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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랑을 거치며 정치인들 운명도 엇갈려

등록일 2021-10-24 20:14 게재일 2021-10-2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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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득  ③  4·19 혁명 후의 정치 상황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장섭의 벽보.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

1960년 4·19혁명 후에 국회가 자진 해산하면서 7월 29일 민의원·참의원 의원을 동시에 선출하는 총선거가 실시된다. 제5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서는 3개 선거구 모두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다. 포항시 이상면(42·대학 중퇴), 영일군 갑구 최태능(51·농업·중졸), 을구 최해용(39·수산업)이 당선자다. 초대 참의원 선거는 대선거구제로 치러지는데 포항 지역 출신 후보 중에는 민주당 이원만(55·무역협회장), 무소속 김장섭(49·변호사·민의원)이 당선된다.

“ 초대 포항시장을 맡은 최기봉은 임기중 시 행정을 현대식으로 바꿔놓은 공이 있어”

“김장섭은 1960년 제4대 총선 보궐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당선, 정계에 입문하지

포항·영일지역서 4·19와 5·16을 거치며 정치생명을 이어간 거의 유일한 인물이야”

“이진우 의원은 포항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 1등을 도맡아 한 수재였지.

공부만 잘한 게 아니라 음악과 글쓰기 외국어도 능통했어. 다방면에 뛰어났지”

11·13대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며,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청와대 정무제1수석비서관 등을 역임.

임종석(임) : 4·19혁명 후의 정치 상황으로 들어가기 전에 초대 포항시장을 한 최기봉이 어떤 분인지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박이득(박)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에 초대 포항시장으로 8개월 정도 근무했지. 포항시장으로 있으면서 시 행정을 현대식으로 바꿔놓은 공이 있어. 포항시장을 마치고 나중에 워커힐호텔 사장이 되었지.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이 한국에서는 놀 곳도 쉴 곳도 없으니까 주로 일본으로 갔어. 일본에 가서 쉬고 놀며 돈을 쓰니까 한국에서도 그런 게 가능하도록 워커힐호텔을 만든 거야. 워커힐은 미군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국고도 채우기 위해 만든 일종의 국책 호텔인 셈이지. 최기봉이 그 호텔 사장을 맡았으니 정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던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임 : 4·19혁명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민주당이 포항시, 영일군 지역구를 휩쓸게 됩니다. 포항, 영일 지역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지요. 당시의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겠는데, 그 와중에 자유당 소속이던 김장섭이 4대 민의원 의원에 이어 처음 치른 참의원 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는 게 눈에 띕니다.

박 : 앞서도 말했지만, 김장섭은 어릴 때부터 수재로 소문이 파다한 인물이었지. 일본에 유학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어. 일제강점기 때부터 판사·검사를 했고 1954년에 서울지검 검사장을 했지. 제1공화국 말기에는 내무부와 농림부에서 차관을 지냈고. 1960년 제4대 총선 보궐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는데 4·19혁명 후에 참의원 의원에도 당선되지. 1963년 6대 총선과 1967년 7대 총선에서도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는데, 포항, 영일 지역에서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정치 생명을 이어간 거의 유일한 인물이야. 오천중학교와 동해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어. 일 처리가 깔끔하고 점잖아서 시중의 평가가 좋았지.

임 : 선생님은 김장섭과 인연이 없습니까?

박 : 젊은 날에 친구인 이대공이 김장섭의 둘째 아들인 김종원과 인사를 시켜주더군. 한때 김종원과 가깝게 지냈지.

임 : 제5대 민의원 의원을 지낸 최태능은 어떤 인물입니까?

박 : 흥해 출신으로 휘문고를 나왔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 인맥이 넓었고 주변 사람에게 후해 인심을 많이 얻었어. 제헌의회 때부터 4대 민의원까지 영일군 갑구에서 계속 출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4·19 후에 5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지. 하지만 5·16이 일어나면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국회의원 임기가 불과 9개월 정도밖에 안 돼. 그 후 흥해중학교 재단 이사장을 맡아 인재 양성에 힘쓰지.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최원수의 벽보.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최원수의 벽보.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별 비례대표제가 도입되고 지역구 의석은 감소되며, 지역사회에서는 포항시, 영일군, 울릉군을 합해 국회의원 1인을 선출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김장섭 후보가 당선되었다.

 

임 :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고, 그해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포항에서는 민주공화당 김장섭, 민중당 하태환, 신민당 최원수, 민주당 이상면이 출마해 김장섭이 당선되는군요.

박 : 포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출마해 선거가 치열했지.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볼만한 선거였어. 득표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고.

 

이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김장섭 4만 7천868표, 민중당 하태환 3만 9천488표, 신민당 최원수 2만 411표, 민주당 이상면 1천361표를 득표해 김장섭이 당선된다. 김장섭이 종합제철 공장을 월포에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1번으로 내건 게 이채롭다.

 

임 : 제7대 선거에서 비례대표를 선출하는데 포항 출신인 민주공화당 이성수가 순위 23번으로 당선됩니다.

박 : 이성수는 대송 사람이지. 어릴 때 별명이 장개석이었어. 그만큼 머리가 좋았다는 이야기지. 대송국민학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이 바쁘거나 몸이 아프면 이성수가 대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해.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해서 1년 단기 국민학교 교사 단기 양성소가 있었는데 이성수는 그곳을 거쳐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다시 중등 교사 양성소를 거쳐 중등 교사도 했지. 그러다 6·25전쟁이 터지고 서울대학교 사범대에 들어갔어. 그 당시 학번을 6·25학번이라고 불렀지. 이성수는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로 나와 또 한 번 당선돼. 1981년 선거는 포항시, 영일군, 울릉군을 한 선거구로 묶어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로 치르는데 민주정의당 이진우 1위, 한국국민당 이성수가 2위로 당선되지. 이성수는 공부 욕심도 많고 일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어.

임 : 이진우 의원 이야기가 나왔는데 박이득 선생님께서 한때 모셨던 인연도 있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분이지요?

박 : 포항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1등을 도맡아 한 수재였지. 공부만 잘한 게 아니라 음악도 잘했고 글도 잘 썼고 외국어에도 능통했지. 다방면에 뛰어났지. 이명석 선생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서울 영등포지청과 경주지청에서 근무했어. 경주지청에 5~6년 근무했는데 그때 포항 사람들이 이진우 검사 덕을 좀 봤을 거야. 가끔 포항에 오면 사진작가 박영달 선생이 운영하던 청포도다방에 들러서 단골이던 부친과 한흑구 선생에게 깍듯이 인사했지.

임 : 이진우 의원이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습니까?

박 : 서울에서 연합 성가대 지휘를 맡기도 했어. 피아노, 클라리넷, 색소폰, 나팔 4개 악기를 다루었고. 과거 포항시민의 노래와 포항고등학교, 포철공고 교가도 작곡했지. 특히 포항시민의 노래는 이명석 작사에 이진우 작곡이야. 부자지간에 작사 작곡을 한 거지. 그 노래는 유명한 음악가인 박태준이 심사해서 선정되었어. 문장도 정확하고 글솜씨도 뛰어났지. 후배 검사가 쓴 글에 일본어 잔재가 보이면 “문장이 그게 뭐냐. 국어 공부 좀 해”라고 나무라기도 했어. 국어순화운동을 하기 위해 전국 강연을 다니기도 했고. 수필집도 여러 권 냈는데, 그의 수필 ‘눈을 들어 하늘 보라’는 아름다운 작품이야.

 

1981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진우의 벽보.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
1981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진우의 벽보.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

이진우는 제11대, 제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으며,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 청와대 정무제1수석비서관, 제14대 국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임 : 많은 정치인이 있습니다만 사정상 한 분만 더 하고 정치 이야기는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이기택 의원도 잘 아시지요?

박 : 7선 의원을 한 큰 정치인이지. 청하국민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 갔어. 고려대학교 학생회 회장을 하고는 큰누나와 자형이 경영하던 태광산업에 들어갔지. 그리고 1967년 7대 총선에서 신민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돼. 만 29세 때 국회의원 배지를 단 거야. 비례대표로 당선되었으니 다음 선거는 지역구를 노리지 않겠어. 이기택이 원래 염두에 둔 지역구는 고향인 영일군이었지. 그래서 나를 포함해 포항 출신 몇 사람을 부르기도 했어. 그런데 8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 내부 사정으로 부산 동래구에 출마하게 된 거야. 여기서 당선되고 9대, 10대에도 잇달아 당선되면서 부산과 신민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었지.

박이득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국문학과와 계명대 무역대학원을 수료했다. 포항 동지고 국어 교사, 포항 MBC PD·기자, 영남일보 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포항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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