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공 ⑦<br/>인간 박태준 그리고 포항공대 설립
포항제철을 이야기할 때 박태준 회장을 빼놓을 수 있을까? ‘철강왕’ 박태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대공 이사장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오랜 시간 박 회장의 진면목을 지켜볼 수 있었다.
“박회장은 원리원칙과 따스함, 냉철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다.
무섭 게 가차없이 일처리를 했지만 한편으론 따스하게 감싸는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기초과학을 가르치고 배워 노벨수상자를 빨리 배출해야 한다며 대학 설립 필요성을
이야기 했다. 우수한 대학을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의 여러 대학을 다녔고 캘리포니아
공대를 벤치마킹 했다. 대학 건설본부 설립 후 1년 10개월 만에 포항공대를 만들었다”
홍 : 박태준 회장과 오랜 시간 일했습니다.
이 : ‘포항제철=박태준’이 아닐까. 무섭게 가차 없이 일처리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한 번은 포항제철에서 철근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모든 현장마다 철근을 풍족하게 책정했으니 과다 계상된 철근을 빼내 외부에 파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포항 언론인들에게 듣고 내가 적발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박태준 회장이 다른 기업에서 대표로 있을 때 물건을 빼돌리던 조직폭력배들과 맞붙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었다. 과거에 큰 공을 세운 직원이었던 것이다. 내 보고를 들은 박 회장은 “그는 목숨을 걸고 고생하며 회사에 공헌한 사람인데, 내보내더라도 명예롭게 퇴직시켜야 한다”고 했다. 결국 철근을 빼돌린 사람은 절도가 아닌 사물함 정리정돈 불량으로 회사를 나가게 되었다. 박 회장의 뜻을 알아차린 그가 눈물을 보이던 모습이 기억난다.
홍 : 박태준 회장의 품성을 보여주는 다른 일화도 있는지요?
이 : 1973년 포항제철을 만들 때의 이야기다. 직위가 높건 낮건 목표치를 정해 현장에서 콘크리트 타설 일을 했다. 목표가 한 달에 700㎥였는데, 단 1㎥가 모자란 699㎥를 타설한 사람을 대기발령했다. 냉정함을 보여 모든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연말에는 그 직원을 사면했다. 박 회장은 원리원칙과 따스함, 냉철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다. 한 번은 여자 문제를 일으킨 간부 직원 한 명이 미국으로 연수를 간 적이 있다. 징계와 관련된 인사 명령을 내리면 귀국하지 않을 것을 알고 해외 지사장 회의를 개최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귀국시켰다. 한 여성의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포항제철 해외 지사장 모두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홍 : 이사장님 삶에서 포항제철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 : 아이덴티티(identity)이자 자부심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뤄가던 획기적인 일터였다. 마지막에는 오해로 인해 곤혹스러움도 겪었지만 내 인생 자체였다. 2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내가 곧 회사고, 회사가 곧 나’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홍 : 포항과 포항제철은 어떤 관계입니까?
이 : 불가분의 관계다.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 본사를 포항으로 정했다. 더 큰 규모의 광양이 아니었다. 애초에 포항제철 건설은 정부가 주도했다. 그럼에도 의도하지 않게 토지 매입 단계 등에서 많은 포항 시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본사를 포항에 두고 세금을 포항에 내려고 했다. 한때 포항제철은 지방세를 1,000억 원 이상 납부했다. 그게 포항 발전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홍 : 광양제철소 건설 때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이 : 광양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광양제철소가 들어서는 지역은 개펄이 많았다. 거기서 조개 등을 캐 생활비를 벌고, 아이들의 학비를 해결하던 지역민들이 보상을 요구했다. 얼마만큼의 조개를 채취했고, 어느 정도의 돈을 벌었는지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었다. 어판장이나 수협에도 그런 자료는 없었다. 재판을 한다면 광양 주민들이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박태준 회장은 “가능하면 지역민들의 요구대로 해주라”고 말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보상금의 규모가 수백억 원이었다. 박 회장은 땅과 개펄에서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홍 : 지금의 포항제철을 지켜보는 심경은 어떤가요?
이 : 박 회장은 돌아가실 때까지 포항제철이 정치에 휘둘리는 것을 아쉬워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다. 박 회장 때부터 포항제철 고위 간부들은 사돈의 팔촌도 특별대우를 해서 회사에 취직시켜주지 않았고 지금도 그 원칙을 지켜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좋은 전통은 지켜가야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홍 : 포항제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 이제는 철강 일변도로 나가지 말고 선진국의 철강 기업들처럼 경영 다각화에 힘썼으면 하는데,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교육사업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예전에 포항공대를 만든 것도 그런 뜻에서다. 기초과학을 통해 노벨상 수상자를 내고, 응용과학을 통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포항제철이 지향해야 할 미래다. 창업 정신을 기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떤 정치적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박태준 회장이 종이 마패를 만들던 심정으로 임직원 모두가 사심 없이 일하기를 기대하고 부탁한다.
홍 : 포항제철이 포항공대를 만들기 위한 준비는 언제부터 했습니까?
이 : 포항공대 건설본부 설립은 1985년 2월 5일이다. 설립 3년 전부터 당시 포철장학회에서 기획하고 준비했다. 내가 포항제철연수원장으로 있을 때 박태준 회장이 찾아와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기초과학을 가르치고 배워 노벨상 수상자를 빨리 배출해야 하고, 응용과학을 통해 고부가가치 연구를 해야 한다는 뜻을 들었다. 지속적으로 포항제철을 발전시키기 위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건설본부 조직이 만들어졌다. 내가 본부장을 맡았다. 그 시기에 포항의 산업체 근로자를 위시해 시민 11만여 명이 포항에 4년제 대학을 만들어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그때는 4년제 대학 설립이 쉽지 않았다.
홍 : 포항공대를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 박태준 회장이 현직에 있을 때 여러 번 이야기했다. “나는 쇠 만드는 공장과 함께 사람 만드는 공장도 세웠다”고. 쇠 만드는 공장은 제철소, 사람 만드는 공장은 14개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 그리고 포항공대를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게 박 회장의 의지였다. 포항공대 건설본부장으로 일하며 박 회장의 지시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다녀왔다. 귀국 후에 박 회장이 “거기 대학들은 얼마나 됐느냐”고 물어서 “600년이 넘었습니다”라고 답하니 “우리도 그처럼 6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대학을 만들자”며 격려했다.
홍 : 교육에 대한 철학과 학교 설립 의지가 대단했군요.
이 : 옥불탁불성기(玉不琢不成器),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아무리 좋은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포스코교육재단에 박태준 회장의 휘호가 남아 있다. 나 역시 포스코교육재단에서 오래 일했다.
홍 : 포항공대가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겠습니다.
이 : 세계 각국의 여러 대학을 다녔다. 벤치마킹한 건 캘리포니아공대다. 그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고 고부가가치 연구도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1984년쯤 박태준 회장 부부가 그 대학 부총장을 만나 “우리도 이처럼 좋은 대학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전하니, 한국을 낮춰보고 “준비와 설립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우려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기가 생겼고, 결국은 건설본부 설립 후 1년 10개월 만에 포항공대를 만들었다.
이대공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포항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0대 중반에 서울·인천에서 석유곤로와 야구 배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1967년 포항으로 돌아와 양송이 재배·가공업을 하다가 1969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부사장을 거쳤다. 포항제철 건설 시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24년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포항지역회 이사장, 경상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등을 맡았으며, 현재 재단법인 애린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대담·정리 : 홍성식(경북매일신문 기자)