 1980년대는 포항이 성장가도를 달리던 시기였죠.
이 : 포항제철이 포항과 광양에 양대 제철소를 짓고 그야말로 세계 굴지의 제철소로 도약하던 시기였다. 광양제철소는 박태준 회장의 결정과 의지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에 서거해 광양제철소 완공을 보지 못했다. 광양제철소 완공은 1992년 10월이었다. 입지 선정 때 광양에 하느냐, 아산에 만드느냐로 의견이 갈렸다. 아산은 배가 접안하기 어렵고, 수로 확보도 어려웠다. 광양제철소 건설을 결정한 건 전두환 대통령이다. 포항과 광양을 합쳐 철강 생산량 2,100만 톤을 달성했다. 포항제철 건설을 시작한 지 24년 6개월 만이었다.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에도 고도성장하면서 일면 조업, 일면 건설을 지속했다.
홍 : 포항제철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이 : 철강업은 국가기간산업이라 파급효과 역시 상당하다. 포항제철이 생기면서 자동차, 조선, 가전, 건설업 등 관련 사업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경우 제철업이 석유화학 사업보다 관련 사업 파급도가 더 크다. 나는 40대에 이사가 됐고, 1985년에 상무, 1989년에 부사장이 돼 최선을 다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홍 : 포항 시민들은 포항제철에 우호적이었나요?
이 : 대부분의 시민들이 포항제철에 협조하고 박수를 보내며 응원했다. 독불장군으로 우리만 잘한 게 아니다. 포항시, 경상북도, 대한민국이 함께했다. 특히 광양제철소 건설은 동서 화합에도 일조했다. 국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포항제철의 역할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홍 : 포항제철이 지역 발전에 기여한 내용도 궁금합니다.
이 : 영세했던 협력업체들이 튼튼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철강산업공단도 형성되었다.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업계에서 주목받았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에게 “우리도 포항제철과 똑같은 공장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이나야마 회장이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포항의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좋아졌다. 다수의 협력업체들이 중견기업으로 도약했다. 조선내화는 내화벽돌을 만들었는데, 포항제철에 고열고압 벽돌을 납품하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포항 시내가 활기를 띠고, 교육열도 더욱 높아졌다. 포항제철은 박태준 회장의 의지를 발판 삼아 지역에 14개의 유·초·중·고등학교를 만들었다.
홍 : 포항제철이 비약적 성장을 이룬 바탕에는 뭐가 있을까요?
이 : 미국의 하버드대학, 스탠포드대학 MBA 과정에 포항제철의 성공 사례가 과목으로 개설됐다. 거기서도 우리의 성공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의 노무라연구소와 미쓰비시연구소에서도 포항제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연구했다. 원료를 저렴하게 구입했고, 공사 기간을 단축했으며, 기술 습득이 빨랐던 게 이유였다. 초기에 열간압연(熱間壓延) 공장에서 빠르게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박태준 회장의 일본 인맥과 유창한 일본어가 큰 역할을 했다. 원활한 소통을 통해 신뢰감을 준 것이다.
홍 : 제철소가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겠습니다.
이 : 경상북도에서 조사한 걸 봤는데 포항제철에서 일하는 지역민은 30퍼센트쯤 되었고, 광양제철소에서는 호남 사람들이 40퍼센트가량 일했다. 그만큼 고용효과가 컸다. 비단 제철소에 근무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관련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들이 드나드는 식당과 주점, 숙박업소 등을 모두 합하면 직간접적으로 포항제철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민들의 숫자는 엄청났다.
홍 : 1970~1980년대 노동자들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이 : 퇴근 후 당구장에도 가고 음식점과 술집 등에서 여가 시간을 즐겼다. 포항제철에서 만들어낸 경제적 부를 포항시에서 소비하고 도시를 발전시켰다. 1970년대부터 효자동에 주택단지도 만들었다. 당시 포항제철 작업복은 철강과 같은 쇳물 색깔이었다. 그 옷이 포항 시내에 넘쳐났다. 그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풍경도 장관이었다. 작업복을 입고 술집에 가지 말라는 회사의 지시를 철회해달라고 업소 주인들이 부탁하기도 했다.
홍 : 1980년대 정권의 경영 간섭은 없었나요?
이 : 천만다행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는 경제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포항제철의 인사나 경영 등에서 압력을 받은 적은 없다.
홍 : 전설처럼 전해지는 ‘종이 마패’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 :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회장을 믿고 국영기업체인데도 조달청이 아니라 포항제철에서 필요한 물품을 직접 구입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래야 물품을 구입할 때 중간에서 누가 장난을 치지 못하니까. 박태준 회장이 자율권을 가지고 경영할 수 있도록 해준 배려가 ‘종이 마패’에 담긴 뜻으로 볼 수 있다. 박 대통령 서거 후에는 외압을 막으려고 박태준 회장이 정계에 진출했다.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포항제철을 바깥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정계 진출이었다.
포항제철 건설 초기에 회사를 외압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 ‘종이 마패’는 박태준 회장의 메모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서명한 문서다. ‘포스코 50년사’에는 “이 한 장의 종이가 제철소 설비와 원료를 구매할 때 정치자금이나 리베이트(rebate)를 요구하는 이들을 막아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박태준 회장의 지갑 속에 늘 간직돼 있던 종이 마패는 현재 포스코역사관에 보관 중이다.
홍 : 한 직장에서 24년을 보냈습니다. 어땠나요?
이 :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 과장 때 박태준 회장에게 발탁돼 차장, 부장, 이사, 상무, 부사장으로 평균 3년마다 진급했다. 마흔여덟 살에 부사장이 되었다. 전례가 드문 초고속 승진이었다. 모든 외압은 박태준 회장이 막아줬다. 내 사번이 39번이다. 포항제철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입사했다. 과장 때인 1973년부터 시작해 1993년까지 만 20년을 임원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이다. 모두 박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항제철에서 나오던 ‘쇳물’이란 월간지에 박태준 회장의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우스개처럼 글을 써서 호되게 야단을 맞은 것 외에는 어려움 없이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었다.
홍 : 1980년대 직장 문화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이 : 그때는 죽기 살기로 일했기 때문에 오전 근무만 하는 토요일에 회식을 했다. 그런데 회식할 때도 반드시 비상연락망은 가동시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박태준 회장이 호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대라 호출기를 차고 다녔다. 그러니 회식 때도 마음 놓고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홍 :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 우리 세대는 회사와 나라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헌신감과 사명감으로 일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지금 젊은이들은 다양성을 추구한다. 우리 세대는 눈앞의 목표를 보고 달렸는데, 이제는 다양한 길이 열려 있는 것 같다. 내 자식들만 봐도 그렇다. 돈벌이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이런 풍조가 세계적인 흐름 같기도 하다.
이대공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 /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